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 장편인물평전 "소금꽃- 강경애 평전" 련재를 시작하며
김 혁
1,
소학시절, 학교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 길에 그후 문학비 하나가 외따로 솟았다. 바로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 이다.
룡정출신으로 10대로부터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 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의 첫 작품을 맨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 중기 초중학교 시절이였다. 방학이면 룡정 신화서점에서는 2층의 한 칸을 내여 아이들에게 책을 대여해 주었다. 땡전 5전을 내면 그 자리에서 책들을 열람할 수 있었다. 책의 홍수가 터진 요즘과는 달리 피폐하기 짝이 없던 문화풍토에서 아이들이 따로 접할 책이 없었다. 그래서 알뚱말뚱한 성인들의 책들을 도깨비 기와장 번지 듯 읽었다.
그렇게 책 대여점에서 열다섯 살 내기의 내가 생애 맨 처음으로 완독한 장편소설이 바로 강경애의《인간문제》였다.
일제 강점기의 농민과 로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핍진하게 그려내여 식민지 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그 소설을 어린 내가 다 알고 읽은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온통 도그마(Dogma)로 점철된 “도긴 개긴”격의 책 몇 권뿐이였던 그 시절, 소설 속 곰살가운 우리 언어와 선비, 첫째, 신철, 옥점의 형상은 내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99년에 강경애의 문학비가 비암산 자락에 세워지면서 다시 강경애의 작품들을 찾아 읽었고 지난 2005년에도 또 한번 이 불운의 녀작가와 만났다.
당시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뜨면서 학계에서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해외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 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회장을 필두로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이 진상 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추진회에서 운영하는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결국 강경애는 오명을 씻고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문화인물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 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히고 있었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선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고향에서 필밭을 경운했던 이 질박한 녀성작가에 대한 애대와 경모를 머금고 나는 강경애의 생몰일을 기념하여 여러 간행물에 강경애의 문학적 생애를 답사기, 칼럼등 여러 쟝르로 발표했다.
그리고 강경애 탄생 110주년을 맞으면서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를 휘동하여 그의 문학과 삶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기획, 주도해 펼쳤다.
조선족 소설가들과 문학도, 언론인들은 이날 룡정 비암산자락을 찾아 강경애문학비에 헌화하고 묵례를 드린 뒤 룡정시 도서관에서 강경애문학세미나를 열었고 내가 강경애의 생애와 작품을 조명하는 특강을 맡아 했다.
올해도 연변대학 조선문학연구소와 손잡고 학원생들을 상대로 “룡두레 우물가에 족적을 남긴 강경애”라는 제목의 특강을 다시 한번 하면서 대학가에 강경애를 알리기도 했다.
2,
강경애는 조선(한국)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걸출한 녀류작가인 동시에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도 추앙할만한 녀류작가로 정평되고 있다.
1906년 4월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부자의 딸로 태여났다.
1929년 10월《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염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을 읽고》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 그가 전공한 쟝르도 애초의 피상적인 서정시에서 특정한 정치적립장과 비평적 시각에 근거한 리론을 담은 평론과 소설로 바뀌였다. 한동안의 습작기간을 거쳐 강경애는 감상적인 문학소녀로부터 철저히 계급의식에 립각하여 글을 쓰는 작가로 변신하였다.
1931년에 강경애는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과 결혼하고 함께 북간도의 룡정으로 이주해 왔다. 1932년 1월 “신녀성”에수필《간도 풍경》을 발표했다. 두만강을 건너서 간도로 들어서는 감회를 피력한 글이다. 체험의 현장인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는 체험을 하게 되였다. 간도방랑체험으로 강경애는 1932년 9월《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을 발표한다.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은 투철한 반일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건실한 반일사상을 지니고 작품창작에 림 (臨)했으며 룡정에서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32년 일제는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우면서 《치안숙청》공작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 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고 또한 지병(持病)인 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8월과 10월의 “동광”지에 발표 된 수필《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 있거라》에 이때 간도를 떠나는 감회가 세세히 적혀 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와 안수길 등과 함께 조선인들의 문학단체인《북향》회동인이면서도 고문격으로 또 가정주부로 창작에 몰두했으며 1939년에는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중간에 간혹 서울이나 장연을 왕래하지만 주로 간도에 거주하면서 손수 물 긷고 빨래하며 한편으로는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귀병이 재발하여 다시 고향 장연으로 돌아가 1944년 4월 26일 영면하기까지 강경애는 10년간 룡정에서 세월을 보냈다.
강경애가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30년대는 일제의 파쑈적 탄압이 전에없이 기승부린 시기였다. 민족의식, 반일사상이 구현된 작품은 출판이 불허되였고 자그마한 요소도 수정이 강요되고 삭제당하였으며 신문련재가 중단되고 문예지, 종합지들이 결간, 페간되였다.
이런 렬악한 상황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개인의 안락을 찾아 민족을 등진 문인들, 매문가(卖文家)들도 나왔다. 그러나 강경애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시종 가난하고 천대받는 근로인민, 수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일개 가정주부로 더우기 신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진보적인 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릴수 있은 것은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룡정지역에서 살면서 시대에 대한 투철한 인식에 기초하여 글을 쓴데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그의 작품을 일람해보아도 그 뚜렷한 구현이 료연하게 알린다.
《신가정》에 《유무》는 1934년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을 묘사한 작품이다.
《신가정》에 발표한 《소금》은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의 참혹한 삶과 그에 저항하는 무장투쟁 부대를 묘사한 중편소설이다.
《녀성》지에 발표한 《어둠》은 제4차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사형 당한 항일혁명운동가의 가족의 고난과 과거 운동가의 전향을 그린 소설이다.
《동지》에 발표 된 《마약》은 아편중독자인 남편에 의해 첩으로 팔려 저항하다가 끝내 죽는 녀성의 수난을 그린 작품이다.
일본어로 쓴 소설《장산곶》은 황해도 몽금포의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인 로동자와 식민지 조선 로동자의 연대 문제를 반영한 작품이다.
강경애는 치렬한 문학생애에 21편의 소설, 2편의 장편연재소절, 24편의 수필과 7편의 시, 3편의 평문을 남긴것으로 알려진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소금》,《축구전》등 많은 작품들이 룡정에서의 간도체험과 갈라 놓을수 없기에 룡정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진 것이다.
3,
오늘날 조선족문학의 근저에는 김창걸, 윤동주, 리욱, 김학철 등과 더불어 당시 간도 지역에 족적을 남겼던 안수길, 최서해,강경애와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조선족 문학의 비조(鼻祖)로 되였고 이로써 우리 문학이 다원화적인 깊이를 이루게 될 수 있었다.
한 시대의 문학은 작가가 생존했던 동시대인들의 삶의 모습, 가치관과 시대의 소망을 담고 있다.
좋은 작품일수록 그 작품이 주어진 력사적 시대나 력사적 현실에 대한 반영에 얼마나 리얼했는가, 그리고 치렬했는가를 말해 준다. 작가만의 감성과 혜안으로 력사적인 현장에서 그 현실과 의미에 관여하면서 삶의 체험과 고뇌를 작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그것과 동화하고 일체가 되는 작업을 치렬하게 완수해 왔기에 그로서 생성된 문학적 가치가 강경애와 같은 이들을 명가로 그들의 작품을 명작으로 만든 것이다.
강경애의 작품이 요즘의 우리 문학에 시사하는바는 크다.
사회참여에 있어서 문학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있다. 따라서 당위의 문학으로 위세를 떨쳐온 리얼리즘도 이제는 낡투로 색바래졌다고 어떤이들은 말한다.
시장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부박한 그 지점에서 우리 문학은 자칫 그렇지 않아도 적은 독자까지 잃을수 있다. 상업주의 문학체제에 순응한다면 우리 문학의 이념은 결국 감각적인것이나 실험적인 론리에만 부박하게 꺼둘리고 말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 력사와 사회와 관련된 공동체 인간들의 삶을 다루는 그런 문학을 격려하고 가꾸어야 하며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선행되여야 한다고 본다. 여러 쟝르, 여러 문체의 작품을 통해 시대의 진실을 전파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에게는 강경애의 작품들이 중고로, 그가 몸으로 지향해왔던 것이 철이 지난 명제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과감하게 시장과 공리의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진솔한 언어로 오늘날 공동체의 깊숙한 아픔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성찰할 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문학이 아닐가!
어제날의 강경애가 바로 그러했다. 하기에 그는 주어진 소명을 하얗게 불태우며 작품의 행간에 민족과 시대를 위한 하얀 기념비를 오롯이 세울 수 있었다.
삶을 형상화하고 그 삶에 가치와 빛을 부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문학의 역할과 소명이라고 할 때 우리 현대녀성문학의 기초이며 높은 봉우리에 서있는 강경애의 문학을 우리는 다시 경모의 마음으로 접하게 된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나의 창작성향”이라고 밝힌적 있다. 이 모든 것은 수십 년간 기자라는 직종에 투신해왔기에 특정지을 수 있는 나의 남들과 차별화 된 창작성향이다.
지금도 나는 소설이라는 픽션물에 주로 매진하고있지만 칼럼, 기행문, 인물전이라는 논픽션물에도 몰입되여 있다.
다각적으로 조선족공동체의 력사와 현황의 면면을 보여주기 위한 소명의식으로 소설창작외에도 기행, 칼럼, 영화평 등 여러 장르를 충분히 동원하여 수년간 출간과 관련 련재를 이어가고 있다. 룡정의 백년사에 대해 전경식으로 조명한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푸른 솔, 해란강 깊은 물”과 문화력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인물계렬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등이 조선족의 백여년 력사를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근년래 나는 또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부와 비젼을 위한 작업— 조선족인물전 시리즈를 사회와 약속하고 그 결과물들을 륙속 펴내고 있다.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제반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주덕해, 김염, 김학철 등 우수한 인걸들의 전기를 이미 펴냈거니와 펴내는 작업을 창작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시간대에 놓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수년래 룡정이 배출한 인물들을 시리즈로 펴내고 있다. 이미 “별헤는 밤: 윤동주 평전”, “실크로드에 지다: 한락연 평전”, “청년문사의 꿈: 송몽규 평전”등 장편인물평전들을 발표했다. 강경애 평전도 바로 이 시리즈의 맥락에서 기획, 집필중이다.
“조선족문화의 발상지로 정평되는 룡정에서 태여난 나에게 있어서 고향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력사에 대한 소명의식은 쉼모르고 필을 들게하는 힘이요, 그 붓끝에 담아내는 묵향이다.
평전의 집필을 앞두고 또 한번 비암산 자락에 있는 강경애 문학비를 찾았다.
요즘 들어 룡정의 비암산은 풍경구 개발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비암산 자락이 온통 꽃밭으로 조경되고 유리잔도도 부설되여 일평균 8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호황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비암산 자락의 적요한 곳에 위치한 “강경애문학비”를 찾는 관객은 없다. 향락주의의 팽배에 유흥을 즐기면서도 막상 우리의 문학과 민족 선각자들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작금의 부박한 풍토가 처처에 엿보여 그를 조명하려는 필대를 무겁게 한다.
필대를 고누잡고 평전의 들머리를 여노라니 간밤에 내린 눈을 소복히 떠이고 있던 녀류작가의 햐얀 기념비가 여느때보다도 심중에 커다랗게 안겨온다.
"장백산" 2019년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