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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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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SNS의 “꽃”, 디카시 댓글:  조회:778  추천:2  2020-09-21
칼럼   SNS의 “꽃”, 디카시   김혁   요즘 인터넷이나 위챗을 통해SNS(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에 떠오르는 글들을 들여다 보면 은연중 디카시가 붐이요, 압권이다. 이른바 “디카시”란 디지털 카메라와 시가의 합성어이다. 작자 자신이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로 시적 감흥을 일으키는 형상을 포착해 촬영하고 그 시적대상에서 어떠한 정서적 령감을 떠올려 5행 이내 짧은 시적언술을 결합하여 만든 뒤 SNS등으로 실시간 소통하는 창작방식을 가리켜 말한다.    디카시는 불과 십여년 전 중국 정주경공업대학 한국어과 교수로 있는 리상옥 시인이 인터넷 한국문학도서관 코너에서 처음 “디카시”라는 용어를 사용한 뒤 최초의 디카시집을 출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천고의 시간동안 탁마해 온 시조 등 쟝르에 비하면 다밭은 시간이지만 디카시는 이미 기존 시의 카테고리를 넘어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하는 다매체 시대의 새로운 쟝르로 무섭게 떠오르고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일상의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여가고 있는 시대다. 멋진 풍경이나, 예쁜 정물, 잊지 못할 장소 등 기억해 둘 장면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그를 향해 앵글을 맞춘다. 모두들 종류별별의 핸드폰으로 마음에 드는 풍경과 사물을 폰에 속속 담는다. 그리고 시를 입힌다. 혹자는 이미 쓴 시에 풍경을 입힌다. 습작기에 배운 은유, 직유를 마음의 눈으로 장착하고 시와 풍경 속에 담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비범한 예술작품으로 승격하는 순간이다.    “인류 력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중 하나로 꼽히는 카메라”가 세상에 나온 지도 200년, 스마트폰의 성능은 전통의 카메라를 뛰여넘을 만큼 발전했다. 그 눈부신 혜택을 입어 모두들 담아낸 영상들이 웬만한 전문가의 작품 못지 않다. 그렇게 촬영가로 “둔갑”한 시인들이 시작품과 그럴듯한 촬영작품을 동시에 뽑아 내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체와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진 디카시 작품들을 감상하노라면 시를 읽는 기쁨도 두, 세배로 가배되는 상 싶다. 읽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 생각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준다. 전문 사진가들을 뺨치는 영상과 시편에서 번뜩이는 직관의 서정은 SNS에 매여 사는 요즘의 새로운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족하다. 게다가 명곡이나 최신 류행음악까지 곁들기도 해 그야말로 오감만족의 흥그러운 향연이다.    디카시는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재빨리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누구나 손 쉽게 감상할수 있고 쓸 수도 있다. 현학적이고 요설적인 말장난으로 독자들로부터 멀어진 요즘의 시와는 다르게 선명한 대중성을 띄고 있다. 또 길지 않고 매력있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고 각광받는 시대 짧은 글과 즉석사진이 전하는 울림이 제법 크고 깊다.  때문에 디카시가 이러한 대중의 문화 향유의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는 신종의 쟝르로 락점, “간택”된 것이다. 어느 비평가가 정평했 듯이 디카시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일상성'을 가졌고, 복잡다단한 세상을 상징적으로 요약하는 '압축성'과 전자매체 영상문화의 시대를 반영하는 '영상성'을 가졌으며, '쌍방향 소통성'”까지 가진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최적화 된 대중적 쟝르로서의 디카시의 보급은 가히 폭발적이여서 해외에서는 교과서와 사전에 디카시의 정의가 실리기도 하고. 작품공모전, 전문지 발표, 시집출간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문단에서도 많은 이들이 뒤미처 이 쟝르의 매력에 일견경심(一见倾心) 빠져든 듯 하다. 작가적 상상력과 톡톡 튀는 개성이 십분 드러나는 작품들로 하루에 쏟아지는 디카시의 량이 적지 않다. 북경, 상해  등 여러 지역에서는 이미 디카시 동아리들이 무어져SNS에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촬영수준의 미달과 짧은 글줄에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로정(露呈)하는 작품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 창작인구가 재빠르게 늘어나고, 게다가 기성작가들도 기꺼이 동참하여 작품의 수준들이 고르게 편재되고 있다.   그럼에도SNS의 불붙는 열조에 반해 우리의 문단은 아직 디카시를 마중 할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여태 디카시를 게재한 잡지도 없고 이 새로운 쟝르에 대해 진맥한 비평가들도 보이지 않는다. 문학열성자들이 스스로 창작하고 동아리를 뭇고, 향유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은 문단과 독자들이 오로지 잉크 냄새 나는 툽상스러운 잡지 한 두권에 붙매였던 옛날과는 다르다. 독자들의 심미수준은 다원화되여가고 참조계 또한 다양하다. 문화와 예술의 패러다임은 재빠르게 바뀌고 있고 이는 더 많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 어쩔 수 없는 문학의 위기에 넋두리를 늘여 놓는 대신, 바뀌여진 창작방식과 새로운 쟝르에 적극 부응할 때 그 것은 침체되여 있는 우리의 문학을 새롭게 촉발시키는 기꺼운 현상으로 고착될 수 있을 것이다.    형식미의 최고를 자랑하는 중국의 고시나 간결함과 명징함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의 하이쿠(癸句, 3행17음절 5•7•5조의 률격을 엄격히 고수하는 일본의 전통시)는 인류문학의 보고(宝库)로 남았다. 쟝르의 경계를 뛰여넘는 디카시 등이 그 계보를 이어나갈지 주목된다.    “기화요초”가 어우러진 SNS에서 신선한 쟝르의 “꽃”들이 더욱 흐드러지게 만개하기를, 그리고 SNS작가들, 디카시 동인들의 순발력 있는 약진을 바란다.  ‘ “연변일보” 2020년 9월 17일  
82    지천명(知天命)의 자치주 댓글:  조회:972  추천:11  2020-09-08
. 칼럼 .   지천명(知天命)의 자치주   김 혁   자치주성립경축대회에서 시민들과 어우러진 주덕해 초대주장     ▲  에헤라 어절씨구 좋구나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화호하네 에헤라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 자치구 세웠네…      신들린듯 구성진 노래소리 속에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창립대회가 연길시에서 펼쳐져 자치구인민정부 주석인 주덕해가 연변조선족자치구의 탄생을 만방에 선포했다.      1954년 4월,중공 길림성위와 성인민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의 규정에 근거,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그해 12월에 열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에서 자치구를 자치주로 선포하고 주덕해를 주장으로 선했다.   자치주의 성립을 선포하는 주덕해 주장     ▲  9월3일은 이제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일일뿐더러 우리민족전체의 축제의 날로 부상되였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명절의 분위기에 흠씬 젖어들어 여러가지 의미있는 행사들이 연변을 주무대로 연줄로 펼쳐진다.    올해도 9.3명절에 즈음하여 유엔세계관광조직, 유엔개발계획서와 국내 전문가들로 무어진 도시고찰단이 왕림하여 >라는 제명의 도시보급교류회의도 열고, 번영발전하는 연변의 시대적특징과 농후한 민속특색을 생동하게 그려낸 중앙TV 의《경국경성(傾國傾城》》문예야회가 펼쳐졌으며 제2기 중국.연길 국제투자무역상담회도 성황리에 개막되였다.    서기로운 가을바람속에 여느때보다 명절의 열락(悅樂)에 빠져든 자치주이다.      자치주성립일 경축대회 회장     ▲  자치주창립이래 연변은 가난하고 페쇄되고 락후한 면모를 철저히 개변하여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번영하고 민족이 단결하며 변강이 안정되고 인민이 즐겁게 생활하는 새로운 국면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근년들어 자치주는 변혁기의 진통도 더불어 겪고 있다. 인구의 대량이동으로 촌부락이 소실되고 녀성들의 도시진출과 섭외혼인으로 남녀비례가 실조되여 농촌총각들이 가정을 못이루고 그로서 인구가 마이너스장성을 기록하고 그에 이은 련쇄반응에 학교가 페교되고 있다. 과거 한세기동안 우리가 피와 땀을 바쳐 이루어왔던 공동체와 그속에 내재되여있는 가치관이 눈에 띄이게 흔들리고있다. 이제부터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피부로 음미해볼 시점에 와있는것이다.   자치주는 올해로 쉰다섯의 년령을 맞았다. 에서는 50대를 천명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의 위기해법은 천명을 아는 우리 자신에 있다. 영광스러운 전통과 우수한 문화유산을 지니고있는 우리 민족은 목전의 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여건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모두가 위기의식을 품고 민족의 현황과 미래를 재검토하고 문제점들을 착중하여 밝히면서 시종여일하게 과학적 발전관과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시달하고 경제발전전략을 전면 실시한다면 우리 민족은 지금 잠시 빠져든 진통의 수렁에서 빠져나올수 있는것이며 경제가 더욱 번영하고 생활이 더욱 유족하며 사회가 더욱 조화롭고 환경이 더욱 좋은 비전을 가져올것이다.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8- 9-3      
81    한 농예인의 동상 댓글:  조회:1087  추천:12  2020-08-01
칼럼   한 농예인의 동상 그리고...   김혁      찜통더위에 꺼둘린7월22일, 룡정시 로투구진 용진촌 소기마을에서 최창호 선생 조각상 설립식이 조촐하게 펼쳐졌다. 허물어져가던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가 보수되였고 최창호선생의 100년 고택도 다시 손길이 닿아 초옥의 운치를 보이는 가운데 그 고택의 뒤쪽 언덕배기에 “사과배의 선구자”로 정평되는 농예인 최창호선생의 한백옥 흉상(胸像)이 건립되였다.   최창호는 1897년 조선의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정동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선비 최병일의 아들로 태여났다. 20세기 초, 일제의 탄압에 조선 리씨 왕조의 운명이 다해가자 최병일은 일가 식솔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 1916년에 드디여 다다른 곳이 바로 그 지형이 버치 모양을 닮은 형국이여 “작은 버치골”로 불리는 룡정 로두구진 소기(小箕)촌이였다.   농예인 최창호   최씨 일가는 화전을 일구어 첫 해 농사를 지었고 지세 높고 양지 바른 곳에 8간 초가집을 지었다. 최창호네 집 뒷켠에는 그닥 가파르지 않은 언덕이 있었다. 최창호는 그 언덕에 살구, 오얏, 배, 복숭아, 찔광이와 돌배 나무를 서렬로 심었다. 그로부터 소기골에 처음으로 과수원이 들어서게 되였다. 1921년에 최창호는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가져온 여섯 대의 배나무 가지를 김치 움에 넣어 잘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봄이 되자 배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지하였다. 짚으로 싸고 삼으로 동여서 겨울나기를 시켰다. 그렇게6년째 되던 해의 봄 3그루의 과일 나무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세 그루의 과일 나무가 연변에서 생성된 사과배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     이로부터 사과배는 연변은 물론 동북지역과 내몽골, 화북지역에 널리 전파되였고 아세아에서 가장 큰 사과배기지인 연변과수농장 만무과원이 룡정에 조성되였다. 사과배는 국내외에 소문높은 브랜드상품으로 자리매김했고 사과배산업은 연변농업경제의 중요한 기둥산업으로 간주되였다.      한 농예인이 접목의 힘으로 거칠고 바람 세찬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지게 한 새로운 품종이 바로 사과배이다. 150여 년의 이민 정착 력사를 경유해 온 조선족이 황무지를 눈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 낸 지역 특산물로서의 사과배에는 조선족의 피와 땀, 애환이 담겨 있다. 이렇듯 이민 민족인 조선족은 중국문화의 가지를 자기 민족 문화의 뿌리에 접목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켰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중국조선족을 사과배에 곧잘 비유한다. 사과배는 어찌 보면 자체의 특유의 생존 리념을 키워 온 조선족 문화를 형상화 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년세월을 경유해오면서 사과배는 중국조선족의 개척정신과 창조정신의 상징물로 부각되였고 사과배선조나무는 연변의 중요한 력사경제문화유산으로, 소중한 향토교재로 각광받게 되였다.   이에 룡정시정부에서는 지난 1987년 최창호선생의 호흡이 서린 소기촌에 《사과배선조나무기념비》를 세웠고 1998년에는 연변주정부와 룡정시정부에서 《사과배소개기념비》를 세웠으며 오늘에는 드디여 그 사과배의 “산파”인 최창호 선생의 기념석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2010년 필자는 최창호의 고택을 찾아 특종 "조선족 사과배 선조나무 고사(枯死)위기를 매체에 발표, 선조 사과배나무에 대한 중시를 불러일으키고저 관련 뉴스, 칼럼을 발표하고 관련 다큐특집 제작에 동참하기도 했었다.       이로서 조선족문화의 발상지 룡정지역에는 모아산 기슭에 과수원을 건설할 구상을 무르익혀 오늘의 만무과수원을 일구어 낸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연변의 첫 반일시위운동의 선두에 섰던 조선족 화가 한락연, 조선족교육의 일번지 명동학교의 창시자 김약연,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등 명사, 명류들의 기념 동상이 들어서게 되였다.    이러한 동상들은 지역사회의 력사와 정체성을 우렷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지역사회의 둘도 없는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돌을 쫗고 나무를 깎아 형상 하나를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선대 혹은 당대 사람들이 이룩한 업적을 기려 정성껏 세운 기념물과 동상은 력사를 기억하려는 량지가 있는 지성인들의 정열과 민족심의 발현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살리고 글로벌 시대 세계로 가는 조선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세우고 높이는 일이다.    명예와 공훈에 걸맞은 기념비, 동상을 적지에 건립한다면 이곳을 찾는 시민, 타지의 유람객들에게 지역사와 현대사의 산 교육의 장으로 될것이다.   민족력사의 보존, 전승, 특히 지역사회의 위상에 걸맞는 기념물의 건립은 력사관, 민족관, 국가관을 제대로 정립하게 해주며 이로서 우리의 미래를 굳건히 다지는 찬란한 기념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연변일보” 2020년 7월 24일    
80    바람을 가르는 붓 댓글:  조회:1595  추천:30  2020-03-09
      워낙에 서재에 오롯이 묻혀 사는 선비의 체질이지만, 느닷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겨우내 방에 붙박힌 시간이 더 많아졌다. 요즘의 신조어를 빈다면  진짜배기 “방콕족(방에만 박혀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 돼버린 것이다.   겨울의 추위와 가세해 덮쳐든 엄슬(严瑟)한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을 엎누르며 전염병을 소재로 한 책들을 서가에서 다시 들추어 보았다.     우선 떠오른 책은 ”백년고독”으로 잘 알려진 노벨상 수상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였다.  마르케스가 1985년에 발표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유럽에서 콜레라가 창궐하던 19세기 말의 풍경을 그린다. 작품의 기본 골조는 사랑하는 녀인 페르미나와 사랑을 이루기 위해 50여년을 기다린 플로렌티노의 이야기이다. 세월의 무상함과 콜레라라는 무서운 전염병의 공포를 이겨낸건 인내와 헌신적인 사랑이였다.      다음은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다시 꺼내 들었다.  알제리의 작은 해안도시에서 수천마리 죽은 쥐들이 발견되고 사람들은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로 속절없이 죽어간다. 결국 도시는 봉쇄되고 시민들은 갇히고 만다. 사망자가 늘어나고 공포 속에 온갖 거짓 소문까지 나돌면서 도시는 감당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당착하고 있는 상황을 다시 보게 만들어주는 작품이다. 소설에서 까뮈는 “병균은 자연이 준 것이고 그밖에 건강은 의지의 소산이다. 우리가 결코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의지이다.”라고 피력한다.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세상을 문학으로 고발했던 까뮈는 페스트라는 잔혹한 배경을 설정해, 병마는 무서운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한 자태와 이를 가능케 하는 의지라는 존재주의 철학관의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 등 작품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렬에 오른 영국작가 윌리엄 서머셋 모옴의 소설 “베일《面纱》”의 소재 또한 콜레라 속 사랑이다. 1920년대 향항과 중국의 “매담부(湄潭府)”라는 곳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아름답고 명랑한 “사교계의 꽃” 키티는 유부남 찰스에게 빠져든다. 그러다 불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찰스는 키티를 배신하고, 안해의 부정을 알게 된 세균학자 월터는 키티를 중국의 오지로 데려간다. 그런데 대륙에서는 창궐한 콜레라가 한창 만연되고 있다.  “키티는 사방에 깔린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과정에서 과거의 욕망들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미래에 대해 보다 관조하는 자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광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을 얽어맸던 잘못된 사랑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한다.”고 평론가들은 이 소설에 대해 정평한다.      이딸리아 작가 보카치오의 저 유명한 “데카메론(《十日谈》)”역시 여태 적라라한 사랑 이야기로만 읽었지만 사실은 온역을 마주하고 써낸 명작이다. 흑사병을 피해 짐싸고 피난을 나온 남녀의 10일간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보카치오는 작품의 서사(序词)에서 “병마에 시달리는 불행한 사람들의 고뇌를 덜어 주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고 밝혔다. 그의 구전문학에 대한 전승과 재난속 삶에 대한 위무의 이야기 방식은 그후의 쉑스피어, 몰리에 등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로빈손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도 런던 전역을 휩쓴 온역을 소재로 한 “온역년대의 기사《瘟疫年纪事》”를 펴내 후세에 비망록을 남긴바 있다.   이제 보니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전염병이 등장한다.  괴질이 돌아 만석군 최참판 댁 일가 대부분이 병에 옮아 죽고 몰락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병명이 바로 당시 항간에서 호렬자(虎列刺)라 불렸던 콜레라이다. “호렬자”는 “호랑이가 살점을 찢는 듯한 고통을 준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소 우리는 소설작품 속 치명적인 전염병은 완전한 허구의 대상과 동일시할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겐 거리감과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무사안일 속에 “안전한 열독체험”으로 다가왔던 소설 속 살풍경이 묵시록적 예언으로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코로나가 만연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 개연성의 출현이다.  란장 속에서도 마스크 등 보견용품을 사재기하여 자신의 괴춤을 먼저 챙기려드는 후안무치 장사군들, 그에 반해 자신의 재물을 헐어 고통에 지지름당하는 사람들에게 신심의 량식을 제공하는 이들, 남들이 뛰쳐나오는 위험 속으로 다시 뛰여드는 “의자인심(医者仁心)”의 용감한 “역행자”들… 이와 같은 소설 속에서 보았던 위기의 상황들을 우리는 지금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포기를 모르고 병마와 맞서 싸우며 희망의 백신을 만드는 사람들, 그들의 분투는 놀라웁고 눈물겹다. 전염병을 소재로 한 명화 "아스도드의 온역" 우리가 지금 겪고있는 재난을 마르케스도, 까뮈도, 모옴도 모두 겪어 왔다. 비단 겪었을뿐더러 그 과정을 작품에 옮겼다.  온역, 전쟁, 기아 등 재난들은 우리의 작가들을 사고하게 하고 그것을 기록하게 할 의지와 힘을 주었다. 신상에 닥쳐 온 재난은 역설적으로 작가들의 소재와 문체를 바꾸어 주었고, 사색을 무르익게 했으며 위대한 작품을 낳게 했다.   재난 중에서의 개체의 기억은 중요하며 그 기억에 대한 기록은 더구나 의의가 있다. 생생한 고통의 목소리와 격앙에 넘친 의지의 목소리는 시대의 증언으로 남을 것이며 경력자들의 생명의 려정과 정신적 도경을 적음으로 하여 그 기록은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  견강, 우애, 선량, 호조, 용감, 락관 등 정신을 노래하고 공포, 유약, 리기, 탐욕과 사악함을 병마와 함께 물리친 이러한 련민과 관조의 격조가 담긴 기록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시(警示)와 사고를 가져다 줄 것이다.   “재난에 대해 쓰지 않는다면 그 또한 재난일 것이다”라고 갈파했던 어느 시인의 명구가 떠오른다.  재난 앞에서 창작의 의미는 더더욱 두드러진다. 거센 맞바람을 헤가르며 흐트러지려는 붓줄기를 다잡아 다시 고누잡는다.    -“청우재(听雨斋)”에서   “연변일보” 2020년 2월 28일    
79    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 댓글:  조회:1012  추천:26  2019-12-30
[만필]   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  윤동주 연구의 결정판 "윤동주 평전"의 저자 한국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宋友惠와 윤동주의 릿쿄대학 후배이자 연구자인 야나기하라가 만난 자리에 나의 인물전 "윤동주"가 등장했다.    송우혜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중퇴하고 한신대 신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이화여대 대학원 사학과(한국사 전공)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 1984년 삼성문예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 장편소설 ≪남도행≫, ≪저울과 칼≫, ≪투명한 숲≫, ≪하얀 새≫,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등이 있고, 평전으로 ≪윤동주 평전≫, ≪송창근 평전≫ 등이 있다. 또 연변지역 동포들의 삶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우리의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스페인 춤을 추는 남자』(1998) 등이 있다. 한국사 관련 론고와 학술론문으로는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조직형태에 관한 연구」,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이은. 李垠의 정략결혼연구─언론보도 (1907~1920)를 중심으로」(석사학위론문) 등이 있다.   력사적 소재 및 당대의 사회상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예리하게 시사문제를 논하는 칼럼니스트로서도 이름이 높다.   송우혜가 되살려낸 윤동주의 순결한 초상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는 1946년생으로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했다. 야나기하라 씨는 릿쿄대학 사학과 졸업생으로 윤동주 시인의 후배가 된다. 20여 년 전 시인 이라바키 노리코의 에세이에서 '릿쿄대학에 류학했던 시인 윤동주'에 대한 문장을 읽고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좇기 시작했다. 시인이 일본에 남긴 발자취를 조사하고 체포시 압수당한 장서 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릿쿄대 졸업생, 교직원과 함게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릿쿄 모임’을 설립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전후로 ‘윤동주 시인과 함께’를 매년 개최해 왔다. 윤동주가 숨진 곳에서 과거의 불행한 력사를 기억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준 이들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귀감으로 되고 있다. 기라성 같은 윤동주 연구의 장인들 앞에서 필자의 작은 책자가 초라할뿐이다. 격동의 지난 세기, 북간도 룡정에서 태여나 한반도와 일본렬도에 자취를 고루 남긴  윤동주는 아시아  문인들중 유일하게 한국, 중국, 일본에 모두 기림비가 세워진 시인이다. 이에 연구가들은 "세계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하고 있는 오늘날 윤동주는 오욕의 력사를 씻고 한, 중, 일의 새로운 뉴대를 잇는 문화사자의 역할을 은연중 하고 있다"고 정평한다.   시인이 그 고난과 격변이 세월에 쓴 시는 시대와 국경, 언어의 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시 속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별의 의경.意境은 중국의 "북간도", 한반도와 일본렬도를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아시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윤동주의 고향 룡정에서 십수년간 오롯이 시인에 대한 연구와 기림사업에 몰두 해온 필자로서는  이념과 력사의 벽을 넘어 한.중.일에서의 윤동주 연구가 더 활발하게, 더 협력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9년 12월 30일   /김혁  
78    신(新) 매체시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테제 댓글:  조회:1114  추천:29  2019-02-28
  . 칼럼 .   신(新) 매체시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테제 - ‘다매체시대 소설문학의 출구는?’문학세미나에서 한 발언 김 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90년대 말 경, 해외 모 문학지에서 “래년부터 우리는 원고지가 아닌 이메일 투고를 전격 실시합니다.”라는 작품공모를 보고 적이 놀란적이 있었다. “천일야화”같은 이야기인줄로 알았는데 불과 2년도 안되여 우리 문단에서도 컴퓨터 창작과 편집이 본격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만년필을 던지고. 컴퓨터로 타자하여 문학지에 실린 첫 작품이 2000년 순수문학지 “도라지” 톱에 실린 중편소설 “라이프 스페이스”(生活空间)인줄을 난 경희와 함께 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문단에서 그 누구보다 앞서 문학, 뉴스, 력사로 분류하여 무려 다섯개의 블로그를 쟝르 별 만들어서는 거의 20년간 꾸려왔다.   그러나 이제 위챗이 우리의 일상의 공간에. 문학공간에 비집고 들기 시작했다.  “촉새 황새 따르기”로 뒤미처 스마트폰에 문학 위챗계정을 만들었다. 문학 블로그와 더불어 나의 신작들을 실시간 올리면서 독자들과 새롭게 만나고 있다.  나의 위챗계정의 이름은 고향 룡정에 있는 오프라인의 나의 서재의 이름과도 꼭 같은 “청우재(听雨斋)”, 그 키워드를 문학, 력사, 영화, 음악, 동물 등등으로 정하고 매일이고 게시물들을 나름 선정해 올리고 있다. 작은 핸드폰 속에 세상만사, 천태만사, 사방오방을 다 담으면서 구지욕에 넘쳐 “작은 두레박에 우물 통째를 담으려”하고 있다.  문단 처음으로 위챗계정에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련재했다. 십여년 전에 출간되였던 나의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수상의 특혜로 나온 책이라 겨우 200권밖에 출간되지 못했는데 위챗련재를 하면서부터는 일 조회수가 거의 천명에로 치달아 올랐다. 게다가 댓글 기능까지 있어 독자들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가능했다.  문학을 담는 그릇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또 변할 수 밖에 없다. 죽간(竹简)이나 양피지(羊皮纸)를 사용하던 시대에는 값싼 종이 책에 외려 령혼이 없다고 보았다. 그처럼 모바일 기기를 문학의 “적”으로 생각하는 부정적,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모바일 기기를 활용한 새로운 방식을 문학의 상실이라고 보면 더구나 안된다.     눈부신 통신수단의 발달과 미디어 외연의 확장과 더불어 문화와 예술의 패러다임은 바뀌고 있다. 전통 매체의 권위성과 독선이 희석화 되고 문학단체와 작가, 독자 등이 직접 미디어를 운영하고 작가, 독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들어섰다. 따라서 탈이데올로기, 문학과 예술의 대중화, 디지털화 등으로 바뀌여지는 오늘날의 문화풍토에서 전통문학의 책무가 더욱 절실하게 되였다.    이제 우리 문단도 주류문단과의 접목, 세계화로의 출두를 위해 다양하고 선진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세계 각지의 독자들에게 보다 손쉽게 조선족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블로그, 위챗계정에서 독자들과 만나는 전자작품은 시효성, 접근성, 범용성 등에서 큰 장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박봉을 털어 자비로 낸 종이책을 지인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고 보면, 시장류통이라는 환절이 탈락되고 책이 더욱 많은 독자군체와 대면할 수 없어 소통이 단절되였던 문단풍토에서 벗어나 문학이 새롭게 독자들과의 만남과 호성을 불러내는 기꺼운 변화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인터넷, 위챗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의 발랄한 운용은 아직도 오지, 변두리 문학에 머물러 있는 우리 문학의 광범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전통문학과 새로운 미디어의 종속관계에 신경을 도사릴 것이 아니라, 응당 쌍방향적이고 복합적인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변혁기의 필수적 변화는 형식의 쇄신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함으로 새로운 창작방식, 새로운 소재, 새로운 문체를 지니고 새로운 류통전략으로 새로워진 독자들의 미뢰(味蕾)와 만나야 한다.   지난세기 90년대로부터 문학의 영향력이 급격히 격하되고 문학 령역이 축소되였다. 우리말 문학지가 7만부의 발행수치를 기록하고 혼인구애광고 뒤에 “문학을 애호함”이라고 기어이 적던 그 풍토는 이미 툽상스러운 6권 사전 같은 두툼한 향수 속에 갈무리되고 말았다.  작가와 독자들이 문학의 정체성 문제에 직면하고, 모든 것이 미디어로 환원되고 있는 변혁기의 오늘날, 작가는 이 모든 혼란에 미상불 대응해야 한다. 문학의 위기를 목메여 부르짖는 대신, 득달 같이 다가 온 기계혁명에 적극 부응할 때 그 것은 위상이 바닥에 내쳐진 우리의 문학을 새롭게 촉발시키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만이 갖고 있는 문화의 토속적인 정서와 력사의 중후한 무늬를 세상에 알리고자 오늘도 컴앞에서, 혹은 스마트폰을 들고 불면의 밤을 새우는 작가와 독자들이 미디어의 미래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가 소망해 본다.      “연변일보” 2018년 9월 7일    
77    김혁소설가와 그의 위안부소재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댓글:  조회:1240  추천:16  2019-02-12
대담 김혁소설가와 그의 위안부소재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문: 중국조선조선족 문단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김혁 소설가가 일전 련이어 장편소설 두부를 출판하여 또 한번 주목과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김혁 소설가는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 《노아의 방주》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뒤 꾸준히 필밭을 경운하여 지금까지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완용 황후》, 《시인 윤동주》, 《춘자의 남경》,《춘자의 남경》등 6부와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페스카마호 사건”, 인물칼럼집 "윤동주 코드", 인물전 "윤동주 평전", “한락연 평전”,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등을 출간. 발표했습니다.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연변주진달래문학상, 두만강문학상 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분과 주임, 룡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등 직을 맡고 있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두부의 작품은 도시진출붐 속의 조선족군상을 감성적 필치로 다룬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와 일본군 위안부의 력사소재를 다룬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이 선후로 출판되였습니다. 그중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은 아리랑 방송에 의해 라지오 소설로 개편, 새해 1월1일부터 전파를 타게 됩니다. 라지오 소설의 방송을 앞두고 “춘자의 남경”의 저자이신 김혁소설가를 만났습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김: 네 안녕하세요?   문:《춘자의 남경》은 작가님의 6번째 장편소설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섯부나 되는 장편소설을 창작하신 것도 대단하지만 이번 작품은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을 소재로 다루고 있어 이슈를 낳고 있습니다.《춘자의 남경》은 조선족문단 나아가 중국문단에서도 처음으로 호흡이 긴 서사로 장편화한 일본군위안부 소재라고 하는데 어느때 어느 간행물에 발표된거죠.   김: 네,《춘자의 남경》은 조선족의 권위문학지인《연변문학》지에 2015년 1기부터 1년간 련재됐고 올해 10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됐습니다. 작품은 30만자의 분량 속에 “뜨거운 감자”격인 소재의 일본군위안부와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20년대 연변지역에서 자행된 ‘간도참안’과 한인, 중국인 위안부들의 참상 그리고 말미에서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의 현장을 재현해 보이고 있습니다.   문: 그 창작경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시죠.   김: 네. 사실 이 작품에 대한 창작충동은 한 폭의 그림에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몇해전 어느 사이트에서 그 그림을 처음 보았습니다. 댕기 머리에 흰색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차림의 한 소녀, 그녀의 가녀린 몸을 감싸고 휘돌아가며 꽃이 피여오르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더러는 아직 봉오리를 틔우지 못한 자주색과 하얀색 도라지꽃이였습니다. 하고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눈물을 떨어뜨릴것만 같은 소녀의 얼굴에는 슬픔과 그리움같은것이 도료와 혼반죽이 되여 묻어 있다. 어딘가 미숙한 붓터치가 보이지만 애잔한 슬픔이 결을 이루고 있는 그 그림의 제목은 “못다 핀 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화가가 아닌 일본군위안부 할머니가 그린 그림이였습니다. 그림의 작가는 김순덕이라는 할머니였습니다. 꽃망울을 피우지 못한 봉오리 앞에 슬픈 표정으로 서 있는 소녀는 김할머니 자신이였구요. 경북 의령 출신으로 1921년 봄날에 태여난 김할머니는 가난을 이기지 못해 녀공을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서 일본군에 끌려갔습니다. 도착한 곳은 중국의 남경이였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는 그곳에서 “성노예”로 전락되여 하루에 몇십명의 군인을 상대로 청춘을 유린당했습니다. 김순덕 할머니가 미술치료의 일환으로 그린 이 작품은 한국과 일본, 미국, 카나다 등지에서 전시되였고 또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선물되면서 일제의 성(性)수탈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위안부할머니들의 아픔을 대변한 작품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또 중앙방송의 일곱시 뉴스를 시청하다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는데 뉴스에 의하면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이미 구상을 마무리한 다른 소재의 장편을 미루고 이 소재를 장편화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장순여(张纯如)라는 미국계 중국인 르포작가입니다. 작가이자 사학가인데 남경대학살에 대해 저술한 르포로 유명합니다. 그녀가 저술한 장편르포 “력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는 해외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켰습니다. 1937년의 그 겨울, 남경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 그 만행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린 보고서였습니다. 저자는 섬세한 필치로 남경의 대학살을 이야기했고 또 일본이 어떻게 력사속에서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 망녕되게 시도했는지 낱낱이 밝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순여의 량심적인 집필은 일본 극우세력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그들로부터 끈임없는 협박을 당해 왔던 장순여는 정신적 고통을 못이겨 2004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작가에 대해 중앙텔레비방송국 다큐프로에서 보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녀의 문명(文名)을 알린 이 장편르포를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습니다.   문: 작가님도 한때 매체에서 활약했던 기자출신이라고 들었는데요.   김: 네. “길림신문과 연변일보”에서 기자사업에 종사했었습니다.   문: 김혁 작가님은 1999년경에 일부 몰지각한 한국들인의 사기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습니다”를 집필, 출간했습니다. 그 르포집이 수천부가 팔려 당시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킨적도 있었습니다. 올해에는 또 한국어선에서의 조선족선원들과 한국선원들지간의 살인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페스카마호 사건”을 다루어 다시 한번 이슈를 일으키기도 했지요.   김: 네. 소설쓰기와 병행해 매체에서 20여년을 기자직으로 일해왔기에 저는 르포가 갖는 매력에 대해 십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같은 픽션작품도 좋지만 실화와 같은 논픽션 작품은 제가 아직도 애대하는 쟝르입니다.   문: 력사소설을 쓰려면 자료수집, 현장답사 같은 것이 선행 되여야 하는데 작가님은 어떻게 착수하셨는지요?   김: 네. 《춘자의 남경》의 집필을 앞두고 2014년 하반년을 옹근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 바쳤습니다. 사비를 팔아 남경으로 가서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300000”이라는 수자가 도처에 새겨진 기념관에서 일본군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만여점의 자료들을 둘러보면서 다시 한번 이 소재의 작품창작에 매진해야 할 각오를 머금었습니다 돌아와서 수십 부의 문사자료집과 피해 당사자들의 진술서는 물론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와 다큐, 드라마도 수십편 찾아보았습니다. 일본군국주의 실상을 깊이 료해하기 위해 수백만자에 달하는 대하실록소설 “태평양 전쟁”도 읽었습니다.   문: 그중에 작가님이 수작이라 생각되는 작품 몇편 소개해 주시죠   김: 네. 가와다 후미코라는 일본작가의 ‘빨간 기와집’ 그리고 한국작가 윤정모의 ‘에미이름은 조선삐였다’, 미국작가 모헤이더의 ‘난징의 악마’등 이 소재 관련 몇부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작가 엄가령의 남경대학살 소재 ‘금릉 13채’는 이미 몇해전에 읽었지요. 소설로서는 이 몇부가 작품성이 들쭉날쭉한 이 소재의 작품들중에서의 수작(秀作)이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조선족 학자들인 김성호의 실화 “종군위안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9년), 강용권의 기행문 “끌려간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과 오스트랄리아 얀.르부 오헤인의《침묵의 50년 한 위안부의 자술 (沉默50年:一位原“慰安妇”的自述》(중경출판사 2015年), 일본작가 이시가와 이쓰코의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 다니엘 최의 “나는 조선의 처녀다- 눈물로 쓴 정신대 위안부 이야기” 등 연구저서들이 내가 하나의 새로운 소설작품으로 픽션화하는데 특히 도움이 되였습니다.   문: 네 실로 많은 작품을 읽었고 꼼꼼히 준비하셨네요.   네: 그런데 뜻밖에도 기성의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어요.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그런대로 적지않은데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많았지요.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습니다.” 그 와중에 외려 위안부 소재의 소설작품이 일본 본토작가의 작품이 있는데 반해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없는데 대해 놀라움을 느꼈고 창작의 립지를 더 굳히게  되였습니다. 력사의 질곡에 갇혔던 불운한 그녀들을 대상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다 했습니다.   문: 김혁 소설가는 이 작품으로 제25회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동포작가들중 문학적 공적이 큰 작가들에게 시상하는 비중이 큰 이 상의 수상은 조선족문인으로서는 김철 시인 등에 이어 8년 만에 처음입니다.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는 작품에 대해 “조선족문단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의 당대문학에서도 주제령역을 승화시킨 중후한 작품입니다”라고 정평했습니다. 《춘자의 남경》은 또 중국작가협회에서 제정한 소수민족중점번역지원작품으로 선정되여 중국어번역을 마치고 북경의 작가출판사에서 곧 출간되게 됩니다.   문: 불과 십년사이에 김혁 소설가는 다섯부의 장편소설과 두부부의 장편르포와 문화시리즈 그리고 네부의 인물전기를 발표, 출간했습니다. 거의 한해에 한부꼴로 펴낸 셈입니다. 게다가 칼럼, 명상록, 소설, 편찬저서들도 곁들면 이 동안 그의 창작량은 그야말로 문단의 평론가들이나 원로들이 격찬할만큼 “전무”할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가 평론가들이 평하다싶이 “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소재로 서사적 사건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그럼 향후의 창작성향과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김: 네. “력사라는 거대한 거푸집 안에 민족의 스토리와 애환을 무늬결 섬세하게 새겨넣은 력사물에 대한 작업이 요즘 내가 하는 전부의 일입니다.” 매체의 언론인과 소설가의 삶을 병행해 왔기에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저의 작품의 특색이라 말할수 있고 이것이 남보다 차별화되는 나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뢰할 만한 소설 창작 기량을 발휘해 주제와 소재의 명징성, 소설적 사건의 이미지화와 깔끔한 흐름등이 잘 조합되여 있는 대서사적인 작품을 다루는것이 나의 금후의 창작의 한방향이 될 것입니다.   문: 민족의 력사와 문화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방대한 작품량으로 묵직한 소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 있는 김혁 작가님, 육성으로 다시 듣게 되는 “춘자의 남경”, 그의 라지오 소설이 기대됩니다.   김: 감사합니다.  / "아리랑" 방송 12월 24일  
76    “백세” 김학철 댓글:  조회:1669  추천:13  2018-12-10
      칼럼     “백세” 김학철   김혁      올해는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탄생 100돐이 되는 해이다. 파란많은 경력과 뜨겁고 강렬한 문체로 작가의 량심을 화인처럼 새겨낸 그이의 문학은 여전히 우뚝하다. 그이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류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 조선의용대 창립 사진, 동그라미 안의 앞줄 두분이 석정 윤세주, 약산 김원봉이고 윗줄이 김학철이다.   김학철과 더불어 100년이라는 상수(上壽)로 기억되는 문화명인들이 적지 않다.   올해는 또 사재를 털어 화림신인문학상을 제정하여 문학후대들을 길러낸 항일녀걸 리화림이 탄생한 10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연변에 오래동안 체류하면서 그 체험을 치렬하게 엮어낸 한민족 사실주의 녀성작가 강경애는 탄생 11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명년이면 곧 온 겨레가 애대하는 윤동주 시인도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영원한 청춘” 윤동주가 100세 로인으로 우리곁에 다가오는것이다.    해외에는 사후 백주년을 맞는 문호들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가, 미국에서는 “야성의 부름”의 작가인 소설가 잭 런던이 올해로 사후 100주기를 맞는다.   탄생 혹은 타계가 백주년으로 그 의미가 다시 돋을새김 된다. 인고와 질곡의 긴 시간을 척각으로 헤쳐온 김학철처럼 치렬한 시대를 헤쳐 나가면서 우리 문학사의 주역으로 우뚝 선 이들은 응분의 역할로 그 선각자적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민족의 찬란한 성좌요, 지워지지 않는 전설이다. 그들이 지내온 시간과 일구어낸 작품의 업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자리에 많은 후배, 제자들이 있고 오늘의 조선족 문단이 있다. 백년이란 시간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문학사적 세월이 어떤것이였던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본다.   그닥 길지않은 문단사에서 처음 백주년을 맞는 문인들이 등장한 우리 조선족문단은 서둘러 거목들을 기릴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이 우리의 문학 나아가 민족사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피는 일은 사뭇 중요하다.  후대가 선대의 루루세월 경유해 온 문학생애와 공적을 알아가는 이러한 기념과 조명은 변혁기 고전하고있는 우리문단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수 있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내는 계시로도 될수 있을것이다.   올해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쉐익스피어는 무려 서거 400주년을 맞는다. 100주년, 200주년을 넘어 설 우리의 문학을 꿈꾸어 본다.      “연변일보” 2016년 4월 14일     
75    신(新) 매체시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테제 댓글:  조회:1232  추천:20  2018-09-14
  . 연변작가협회 세미나 "멀티미디어 시대 조선족문학의 출구는 어디에"에서의 발언 요지 .   신(新) 매체시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테제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90년대 말 경, 해외 모 문학지에서 “래년부터 우리는 원고지가 아닌 이메일 투고를 전격 실시합니다.”라는 공모공지를 보고 적이 놀란적이 있었다. ‘천일야화’같은 이야기인줄로 알았는데 불과 2년도 안되여 우리 문단에서도 컴퓨터 창작과 편집이 본격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만년필을 던지고. 컴퓨터로 타자하여 문학지에 실린 첫 작품이 2000년 순수문학지 《도라지》 톱에 실린 중편소설 (生活空间)인줄을 난 경희와 함께 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문단에서 그 누구보다 앞서 문학, 뉴스, 력사로 분류하여 무려 다섯개의 블로그를 쟝르 별 만들어서 거의 20년간 꾸려왔다.   그러나 이제 위챗이 우리의 일상의 공간에. 문학공간에 비집고 들기 시작했다. ‘촉새 황새 따르기’로 뒤미처 스마트폰에 문학 위챗계정을 만들었다. 문학블로그와 더불어 나의 신작들을 실시간 올리면서 독자들과 새롭게 만나고 있다. 나의 위챗계정의 이름은 고향 룡정에 있는 오프라인의 나의 서재의 이름과도 꼭 같은 ‘청우재(听雨斋)’, 그 키워드를 문학, 력사, 영화, 음악, 동물 등등으로 정하고 매일이고 게시물들을 나름 선정해 올리고 있다. 작은 핸드폰 속에 세상만사, 천태만사, 사방오방을 다 담으면서 구지욕에 넘쳐 ‘작은 두레박에 우물 통째를 담으려’하고 있다. 문단 처음으로 위챗계정에 장편소설 를 련재했다. 십여년 전에 출간되였던 나의 첫 장편 는 수상의 특혜로 나온 책이라 겨우 200권밖에 출간되지 못했는데 위챗련재를 하면서부터는 일 조회수가 거의 천명에로 치달아 올랐다. 게다가 댓글 기능까지 있어 독자들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가능했다.   문학을 담는 그릇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또 변할 수 밖에 없다. 죽간(竹简)이나 양피지(羊皮纸)를 사용하던 시대에는 값싼 종이 책에 외려 령혼이 없다고 보았다. 그처럼 모바일 기기를 문학의 ‘적’으로 생각하는 부정적,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모바일 기기를 활용한 새로운 방식을 문학의 상실이라고 보면 더구나 안된다.   눈부신 통신수단의 발달과 미디어 외연의 확장과 더불어 문화와 예술의 패러다임은 바뀌고 있다. 전통 매체의 권위성과 독선이 희석화 되고 문학단체와 작가, 독자 등이 직접 미디어를 운영하고 작가, 독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들어섰다. 따라서 탈이데올로기, 문학과 예술의 대중화, 디지털화 등으로 바뀌여지는 오늘날의 문화풍토에서 전통문학의 책무가 더욱 절실하게 되였다.   이제 우리 문단도 주류문단과의 접목, 세계화로의 출두를 위해 다양하고 선진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세계 각지의 독자들에게 보다 손쉽게 조선족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블로그, 위챗계정에서 독자들과 만나는 전자작품은 시효성, 접근성, 범용성 등에서 큰 장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박봉을 털어 자비로 낸 종이책을 지인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고 보면, 시장류통이라는 환절이 탈락되고 책이 더욱 많은 독자군체와 대면할 수 없어 소통이 단절되였던 문단풍토에서 벗어나 문학이 새롭게 독자들과의 만남과 호성을 불러내는 기꺼운 변화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인터넷, 위챗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의 발랄한 운용은 아직도 오지, 변두리 문학에 머물러 있는 우리 문학의 광범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전통문학과 새로운 미디어의 어떤 종속관계에 신경을 도사리지 말고, 응당 적극적으로 쌍방향적이고 복합적인 새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변혁기의 필수적 변화는 형식의 쇄신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함으로 새로운 창작방식, 새로운 소재, 새로운 문체를 지니고 새로운 류통전략으로 새로워진 독자들의 미뢰(味蕾)와 만나야 한다.   작가와 독자들이 문학의 정체성 문제에 직면하고, 모든 것이 미디어로 환원되고 있는 오늘날, 작가는 이 모든 혼란에 미상불 대응해야 한다. 문학의 위기를 목메여 부르짖는 대신, 득달 같이 다가 온 기계혁명에 적극 부응할 때 그 것은 위상이 바닥에 내쳐진 우리의 문학을 새롭게 촉발시키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만이 갖고 있는 문화의 토속적인 정서와 력사의 중후한 무늬를 세상에 알리고자 오늘도 컴앞에서, 혹은 스마트폰을 들고 불면의 밤을 새우는 작가와 독자들이 미디어의 미래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가 소망해 본다.   "연변일보" 2018-09-06    
74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3 댓글:  조회:1699  추천:13  2017-11-22
  . 련작칼럼 .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김혁 공책 셋 “별”을 쏘다   모 잡지에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라는 인물칼럼을 련작한적 있다.  2년반 되게 련재한 칼럼은 조선족 수십명 인걸들의 생애를 사전형식으로 가나다라 순으로 짧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는 소전기물이다.  민족을 위해 커다란 족적을 남긴 기라성같은 별들을 헤아리는 작업에 기꺼이 투신하면서 아낌없이 산화해간 별들을 두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한면 그가운데 이름은 화려해도 아무런 빛도 내지 않은 암흑성(暗黑星)도 끼여있어 선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룡정의 명인들을 정리하면서 그러한 어려움은 곱배로 밀려왔다.  룡정에서 윤동주의 시대에 함께 족적을 남긴 저 유명한 동요 “반달”의 작곡자 윤극영, 녀류시인 모윤숙 모두가 친일의 혐의에서 여유롭지 못했기때문이였다.    윤극영은 1926년경  피아니스트 오인경과의 애정행각으로 서울에서 룡정으로 도피를 했다.  윤동주와 문익환이 다녔던 광명중학교등 학교들에서 음악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했다. 이후1940년에는 할빈에서 예술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룡정에서 간도성협화회(間島省協和會)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윤극영이 가담한 이른바 협화회는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협화회에는 조선인과 한족, 만주족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가담했는데, 이들의 역할은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서 만중을 선동하고 감시하는데 있었다. 고 박창욱 연변대학 교수는 일찍 "협화회(協和會)는 소위 민중조직이라고 하나, 사실은 비밀공작을 위한 특무조직이다. 협화회는 일반적인 만중조직인 동시에 내부에는 특무가 있는 것이다. 협화회의 선무반, 특별공작반 등은 완전히 일본군 토벌대와 같이 독립운동 세력을 토벌하는것이다."고 밝힌바 있다.    일본이 투항하자 1946년에 체포되여 3년형 선고를 받고 연길 감옥에서 복역중 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1950년대초 북경에서 조선족 음악인 김정평과 김철남이 윤극영의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했다. 노래는 근 30년간 애창되였으며 1979년 전국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였다.   윤극영이 협화회 책임자로서 적극적 친일을 한 경위는 90년대 조선족 소설가 고 류연산씨의 추적을 통해 속속 드러났다.   모윤숙은 1931년 리화녀전 영문과를 졸업했고 그해 친지의 주선으로 룡정에 있는 명신(明信)녀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바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과 나란히 이웃한 학교였다.   명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새긴 당신의 얼골을”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뒤 교사, 기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중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 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친일 강연을 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등에 친일 론설을 기고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론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녀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소년 학도병에게”,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등을 련달아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이 시기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로천명과 함께 문인중 가장 로골적인 친일파로 전락했다.   몇해 전 한국에서 펴낸 “친일파인물사전”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파의 정의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규정했다. 편찬자들은 친일파선정 원칙에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고 밝혔다.  높은 위치의 정계인사들뿐아니라 문화예술계의 이름이 쟁쟁한 인사들도 대량 포함되여 세간을 경악케 했다.    지난세기 30,40년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고 민족문학사가 실종된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였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물자를 수탈하고, 징용령을 만들어 조선인을 군인, 보국대, 로무자, 위안부로 징발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게 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조상이 준 이름을 일본식대로 뜯어고치게 했다.  그 마수는 문화예술계에도 미쳤다. 조선말로 된 유명 일간지며 문학지들을 폐간시켰고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 어용 문학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민족의 수난기에 안일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무릎 꿇은 문인들의 친일행위였다. 그동안 민족주의 작가로 주목받던 문단의 대표적 인사들이 대거 친일문학의 대렬에 끼여든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오명을 진 문학인들로는 신체시 “바다에게서 소년에게”로 민족시의 전환점을 지었던 시인 최남선, “화사집”, “귀촉도”등  탐미적인 시편들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것으로 평가되였던 시인 서정주,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감자”, “운현궁의 봄”의 저자 소설가 김동인… 등등이다.    그 전형으로 개화계몽기부터 1920년대까지 언제나 민족주의적인 립장에서 앞장 섰던 “무정”, “흙”의 작가 리광수를 들수있다. 리광수는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그 뛰여난 문필가의 기량을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글을 써내는데 허비했다. 남보다 앞서 꼭두 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인으로서의 본질과 껍데기까지 모조리 던져버리고 일본인으로 변종할”것을 공공연히 웨쳤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들을 선하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천황폐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자고 선동했다. 근시안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행태는 우리의 민족문학사에 치명적인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문단을 대표하고 민족의 지성을 상징한다는 이들이 하나 같이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칭송하고 “황군(皇军)”을 위해 비루한 붓을 들고있을때, 숭앙했던 문인들과 자기 학교의 교장마저 친일에 앞장설때 중국 동북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작은 촌부락에서 태여난 한 문학청년이 괴로움에 찬 시편“참회록” (忏悔录)을 내놓았다. 윤동주, 식민지시기 스물네살의 문학청년이 령혼의 잉크를 재워 각혈처럼 지었던 그 시작(诗作)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전률하게 만든다.   “참회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류학을 준비할 무렵에 쓴 시이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고백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각인해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원고의 하단 여백에는 도일(渡日), 시란? 문학, 생존, 생과 같은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절절한 락서들이 남아있다.    “…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굴욕, 치욕, 릉멸, 방황,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그때 그 시가 담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반성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      윤동주 "참회록" 육필고   그리고  2년 후 일본 도지샤대에 수학하던 윤동주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여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윤동주는 식민지체재에 동화될수도 저항할수도 없던 여리고 섬세한20대의 문학 청년이었다. 당시 그에게서 생의 출구는 막혀있고 현실은 랭혹하고 폭력적이며 미래는 어둡고 삶의 리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분렬을 거듭했다. 윤동주는 “나약”했고 “감성적”이였지만 감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주변부 식민지의 생활과 속악한 삶의 행태에 수치심을 느꼈다. 의지할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의 마음은 종국에는 때묻지않은 령혼의 시줄에 깃들었다.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고있는 정신적 바탕은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방관자적 립장에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뇌라 할수 있다. 그의 시의 중심적인 심상을 이루고있는 “부끄러움”은 이 같은 자기 반성과 고뇌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물론 당시는 극한의 식민지 현실에서 그 누구도 정상적인 문학을 할수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에 가장 먼저 민족문학의 전통과 자존을 지켜야할 문인들이 저항은 커녕 오히려 굴종과 어용과 변절로 민족문학사를 훼손한 친일행위에 민족사의 심각한 비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력사의 갈피에 지울수없는 오점으로 남은 이러한 문인들의 행태처럼 오늘 날에도 여전히 보잘 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에 매달려 권력과 리념과 공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문인들을 찾아볼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를 다시금 떠올려 보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윤동주, 그의 시를 읽을때마다 우리는 먹먹한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민족과 언어를 빼앗겼던 정말 암울하고 힘들었던 식민지 시대에 자아와 민족이 부재한 력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윤동주는 참회와 헌신의 신앙적 결의로 마침내 도래 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확신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시인의 고향의 하늘에 별은 오늘도 또렷하다. 그 밤 하늘을 쳐다보노라니 윤동주의 “달을 쏘다”라는 산문의 한 구절이 또록이 떠오른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곳곳한 나무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매어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오늘날 우리는 “보람처럼 풀이 무성한” 고향의 언덕배기에 잠든 시인을 더더욱 기리고 있으며 시인이 읊었던 별의 밝음과 어둠을 낱낱이 헤아리고 있다. 찬란한 별무리 속에 은닉(隱匿)해 있는 별 조차 낱낱이 헤여보다 “좀 탄탄한” 오안(五眼)의 빛을 “화살로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별”을 쏜다.    “도라지” 2017년 제5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73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2 댓글:  조회:1703  추천:20  2017-11-21
. 연작수필 .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김혁     공책 둘 간(肝)의 노래     남자들끼리 앉으면 간에 대한 화제가 많이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남성들이 녀성들 보다 간암 발병 위험이 7배나 높다고 하니 잦은 음주로 인한 간 질병에 대한 걱정으로 남성들 화제의 일순위에 오르는때가 많은것이다.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인 간은 복부의 오른쪽 웃쪽에 위치하는 내장기관으로 입을 통해 섭취돼 위장관에서 소화, 흡수되는 대부분의 물질들을 걸러낸다. 갑옷 떨쳐입고 칼과 창을 비껴들고 성문이나 궁문을 지키던 옛날의 무관들처럼 우리 몸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것이다. 뿐만아니라 영양분의 대사와 저장, 단백질과 지질의 합성, 면역 조절 등 정상적인 신체 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생화학적 대사 기능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고 저장하며 인체의 해로운 물질을 해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고마운 장기이다.      여기 간에 대해 읊은 시인이 있다. 윤동주,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는 시가 바로 “간”이다.   바다가 해빛 바른 바위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여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룡궁(龙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경성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에 쓴 작품으로 알려진 이 시는 두 개의 이질적인 설화를 결합하여 형상화하고있다.   시는 거북이의 꾀임에 빠져 간(肝)을 잃을뻔했던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우리민족의 “구토지설(龟兎之说)”과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어 신의 저주를 받고 매일 재생되는 간을 독수리로부터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희랍신화를 적절히 변용하면서 작품속에 투영시키고 있다.      윤동주는 궁지에 몰려서도 슬기롭게 자기의 “간”을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될수밖에 없었던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자신과 동일시하며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최근들어 한국 연세대 설성경교수가 윤동주의 시 “간”에 대해 저항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한국 고전소설의 난제를 해결해 온 전문가인 설교수는 "윤동주의 “간(肝)”에 형상화된 “프로메테우스 연구"를 출간하면서 이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는 "윤동주의 ‘간’이 저항시임을 외면한 채 그간의 연구자들은 시인이 희생적 모습을 묘사한것으로 오판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시 “간”은 윤동주 시인이 프로메테우스에 자신을 빗대여 식민지 시절 손상을 입은 량심의 회복 의지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돼 왔다. 하지만 설교수는 “오히려 “간”은 일제시대의 가장 저항적인 시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심판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설교수에 따르면 그동안 학계는 “간”의 핵심 시어인 “프로메테우스”를 희랍 신화의 영웅의 오기로 간주해 왔고 이를 토대로 마광수등 기존 학자들은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를 시적 자아인 윤동주의 상징으로 봤다. 순수성(불)을 상실(도적)한 시인 자신에 대한 비탄으로 해석한것이다.  그러나 설교수는 “프로메테우스의 의도적 변형을 통해 윤동주가 ‘가짜 영웅’ 일제의 패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인은 나라(불)를 빼앗고 착취(도적)한 일제에게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설 교수는 “이 표현은 기독교에서 지옥과 사탄을 이야기할때 사용했다”며 “시의 바탕에 기독교주의적인 민족주의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설교수는 특히 윤동주의 시가 다른 저항시보다 한수 우의 경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리륙사, 한용운등의 시에 등장한 저항은 아래에서 우로의 저항이고 세계문학의 모든 저항시들이 택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며 “하지만 이 시는 력사의 이름을 빌려 가짜 영웅을 내치는 심판시이자 동서양 신화의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한 시”라고 평가했다.   윤동주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의 련속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사라져 가는데 대해 내장이 상할만큼 맹독(猛毒)의 아픔을 느끼며 몸부림을 거듭했다. 그의 시편들은 비록 조용하고 어딘가 소극적으로 보기기도 하지만 실은 부끄러운 자아의 응시로부터 력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그 기저에 깊이 깔고 있다. 때문에 그에 대해 “저항시인”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시 “간”에 대한 새로운 해제 또한 이를 뒤받침해준는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속출하고있는 민족 공동체의 아픔과 그 위기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한채 신상의 작은 질병에 대한 걱정에나 전전긍긍하며 무사안일의 나날에 버릇된 현대인들에게 윤동주의 시 “간”을 한번 읊어보라 권장하고 싶다.    "도라지" 2017년 제5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72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1 댓글:  조회:1387  추천:15  2017-11-12
    . 연작수필 .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김혁     공책 하나   소울메이트     친구가 차를 뽑았다. 차 이름은 “소울”이였다. 가격이 너무 착해서, 차를 너무 갖고싶던차 이곳에서는 잘 알려지지않는 형의 차를 샀다고 했다. 그리고 중고차라 혀아래 소리로 굳이 밝히며 어딘가 자존심의 어깨가 쳐져있는 친구를 위로할겸 나는 우수개로 한마디 했다.   “중고가 좋아, 친숙해, 우리 사이도 이젠 중고가 됐잖아” 즐겁게 웃고나서 나는 차 이름의 “소울” 대신 다른 “소울”을 생각하고 있었다.        소울메이트는 령혼 (soul)과 동료 (mate)의 합성어로 서로 뜻이 잘맞는 사이를 지칭한다. 문학, 예술, 스포츠, 비즈니스 등 분야에서 큰 성공을 한 사람에게는 흔히 도타운 솔메이트의 존재가 있다.   그 일례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 괴테와 실러를 들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한 자극과 격려를 통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해나갔다.    두 예술가의 우정은 베토벤과도 이어졌다. 두 문호를 존경했고, 이들의 작품에 큰 령감을 받은 베토벤은 두 사람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소울메이트들끼리 단순한 우정을 넘어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을 유발시킨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또 한쌍의 유명한 소울메이트이다.    동생 테오는 괴퍅한 성격을 가진 형의 재능을 알았고 힘들게 번 돈으로 형을 위해 생계비를 대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고흐가 자살한 뒤, 애달픈 나머지 테오는 여섯달만에 형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형제의 묘는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에게도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바로 송몽규이다. 둘이는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 석달을 차이 두고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명동학교도,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함께 다녔다.   송몽규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자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여 자신의 작품에 날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둘은 또 경성의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했고 학교에서 함께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당시 “문우”에 실었던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그의 룡정자택 장례식에서 랑송되였다.   두 사람은 또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제경찰의 마수에 떨어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일제의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와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가족에서는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송몽규의 시신도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혔고 “청년문사(文士) 송몽규” 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 윤동주의 묘쇼곁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둘이는 묻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오늘날 윤동주는 겨례 시인으로 높이 추앙되였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오래전에 등단한 문사이자, 철저한 반일지사인 송몽규에 대해 아는이는 적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나눈 진정한 소울메이트였으니깐.   "도라지" 2017년 제5호     일본류학시절, 방학에 고향으로 돌아와 친지들과 사진을 남긴 윤동주(뒷줄 오른 쪽)와 송몽규(앞줄 가운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71    필끝에 건곤乾坤세상 있나니(련재1) 댓글:  조회:1610  추천:14  2017-08-03
필끝에 건곤乾坤세상 있나니(련재1)  -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김혁   수도에서 열리는 문학성회에 다녀왔다.   중국작가협회 제 9 차 전국작가대표대회가 2016 년 11 월 30 일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개막 식을 시작으로 성황리에 열렸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대표단은 연변작가협회 최국철주석을 비롯해 장계신, 정봉숙, 김 혁, 김영건, 김홍란, 채시봉 등 조선족작가와 문화계 사업일군들이 대표로 선정되여 참석했다.   습근평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대회 개막식에 출석한 가운데 중국 각지의 문학계 엘리 트들이 참석한 대회는 제8차 중국작가협회의 사업보고를 심의채택하고 “중국작가협회 규정”을 수정하였으며 철응을 주석으로 한 중국작가협회 차기 지도기구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12 월 3 일에 페막, 5 박 6 일간의 대회일정을 원만히 마치고 대표들은 귀환했다. 10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글밭만 경운해온 작가로서 중국대륙의 문학계를 대표하는 기 라성 같은 거장, 엘리트들이 운집한 전국작가대표대회에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게 된것을 행 운과 자호감으로 생각한다.   20 여년전부터 전국청년작가회의 등 전국적인 문화행사에 적지 않게 다녀왔다. 하지만 이 번의 성회는 여느때와는 또 다른 농도와 줄기의 계시와 감수를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회의기 간 나는 매일 휴대폰으로 간명하나마 그날그날의 수감을 일지로 적어 위챗에 올리고 나의 문 학블로그에도 올렸다.   스모그로 몸살하던 북경이였지만 그 며칠만은 초동 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의 련속이였다.   그처럼 “가슴속에 대의를 품고 마음속에 대중을 담아야 하며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필 끝아래 건곤을 적어내리기를 바란다(胸中有大义、心里有人民、肩头有责任、笔下有乾坤).” 라는 회의의 주제문구는 작가들의 마음벽을 울려주고 우리 문학의 화창한 봄날을 제시하는듯 했다. 성회에서 받은 감수와 사색을 편단으로나마 테마별 적어본다.    자신감을 소환하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1)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옥색 저고리우에 감색 마고자를 받쳐입었다. 헌활하게 통이 트인 바지를 떨쳐입고 발목에 대님을 조여 고풍스러운 멋을 강조했다. 저고리의 섶이 약간 들린 품이 나래를 펼치려는 학의 그것과도 같다. 간결함과 섬세함이 매치된 선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그려낸다. 오방색 수공의 옷은 단아하고 아취가 있다. 마음은 싱그럽고 발길도 가벼워 건들건들 걸으니 자신감이 그윽하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한복이다.   전국작가대표대회 개막식이 열리던 날 아침, 나는 참말로 오랜만에 한복을 떨쳐입고 나섰 다. 15 억인구중 민족을 대표하는 소수민족 작가로 선정된 기쁨으로 처음 민족복장을 맞추어 입었다.   역시 한복을 떨쳐입고 나선 녀성대표들인 김홍란, 정봉숙 역시 여느때보다 청초한 모습이 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기자들의 카메라의 앵글이 우리 복장이 주는 운치에 맞추어져있었 다.   연변대표단의 대표들은 인민대회당의 가장 현요한 앞자리에 자리배당이 되여있었다. 우리는 부풀은 한복처럼 한껏 부풀은 마음으로 총서기와 중앙의 지도자들, 전국 각지에서 온 민족작가들과 만났다.   개막식에서 한, 총서기의 예술변증법과 과학정신으로 일관된 강화는 새로운 문화리념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었다. 관점의 밀도가 농후하고 새로운 용어로 가득한 그 강화에서 몇줄을 임의로 뽑아내도 느낀바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문화자신감”이라는 용어를 나는 정중하게 뽑아보았다.    “문화자신감은 기초로 되고 더 광범위하고 심후한 자신감으로 되여야 하며 기본으로 되고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합니다. 문화적자신감을 갖는것은 국운의 흥망성쇠와 관련되며 문화의 안전, 민족정신의 독립성에 관련되는 큰 문제입니다. 문화자신감이 없이는 골기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풍채가 보이는 작품을 써낼수 없습니다.”   자신감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렇게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기는 근년 들어 처음이였다. 우리 는 언제부턴가 자신감이라는 이 단어를 잊고있었다. 잃어버리고있었다.   근년래 중국조선족은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서 부침해오고있으며 따라서 “위기론”, “비관 론”도 머리를 쳐들고있다.   도시진출, 출국붐에 잇달아 가꾸며 살던 터전이 비여지고 인구가 마이나스성장률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기록하고 학교들이 줄줄이 페교되고 독서인구가 급락되고 잡지사와 출판사가 불황을 겪는 악순환이 지속되여왔다. 그에 따라 작가들은 바닥까지 실추된 문학의 위상에 설 자리를 잃고 방황과 고민을 거듭하고있다.   그리고 조선족작가들은 전국 여러 도시에서 가장 낮은 최악의 고료를 받고있다. 물론 “오 두미배요(五斗米拜腰)” 즉 쌀과 돈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것을 작가들의 지조로 알고있지만 작 가들에게 문학은 먹고 살아나갈 삶의 방편이 못되였다.   이렇게 위축의 일로를 걷고있는 사회상을 바라보며 작가들에게 자신감이란 운운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근년래 우리의 문학계는 조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수 있었다. 그 감지는 독자층과 문학애호가들로부터 왔다. 미약하나마 독자와 문학애호가들이 전에 비해 상당히 붇고있음을 놀라웁게 발견할수 있었다. 시가지들에서 단지 커피나 음료를 팔던 청일색의 다방, 까페들로부터 책을 읽을수 있는 북카페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민간에서 “책읽 기 동아리”가 하나 둘 속출하고있다.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조직하는 문학강습반도 몇해전에는 참가수가 너무 적어서 개강을 하지 못한적도 있었지만 올해는 신청자가 넘쳐나서 그 인원을 제한하기 까지 했다.   해외문화와의 충돌로부터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 소실되여가는 민족언어에 대한 우려, 출 국인원들의 귀향후 재정착에 대한 고민 등등에서 유발된 사고, 개개인의 노력을 수반으로 한 생활수준의 제고와 질적인 삶의 변화, 경제가 발전한 선진국의 수준 높은 문화생활에서 배운 지식들이 이러한 변화를 촉구한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이로써 책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인생 에서의 지식경영의 중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다시금 책을 들고있는것이다.   비록 아직은 작은 파문에 불과할터이지만 이제 좀더 큰 이랑을 이루기 시작한다면 이는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파고(波高)의 높이가 아닐수 없 다.   주지하다싶이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령혼이다. 문화생명력에 대한 신심은 리성인식에 서의 고도로 성숙된 정신적인 면모라 할수 있다. 할진대 문화의 자신감은 그 혼의 기초로 되 여야 하며 광범위하게 더 깊게 더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하는것이다. 이러한 문화자신감으 로서 자신의 작품의 품위를 높이고 력사사명감을 자각하고 심령을 정화하고 민족의 인문소양 을 높여야 한다.   여기서 바로 원견과 지명의 “자신감”이 소요된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보조를 흐트리지 않으며 나아가야 한다. 발에 채이는 비관의 돌덩어리들을 치우면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앞으로 형성될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서 그 립지를 강 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것이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변강소수민족이라는 특유의 위치와 특수 한 문화환경을 용유(拥有)하고있다. 우리 중국조선족공동체는 조선반도 문화와 중국 문화의 사 이에 있는 변연문화의 특징을 지니고있다.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로 인해 새 로운 문화요소를 창출할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적기능을 나타 낼수 있다.   거기에 한국과 조선 두 나라 가운데 끼여있는 조선반도에서의 민족의 교두보 역할도 무시 못한다. 이러한 민족적우세를 도약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족 공동체사회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중국과 조선반도간의 교류, 협력에 필히 긍정적 인 역할을 미칠것이고 중국과 조선반도간 광범위한 교류의 진일보는 동북아 국제협력이라는 중국의 대동북아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전략 의 구축과 실행 과정은 정부의 직접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그 와중에 정부에서 소수민족에 게 돌려지는 점점 더 원활해지고있는 무양한 특혜도 우리는 적극 활용할줄 알아야 한다. 현정세에 대한 바른 리해를 토대로 자신의 립장과 토대를 굳건히 설정해나가면서 우리의 오래된 가치관에 자신감을 덧입히고 그것을 미래 지향적인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것이 우리 제반 분야의 바탕이 되도록 하여 우리의 얼을 살려야 한다. 그러한 저력이 근로용 감한 우리의 문화전통에 잠재하고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것이다.   목전의 진통을 극복하면서 모색속에 새로운 대안을 찾는 험준한 과정에 비관을 엎누르는 자신감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때이다. 대회의 개막식과 페막식에서 초겨울의 추위도 무릅쓰고 우리는 한복을 입고 북경의 장안 가, 인민대회당앞 광장에서 포토타임을 가졌다. 외성의 대표들과 매체 기자들이 다투어 우리들의 현란한 색조를 향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 추었다. 우리 복장의 단아함과 민족작가로서의 자호감 머금은 자세에 타성의 대표들과 행인들 이 찬탄의 소리를 보냈다. 소슬한 겨울바람이 한복의 자락을 스치나 우리는 모두다 상기된 얼굴, 더워나는 가슴을 느꼈다. 그야말로 자신감을 소환해본 시간이였다.   문호들의 고향 - 관씨, “마”씨 그리고 최씨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2)   대회기간 문단의 거목,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가까이할수 있다는건 아직도 문학도의 초심 과 정열을 온곱게 갈무리하고있는 나에게는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회의장에서, 이동하는 셔틀 뻐스에서, 호텔 로비에서, 지어 엘레베터속에서도 마음속 우상들과 꿈결처럼 만날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막언선생과 함께 할수 있은건 크낙한 기쁨이였다. 나는 80 년대중기 막언의 출세작 “붉은 수수”를 스크린에서 본 뒤로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해 읽었고 영화, 드라마로 각색된 영상물도 모두다 갖출 정도로 그의 “골수팬”이다. “백구 그네대(白狗秋千架)”와 같은 그의 단편소설을 조선말로 번역했었고 언감 평문도 달아보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 랑보(朗報) 가 터져오르자 곧 평론, 대담, 칼럼, 방송 등 다쟝르를 동원해 그의 작품들을 조선족독자들에 게 소개하기도 했었다.   나는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작품에 대해 소개해드리면서 그이와 합영도 하고 회의노트에 싸인도 받았다.   노벨문학상 계관을 쓴 문호임에도 막언선생은 차림새가 지극히 소박했고 말수 또한 적었 다. “고향이 어디지요?” 사진을 남기고싶다는 간청에 흔쾌히 카메라, 휴대폰앞에 서면서 문호는 나지막한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연변입니다, 조선족작가입니다” 그 몇마디뿐이였다.   막언의 본명은 관모업(管谟业), 필명인 막언은 “말이 없다”라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시종 과언(寡言)이였다. 그저 합영이나 싸인을 청하는 문학팬들에게 인자한 흙좌불(坐佛)처럼 소리없는 미소로 화답하곤 했다.   호텔로 돌아와 흥분을 곰삭이노라니 그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음이 왠지 막중하게 떠올랐 다. “고향이 어디지요?” 나는 은연중 고향이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고있었다.   막언 소설의 또렷한 특점이라면 거의 모든 작품마다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펼 쳐나간다. 그리고 다작의 그의 작품속에는 어김없이 “동북 고밀향(高密)”이라는 고향이 등장한 다. 시간적배경은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이고 공간적 배경은 자신의 고향을 문학적으로 확장한 “고밀향”이다. 그의 작품속에서 중국의 대약진운동, 반우파투쟁, 문 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굵직굵직한 력사적사건들을 배경으로 민담과 습속의 화려한 색채를 입 은 “고밀 동북향”의 이야기들이 줄레줄레 펼쳐진다.   막언은 일찍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향은 아주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라고 고백했었다. 그는 “소설속의 고향은 실제 고향과는 좀 다르지만 그 소설속 고향에는 나의 리념, 사상, 상상 력이 부과돼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민속예술과 민속문화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고향에서 목격한 문화적요소들에 영향을 받았다.”며 “창작을 위해 펜을 들었을 때 고향이 불가 결하게 내 소설에 스며들어 영향을 줬고 문학스타일을 결정했다”고 력점을 찍어 말했다.   30 년 넘게 왕성하게 글을 써왔지만 그의 창작의 안목은 여전히 낡은 치벽지인 고향 고밀 향에 머물러 고향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과 그 력동성을 낡지 않게 그려내고있다. 고향인 “고밀향”을 대상으로 중국적인 력사와 삶의 가치문제에 천착해오고있는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 에는 이렇게 고향으로 징표되는 민간의 립장과 시선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민속이 그려 져있다. 이는 바로 막언 문학의 핵심적요소이다.    1981 년 단편소설 “봄밤에 내리는 소나기”로 등단한 이래 “고밀향”이 단순히 고향이란 의 미를 넘어 막언 창작의 밑그림과 같은 문학적공간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최근작 《개구리》 에 이르기까지 막언의 거의 모든 소설은 “고밀향”에서 진행되거나 그것을 기초로 한 가상공간 에서 펼쳐진다.   “제 소설속 고향은 이미 문학적인 개념입니다. 실제 지명을 기초로 하였지만 허구의 공간 으로 확장된것이죠.” 막언은 북경에 거주하면서 문학행사와 해외에 다니는 일이 잦지만 창작에 집중할 때는 수 수가 붉게 익어가는 고향에 내려간다고 한다.   막언은 중국의 전통이라는 씨줄과 창작이라는 날줄을 엮어 그 매듭의 지점에서 “고밀 동 북향”을 발견했다. 고향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속에서 이루 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이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그 원초적공간과 근대적변화라는 력 사공간을 마주세우고 겹치면서 성찰의 주추돌을 쌓는다. 따라서 막언은 “중국적인것을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불린다.   막언은 “내 작품들은 세계문학의 일부인 중국문학이고 중국인의 삶과 중국의 독특한 문화 및 민속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내 소설들은 지역과 종족을 넘어선다”고 설명했다. 막언은 고향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라렬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마술적(魔幻) 리얼리즘”을 가미해 작품을 “촌스러움”에서 해방시킨다. 그렇게 재구성한 작가의 작품은 극히 다채롭다. 사실적이지만 풍자적이며 때로 잔혹하다가 문뜩 환상적이고 몽상적이여서 타의추종 을 불허하는 나름의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막언이 자신의 독특한 문 체로 고향이라는 이 협애한 향토적개념을 초월하려 시도한것이다. 그 개념은 좁게는 고향에서 비롯된것이지만 넓게는 중국의 농경문화, 더 넓게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비롯된것인데 여기서 그의 작품의 거대한 스타일과 깊이를 감지할수 있다.   막언은 일찍부터 남미의 마술적사실주의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남미의 문호 마르케스에게서 막언은 의식류소설의 시공간의 처리수법과 “마환현실주의” 소설의 구조 방식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막언에 대해 지칭할 때 “중국의 마르케스”로 통하며 그의 작품들은 “중국적인 ‘마술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정평을 받는다. 일관된 창작태도, 민족적인 토양과 그에서 삶을 영위하고있는 인간들의 령혼상태에 대한 탐색, 예술형식에서의 락오를 허용치 않는 쉼 모르는 실험정신, 그러한 큰 그릇에 담겨져있는 사회의 통증과 인간의 삶에 대한 천착,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고난속 에서도 결코 놓지 않는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 이러한 요소들이 바로 중국 인들의 오래동안의 숙원을 이룩하면서 막언이 노벨문학상의 견고한 대문을 드디여 열어젖히게 된 중요한 요소라 하겠다.   막언이 심취되였고 그의 창작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남미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 품에서도 고향은 앵콜 레파토리처럼 거듭 나온다.   막언보다 30 년 먼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20 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중 한명”으로 자리매김되고있다. 《백년고독》, 《콜레라시대의 사랑》 등 명작을 남긴 그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현대소설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마술적리얼리즘”의 창시자로서 그가 현대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마르케스는 1927 년 봄, 콜롬비아 북부의 작은 해안마을에서 태여났다. 생계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부모님과 떨어져 8 살때까지 외할머니 슬하에서 살았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환 상적인 이야기들은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됐다.   그의 고향은 적도의 해빛이 격렬하게 정수리를 비추는 곳, 악사들이 손풍금과 기타로 흥 겹고 강렬한 리듬의 “바예나토(Vallenato)”을 튕겨내는 곳이다.   외할머니가 들려준 콜롬비아의 력사, 온갖 신기하고 기괴한 이야기들은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중남미 력사를 그려낸 그의 대표작 《백년고독》의 바탕으로 되였다. 그의 소설속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 이름은 외가에서 기차로 10 분 거리에 있는 바나나농장 이름 에서 따온것이라 한다.   첫 소설이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뒤 작가로서 좌절에 빠졌던 그는 기자로서 먼저 두각 을 드러냈다. 유럽 특파원으로 발령되였고 반평생을 타향에서 떠돌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해했 다. 기자로서의 경험과 그의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이 뒤얽혀 라틴아메리카의 력사와 원시 토 착신화를 결합한 “마술적리얼리즘”이라는 특이한 쟝르를 낳았다.   그렇게 창작된 작품들은 남미뿐만아니라 미국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드디여 1967 년 발표한 《백년고독》으로 1982 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3 년뒤 내놓은 《콜레라시대의 사랑》 역시 세계 35 개국 언어로 번역돼 5000 만부가 팔려나가고 영 화로 각색되며 전작에 못지 않은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민초들의 사랑과 애환을 담은 그의 고향은 사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끝없이 중첩되는 《백년고독》과 같은 서사구조를 가지고있다”며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그의 고향 열대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빚어낸것”이라고 말했다.    마르케스가 들으며 자랐던 “바예나토” 음악은 민담이나 사랑이야기를 빠른 템포로 구연口 演하듯 부르는“옛날옛날에”로 시작한다고 한다. 동네방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아주 자연스러 운 말투로 랩 같이 리듬있게 전개해나간다.   고향은 마르케스에게서 “옛날옛적에”로 운을 떼는 오래된 음악과 같은 마술적리얼리즘의 원형이였다. 마르케스는 력사와 생활의 관찰자로서 우리앞에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그 필법속에 그가 마법처럼 부린 환상의 세계는 무한한 진실로 통하는 문을 거쳐 다 달은 고향이였다.   막언에게 동북 “고밀향”의 이야기가 있고 마르케스에게 “마콘도”의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 에게는 “남대천”의 이야기가 있다.   이번 전국작가대표대회에 연변작가대표단을 휘동하고 나선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소 설가의 작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짚어볼수 있다.   최국철의 이미지와 련관지어 기억들을 끄집어낸다면 그 기억들은 그의 소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남대천”과 직결되여있다. 최국철소설가의 3부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20여부의 중단 편소설들은 모두다 남대천을 무대로 그려진것이다.   조선족문단의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최국철소설가는 지난 60년대 바로 이곳 남대촌에서 5 남매의 맏이로 태여났다. 소설가의 필끝에 고향이 많이 묘사되였지만 이제 고향 남대촌을 말할라치면 막상 소설가를 빼놓을수 없을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고향의 하늘과 땅은 가장 근원적인 령혼의 장소이고 소설적인 발견, 흥분점이 무진장하게 깃들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고로 고향은 남녀간의 사랑주제만큼 지속 적이고 영구적으로 격조높게 그려져온것이다”고 소설가는 말한다.   최국철소설가네 남대천은 “마을 외곽에는 토벽자리가 황페하게 남아있었고 그 토벽우로 헌 삿자리, 낡은 고무신짝들이 걸려서 스산한 풍경을 자랑하는, 토벽아래로 호성하가 소오줌 같이 지줄거리는, 비가 한줄금만 내려도 황토길이 질척거리고 안해가 없이 살아도 장화가 없 으면 못산다는, 외눈박이 개딸년도 주기 싫어하는 빈한한 마을”이였다.   “찰떡처럼 찰진 황토땅, 그것은 내 고향의 슬픈 표상이다.”고 소설가는 말한다. 이런 동네에서 소설가는 “석탄을 주으며 가난을 알았고, 새차꼬를 놓아 참새와 메새를 잡 으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소똥을 차고 지저분한 마을길을 오르내리며 문학청년의 꿈을 키웠다.”   나날이 문학수련을 거쳐 점차 완숙하게 벼려진 그의 필끝아래 고향의 정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윽한 민속화처럼 그려진다.    그의 필아래 그려지는 고향은- “모내기철이면 이랴 끌끌 나래를 놓고 점심이면 두렁밑에서 캔 미나리에 벌건 고추와 식 초를 팍팍 무쳐 술안주로 해서 아버지와 동생들과 마주앉아 재미있게 술을 마시는”, “호미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들방초가 우거진 석골개천에 숨어들어 홀랑 벗고 저 락저락 물을 끼얹고는”, “해거름녘이면 앞마당에 짚멍석을 깔고앉아 늙은 어머니가 버들조리에 쪄주는 가지와 풋 고추, 깨잎을 맛나게 먹으며 검푸른 잎을 이들거리며 우긋이 자라오른 강냉이와 처마사이에서 집을 짓는 거미를 재미있게 구경”하는, “장마비에 기세가 오른 버들숲에서 그윽그윽 간신히 톺는 황소의 영각소리, 온갖 풀벌레 소리도 가만히 들”리는, “헐어서 바늘로 꿰맨 코신을 겨우 끌고 마당에 나선 조모가 앞마당의 곰삭은 나무바자를 짚고 서서 서산에서 후르르 달려 내려오는 가을 저녁바람에 흰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단풍이 깊어가는구나’ 하며 서글픈 탄식을 하던”, “두만강에 황어가 거슬러오를 때 콩의 떡잎부터 먼저 들고 다시 차례로 산으로 오르고 나 무잎에 옮겨타면서 단풍이 드는”, “입안에 착착 감겨드는 찰옥수수죽에 하얀 무우동치미를 얹어 게걸스레 먹어”대다가, “추위에 얼어빠진 달이 구름사이로 어망치망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남대천에서 쩡쩡 얼음이 갈라터지는 소리를 듣는” 그런 곳이다.   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독보적인 문체로 풍경이면 풍경, 인물이면 인물, 풍속이면 풍속, 정서면 정서를 어렸을적 모두가 보고 겪었던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는 솜씨는 실로 경탄을 자아낸다.   모던한 기교도, 화려한 장식적인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그의 붓 터치는 때로는 크고 툽상 스러운 륜곽선으로, 때로는 세세한 국부로 삶의 순간을 굵은 결의 캔버스에 봉선화 물들듯이 정감스레 옮겨내고있다.   그야말로 최국철만의 미덕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며 최국철이기에 가능한 그만의 감성과 력 량이다. 최국철 소설의 미학은 바로 고향 내지 자연이 지닌 의미성을 천착해내는것이다. 그것 속에 그의 인생관과 나름의 철학을 투영화시킨다. 이는 호방하면서도 온유한 성격의 그가 살 아온 삶 그 자체였다. 그 삶이 거짓말 못하는 어린애의 순진한 대답처럼 서사적으로 표현되고 어릴적으로부터 싹터온 강한 호기심과 적극적 삶에의 용기로 작품속에서도 그의 성정만큼이 나 깊고 강하게 나타난다.   최국철소설가가 단절된 고향의 풍경속에서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을 추겨준 작품을 량산하면서 고향의 자연풍경을 문학적인 예술공간에 복원하는데 성공할수 있었던것은 고향에 대한 그의 남다른 정감과 향수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토속적인 방언으로 다시 빚어낸 너스레, 투박함, 감칠맛이 혼재되여있는 조어(造語)들의 련금술적인 효과덕도 톡톡히 입었던때문이 아닐가싶다.   “고향은 나에게 고향 자체만은 아니다. 그것은 끈끈한 민족의 삶이 적취된 터전이다. 그 원천적인 터전을 등지면 민족작가에게는 보람이 없고 문학사상을 운운할수 없다.”고 작가는 적고있다.   최국철소설가의 고향 남대천에 대한 사랑은 나이가 들어도, 삶의 터전이 시가지로 옮겨도 변하지 않고있다. 고향 남대천은 그에게 피와 살을 준 곳임과 함께 그에게 령혼을 부여하고 작가적인 삶을 영위하게 해준 자궁이자 요람이였다.   한 작가의 성장과정에 지배적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환경과 작가의 의식세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토대가 곧 고향이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고향 남대천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해 늘 향수에 젖어있고 그 향수는 진한 사념의 절주가 되여 키보드장단속에 가락 맞는 고향타령 을 두다려대고있는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현대인들에게는 “고향”이라는 단어조차도 낯설어지고있는듯하다. 작가들은 저마다 피페화되여가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고향의 상실이라는 문제는 현대인 들의 심리속에도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자아를 잃고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리유의 하나가 되기도 하는것이다. 이제 새로이 태여날 세대에게 고향의 문제를 어떻 게 일깨워줄것인지 우리의 문학은 그것을 새롭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였다고 하겠다.   문학작품에서 고향은 작품의 줄거리를 동반한 정서로 미화되거나 작품의 후경으로 보조역 할을 한다. 작중인물에게 고향이 차지하는 심리적배경도 큰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문학작품에 드러난 공간과 배경의 의미는 작품 연구와 구분해서 다룰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 고있다.   현대인들은 물리적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상실했을뿐만아니라 인류의 근원적인 고향으로서 의 심적공간도 상실해가고있는 현실이다. 그 점에서도 우리 문학속에서의 고향의 의미에 대하 여 검토해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것이다.   세상은 넓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반드시 그곳이여야만 했던 문호들의 문학적 본향, 그 곳의 어제와 오늘, 그속 인간 존재들의 속됨과 아름다움, 우환과 희망을 망라하는 그곳만의 이 야기가 파노라마로 펼쳐지기에 독자들의 향수와 더불어 그 작품은 명저의 반렬에 오를수 있은 것이 아닐가!   이 한 면에서 관씨, “마”씨, 최씨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지 않냐고 스모그가 자욱한 수부에서 고향의 파란 하늘을 그리며 새삼스러운 향수 한자락 머금어보았다.   쟝르, “낭떠러지”에서 “바람소리”를 듣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3)   대회기간 연변작가협회대표단은 절강성대표단, 중경대표단과 분조토론(分组讨论)을 함께 하기로 배치되여있었다. 그중 절강성대표단의 명단을 본 나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터뜨렸다. 그 명단속에 소설가 맥가(麦家)가 우리와 같은 조에 있었던것이다.   작가대표대회에 오기전까지도 나는 마침 맥가의 소설 《칼날刀尖우를 걷다》를 읽고있었다. 맥가는 그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영화 “바람소리”를 보면서 홀딱 반하게 되였다.   주신, 황효명, 리빙빙, 장함여, 소유붕 등 중국대륙과 대만의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영 화는 원체 영화광인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후 원작을 찾아 읽으며 그의 작품에 홀딱 빠져 한부, 두부 그의 모든 작품을 소장하고 읽고있다.   《바람소리(风声)》는 2 차대전시기 일본의 침략에 맞서 활동했던 중국 스파이들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1942 년, 일본군은 “유령”이라 불리는 정보부 내부의 첩자를 잡아내기 위해 가짜 암호를 내보내고 암호에 접근할수 있었던 5 명의 중국 내부요원을 외딴섬에 감금한다. 한명씩 차례로 고문과 회유를 통해 심문하지만 끝끝내 첩자를 잡아내지 못한다.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원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속에 침략자 일본과 그에 맞선 중국 엘리트들사이의 두뇌싸움이라는 심리 스릴러를 흥미 진진하게 풀어가고있다.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속에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대의명분과 우정 과 배신으로 얽힌 개인적인 감정이 교차되면서 놀라운 감동을 선사한다.   맥가의 출현은 문학계에 작지 않은 충격을 불러왔다. 그의 소설은 쟝르문학과 본격문학의 중간쯤에서 흥미있는 스토리를 박진감 있게 엮어나가는 품이 기존소설의 문법을 확연하게 뛰 여넘는다. 그의 작품을 첩보소설, 추리소설의 형태로 귀납할수 있지만 암호의 고안과 파해, 신 비한 직업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소재로 한 작품구성에 만족하지 않고 맥가는 이 신비로운 세 계속의 개인의 생존상태에 더욱 주목한다. 이것이 곧 그의 작품이 추리소설이나 정탐소설보다 초월적인 품격을 갖춘 품격의 높이이다. 맥가는 이제 순 문학의 리념과 쟝르소설을 가장 훌 륭하게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전범으로 자리매김되였다.   해외 주요 언론들에서도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작가 탐방기사를 장문으로 실었고 《월스트리트저널》이나 《옵서버》 같은 주류 매체에서 “가독성과 문학성이 뛰여나다”고 호평했다.   한 문학잡지는 “1980~1990 년대의 막언, 여화, 소동, 왕안억 이후 단 한명을 꼽으라면 바 로 맥가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대회기간 여러 쟝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또 한분의 작가를 만날수 있었다.   지난해 우리 문단의 최고액의 상인 “단군문학상”을 수상한 전용선소설가였다. 흑룡강대표 단으로 온 전용선은 인민대회당에서 특별히 연변대표단의 좌석을 찾아와 우리와 악수를 나누 고 담소를 나누었다.   전용선은 1966 년 흑룡강성 가목사에서 태여났다. 북대황문공단 창작원, 《삼강석간》신문 사 기자로 근무했고 중한수교 이전 한국 파주의 한 공장에서 힘든 고역을 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이후 34세가 되던 해 꿈을 안고 북경에 올라온 그는 로신문학원과 북경영화학원에서 공부 하며 비로소 작가로서의 길을 내딛게 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중편소설 “흰 태양 붉은 태양”, 장편소설 《독신자》, 소설집 《소화 18 년 (昭和十八年)》 등이 있다. 드라마창작에도 매진하여 “세월”, “눈속의 승냥이(雪狼)”, “어머니” 등 드라마를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첩보드라마 “낭떠러지”로 드디여 중국문단에 크게 문명을 떨친것이다.   요즘 TV 채널을 열면 온통 첩보드라마 열풍이다. 몇해전 첩보드라마 “잠복(潜伏)”이 공전 의 히트를 해 묵직한 상도 받았고 조선에까지 수출되여 인기리에 방영되였다. “중국드라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린 드라마의 시작”이라고 관객과 전문가들은 첩보드라마의 출현을 반겼 다.   그를 선두로 몇해간 중국의 거의 모든 채널에서는 다투어 첩보드라마 열풍이 일었는데 가 히 토네이도 급이다. 주요 방송국에서 황금시간대에 방영된 드라마 200 여편중 항일전쟁드라마 가 70 편 넘게 차지했는데 그중 과반수가 첩보드라마이다. 지난해 절강성의 유명한 드라마 촬 영지인 횡점(横店)스튜디오에서는 동시에 50 작품이나 되는 항일전쟁드라마가 촬영되였는데 일 본군 배역을 도맡다싶이하는 한 전문 배우는 최대 하루에 10 여번이나 죽는 장면을 찍었다는 후문이다.   이 활기찬 항일전쟁드라마, 첩보드라마의 배후에는 성숙한 영업, 판매 생산 라인과 정의의 애국이라는 정서와 무대가 뒤받침하고있다. 그것은 문화의 트렌드와 자본의 추구로 인해서 생겨난 산물인 동시에 중국인들의 항일전쟁시기에 대한 특수한 정감과 력사관에서 유래한것으 로 단순한 오락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드라마 작품들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량산된 드라마중에는 단순한 열풍에 편승한 싸구려수준의 드라마가 란무하 였고 수작이란 몇부밖에 되지 않았다. 그 수작들중에서도 장가락으로 솟아오른 작품은 단연 전용선의 “낭떠러지(悬崖)”가 아닐가 생각한다.   드라마는 일본의 침략과 국민당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공산당의 특공인원 주을(周乙)의 활 약을 시종 팽팽한 긴장감속에 사랑과 증오, 음모와 배신을 현념과 액션을 곁들인 프레임으로 그려내고있다. 여느 드라마에 비해 총격전이나 동작씬 같은것이 적고 미녀들의 선정적인 유혹 도 없지만 30 여집 내내 마음 졸이며 보게 하는 영화, 극작가가 심혈을 쏟아부은 탄탄한 스토 리와 주연들의 웅숭깊은 연기가 돋보인 드라마이다.   “낭떠러지”는 “제 18 회 상해 TV 페스티벌”에서 “최우수드라마 작가상”을 수상했고 이밖 에 “최우수작품상”, “녀우주연상” 등을 휩쓸며 그해 중국 최고의 드라마로 선정됐다.   “낭떠러지”는 전용선의 장편소설 《호바트거리(霍尔瓦特大街)》를 개편한 작품이다. 2012 년 1 월부터 상해동방위성 TV, 흑룡강위성 TV, 천진위성 TV 에서 동시에 저녁황금시간대에 방영 했다. 상영 3 일만에 관객들의 열띤 론의를 불러일으켰고 시청률은 으뜸을 차지했으며 시장점 유률은 새해 대형드라마가운데서 최고에 달했다. 이에 중앙 TV 제 1 프로에서 인차 황금시간대 에 방송을 했고 중앙 TV 종합프로에서도 뒤이어 역시 황금시간대에 재차 방송했다.   드라마가 방영된후 중국 TV 예술위원회에서 “낭떠러지”에 대한 연구토론회를 조직했다. 회 의에서는 근간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듯 식상함을 보이고있는 첩보전드라마창작에 있어서 “낭 떠러지”는 “하나의 좋은 돌파구를 제시했다”, “슈제트로 승부한것보다는 인물, 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인물의 내심세계와 세부의 진실로 승부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사실 우리 문단에서 전용선을 극구 알린 장본인은 필자라고 감히 말해본다. 필자는 전용 선의 씨나리오 “낭떠러지”와 그 본인을 소개하는 글들을 수차 여러 간행물과 웹사이트에 실었 고 그의 《소화 18 년》, 《한사(恨事)》 등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그의 대표작인 “낭떠러지”를 DVD 물로 여러부 구입해 동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가 “단군문학상”에 입상되자 평심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기뻐했던 나였다. 내가 그에게 흠뻑 빠진 또 다른 원인은 중국의 주류문단과 드라마계에 진출하여 모두를 놀래운 그가 다름아닌 조선족이라는 동질성 어린 정감에도 있었다.   전용선은 근래 출간문의가 비발치는 이 미완의 장편소설 《호바트거리》를 완수하여 드라 마에서의 아쉬운 점을 보완하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늘로 치솟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단에서 맥가 그리고 전용선의 작품들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그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맥가의 작품 《바람소리》가 제 6 회 중국어문학미디어 대상을, 《해밀(解密)》이 국가도서 상을, 《암산(暗算)》이 심지어 제 7 회 모순문학상이라는 중국문단 최고의 상들을 수상했음에도 그를 모른다.   바로 이들이 추리문학이라는 특정된 소재를 다룬다는 쟝르적특성때문이 아닌가싶다. 우리 문단에서 추리소설은 찬반론이 심하게 엇갈리는 쟝르이다.   그럼에도 일찍 80 년대에 우리 주변에서는 이미 추리소설 열독붐이 일었다. 당시 일본작가 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 한국작가로는 김성종 그리고 미국작가로는 시드니 쉴던(西德尼·谢尔 顿)의 작품들이 거의 서점가를 독점하다싶이 했다. 그리고 애거서·크리스티(阿加莎·克里斯蒂)의 추리소설을 각색한 영화 “나일강 살인사건(尼罗河上的惨案)”과 “동방특급렬차 살인사건(东方 快车谋杀案)”이 중국말로 더빙되여 나와 인기를 끌었다.   조선족작가들에게 소개된 작품들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인간의 증명”, 김성종의 “피아 노살인”, “제 5 의 사나이”, 시드니 쉘던의 “가령 래일이 오면” 등이 있다. “가령 래일이 오면” 은 당시 《천지》문학지에서 꾸리던 문학애호가들의 통신간물 《개간지》에까지도 련재된적 있 다.   김성종의 추리소설은 그후로도 거의 20 년 가까이 서점가를 강타했고 모든 간행물들에서 그의 소설들을 다투어 련재했었다. 우리의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많은 소설들이 중문으로 번역되였는데 불과 몇해까지만도 진설홍, 윤금단 등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소설이 중문 으로 번역되여 서점가에 올랐다.   사실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오래전에 추리소설과 같은 쟝르문학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1960~1970 년대에 이미 인물설정과 플롯구성에서 탐정소설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황당한 년대에 계급투쟁의 주제는 우리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숨 은 계급의 적을 수색하고, 그들의 반동적인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소설의 플롯을 형성한것 이였다. 따라서 탐정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시작했다.   장춘식평론가의 평문에 따르면 “김지훈의 단편 ‘첫 근무’(1976)와 김청송, 황하성의 ‘철벽’ (1976)은 상당히 정교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다.” 그리고 이처럼 본격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작품들도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는 작품이 적지 않았는데 “김 희철의 중편소설 ‘전우의 딸’(1976)과 ‘림해의 풍파’(1977)”가 대표적이다.   당시는 이른바 “3 돌출원칙”이라는 좌적인 철쇄에 매여 모든 작품들이 소재나 구성면에서 천편일률적인 자유롭지 못한 상황임에도 이러한 창작경향이 슬그머니 일었는데 평론가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현상을 해석해본다. 하나는 많은 금지구역이 존재하였기때문에 작가들이 리 용할수 있는 플롯구성의 방식에 별로 여지가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 전에 우리 글로 번역소개되였던 쏘련의 탐정소설 《구리단추》 등 작품들이나 70 년대 중반 중 국에서 방영되였던 조선영화 “숨길수 없는 정체”, 쏘련영화 “발자욱” 그외 알바니아와 로므니 아의 탐정영화가 준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이다. 탐정영화, 당시에는 흔히 “반특”영화라 불 렀는데 몇편 안되는 혁명적 본보기극 영화들만이 란무하던 그시절, 단일한 제재의 반복에 식 상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보태여준 제재라 볼수 있겠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은 점차 자취를 감추나 소설 플롯구성에서의 이와 같은 탐정, 혹은 추리적인 수법의 관성은 여전히 이어졌다. 그후 《아리랑》총서에 몇회에 나뉘여 련재되였던 김경련의 중편소설 “흉수는 누구?”, 리만호의 “국장과 나리꽃” 등 몇부의 소설들이 추리소설, 통속소설의 형태를 띠고 창작되여 당시로는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 다.   그외에도 추리소설에 대한 전문창작시도를 보여준 작가들도 몇분 있었다. 연변 로투구출 신의 윤송이라는 젊은 작가도 있었고 경찰계통에서 사업했던 룡정의 전강이라는 작가가 추리 소설을 몇부 내놓았다. 하지만 량적으로 적었고 수작을 내놓지 못했기에 쟝르문학 창작군을 뭇기에는 그 기세가 판부족이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도 80 년대에 추리소설을 발표하려 고심한적 있었다. “꿈의 변두 리”라는 제목으로 4 만자 되는 꽤 큰 편폭으로 창작했는데 여러 문예지들에서 퇴짜를 맞고 나 중에는 당시 번역작품들을 전문 싣다가 페간된 《갈피리》라는 잡지에 그나마 실려 추리소설 창작에 대한 감질난 창작욕구를 무마한적 있다.   이 와중에 크게 느낀바이지만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에 대한 수용태도는 그닥 원활하지 못하다는것이다. 때문에 추리소설외에도 쟝르소설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무협이나 과학환상소 설, 판타지 같은것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있다. 과학환상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환상동화가 그런대로 몇편 나왔지만 성인을 상대로 한것은 리태학선생이 《아리랑》지에 발표한 겨우 한 두부로 알고있다. 무협형태의 작품 역시 80 년대 내부간행물인 《개간지》에 당시 문학통신원 출신의 젊은 작가였던 류순호씨에 의해 겨우 한편이 나왔다.   오래동안 탐정소설을 비롯한 추리소설들은 중국 정통문학 및 정통독서계 그리고 주류 미 학관에서 부자연스러운 위치에 처해있어왔다. 막상 추리소설을 좋아해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꺼린다. 특히 품위있다는 문화인, 엘리트 지식인이 그렇다. 추리소설은 로맨스, 무협 등의 소 설과 마찬가지로 통속적이며 격조가 높지 않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 는 부류도 사회문화수준이 어떠하든 본질적으로 취미가 낮은 사람으로 찍힌다. 이러한 쟝르에 대한 거부와 폄하가 쟝르문학의 정체를 빚어내고있다고 해야겠다. 우리 문단에서도 마찬가지 이며 외려 그 편향적인 시선이 더 강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몇해전 필자가 추리소설에 좀 필묵을 돌려보려 한다고 창작의향을 밝히자 어느 선배작가 는 술까지 사주면서 극구 만류했고 어느 잡지사 편집은 아예 그런 쟝르는 우리 잡지의 관문을 넘을수 없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또 어느 한번 문학도들을 위한 특강의 자리에서 나는 편협한 독서의 범위를 넓혀 추리소 설 같은 쟝르소설도 읽으면 플롯이나 구성에서 도움이 될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 자리 에 동석했던 해외에서 학위까지 따내고 왔다는 한분이 벌떡 일어서더니 “추리소설을 읽지 마 세요. 쓰레기입니다.”고 벌겋게 흥분한 목소리로 나의 특강을 무질러버리는것이였다. 특강이 끝난후 식사자리에서 나는 “뿌쉬낀, 스티븐슨, 월리엄 포크너 같은 순 문학의 대가들도 모두 추리소설을 창작한적 있습니다. 레이먼드 첸들러의 추리작품을 읽었나요? 순 문학보다 더 깊 습니다.” 하고 진지하게 반문하며 그 편견을 깨려다 돌아온건 “난 그런 작품들을 읽은적도 없 고 그 작가들 이름조차 모르오.”라며 한사코 머리를 가로젓는 거부의 표정이였다.   이처럼 우리의 일부 작가들과 주류문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추천하고 언급하고 연구하는 것만을 문학으로 간주하면서 배타적으로 쟝르문학 같은것은 순수문학으로부터 배제된 “상업주 의문학” 지어 “하위문학”이라고 락인을 찍고있다. 이러한 쟝르가 우리가 흔히 접해온 근대소설 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것은 변조하고있는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 아닐가고 감히 말해본다.   이렇게 쟝르문학을 “수준 낮은 문학”으로 치부하는 시선들이 있기때문에 쟝르문학에 아예 근접해보지도 못하고 쟝르문학이 정체되는 리유중 하나일것이다.  우리 문단의 작가들과 독서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근년래 쟝르문학의 최고봉 으로 꼽는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 톨킨의 《반지의 제왕》 조차 읽은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독서량의 편식에 놀란적도 있었다.   사실 필자는 국외의 쟝르문학 작품들을 대량 사들여 소장하고 읽으면서 나름 쟝르문학 창 작에서 시도를 많이 해보았다. 아동력사소설에 미스터리와 무협요소를 가미한 “거북구술”과 “신라의 검”을 발표했고 “환을 말하다”라는 평론을 게재하여 판타지문학의 추세에 대해 분석 도 해보았고 순 문학지에 호러작품 몇편도 발표하여 평론가들의 찬반의 평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판타지작품 “불의 제전”을 발표하여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 다. 당시 문단의 첫 판타지였음에도 그 새로운 쟝르를 존중해 큰상에 뽑아준 심사위원들에 감 사를 느꼈지만 1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판타지작품은 아직도 거의 한편도 보이지 않아 갑갑 한 마음이다.   그만큼 이렇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새로운 매체나 틀이 등장하였을 때 관습적인 서사형태 로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던 우리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다. 해외의 경우“순수문학”과 “쟝르문학” 사이의 경계조차 허물어지고있다. 이 경계가 허물어 지고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게 벌써 십년 저쪽의 일이다. 추리, 과학환상, 판타지, 로 맨스, 무협 같은 쟝르소설들이 본격문학의 령역안으로 대거 밀고 들어오는 한편 순수문학쪽과 의 대화를 시도하고있다. 그리고 태고적에 칼날을 휘두르고 은하계밖에서 날아예고 피투성이 의 복수극을 펼치던 쟝르문학이 이제는 사회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있다. 쟝르문학 전문작가들 은 그 시대의 사회문제를 포착하고 민감하게 의식하고있고 대중들도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 사 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작품에 담아내고있다.   해외작가들중에서 쟝르문학에 심취한 순 문학가들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앙 드레 지드, 《인간의 굴레》의 저자인 영국 소설가 서머셋 모옴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서머셋 모옴은 “미래에 살아남는 문학은 추리소설뿐이다. 책방에도 도서관에도 추리가 넘쳐날것이다.”고 예견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이 엄격한 그들의 문학풍토에서 쟝르문학 시 장이 활성화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하위쟝르로 폄하되던 쟝르소설들이 미래의 문학을 이끌어갈 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점치기도 한다.   추리소설이 단순한 추리가 아니고 “소설”의 체제를 갖춘 추리요, 추리를 위한 “소설”인만 큼 문학의 쟝르임에 틀림없으며 문학의 쟝르인 한 문학성을 부정할수는 없다. 만약 문학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전히 추리에 대한 문제의 제시와 해답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소설은커녕 원고지 몇장이면 충분한 퀴즈풀이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 즉 작가들이 다양한 쟝르에 손 댈수 있는 욕구가 필요한데 조선족문단에서는 이것이 너무 미약하다 할수 있다. 다양한 쟝르의 창작에 관심을 가질수 있 는 가장 강력한 욕구는 독서시장의 요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런데 우리 작가들이 그것 도 자비로 출판한 책들이 겨우 300 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 말 출판시장과 독서시장의 부재는 오래된 현상이다. 게다가 가련할 정도로 적은 우리의 독자들조차 중국이나 외국의 영 화나 텔레비죤 영상물 그리고 인터넷쪽에 경도되여있다.   작은 시장, 엷은 독자층을 가진 우리 문단, 하기에 더욱더 생존의 길을 뚫어야 한다. 생존 화하려면 다양화 그리고 분화할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쟝르문학을 바로 분화, 다양화의 한가 지 중요한 방식으로 봐도 무방할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대중이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대중에 의해 문화가 창조된다.”고 전문가 들은 말한다. 이러한 정론은 쟝르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한다. 독자들의 흥미를 무시하고 독자를 외면하며 씌여진 작품은 비록 작품성이 뛰여나다 할지라도 “읽히지 않는 소 설”이라는 모순에서 벗어날수 없을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문단은 편협한 변두리사유에서 벗어 나 첨단 다매체시대에 걸맞게 활용매체에 부합되고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소통전략을 필요로 해야 할것이다. 그런것이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서서히 극복하고 넘어서는것이 우리 문학 의 다양화와 정체의 극복 나아가 비전을 위해선 상당히 중요한 고리가 아닐가 하고 생각해본 다.   번역인재들을 적극 동원하여 우리의 수작들을 번역하여 주류문단에 소개하는 한편 우리 말의 동질성을 갖고있는 한국을 포함시킨다면 물론 작은 시장은 아닐터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만의 특유의 정서와 소재로 한번 승부사를 던져본다면 가능성이 없 는것도 아니지 않을가? 근년래 외려 한국에서 우리의 소재를 활용하여 책도 내고 영화도 만들 고있다. 그 와중에 상업효과만 쫓아가고 조선족에 대한 리해의 결핍때문에 상업의 맛망울을 따라가며 내놓은 작품들이 조선족을 심하게 외곡해 독자와 관객들의 불평의 소리도 크게 들린 다. 여기서 우리 조선족작가들이 해외에서 사뭇 선호하는 쟝르문학에 대한 연구와 동참의식에 대해 한번 호출해보는것도 무리가 아닐것이다.   쟝르문학이 가지고있는 오락성은 분명 순수문학의 엄숙성과는 구분지어질 특징이라 할만 도 하다. 그러나 쟝르문학의 가치 전부가 부정적으로 판단될 성격의것은 아니라고 본다. 교훈 적이기보다는 오락적인 재미를 얻기 위해 소설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순수문학이 추구 하는 목적달성의 “일석이조”의 효과도 줄수 있다면 쟝르문학의 가치를 작지 않게 매길수 있다 고 생각한다.   몇해전에 《도라지》에 발표한 호러작품 “산장”에서 필자는 단지 공포물이라는 취미로 쟝 르문학에 접한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변혁기 농촌사회의 붕괴와 그 와중에 겪게 되는 농촌총 각들의 실의와 아픔에 대해 다루려 했다. 그리고 《연변문학》에 발표한 판타지 “불의 제전”에 서는 민족의 렬근과 분단의 아픔에 대해 말하려 꾀했다. 오래동안 엄숙한 자세로 소설창작에 림해온 작가로서 필자는 기존의 본격소설은 쟝르문학과 같은 다양한 자양분을 수용해야 그 지 평을 넓힐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독자들을 섭렵하고있는 쟝르문학의 흥미 가 종국에는 순 문학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라마지 않고있다.   “호불호”가 엇갈릴지라도 현재의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양식과 감각은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의 양상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쟝르문학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중요한 령역이다.   쟝르문학에 대한 새삼스러운 환기와 구구한 담론은 산업화시기에 맞닥뜨려 어딘가 무력해 진 우리 문학의 현황과 그 문학의 생존을 갈망하는 열정때문이라고 말하고싶다. 탈변에 탈변 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문학은 더욱 문학답게 정련될것이며 그것만의 절대적인 기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싶다.   추리소설은 이미 충분한 호소력을 갖고있다. 그것은 나날이 성숙해지고있으며 작가, 도서, 출판사에서부터 독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추리소설을 많은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혼돈에서 이끌어내 하나의 명확한 문화상품이 되게 하였다.   추리물은 또 중국의 유명 작가들이 다투어 애호하는 서사양식으로 되고있다. 북경 작가 왕삭王朔은 몇몇 소설에서 추리물의 서사모델을 채택했다. 그는 전통 추리소설 속의 정의, 지혜, 제도와 질서를 해소시키는 대신 세속적이며 경멸적인 태도로 숭고하고 정통 적인 모든 사물을 조롱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여화(余华)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그는 창작초기에 몇편의 추 리물과 미스테리물을 쓴바 있다.   모순문학상을 수상한 상해 녀류작가 왕안억(王安忆)의 근작 장편소설 《닉명》도 역시 추리 소설의 형태를 띠고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순 문학작가들이 쟝르소설적 틀과 장치를 적극 활용한 작품들을 다투어 내놓고있다. 그들은 “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독자와 정면승부하자는게 취지”라고 창작의 취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그중 맨 선두주자로 달리고있는 맥가가 바로 전형적인 례이다.  대표대회가 열리는 기간 중국의 유명 순 문학잡지인 《수확(收获)》에서 추리소설상을 공모 한다고 발표, “순 문학과 쟝르문학의 경계를 가르련다”고 선언했다. 사실 중국문단에서 중요한 소설상의 하나인 욱달부(郁达夫)소설상의 단편부문상 역시 올해에는 추리소설가 채준(蔡骏)의 추리작품 《눈물의 돌(眼泪石)》에 돌아갔다.   우리 문단의 경우 권위 문학지 《연변문학》에서 올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12 월호에 참으 로 오랜만에 큰 편폭을 할애해 추리소설을 실었는데 기꺼운 시도라 본다.   전통적으로 추리소설은 의식적으로 자신과 순수문학의 신분을 갈랐으며 일반대중을 상대 로 자신의 “서자(庶子)”와 같은 명분을 정해왔다. 이제 좁고 추운 별채에서 소박받던 그 “서 자”가 궁궐 같은 본채로 들려 한다.   그럼에도 중국문단에서 이러한 자리매김은 아직도 “낭떠러지”우에서 소슬한 “바람소리”를 듣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아직도 산자락에서 서성이는 상태, 산봉에 오르기까지는 등반의 모험을 수반한 긴 시간과 각오가 수요된다고 해야겠다. 우리 문학에서는 더 긴 등반이 수요될 듯하다… (다음호에 이음)   김혁 략력: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룡정 윤동주연구회 회 장, 중국작가협회 회원. 《길림신문》, 《연변일보》 등 매체에서 20 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시인 윤동주”, “춘자의 남경”, “완용황후”, 소설집 《천재 죽이기》, 인물평전 “윤동주평전”,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등 10 여부 간행.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문학상, 《장백 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진달래”문예상 등 수상. 작가메일: Ckkh99@hanmail.net 대형문학지 《장백산》2017년 1월호  
70    죽음의배- "페스카마"호 댓글:  조회:2143  추천:17  2017-06-13
  . 칼럼 . 죽음의 배- "페스카마"호 김혁     요즘들어 배가 화두다. 만경창파를 누벼야할 배가 어쩌구려 사람들의 눈물 속에 스미고, 가슴패기를 짓누르고 있다. 요즘처럼 배가 사람들에게 회자된적은 없는 것 같다.   우선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를 찾으러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홍콩과 터키인들이 합동으로 구성한 노아방주선교회(NAMI) 아라랏산 노아방주 탐사팀은 터키 동쪽 해발 4000미터의 아라랏산에서 발견한 거대한 목조 구조물에 대해 찍은 영상물을 공개, "7000-10000BC의 유물이라는 것이 증명된 상태"라고 밝히면서, “발견된 구조물이 ‘노아의 방주’라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내년 7월 중 4~6명 정도의 원정대를 꾸려 탐사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사상 최대의 해난 사고로 기록된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를 복제하고 있어 화제다. 중국 사천의 “칠성” 에너지투자그룹이 10억원을 투자해 타이타닉호를 복제하고 있다고한다. .   무엇보다 수년 내내 눈물 위로 떠다니는 배는 “세월호”일 것이다.   3년전,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 300여명의 애닯은 청춘을 수장(水葬)시킨 비정의 “세월호”. 그 미수습자 신원의 발견과 확인에 온 세간의 젖은 눈길이 오늘도 모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바다에서 일어난 해난사고들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낸 사고에 조선족 한금희(녀, 37)씨와 리도남(남, 38)씨도 조난당했음이 확인됐다.   하지만 동질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세월호 중국인 사망자를 비하하는 글을 올린 혐의(형법상 모욕)로 권모(당시 27세 ·무직)씨가 불구속 입건되는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다. 권씨는 인터넷 한 사이트의 게시판에 '실종자 중 조선족 2마리가 있다는데, XX버리고 학생들이 살아났으면 좋겠다'란 글을 올려 중국인 실종자를 모욕한 혐의로 입건되였다.   또한 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이 막을 올려 화제다.   선상 반란 사건 “페스카마호” 실화를 담은 문제작 연극 “페스카마-고기잡이 배”가 대통령의 취임 이튿날인 10일 막을 올렸다.   연극 “페스카마- 고기잡이 배”는 1996년 8월 남태평양에서 조업중이던 원양어선 페스카마15호에서 일어난 선상(船上) 반란 사건을 다룬다.   연극 포스터     1996년 여름. 남태평양.   참치잡이배 “페스카마호”에 오른 승선경험이 전무한 조선족선원들은 수차례 작업설명을 해도 손이 느리고 서툴러 갑판장과 갑원에게 구타를 당한다.   한국선원들은 조업 실패를 조선족선원들의 탓으로 돌리며 더욱 심한 폭력을 행사하고 조선족선원들은 비인간적인 처우에도 한국 배에 타기 위해 맡겨놓은 거액의 보증금 때문에 협조하지 않으면 하선시키겠다는 선장의 말에 굴복하고 작업에 림한다.   평소의 열배나 많은 참치가 낚시에 달려 올라온다. 태풍이 예고된 상태에서 선장까지 갑판에 내려와 작업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 조선족 선원이 낚시에 걸린 참다랑어 한 마리를 바다에 떨어뜨린다. 이에 격분한 선장이 조선족 선원을 구타하자 맞은 선원도 선장의 뺨을 때리는 일이 벌어진다. 순식간에 칼과 흉기를 든 한국선원과 조선족 선원들이 갑판에서 대치하는데 나이가 많은 기관장이 중재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분을 삭이지 못한 선장이 조선족 선원 전원을 강제 하선시키기로 통보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족 선원들은 선장에게 찾아가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빌지만 오히려 선장으로부터 강제하선은 물론이고 선상란동으로 형사고발조치를 하고 조업 손실금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청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한다.    커다란 실의에 빠진 조선족 선원들은 한국인 선원들을 차례로 살해한다... 연극의 한 장면     이 연극이 주목을 모은것은 제38회 서울연극제 공식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이고,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소재에도 있겠지만, 금방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시절에 변론을 맡았던 사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 이 사건의 조선족 선원 6명의 변론을 맡아 화제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일각에서는 당시 문재인이 조선족 인권을 자국민에 우선시했다며 비난하면서 “문재인의 '아킬레스건'”이라 부르기도 했다. 변호사 시절의 문재인   중국 국적 조선족들의 반란 사건에서 한국인 선원 7명, 조선족 선원 1명, 인도 네시아 선원 3명 등 11명이 숨졌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범인들은 칼과 도끼로 피해자들을 무자비하게 란자(亂刺)하고 찍었으며 저항력이 없는 환자를 산채로 바다에 내던져 죽이기도 했다.   법원은 1심에서 해상 강도살인 및 시체유기 등 혐의로 전원 사형을 선고했다가 항소심에서 주범을 제외한 5명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후 주범인 전재천 씨는 2007년 12월31일 로무현 정부 말기 특별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페스카마호 사건 관련보도   작품은 비극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많은 담론과 정서를 만들어 내는 한편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몸부림쳤던 조선족 선원들의 비극을 보여준다.   모두를 경악케 했고 가슴아프게 했던 이 사건은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불협화음으로 얼룩졌던 지난 90년대 중기를 다시 무대우에 소환한다.  20년전 한척의 배위에서 벌어진 연극과도 같은 이야기는 력사와 세월의 “만경창파”에서 한국과 민족적 동질성을 가졌던 이민자의 후예들이 만나는 과정을 서로 잘못 풀었던 시대적 “침몰”을 소급해 보여준다.   다시 한번 그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동포 사이의 참극을 반추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고해성사처럼 다시 한번 그 상처자욱을 들여다 봐야 한다. 이 사건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100여년 정착사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없고 한국과의 관계사에서 있을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조선족 사망자를 비하하는 글을 올린 사례에서도 보다싶이 조선족에 대한 몰리해, 비하와 질시는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비일비재한 편견과 악폐이다.   또한 조선족도 단순한 부에 대한 열망으로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나선 일그러진 “코리안 드림”의 허허실상에 대해 심각한 반추와 검토가 재다시 수요된다.   이렇게 서로의 소통과 화합의 장을 모색하지 않는 한, 페스카마호처럼 “어사망파”의 침몰선이 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장하는 수가 없다.   중한수교 25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이로부터 한국과 조선족이 모두 교훈을 얻고, 상처를 리성으로 치유하는 예시로 이 연극에 큰 의미를 두어 본다. "료녕신문" 2017-05-27   악몽의 배 "페스카마"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9    창피함에 대하여 댓글:  조회:1670  추천:13  2017-05-31
. 미니칼럼 . ​ 창피함에 대하여 ​김혁 ​ ​ ​​   단오에 대해 검색하다가 굴원이 떴고 굴원의 생을 따라가다가 “창피”하다는 낱말의 어원을 알게 되였다.   창피(猖披)에서 창(猖)은 옷을 입고 마무리를 하지 않은 듯 흐트러져 있다는 뜻, 또는 미쳐 날뛴다는 뜻이다. 피(披)는 손으로 옷을 풀어헤치는 모양의 글꼴이다,    창피라는 말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의 대표시 “리소(離騷)”에서 나온다.   중국 력사상 폭군을 들자면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이 꼽히는데 폭정을 일삼다가 나라를 망치고 궁궐에서 급히 도망쳐나가는 그들의 꼴에  대해 굴원은 이렇게 읊는다.   “어찌 걸과 주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허둥대면서 군색한 걸음으로 달아날 지름길만 찾는가(何桀紂之猖披兮 夫唯捷徑以窘步)”   여기서 "창피”(猖披)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창피”는 본래 옷매무새가 란잡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 옷이 풀어져 흐트러지면 남 보기에 부끄럽기 마련이다. ​   여기까지 쓰고나니 또 한분의 시인이 떠른다.   역시 부끄러움을 읊조렸던 윤동주 시인이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천고절창을 남긴 윤동주.   윤동주는 그 암흑의 시대에 자신의 무가내한 모습을 부끄러워했고 부끄러움에 휘청인 필에서 나온 시들에서는 창피와 참회의 눈물이 슴배여 있다. 나약하지만 그 부끄러움에는 선하고 올곧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 부끄러움이 오늘따라 시리도록 아름답다.   부끄러움이 실종돼버린 요즘 세월, 새삼스레 “창피”의 옷깃을 여미여 본다. ​ 2017년 5월 30일 단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8    꼬마 축구팬의 눈물 댓글:  조회:1703  추천:15  2017-04-21
。 미니칼럼 。   꼬마 축구팬의 눈물   김혁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이라는 그림이 있다.   유명 광고나 만화책에서 이미지를 차용 해 작업하는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다.     그림은 2002년 뉴욕의 어느 한 경매에서 715만 9500 달러에 경매되였다. 당시 영국 BBC 뉴스는 이 작품이 고가에 판매, 경매 기록을 깼다는 기사를 내보낸 적 있다.  이 그림은 지금 한국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자택에 걸려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작품이 인상적이였다기 보다는 그 가격 자체가 충격적이였다.   오래 된 만화책에서나 볼법한 촌스러운 아가씨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이 수백만대를 호가한다니? 사람들은 과연 이 그림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지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머금은 아가씨의 얼굴은 그로서 강렬한 이미지로 모두들의 뇌리에 남았다.       며칠전에도 우리는 행복한 눈물을 목격했다.   4월 16일, "백두의 호랑이" 연변팀 대 하북팀전에서 올 시즌 첫 꼴을 터뜨리자 꼴문을 연 용장 김승대와 그 꼴에 도움을 준 윤빛가람 못지 않게 관중들의 주목을 받은 축구팬이 있었다.    선수와 팬들이 흥분의 도가니로 들끓는 사이 생방송 카메라는 홀연 한 꼬마 축구팬을 포착했다.    부진에 시달리던 우리의 "호랑이"가 올 시즌 첫꼴을 선사하는 순간, 한 꼬마가 격동에 못이겨 그만 눈물 왈칵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이였다. 붉은 빛 응원 유니폼을 입은 앳된 얼굴의 소년은 목에 두르고 있던 응원 타올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을 터뜨렸다. 곁자리 친구의 다독임에 마음을 안추리고 다시 눈물 머금은 얼굴로 꼬마는 “연변팀 이겨라”를 목청껏 복창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시청자들의 감동과 공명을 자아냈고 그 동영상이 인터넷과 위챗을 달구어 불과 며칠사이에 5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피폐한 환경, 풍토에 "안구건조증" 환자가 속출하고 눈물을 잃어가고있는 요즘 세월 인공눈물까지 등장하고 있다. 어느때 부터인가 세상은 진정한 눈물을 잃어버렸다. 대신 위장된 눈물, 계산된 눈물로 넘쳐난다. 돈으로 치환되는 눈물도 있다.    그에 비하면 한 꼬마 축구팬이 자신의 팀을 위해 흘린 눈물을 우리는 그야말로 거금으로도 환산할수 없는 수정같은 눈물이라 높이 사고 싶다. 그것은 정녕 순수한 눈물, 값진 눈물, 행복의 눈물이 아닐가!   2017- 4- 18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67    필끝에 건곤(乾坤)세상 있나니 댓글:  조회:1759  추천:17  2017-02-28
. ​련작칼럼 .​ 필끝에 건곤(乾坤)세상 있나니 - 제9차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수도에서 열리는 문학성회에 다녀왔다. 중국작가협회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가 11월 30일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개막식을 시작으로 성황리에 열렸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대표단은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을 비롯해 장계신, 정봉숙, 김혁, 김영건, 김홍란, 채시봉 등 조선족작가와 문화계 사업일군들이 대표로 선정되여 참석했다. 습근평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대회 개막식에 출석한 가운데 중국각지의 문학계 엘리트들이 참석한 대회는 제8차 중국작가협회의 사업보고를 심의채택하고 “중국작가협회 규정”을 수정하였으며 철응을 주석으로 한 중국작가협회 차기 지도기구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12월 3일에 페막, 5박 6일간의 대회일정을 원만히 마치고 대표들은 귀환했다. 10대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글밭만 경운해 온 작가로서 중국대륙의 문학계를 대표하는 기라성같은 거장, 엘리트들이 운집한 전국작가대표대회에 대표의 일원로 참석하게 된것을 행운과 자호감으로 생각한다. 20여년전부터 전국청년작가회의 등 전국적인 문화행사에 적지않게 다녀 왔다. 하지만 이번의 성회는 여느때와는 또 다른 농도와 줄기의 계시와 감수를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회의기간 나는 매일 핸드폰으로 간명하나마 그날 그날의 수감을 일지로 적어 위챗에 올리고 나의 문학블로그에도 올렸다.  스모그로 몸살하던 북경이였지만 그 며칠만은 초동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의 련속이였다.  그처럼 “가슴속에 대의를 품고 마음속에 대중을 담아야 하며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필끝아래 건곤을 적어내리기를 바란다.(胸中有大义、心里有人民、肩头有责任、笔下有乾坤)”라는 회의의 주제문구는 작가들의 마음벽을 울려주고 우리 문학의 화창한 봄날을 제시하는듯 했다. 성회에서 받은 감수와 사색을 편단으로나마 테마별 적어본다.      자신감을 소환하다 -    제9차전국작가대표대회 수감록 (1)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옥색 저고리우에 감색 마고자를 받쳐 입었다. 헌활하게 통이 트인 바지를 떨쳐 입고 발목에 대님을 조여 고풍스러운 멋을 강조했다. 저고리의 섶이 약간 들린 품이 나래를 펼치려는 학의 그것과도 같다. 간결함과 섬세함이 매치된 선이 아름다운 실루엣을 그려낸다. 오방색 수공의 옷은 단아하고 아취가 있다. 마음은 싱그럽고 발길도 가벼워 건들건들 걸으니 자신감이 그윽하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한복이다. 전국작가대표대회 개막식이 열리던 날 아침, 나는 참말로 오랜만에 한복을 떨쳐입고 나섰다. 15억의 작가들을 대표하는 성회에서 민족대표로 선정된 기쁨으로 처음 민족복장을 맞추어 입었다. 역시 한복을 떨쳐입고 나선 녀성 대표들인 김홍란, 정봉숙 역시 여느때보다 청초한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기자들의 카메라의 앵글이 우리 복장이 주는 운치에 맞추어져 있었다. 연변대표단의 대표들은 인민대화당의 가장 현요한 앞자리에 자리 배당이 되여 있었다. 우리는 부풀은 한복처럼 한껏 부풀은 마음으로 총서기와 중앙의 지도자들, 전국각지에서 온 민족작가들과 만났다. 개막식에서 한 총서기의 예술변증법과 과학정신으로 일관된 강화는 새로운 문화리념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관점의 밀도가 농후하고 새로운 용어로 가득한 그 강화에서 몇줄을 임의로 뽑아내도 느낀바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문화자신감”이라는 용어를 나는 정중하게 뽑아보았다.   “문화자신감은 기초로 되고 더 광범위하고 심후한 자신감으로 되여야 하며 기본으로 되고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합나다. 문화적자신감을 갖는것은 국운의 흥망성쇄와 관련되며 문화의 안전, 민족정신의 독립성에 관련되는 큰 문제입니다. 문화자신감이 없이는 골기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풍채가 보이는 작품을 써낼수 없습니다.” 자신감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렇게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기는 근년들어 처음이였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신감이라는 이 단어를 잊고 있었다. 잃어버리고 있었다. 근년래 중국조선족은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서 부침해 오고있으며 따라서 “위기론”, “비관론”도 머리를 쳐들고 있다. 도시진출, 출국붐에 있따라 가꾸며 살던 터전이 비여지고, 인구가 마이나스 성장률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기록하고, 학교들이 줄줄이 폐교되고, 독서인구가 급락되고, 잡지사와 출판사가 불황을 겪는 악순환이 지속되여 왔다. 그에 따라 작가들은 바닥까지 실추된 문학의 위상에 설 자리를 잃고 방황과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작가들은 전국 여러 성시에서 가장 낮은 최악의 고료를 받고 있다. 물론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즉 쌀과 돈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것을 작가들의 지조로 알고 있지만 작가들에게 문학은 먹고 살아나갈 삶의 방편이 못되였다. 이렇게 위축의 일로를 걷고있는 사회상을 바라보며 작가들에게 자신감이란 운운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근년래 우리의 문학계는 조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수 있었다. 그 감지는 독자층과 문학애호가들로부터 왔다. 미약하나마 독자와 문학애호가들이 전에 비해 상당히 붇고 있음을 놀라웁게 발견할수 있었다. 시가지들에서 단지 커피나 음료를 팔던 청일색의 다방, 까페들로부터 책을 읽을수 있는 북카페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민간에서 책 읽기 동아리가 하나 둘 속출하고 있다.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조직하는 문학강습반도 몇해전에는 참가수가 너무 적어서 개강을 하지못한적도 있었지만 올해는 보명수가 넘쳐나서 그 인원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해외문화와의 충돌로부터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 소실되여 가는 민족언어에 대한 우려, 출국인원들의 귀향후 재정착에 대한 고민 등등에서 유발된 사고, 개개인의 노력을 수반으로 한 생활수준의 제고와 질적인 삶의 변화, 경제가 발전한 선진국의 수준 높은 문화생활에서 배운 지식들이 이러한 변화를 촉구한것이아닐가 생각해 본다. 이로서 책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인생에서의 지식경영의 중요성을 스스로 자각하고 다시금 책을 들고 있는것이다. 비록 아직은 작은 파문에 불과할터이지만 이제 좀 더 큰 이랑을 이루기 시작한다면 이는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대단히 고무적인 파고(波高)의 높이가 아닐수 없다.   주지하다싶이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령혼이다. 문화생명력에 대한 신심은 리성인식에서의 고도로 성숙된 정신적인 면모라 할수 있다. 할진대 문화의 자신감은 그 혼의 기초로 되여야하며 광범위하게 더 깊게 더 지구적인 힘으로 되여야 하는것이다. 이러한 문화자신감으로서 자신의 작품의 품위를 높이고 력사사명감을 자각하고 심령을 정화하고 민족의 인문소양을 높여야 한다.   여기서 바로 원견과 지명의 “자신감”이 소요된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보조를 흐트리지 않으며 나아가야한다.  발에 채이는 비관의 돌덩어리들을 치우면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앞으로 형성될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서 그 립지를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것이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변강소수민족이라는 특유의 위치와 특수한 문화환경을 용유(拥有)하고있다.그로서 우리 중국조선족공동체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의 사이에 있는 변연문화의 특징을 지니고있다.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수 있다는점에서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적 기능을 나타낼수 있다. 거기에 한국과 조선 두나라 가운데 끼여있는 한반도에서의 민족의 교두보 역할도 무시못한다. 이러한 민족적 우세를 도약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족 공동체사회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중국과 한반도간의 교류,협력에 필히 긍정적인 역할을 미칠것이고, 중국과 한반도 간 광범위한 교류의 진일보는 동북아 국제 협력이라는 중국의 대 동북아 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전략의 구축과 실행 과정은 정부의 직접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그와중에 정부에서 소수민족에게 돌려지는 점점 더 원활해지고 있는 무양한 특혜도 우리는 적극 활용할줄 알아야 한다.  현정세에 대한 바른 리해를 토대로 자신의 립장과 토대를 굳건히 설정해 나가면서 우리의 오래된 가치관에 자신감을 덧입히고 그것을 미래 지향적인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제반 분야의 바탕이 되도록 하여 우리의 얼을 살려야 한다. 그러한 저력이 근로용감한 우리의 문화전통에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목전의 진통을 극복하면서 모색속에 새로운 대안을 찾는 험준한 과정에 비관을 엎누르는 자신감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때이다. 대회의 개막식과 페막식에서 초겨울의 추위도 무릅쓰고 우리는 한복을 입고 북경의 장안가, 인민대회당 앞 광장에서 포토타임을 가졌다. 외성의 대표들과 매체 기자들이 다투어 우리들의 현란한 색조를 향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 복장의 단아함과 민족작가로서의 자호감 머금은 자세에 타성의 대표들과 행인들이 찬탄의 소리를 보냈다. 소슬한 겨울 바람이 한복의 자락을 스치나 우리는 모두다 상기된 얼굴, 더워나는 가슴을 느꼈다. 그야말로 자신감을 소환해본 시간이였다. "장백산" 2017년 1월호      
66    우리의 이야기를 여러 어종(語種)으로 세상에 들려주자 댓글:  조회:1922  추천:15  2017-02-10
우리의 이야기를 여러 어종(語種)으로 세상에 들려주자  - 연변작가협회 성립 60주년 기념 간담회에서 한 발언 김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몇해전 연변대학과 한국 제주대학교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스토리텔링학술대회에 참석해 크게 감명을 받은적 있다. 여기서 우선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란 “사건에 대한 진술이 지배적인 담화 양식”으로 작가의 이야기 전개를 이르는 말이다. 최근에는 쓰임에 따라 더 넓은 의미를 갖기도 해서 문학을 넘어 음악, 미술, 무용은 물론 영화, 연극, 만화 등 모든 문화 예술 령역에서 스토리 텔링은 어느 곳 어디에나 있다.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실감케 해주는 실례로 중국의 불멸의 고전 “삼국연의”를 들수 있고 우리 민족은 “춘향전”을 들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영화나 드라마, 연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만화등으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번안되면서 수없이 활용되고 있다. 그로서 창조된 거대한 효익은 스토리 텔링이 얼마나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 올수 있는가를 보여준 실례이다. 그 스토리에 새 옷을 입혀 번안한 작품 “춘향”으로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도 몇해전 “준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었다.   정보, 뉴스의 과잉시대에 우리의 작품을 더 크게 알리려면 스토리의 옷을 입혀야 한다. 좋은 스토리는 독자들의 몰입과 공감도를 높이고 그 만큼 감정이입 효과도 크다. 이야기의 향연은 사람들을 절로 책을 들게 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문화 원형자료는 빈곤하고 생동한 이야기는 자리를 비웠다.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멋 등 문화원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만의 특산인 사과배며 황소며, 벼에 대한 마케팅은 아직도 원활하게 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에 깃든 구수한 이야기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음식이야기도 없다. 한국에서는 음식테마를 이야기로 풀어내린 드라마 “대장금”으로 아세아에서 폭넓은 성공을 거두었다. 아직도 연변의 CD점들에 가면 “대장금”은 현요한 위치에 놓여져 있고 이 드라마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에 비해 우리에게는 김치며 랭면이며 찰떡등 타민족과 외빈들이 감탄해 마지않은 특색음식들이 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느 민족처럼 우리 민족 역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민족이다. 설화, 민담, 전설… 우리의 산하, 우리의 력사에 깃든 그러한 것들은 매우 유용한 이야기 소재가 된다. 룡정은 우물 이야기, 도문은 두만강 이야기, 안도는 집단부락 이야기, 화룡은 청산리 이야기, 훈춘은 충청도마을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생산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가공할 수 있는 원형들이다. 그동안 전해 내려오는 우리네의 다양한 인문자원에서 남들의 이목을 끌만한 이야기꺼리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투신할 필요가 있다. 전통문화유산에서 실질적인 콘텐츠를 찾는 스토리 라인 발굴이 요구되는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리해와 중시가 결여된 탓으로 우리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고스란히 넘기고 있다. 일제와 맞선 15만원 탈취의거, 민생단사건의 교훈,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화가 한락연의 일대기, 지어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에서의 조선인들의 활약상등 우리의 주인공 우리만의 이야기가 이미 해외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장편소설로 엮어지고 연구론문으로 나왔다.   이제 문학창작에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이 필요하다. 본격문학의 완결성을 지향하면서도 소설과 독자 더욱이 독자층이 빈곤한 우리 민족독자층을 넘어 외래의 독자와의 쌍방향성, 수용의 접점을 찾아내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 우리 특색의 문학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이른바 우리 특색의 문학이란 곧 지역문학사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어떻게 간직할것인가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그 지역특수성과 독자성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면 변별성을 잃게 되고 반복적인 소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문학은 매력과 탄력성을 잃게 될수있다. 그러면 주류문단과의 접목이며 세계로의 진출은 지상담론에 그칠수밖에 없을것이다. 우리문학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통해서 조선족문학의 본연의 모습을 우리의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야기해낼수 있어야 하며 그로서 자가(自家)의 독특한 경지를 새로 개척해야한다.  따라서 우리말 작품의 번역의 진부함에 관해 감히 말해보고저 한다. 글로벌화시대, 번역의 중요성은 더 운운할 나위가 없이 중요하다. 우리 문학이 “중국문단과 접목하고 세계로 나가자”고 호소를 거듭한지도 수십년째 잘된다. “쌍수리개 전략”이요하고 거창한 이름을 달고 진척해보았지만 그 효과는 미비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훌륭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전면적으로, 체계적으로 번역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해째 번역이 몇몇 같은 사람에만 국한적으로 그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아니다. 지어 윤동주나 김학철 같은 거목들의 보귀한 유산인 주옥같은 작품들에 대한 번역조차 빈약하다. 타민족은 이들이 누군지조차 잘 모른다.    번역인재는 타지로 대도시로 빠지고 있고 번역의 후배양성도 미흡하다. 번역가들은 생계때문에 한국의 작품, 그리고 상업성에 치우친 작품을 번역하는데 많은 필봉을 바친다. 조선족의 번역가가 대도시로 나가서 타민족의 민족영웅을 소재로 한 대형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활약하는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적 있다. 또 “민족문학”과 같은 소수민족작가들을 전문 소개하는 권위문학지를 받아들고 목록을 펼치면 조선족 작가가 가장 적고 때론 지어 작품 한편도 없을때면 그야말로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 작가들중에 중국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는 사람이 몇명 안된다. 근년래 우리 문학사에서는 중국말로 전문 창작하고있는 김인순, 전용선, 김창국등을 문학사에 보충해 넣음으로서 이면에서의 공백의 유감을 무마하려 하고있다. 이로서 번역에 대한 중시도를 다시금, 더 강도있게 호소하고 관련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소수민족문학치고는 비교적 많은 문학상을 갖고있는 우리의 허다한 작품상중에 번역상은 없다. 우리의 문학지들은 더불어 코너를 신설하여 조선족 번역작품도 중국어로, 외래어로 싣고 소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을 선정기획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상급과 기업가들의 호응과 찬조를 얻어내야 한다. 이면에서 연변의 가무와 축구는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작가는 “번역은 나를 국경 밖으로 데리고 가는 우방과도 같다”고 했다. 번역이 없다면 한 어종의 문학이 다른 어종의 나라로 뻗어나갈 방법이 없다.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주류문단과 접목하고 세계로 나가는 지름길은  좋은 번역가를 만나고 그에 따른 마케팅법을 기획하는 것이다.  FTA, 즉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수출입 장벽을 낮춰 경제령토를 넓힌다”는것을 슬로건처럼 내걸었다. 이처럼 외국과 타민족과의 문학을 많이 읽을뿐더러 우리의 좋은 작품이 더 많이 더 수준높게 번역되여 널리 읽힐수록 우리작가들에게는 높기만 한 언어 간의 장벽이 낮아지며 문학, 문화의 령토가 더욱더 넓어질것이다. 아무쪼록 우리 작가와 번역가들의 선전(善戰)을 빈다.
65    로신의 어깨 댓글:  조회:2307  추천:17  2016-09-13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7]   로신의 어깨       올해는 로신의 80주기가 되는 해이다. 1918년 절강성 소흥의 주씨가문에서 태여나 첫 작품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달았던 필명 로신은 지금껏 여뢰관이(如雷贯耳)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그의 작품은 시대를 뛰여넘었고 그는 이미 인류의 고전이 되였다. 그 없이 중국의 현대혁명사와 문학사, 학술사를 론할수 없다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로신은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온몸 바쳐 살았던 인물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여나 전통교육을 받고 일본 류학길에 올랐던 로신은 “우매하고 연약한” 중국인의 렬근을 진맥하기 위해 의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문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문학의 힘으로 절망에 빠진 중국의 혼과 희망을 일깨우고자 했던 로신은 문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자신을 바쳤고 드디여 “근대문학의 아버지”라는 존칭을 한몸에 받으며 20세기 중국 문단의 정상에 우뚝 섰다.  신과 구의 갈등, 동과 서의 문명충돌의 격랑속에서 사상문화운동의 홰불을 선두에서 추켜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근대이행기의 려명전의 암흑을 헤쳐나갔다. 그의 소설과 잡문은 낡은것을 뒤엎고자한 신민주주의 청년들에게 전률과 영향을 주었고 그 전파가 사후에도 지속되였다.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선생이 극찬했던 그의 “촌철살인”의 강인한 명문들은 사회에 대한 엄격한 비판, 인간에 대한 예리한 성찰로 읽는 이의 정신을 확 흔들어 깨운다. 로신은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 “예술만을 위한 예술”을 경멸했다. 문학이 무엇을 할수있는가를 항상 고민했고 그 흥건한 사상에 붓자루를 담갔다. 그리하여 로신의 문학과 사상에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모난 사고가 뚜렷이 음각되여 있다. 아큐, 공을기, 상림아주머니 등 중국문학 나아가 세계문학사에서도 개성 도렷한 인물들이 그의 필끝에서 줄인형처럼 발랄한 춤을 추었다.    최근 변혁기의 소용돌이에 당착한 우리 공동체와 그 민족작가들이 겪고있는 고민에 대입해도 유의미하게 읽힐수 있는 로신의 글들은 그래서 조화석습(朝花夕拾), 즉 “아침꽃을 저녁에 줏는” 여유로움으로 오늘 날에도 살아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신록이 짙어가는 지난  6월 11일, 로신문학원 문학창작 강습반이 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처음으로 개강했다.  1950년에 대문호의 이름을 떠이고 출범된 로신문학원은 젊은 문인들을 양성하는 중국작가협회 산하의 전문양성기구이다. 로신문학원은 10여년전부터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무려 29차례의 강습반을 열고 1000여명의 중청년작가, 평론가, 편집들에게 충전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변강의 오지인 연변에까지 찾아든것이다.    “청년들아, 나를 딛고 일어서라!” 이 말은 바로 로신이 청년들을 향해 던졌던 대표적인 문장의 인용구이다.  문학원의 문학도들이 “청출어람”의 기상으로 대문호의 선험(先验)을 자양분으로 부여받고 깨금발하여 침체기의 우리 문학에 한줄기 짙푸른 생력소를 주입하기를 기대해 본다.      “연변일보” 2016년 6월 23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4    즐거운 축구 패러디 댓글:  조회:2556  추천:13  2016-09-13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8]   즐거운 축구 패러디         붉은 망토를 걸친 하태균, 마천루우에서 거미줄을 타는 지문일, 별이 새겨진 방패막이를 든 최민… 얼핏 보면 할리우드 환상영화의 한 장면들, 하지만 그 화려하고 기이한 복색을 걸친 이들은 전부다 익숙한 우리의 축구선수들이다.    영화 “슈퍼맨”, “스파이더맨”, “캡틴 아메리카”를 패러디한 재치만점 축구만화가 연변의 어느한 사이트에 등장했다. 그림마다 선수들의 포지선을 정확하게 짚어 내였고 그 결연한 의지를 머금은 얼굴들은 보는이들로 하여금 존대와 애대를 자아내게 한다.      패러디는 특정 작가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해학적으로 변형하는것을 말한다.  패러디(Parody)의 어원은 희랍어인데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장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단어는 두 텍스트들 사이의 “대조” 또는 “상반”을 뜻하는것.    패러디는 한마디로 흉내내기의 일종이다. 어떤 유명 작가나 화가, 작곡가의 작품의 문체나 률격을 모방하여 그것을 풍자적으로 또는 조롱삼아 꾸민 익살스러운 글로 희화화하는 비틀기의 한 수법으로 많이 씌인다. 널리 알려진 작품의 자구(字句)를 변경시키거나 과장하며 익숙한 캐릭터를 비틀어 익살 또는 풍자의 효과를 노리는 경우가 많다. 시와 소설, 음악과 미술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외국에는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영화등 많은 분야에서 유명한 패러디 작품들이 나왔다.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비교적 유명한 페러디들로는 그림에서는 저 유명한 “몬나리자”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여러 동물들에 대체되고, 음악에서는 “에스빠냐 투우곡”이 쫓고 쫓기는 활극에서 자주 삽입되는 경우들이다.    우리 민족의 선인들도 오래전에 이미 패러디를 활용해 왔다. 민요 “아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노래 가운데 가장 많이 패러디 된 작품으로 봐야할것이다. “강원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이처럼 패러디는 음악부문에서는 한 음률에 다른 가사를 붙이는 경우, 풍자나 익살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경의를 표명하기 위한것으로 씌이기도 한다.          패러디가 다양하게 이루어지면 문학과 예술의 저변도 그만큼 넓어질수 있다. 보다싶이 우리 선수들의 패러디 그림은 체육에까지 그 재미와 의미가 확장된 용례(用例)이다.   치솟는 여름의 열기와 더불어 연변팀이 몰고 온 축구의 열풍으로 온 조선족 사회가 도가니로 달아오르고 있다. 모두가 연변팀의 경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다양한 이벤트로 축제를 즐기고있다. 그 축제의 주인공들인 지문일, 하태균, 최민등 그라운드를 날아예는 선수들은 우리에게서 판타지 영화가 만들어낸 영웅에 못지않은 최고의 슈퍼맨들이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는 축구로 인해 모두가 하나가 되였다. 이미 축구는 조선족의 지역 정체성의 하나로 작용하고있는것이다. 이 와중에 문화의 힘을 무시할수 없다. 작게는 패러디로부터 크게는 축구장을 뒤흔드는 응원의 행위까지 바로 문화가 빚어내고 보여주는 힘이다. 모두가 합심해 더욱 큰 에너지를 창출하고 진정으로 빛나는 축구문화를 만들어갔으면하는 바램이다.     기발하게 희화화(戱畵化)된 축구 패러디물이 선수 본인이나 그림을 보는 팬이나 다 같이 즐겁게 한다.      "연변일보" 2016년 7월1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3    꿈과 사다리 댓글:  조회:2345  추천:10  2016-06-29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6] 꿈과 사다리 한발 한발 차근차근 오르렴 나는 괜찮으니 마음 놓고 오르렴 키다리가 되여 높은 벽에 이마라도 잇대여 사다리가 되여주고 싶은 아버지 사다리는/ 우리들 아버지같다… 한 아동작가의 “사다리”라는 동시의 절록이다.     일전 어린이 독서대잔치에서 무수한 “사다리”의 투영을 볼수 있었다. 연변독서절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연변독서협회, 연변조선문독서사협회,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룡정윤동주연구회가 주관한 “엄마랑 함께 하는 독후감쓰기 잔치”와 “중국조선족인물전기 민족문화지식경연 시상식”이 더불어 열린 가운데 200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상패와 더불어 상물로 책들을 아름벌게 받아 안았다. 색동옷 민족복차림으로 책을 껴안은 아이들의 모습은 총기와 해맑음으로 빛났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왔고 함께 시상대에도 오른 학부모들은 아이들 수발에 땀동이가 된 얼굴들이 감개로 흠뻑 물젖어 있었다. 일상에서 책으로 어우러진 가족의 모습을 보일것이라고 모두들 소회를 밝혔다. 사실 애초 어른과 아이들의 독서물은 그 경계가 모호했었다. 아동문학관련 리론서를 읽다가 접한 충격적인 진실, 17세기중엽까지는 특별히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책을 빌어 읽으며 만족할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요 역시 어른들의 짧은 노래정도, 대개 술집에서의 해학, 풍자, 멜로 등 성인용 이야기로 가득찬 노래였다. 아이들이 접한 동화도 어른들의 생활에 얇은 베일을 씌운것이였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아름답게 읽고있는 “백설공주”나, “빨간 모자”,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원본은 지금보다 아주 다르다. 랭혹한 현실이 그대로 씌여져 무섭고 잔혹하며 지어 외설적이기까지 하다. 그 와중에 희랍인의 손에서 “이소프의 이야기”가 나와 만만다행이였다. 이 획기적이라 할만한 책은 민화를 모아 그림이 주가 되게 하고 그림에 짤막한 설명문을 붙인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아이들에게 걸맞는 책이 드디여 탄생된것이다. 아이들은 이제 악몽을 유발하는 어른들의 무서운 책이 아니라 미몽을 선사하는 자신들의 감미로운 책이 있게 되였다.   독서교육의 중요성은 어제, 오늘 회자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소질이나 특기, 장래희망등을 고려해 좋은 책을 선정, 권장해 주는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프랑스의 지성적인 비평가 레미 구르몽은 “책은 어느 사람에게는 울타리가 되고 어느 사람에게는 사다리가 된다.”고 했다. 지속적인 독서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지식습득과 꿈을 향해 오르는 사다리를 놓아주는 작업은 그래서 십분 중요하다.    독서의 사다리,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시나브로 꿈을 향해 뻗어 있다.   “연변일보” 2016년 6월 16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2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 댓글:  조회:2432  추천:10  2016-06-18
. 제3회 "두만강"문학상 축사 .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   김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존경하는 청산그룹 리청산 리사장님, 길림신문사 홍길남사장님,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님 그리고 귀빈 여러분, 매스컴과 문학계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세상이 밝은 기운으로 가득한 6월의 복판에서, 저 역시 “두만강”문학상 수상자의 한 사람으로써 세번째로 이어지는 두만강문학상 시상식에 축사를 드리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먼저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하여 평소 책임감을 떠인 창작혼과 부단한 정진으로 오늘 영예의 상을 수상하신 수상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두만강 문학상”은 길지 않은 년륜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계의 영향력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 동안의 수상작 또한 우리시대의 삶과 정신을 결집해 낸 문학계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문학상의 짜임새나 수준이나 기획력이 문단의 그 어떤 상에 비견해도 못지않다는것을 생각하면 이제 권위와 품격을 자랑하는 “두만강 문학상”의 성장과 미래가 눈앞에 훤히 보인다고 해도 좋을것입니다. 이 소중한 문학상이 우리문학의 감성에 맞는 문학적 토양을 잘 걸구어 가면서 중국조선족 문학의 한 진경(眞景)을 펼쳐보이기를 기대해봅니다. 조선족문단에서 해외인사들의 헌금으로 세워진 이러저러한 문학상이 적지않지만 순 우리 기업인의 쾌척으로 이루어지고 이렇게 이어져가고있는 문학상은 흔치않은줄로 알고 있습니다. 상의 위의(威儀)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열정과 로고를 바치신 리청산 리사장님과 “길림신문”이 이룬 결실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지금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 몸부림하고있으며 또한 서글프게도 인문학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인이 몸 담근 성소(聖所)에는 그 사회적인 책임감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렬악한 상황속에서도 굳건하게 문학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문인들이야말로 민족발전의 지혜를 창출하고 그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우리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선봉장들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상하신 여러분의 작품들은 참으로 값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조광명 시인님이 보여준 탁월한 의경의 경지와 오경희 수필가님이 보여준 민족정서의 고운 결, 우상렬 교수님이 보여준 정조준의 호쾌발랄한 평문을 수상작으로 뽑으면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서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이렇듯 시대의 아픔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붙잡도록 해주는 빼여난 작품을 창작하신 수상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문학이 바로 부침과 리산의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의 아픔과 고민을 도닥여 주고 지역과 세대를 하나로 이어주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될것입니다.   존경하는 문인 여러분, 이러한 창조적 정신의 발현으로 우리 문학의 진흥에 적극 동참하여 앞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의 장하에 큰 흐름을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이황의 시조 한수로 오늘의 심경을 비추어 읊고자 합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류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하리라   감사합니다.   2016년 6월 16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1    소울메이트 댓글:  조회:2255  추천:14  2016-06-18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5]   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는 령혼 (soul)과 동료 (mate)의 합성어로 서로 뜻이 잘맞는 사이를 지칭한다. 문학, 예술, 스포츠, 비즈니스 등 분야에서 큰 성공을 한 사람에게는 흔히 도타운 솔메이트의 존재가 있다.     그 일례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 괴테와 실러를 들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한 자극과 격려를 통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해나갔다.    두 예술가의 우정은 베토벤과도 이어졌다. 두 문호를 존경했고, 이들의 작품에 큰 령감을 받은 베토벤은 두 사람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소울메이트들끼리 단순한 우정을 넘어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을 유발시킨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또 한쌍의 유명한 소울메이트이다.    동생 테오는 괴퍅한 성격을 가진 형의 재능을 알았고 힘들게 번 돈으로 형을 위해 생계비를 대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고흐가 자살한 뒤, 애달픈 나머지 테오는 여섯달만에 형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형제의 묘는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에게도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바로 송몽규이다. 둘이는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 석달을 차이 두고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명동학교도,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함께 다녔다. 송몽규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자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여 자신의 작품에 날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둘은 또 경성의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했고 학교에서 함께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당시 “문우”에 실었던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그의 룡정자택 장례식에서 랑송되였다.   두 사람은 또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제경찰의 마수에 떨어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일제의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와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가족에서는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송몽규의 시신도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혔고 “청년문사(文士) 송몽규” 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 윤동주의 묘쇼곁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둘이는 묻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오늘날 윤동주는 겨례 시인으로 높이 추앙되였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오래전에 등단한 문사이자, 철저한 반일지사인 송몽규에 대해 아는이는 적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나눈 진정한 소울메이트였으니깐.   “연변일보” 2015년 5월 20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0    구순(九旬)의 박물관 댓글:  조회:2391  추천:11  2016-05-29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4]   구순(九旬)의 박물관         지난 년말과 년초, 룡정에서는 구순(九旬)의 로인장 두분이 련이어 “가학서거 (架鹤西去)”하셨다.   한분은 “룡정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최근갑옹, 또 다른 한분은 민족시인 심련수의 동생 심호수옹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서 리직휴양한 후 달갑게 민족의 뿌리를 찾는 “심마니”가 되여 온 최근갑옹은 유서깊은 룡정에 3.13반일의사릉, 서전서숙옛터, 명동학교 등 민족의 발자취를 기념하는 9개의 유적비를 세우고 성역화하는데 만추를 불태워왔다. 모두들 즐겨 부른 그의 호는 “룡정력사의 산증인”, “비석아바이”였다.       최근갑옹과 필자     “윤동주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추앙받고있는 심련수시인의 동생 심호수는 룡정의 시교에서 형님의 소중한 육필 원고를 항아리속에 담아 무려 55년간이나 보존해왔다.    루루 파란의 세월, 목숨으로 보존해온 이 작품들은 “일제암흑기의 한민족문학사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것”으로 정평되고있으며 그로서 심련수라는 연변이 낳은 또 하나의 걸출한 민족시인의 존재를 존립시켰다.   지난해 심연수의 동생 심호수선생(가운데)의 자택을 찾은 필자 (왼쪽 윤동주의 조카 오인경 여사)     사실 현대인간들은 자연의 보물이든 인공의 유물이든 소중한것을 보존하는데 태만하기가 일쑤이다. 그리하여 금쪽같은 문화재들은 세월의 류수에 파이고 깎이고 바래진다. 게다가 인간의 망각이란 무책임때문에 감감 잊혀지기도 한다. 이런 보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은 뻔하지만 이를 실천할 의지나 재원이 없는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문화재의 가치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에 전수되고 향유될때 제 의미를 갖는다. 세월의 더께에 쌓여 처박힌 서류더미속 력사나 문화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 일상속에 스며들어 존재할때 우리 문화는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민족을 위하여 후세를 위하여 온 몸을 던진 선각자들의 치렬한 몸짓과 웅숭깊은 소리, 그 헌신의 성과는 기록되고 보존되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선인들이 남긴 우렷한 력사와 비범한 지식과 장인의 기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우리는 충분한 노력을 하고 있는걸가? 이들을 승계해 나가는데 얼마만큼 신경을 쓰고 있는걸가?      이제 구순의 지킴이들을 우리는 홀연히 보냈다. “로인 한분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불탄것과 같다”던 외국속담이 흥감스럽지 않은 절실함으로 이 시각 떠오른다.     구순의 지킴이들은 평생을 걸고 우리의 보물들을 보존해왔다. 이제 보전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네들의 타계가 한 력사와 문화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도록 그들의 통찰을 기록하고 그 노력의 결실을 보존해야 한다.     룡정의 력사와 문화를 위해 로구를 투신해온 구순의 지킴이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그들의 타계를 애닲아 한다.   "연변일보" 2016-5-6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9    리얼리즘과 문학비 댓글:  조회:2037  추천:17  2016-05-04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2]   리얼리즘과 문학비     2015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시예비치     그녀의 “작품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기록한 기념비적 문학”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지난해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선정하면서 밝힌 리유이다. 열네번째로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녀성작가의 문학과 작품을 읽으면서 다른 한 녀성작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고향 룡정의 비암산 자락에 호젓이 서있는 하얀 기념비를 떠올렸다. 바로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였다.   두 사람의 작품은 닮은데가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기자출신의 저널리즘 작가이다. 2차대전 참전 녀성들, 체르노빌 핵발전소사고 피해자들, 붕괴된 쏘련의 사회상… 커다란 력사적 사건속에서 심신의 상처를 입고 소외된자들의 고통의 목소리를 부각시켰다. 강경애 역시 저널리즘에 종사한적 있다. 룡정에서 조선일보 간도지국장까지 지낸것이다. 강경애는 핍진한 리얼리즘적 기록으로 어두웠던 일제강점기에 억압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들의 고난의 삶을 그려내였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로서는 흔치 않게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이 녀류작가들은 모두가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고난속 인간이 당착한 냄새와 색갈과 소소한 일상을 보고 듣고 말한다     간도체험을 수작으로 펴낸 강경애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지만 이들의 작품이 요즘의 우리 문학에 시사하는바는 크다. 사회참여에 있어서 문학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있다. 따라서 당위의 문학으로 위세를 떨쳐온 리얼리즘도 이제는 낡투로 색바래졌다고 어떤이들은 말한다. 시장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 문학은 자칫 그렇지 않아도 적은 독자까지 잃을수 있다. 상업주의 문학체제에 순응한다면 우리 문학의 이념은 결국 감각적인것이나 실험적인 론리에만 부박하게 꺼둘리고말것이다. 우리 문학에서 력사와 사회와 관련된 공동체 인간들의 삶을 다루는 그런 문학을 격려하고 가꾸어야 하며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선행되여야 한다고 본다. 여러 쟝르, 여러 문체의 작품을 통해 시대의 진실을 전파하는 일을 소홀히 할수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에게는 철이 지난 명제로 비쳐질수도 있겠지만 과감하게 시장의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진솔한 언어로 오늘날 공동체의 깊숙한 아픔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성찰할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문학이 아닐가! 어제날의 강경애가 그러했고 오늘날의 알렉시예비치도 그러했다. 하기에 그들은 모두 주어진 소명을 하얗게 불태우며 작품의 행간에 민족과 시대를 위한 오롯한 기념비를 세울수 있었다.     며칠전 기념행사를 기획하여 소설가들과 함께 강경애 문학비에 헌화를 하고 돌아왔다. 간밤에 내린 작달비에 말쑥하게 씻겨진 햐얀 기념비, 산행에서 몇번이고 무심히 지나쳤던 문학비가 다시 심중에 커다랗게 안겨온다.    “연변일보" 2016-4-21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8    “백세” 김학철 댓글:  조회:2557  추천:30  2016-04-23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1]     "백세" 김학철       올해는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탄생 100돐이 되는 해이다. 파란많은 경력과 뜨겁고 강렬한 문체로 작가의 량심을 화인처럼 새겨낸 그이의 문학은 여전히 우뚝하다. 그이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류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김학철과 더불어 100년이라는 상수(上壽)로 기억되는 문화명인들이 적지 않다. 올해는 또 사재를 털어 화림신인문학상을 제정하여 문학후대들을 길러낸 항일녀걸 리화림이 탄생한 10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연변에 오래동안 체류하면서 그 체험을 치렬하게 엮어낸 한민족 사실주의 녀성작가 강경애는 탄생 11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명년이면 곧 온 겨레가 애대하는 윤동주 시인도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영원한 청춘” 윤동주가 100세 로인으로 우리곁에 다가오는것이다.    해외에는 사후 백주년을 맞는 문호들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가, 미국에서는  “야성의 부름”의 작가인 소설가 잭 런던이 올해로 사후 100주기를 맞는다.   탄생 혹은 타계가 백주년으로 그 의미가 다시 돋을새김 된다. 인고와 질곡의 긴 시간을 척각으로 헤쳐온 김학철처럼 치렬한 시대를 헤쳐 나가면서 우리 문학사의 주역으로 우뚝 선 이들은 응분의 역할로 그 선각자적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민족의 찬란한 성좌요, 지워지지 않는 전설이다. 그들이 지내온 시간과 일구어낸 작품의 업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자리에 많은 후배, 제자들이 있고 오늘의 조선족 문단이 있다. 백년이란 시간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문학사적 세월이 어떤것이였던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본다.   그닥 길지않은 문단사에서 처음 백주년을 맞는 문인들이 등장한 우리 조선족문단은 서둘러 거목들을 기릴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이 우리의 문학 나아가 민족사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피는 일은 사뭇 중요하다.  후대가 선대의 루루세월 경유해 온 문학생애와 공적을 알아가는 이러한 기념과 조명은 변혁기 고전하고있는 우리문단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수 있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내는 계시로도 될수 있을것이다.   올해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쉐익스피어는 무려 서거 400주년을 맞는다. 100주년, 200주년을 넘어 설 우리의 문학을 꿈꾸어 본다.       “연변일보” 2016년 4월 14일    [출처] “백세” 김학철|작성자 김 혁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7    난 로봇이다 댓글:  조회:2939  추천:11  2015-09-14
칼럼     난 로봇이다     김 혁     과학환상소설의 거장 아시모프의 “로봇단편소설전집”이 중문으로 출간되였다. 다양한 쟝르소설의 수용과 창작이 척박한 조선족문단에서는 과학환상소설은 제때에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서러운 쟝르"이다. 지난 80년대 과학분야의 종합지에서 간혹 단편과학환상소설을 실으며 아시모프라는 이름이 잠간 소개된적 있었던것 같다. 유태인 방아간집에서 태여 난 아시모프는 평생에 걸쳐 200여편의 과학환상소설작품을 창작, 로봇의 개발과 응용 과학의 대중화에 거대한 작용을 놀았다. 아시모프의 작품들은 지금도 해외에서 그 인기가 높아 몇해전에도 할리우드에서 그의 단편을 개작한 영화 “난 로봇이다”가 크게 흥행을 보였다.   2   “로봇(robot)”이라는 단어는 1921년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희곡에서 처음 쓰였다. 희곡에서 나오는 인조인간들을 창조해 낸 천재 과학자의 줄임말, 그리고 체코어로 “로동자”의 의미를 담은 로봇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바야흐로 로봇의 시대다. 산업용 로봇이 거부감 없이 인간 옆에 선것은 1960년대 자동차업계에 등장한 자동화기계에서부터 따져도 벌써 반세기다. 이젠 군사, 의료, 청소 분야를 넘어서 감성로봇까지 등장한다. 아시모프의 필끝에서 “천방야담”의 이야기로만 알았던 로봇이 생활속으로 빠르게 파고 들고 있다. 로봇기술의 혁신으로 인간과 기계의 협업은 더욱 긴밀해질 전망이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로봇이 인간을 돕는다.생산 현장에서는 제조 로봇이 근로자와 함께 일한다. 해저•우주탐사 로봇뿐 아니라 가사도우미 로봇까지 등장했다. 로봇청소기는 생활가전의 필수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해외에서는 가정용 로봇이 이미 상품화되고 있어 가사와 방범, 오락, 교육 등 일명 “가족 도우미” 형태로 다양화되고 있다. 업체 관계자들은 첨단기술의 집합체인 로봇산업이 21세기에 가장 성장잠재력이 높은 산업이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3   일전, 여러 매체의 주도로 펼쳐진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선발에서 유난히 인기를 끄는 인물이 있었다. 할빈공업대학 홍병용교수이다. 중국로봇축구의 아버지로 지칭되고있는 그는 명실상부하게 중국로봇문화예술분야의 개척자로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처음으로 마이크로 마우스를 연구 개발해 냄으로써 당시 중국에서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붐을 일으켰으며 우주공간   연구프로젝트의 국내에서 선도적인 위치로 우주항천부의 상을 타기도 했다. 더우기 시뮬레이션 로봇축구경기와 완전자률형 로봇축구경기, 상응한 경기 플랫폼을 개발해 냈다. 첨단 과학 분야에 이름을 남긴 중국 조선족 인걸, 그 이름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신기 그 자체인 로봇처럼 존외(尊畏)스럽고 자랑스럽다.   “송화강” 2015년 8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6    피서(避暑)의 방식 댓글:  조회:2763  추천:13  2015-08-19
. 칼럼 . 피서(避暑)의 방식 김 혁         1 에어콘이 고장났다. 하필이면 이 삼복더위에.  판매상과 련계해 고치려니 이핑계 저핑계 시종 찾아주질 않는다. 그렇다고 스스로 뜯어 가져가기도 번거롭고해서 더위에 대처할 궁여지책으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구식 선풍기를 꺼내 먼지를 닦고 다시 돌렸다. 개운치 못하다. 나의 애견 두마리도 더워에 꼬리를 사린채 혀를 잔뜩 빼물고 있다. 빈 콜라병에 물을 채워 랭장고에 얼구었다 꺼내주니 두 녀석 다 찬 병에 배를 딱 붙이고 엎드려 있다. 그래도 여전히 더운지 혀를 빼물고 주인장을 빤히 쳐다보며 할딱거린다. 더웁기는 사람이나 매 한가지다.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사람을 들볶는다. 불볕더위란 말이 명실상부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올해는 이례적으로 삼복이 왕년보다 열흘이나 더 길다고하니 이 더위를 어떻게 지낼지 짜증부터 앞선다.   2 요즘 세월에는 에어콘이다 선풍기다 랭장고다 해서 그나마 더위를 쉽게 보내지만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 더위를 물리쳤을가? 살펴보니 옛사람들은 더위나기에 무척 고심했고 그 노력은 나름 이채롭기까지 했다. “오월춘추 (吴越春秋)”의 기재를 보면 춘추시기 여름이 되면 궁정에서는 얼음찬장 (冰厨) 을 만들었다고 한다. 월나라 왕 구천(勾践)은 가장 더운 삼복기간이면 그 얼음 찬장”에서 지냈다고 한다.  당나라때에 이르러서는 한수 더 떠서 궁정에 기계의 힘을 빌어 좌우로 움직이는 부채를 설치했다고 한다. "극록담(克录谈)이란 책에도 룡피선(龍皮扇)이라는 부채가 등장을 하는데 신라의 스님들이 가져온 특수 어피(漁皮)로 만든 이 부채는 당나라의 대부호가 소유했던 것으로 이 부채는 흔들지 않아도 저절로 부채에서  찬 바람이 나왔다고 적고 있다. 요즘의 선풍기의 비조(鼻祖)라고 할가.  그리고 또 찬물을 관작들의 거처의 지붕으로부터 내리부어 인공비줄기를 만들었는데 그 장면이 실로 가관이였다. 이러한 피서 장치가 되여있는 집을 “수정(水亭)”이라고 불렀다. 당나라의 경국지색 양귀비는 더운 여름엔 설산의 눈속에서 자란 누에 꼬치에서 뽑아낸 명주 실로 짠 빙잠옷(氷蠶衣)을 입고 더위를 이겨 냈다고 한다 이 옷을 입고 있으면 더위가 석자 앞에서 물러 났다나? 거기다 양귀비의 오라비 양국충의 피서법도 가히 사치와 호사의 극치 였다, 빙병(氷屛)이라 하여 얼음으로 만든 병풍을 만들어 쳤는데 그 얼음병풍에다 산수화나 “십장생”그림까지 새겼다고 한다. 얼음병풍을 치고 연회를 벌이다가 지나치게 추워지면 기생들을 홀랑 벗겨  그 체온으로 냉기를 중화 시켰다 하는데 이를 가리켜서는 육병(肉屛)이라 했다. 그야말로 피서 무도(避暑无道)가 아닐수 없다, 청나라때에는 임금과 황후들이 궁정을 나와 피서지로 가는 방법이 류행되였는데 그래서 오늘의 유람성지인 하북 승덕(承德)피서산장이 생겨나게 되였다.  문헌 "두양잡편"(杜阳杂篇)에서는 특이한게 눈에 띄는데 신기한 화분 한점을 키워 이를 창문에다 올려 놓으면 더운 바람이 지나면서 저절로 시원한 바람으로 바뀐다고 했다. 봉황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해서 "봉수목(鳳首木)"이란 이름이 붙은 이 화분은 이를 방안에 두면 서너칸 랭방은 거뜬 했다고 한다, 이러한 피서백태(百態)는 더위에 시르죽은 마음들을 무마하기 위한 전설이라 여겨진다.   우리민족의 선조들도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먼저 열(热)로서 더위를 다스리는 “이열치열 (以热治热)”의 방법이 있다. 이맘때 딱 좋은 음식으로 삼계탕과 개장국을 든다. 당연히 “이랭치열(以冷治热)”의 방법도 있다. 참외, 수박 같은 과일을 흐르는 물에 담가두었다가 먹고 싶을때 꺼내 먹군했는데 그 시원 달콤한 맛은 무더위를 싹 가시게 한다.  남녀로소 할 것 없이 즐겨 입었던 것은 삼베옷, 모시옷이다. 더위가 계속 이어질 때는 생모시로 된 고의, 적삼 또는 치마를 해 입었다. 이런 옷들은 습기를 흡수하고 통풍이 잘 되였다.  통풍과 해볕 가림을 하기위해 발을 치고 돗자리를 깐다. 발이 처진 방안에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더위도 한 발 물러서게 마련이다. 낮잠이라도 청할 양이면 없어서는 안될 것이 목침이다.  다음 탁족(濯足)이라는 운치있는 방식이 있다. 말 그대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흐르는 물에 더위를 씻어내는 일이다. 록음이 만드는 짙은 그늘과 귓가를 스치는 요란한 물소리가 한여름 더위를 단번에 사라지게 한다.. 더위 피해 물 가에서 다투어 발 담그니(避暑水边爭濯足)… “도하세시기속시(都下岁时紀俗诗)” 중의 한 구절이다. 탁족은 몸의 열을 내모는 기 순환의 원리를 리용한 것이다. 즉 발은 모든 신경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을 식힘으로써 온몸에 찬 기운을 불어넣는 리치이다.     호젓한 계곡을 찾아 흐르는 물에 신심을 담그고 속세의 번뇌를 씻어내리며 그윽한 시조 한수 읊조리는 일, 그야말로 운치있는 더위나기가 아닌가!   3 옛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유용한 피서법으로는 책읽기가 있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사촌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옷을 벗거나 부채를 휘둘러도 불꽃 같은 열을 견뎌내지 못하면 더욱 덥기만 할뿐, 책읽기에 착심(着心)해 더위를 이겨나갈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사실 책읽기 정말 힘든 계절이다. 눅눅한 습기와 끈적끈적한 무더위, 어지간히 책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손에 책을 잡고 있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더위를 책을 통해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 여름과 책의 관계는 역설 그 자체이다. 책읽기를 뜻하는 한자말에는 독서말고도 “간서(看书)”, 그리고 “피서(披书)”라는 말이 있다. 그러고不上보니 “피서(披書)”와 “피서(避暑)”는 음이 꼭 닮았다. 독서야말로 습하고 더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가장 쉽고 매우 저렴한 길이 아닐가 한다.  올 여름엔 독서삼매경에 빠져 망서(忘暑)하리라!    -“청우재(听雨斋)”에서   “문화시대” 2011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5    영화"암살"의 녀주인공과 "간도참변" 댓글:  조회:4823  추천:16  2015-08-18
. 력사만필 .  ​ 영화"암살"의 녀주인공과 "간도참변"   김혁    영화 “암살” 포스터, 영화 속의 녀주인공 안윤옥은 “경신참변”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한국영화의 흥행신화를 다시 쓰면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암살”에서 톱스타 전지현이 주연한 안옥윤은 “간도참변”에서 어머니를 잃는다.   또 한 부의 의열단활동을 다룬 영화 “아나키스트” (개봉: 2000년, 감독: 유영식, 출연: 장동건, 정준호, 김상중, 이범수, 김인권)에서도 주인공 상구는 경신년 간도 대학살에서 친지를 잃고 상해로 와서 의열단에 가입한다.   “간도참변”은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일어났던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인사회· 항일단체. 학교· 교회 등을 초토화시켰다. 간도참변으로 조선인 1만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참변으로 간도를 포함한 동북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조선인 사회 및 항일단체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간도참변”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사건은 “장암동 학살사건”이다. 한국의 “제암리 학살사건”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간도참변을 떠올리면 모두 “장암동”부터 떠올린다.   경신년간도대학살의 현장을 찾았다.     청산리, 봉오동 대첩에서 연전연승한 독립군은 일본군과 맞대결을 계속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만주벌의 북쪽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전을 피하고 거듭되는 전투에서 피로해진 부하들의 건강회복이 필요해서 취한 조처였다. 한편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  청산리에서 대패하고 퇴각하는 일본군 ​        일제는1920년 10월부터 3개 월 여에 걸쳐 조선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장암동 주민들의 희생이 가장 컸다. 그 참안현장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몇몇 문학지기들과 매스컴 기자들과 함께 아침일찍 연길 동북아 터미널에서 개산툰행 버스에 탑승했다.     9시경에 용정 동성용진에서 하차해 도보로 장암촌을 향했다.   평소의 답사처럼 흔쾌히 길에 올랐는데 그렇게 먼 길일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잡풀이 뒤 덮인 산자락에 난 소수레길을 따라 도보로 30여 리를 걸었다. 몇몇 대원들은 평소와는 달리 힘에 부쳐했다.     오후 한 시가 넘도록 무려 4시간이나 강행군을 해서야 세전이벌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동명촌 제2촌민소조에 이르렀다. 좁은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니 그곳이 바로 장암동이라고 했다. 초가집과 벽돌기와집이 섞인 오붓한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이지만 수십년 전 이 곳에서는 일제의 몸서리치는 만행이 자 행된 참변의 현장이었다.   마을 중심에 들어서니 "동명"는 표지석이 보였다.   우리는 동명촌에서 근 60년간 살아 왔다는 주병욱(75세)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에 의하면 촌민들에 의해 “노루바위 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중국말로는 장암동, 간장암동(間獐巖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촌민들 거개가 한국으로 출국하고 지금은 마을 주민 다수가 중국인들이라고 했다.   그가 가르켜준대로 골짜기를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동명촌 제3촌민소조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 앞쪽 언덕에 새로 수선한 "장암동(獐巖洞)참안유적"비가 있었다.   석비정면에 “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못 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6月30日     유적비에는 몇글자로 응축 된 그날 장암동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것일가!   청산리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조선인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으로 혈안이 되었다 조선인들이 독립군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뻗친데 대한 분풀이었다. 이 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ㆍ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이 대첩을 이룰수 있었던것은 지역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군을 쫓아 시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 변에서 조선인 마을만 보면 수색하여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녀성들을 간음하며 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삼광전략(三光戰略)” 즉 모조리 죽이고, 략탈하고, 불지르는 초토화 섬멸 작전이었다.     일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당시 동북에서 발행했던 “길장일보(吉長日報)” 1920년 11월 7일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있다. “그들은 독립군이든 아니든 묻지도 않고 조선인이라면 함부로 수색하며 살해하고 있다. 례컨대 삼둔(三屯)에서 조선인 3~4명이 체포되었고, 남대고비(南大古比)ㆍ오술동(五述洞) 마을의 가옥은 몽땅 소각되었다. 그리고 빈송배(杉松背) 등에 서는 14명이 타살되었는데, 그중에는 학생이 5~6명, 교원이 1명이 있었다.   소가(小街)에서는 12명이 타살되었고 경성위자(鏡城威子)에서 타살된 남녀는 도합 200여 명에 달한다. 삼도구에서 불에 탄 화민(華民) 가옥은 2호이고 조선인 가옥은 500~600호이다. 삼도구 내의 청산리 지방의 전 촌 조선인가옥 1,000여 호를 전부 불살랐으며, 봉자구의 조선인 가옥 70~80호도 불태워버렸다. 회경가의 50~60호의 조선인 가옥과 명동학교도 불태웠다. 최근 3주일 내에 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 명에 달하며 매개 촌에 이르러서는 남녀를 한 곳에 집결시켜 놓고 함부로 총살하거나 불태워 죽였으며 혹은 집 안에 가두어 놓고 소살하였다.”   그중 가장 잔인한 학살현장의 하나가 바로 장암동이었다.     1920년 참안을 앞둔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 있었다. 장암동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수교신자들이었으며 린근에서 장암동 마을을 “예수 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영신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 “3,13”반일시위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원들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장암동은 또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촌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었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만주지방 총회장 양도헌(梁道憲)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반일단체인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늘 장암동에 와서 활동하였다. 이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무장독립운동비사”)     1920년10월30일 새벽 0시30분, 용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었다. (일본 제19사단사령부, ).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다시 불 속에 던져넣었다.   가슴치며 절규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 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며칠후였다.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강요했다. 유족들이 위협에 못이겨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 위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그후 이중학살된 참혹한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도 가릴 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일제는 장암촌에서 류례가 없는 잔악한 행위을 우리 동포에게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장암촌은 폐허가 되고말았다. ​ ​ ​ “경신참변”에서 페허가 된 마을 ​   사건 다음 날부터 장암동을 비롯해 일본군의 만행 현장을 조사한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과 카나다 북장로회 선교사 푸트가 학살현장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들에 의해 일본군의 몸서리치는 잔학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마틴은  “견문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10월 31일 일요일 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용정에서 출발했다. 지난 10월 29일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 보병 한 개 부대는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을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보였다 ...이런후에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을 축하했다.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가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알몸인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앞에서 구슬프게 울고있었고... 큰 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채로 지은 학교의 대건축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 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개를 목격하였다”   선교사 푸트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11월 4일에 간장암동에 갔더니 촌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0월 30일에 왜병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을 가했다’ 나는 가옥 9칸과 교회당과 학교가 잿더미로 된 것을 보고 사실임을 알았다. 또 11월 1일에는 왜군 17명, 왜경 2명 및 조선인 경찰 1명이 이 마을에 와서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 내다가 죽인 후 그들의 처를 불러내어 사자의 경력을 말하라고 고문했고, 그 다음에 촌락의 주민들 모두 모아서 일장 연설을 한 후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피에 젖은 만주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기시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와 “상하이 로투(路透)통신사”등에 보도되었다.     이렇게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일제는 상부에 바치는 보고에서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장소로 되는 집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 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고 진상을 왜곡하여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했다.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일본군은 용정의 선교사들이 조사하러 다니자 민간인 대학살이 외국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이를 경계하는 기록도 남겼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죽이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저들 선교사는 다음 31일 그곳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시체에 밤 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서 숯이 되어있는 것을 촬영했다고 한다) 조위금 200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것은 사실이다. 본건을 혹은 학살사건으로서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 (“장암동 부근의 토벌 상황”“, “장암동 소탕 상보”)   사책들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 해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 참변”과 함께 우리 민족이 만주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    "장암동 참안" 유적비 앞에서의 필자     유적비에 묵념을 올리고 마을 동쪽골짜기에 자리잡고있는 노루바위를 찾아보았다. 주병근 할아버지에 의하면 “노루바위는 원래는 제법 선바위모습을 한 바위였는데 한때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바위 일부를 부셔버렸다”고 한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온 하루 답사를 강행한지라 발을 조이는 신발이 거추장 스러워 아예 신발을 벗고 걷는 대원도 있었다. 발이 부르튼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릿하게 하고 있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단 먼 답사길에 지쳐서가 아니였다. 수십차 답사를 이어왔지만 이번 처럼 가슴이 무거워나는 답사길은 없었다.   석양이 서산마루를 핏빛으로 물들이고있었다.   어둠에 사위어 가는 노루바위 골을 다시 돌아다 보았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하지만 답사 내내 노루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처연히 들려오는 꿩 우는 소리만이 어젯날의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픈 수난을 이야기 하는듯 했다.    - “청우재(听雨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영화 "암살" 예고편 (아래단 왼쪽의 버튼을 누르세요)  
54    어느 화백의 실크로드 댓글:  조회:2935  추천:18  2015-07-30
칼럼   어느 화백의 실크로드   김혁 (소설가. 인물전 “한락연의 이야기”의 저자)     1 인류는 길을 따라 소통하고 교류하며 문명을 꽃피워 왔다. 그 대표적인 길이 중국 장안에서 시작돼 중앙아시아를 관통, 유럽 지중해까지 연결 된 실크로드다. 중국의 고전 “서유기”에서 등장하는 당승의 원형인 현장법사가 1,300년 전 기록으로 남긴 귀중한 자료 “대당서역기”에 대서특필했던 곳이 바로 그 실크로드다. 고구려 고선지 장군의 활약과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혜초 스님의 법경이 바람소리로 남아 있기도 한 길이  바로 그 실크로드다. 이 길을 통하여 도자기, 향신료, 유리, 보석, 옥, 직물, 쌀, 밀 등 인류가 생산해 낸 모든 물건들이 거래 되였으며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비단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길을 따라 물건만 오고 간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도 함께 주고받았다. 동서양의 교역과 문화의 네트워크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약 6400 킬로메터에 이르는 방대한 륙로 교통망이 구축되였다.   2 최근 실크로드는 또 한번 굳잠에서 깨어 나고있다. 중앙아시아의 경제성장 잠재력이 부각되면서 주변국인 일본에서는 실크로드 루트의 동방의 종점은 일본이라고 력사를 왜곡하고 있는가 하면, 중국을 비롯한 한국, 로씨야 등 린접국들은 그 경제협력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도 있다. 따라서 한국이 중국의 동부 도시들과만 교류에 그치지 말고 특색있는 서부지역과 교류의 다변화를 꾀해 새로운 “한중-로드”를 구축 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나오고있다. 한반도 종단 철도를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확장하겠다는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에서 실크로드는 “장미빛” 환상의 길목이며 그 길 위에서 한국과 중국은 경쟁자이자 동반자인 셈이다.   ​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3 그 길우에 혼을 묻은 화가가 있다. 1898년 이주민들이 일군 북간도의 룡정촌에서 태난난 그의 원명은 한광우, 한락연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 1914년 룡정에서 헤이그 밀사 리상설이 창설한 “서전서숙”이 전신이였던 룡정보통학교를 마쳤고 용정에서 3 ·1운동의 추동을 받은 독립시위에 가담하였다. 일경의 리스트에 오르자 1919년 상하이로 갔고 임정의 초기 멤버로 활약하였다.  상해에서 중국 최초의 미술전문학교를 나왔다. 1923년 심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29년 프랑스로 가서 루브르예술학원을 졸업했다. 재학 당시 유럽 각국을 돌며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자 그는 곧 중국으로 돌아와 무한, 중경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다. ​​​ 서역의 풍광을 담아 낸 한락연의 유화 ​   그는1943년부터 중국에서 처음으로 서역의 벽화모사와 유물 고찰작업에 착수한 사람이다. 이때 장족, 몽골족, 위구르족 등 중국 소수민족의 생활풍습 등을 생동감 있는 화법으로 그려냈는데, 이는 당시 중국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이름난 석학 성성(盛成)선생은 1980년대 한락연의 그림전을 보고 이런 글발을 남긴적 있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었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낙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 1947년 다시 벽화모사와 유물고찰을 마치고 둔황에서 란저우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한락연은 실크로드 위에 육신을 바쳤다. 한국에서는 광복 60주년을 맞으며 덕수궁미술관 한락연 특별전을 가졌고 이어 “대통령상”이 추서(追敍)되였다. 2010년 고향인 룡정에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조성되였다. 피카소등 세계화단의 불세출의 인물들과 실크로드에 깃들어있는 인류의 보귀한 유산들이 한락연의 꿈을 키울 모판이 되였고 그의 화법에 그러한 심력이 녹아 들어있다. ​ ​고향 룡정에 조성된 한락연 공원 ​ 조선인 이주민의 후예로서 ,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그는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을 위해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혼신을 던졌으며 무엇보다도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주력하여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 전기적 색채가 짙은 한락연의 경력은 깊은 잠에서 깨어 난 실크로드와 더불어 뒤늦게 나마 중국과 세계 화단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청우재(听雨斋)”에서   “문화시대” 2015년 3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3    무자비(無字碑) 댓글:  조회:3581  추천:13  2015-07-13
칼럼   무자비(無字碑)   김혁   ​ ​"드라마 “무미랑 전기(武媚娘传奇)” 포스터     1   또 한부의 무측천의 일대기를 보여준 드라마 “무미랑 전기(武媚娘传奇)”가 브라운관을 달구며 안방극장을 찾았다. 빅스타 범빙빙의 주연으로 된 드라마는 3억원이나  투자 된 대형 사극으로 지난해 말 부터 중국 곳곳에서 촬영, 제작되여 올해 년초에 방영되였다. 끝임없이 리메이크 된데서 이 드라마가 무측천의 몇번째 드라마인지 모른다. 하지만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유명 녀배우와 거대 자금의 투입으로 “무미랑 전기”는 또 한번 가장 핫한 드라마로 떠올랐다.  ​ 무측천은 중국 력사상 유일무이한 녀제(女帝)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 부임한 뒤 2000여년, 중국 력사에서 녀성 황제는 단 한 명, 바로 무측천이였다. 하지만 그녀만큼 중국 력사상 호훼포폄(护毁褒贬)의 대상이 된 인물도 드물다. “정권 유지를 위해 무자비한 숙청을 일삼고 자신의 딸과 아들마저 죽인 천륜을 저버린 철녀”라는 평가와 “거의 반세기 통치기간중 강력한 중앙집권제 확립으로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을 꾀한 성군”이라는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럼에도 무측천은 중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두드러지게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정치에서 적절하게 당근과 채찍을 병용했고, 국제정세에 밝았고 인재를 등용했다. 그 결과 그의 집정기를 “당나라의 황금시대”로 평가받기도 한다. ​ 때문에 극적인 줄거리로 가득 찬 그녀의 이야기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 자주 오르는 “1순위의 소재”로 되고있다.     2   무측천은 당나라 초기 624년에 상인 무(武)씨의 가문에서 태여났다. 빼여난 미모 덕분에 그녀는 14살때 태종(太宗) 리세민의 후궁으로 뽑혔다. 리세민은 그녀를 “미랑”이라고 부르며 끔찍하게 아꼈다. 그런데 태자 리치도 그녀를 보고 사모에 빠졌다. 궁에서 벌어진 희한한 “삼각관계”였다. 그러다 리세민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화살을 맞은 상처로 앓다가 붕어(崩御)하고말았다. 태종이 죽자 무측천은 머리를 깎고 장안 감업사(感业寺)의 비구니가 되였다. ​ 태종의 5주기에 고종(高宗)으로 등극한 리치가 그 절을 찾았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무측천은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궁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후궁이였던 녀자가 다시그 아들의 후궁이 된것이다. 그때 무측천은 이미 서른한 살, 고종보다 네살이나 많았다.그러나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인차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녀는 기개와 권모로 천하의 대세를 바꾸었다. 고종이 두통과 시력의 저하로 정무를 힘들어하자 무측천이 점차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타고난 정치적 수완으로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나 인사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남편은 천황, 본인은 천후로서 실질적인 국정의 동반자가 되였다. ​    황위를 찬탈한 사악한 요녀로 알려졌지만 그녀는 뛰여난 정치재능을 보였다. 그녀는인재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는 “광초현재(广招贤才)”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요즘 영화와 텔레비에서 셜록 홈즈를 뺨치는 정탐인물로 부각되여 자주 등장하는 재상 적인걸을 비롯하여 준재가 그의 주위에 즐비하였다. 그녀는 특히 적인걸을 신뢰하여 이름대신 “국로(国老)”라 부르고 늘 그의 뜻을 따라 자신의 뜻을 굽혔다. 또 과거제도를 개편하여 특별한 재능인을 뽑았고 호구와 토지를 철저하게 조사하여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먹고 살수 있도록 했다. 황족이나 문벌귀족에게 그녀는 공포의 대명사였지만 백성의 립장에서는 구세주였던 셈이다. 무측천은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려고 애썼다. 면류관을 쓰고서 직접 신하들을 만나국사를 처리했다. 남성 황제들처럼 후궁도 두었는데 때문에 후세의 사가들이 그녀를 천하의 음탕녀로 그렸다. 그녀의 통치에 대해선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폄하의 시각이였다. ​ 무측천이 문인들을 우대하면서 그 풍조가 정착되여 당대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광범위한 예술과 학술의 무대에서 활보 할수 있었다. 2,200명의 당대 시인들이 지은 근 5만여편의 시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왕유(王維)․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리상은(李商隱)등 기라성 같은 뛰여난 시인들을 연줄로 배출한것도 이러한 풍조가 시문학 발전에 큰공헌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   “자치통감(資治通监)”은 "정사를 스스로 펴서 명찰, 선단하였기에 당시의 영현들이앞을 다투어 그를 섬기다"라고 그녀를 정평하였다.     ​ 3   서안의 서쪽에서 90키로메터 떨어진곳에 건릉(乾陵)이 있다. 고종과 무측천이 함께묻힌 묘역이다. 건릉에 이르는 약 1키로메터의 길은 문무 석상들이 시립해 있는데 이 묘역은 당 18릉 중 최대 규모라고 한다. 고운 돌로 포장되여 있는 좌우에 석상을 낀 이 길은 과거엔 4품 이상의 벼슬아치만 걸을수 있었다고 한다. ​ 묘역의 목구멍이라 할 위치에 이르면 우측에 흰빛의 거대한 비가 서있다. 이름하여무자비(无字碑)이다. 하얗게 비여 있어 백비(白碑)라고도 한다. ​ 중국 최초의 녀황제 자리에 스스로 등극하여 중원을 호령해 온 그녀였지만 대신들에게 유언을 남겨 굳이 무자비를 세우게 했다. 그렇게 갈래 많은 전설을 루루히 남긴 녀황제는 막상 죽어서 비석에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깨끗하게 비여있는 햐얀 그 비석은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색조의 사색을 당혹감에 덧칠하게 한다. ​ 비석은 무덤에 묻힌 사람의 이름 및 행적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적(史蹟)이나 업적을널리 알리기 위하여 돌에 글을 새겨서 세우는것을 말한다. 자고로 돌이나 쇠에 글을 새기는 까닭은 그 기록을 천년, 만년 남기를 원해서이다. 하지만 절대권력을 휘두른 무측천은 자신을 위해 거대한 빗돌에 명가의 필체로 현란한 수사를 그들먹히 새긴 비문이 아닌 비여있는 무자비, 백비를 세웠다. 한 글자도 적지않은  무자비는 무측천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성찰과 평가유보의 의미로 남겨 놓은 기념물이 아닌가 싶다. ​ 어찌보면 무자비는 한 덩이의 돌같아 보인다. 우리가 그에서 력사의 행간을 읽어내지 못하면 무자비는 아닌게 아니라 그저 오래된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다시 헤아려보면 그것은 그저 돌덩이가 아니며, 비여있는듯 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것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명리를 챙기고 현시하기 위해 거품많은 명함과 프로필을 흩뿌리고 다니기를 좋아하는게 요즘 현대인들의 풍경이다. 적지않은 이들은 품 들이고 돈 들여 속세의 돌을 화려하게 쫗아서는 본인 이름 석자를 크게 새기길 원한다. 그러한 이들에게 많은것을 말해주는 무자비이다. ​ 저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쉼없이 빼곡히 적어 내려가고있는 우리의 삶이 세상의평가를 저만치 넘어서는, 깨끗하게 여백이 있는 삶이였으면 좋겠다. ​ 무자비에 관한 김종제씨의 시 한수 읊으며 글에 끝점을 찍는다.   버려진 뼈같은 비석에 글자가 하나도 없다 묵언으로 여태 면벽의 수행 중일까 아니면 침묵으로 등을 보이며 아직 항거하고 있는 것일까 움직임 없이 굳건하게 서 있는것이 좌탈(坐脫) 같기도 하다 눈을 감고 돌속에 새겨진 점자를 읽으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니 다투어 튀여나오는 파란의 생애 분명 죽지 않는 저 삶이 세상 그 무엇보다 높은 탑이 아닐까 파헤칠 관도 없으니 살아온 나날들을 흔적없이 지우고 간것이다 비석마저 세우지 말았어야 하는데 무덤 대신 남겨놓은것이리라 뼈 속에 새겨진 흰 무늬의 혈서 같은것 살갗에 새겨진 지울수 없는 문신 같은것 그가 원했던 자서전 같은 글들이 야생의 꽃속에서 피여나고 있다 조만간 불에 타버릴 나도 들녘에 뿌려져 백비로 서있어야 함을 알겠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 ​ "송화강" 2015년 5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2    요절 문인 댓글:  조회:3145  추천:16  2015-07-07
. 칼럼 .   요절문인 (夭折文人)   김혁 ​    ​인터넷 서점으로 올해의 “리상 문학상수상작품집”을 구매했다. 일주일만에 도착한 책을 들고 생각이 갓길로 빠졌다. 정작 표지 옹근 전체를 커다랗게 장식한 녀수상자의 아릿다운 얼굴보다는 그 웃가녁에 덩그마니 그리고 자그맣게 박힌 시인 리상의 모습을 멀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1937년의 이른 봄, 일본 도꾜제국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이 악화 된 한 시인이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폐병의 절망을 안고 기생과 동거하며 난해한 초현실주의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를 써내 천재적 면모를 보였던,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절망끝에 건너간 도꾜에서 “멜론이 먹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생을 접고 만 리상(李箱)이다. 리상외에도 김소월, 라도향, 최서해, 강경애, 전혜린, 모파상, 뿌쉬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로요(路遥), 소홍(萧红), 고성(顾城), 왕소파(王小波)등 세계문단사에는 그 재능을 다 펴지못하고 일찍 스러진 “별”들이 그렇게도 많다. 요절 (夭折). 여기서 요(夭)자는 무성하다, 절(折)은 부러지다는 뜻이다. 싱싱함과 향기를 채 뿌리지못하고 꺽이고 말았다는 그 뜻말에 조차 애통함이 깊이 담겨 있다.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을 집필,련재하던 몇해전 답사차로 룡정 대포산을 오르다가 길녘에서 뜻밖에도 익숙한 이름의 묘소와 마주쳤다. 허흥식 시인의 유택(幽宅)이였다. 하냥 질박한 모습에 고향산천을 주제로 한 많은 수작들을 련줄로 펴낸 그와의 인연은 “연변일보”문화부에서 기자로 뛰던 시절 내가 편집한 그의 수필 한편이 향토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면서 이어졌었다. 그의 졸사(猝死)에 망연함을 금치못했던 당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마른 풀잎속에 말없이 방치된 그 묘소앞에 가던 길을 멈추고 묵도를 드렸었다. 우리 문단에도 안타깝게 요절한 문인들이 적지 않다. 류연산, 윤림호, 박향숙, 남주길, 조은철, 윤광수… 병환으로, 사고로 애닯게 일찍이도 간 그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는것만으로도 눈시울이 젖어 오른다. 해외에서는 요절문인들에 대한 추모방식이 정례적으로 진행되고있다. 주기를 꼭 챙겨 기념하고 요절문인 작품집도 내고있다. 우리 역시 작고문인들을 추모하고있지만 가족이나 몇몇 친구들의 작은 방식으로만 그칠뿐 보다 장중하고 조직적인 추모 방식은 결여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생의 황홀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늘속 죽음에도 눈길을 주라”하고 어느 한 학자는 말 했다. 작고문인들에 대해 정례적으로 눈길을 돌리고 그이들이 우리 문단사에 남긴 업적을 기리는것은 문단의 전승과 발전에도 필수적인 례식이 아닐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이들을 추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이들이 남긴 작품을 읽는것일것이다.   2014년 3월 7일 - “청우재(聽雨齋)”에서   “도라지” 2015년 3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1    전범기(戰犯旗) 펄럭... 댓글:  조회:4532  추천:13  2015-06-30
칼럼 전범기(戰犯旗) 펄럭... 김 혁   1 2015 캐나다 피파(FIFA) 녀자 월드컵이 막을 올렸다. 1991년에 창설되여 올해로 7회째를 맞은 이번 대회는 본선 출전국수를 24개국으로 확대해 력대 최대규모로 열렸다. 남자 월드컵에 비견될만한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였기에 모두들 또 한번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대 스위스 C조 1차전경기 관람을 하려던 중, 팬들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된다. 일본 축구팬들이 전범기를 들고 자기의 팀을 응원하고 있었던것이다.  지난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목도되였던 광경이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은 최상의 스포츠 잔치답게 또 한번 온 누리의 초점을 한 몸에 모았었다. 경기가 백열화되여 월드컵 C조 2차전 경기인 일본 그리스전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화면에 커다랗게 클로즈업 된 한 축구팬의 모습에 관중들은 일순 아연해 지고 말았다. 축구팬의 얼굴에 그려진 선명한 빛살무늬, 그건 바로 일본의 욱일기였다. 이번에도 또 한번 녀자 월드컵에 등장한 욱일기이다.    (자료사진) 2 욱일기, 태양을 상징한는 빨간색 동그라미 주위에 퍼져나가는 붉은 햇살- 욱광, (旭光)을 그린 기발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시대에 사용된 일본군의 군기(军旗)이자 현재의 일본 자위대의 기발이다. 1870년에16줄기의 해살이 도안된 욱일기는 일본제국 륙군기로 지정되었으며 이어서 일본 해군의 각종 장군기(將军旗)도 8줄기의 해살이 그려진 욱일기를 응용하여 제정하면서 욱일기는 일본군의 상징으로 되였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자 일본군도 해산되였고 그에 따라 욱일기도 사용이 중단되였다. 일본에서 욱일 문양은 축복, 행운같은것을 상징하므로 욱일기가 축하 용도 및 스포츠 경기 등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욱일기는 일본군의 침략과 가혹한 지배를 겪은 동북아시아권에서는 금기시되고 있는 문양이다. “군대 외에도 폭넓게 사용돼 왔다, 꼭 군국주의의 심벌(어떤 추상적인 사상이나 개념을 구체적인 사물이나 의미로 바꾸어 나타내는 일)은 아니다”고 일본은 주장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당시 욱일기는 군국주의 일본의 대표 심벌이였다. 일본이 “종전일”이라고 부르는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에 옛 군복 차림으로 참배 오는 사람들은 요즘도 욱일기를 흔든다.  2008년 북경올림픽 당시에도 일본 정부는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욱일기를 소지하지 말라고 팬들에게 권고했다. 이처럼 이 기발의 의미를 일본인들은 스스로 잘 알고 있는것이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은 "하필이면 전범기를 얼굴에 그리는 리유는 뭘까? 축구장 티켓값이 아깝다", "대체 저게 무슨 뜻인지 알고 사용하는 건가?", "월드컵 을 욕보이고 있다", "FIFA에서 징계로 승점을 깎을가보다","현장에서 바로 조치가 취해지면 좋겠다" 는 등의 눈쌀 지푸린 반응을 보였다.  독일도 일본과 같은 경우로 하켄크로이츠라는 전범기가 있다. 갈고리 십자가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만(卍)자로 부른다.전쟁미치광이 히틀러가 몸담았던 민족사회주의 독일 로동자당의 당기로 정해졌다가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1935년에 독일의 국기로 지정됐으며, 한때 나치 독일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씌였다. 나치는 하켄크로이츠 전범기를 앞세워 유럽과 아프리카를 전쟁속에 몰아넣었다. 하여 이 기발은 “피의 십자가”라는 별명도 가지고있다. 현재 독일에서는 하켄크로이츠 전범기의 사용이 금기시되고 있다. 전후 독일은 전범기를 스스로 불태우며 인류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일본은 온 세계가 혐오하는 전범기를 공공연히 흔들고 있다.    3 어떤 이들은 너무나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고 이의를 보이고 있지만 전범기의 경기장 등장은 결코 쉽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전범기는 일본군국주의가 부르짖던 대동아 공영권 즉 동아시아 식민지 전략의 슬로건이 되였던 기발이기 때문이다. 비해 말하자면 이 기발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 나치 기발과 꼭 같은 의미를 가진,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기발인 것이다. 사실 일본인의 식민 침략을 겪은 아시아인들이 아니라면 다른 나라 외국인들은 일본 전범기에 담긴 의미를 잘 모른다. 그들의 시각에 일본 전범기는 디자인이 멋지고 일본풍격이 농후한 기발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헐후한 시각때문에 일본내에서는 이 기발의 로고가 맥주병에도 씌이고 회사의 로고로도 쓰인다. 요즘 곧 개봉하게 되는 할리우드 공상영화의 포스터에도 스스럼없이 일본전범기가 새겨져 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아세아 근대력사에서 일본의 식민지배 시기는 암흑과도 같은 시기였다. 또한 인류력사의 오욕의 한페지였다. 다시 이 같은 끔찍한 력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이를 그저 경기를 관람하는 자의 유흥으로만 넘겨서는 될 일이 아닌것이다.   아베 정권 들어 일본의 력사 역주행과 극우 군국주의화는 굳이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이런 시점에서 일부 몰지각한 팬들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심에 바탕을 둔 응원은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월드컵의 의미를 오염시키고 있다. 어느 한 학자는 "력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의 상황을 제대로 해석해서 현재의 상황에 대응해야 미래도 밝아진다는 의미이다. 경기장의 팬이 무심코 그린 문양 하나에도 종횡의 력사가, 그에 내재된 아픔과 의미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우리가 명백한 력사관을 가지고 력사와 끊임없이 대화할때야 만이, 우리가 궁극으로 추구하는 인권, 자유, 평등은 깃들고 월드컵마당과 같이 온 누리가 어우러지는 평화의 장을 만들어 나갈수 있을것이다. - “청우재(聽雨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白鷺三味線-都はるみ        
50    소금 이야기 댓글:  조회:2923  추천:12  2015-06-16
. 칼럼 .    소금 이야기 김 혁 ​ 1 중국의 소금 전매제가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매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독점 제도였다. 소금 전매제도는 기원전 7세기에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처음 도입한 이후 기원전 119년 한나라 시절에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소금은 오랫동안 왕조의 큰 수입원이었다. 심지어 중세와 근대를 연결하는 청나라 때도 재정의 25%가 소금에서 나올 정도였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도 담배와 소금 시장만은 개방하지 않았다. 재정수입에서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줄어드는 반면 소금 전매를 유지하는 비용은 계속 불어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소금 전매제 폐지를 통해 정부는 2016년부터 소금가격을 자유화하고 2017년부터는 신규 사업허가도 허용할 예정이다. 소금 전매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중국 소금 생산업자들은 2600여년 만에 정부 대신 시장에 직접 소금을 내다 팔 수 있게 됐다. 2 우리 식탁의 대표적인 조미료로서 소금은 짠 맛이 나는 백색의 결정체로다. 주성분은 염화나트륨으로서 천연으로는 바다물에 약 2.8% 함유되어 있으며 암염으로도 만들어 진다. 인체의 혈액이나 세포 안에 약 0.71% 들어 있다. 소금은 지구의 탄생과 그 시작을 같이 한다. 지구 생성 당시 지표의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던 수증기와 염화수소가 바위 속 산화나트륨과 충돌하여 그중 일부가 염화나트륨이 되어 증발했다고 한다. 차츰 지구가 식으면서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릴 때 소금이 함께 녹아 땅에 쌓이며 바다가 생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금은 옛날부터 육류의 부패를 방지하고 인간의 건강과 정력을 유지하는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대 애급에서는 미이라를 만들 때 시체를 소금물에 담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하여 소금을 비료로 사용하였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소금을 금보다 비싼 고급 사치품으로 여겨 귀한 손님을 초대하면 음식에 소금을 듬뿍 넣어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으며 우크라이나에서는 먼 곳에서 손님이 오면 환영의 뜻으로 쟁반에 보리 이삭과 소금을 담아 대접했다고 한다. 또한 소금이 곧 칼이고 권력이였으며 부(富)이었다. 소금 때문에 무역의 길이 열렸는가 하면 전쟁과 혁명도 일어 났다. 진시황은 소금 전매 수입으로 군대를 양성했고 로마 역시 소금세로 전쟁 비용을 조달했다. 신대륙이 발견되기전까지 유럽의 무역은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소금 패권에 좌우됐고,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의 원인 중 하나도 실은 소금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봉급”과 “병사”라는 말도 라틴어로 “소금(sal)”이란 말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당시 병사들의 봉급을 소금으로 지급했던 까닭이다. 소금의 용도는 1만4000가지가 넘는다지만 오늘날 식용으로서의 소금은 갈수록 푸대접 받는다. 미국의 경우 소금이 외려 제설(除雪)용으로 51%인 반면 요리용은 8%뿐이고 18세기 유럽인 1인당 70g이었던 소금 섭취량은 현재 세계보건기구 권장량인 5g에 지나지 않는다. 짠 음식이 고혈압과 뇌졸중, 심장마비의 원인으로 된다고 밝혀진 탓이다. 건강한 식생활이 우리의 일상에 깃들면서 소금은 외려 소박맞는 존재가 되고 있다. 3 여기 “소금”이라는 소설이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과 항일운동가들의 삶을 그려내어 한민족 근대문학사에서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여류작가 강경애, 북간도 용정에도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작품에 담았던 그의 대표작이다. ​ 강경애   일제치하 억압받던 당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 불합리한 사회를 뒤엎기 위해 총을 들고 일어 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을 소금 밀수라는 비화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 중편소설이다. 작품은 1985년에는 신상옥이 메가폰을 잡아 조선에서 영화화 되었고 주역을 맡았던 그의 부인 최은희는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일송정이 있는 중국 용정 비암산에 세워진 강경애 문학비   소설에 그려지다 싶이 당시 간도땅에는 소금이 귀했다. 당지 소금은 중국 내지에서 오는 “암염(岩盐”이었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값도 곱절 비쌌다. 조선에서 소금 한 소두(7.5키로)에 50전이 못되었으나 “암염”은 1위안도 더 갔다. 이에 소금밀수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삼봉에서 소금을 가져와서는 한 소두에 중국 소금보다 조금 값을 낮추어 팔아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금 밀수를 통제하기 위해 두만강 북안지역에 “사염집사대(私盐辑士队)”까지 나왔다. 검은 정장을 하고 붉은 세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집사대는 여간만 감때사납게 굴지 않았다. 발각되면 소금을 몰수당하고 벌금 수십 위안을 해야 했다. 엄중한자는 영창에 집어 넣고 지어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허나 생활고를 못이겨 밀수꾼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소금 밀수꾼들은 끊임없이 집사대의 눈을 피해 소금마대를 지고 산발을 탔다. 이렇듯 소금 한 톨에도 우리의 한많은 이주사가 짜겁게 깃들어 있다. - “청우재(聽雨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9    12 초 댓글:  조회:5318  추천:22  2015-06-04
. 칼럼 . ​ 12초 ​  김혁   ​ ​   1   1초, 그 찰나의 시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걸가? 국제 도량형 총회는 세슘 원자가 91억 9천 2백 63만 1천 7백 7십번 진동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1초라고 정의했다. 1초, 이 칼럼의 제목을 읽을만한 동안인 그 시간내에 지구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있다. 전 세계적으로8명의 새 생명이 탄생하고5명이 목숨을 잃는다. 1대의 승용차가 만들어지고 4대의 TV가 만들어진다. 166병의 콜라와 1200여 개의 달걀이 소비된다. 80가마가의 쌀이 재배된다. 51톤의 세멘트가 소모된다. 22명의 려행자들이 국경을 넘는다. 인터넷에서는4백만 건의 이메일이 전송된다. 39만 4천여 개의 댓글들이 달린다.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인 빌게이츠는 1초에 인민페로 800원 벌어들인다. 이렇게 추산해보면 빌게이츠는 하루에 하루에 인민페로 600만원을 버는셈이다. 벌이 살아 남기 위한 날개짓을 200번 한다. 사람들이 134억 8천만 개의 식물, 곤충, 동물을 죽인다. 총구를 떠난 총알이 900m를 날아간다. 헬리콥터의 날개는 125회 회전을 한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486억Kw의 에너지를 받는다. 세계 각지에서420톤의 비가 쏟아진다. 빛이 30만km 즉 지구를 7바퀴 반을 이동한다. 빛의 속도로 우주는 30만키로메터씩 팽창을 한다. 그리고 우주에서 79개의 별이 사라진다.   그러면 12초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난것일가? ​ ​ 남경대학살 기념관에서의 필자   2   지난 가을, 연길에서 2시간 40분간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날아갔다. 포동국제비행장에서 29개의 역을 지나 상해기차역에 닿았다. 다시 2시간30분동안 고속렬차를 타고 고도(古都) 남경에 닿았다. 남경역에서 2호선 지하철을 타고 5개의 지하철역을 지나 30여분만에 이른 곳은 남경대학살 기념관이였다.    굳이 사비를 팔아 남경땅을 밟은것은 새롭게 집필하는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을 위한 현지감각을 찾기위해서였다.  나의 이 신작장편은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을 소재로 하고있다. 남경대학살은1937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이 3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들의 항일 의지를 꺾기 위해 6주 동안 적수공권의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중국지역 일본군 총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휘하의 일본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생매장 하기, 휘발유를 뿌려 불지르기, 칼로 참수하기,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쏴 총알의 관통력 테스트하기…등 잔학한 방법으로 대학살을 자행,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 3개월 된 아기까지 무차별 학살했고 녀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한뒤 기념사진도 찍었다. 아름다운 고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무간나락에 떨어졌다. 석학 림어당(林語堂이 갈파했듯이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이런 잔학상은 처음”이였다. 남경시 서쪽 외곽에 자리를 잡은 남경대학살기념관에는 평일에도 관람자가 장사진을 이루었다. 단체로 온 학생들에서 머리발 허연 로인들 그리고 이국적 외모의 외국유람객들이 눈에 띄였다. 간간이 한국인들의 익숙한 말씨도 들려 왔다.  기념관은 표를 받지 않고 무료 개방하고 있었다. 밀려드는 인파에 끼여 한참 줄을 선 뒤에야 입장할수 있었다. 넓다란 기념관 정원에 들어서자 무엇보다 눈길을 끈것은 “300000”이라는 수자였다. 전시관 곳곳에는 “300000”이라는 수자가 새겨 있었다. 바로 일본군에 죽임을 당한 희생자의 수자이다.  1985년 8월 15일 개관한 남경학살기념관은 일본군이 학살을 저지른 비극의 현장에 세워졌다. 기념관은 도편전시관과 유골전시관, 파괴된 도시와 살해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부조물, 생존자들의 족적을 탁본해 만든 동판조각로, 희생자의 명단을 판각한 벽인 “통곡의 벽”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희생자의 유골이 집단으로 발굴된 곳에 만들어지진 “만인갱”(万人坑)이라는 전시공간에는 유골은 무려 7단계로 층층이 쌓여 있어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어렵지 않게 엿볼수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음향시설을 갖춘 전시 공간도 있었다.  천정에서 물방울이 12초 간격으로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있었다. 시계의 초침처럼 정확한 그 소리는 남경대학살 당시 12초마다 한 명씩 살해됐다는것을 환기시켜주는 소리였다. ​​​     3   남경대학살은 종전후인 1946년 명백하게 확인된 대참안이다. 대학살을 주도했던 전범들은 남경군사법정과 도꾜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도록 일본에서는 일부 량심세력만이 이를 인정할뿐 “이는 중국인의 환상이다” ,”학살은 없었다”는 뻔뻔한 부인이 계속되고있다. 그 극우세력의 대오속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들도 들어있다. 일본의 극우분자들은 이 모든것이 “허구 또는 과장”이라 망언하며 발뺌하려 애쓰지만, 남경은 당시의 사진과 세계각지 언론의 기사, 생존자들과 유가족의 방대한 증언 등을 모아 놓은 이 기념관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과거의 시간”을 지우려는 일본의 시도를 까밝아놓고있다.  “과거사 지우기”에 급금해 하는 일본 아베 내각의 심각한 력사인식의 오류와 반평화적인 도발 의지는 세상의 지탄을 받고있다. 이대로 나간다면 일본은 국제사회와의 공생에서 스스로 멀어진 “력사적 후진국”이라는 락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것이다. 누군가 시간이란 “과거에서 출발해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해 끝없이 날아가는 되돌아올수 없는 화살”이라고 했다. 극구광음(隙駒光陰), 문틈새로 달리는 말을 보듯이 얼핏 스쳐지나는 시간이라지만 력사는 인류의 무지, 쟁투, 잔학, 수난을 분초속에서도 슬로모션(피사체의 움직임이 실제 속도보다 느리게 보이도록 하는 촬영기법)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의 필림에 새긴 그 영상물의 테마에는 평화라는 커다란 글자를 새겨 놓았다. 두시간 남짓한 관람이였지만 나지막히 귀에 잡히던 그 촌초 (寸秒)의 소리는 커다란 울림으로 내내 머리에 남아있다.   -“청우재(聽雨齋)”에서   “도라지” 2015년 2월호 유화 "남경 대학살"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 /
48    북간도의 큰 스님 댓글:  조회:3708  추천:14  2015-05-26
. 칼럼 .   북간도의 큰 스님   김 혁     1   한국작가 최인호의 많은 수작들중에 “할”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이 특별하고 의미가 있는건 작가가 암 투병중에 남긴 작품이기때문, 그리고 가톨릭 신자가 쓴 불교관련 작품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출간되였던 작가의 장편소설 “길 없는 길”을 재구성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호평받으며 지난 10년 간 150만여 만부가 판매되였다. “단순한 구도소설의 한계를 뛰어넘은 최인호 인간주의 문학의 백미”라는 평도 뒤따랐다. 책은 근대 불교계의 선풍을 일으킨 불교 증흥조 경허(鏡虛)대선사가 열반에 드신100년기념으로 재 구성해 내놓았다. 책에는 경허 대선사의 수법제자들의 이야기도 큰 편폭으로 나온다. 그중에는 법호 그대로  세속뿐 아니라 불가에 조차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물속의 달처럼 조용히 사라진 수월 스님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수월 스님, 누구이신고?   2       수월스임은 민간에서 오래동안 구전으로 그 행적이 전해져오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불자들이 수월정사라는 조그만 법당을 차린것을 시작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가을, 중국 연변 도문시에서는 도문시 일광산에서 “일광산 화엄사 대웅보전 락성 및 불상 개안 경축법회”가 열렸는데 중국불교협회와 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에서 온 불자 등 2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연변의 첫 불학대사 수월스님을 선양하는 불사가 봉행됐다. 이날 수월스님이 머물렀던 일광산 중턱에 수월스님의 옛 거처를 복원하는 기공식도 더불어 열렸다. 화엄사 불사를 주도하고 있는 오덕 스님은 조선족 출신이다. 그리하여 화엄사는 중국, 한국, 조선 등 3국이 합작으로 조성한 사찰로 되였다. 가람은 중국식에 한국의 전문가들이 단청을 입혔다. 불상과 탱화는 북한 만수대 창작사 화공들이 조성했다. 오덕 스님은 “화엄사는 조선족의 첫 사찰이자 중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한 사찰이여서 의미가 크다”며 “남북통일과 한·중 량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가람이 될 수 있도록 불사를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연변지역에서 늦게나마 회자되고있는 수월(水月)스님은 한국 충남 홍성 출신으로 알려졌다. 1885년 태여난 스님은 속성 조차 정확하지 않다. 전(田)씨라고 알려졌지만 일부에서는 전(全)씨, 김씨, 제(祭)씨, 최씨라는 설도 있다. 법명은 음관(音觀)이다. 어릴적 부모님을 잃고 고아로 남은 스님은 머슴살이를 하며 연명했다. 어느 탁발승이 전해준 수행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명받아 어느 늦가을 서산군 연암산 중턱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을 찾아갔다. 당시 천장암에는 경허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스님이 홀어머니 박씨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다. 이곳에서 나이 서른이 다 되여 행자로서 나무꾼 생활을 했다. 어느 한번, 그는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당시 스님은 특히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해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외웠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을 발견하고 급히 끌어냈다. 이때 그의 순전한 수행력을 인정한 태허는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인정했고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수월스님은 보임공부를 위해 금강산 등지에서 신분을 숨긴채 정진하면서 지냈다.   1912년 경허스님이 열반하자 수월스님은 북간도로 건너왔다. 회막동(지금의 도문시의 옛 이름)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동안 소먹이꾼 노릇을 했다. 이때 수월은 자기가 소를 먹여 받은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 북간도로 건너오는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길가 바위우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무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었던것이다. 1915년 회막동을 떠나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갔다. 그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채 몰지각한 젊은 스님에게서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1921년 봄부터는  왕청현 라자구(羅在溝)에 들어가 당지인들이 지어준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도 스님은 누더기를 걸치고 종일 일했고, 탁발(托鉢)을 다녔으며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화엄사에 머무는동안 그를 만나려고 먼 길을 걸어오는 조선 스님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오, 효봉, 청담 등이 수월을 찾아와 몇 달 혹은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말없는 가르침”을 배워갔다. 수월스님의 법은 묵언스님을 거쳐 도천.명선스님 등으로 이어졌다. 화엄사에서 지내기를 8년철이 되던 해인 1928년, 입적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게 된 스님은 점심공양을 마친후 절 뒤편에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머리우에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컬레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결가부좌한채 스스로 준비한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놓았다고 한다. 스님은 자화장(自火葬)으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 도문시 일광산에 자리 잡은 화엄사      수월은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였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로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여난 수행력으로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일제의 수탈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한많은 백성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다.  이름 그대로 “물 속의 달”처럼 흔적없는 바람같이 살다간 그는 오직 행동으로 소임을 다 해온 숨은 성자였다.   불교에서 수월(水月)이란 모든 사물에 실체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달이 강을 비추더라도 물에 비친 달 그림자는 그 실체가 없는것과 같이 수월스님은 자신이 없는 선행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채 실천하였다.   3   최인호가 지은 책의 제목 “할”은 사찰과 선원에서 학인(學人)을 꾸짖거나 말이나 글로써 나타낼수 없는 도리를 나타내 보일때 내뱉는 소리를 뜻하는 불교용어다.   수월스님의 법문은 전해오는것이 많지못하다. 다음은 구전을 통해 전하는 스님의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허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모시면 효도라도 하는데, 집을 나와서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뭐여… 사람 몸 받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 이보다 더 큰 한(恨)이 어딨어.”   법기와 수련이 높은 “깨달은 자”들의 소리가 위기론이 대두되고있는 우리 민족 공동체에 지혜와 기운 넘치는 “할”을 날릴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이천공십오년 오월 이십오일(음력 사월 팔일) 부처님 오신 날에  -“청우재(聽雨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7    "언브로큰" 그리고 윤동주 댓글:  조회:4494  추천:22  2015-05-07
칼럼   “언브로큰” 그리고 윤동주   김혁 ​ ​     1   화제의 영화 “언브로큰(Unbroken)”이 드디어 중국에서 상영되였다. 중국에서는 영화에 앞서 지난 1911년경에 원작소설이 이미 출간되였고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소설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출간되였다. 할리우드의 톱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 대신 연출한 영화는  상영전부터 일본 극우들의 온갖 음해와 날조 왜곡으로 일관에 년초 화제가 되었다.  “언브로큰”의 개봉 소식에 일본 극우단체들이 보이콧에 나서는가 하면, 평소 좋아했던 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일본입국금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등 그 행태가 도를 넘어 상식을 벗어난 행동과 말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에 출연한 재일 교포도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있다고 한다. 일본 우익들이 이 영화에 발끈한 원인은 무엇일가? “언브로큰”은2010년 발간된 후 180주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미국 작가 로라 힐렌브랜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실존 인물인 루이 잠페리니의 실화를 스크린에 담은 작품이다. 루이 잠페리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참가한 미국의 육상선수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작전을 수행하던중 전투기 고장으로 태평양 한가운데 추락해 47일 동안 표류하다 적국 일본의 함선에 의해 구조된다. 영화는 루이 잠페리니가 일본 포로 수용소에 끌려가 850일 동안 일본군에 의해 겪게되는 무자비한 역경의 과정이 담겼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소재로 했기에 영화가 상영전부터 일본우익의 심기를 건드렸던것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영화적 제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군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수많은 만행을 대부분 다루지 않아 원작에 비해 훨씬 관대했다. 원작에 일본군의 중국 난징대학살 문제나, 십여번 나오던 위안부 얘기도 생략됐다. 일본군이 잠페리니를 비롯한 미군 포로들의 정맥에 희뿌연 코코넛주스를 놓으며 생체 실험을 한 얘기도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원작에는 전범 용의자였지만 수년 뒤에는 일본 총리가 됐던 기시 노부스케와 관련된 일화도 들어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현 아베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뜬금없는 비약일지 몰라도 바로 윤동주였다.   2   일전에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미군 포로를 상대로 비인도적 생체실험을 자행했음을 보여주는 미국 측 문서가 발견됐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소장한 “전 일본해군 군의관(중위) 나카무라 시게요시와의 인터뷰”라는 제목의 문서에 이같은 내용이 기록된 사실을 확인되였다. 나카무라는 당시 심문에서 자신이 1944년 1월 말~2월 초 태평양 서부 트루크 41경비대 의무실에서 생체실험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포로들의 팔 정맥에는 연쇄구균 계열의 생박테리아가 주사됐으며, 일본군은 포로들이 주사를 맞고서 호흡곤란 등으로 상태가 악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2~3일 후 이들이 패혈증으로 사망하자 시신을 해부해 장기 상태 등을 분석했다. 또 압박지혈대를 착용시켜 동맥과 정맥의 혈류를 차단하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실험이 이뤄졌다. 이들은 팔과 팔꿈치, 허벅지, 무릎 등을 지혈대로 압박당하고서 실험 직후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다 경련과 쇼크를 일으키고 10여분 만에 사망했다.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의식을 잃자 물로 소생시키고, 다음날 이들을 상대로 폭파 충격 실험을 하고서 살해했다. "이 문서는 태평양전쟁기 일제가 731부대뿐 아니라 태평양 지역에서도 비인도적 생체실험을 했음을 확인해준다” 2차세계대전 당시 영화에서 나오는 루이 젬페리와 비슷한 경력의 사건이 또 하나 있다. 1945년 5월에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추락,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명은 산 채로 해부된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이들을 상대로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다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에는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 ​   3       바로 같은해인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형무소의 한 독방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이 내질러진다. 간수가 바짝 청각을 돋우고 달려갔다. 이는 윤동주라는 한 문학청년이 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절규었다. 민족해방의 날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향년 29년의 한 나 젊은 민족시인이 감방에서 의문사를 당한것이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교또경찰서에 검거되여 수감되였다. 사상범으로 피체된 그들의 죄명은 일본 형사의 취조서에는 “독립운동”이라고 기록되여 있었다. 윤동주는 2 년, 송몽규는 2 년 6 개월의 언도를 받고 후코오카(福岡)형무소에 수용되였다. 1945년 고향집으로 매달 초순에 배달되던 엽서가 이해 2월 중순가지 도착되지 않고 대신 "2월 16일 동주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윤동주의 시신을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 윤영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촌인  윤영춘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로 갔다. 두 사람은 먼저 살아 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알이 반쯤 깨진 안경을 간신히 걸치고 있는 송몽규를 두 사람은 쉽게 알아 보지 못했다. 피골이 상접한 그가 먼저 무슨 말인가 건네 오는데 그게 마치 저 세상에 들려오는 말소리 같았다. “저놈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됐고, 동주도 이 주사를 맞고….” 간수의 눈을 피해 몰래 우리말로 간신히 주고 받은 한마디였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규슈대학 의학부의 생체실험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곳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윤영석이 후코오카 감옥에 갔을 때에도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명이 강제 주사를 맞기 위해 줄 서 있는것이 목격되었다. 가족이 윤동주의 유해를 찾아간지 한달도 되지 않은 3월7일 송몽규 역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제가 저지른 대표적 만행인 세균전과 생체실험에 대한 의혹은 중국에서도 강력히 제기되였고 그 진상이 세상에 공개된지 오래다. “언브로큰”에서 코코넛을 미군포로에게 주입했듯이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주사에 강력한 의문의 초점이 모아진다. 이에 대해 일본인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지 는 “그 의문의 주사”는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리식염수 대신 바다물을 주입한 규슈제대의 실험을 감안하면 윤동주가 맞았다는 주사 역시 “바다물”일 가능성이 크다. 약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인체에 바다물을 주입할 경우, “바다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같은 시기 후쿠오카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암산은 “신경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시행정실록을 보면 후쿠오카형무소에서는 1943년 64명, 1944년 131명, 그리고 1945년에는 259 명이 옥사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을 상대로 대규모의 생체실험을 했으리라는 심증을 안겨준다. 윤동주의 사인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라는것이 주되는 주장이다.   올해는 일본의 패전 70주년, 민족의 해방 70주년이다. 또한 윤동주의 옥사 70주기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의 한편의 영화를 계기로 중.한·일 과거사전쟁은 이제 미·일 역사전쟁으로 확전되고 있는 가운데 다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우리의 시인을 다시금 환기해 본다. 이 처럼 일본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치부와도 같은 전쟁의 역사가 우리 시인의 애닲은 삶에도 깃들어 있다.   -“청우재(聽雨齋)”에서   “문화시대” 2015년 2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6    지하철에서 읽은 모디아노 댓글:  조회:2902  추천:12  2015-04-29
    칼럼   지하철에서 읽은 모디아노   김혁      노벨상수상자 파트릭 모디아노 1   수많은 책을 서로 다른 시간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읽어왔지만 이번의 독서경력은 좀 특이했다. 소설의 거의 전부를 지하철에서 읽은것이였다. 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트릭 모디아노의 대표적인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이다. 금번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은 상해에서 접했다. 상해에서 열린 로신문학원 강습소에서 들었고 한달간의 강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노벨상 수상자발표와 함께 금방 출간된 “따끈따끈”한 그의 작품을 읽었다. 문학강습이 열렸던 상해 복단대학부근의 강만역에서 포동 비행장까지 대여가려면 좋이 세시간가까이 걸렸다. 무려 30여개의 지하철역을 지나는 긴 려정이였기에 책의 3분의 2를 지하철에서 읽었고 또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터미널에서 마저 읽어 버렸다. “모디아노는 보통 130~150쪽 정도의 얇은 소설을 쓰는 작가"로 그의 이 소설도 겨우 10여만자, 부담없이 빨리 읽혀진것이다. 평론가들은 “시간려행과 공간순례와 같은 모디아노의 소설은 관광지도로 읽힐 수 있다”고 했다. 상해라는 국제 도회지에 온 변강오지의 촌닭같은 나는 쉽게 꺼낼수 있게 웃옷 호주머니에 지하철 관광지도를 내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나같은 이들에게 모디아노의 작품은 지하철에서 읽기에 맞춤형으로 씌여지기라도 한듯했다. 중국독자들에게는 조금 낯설은 이름인 모디아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 바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이다. 그는 이 소설로 공쿠르 상을 수상, “현대 프랑스문학이 거두어들인 가장 큰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퇴역 탐정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려정을 그린 소설, 모디아노는 이 책을 통해 기억 상실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비극적 현대사의 한 단면을, 나아가 인간 존재의 소멸된 자아 찾기라는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중국판 표지   2 노벨문학상을 내린 한림원은 모디아노의 소설의 주제에 대해 "시간, 기억 및 정체성이다"고 평했다. “1945년 7월 30일, 나치 점령하의 빠리에서 서로 알게 된 유태인 남자와 플랑드르 출신 녀자사이에서 나는 태여났다.” 모디아노의 자서전격으로 읽히는 작품 “혈통”의 첫 문장이다. “가을의 빠리를 관광하려면 바람이 불어 지도를 들고다니기 불편하다. 모디아노의 신작 소설을 권한다. 지도보다 들고 다니기 편할것” 모디아노의 작품에 대한 평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자신이 태여난 곳,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작품에 집요하게 담는다. 또 과거에 대한 집착, 자신과 빠리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미로의 길찾기는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특징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불과 두달이후 태여난 모디아노는 전쟁의 참상속에서 받은 상처를 아프게 갈무리하고있는 이들을 보며 자랐고 또 어려서 사랑하는 동생을 질병으로 잃었다. 이런 기억이 집필에 영향을 미쳐 그의 모든 작품은 기억, 가족, 정체성으로 귀납할수 있다.   그의 문학성격을 징표해줄수 있는 몇몇 작품중에 “한밤의 사고”는 교통사고를 당한 “나”가 앰불런스에서 만난 한 녀자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며 “혈통”은 그의 아버지가 사용했던 가명, 어머니가 일했던 극장 이름,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호텔과 그 주소 등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간 소설이다. 인간의 정체는 과거의 집적과 그 기억에 불과하다고할때 기억과 망각의 문제는 모디아노의 개인사와 집단의 력사가 맞물리면서 그의 문학 세계를 구성한다. 어두웠던 시절을 희미한 기억력에 의존하여 물증과 증인을 찾아 자신의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은 결국 정체성의 재구성, 자아의 복원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모디아노는 표변하는 세평을 오래동안 등지고 이 문제에만 천착하며 홀로 한 우물을 팠다. 시대와 세상의 무게감은 한 개인을 질크러지도록 짓누르며 고통속으로 서서히 밀어넣는다. 모디아노의 작품들에는 전쟁에 의해, 한 인간의 정체성이 통째로 붕괴되는 과정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묘사되여 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내면에 뚫린 커다란 구멍, 메우지 못할 빈 공간을 작은 기억의 조각들로 채워나간다.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소멸된 과거를 찾아서 되살리는 일을 이어나간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느끼십니까?" 바로 그런 강요가 모디야노의 작품을 량산해낸다. 프랑스가 겪었던 현대사의 비극과 성장기의 개인적 상처와 그 정체성 찾기는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17세에 부친과 절연했고 어머니의 정을 느끼지 못했고 남동생은 어릴때 세상을 떠나는 등 작가의 성장기에서 가족은 부재했다. 때문에 그의 소설은 항상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과거의 애틋한 흔적을 되살리는데 바쳐진다. 인간의 정체성을 어둠속으로 침몰시켜버리는 세계, 인간 실존의 근원이 상실돼 가는 세계를 기억상실자가 과거를 찾아가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그린다. 그러한 정체성찾기가 그의 작품들에서 계속 반복된다.   3,   여기서 근년들어 우리 사회에서, 우리 작품에서 부쩍 회자(膾炙)되고있는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다시 말하고저 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실 개인의 정체성을 인간의 몸에서 찾기는 어렵다고한다. 왜냐하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가 계속 바뀌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의학이나 과학수사에서 만능으로 여기는 그 DNA의 염기 배렬이 개인의 정체성을 확정 시켜줄수도 없다고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정체성은 DNA의 염기 배렬,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억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이 지탱될수 있다. 즉 자아가 계속적으로 기억하고 반성하는 한 한 개인의 정체성이 유지될수 있다는것이다. 하지만 흔히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정체성이 사라질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집단의 정체성 확립은 훨씬 더 어려울 것이 아닌가. 이처럼 정체성 확립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집단의 정체성을 탐구한다. 피줄에도 기대여 보고 언어에도 기대여 본다. 그리고 작가들은 문자에 기대여 본다. 글로벌화로 인한 외부여건과 문명충돌은 약소민족이나 그 개체로 하여금 뒤미처 정체성찾기라는 본질적특성을 반추하게 했다. 모디아노처럼 이러한 정체성찾기의 문학이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보여 주며 최고의 상을 수상할수 있는것도 바로 인류의 이런 본연의 모습과 자세에 대한 추구와 맞물리기때문이다. 우리의 조선족 작가들은 민족공동체의 부침속에 멀미와 현기증을 엎누르며 흔딜리는 필을 고누잡고 창작에 고심하고 있다. 수십년간 불어친 도시진출, 출국붐에 밀려 우리의 언어를 아끼고 돌보던 사람들인 문학인과 독자층도 역시 피폐할 정도로 줄어들고 있다. 하필이면 이런 시대에 문학을 한다는 일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고 있으면서도 필을 놓지않고 있다. 잊혀지고 박제된 민족의 력사를 불러내고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우리 민족의 뜨거운 숨결과 기상을 되살려내려 몸부림하고있다.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각오와 능란한 민족어 구사로 합격된 작가와 문화인이 되여야만 거대한 대륙의 주류문단과 접목하고 나아가 세계 문학과 문화에 기여할 작가로 성장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하철속 지도처럼 읽은 모디아노의 창작자세가 그 본이다. 모디아노처럼 과거를 직시하고 그 과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기억해내고 그 과거를 잊고있는 사람들을 불러내는것이 나의 창작의 한 방향이라고 각오를 뼈무른다. 또 한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든 작가의 힘, 혹은 글의 의무가 아닐가?        - 2014년 11월 18일, -“청우재(聽雨齋)”에서   “연변문학” 2015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5    황제의 수라상 댓글:  조회:4828  추천:12  2015-03-30
칼럼   황제의 수라상 ​ 김혁 ​ ▲ 영화 “마지막 황제”의 포스터 ​ 1 ​ 제60회 아카데미 수상작 “마지막 황제”가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다시 개봉되었다. 여기서 리마스터링이란 과거의 영상이나 음원을 디지털로 복원하여 화질과 음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필름에 붙어 있는 먼지를 제거하고, 파일의 색과 음향을 보정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필름이 손상된 고전 영화는 복원 작업까지 더해진다. 대부분의 극장들이 디지털 영사기로 교체돼 필름 영화는 아예 틀 수 없게 된 지금, 리마스터링은 문화재 보존의 차원과 초고화질 환경에 대한 콘텐츠 공급에 대한 차원의 작업으로 부상되고 있다. ​ ▲ 위만주국 원수 복장차림의 마지막 황제- 부의 2 ​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생전에 집필한 자서전 “나의 전반생”을 바탕으로 이딸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의해 엄청난 제작비와 물량이 투입되여 제작된 영화는 1988년 제 6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색, 음악, 촬영 등 9개 부문을 대거 수상, “그저 놀랄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우리가 다신 볼 수 없는 역사드라마”, “강력하고, 장엄한 역사적인 전기영화” 등 엄청난 찬사 속에 불후의 명화로 손꼽힌다. 1906년,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80세의 서태후는 병상에 누워있는 광서제 대신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아들인 네살의 푸이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 장엄한 황제 즉위식조차 하나의 놀이로 밖에 여기지 않는 어린 푸이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하게 된다. 자금성에서 연금생활을 하며 푸이는 16살때 완용을 황후로, 문수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1924년, 풍옥상의 군사혁명으로 푸이는 자금성에서조차 추방된다. 중국침략의 야욕에 찬 일제의 사촉으로1934년, 푸이는 세상의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만주국을 세우고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하지만 일본군의 조종하에 위만주국에서 그는 허울뿐인 “꼭두각시 황제”노릇을 한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일본 탈출을 시도하던 푸이는 만주에 주둔한 쏘련군에 의해 포로가 되며 중국인 전범수용소에 갇힌다. 1959년, 특사령에 의해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수용소에서 나온 푸이는 평범한 공민이 되여 만년을 보낸다. 영화는 력사의 도도한 흐름아래 몰락해가는 왕조, 그속에 굴절된 인간의 삶과 영욕을 그리고 있다. ▲ 벼타작을 하고있는 간도의 이주민   3 영화에서는 푸이가 일제의 사촉하에 지금의 창춘에 허울뿐인 위만주국을 세우고 강덕황제로 등극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런 강덕황제에게 진상한 수라상의 쌀은 바로 간도지역에서 생산되었음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당시 두만강지역은 인적이 드문 “봉금”지역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황무지를 개간하는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사직전의 가난한 조선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월강하여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용정시 개산툰진의 하천평은 조선인들의 벼농사가 비교적 일찍 시작된곳이었다. 이 마을에 최학출이라 부르는30여세의 조선인 농꾼이 있었다. 최학출은 1917년 2월 18일 충청북도 청주군 학사면 원평리에서 태어났다. 재해로 살길이 막연하여 지자 1935년에 이곳으로 이사하여 왔다. 그때만 하여도 이 고장의 벼농사는 주로 산종을 했고 벼모이식을 조금씩 하는 정도여서 벼의 생산량이 많지 못했다. 최학출만은 전부 모내기를 할 타산으로 당지의 한냉한 기후조건에 비추어 대담하게 온상육모를 시험했다. 1941년 봄, 유리창문처럼 간이 문창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양광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다. 결과 모를 일찍이 키워냈을뿐만아니라 유별하게 벼모가 건실하게 자라났다. 이해 소출도 뜻밖에 아주 높았고 지어놓은 해쌀밥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가 있어 그야말로 천하진미요, 천하진품으로 되었다. 그의 벼는 현과 간도성 농산품 전시회에 출품하게 되어 으뜸가는 호평을 받았고 점차 전 만주에 소문이 났다. 최학출은 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신경(지금의 창춘)에 가서 만주국화페로 천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특별히 강덕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쌀을 전문 생산하는 밭을 가꾸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천자, 제후에 붙이는 높임말인 “어”에 곡식 “곡”자를 붙여 밭이름을 "어곡전(御谷田)"이라고 했다. ​ ▲ 어곡전 옛터 기념비앞에서의 필자 최학출이 맡은 "어곡전" 면적은 천평이나 되었다. “어곡전” 주위는 뺑끼칠을 한 널판자로 울타리를 하여 집짐승들이나 사람들까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촌공서와 경찰서, 현의 관원들이 "어곡전"을 호위해 주었다. 봄에 논갈이를 할 때만 소의 힘을 빌었을 뿐 그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 논에 일하려 들어갈 때면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하였고 거름은 오직 삶은 콩과 두병만을 사용하였다. 가을이면 먼지가 없도록 까붐질을 한 다음 정미를 하고 온 마을 처녀들을 끌어다 쌀을 고르게 하였다. 처녀들은 유리판 위에 쌀을 펴놓고 한알한알씩 고르었는데 쌀알의 귀가 좀 떨어져도 안되고 쌀의 빛깔이 좀 달라도 안되었다. 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어곡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참으로 세심한 과정이 었다. 이렇듯 만주지역의 논농사는 이곳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최학출은 만주 지역 벼농사의 전설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벼재배 기술과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안고 오늘도 두만강 연안에서 나는 쌀은 당년 못지 않게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 돌며 밥맛도 참으로 구수하다. -“청우재(聽雨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영화 "마지막 황제" ost
44    봄 우뢰 댓글:  조회:3776  추천:11  2015-03-16
칼럼 봄 우뢰 김혁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3.13 반일시위 모습     1,   우뢰, 여름철 소나기 올 때 하늘에 크게 울리는 소리를 말한다. 대기 중의 방전 현상으로 생기는 큰 소리이다. “울다”의 어간 “울”에 어미 “에”가 붙어서 이루어진 순 우리 말이다.   또 천둥이라고도 하는데 천동(天动)이 변한 말이다. 옛 사람들은 하늘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해서 천고(天鼓)라는 표현도 썼었다.   우레는 장마철이나 여름철에 많고 봄에는 드물다. 그래서 봄우뢰를 신뢰(新雷)라고도 했다. 연변지역은 비교적 한랭한 기후이니 봄 우뢰가 우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95년전 지금의 연변지역 즉 당시의 북간도에서는 세상을 놀래는 “봄 우레”가 울었다.   좌로부터 김약연, 림민호, 한락연   2,   1919년, 3월1일,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독립지사들은 경성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 전역을 무대로 성세호대한 반일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온 겨레가 떨쳐 일어 선 이 장거에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적극 호응하여 “간도의 서울”인 용정에서 반일시위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 13일, 이른 새벽부터 북간도 각지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용정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3만 여명의 민중들이 분분히 대렬을 지어 용정에 도착하였는데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었다.   대회에서는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을 낭독한 뒤 일본간도총영사관을 향해 나아가며 거리시위를 단행했다.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용정의 거리와 골목에 우레처럼 메아리쳤다.   시위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을 받았다. 군경들은 적수공권인 군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이날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19명이 피못에 쓰러졌고 4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94명이 체포되었다. 그 후 용정의 각계 인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14명 수난자들을 용정 동남쪽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고히 안장했다.   용정의“3.13”반일운동은 20세기 10년대 북간도 지역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학계에서 “해란강의 봄 우레”라고 지칭되는3.13반일운동의 천둥은 북간도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퍼지어 앙양된 반일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3.13반일운동과 직결된 인물들은 많고 그중에는 조선민족을 빛낸 여뢰관이 (如雷贯耳 우레소리가 귀를 뚫고 지나는 것 같이 명성이 자자하다) 의 인걸들이 적지않다. 그 몇분을 뽑아보면-   김약연. 당시 간도지역의 “대부”로 연변 초기의 이주민 마을인 명동촌의 지탑을 잡고있던 그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자 연해주로 파견되여 갔다. 연해주에서 김약연은 각지에서 파견 되여온 독립지사들과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고 용정반일시위를 기획하였다.   “3.13”반일시위가 일제에 탄압을 받은 후 조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이를 빌미로 2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초기의 근대 교육학교인 명동학교를 세운 그이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림민호 반일시위가 일던 날 대회장 가녁의 교회당 첨탑 위에 올라가 구경하고 있던 한 소년이 교회당의 종소리를 울렸고 그 종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되었다. 종소리를 울려 성세호대한 반일시위를 촉발시킨 그 홍안의 소년이 바로 후일 연변대학의 총장으로, 조선족교육의 정초에 크게 기여를 한 림민호 총장이었다.   한낙연. 근대 중국미술발전사와 중국현대혁명사에서 선구자적 위치를 자리매김하여 “중국의 피카소”라 지칭되고 있는 그는 당시의 반일시위에 적극 동참하여 대회에 사용 될 기발을 만들고 프랑카드를 써서 대회장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시위자들과 함께 반일과 민족독립을 위해 한 목청을 높였다.  용정의 시교에 조성 된 "3.13" 반일 의사능   3,   룡정에서 남녘 삼합 쪽으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3.13반일의사릉에는 그날 만세를 목청껏 부르다 순직한 13인 열사의 봉분이 두 줄로안장돼 있다. 그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조선후기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탁월한 승려인 혜장을 높이 치하하여 지은 시가 있다.   그 명성이 우레처럼 크게 떨쳐 사방의 호걸들이 얼굴보기를 원했지   해란강반에서 반일의 봄우레가 터진 3.13반일시위가 어언 96돐을 맞았다. 이날을 계기로 또 한번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한 몸 바친 인걸들의 “여뢰관이”한 이름을 크게 새기며 망각과 무심으로 안일했던 마음 들을 들깨우기를 바란다.   -“청우재(聽雨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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