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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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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가다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3402  추천:73  작성자: 김혁



. 기행문 .


독도 가다


김 혁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 독도는 우리 땅...



  오래전 재즈에서 몇구절로 들어왔던 그 외로운 섬 독도를 다녀왔다.  


  80년대 중기, 변혁의 문이 열리면서 본보기극의 단조로운 음조에만 버릇되였던 우리도 다양한 풍격의 음악을 접할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선참 들었던 이 노래는 가히 인상적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어떤 절주빠른 선률에만 심취되였고 독도라는 섬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그렇게 아렴풋이 알았던 외로운 섬 독도를 다녀왔다.


  지난 5월 말, 지인들과 함께 조선족뉴스전문사이트를 운영중이였던 나는 한국의 주최로 된 해외동포언론인 심포지움에 참가했다. 5박6일로 된 회의는 아름다운 섬 울릉도에서 열렸다. 대회일정을 훑어보니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울릉도에서의 맨 마지막날 독도행이 배치되여 있는 것이였다.


  독도, 세계의 주목을 끄는 곳이였고 바다와 섬을 멀리한 변강오지에 사는 한 나그네의 호기심과 향수를 충분히 자아낼 만한 곳이였다.


 

  독도행에 앞서 나와 중국에서 온 말짱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몇몇 《륙지오리》들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바로 배멀미, 배멀미가 우리들에겐 천적(天敵)이였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뻐스로 묵호항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한겨레》호 려객선을 타고 3시간 반 정도 대여왔던 울릉도, 그 려정은 우리들로 말하면 말 그대로 련옥으로 가는 체험이였다.


  《한겨레》호가 《선체가 커 온중하기 때문에 멀미 걱정은 말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배멀미쯤이야하고 방심했더니 큰 오산이였다.


  날씨가 사뭇 좋아 보이는데 반하여 무척 파도가 높았다. 우리는 금세 장난꾸러기 악동이가 심술궂게 밀어대는 그네에 앉은 꼴이 되어 버렸다. 배가 출발하기 바쁘게 려객선 내부에는 대 혼란이 벌어 졌다. 여기저기서 무섭게 <<욱~욱~>> 토악질하는 소리가 났고 독한 술 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얼굴이 노랗게 변하여 울렁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좌석에 볼썽사납게 드러누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선원들은 선실 이곳저곳에 마련된 비닐봉지를 건네주기가 바빠 졌다. 정해진 좌석도, 2층 3층도 구분이 없어 졌다.


   튼실한 신체를 믿는 나였지만 항해의 신기함을 음미 할 사이도 없이 꼭 마치 폭음한 이튿의 숙취와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배안에서 상영하는 영화에도 집중해 보고  책도 읽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한국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을 각오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울릉도였다.


  3시간 30분여, 217키로메터의 해리를 뚫고 울릉도의 조그만 도동항에 도착하기 까지 우리는 발에 발을 잇는 고험에 시달려야 했다.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백의 멧부리 방울튀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청마 유치환이 애달프게 시에서 읊조린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관광의 보고》울릉도에 며칠 류하는 동안, 울릉도의 비경과 해물맛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독도에 대한 호기심은 나름대로 부풀어져만 갔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흔히 큰편인데 게다가 쉬이 닿을수 없는 특유의 섬이였기에 호기심은 더했다.




  그러나 설상 독도를 딛기는 힘들다. 전세계 한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이 높은 곳일 터이지만 설상 독도에 가본 사람은 많지 못하다. 


  독도로 가는 길은 현재까지는 울릉도를 거쳐 가는 도항(渡航)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또 독도로 출발했다고 모두 입도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입도신청서를 작성하고 허가를 받아야 독도 입도가 가능하다.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모두가 허사.  파도가 높거나 풍랑이 치면 배가 결항(缺航)되기 때문에  웬만한 기상상태로는 입도자체가 힘들어 배가 부두에 접안을 하지 못하기에 먼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독도를 가려면 날자를 맞추고 날씨를 살피는 려행객의 정성에 보태여 하늘의 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그래서 독도 땅을 밟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독도에 상륙하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관광객들의 출입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정부가 자연보호를 리유로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된 독도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입도는 불허되고 학술적인 목적 등 특별한 경우에만 문화재청과 경찰청의 심의를 거쳐 입도가 허가된다. 울릉도 어부들 도 입도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울릉도 사람들조차도 먼 이상향으로 여길 만큼 독도는 가까우면서도 먼 곳이었다.


  독도가 이렇게 된 것은 꼭 바다의 험난함 때문만은 아니다.


  1998년《신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간수역에 포함된 독도 주변 해역은 일본과 러시아 함정 등이 출몰하면서 군사요충지가 됐다.


  해경에 따르면 500∼1000톤급 일본 순시선이 한국 령해인 독도 주변 12해리 밖을 한달에 네댓 차례 돌고 있다. 반면 독도 주변 12해리는 동해해경 소속 해경정 3척이 경비를 맡고 있다. 그중 최근에 취역한 한국의 5000톤급 《삼봉》호는 해군과 해경을 통틀어 가장 큰 경비정. 독도의 중요성을 감안해 최신식 대형함정을 배치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수고롭고 예측 불허한 려행이 또 있을까


  자칫 이번 행이 소득없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31일, 회의일정을 마감한 뒤 울릉도를 한 바퀴 도는 해상관광을 마치고 호텔에서 오삼불고기로 점심을 든 후에 모두는 도동항에 모였다. 


    울릉도의 서울이라고 불리우는 울릉읍 도동은 울릉도의 행정, 경제, 교육, 교통의 중심지이다. 깎아지른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도동항은 유람선을 위한 전용항구라고 여겨질 만큼 작고 아담하다. 독도행 유람선은 이곳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고기배나 일반 선박들이 적었고 선착장은 어딘가 어수선했다. 시멘트와 자갈 등 건축자재가 쌓여 있고 인부들이 작업을 하느라 시끌했다. 태풍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중이라고 곁에서 알려 주었다. 지난해 한국을 휩쓸고간 태풍 <<매미>>에 매립돼 도동의 풍경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항구에는 우리를 독도로 태워 줄《씨플라워》호가 정박 되여 있었다.


   촉박한 회의일정이었지만 배에 오르기 위해 조별로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인원 점검 끝에 배에 올랐고  드디여 독도행 《씨플라워》호는 세계각지 20여개 나라에서 모여온 동포언론인들을 싣고 파도를 가르며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92키로메터, 독도를 순회하고 되돌아오는데 총 3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해로는 해상의 고속도로이다. 발해민이 일본을 건널 때도 이 바다길을 리용했고, 장보고가 해상을 장악했을 때도 이 길을 누볐다고 한다.


 


 


독도가는 흔들리는 배에서 찍은 사진,
날씨가 좋지않아 독도에 못 오를가 내심 걱정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아침부터 하늘이 납물이 든 듯 시퍼렇게 변해 금세 큰 비라도 쏟아질듯 했다. 혹여 입도하지 못할가 모두가 근심에 쌓였는데 이만하면 기후가 괜찮아 순항이라고 선장이 스피카를 통해 알려주었다. 모두들의 얼굴은 금세 개운해 졌다.


  배가 순항을 계속하는 사이 나는 독도에 대한 예비지식을 쌓으려 독도관광에 대한 팜플렛을 읽기 시작했다


   독도! 면적 187.554평방이며 독섬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킬로메터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 서도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33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메터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메터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여 있다. 동도를 암섬, 서도를 수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한 해풍과 척박한 토질로 인해 동식물이 서식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서식하는 짐승은 없지만 바다제비, 슴새·괭이갈매기 등 여러 종류의 곤충과 해조류가 살고 있다. 무엇보다 독도 주변 해역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며 물이 맑고 수심이 얕기 때문에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으며, 1881년 독도로 개칭되었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돍섬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프랑스에서는 《리 앙쿠르》, 영국에서는 《호넷》으로 해도에 표기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한 일본은 같은 해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켰으며, 이후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여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현안으로 남아 있다.




    묵호- 울릉도행에서 배멀미에 혼쭐난 우리는 너나가 멀미약을 열심히 챙겼다. 멀미약을 약갑에 씌여진 설명서대로 두시간전에 먹었고 귀바퀴에 혈위를 지압하는 멀미약도 붙였다.  약효였던지 아니면 독도로 간다는 감흥에서였던지 무서운 멀미가 더는 우리를 법접못했다.


  배길을 달린 지 2시간여, 안내서에 빠져있는데 《독도다!》하는 누군가의 환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타원형의 유리창에 매달렸다.


  검푸른 수평선우에 거의 수직으로 솟은 섬 하나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속력을 줄이면서 배는 독도에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섬 주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이 뱃전에서도 들릴 만큼 가까워졌을 때 하나로 보이던 섬이 두개로 갈라졌다. 독도를 이루고 있는 쌍둥이 섬 동도와 서도다.


  잠시 후, 입도가능을 알리는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후 2시에 울릉도를 출발한 《씨플라워》호는 항해를 시작한 지 2시간 20여분 만인 오후 4시 20분쯤 독도 접안시설에 배를 대는데 성공했다. 육중한 선체를 로프 몇 개로 부두에 달아매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거센 풍랑에  배는 잠시 주춤하면서 기다림에 지친 우리들을 독도의 품안에 내려놓았다.


 



   


  하늘이 돕는다. 1년에 단 60여일만 맑은 날씨를 보여준다는 독도다. 그만큼 범인이 접하기 힘든 섬이다. 그런 독도에 우리가 입도할때는 거짓말처럼 말짱 개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올랐고 찰칵찰칵 카메라의 플래쉬가 튀었다.


  평면의 사진으로만 접했던 독도가 그저 볼품없는 돌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나 막상 오르고 보니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천혜의 비경을 연출한다. 


  독도주변은 해심이 무려 2천메터가 넘는단다. 그 깊이로 우려내서 그런지 바다색깔이 진한 남보라색이다. 그런 바다를 박차고 나란히 솟은 동도와 서도, 빼여난 기암절벽, 암초바위 어느 것 할 것 없이 당당함으로 가득찬 멋진 모습이었다.


  사실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은 얼마 안되지만, 사방으로 이어지는 그 정경은 가슴을 부풀게 만들었다.


   가파른 하나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새들을 제외 하고는 사실상 접근이 어려워 보였다. 해안 절벽에 뚫린 수많은 동굴들이 독도의 매력 포인트. 기이한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각각의 암초들은 물개바위, 독립문바위, 촛대바위, 해태바위. 권총바위. 남근바위, 얼굴바위 등 생김새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다.


  섬에는 관광안내서에서 본 괭이갈매기가 등대로 오르는 계단이며 바위며 흙길이고 상관하지 않고 날아다녔고 우리들의 어깨도 스쳤다. 


  독도의 아름다움을 말할라치면 어떤 진부한 수식어를 단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자연이 베푼 최고의 은혜로움이 가득한 곳 독도.


  동도에는 1954년 광복절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는 독도등대와《대한민국 동쪽, 휘몰아치는 파도를 거친 숨결로 잠재우고 우리는 한국인의 얼을 독도에 심었노라》라는 글발이 새겨져있는  《한국령》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동도의 등대 밑에는 소총을 든 독도경비대원들이 역시 하나의 암초처럼 서서 매서운 눈초리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독도경비대가 독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그전 3년간은 울릉도 주민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자비를 들여 막사를 짓고 독도를 지켰다. 동도 해안가 절벽 밑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라고 새긴 비석을 세운 것도 그들이었다.


  당시 반도는 6·25 사변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소홀한 틈을 탄 일본은 이곳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령토 표식을 하고 돌아갔다.


  이를 보고 분개한 홍순칠씨는 한국의 마지막 의병인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다. 울릉도 경찰서장으로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기관총, 소총 등으로 무장하여 일본 함대를 격퇴시킨 것이다. 3년 동안 무려 5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니 그때부터 쟁탈전이 아주 치렬했음을 말해준다.


   1948년에는 B29 폭격기가 이 바위를 어선으로 착각하고 폭탄을 떨어뜨려 어민 20명이 폭사한 기록도 있다. 그만큼 독도는 슬픔을 지닌 섬이다.


  경비대가 상주하게 된 이후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집도 짓고 간이선착장도 만들었다.


  


 

                            독도에 축조된 독도의 역사를 적은 비문

 


  그 너른 동해바다의 작은 점이건만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당했던가?


  도대체 가로세로 400m의 이 조그마한 섬에 무엇이길래 한국과 일본은 이리도 오랜 세월 한 치의 양보할 수 없는 영유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


  과거의 독도는 바다가운데의 작은 외딴섬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해양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정치·경제·군사·학술 등 다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리유로 현재 일본과 그 영유권을 두고 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따라서 천해고도 외로운 섬이 깨여나기 시작했다.




  근래에도 독도를 사이에 두고 한·일 량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4월 일본 해양탐사선이 탐사를 명목으로 독도 린근 해역으로 진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힌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일본 정부는 독도 린근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침입해 수로 측량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은《독도 주변 해역 탐사계획을 중지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에 대해《국제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한국외교통상부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무관하게 단호하게 대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독도를 둘러싼 민간인의 활동은 한국 측이 활발한 편이다. 오프라인 회원 수가 수천 명에 달하는 단체도 있고 온라인 회원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단체도 있다.


  오프라인 쪽은《독도력사찾기운동본부(독도본부)》가 대표적인 단체로 꼽힌다. 이 단체는 신한일어업협정 폐지를 주장하는 민간단체로 2000년 출범해 현재 5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독도수호활동은 온라인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반크(VANK)>>는 전세계 유명 교과서와 방송국, 지도, 포털 사이트 등에서 독도와 관련된 잘못된 표기나 역사, 지도 등을 바로잡는 사이버 단체다.




    일본 측의 도발 의지도 만만찮다. 일본은 독도가 자국 영토인데도 한국이 무단 점령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일본의 민간 차원 대응은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중앙정부가 나서지 않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차원에서 력사교육 강화 촉구, 홍보책자 배포 등을 통해 일본인들이 자연스럽게 독도가 일본 땅임을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 우익단체와 대학교수 등이 독도가 일본 땅임을 주장하는 책을 발간하거나 몇몇 우익단체들은 독도상륙이라는 적극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의 활동도 활발하다. 중앙정부는 나서지 않는 현 차원의 대응으로 비치지만 중앙정부와 련계한 프로그램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고 《다케시마의 날》 1주년 행사도 강행했다.


  일본 공무원 시험, 학교 시험을 비롯한 많은 수험서에는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점유를 하고 있어 분쟁지가 되었다는 항목이 중요한 소재로 실려 있다.




  그러나 해외의 시각은 급변하고 있다. 최근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竹島)》를 병기해서 독도를 표기하는 해외 인터넷사이트와 지도들이 늘고 있는 것. 이는 국제사회에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미국 중앙정보국의 국가정보보고서 2002년판은 《일본이 독도 관련 분쟁을 제기하고 있다》고만 언급했지만  2004년판은 《분쟁이 고조되고 있다》고 표현을 바꿔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못 박고 있다.


  일본이 독도영유권 주장을 하는 데에는 숨은 저의가 있다고 한국은 본다. 독도 주변에서 막대한 가스층이 발견되었고, 석유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한난류가 교차하기 때문에 어족 자원이 풍부하여 고기가 많이 잡힌다.


  독도 주변 해역의 경제적 가치도 향후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독도 주변 해역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해 수산자원이 풍부한 데다 해저자원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도를 둘러싼 한·일의 공방은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다.


 


   그런 분쟁의 초점속에도 독도에 정착해 사는 어민이 있었다.


   현재 유일한 거주민은 김성도(64세, 울릉읍 도동리 산 63번지)씨. 그들 일가족은, 독도 최초 거주민이 된 최종덕씨 이후 6번째 가족이다.


   심포지움기간 한국위성방송에서 김성도부부가 월드컵을 시청할수 있도록 독도에 위성접수기를 설치해준 뉴스가 나와 김성도 부부의 모습을 화면으로 접할수 있었다.


  김성도씨 가족은 겨울 동안에는 울릉읍에 체류하고 3월 경부터 독도에 들어가 어업을 시작한다. 김씨가 울릉도와 독도에서 살아온 얘기는 이러했다.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서 태여난 김씨는 1960년대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10여살 위인 최정득씨(작고)와 함께 독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복과 미역, 홍합 등 지천에 깔려있는 해산물을 채취해서 파는 재미가 쏠쏠했기에 외로운 섬 생활의 불편은 참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전복이나 소라 등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 등지에서 해녀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단다. 그러던 최씨가 해녀들을 데려오기 위해 륙지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독도에는 김씨 가족만 남았다는 것이다. 두 살 년상인 부인 김신열과 단둘이 사는 독도 생활은 좋다고 했다.


  김씨가 사는 집은 거센 바람 때문에 기초 바닥에서부터 벽, 기둥, 지붕 등이 모두 철근이 들어간 세멘트 집이라 했다.


  독도에는 먹을 물이 있느냐?고 묻자 김씨는 자기가 사는 서도에 《물골》이라는 샘이 있는데 그 샘에서 하루 20명이 먹을 수 있는 량의 물이 나오기 때문에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다고 했다.


   강한 해풍과 부족한 토양 탓에 독도에는 바위틈에 약간의 식물들이 자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으나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 지금은 나무와 화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노력은 비단 섬을 예쁘게 꾸미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해양법상 섬은 암초와 인공섬, 자연섬으로 구분된다. 영토의 경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섬뿐이다. 자연섬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식수가 있어야 하고 나무가 자라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


  하여 외로움을 이기며 한호라도 거주민이 보금자리를 틀었고 여러 단체에서 10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500여그루의 나무를 살리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현재 한국에 호적이 독도로 되어 있는 국민의 수는 약 850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독도에 태어나거나 거주한 경험이 없지만 99년부터 시작된 《독도 호적 옮기기 운동》에 동참한 이들이다.

 





  독도의 절경과 파란많은 사연에 한참 취해있을 때 배에서 승선하라는 신호가 들려왔다.     파도가 심해져서 더 이상 지체하기엔 위험하다는 《씨플라워》호의 통지였다.


  독도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30분 지났는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들은 뉘엿뉘엿 배에 몸을 실었다.


  삽시에 들끓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독도는 다시 외로운 섬으로 남았다.


  신이 붓끝으로 눌러찍은 듯 작은 점으로 태여난 은총의 섬, 독도.


  기암절벽과 하얀 갈매기들의 마냥 잔치를 벌이고 있는 섬 독도. 


  동해의 너른 바다우에 독도가 한 점 놓여있다.


  이름이 말해주듯 거리상으로도 많이 떨어져 있고 우리들 마음에서조차 다분히 멀어진 곳이다. 그러나 독도 땅에 발을 딛은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려행이였다.


 

   급변하는 기후속에 독도는 재빛 덮개를 덮은 듯 몽롱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봐도 독도는 거기에 있었다.


  철벅이는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 견고해진 넉넉함으로 거기에 있었다.


  작은 몸체에 당찬 위엄을 갖추고 세간의 풍파와 조명을 한 몸에 받아 안으며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찍은 독도사진 몇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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