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e 블로그홈 | 로그인
김혁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홈 > 약력/문학자서전/관련뉴스

전체 [ 21 ]

21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회 북경에서 개최 댓글:  조회:658  추천:18  2019-10-19
“연변 문단 발전의 공간 한층 넓혀줄 거라 확신…” -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회 북경에서 개최     중국작가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개최한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회의가 14일부터 15일까지 북경에서 개최됐다.    연변작가협회 당조 서기 정봉숙을 단장으로 하고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인 김혁, 장백산잡지사 주필 안미영을 단원으로 하는 연변작가협회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조선족 대표들   회의는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단결진보의 기치를 높이 들며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사상을 깊이있게 학습하고 습근평 총서기의 문예사업, 민족사업에 대한 중요론술을 학습, 시달하며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우리 나라 소수민족 문학 발전의 려정을 회고하고 사업경험을 총화하며 우리 나라 소수민족 문학 사업을 보다 번영, 발전시킬 데 관한 조치를 연구하고 전국 광범한 소수민족작가와 문학종사자들을 단결시켜 새시대 우리 나라 소수민족 문학 사업의 새 국면을 개척하는 데 취지를 두었다.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은 개막사에서 소수민족 문학의 번영 발전을 위해 공헌한 작가와 문학종사자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나서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새시대에 중국소수민족 문학은 새로운 발전공간을 맞이했는바 광범한 소수민족 작가들은 ‘단결’, ‘시대’, ‘혁신’이란 세가지 과제를 정확히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의에서는 중국작가협회 당조 서기이며 부주석인 전소천이 사업보고를 했다. 광범한 소수민족 작가와 문학종사자들은 초심을 잊지 말고 부단히 노력하고 참답게 창작을 견지해 소수민족 문학 사업의 발전을 추진하고 우리 나라 다민족 문학의 보고를 풍부히 하며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새시대의 문학작품을 써내려갈 것을 당부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첫날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감독검사사 사장 수청, 《민족문학연구》 부주필 류대선, 사천성작가협회 주석 아래의 특강을 청취한외에 제10회 모순문학상 시상식에 참가했다.     길림성 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한 김인순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당조 서기 정봉숙은 17일 인터뷰에서 건국 70돐을 맞아 경사스러운 분위기 속에 이번 소수민족문학창작회의에 참가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게 느껴지고 감개무량하다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회의는 1980년에 제1회가 개최돼서부터 지금까지 6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매 한번의 회의는 모두 소수민족 문학창작의 번영과 발전을 힘있게 추진했다. 이번 회의는 내용이 알차고 풍부해서 이틀간의 시간에 많은 것을 학습했다. 이번 회의가 소수민족 지역 문학창작에 정책적 지원은 물론 발전의 공간을 한층 넓혀줄 것이라 확신한다. 대표단은 회의정신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참답게 전달해 광범한 작가, 문학종사자들이 깊이있게 학습하도록 할 것이다. 이번 회의는 향후 연변의 문학 발전, 번영에 큰 추진작용을 할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연변일보” 10월 18일   중국작가협회 철응 주석과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서기처 서기, 이족 시인 지디마쟈와    
20    “모순 문학상”시상식에 참가하다 댓글:  조회:800  추천:15  2019-10-19
       
19    “민족문학” 3종 잡지 10주년좌담회 북경에서열려 댓글:  조회:800  추천:11  2019-10-19
  《民族文学》蒙、藏、维文版创刊10周年座谈会在京举行     10月16日上午,由《民族文学》杂志社和中国少数民族作家学会主办的《民族文学》蒙古、藏、维吾尔文版创刊10周年座谈会在中国现代文学馆举行。   中国作协党组成员、副主席、书记处书记吉狄马加,中国作协副主席白庚胜,中国作协名誉主席丹增,中国少数民族作家学会常务副会长叶梅,中国民族语文翻译局局长李万瑛,《民族文学》主编石一宁、中国作协创联部主任彭学明等出席座谈。     全国唯一的少数民族国家级刊物《民族文学》于1981年创刊,随着民族文学不断繁荣,这本刊物也在不断丰富和壮大,于2009年创刊的蒙、藏、维三个少数民族文版就是一个强有力的证明。他希望《民族文学》继续办好三个少数民族文版,为培养民族文学后备力量,为人民提供更多精神食粮,为推动少数民族文学继续向前发展作出应有的贡献。   哈闻、艾克拜尔•吾拉木、陈岗龙、扎巴、拉先加、艾布、阿合买提、吾麦尔江•吾吉艾合麦提、达哇才让、阿不都拉、陈涛、张健、严英秀、金革等作家、学者,以及民族文学杂志社全体编辑等70余人参加座谈会。   (文、图/中国作家网记者 杜佳) 中国作家网2019年10月18日  
18    소설가 김혁 중앙민족대학서 특강 댓글:  조회:728  추천:15  2019-04-28
소설가 김혁 중앙민족대학서 특강   소설가 김혁 23일, 중앙민족대학 조선어문학부의 요청에 의해 소설가 김혁이 를 테마로 특강을 펼쳤다. 중앙민족대학 조선문학부 교수와 학부생 및 석, 박사 연구생 40여명이 참가했다.   김혁은 조선족 문학연구와 문학습작에 도움을 주는 데 목적을 두고 조선족문학의 형성으로부터 시작해 외래문학의 영향, 우리 문단 진맥 등 약 1시간 30분에 걸쳐 강의했다. 김혁은 강의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그 력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자신의 독특한 지정학적, 문화적 특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학의 우수한 전통도 고스란히 물려받아 반도와 세계 각국 겨레문학의 흐름중에서 아주 각별한 위치와 나름의 위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 또 조선문학, 일본문학, 로씨야문학, 한국문학이 우리 문단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고 조선족문학과 해외문학의 수용의 차이를 설명했다. 우리 문단 진맥에 있어서는 퓨전시대 새로운 쟝르가 출현하고 있지만 우리 문단은 문체시도가 따분하고 쟝르실험이 전무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많은 이야기와 민족특색을 간직한 우리 민족 문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2019-04-27     
17    金革长篇小说“春子的南京” 出版发行。 댓글:  조회:747  추천:13  2019-03-13
中国作家协会会员,朝鲜族小说家金革的长篇小说“春子的南京” 汉文版近日由作家出版社出版发行。 中国作家协会会员,延边大学翻译硕士导师靳煜翻译。 ​ “春子的南京”,通过刻画慰安妇群体的悲惨命运,回顾那段不堪回首的历史,进而呼吁反战与和平。 为了让更多的人了解历史真想,金革小说家本着对历史和后代负责的态度,在大量调查史料,实地踏查战争遗址的基础上,以艺术的手法,还原了那段历史,塑造了以春子为代表的慰安妇群像。 通过春子等慰安妇们崎岖坎坷的命运 ,深刻地揭露了日本侵略战争肮脏、丑恶、丧尽人性的罪恶本质,表达了全人类有良知的人们反对战争、珍爱和平的良好愿望。 ​ 作者金革近年来著作甚丰,已发表,出版了长篇小说“猩红热”、“局子街的女人,”,“诗人”,“无声时代”、“傀儡皇后”、小说集“扼杀天才”,长篇纪实文学”天国无梦“,“韩乐然传”等。 ​ “春子的南京”于2016年入选中国作协少数民族文学民译汉扶持作品。 ​ 记者 杨守玉 ​ “延边日报” 2019 年3月 13日       ​
16    김혁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한문판 출간 댓글:  조회:693  추천:12  2019-02-12
김혁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한문판 출간   --중국문단에서도 처음으로 호흡이 긴 서사로 픽션화 한 일본군 위안부 소재,   중국의 당대문학에서도 주제령역을 승화시킨 중후한 작품   조선족 소설가 김혁의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이 최근 작가출판사에 의해 한문(汉文)으로 출간됐다.   2016년도에 중국작가협회소수민족문학 번역지원작품에 들어 출판된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은 조선족문단 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국문단에서도 처음으로 호흡이 긴 서사로 픽션화 한 일본군 위안부 소재이다.   지금까지 조선족은 물론 중국문단에서도 위안부소재를 다룬 소설작품은 얼마 안된다. 력사의 사실로 기록된 위안부는 전쟁속 엄연한 희생양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극우세력은 세계여론의 반대에도 불과하고 교과서를 뜯어고치고 력사를 왜곡 부인하고 있다. 소설가 김혁은“춘자의 남경” 창작과정에 대해 “력사의 질곡에 갇혔던 불운한 그녀들을 대상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골수 깊은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 싶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연변대학 우상렬교수는 작품에 대해 “조선족 문단 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의 당대문학에서도 주제령역을 승화시킨 중후한 작품이다”라고 정평했다.   한편 “춘자의 남경” 한문번역은 연변라지텔레비죤방송국 보도쎈터의 주임조리, 부편심이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연변대학 번역석사생 도사인 근욱이 맡았다.   현재 “춘자의 남경”은 연길아리랑방송에서 라지오소설로 각색되여 인기리에 련재방송중이다.   김혁은 중국작가협회 회원이며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사단법인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등 직을 맡고 활약하고 있다.   안상근기자  [ 길림신문 ]  2019-01-24  
15    金革长篇小说“春子的南京” 中文版出版发行 댓글:  조회:845  추천:13  2019-01-27
    长篇小说“春子的南京” 2019年1月由作家出版社出版发行。 ​ “春子的南京“是朝鲜族小说家金革先生推出的一部力作,通过刻画慰安妇群体的悲惨命运,回顾那段不堪回首的历史,进而呼吁反战与和平。 ​ “春子的南京”于2016年入选中国作协少数民族文学民译汉扶持作品。 ​ 作者金革现为中国作家协会会员、延边作家协会副主席,著作甚丰,已发表,出版了长篇小说“猩红热”、“局子街的女人,”,“诗人”,“无声时代”、“傀儡皇后”、小说集“扼杀天才”、散文集“诗人密码”,长篇纪实文学”天国无梦“,“佩斯卡玛号事件”,人物传“尹东柱评传”,“中国的毕加索- 韩乐然”等。 ​ 译者靳煜现为延边广播电视台新闻中心主任助理 ,副译审,中国作家协会会员,延边作家协会理事,延边大学翻译硕士导师。 长篇小说“春子的南京” 朝文版 ​ 放眼朝鲜族与中国文坛,迄今为止,涉及慰安妇题材的小说作品寥寥无几。慰安妇在历史上却的的确确存在过,她们是战争的牺牲品,可是日本极右翼势力不顾世界舆论的反对,擅自篡改教科书,否认这一段历史。 ​ 为了让更多的人了解历史真想,金革小说家本着对历史和后代负责的态度,在大量调查史料,实地踏查战争遗址的基础上,以艺术的手法,还原了那段历史,塑造了以春子为代表的慰安妇群像。 通过春子等慰安妇们崎岖坎坷的命运 ,深刻地揭露了日本侵略战争肮脏、丑恶、丧尽人性的罪恶本质,表达了全人类有良知的人们反对战争、珍爱和平的良好愿望。 ​ 长篇小说“春子的南京“填补了中国文学关注慰安妇群体,书写慰安妇群体的空白。 ​ /书讯 ​
14    저서 싸인회를 가져 댓글:  조회:1077  추천:43  2017-01-17
6.1 아동절을 맞아 연길시 인민공원에서  내가 집필한 청소년위인전 시리즈를 어린 독자들에게 증정하는 싸인회를 가졌다.   (2016년 6월 1일)      연변조선족자치주출판국,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조선문독서사협회의 공동 기획과 주최로 된 싸인회에서  "윤동주 코드",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주덕해의 이야기" 등 근년래 출간된 나의 저서 80여권들을  공원을 찾은 독자들에게 싸인,증정했다. 举办第十届延边读书节庆“六一”暨“2016绿书签行动”图书展 "延边日报“”:2016-06-02   本报讯(记者 陈颖慧)6月1日,由延边读书节组委会、延边读书协会、延边州文广新局联合主办的“2016第十届延边读书节庆‘六一’图书展”暨“绿书签行动”在延吉公园开幕。7家参展单位300多个品种1.5万余册图书,吸引近万名学生及家长参与活动。 当日上午9时,延吉公园广场人山人海,荷花池畔书香阵阵。延吉市新华书店、延边人民出版社文化书店、延边民族图书大厦、延吉市莘学书店、延吉市求学书店、延边青少年文化促进会、延边朝鲜文读书社将五颜六色的图书沿池畔一字排开,每个书摊前都吸引众孩子驻足观看。主办方还开展打折送书、赠送文具盒、发放书签、指导读书等活动。 众多孩子及家长在一张书案前排起长队,中国作家协会会员、延边作家协会副主席、龙井尹东柱研究会会长金革免费签名赠书活动火热进行。 他认真地询问每个孩子的名字,在他所撰写的《韩乐然的故事》、《朱德海的故事》等书的扉页上郑重地写下自己的赠言, 免费赠送读者,仅30分钟,赠书近80册。 金革被称为“中国朝鲜族第六代小说家”的代表人物之一,曾获得第七、八届全国少数民族新闻奖,第五、六届延边“金达莱”文艺奖。孩子们拿到他签名的赠书,都不由自主翻阅,认真阅读,心中埋下文学的种子。    
13    “별”의 기호를 풀이하다 댓글:  조회:1894  추천:17  2016-03-09
. 후기 .   “별”의 기호를 풀이하다 김 혁   1. 출판계와 서점가를 강타한 “다빈치 코드”라는 초베스트셀러가 있다. 추리소설과 비슷한 쟝르적특성으로 미스터리함과 긴장감을 유지시킨 특징이 그 작품을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게 한 원인이였지만 무엇보다도 압권은 작품에 새삼스럽게 기호학을 잉용(仍用)해 작품의 골조를 이룬것이였다. 기호라는것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수 있고 인지하고있는것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 없이 받아들였던것이다. 교통표지판, 상표, 간판, 영화포스터, 시, 그림, 핸드폰속 이모티콘 등등 다양한 기호학적문화읽기는 사실 은연중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사처에 널려있다. 하지만 “다빈치 코드”의 작가는 기호를 통해 그 단순함 리면에는 뭔가 특별한것이 있다는 기대를 독자들에게 던져주어 다양한 독자층의 관심을 끌고 작품에 나름 깊숙한 의미를 부여했다. “다빈치 코드”의 흥행은 광범위한 범위에서 “코드열풍”을 일으켰다. 이어 쉐익스피어, 단떼, 피카소, 모짜르트 등문화, 예술 분야 인물에 대해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책자들이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그 일례로 중국에서의 “병마용코드”, “진시황 코드”, “청명상하도 코드” 등 일련의 관련 연구서들을 들수 있다. 이처럼 근년 들어 기호학은 단순히 언어학적분석의 패러다임에 머물지 않고 문화콘텐츠의 해석을 통해 일반문화의령역으로 폭넓게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다.   2.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이다. 학계에서는 그이를 리욱, 김학철 등과 더불어 중국조선족문학의 으뜸가는 우수한 대표로 꼽는다. 또한 올해는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돐 기념일이자 “저항시인” 윤동주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본 후꾸오까감옥에서 숨진지 꼭 70주기 되는 해이다.   외국에서 윤동주연구 관련 석사, 박사가 50여명이나 배출되고 그 연구물이 수백편에 이르는 방흥미애(方兴未艾)의열조에 비해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윤동주 관련 연구물이 몇손가락 꼽을 정도로 미비하고 그 기림의 열조 또한 미온적인것은 세계가 자호하는 고향의 시인에 대한 “홀대”이며 자라나는 새 세대에 그의 문학적재부를 승계해주지못한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필자는 10여년전부터 윤동주연구에 몰두하여왔고 언론사시절에는 관련 추모, 연구 행사들을 빠짐없이 보도했으며이미 2010년에 윤동주의 생애를 문단 최초로 소설화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연변문학》에 일년간 련재하였고 또 윤동주 관련 연구 시리즈물들을 여러 간행물들에 평론, 칼럼, 수필 등 여러 쟝르를 동원하여 수십편 창작,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향의 시인에 대한 추모와 선양이 외려 다른 지역들에 비해 미온적인데 대해 늘 가슴 깊은 곳에 체증 같은것을 담고있었다. 그러다 윤동주 70주기를 맞으며 새로운 격식, 새로운 시각의 윤동주연구물을 내놓으려 나름 시도해보았다.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여러가지 텍스트로 나왔지만 새로운 격식과 문체, 다각적인 시각으로 나름 조명하고싶었다. 몇해전 대학가의 청탁을 받고 연변대학의 문학도들에게 윤동주 관련 문학특강을 한적 있었는데 그때 어린 문학도들이 윤동주의 보편적이면서도 심대한 문학생애를 비교적 알기 쉽게 접하도록 열개의 편린으로 나누어 이야기했었다. 평론가의 말투나 난해한 해설이 아니라 독자와 공감할수 있는 언어로 특히 삶의 의미와 관련해 스토리텔링으로전해주고싶은 마음에서였다. 그후 연변작가협회 문학강습반에서도 이런 형식으로 강의했고 몇번의 윤동주 생몰일 기념모임에서도 그 뼈대를 계속 보완해 이야기했다. 그 연구물을 지난 2012년경에는 문화종합지 《문화시대》에 근 1년간 련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본 책자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론문이나 특강, 칼럼, 기행 형식으로 써놓았던 글들을 련작칼럼으로 다시다듬었다. 스물아홉해의 짧은 인생을 보낸 윤동주의 생과 문학에 대해 29개의 코드로 풀이해보았다. 29개의 코드에 윤동주의 중요한 대표시들을 빠짐없이 선정해 싣고 해제를 달아 문학생애에 대한 료해와 더불어 그의 시집을 접하는것과도 같은 다중효과를 거두기로 꾀했다. 윤동의 생애와 직결되는 인물, 사건에 대해 사진자료들을 곁들어 해설함으로써 당시 시대상의 면면을 살펴볼수 있도록 노력했다. 비록 타이틀을 련작칼럼이라 달고 몇배로 되게 크게 보완하고보니 련작칼럼이 내용도 충실해지고 부피도 묵직하니짜장 인물연구서처럼 되였다.   집필의 과정은 그야말로 고된 작업이였다. 적지 않은 작품을 량산(量产)했지만 막상 집필에 앞서 윤동주라는 이 우리 민족 모두가 애대하는 걸물을 나의 졸필로 그려낼수 있을가 하는 부담감에 지독한 창작슬럼프에 시달렸다. 출판사에서 청탁한 시간이 거의 만료되도록 한 글자도 적어내려가지 못했다. 이는 그 이전에 작가협회 계약작가로 선정되여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집필할 때와 꼭같이 겪게 된 슬럼프였다. 그 슬럼프를 이겨내게 해준것이 또 다름아닌 그 슬럼프를 안겨준 윤동주의 삶이였고 윤동주의 시였다. 송우혜작가의 윤동주연구의 결정판이요 평전문학의 진수인 《윤동주 평전》이라는 경전이 이미 앞서 있지만 “외계에서 들여다본 윤동주”가 아닌, “고향에서 내다본 윤동주”로 시각의 차이를 바꾸고 윤동주가 오래동안 생활해온룡정지역이라는 이 유서깊은 곳의 지역특색의 문화풍토를 덧입히려는 나름의 시도가 슬럼프로 흔들리려는 나의 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고향 시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의 승계를 위한 나의 작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이 기회에 다시한번천명하고싶다. 장편소설은 련재가 끝난지 몇해가 지난 오늘도 계속 탁마에 탁마를 거듭하고있고 인물평전은 유명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했으며 청소년전기물도 곧 출시될 예정이다.   3. “민족시인”, “저항시인”, “별의 시인” 등으로 윤동주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오늘날 윤동주라는 코드는그저 시인이라는 수식과 호칭을 뛰여넘는 풀이를 우리앞에 숙제처럼 남기고있다. 오늘도 우리가 윤동주라는 코드를 굳이 여러 각도로 풀이하는것은 그이의 아름다운 생각, 맑은 령혼, 진리를 향한열정, 인간을 향한 순수함 그리고 민족이나 나라를 뛰여넘는 우주적, 보편적 량심이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때문이다. 윤동주의 소꿉친구 문익환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이를 “떠올리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짐”을 우리는경험한다. 오늘날 그를 기억하고 그의 시를 되뇌이는 일은 우리 민족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고 비전을 위해 뛰고있는이들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체험과 계시로 될것이다. 전대의 력사는 후대의 전성기에 쓴다는 성세수사(盛世修史)라는 말이 있다. 그 민족과 민족의 시인이라는 깊은 명제의 코드를 풀이해내는 벅찬 작업을 나름 완수할수 있어 마음은 뿌듯하다. 한편 걱정 또한 갈마든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의 생애를 연구,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한적 있다. “천한 사람의입으로는 찬양하는것조차도 그를 모욕하는것이다.” 이처럼 내 작은 둔필로 그이를 찬양하는것이 오히려 시인의 고매한 생애에 흠결(欠缺)을 주는것이 아닐가 내심 조심스러워진다. 관련 연구를 선행한 작가, 학자들에게 경의를 드리며 많은 연구가와 윤동주를 사랑하는이들의 동참과 편달을 바란다.   2015년, 백로(白露) - 청우재(听雨斋)에서   "윤동주 코드 - 29개의 코드로 풀어 보는 스물아홉 살 시인의 삶과 문학" 김혁 지음  출판 연변인민출판사  20015년 12월  페이지 수 324  정가 30원 목차 코드 1. 파평 윤씨 코드 2. 월강곡 코드 3. 선바위 코드 4. 공덕비 코드 5. 생가 코드 6. 명동학교 코드 7. “3.13” 코드 8. 15만원 코드 9. 우물 코드 10. 영국더기 코드 11. 은진중학 코드 12. 청년문사 코드 13. 처녀작 코드 14. 신사참배 코드 15. 늦봄  코드 16. 낭인(浪人) 코드 17. 카톨릭소년 코드 18. 연희전문 코드 19. 순이 코드 20. 자필시집 코드 21. 창씨개명 코드 22. 육첩방 코드 23. 구름다리 코드 24. 판결문 코드 25. 의문사(疑问死) 코드 26. 장례식 코드 27. 오오무라교수  코드 28. 아우 코드 29. 시비(诗碑) 책 소개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인 김혁작가의 인물연구서. 스물아홉해의 짧은 인생을 보낸 윤동주의 생과 문학에 대해 29개의 코드로 풀이 해 보았다. 특히 윤동주가 대부분의 시간을 지냈던 북간도 용정과 명동의 풍토에 대해 더욱 많은 편폭을 들여 세세하게 조명했다.  29개의 코드에 윤동주의 중요한 대표시들을 빠짐없이 선정해 싣고 해제를 달았다. 윤동의 생애와 직결되는 인물, 사건에 대해 사진 자료들을 곁듦으로써 당시 시대상의 면면을 살펴볼수 있다. 저자소개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했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를 나와 베이징 루쉰문학원을 수료했다. "길림신문", "연변일보"등 조선족의 주요 매체에서 20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했다. 현재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직을 담임하고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중학의 후신인 북안소학교, 은진중학의 후신인 용정중학을 나온 학연(學緣)을 자각하고 10여년간 윤동주 연구에 매진했다.  중국조선족 최초로 2010년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창작, 발표하여 이슈가 됐고, 현재 조선족 권위간행물에 "윤동주 평전"을 2년째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난장 속에 스러져간 청춘의 군상을 그려낸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조선족 최초로 되는 위안부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만주국 황후 완룽의 생애를 그려낸 "완룽 황후"등 장편소설 7부,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등이 있다. "중국의 피카소 한낙연 평전",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 등 인물전 다부가 있으며  논픽션물로는 북간도 용정의 백년역사를 조명한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한국 초청사기행각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등이 있다.  “윤동주”문학상을 비롯하여 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학상, "연변문학"문학상, 연변일보 CJ문학상,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상 등 조선족문단의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했으며 2004년 한국재외동포재단 제1회 한민족 청년상을 수상한바 있다.  저자 메일: ckkh99@hanmail.net  (출처:동포투데이)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2    문화·학술행사로 꽃피우는 만해의 얼 댓글:  조회:1907  추천:10  2015-09-01
문화·학술행사로 꽃피우는 만해의 얼   ‘제17회 만해축전’ 11~13일 인제 만해마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시인이자 타협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는 만해축전이 8월 11일부터 사흘간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17번째를 맞는 올해 만해축전의 대주제는 ‘해방 70년, 분단 70년, 민족문학의 역경’이다. 만해 축전은 행사 기간 동안 시상식, 학술행사, 문화행사, 만해 스님 71주기 추모행사 등 각 분야별로 20가지가 넘는 크고 작은 행사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 우선 만해축전 행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제19회 만해대상 시상식’은 12일 오후 2시 인제 하늘내린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만해 스님의 삶과 사상을 기려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제정한 ‘만해대상’은 평화, 문학, 학술, 예술, 실천, 포교 등 6개 분야별로 100여 명의 국내외 인사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올해는 평화부문에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 실천부문에 히말라야 빈민구제활동가 청전 스님과 발달장애인공동체 무지개공동회, 문예부문에 황병기 가야금 명인과 정현종 시인,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를 각각 선정했다. 이에 앞서 11일 오후 6시 30분 만해마을 님의침묵 광장에서는 만해 스님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제정한 ‘제13회 유심작품상 시상식’이 열린다. 올해는 박형준 시인과 김복근 시조시인, 이숭원 평론가가 작품상을 수상한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문학정신을 계승 발전하고, 새로운 시대정신과 문화예술 창조를 위해 진행하는 ‘학술심포지엄’도 행사 기간 중 7차례 열린다. 11일에는 만해연구소의 ‘만해 한용운, 전통과 근대 그리고 탈근대’와 창작21작가회의 ‘해방 70년 분단 70년 민족문학의 역경’ 두 학술심포지엄 마련됐고, 12일에는 현대불교문인협회의 ‘현대 불교시인 연구’, 유심시조아카데미의 ‘사설시조의 위상과 현대적 계승’, 창작21작가회의 ‘평화 시낭송회가’가, 13일에는 시와세계의 ‘설악 큰스님 만해축전 창립·고별 심포지엄’, 한국시인협회의 ‘21세기 한국 시문학의 가능성’ 등 심포지엄이 각각 열린다. 사전행사로 6월 27일엔 동악어문학회가 ‘동국문풍과 한국 근대불교문학 전통’, 7월 28일엔 불교평론의 ‘불교와 내셔날리즘’, 7월 31일엔 만해학회의 ‘만해 한용운과 허영호’가 각각 진행됐다. 이밖에 강원일보사의 ‘전국고교백일장’(12일)과 강원도민일보사의 ‘님의 침묵 서예대전’(12~16일), 인제신문사의 ‘님의 침묵 전국 백일장’(13일), 니르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청소년 음악캠프’(4~10일), 어린이날다협동조합의 ‘어린이 미술캠프’(12~14일) 등 문화예술행사와 만해축전추진위원회의 ‘유성기 소리마당’(12일)과 ‘설악·금강 공연’(14일), 서사문화연구소의 ‘청년만해학’교(12~14일) 등 만해 스님 71주기 추모행사도 다양하게 마련했다. 행사의 서막을 알리는 전야제 행사는 11일 오후 7시 만해마을 님의 침묵 광장에서 열린다. 니르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과 포크송·록밴드 공연, 유심시조아카데미의 ‘시·시조 낭송 콘서트’ 등의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불교저널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1    재중동포 작가 김혁의 필속에 흐르는 시대와 역사 (4)​ 댓글:  조회:1923  추천:13  2015-08-01
재중동포  작가 김혁의 필속에 흐르는 시대와 역사 (4)​ ​ ​ 시인 윤동주와의 지연, 학연으로 인한 사명감   “윤동주시인은 천고절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우리한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윤동주의 삶과 그 작품은 시공간과 여러 계층을 초월하여 현대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 김혁은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윤동주에 심취되고 윤동주에 관련된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두고 “생래적(生来, 天生的)”에 가깝다 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중국 연변 용정에서 태어나 스무살까지 용정에서 보냈던 김혁,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후에 조선족 최초로 윤동주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창작하고 윤동주 관련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 ​ 그는 용정에서 어려서 신안소학교(지금의 북안소학교)를 다녔는데 그 전신이 바로 윤동주와 문익환이 다녔던 광명학교였다. 그후 용정중학에서 초중과 고중을 마쳤는데 용정중학교는 바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 대성, 동흥 등 학교가 합병한 학교로 지금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가 우뚝 서있다. 이렇게 그는 윤동주와 ‘지연’, ‘학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기자로 뛰면서 조선족 최초의 윤동주 학술회, 시비 건립, 윤동주 관련 학술저서 출간, 관령 활동들을 빠침없이 취재하였고 윤동주를 중국에 맨 처음 알린 오오무라 마스오, 윤동주의 시를 일본에 번역한 아이자와 가쿠,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녀사 등 관련 친지, 연구가들도 지난 세기90년대에 이미 만나 많은 교류를 했다. 시인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오래전에 벌써 윤동주 관련 카페도 개설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논문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딴 된 사람만도 50명이 넘고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론문도 수백편이 나왔다. 평전이나 위인전기물도 여러 권 나왔다. 이렇게 논픽션 작품은 많이 나왔는데 그에 비해 픽션작품 즉 소설과 같은 창작물은 전무했다. 너무나 알려져 있는 시인이었지만 그 높은 위상 때문이었던지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작품화한 사례가 극히 적었다. 소설로는1992년 경, 한국에서 방송드라마의 시나리오를 개작하여 한부가 나왔다. 그후 구효서와 이정명에 의해 나왔지만 김혁 작가가 장편 “시인 윤동주”를 2010년에 발표한  후의 일이다. 그리고 윤동주의 숨결은 현재에도 용정의 곳곳에서 느껴지는데 이 곳에서의 윤동주에 대한 추모와 연구작업은 미비한 상태. 그 같은 공백들은 시인 윤종주의 고향에서 태어나고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에서 공부했던 작가 김혁에게 그 어떤 사명감과 창작의 충동을 주었다. 작가 김혁은 본격적으로 윤동주를 소설화 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연변작가협회에는 “계약작가”라는 창작제도가 있다. 작가들이 창작기획서(스토리와 창작취지)를 작성해 제출하면 연변의 유명 대학교수들과 평론가, 원로작가들로 구성된 평심단이 제출된 많은 기획서들 중에서 가능성 있는 작품을 엄선해내 1년간 창작기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김혁은 윤동주에 대한 스토리만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조선족 작가들중 유일하게 두 차례나 이같은 계약작가에 선정되었다. 이렇게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가 2010년 조선족의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1년간 연재되었다.   한편, 지난해 9월에는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 사단법인 “용정·윤동주연구회”를 발족시켰다. “용정·윤동주연구회”는 조선족의 작가, 학자, 교직원들로 무어졌으며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선양하는데 그 취지를 두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고고한 삶과 정신은 내 삶속에 깊게 들어와 있다”고 작가 김혁은 말한다.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 고양에 앞장서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으로서의 김혁은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윤동주가 시 편들을 통해 선양하려 했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널리 계승, 발양하기 위해  지난해 9월, 용정윤동주연구회를 설립한 후 짧디짧은 시간내에 많은 일들을 해왔다.      2014년 12월 20일,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서 윤동주 탄신 97돐 기념행사를 가졌고 2015년 2월 16일에는 윤동주 옥사 70주기를 기념하여 “항일 시인 윤동주 70주기 기념행사”를 가졌다. 또 용정·윤동주연구회의 편찬으로 문화총서 “룡두레”를 출간하기도 했다. 룡정·윤동주연구회의 년중행사의 중요한 일환으로 해마다 정기적으로 펴내게 될 이 문화총서 “룡두레”는 문단의 각 장르에서 뛰어난 실적을 올린 작가들과 대학 교수들로 편집진을 뭇고 그 첫 기를 윤동주 추모특집으로 꾸몄다. 금후 지속적으로 출간하게 될 “룡두레” 총서는 윤동주를 연구하고 그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잇는 문헌들과 회원들의 다채로운 창작품들들을 게재할 뿐더러 용정의 역사,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을 조명하고 진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공동체의 이슈와 현안에 대해 진맥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비전에 대한 제안 등의 알쭌한 내용들을 여러 코너를 개설해 다양한 문체로 꾸며나갈 전망이다. 올  4월 4일, 청명을 맞아 장춘에서 꾸리는 조선족의 순수문학지 “장백산” 잡지사와 손잡고 윤동주의 묘소를 새롭게 단장했다. 이어 윤동주연구회 사무실을 윤동주의 자취가 서린 용정의 자택 자리에 오픈, 오픈식을 가지고 본격적인 사무에 착수했다. 뿐만 아리라 룡정·윤동주연구회에서 주관, 운영하는 사이트가 현재 개설중에 있다. 이 사이트는 윤동주에 대한 연구, 선양과 더불어 그 의미를 넓혀 용정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조명하고 오늘의 이슈와 뉴스를 시효성 있게 다루며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비전을 알리는 뉴스성, 전문성 종합사이트로 거듭나려 한다. 이제 용정·윤동주연구회 성원들로 구성된 역사답사팀이 본격적으로 역사답사에 나선다. 윤동주의 발자취가 어린 명동, 나아가 조선족역사의 “박물관” 격인 용정  유적지에 대한 계획적인 답사다. 보름에 한번 꼴로 정규적인 답사를 이어갈 것이라고 김혁은 밝혔다. 조선족문학의 순문학지인 “도라지” 잡지사, 문화종합지 “문화시대” 등 잡지들과 손잡고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원 특집을 마련했다. 금후에도 여러 간행물과 손잡고 회원들의 우수한 문학작품들을 그에 걸맞는 우수한 지면에 소개할 타산이다. 또한 연구회 회장 김혁이 창작한 조선족 최초의 “윤동주평전”이 대형문학지 “장백산”에 연재중이다. 올 하반년에는 윤동주를 위한 인물연구서 “윤동주 코드”를 출간하게 된다. 이 외에도 해당 부문과 손잡고 윤동주 백일장, 윤동주 시랑송대회 등 유익한 행사들을 대거 펼쳐 나가려 한다.   에필로그   현재 김혁은 30년 가까이 근무하며 지내왔던 자치주 수부 연길시를 떠나 고향 용정으로 돌아왔다. 윤동주 시인의 용정자택 자리에 앉힌 연구회 사무실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경쟁과 명리만이 난무하는 도시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수십년 내내 문인들의 “문인상경”의 풍토로 얼룩진 문단에서 탈출해 참된 작가의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고 싶었다. 또 중국조선족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인 용정에서 조선족의 역사를 직접 밟아보면서 관련 연구물과 작품 쓰기를 창작성향으로 삼고 십여년간 매일 꼬박 십여시간 가까이 창작과 독서를 견지하고 있다.   “종당에는 중국조선족의 생성에 대한 호흡이 긴 소설, 이주와 정착, 개척과 항일, 건국과 ‘문혁’과 개혁, 출국과 이산의 수백년의 역사를 대하소설로 창작하는 것으로 만년을 장식하고 싶다”. “진정성을 가지고 영혼의 울림이 있는 큰 글을 쓰고 싶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아닌 항상심(恒常心) 하나 가슴에 품고 길을 가려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민족작가’라는 타이틀로 남고 싶다. 단지 유행을 쫓는 소설가나 칼럼니스트가 아닌 역사에 천착하고 민족을 위해 한 목청 내였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그의 창작에 대한 지론이다.   김혁 그의 30여년의 작가생애, 그간 그는 실로 우리들 앞에, 우리의 역사 앞에 너무나 많은 작품들을 펼쳐보였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해왔다. 또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오늘도 쉼모르고 달리고 있다. 재중동포 작가 김혁, 조선족 문단의 갈피에 우렷이 남을 중후한 큰 작가의 앞날을 기대해 본다. ​ 김정, 허훈 기자 ​ 동포투데이 2015/6/1​  
10    재중동포 작가 김혁의 필속에 흐르는 시대와 역사 (3) 댓글:  조회:1846  추천:13  2015-07-23
재중동포  작가 김혁의 필속에 흐르는 시대와 역사 (3) 자신의 문학의 사표로 삼고 있는 박경리의 자취를 찾아 원주 박경리 문학공원을 찾은 작가 김혁    사회문제 다룬 무게 있는 작품들   밑바닥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추구와 아픔에 대한 묘파는 지난 세기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 양상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때를 두고 작가는 다음과 같이 회억한다. “나의 육신밖의 아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피부로 느끼면서 갓길에 섰던 나의 필봉은 새로운 좌표를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의 중국조선족 한국초청사기 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다”, 도시와 외국으로의 진출 과정에서 조선족 여성들이 겪는 아픔을 다룬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중국조선족 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하에 변혁기 중국조선족의 고뇌를 취급한 작품들을 련줄로 펴냈다.  특히 1990년대 말의 한국초청사기 사건을 전방위로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조선말출판 풍토에서 가장 짧은 시간내에 수천권이 판매되는 기록을 냈다. 그 후, 조선족공동체의 정체성과 위기를 다룬 작품창작이 작가의 창작 주선을 이룬다. 십여년간 “중국조선족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그 시리즈물을 수십편 펴냈다. 올해에 그 특집을 한데 묶은 소설집이 간행된다. 작가는 여섯 부의 장편소설을 연재, 출간했는데 모두다 민족의 역사와 관련된 묵직한 소재의 작품들이다. 그 가운데서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문화대혁명에 관한 아픈 기억을,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흔들리고 있는 조선족공동체의 아픔속에 스러져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조선족 최초 연변지역 위안부의 시선에서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제재를 다루고 있다. 김혁 작가의 상술한 작품들을 두고 평론가들은 “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소재로 서사적 사건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고 높이 형가했다. 작가의 필속에 살아 숨쉬는 역사와 인물들  김혁은 다각적으로 조선족공동체의 역사와 면면을 보여주기 위해 소설, 창작 외에도 기행, 칼럼, 영화론문 등 여러 장르를 충분히 동원하여 수년간 관련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 5년간의 답사를 거쳐 용정의 역사를 60여만자로 다룬 장편역사기행 “일송정 푸른 솔, 해란강 깊은 물”은 조선족문화의 발상지 용정의 생성과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완결판 같은 작품이라고 격찬받고 있다. 이 작품은 이미 중문으로도 번역되여 출간을 앞두고 있다. 3년반 째 연재되고있는 문화역서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은 스크린의 각도에서 조선족의 백여년 역사를 다른 텍스트로 연구한 작품이다. 2년째 연재되고 있는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는 조선족 수십명 인걸들의 생애를 사전형식으로 가나다라 순으로 짧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는 소전기물이다. 작가는 근년래 인물전기 창작에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다.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부와 비젼을 위한 작업—조선족인물전 시리즈를 사회와 약속하고 그 결과물들을 육속 펴내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제반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주덕해, 한락연, 김염, 김약연, 윤동주, 김학철, 리홍광, 리화림, 양림, 정판룡 등 우수한 인걸들의 전기를 이미 펴냈거니와 앞으로도 지속 펴내는 작업을 그의 창작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있다.  한편, 그는 기행문, 인물전이라는 논픽션물 외에도 소설이라는 픽션으로 조선족 인걸들을 조명하는 작업을 펼쳐나가고 있다. 문단 처음으로 소설화한 “시인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문학적 삶을, “완용 황후”는 연변에서 숨진 청나라 황후를 통해 근대 동북의 근대사를 조명하고 있다. 현재 집필을 마치고 출판을 앞두고 있는  “무성시대”는 “중국 영화의 황제” 김염의 영화인생을 그린 장편소설로서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 지지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매체의 기자와 소설가로서의 삶을 병행해 살았던 김혁에게 있어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창작성향이다. “대서사적인 작품을 다루는것이 나의 근년래 그리고 향후의 창작방향”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끊임없는 창작과 그 작품들 작가 김혁은 그야말로 백메터 경주자의 자세로 오로지 창작에 몰두 하고 있고 발에 발을 이어 그 결과물들을 육속 내놓고 있다. 이미 출간된 외에도 곧 출간을 앞두고 있거나, 창작스케줄을 짜고 다그치고있는 작품창작 역시 놀라울정도로 방대하다. 윤동주 연구서인 “윤동주 코드”의 집필을 이미 마무리했다. 조선의용대 분대장 김학철에 관한 청소년 전기도 완수했다. 지금 연재중인 “윤동주평전”의 집필과 병행,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에 관한 평전 “규암 김약연전”도 집필중이다. 연변대학교 교수들과의 공저로 연변대학의 정초자 “정판룡평전”도 몇해 전에 이미 집필에 착수했다. 지난세기 30년대 용정에서 10여년간 지내면서 용정체험을 소설로 펴냈던 여류작가 강경애의 일대기도 소설화, 집필을 마쳤다. 연변의 첫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의 설립자이자 고종황제의 밀사였고 독립운동가였던 보재 이상설에 관한 장편소설도 그이의 타계 100주년을 맞아 출간 예정이다. 특히 지난 몇년간 김구의 비서로 지냈고 윤봉길과 이봉창의 작탄의거를 도왔지만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해외에 알려지지 못했던 의용대 출신의 여걸 리화림에 대한 전기물 집필작업을 몇해간 꾸준히 해왔다. “꼭 그 결과물을 내놓으련다”고 김혁은 말한다.  (계속)​ 김정, 허훈 기자 동포투데이 2015/5/28  
9    재중동포 작가 김혁의 필속에 흐르는 시대와 역사 (2) 댓글:  조회:2362  추천:13  2015-07-13
재중동포  작가 김혁의 필속에 흐르는 시대와 역사 (2) ​  개인서재 “청우재(聽齋雨)”에서의 저자     "독서광"으로 불리는 작가 ​     조선족 문단에서 김혁작가는 유명한 "독서광"으로 불린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물었다. ​  ​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은 그 인생경력과 열독경력에 따라 변모한다.   어렸을때는 장르작품들 그리고 남다른 문체실험으로 튀는 작가들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오래동안 기자생활에 몸담그고 열독량이 많아짐에 따라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작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   토스토예프스키, 카잔차 키스, 솔제니친, 박경리같은 대가들에게 경모감을 품고 호흡이 긴 그들의 대하소설들을 완독하는데 성공했고 그이들에 대한 연구서들도 숙제하듯이 밑줄그어가며 읽었다. 그중 보리스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좋아해 소설을 몇번이고 다시 읽었고 영화,테프 CD로도 여러가지 판본으로 갖추어 지금도 다시 본다."   박경리에 대해 흠모한 나머지 김혁 작가는 십여년전에는 사비까지 팔아가며 그이를 찾아 원주로 간적까지 있다고 한다.     "일본작가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치, 마츠모토 세이이쵸 등 추리작가들에 미쳐 살았던때가 있다. 요즘 대세인 히가시노 게이고도 좋지만 교고쿠 나츠히코라는 일본추리작가도 좋아한다.   깊은 지식과 탐미적인 문장이 어우러져 추리작가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사회학자로 지칭할 만한 작가, 무엇보다 작품 모두가 읽기 난해하다는 그 난도가 외려 나의 완독 욕구를 부추켰던 작가이다. 우리 문단에서 아마 교고쿠의 작품 수십권 거의 전부를 갖춘 작가는 없을 것이다. ​   무라카미도 좋아하지만 우리로서는 잘 알려 안 진 가즈오 이시구로를 좋아한다. 그의 대량의 작품들이 중국어로 번역되였는데 모두 소장하고 읽었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영문으로 써내는 작가인데 일본작가이지만 영국에서 살면서, 현대 영미권 문학을 이끌어 가는 거장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처럼 우리 조선족 문단에도 이중의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가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의 조선족문학을 거대한 중화권의 문단에 어떻게 잘 알릴가 고민이 많다. ​   엔도 슈사쿠를 좋아한다. 그의 “깊은 강”, “침묵”, “바다와 독약”등 대표작들을 모두 중문으로 읽었다. ​   야스히코 요시카즈를 좋아한다. 소설가가 아니라 만화가이다. 하지만 조선의 개화기, 만주국의 허상 등 근대 아시아 역사를 소재로 한 그의 만화들은 여느 대하소설 못지 않게 깊이가 있다. 게다가 만화장르로서의 재미까지 겸하고 있다.     중국작가로는 모옌(莫言), 위화(余華), 얜거링(严歌苓)을 좋아한다.   모두가 역사의 대사기를 소인물들의 생활에, 인간보편의 주제에 잘 버무려 낸다. 그리고 이들의 특점은 작품 그대로 영화하하고 드라마화 해도 좋다는 것이다. 조선족문단에서 영화광으로 불리는 나에게 그들의 창작방식은 많은 귀감으로 되고 있다. ​    그중에서 근년래에는 옌롄커(閻連科)를 특별히 좋아한다. 나는 그가 중국작가들중에 지식인의 처절한 글쓰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묵직한 소재, 다양한 문체 실험으로 중국 지식인들이 걸어온 길과 가야할 길에 대해 비극적으로 그리고 적나라하게, 첨예하게 보여준다.     한국작가로는 애초에는 시인 이상에 빠져 있었고 소설가 최인호와 박범신등 로장들의 스토리가 재밌고 문자가 현란한 작품들을 좋아 했었다. ​   근래의 한국작가로는 김별아를 좋아한다. 문체도 빛나고 무엇보다 격동의 근대 역사와 그 속에 부침하는 인간들을 즐겨 소재로 삼는 면에서 나의 창작성향과 서로 닮았다고 해야겠다. 왜장과 함께 강물에 투신 한 논개, 백범구의 일대기와 일본총독에 폭탄을 던진 박열과 일본여인의 사랑을 다룬 소설, 해학으로 가미가제 특공대를 다룬 소설들, 깊이와 재미를 두루 섭렵한 깔끔한 소설들을 정말로 감명깊게 읽었다. ​   김연수의 작품도 좋다. 소설의 기교를 능수능란하게 다룬 그의 중단편들이 좋다. '밤은 노래한다'와 같은 작품에서 그는 조선족의 신변에서 일어난 아프고 민감한 소재를 그렇게 훌륭하게 다루어 냈다.   김훈과 공지영의 작품도 좋아한다."     작가 김혁에게서 좋아하는 작가를 단 한 사람만 뽑으라면 단연 “조선족 문학의 대부- 김학철"이라고 말한다.   지금 칼럼이라는 쟝르에 환혹되어 거의 일주일에 두 세 편 꼴씩 수백 편을 써나가고 있는 것도 오랜 기자생활 중에 버릇 된 쟝르의 작법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김학철선생의 창작 중에 가장 빛나는 다량의 잡문에 매료되어서 부터라고 한다. ​   작가 김혁에게 김학철은 "문학의 길로 인도해주시고 아픔과 상처와 노는 법을 일러주신 분이다.   김혁은 "김학철옹은 너무나 아득해서 도저히 흉내낼수 없이 높은 경외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이의 넓이와 깊이의 사범(師範)은 내가 영원히 본받고 내가 궁극적으로 닿고저 하는 목표이다."라고 말한다.    김혁은 김학철에 대한 인물전기의 집필을 완료,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계속) ​ ​동포투데이 김정, 허훈 기자 ​ 2015/5/25 ​    
8    재중동포 작가 김혁의 필속에 흐르는 시대와 역사 (1) 댓글:  조회:2086  추천:15  2015-07-13
재중동포  작가 김혁의 필속에 흐르는 시대와 역사 (1) ​ 김혁은 누구? 1965년 중국 룡정에서 출생. 열아홉살이 되던 해,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 “노아의 방주” 등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그로써 문재를 인정받고 스무살 어린 나이에 “길림신문”의 기자로 파격 발탁되였고 그 후로 “길림신문”, “연변일보” 등 조선족의 주요 매체와 인터넷 미디어에서 25년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십대에 데뷔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25년간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완용 황후”, “시인 윤동주”, “춘자의 남경” 등 6부의 장편소설과 “천재 죽이기”,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불의 제전”, “뼈”, “피안교” 등 중단편소설 수십편,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 “윤동주 평전” 등 인물전기, 평전, 장편역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역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등 역사문화연구저서 외에 시 수백수, 칼럼 200여편을 창작, 발표해 “쟝르를 초월하는 작가”, “조선족 다산작가”로 불리고 있다. 상술한 성과와 기여로 하여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상, “해란강” 문학상, 자치주정부 “진달래” 문학상 등 각종 묵직한 문학상을 30여회 수상했다.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이사,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위원장),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등 직무를 맡고있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석사연구생, 북경 로신문학원을 졸업(수료)했다.   원로 평론가가  말하는 김혁   전임 연변작가협회 주석이며 원로 평론가인 조성일 선생은 재중 동포 대형문학지 “장백산” 2014년 2월호에 게재한 글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작가 김혁 인상기”에서 김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 “사람들이 김혁이 누구냐고 물으면 소설가 하나의 타이틀로는 부족하다. 그의 문학은 소재나 형식, 그 어느 면에서나 문학예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그는 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 이를테면 소설, 시, 수필, 칼럼, 르포, 다큐멘터리, 아동문학…등을 섭렵하면서 글쓰기를 계속해 왔고 문학이라는 전당의 구석구석에 이름을 남겨 독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는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아동문학가이고 지어 ‘이디어 뱅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가 김혁’이보다 ‘작가 김혁’이 더 잘 어울린다. 그는 다쟝르작가로,다면수로 우리 앞에 당당하게 서 있으며 그만큼 우리 조선족문학예술에 대한 기여가 다방위적이다.”   작가의 성장과  탐색   작가 김혁은 1985년에 데뷔하여 소설과 시를 발표, 신출내기 기자, 문학도로서의 습작기를 걸쳐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그야말로 맹렬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남에 비해 불운한 특유의 인생경력과 오래동안 언론사에 근무했던 언론인의 안광을 지녔던 관계로 애초의 작품부터 무거운 소재에 천착하게 되었다. 창작 작법을 잘 모르고 썼던 초기의 작품부터라도 그는 시종 그 “무거움”을 의식해 왔었다. 열아홉에 낸 두 편의 처녀작품 역시 중국 개혁개방 초기, 변혁기의 취업대기 청년들의 문제를 반영했고 거기에 제목이 종교색채까지 띠어 화제가 됐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기 자신의 불우한 운명과 처절한 인생체험을 회피하지도 숨기지도 않고 자기 작품에 반영했다. 이 비정한 세계에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성장기에 자기가 겪어야 했던 가혹한 체험들을 독자들에게 설파했으며 가슴속에 고여있는 한과 서러움과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작가의 소설 “적”, “바람속에 지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이올린”, “천재 죽이기”, “불의 제전”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보면 그 소설들에 부각되고 있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죄다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고 근원적인 아픔에 시달리면서 죽어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런 인물형상들을 통해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불안의 정조” 속에서 비장한 혈투로 몸부림치는 사회의 저층에 깔린 인간들의 영혼을 보여주려 했고 자기의 실존을 위해 약속 없는 미래를 향해 힘겨운 행보를 하고 있는 “소인물”들의  불안과 실망, 소외와 고독, 아픔과 슬픔을 반영하려 했으며 나아가 빛에 가려진 어둠속 약자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이야기 하려 했다. 이 모든것은 남과 다른 작가의 불우했던 인생경력과 밑바닥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들이었다. 한편, 작가는 새 것에 부단히 도전하며 과감하게 새로운 실험을 한다. 작가는 국내외 문학사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기 나름의 개성적인 작품을 창출해 냈다. “천재 죽이기”, “신오감도”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계열시, 신사실주의 소설 “라이프 스페이스”, 황당파 소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이올린”, 사이버 소설 “병독”, 판타지 소설 “불의 제전” 등 동포 문단에서 쟝르와 문체실험을 가장 많이 하고 가장 먼저 한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계속) ​  동포투데이 김정, 허훈 기자 ​ 2015/5/24 ​  
7    나의 루실명 <陋室銘> 댓글:  조회:1988  추천:11  2014-09-09
  나의 루실명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는 이렇게 노래했다. '충만한 삶인가? 완벽한 작품인가? 만약 두번째를 선택했다면 어둠 속을 가며 천국을 포기해야 하리라!'   하필이면? 왜? 내가? 천형같은 이 책무를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가? 하는 의문으로 문학가의 직업륜리를 심각하게 고민한적있다.   그러다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휘둘리우며, 코피를 쏟으며 그와 필로 대치하려는 가상스러운 각오를 은연중 머금게되었다.   이제 단순한 애호와 취미의 발로를 넘어서 세상의 돌팔매질에도 불구하고 외길을 포기하지 않는 구도자의 자세를 몸으로 익혀야 할때다.   김 혁     "도라지" 2008년 3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    추천사 (4월 11일~ 4월 4월 18일) 댓글:  조회:2967  추천:34  2011-04-11
추 천 사        조선족 중견소설가 김혁선생이 집필한 인물전기”주덕해의 이야기”가 주덕해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되였다.     중국조선민족의 정초자이며 민족의 탁월한 지도자인 주덕해의 일대기를 조명한 인물전기 “주덕해의 이야기”는  15만자에 달하는 편폭에 16개 장절로 구성, 주덕해의 인생로정을 따라 로씨야에서 탄생, 중국 화룡현 수동골에로의 이주, 소학교생활과 야학교생활, 혁명의 계몽스승을 따라 펼쳐온 초기항일활동, 혁명사업에 참가하기 위한 퇴혼, 흑룡강성 녕안, 서대림자, 밀산에서의 항일투쟁,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생활, 할빈에서 조선의용군 3지대와 함께 싸우던 시절, 건국직후와 연변지구위원회 서기 겸 연변전원공서 전원시절, 조선전쟁시기 특무색출작업,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과 연변의 건설, 문화대혁명시기 박해를 받던 과정, 서거와 연변인민들의 추모활동등을 섬세하게 다루었다.     평론가들은 이 위인전기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언어로 주덕해의 인생을 조명하였을뿐만아니라 항일투사이고 조선족대표자이며 인물인 주덕해의 진, 선, 미의 일체를 보여주고있다.” 이 인물전기의 출현으로 하여 새로운 전기문학, 더우기는 청소년을 위한 인물전기의 활약상을 감히 기대해 본다”고 정평하고 있다.   김혁소설가는 금방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소설화하는 장편소설의 작업을 끝내기 바쁘게 자치주 주장에 대한 애대와 민족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안고 창작에 매진하여 불과 석달도 못되는 짧은 시간에 이번 위인전기를 집필해 냈다.     저자는 “중국조선족의 정초를 닦아온 한 혁명가의 초상을 그리면서 나는 여태 창작해온 여느 쟝르나 문체보다는 다른 농도와 줄기의 중후한 기운을 느꼈다.”고 하면서 “이에 그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우리 위인들의 이야기를 펴내는 우리들 응분의 작업에 계속하여 필봉을 크게 기울일것을 약속했다.   재차 금주의 문인으로 추천한다   문학닷컴 편집부  
5    추천사 (11.8~11.15 ) 댓글:  조회:2882  추천:28  2010-11-09
추 천 사     중국조선족 문단의 중견소설가 김혁선생이 “제3회 김학철 문학상”을 수상했다. 민족이 낳은 걸출한 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첫 소설화하는 작업을 마무리한 시점에서의 수상, 또 한번의 이슈가 되고있다.  문학의 위상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문학인의 가치가 환금성으로 계산되는 부박한 시대, 10대로부터 시작해온 초심을 잃지않고 조용히 서재에 묻혀 량산의 작가로 거듭나며 문학의 참(真)을 찾고있는 김혁 소설가, 금주의 문인으로 추천한다.     문학닷컴 편집부    
4    문학자서전 (3) 댓글:  조회:4444  추천:71  2008-05-17
    . 문학자서전  3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입사 그 이듬해도 나는   ,  ,  등지에 육속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와 함께 나의 인생이 궤적이 느닷없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창간초기의 인원결핍으로 고민하던 성급신문인 사에서 파격적으로 나에게 요청을 보내왔다. 하여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은 문제아였던 나는 , 어느 사영기업의 양계장에서 달걀이나 깨우던 허드레 부화공이였던 나는, 필재가 양양한 문학청년으로 인정받고 일조일석에 신문사 기자로 변신을 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스무 살이었다. 중학교문도 채 나오지 못한 스무 살 내기가 일약 신문기자로 된다는 것은 그 당시 편집원들이나 내 곁 사람들의 경악에 쳐들린 눈초리가 보여주다시피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사회접촉면이 넓은 기자 사업에서 단련하면서 나의 눈과 필봉을 벼리여 당시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중국작가 호연과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뼈물어 먹었다. 한낱 뜨내기 부화공이 기자로 발탁되는 조건은 가혹했다. 2년의 시간은 고험기로 견습기자, 그 기간 로임이나 장려가 한 푼도 없다는 조건이었다. 대신 원고비는 내준다고 했다. 이를 작가로 향발하는 길에서의 기회와 전환으로 여긴 나는 그 조건을 겁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86년 5월, 온 거리에 흩날리는 하얀 비술나무 씨를 축복처럼 맞으며 좀은 어리친 모습으로 나는 신문사 편집실에 발을 디밀었다. 배치되어 맨 처음 맡겨진 임무가 선배들과 함께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편실화 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선배들은 일찍 번역을 마치고 차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나는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팥죽 땀을 흘려가며 번역에 매어있었다. 번역이 늦어져 부장이 곁에서 재촉하고 주필님까지 찾아와 지켜보는데 난해한 단어들이 많아 안달아난 나머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겨우 번역을 마무리했다.   내가 쓴 첫 기사는 86년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그네가 정식경기종목으로 되였다는 예고소식이었댜. 그런데 신문기자습작에 관한 강의나 학습도 없이 착수했던 나는 그 기사를 밥도 죽도 아닌 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머리에 그네에 대해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조를 곁들였고 소식에 그네 뛰는 여인들에 대한 찬미의 서정까지 토로했다. 글을 들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주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길림성을 상대로 한 성급신문이라 취재범위가 넓었다. 룡정을 작은 반경으로 다람쥐 채 바퀴 돌리 듯했던 나는 상경한 시골 닭처럼 전전긍긍하며 장춘, 길림, 교하, 류하, 통화, 매하구, 구태, 장백 등지를 사철 내내 돌아다녔다. 촌부락에 내려가서는 하도 어린 나이였기에 가짜기자로 의심받고 초대도 받지 못한 채 어스름이 내렸으나 잠자리도 찾지 못하다 학교접수실의 마음씨 고운 당직 아바이에게 청구하여 한 온돌에서 비비 닥이며 자기도 했다. (그때 나는 어린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려보려고 덜 고운 의붓아버지에게 청구하여 호구부를 고쳐 나이를 한살 올렸고 콧수염을 무성히 기르고 다녔다.) 그렇게 어려운 기자 생활중에서 나는 문자라는 부호의 합의된 배열법칙과 음훈을 익혀나갔고 따라서 나의 필봉은 서서히 벼려지게 시작했다.    하지만 로임을 주는 날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감내를 겪어야 하는 날이었다. 매양 19일날, 모두가 희희락락 로임봉투를 타들고 음식점을 찾아 갈 때면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군 했다. 신문사를 멀리한 상점으로 가서 가련한 원고 비를 잘라 홀로 맥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신문기사를 곧잘 다루는 합격된 기자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신문의   ,  와 같은 칼럼란에서 나의 이름과 필명을 하루 멀게 볼 수 있었다. 북향, 초군, 설봉, 각설이 그때 나의 필명만 해도 13가지나 되었다. 그때 문단의 원로 김학철선생의 신랄한 잡문에 홀딱 반해 나는 잡문쓰기에 커다란 열성을 보였다. 지어 선생의 풍격인 글 사이에 풀이표를 쳐주는 것도 꼭 같이 모방하여 잡문을 저그만치10여편 발표했다. 한편 기자생활에서 받은 감수로 20여 편의 소설과 100여수의 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 8년간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단 한 가지 리유로 학교 문을 갓 나서고 취업한 애송이들보다도 적은 가련할 정도로의 로임을 받았고 직함이나 대우, 집 분배 등 기본 적인 면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신문기자행업에 투신한 17년이란 기간 그런 대우는 내게서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어찌 보면 나는 졸업장 한 장으로 한 사람의 우렬을 제쳐놓고 락인부터 찍어놓는 그런 미완숙한 사회규제의 가장 큰 희생자였는지도 모른다.)   오른손잡이를 위해 고안된 세상에서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망각한 그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오로지 오기와 치기로 한곳 향해 매진하는 외뿔 소마냥 문학의 뿔을 혼자서 갈고 닦으며 버텨내었다.   기자라는 것은 나에게서 직업이었고 문학은 본능이었다. 이를 나는 개인적 수행의 방법으로 간주했다. 그 방법을 통해 나는 어섯눈을 개안할 수 있었고 부족한 나의 천성을 다독이며 달랠 수 있었다. 넋 건지기에서 닭을 희생시키듯 하나의 제물로 나는 문학의 제단에 던져져 있었다. 그런 제물이 되여도 나는 유감이 없다.   8년간의 고험을 거쳐 글 다루기에서 제법 웃자라난 나를 두고 광복과 함께 창간된 조선족 최대의 일간지 에서 백락처럼 손짓했다. 94년, 나는 해란강문예부간 편집기자로 전근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시작하여 1여년의 기자생활에서 제법 이름 있는 로기자라는 딱지가 앉게 되였고 그 기간 나는 1000건에 달하는 기사를 발표, 문학상과 전국소수민족신문상을 비롯한 각종 신문보도상 20여차를 수상하게 되였다.   동호 (同好) 여려서 사회에 내쳐졌고 기자와 작가라는 이중신분으로 여러 계층에서 자맥질해왔던 만큼 나에게는 각종 부류의 친구들이 많다. 그중에서 물론 가장 도타운 친구들은 문학동호인들이다. 나는 문학인들과 적극 사귀였고 각종 문학협회를 꾸리는 남다른 열성을 보여 왔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85년, 룡정에서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문학협회를 꾸렸다. 비서장을 맡고 각 현시 문학도들을 조직했고 한편 등사본잡지에 상당한 분량의 무협소설 를 련재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룡정의 유명작가들이 꾸린   협회에 가입, 보름에 한번 씩 열리는 작품합평회에 참가하러 퇴근 후면 늦은 밤 버스를 잡아타고 룡정으로 빠짐없이 다녔고 회의마다에 작품을 내놓았다.  에 입사한 86년 나는 또  문학협회를 만들었다. (협회 이름은 당시 의기투합됐던 지금의 사 최호사장과 함께 백조사진관에 가서 협회창립기념을 남기며 내가 사진관 이름을 본 따 단 것이었다.) 연길시 당안관 자리를 빌어 협회명의로  60여명의 작가와 문학 지망생들이 참가한 대형 련환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등사본잡지를 몇 기 발행, 창간호에 나는 설봉이라는 필명으로   이라는 평론을 실었다. 그러한 우리 문학도들을 대견히 여겨 등사본잡지의 앞머리에 김학철선생과 리상각시인께서 왕붓을 허비해 제사까지 써주셨다. (그 동아리들 중에서 대부분이 사회 각 기관의 어마어마한 령도인물로 성장. 오직 나만이 외줄타기로 지금도 경황없이 글밭을 경작하고 있다.) 그후에도 여러 문학협회에 적극 참여, 청년시인협회인  의 부회장직을 맡고 수천원의 자금도 협찬 받아오고 내가 경영하고 있던 식당을 협회전용처럼 내밀고 각 잡지에 동호특간도 조직해내고 하면서 동호회를 만드는데 혼신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떤 동아리를 만들기에 열중하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그러한 지인들지간의 이해와 교류의 분위기의 멋을 잊지 못해 몇 해 전에도 전국 각지의  기성문인들을 동원하여   라는 인터넷동호회를 설립, 한국의 유명홈에 개설한 우리 동호회가 그중 가장 활약적인 양상을 보여 왔다.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나의 동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즐겨 읽는 무협지중의 녹림인물들처럼 자신을 내던지곤 했다. 당년에 책을 쌓아 놓고 나면 엉덩이도 간신히 들이밀 나의 8평방짜리 셋방 집에 들리지 않은 동년배 동인이라곤 없다. 싸구려 생맥주에 북어끄트러기라도 맛나게 찢으며 문학을 안주삼아 밤을 지새곤 했다.문예부에서 편집을 하면서 나의 손으로 편집하고 그 작품이 상을 받은 내 또래 동인이 10여명이 된다.. 문학 외에 아는 것이란 또 문학밖에 없는지라 합격 못된 세대주로 첫혼인이 파렬된 후에 거칠 것 없는 나의 셋방 집은 아예 문학 살롱이 되다시피 했다.   우리집에 묵으며 꼬박 2년간 나와 함께 지낸 문학도들이 몇몇 있다. 석탄도 사지 못해 한겨울에 불 때지 못한 찬구들에 이불 몇 채씩 깔고 앉아 매운 소주에 청국장 하나만 달랑 놓고도 우리는 문학의 진미를 담론했다. 그사이 우리 집 식객이었던 그 문학도들의 내가 편집한 작품이 어느 해에는 연변일보 , , 을 몽땅 도거리해서 보람으로 기쁨에 눈굽을 적신적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불경기로 로임까지 체불 받으면서 직장도 없는 그애들을 부둥켜안고 책을 팔아 쌀을 사야 하는 극난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 나날에 나는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과 수십 수의 시를 발표, 4차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조선족 최대의 사회열점을 건드린 장편르포 를 집필, 연재, 출판해 내었고 첫 작품집 를 내놓았다. 그네들과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원조하고 지지리도 어려운 그 나날을 버텨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요즘 세월에도 문학의 외길을 고집하며 함께 하는 그네들을 나는 좋아한다. 친지가 적은 내게서 그들은 살밭은 형제와도 같다. 바른 심성을 갖춘 그들이 문학에 불어넣는 생의 기미에 대한 전언을 읽어내고 서로 긍휼을 나누는 지음이 될수 있기를 나는 진심 바랬다.     무드(mood)   신문기자로 발탁된 이듬해 연길로 이사 오면서 나는 28개의 사과배광주리에 나의 전부의 가산인 소장한 책들을 담아 싣고 왔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붙박이로 책 더미에 내 옹근 몸뚱아리를 부장품처럼 묻어버렸다,   나의 일상에서 독서가 없는 나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편집광적인 독서광이다. 언감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좋은 책들을 모조리 읽고자 망상하고 있다. 시시때때 그 시대의  의식형태에 맞추어 나오는 각종 종류의 책들을 모조리 읽으려 들었다.   종소리에 반응하는 파블로브의 실험용 동물처럼 좋은 책만 나오면 예민한 후각으로 알아내고 선참 사들여 허겁지겁 읽었다. (멋모르고 읽다나니 독일철학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한어로 읽고 중국인으로 여긴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홍루몽'     '닥터 지바고'     '몽떼 그리스도 백작'     '여기의 려명은 고요하여라'     노르웨이의 숲     김용의 '영웅문', '연성결'     산샤의 여황 '측천무후'     백거이의 '장한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대만작가 지미의 모든 만화   세상의 모든 책을 읽고 싶다. 독서광으로 통하는 나, 이상은 세번 다섯번, 지어 열번 이상으로 읽은 좋아하는  책들이다.   삶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 적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어떤 가치의 획득이고 소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자기유지이다. 적극적인 보상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기유지를 해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을 재대로 받지 못한 콤플렉스가 심각하기에 남보다 몇배로 되는 책을 읽고 있다. 그 것이 이제는 내 생리적인 행위에 가깝게 체질화되었는가 보다.    나의 독서범위는  오지랖이 넓어도 무지 넓은 편 , 단 문학 류뿐 아니라 종교, 천문학, 회화, 동식물학, 민속 등등 여러 부류의 책들도 대량 사들여 읽는다..신간베스트셀러면 죄다 사들이는 외에도 꼬박 10 여년 주문하거나 사서 읽는 잡지만도 다섯 10여 종류가 된다.   , , ,,,,,, , , ...   보잘것없는 박봉마저 그 3분의 2는 잘라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책과 잡지를 한 아름 사드는 나를 두고 안해는 우리 집이 내내 쪼들리고 있는 까닭은 책을 너무 사들이기 때문이라고 찬사절반 푸념절반을 섞곤 한다. 일찍부터 나는 책을 사면 책의 맨 앞장에 나의 이름 병음자모와 책을 산 곳과 일시를 적곤 했다. 그 날자가 적힌 5천여 권의 책과 매달기수가 빠짐없는 수천 권의 잡지들을 배열해놓으면 나의 지금까지의 문학적 행보가 년보처럼 역력히 엿보인다. (89년도에 생활고를 덜어보고자 나는 주 공안국부근에 책방 하나를 차린 적 있다. 라는 대문호의 이름을 딴 서점, 그 서점을 꾸릴 적에 내가 소장한 책 수천 권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바람벽을 꽉 메운 책장과 침실, 주방 지어 화장실까지 쌓여있는 책속에 파묻혀 나는 예이제 없이 신들린 듯 독서에 혼 줄을 앗긴다. 나를 잃는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 이였고 회원 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 원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일년 사이에 3천 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내가 열광적인 영화디스크 수집애호가라는 것을 문인들은 다 알고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이프 점들에서 나를 모르는 경영자들이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에 심취되어왔다. 명작개편영화와 할리우드의 대작영화 중국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테프와 VCD디스크로 대량 사들였다. 세계명작
3    문학자서전 (2) 댓글:  조회:3924  추천:104  2008-05-17
[removed][removed]      . 문학자서전  2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removed][removed]       등 단 양부가 세상 뜬 5년 만에 의붓아버지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내가 일곱 살 적에 우리 집에서는 오누이를 만들어준다며 또 3살짜리 여자애를 수양했다. 이로서 우리 집은 한 가정에 성씨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든 특수한 가정으로 어우러졌다. 특수한 가정이라 남보다 더 잘 보듬어야 했지만 의붓아버지는 그런 도량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어떤 작은 잡화점을 경영한적 있다고 자신을 경리님이라 불러야 흡족해 하는, 나의 양모가 네 번째 여자였던 의붓아버지의 출현은 외려 온가족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일 년 사철 하는 일이란 어중이떠중이들을 불러 술 마시는 짓거리, 입만 열면 저속하고 상스러운 말들이 튕겨 나오고 이제 백만 원 잡아온다, 천만 원 잡아온다 하며 허풍을 쳐댔지만 결국 어머니의 퇴직비나 말아먹는 용모마저 추악했던 의붓아버지였다. 의붓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년내내 사사건건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다. 교원가정의 청고한 분위기에서 자랐던 나는 의붓아버지로 인해 돌변하는  상스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했다. 따라서 의붓아버지의 눈에 나는 속곳에 든 가시였다. 나는   침묵으로 아버지에게 항거했다. 나중에 모순이 극화되어 꼬박 3년 동안 아버지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 밥상에서 밥도 먹지 않았다.   바로 이때에야 나는 자기가 입양아라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이 원체 복잡한 가정에 들어오면서 일으키는 역작용에 또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니었다는 엄청난 비밀에 나의 무양하던 심기는 정을 잘못 맞은 못처럼 외곬으로 꼬부라들기 시작했다.   한 가슴 가득 찬 실의를 이기지 못해 나는 사회의 불량배들과 휩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아침 새에 문제아로 변해버렸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외 쪽에 집을 잡고 나가버렸고 어린 나 혼자만 집에 남았다. 어머니가 때때로 와서 쌀 사주고 밥 지어주고 갔지만 그 짙고 쓴 외로움과 고독감은 내 소년기에 큰 응달로 자리 잡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1순위로 놓는 작가 로신, 그의 대표작 아큐정전'은 교과서에 수록되어 중학시절 부터 통독했었다.   그 고독감을 달래준 것이 또 책이었다. 이때는 온 나라가 동란의 부진을 씻고 좌적인 철쇄에서 벗어난 시기라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고 금서로 치부되었던 세계명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탐스럽게 독서를 했다. 세계명작들을 거의 다 이 시기에 읽었다. 어머니가 명심해 주문하는 , 외에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나오는   과   , 민족출판사에서 나오는  총서들을 빠짐없이 사들였다. 그 잡지와 총서들을 통해 나는 세계문학과 중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해 알게 모르게 대량 접촉하게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 화약 같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로는 다니엘 디포의   ,엑또르 말로의  , 로신의  과 구소련작가 라 쁠레예브의  , 중국 작가 량효성의  , 진국개의   와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추리소설과 호시가라 싱이치의 꽁트들, 그리고 연변작가들의 작품인 김성휘의  와 림원춘의  였다.     당시 우리 집에서 주문해 보았던 베이징에서 꾸리는 '인민화보' 겉봉은 거개가 모택동주석의 초상화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했다.     그리고 다빈치의 그림  , 일본영화 ,중국영화 ,브라질의 TV드라마   , 중국통속가수 등려군, 정림의 노래와 프랑스영화   중의 여배우 나타샤 킨 스키와 중국영화배우 장유와 통기타와 디스코음악과 나팔바지와 원숭이해의 원숭이 우표 등등을 나는 좋아했다. 나는 음식 탐을 하는 허기진 애 마냥 그 경전과 류행들을 내 작은 두뇌의 빈 동공(洞空)속에 아낌없이 부어넣었다.     중국영화 '고뇌에 찬 웃음'     일본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북한영화 '이름없는 영웅들'     프랑스 영화 '낡은 렵총'     쥬고슬라비아 영화 '다리'      알바니아영화 '여덟번째 동상'   당시 중국에서 흥행을 보였고 내가 좋아했던 영화     일본배우 다까구라겐     중국배우 장유     일본배우 야마구찌 모모에     프랑스 배우 알란 들롱      '더버빌가의 테스'중의 나타사   * 사춘기  우상들     그때 학교에서 나는 줄곧 어문과대표를 맡고 있었고 작문 짓기에서 큰 기량을 보였다. 내가 쓴 작문이면 죄다 범문으로 낭독되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후 전국적으로 처음 있게 되는 제1회 전국조선족중학생 작문콩클에서 지도교원도 없이 나절로 써서 투고한 작문이 우수상을 수상하여 라디오와 상패를 수상하는 잊지 못할 벅찬 나날이 있었다,        나의 앳된 영혼을 들쑤셔주는 벅찬 문화적인 감수에 못 이겨 나는 필을 들었고 작문에만 그치지 않는  본격적 인 창작을 언감 시도했다.   당시 일본추리영화와 무협영화가 처음 나와 우리 또래는 그에 열광했다. 하여 나는 무협소설과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썼고 학교에서는 내가 싫어하는 수학시간에도 썼다.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각각 3만 여자에 달하는 무협소설, 추리소설 을 써냈다. 는 무협영화의 고루한 형태의 본을 내여 절을 배반하고 나간 무림계의 흑세력을 동자중들이 성장하여 타승 하는 내용을 처럼 장회체로 썼고, 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흥행했던 일본영화 과 문화혁명 때 수사본으로 유행되었던 반 간첩 소설 을 한데 버무려놓은 모방작들이었다. 그중에도 나름대로의 창의성이 보인다면 주인공이 나처럼 남의 집 양자로 자랐다가 아버지를 찾고 보니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흑세력의 두목이었다는 그런 나만의 정감을 부여한 점이었다.   나의 이 소설이라 해야 할지 영화대본이라 해야 할지 작문이라 해야 할지 장르를 획분 할 수 없는 글들은 당시 학생들 중에서 로 대인기를 누렸다. 반급 애들이 다투어 돌려보고는 휴식시간이면 작중인물들의 무림초식(招式)이나 그들의 운명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들은 자기신변에 선 작달만한 애가 이 책의 저자라는 것을 감감 잊은 채 어떤 명작이나 영화를 담론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곁에서 눈을 슴벅이며 득의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해했다. (지금도 82년 고중시절에 수학공책 뒷장에 쓴 이 글들을 나는 고이 보존해두고 있다. 일전 서가를 정리하다 다시 오점투성이인 그 글을 보면서도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스스로 대견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나는 교정 문만 나서면, 썰렁한 집에만 들어서면 다른 아이로 변하군 했다. 무리싸움에 이은 무리싸움, 그것이 방과 후면 하는 가장 큰 짓거리였다.   결국 고중2학년에 나는 룡정 말발굽 산에서 있은 어느 한차례의 큰 무리싸움의 주모라는  죄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애를 이제 완전 망쳤나보다고 어머니는 낙루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배짱이 있었다. 내가 가장 숭배했던 쏘련작가 고리끼처럼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유명작가가 될 거라고 나의 퇴학소식을 접하고 걱정스레 모여온 친지들 앞에서 호기에 넘쳐 선언했다.   아이러니 적인 것은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되어 내가 쓴 작문이 또 중학생작문 콩클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허나 시상식날 수상자는 퇴학당하고 없었다. 학교교무처의 선생들과 반주임이 상품인 반도체라디오와 상장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와 장끼가 있는 학생인지라 다시 학교에서 받아들일 의향을 말했다. 허나 성숙치 못한 치기에 넘쳤던 나는 호의로 찾아온 선생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색안경 끼고 나를 사회 불량배 대하듯 하는 학교는 싫다, 광활하고 할일 많은 사회대학을 나와 이제 고리끼처럼 명작가로 될거다!며 가슴을 탕탕 쳤다. 아직도 천지분간 못하는 애송이었던 나는 스스로 다가오는 어떤 기회를 잘라 던졌고 그 기회를 잃고 그 후로 내내 큰 대가와 무거운 부하를 겪어야했다.       나의 모교- 용정중학. 대성중학으로 불렷던 학교는 시성 윤동주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때의 용어를 빈다면 나는 취업대기청년이 되어버렸다. 직업은 없고 하여 친구들과 함께 샌들장사에 나섰다. 연길로 와서 그때까지도 시공 중인 서시장의 골목길에서 대련에서 넘겨온 샌들을 팔았다. 허나 장사에 재미를 붙일 무렵, 불량배들에게 샌들을 빼앗겼고 그 것을 지키려다가 늘씬히 얻어맞고 장사도 그치고 말았다.   다음에는 룡정 과수농장에서 꾸리는 주물공장에 취직을 했다. 하수도 덮개와 스팀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자전거로 오가는 출근길만 해도 반시간 푼히 걸려야하는 자그만 민영공장에 서 기능공들이 단숨에 100여차 휘두르는 메를 10여차도 못 휘두르고 헐떡이었고 지글지글 끓는 쇳물 바가지를 어떻게 주체할길 없어 그 앞에서 쩔쩔매었다, 그때 내 나이가 17세, 번중한 로동이 힘에 버거워 속눈물을 떨 군적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허나 처음 당착해보는 직장생활은 나에게 불꽃 튀는 영감을 주었고 그 주물공자의 생활을 모태로 하여 무협이나 추리가 아닌 순수소설이라 생각하고 작품 한편을 썼다.   , 세계에서 키가 가장 작은 인종인 피그미라는 토착민들처럼 평균 키가 작은 주물공장의 몇몇 청년들의 사업과 사랑에 대해 쓴 1만 7천자짜리 단편소설이었다. 였던 나는 그때 이 작품에 대해 신심이 컸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중국작가 장자룡의 공업소설 에 못지않을 대작이라고 스스로 만족의 미주를 기울였다. 당시 젊은이들 층에서 인기 높은 종합지였던 잡지에 투고했다.   석달 후엔가 편집부에서 신씨 성을 가진 편집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양모의 학교를 연계주소로 했기에 편집들은 나를 40대의 교원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름도 필명인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애송이티를 가시지 못한 나를 본 편집이 헛 밟은듯 움찔했고 허구픈 실소를 머금었다. 편집부에 한번 왔다가라는 말만 남기고 두수 없는 행차를 한 듯 돌아가버렸다.   며칠 후 나는 토끼를 품은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추리며 연길에 있는 편집부를 찾아갔다. 편집선생들이 모조품을 보는듯한 웃는 눈길로 나를 에워쌌다. 표절, 혹은 번역작품으로 미심쩍어하지만 그 의사를 완곡적으로 얘기해주는 편집원들에게 나는 미덥지 못하면 내가 또 한편의 작품을 써 보이겠다고 배심 두둑이 여쭈었다. (나이가 어린지라 애초에 발표한 나의 작품들은 늘 표절이 아니면 번역 작품이라는 의심을 사곤 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나의 글 수준을 고도로 인정해주는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배포를 머금었다). 편집들은 마지못해 나의 하회를 기다렸다.   친지를 볼모로 둔 심정으로 돌아와 그 작품을 구하기 위해 또 한편의 작품을 썼다. 라는 제목으로 남을 위한 좋은 일만 해서 백치로 몰리는 한 쌍의 신혼부부의 밀월기간에 일어나난 사연을 소재로 단편을 만들었다. 여자 손목도 쥐여 못 본 애송이가 어떻게 밀월을 썼던지 모르지만 그 작품마저 읽은 편집원들이 내 어께에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었다.   드디어 1985년 8월호 지에 나의 첫 소설  이 실렸다.(그 이듬해에 나는 자매편  을   잡지에 발표하여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3부작으로 예정하고 을 창작, 아쉽게도 채용되지 못했다.) 편집들의 면려로 소설뒤끝에 짤막한 약력까지, 첨부되어 나갔다. 지금 보면 가위의 장정설계도 조야하기 그지없고 잡지 값도 겨우 45전, 하지만 처녀작이 실린 그 잡지를 받아든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듯했다. 대번에 여섯 부를 사서 친지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초등학교 반주임이며 룡정에 있는 리태수 김재권 등 작가분 몇몇이 우리 집에 모여와 작은 파티를 열어주었다. 십대의 나이에 그것도 정학처분을 받은 내가 유명잡지에 당당하게 처녀작을 냈고 선생들과 의붓아버지 앞에서 나의 호언을 완수해 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하지만 의붓아버지의 빈축의 눈길은 여전하였다. 그 눈길이 싫어져 그 무렵 나는 집을 나와 버렸다. 연길로 와서 동쪽 교외의 동광양계장에서 달걀을 깨우는 부란공일을 하게 되었다.   장장 21일을 자지 못하고 열을 고루 받도록 부란기의 손잡이를 반시간에 한번 꼴로 돌려주며  오리 알이며   종자달걀을 깨웠다. 그 부란기의 동음이 귀청을 멍멍하게 하는 부화실에서 군용침대에 엎디어 나는 쉴새없이 읽고 또 썼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19살 그해에 련이어 ,  등 3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잡지에서 잡지 뒷면에 나의 작가사진을 실어주었고 작가협회 기관지 에서 조직한 문학 강습반에서는 우수학원으로 선정되어 중국의 대문호 로신의 반신상을 상패로 수상했다.   그 석고상을 부란실의 창턱에 놓고 바라보며 문학이 주는 즐거움과 성취감에 나는 가정에서의 소외감이며 번중한 로동의 고달픔이며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운명의 신은 나와 글쓰기라는 짓거리를 단단한 동아줄에 옭매듭으로 칭칭 얽동여놓았다.     [removed] [removed]   [removed]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5465899');[removed][removed] [removed]
2    문학자서전 (1) 댓글:  조회:3560  추천:84  2008-05-17
. 문학자서전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동란의 문화대혁명이 일던 첫해의 어느 가을날, 고색 짙은 변강의 오지인 룡정현에서 시장부근의 한 교원가정은 암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봉당에는 보자기에 동여진 아기 하나가 그 무슨 물건처럼 내쳐져있었다. 태여 난지 이제 겨우 사흘이 되는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석현에 있는 어느 처녀가 결혼 전에 아기를 뱄는데 부모의 결사적인 반대와 항간의 눈이 무서워 룡정의 병원에 와서 아이를 낳고 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를 룡정 어느 소학교의 아이 낳이를 못하는 교원이 안아왔는데 아이가 풍을 일구고 담이 목에 막혀 우유도 넘기지 못한 채 죽어 가는지라 막 버리려던 참이었다.   이때 이웃집 영감이 여느 때와 같이 마실 돌이를 왔다. 봉당에 놓인 들숨도 쉬지 못하는 아이와 그 사연을 들은 영감은 자기가 아이를 살려보겠다고 나섰다. 중의경력이 있다지만 고주망태로 이름 있는 데데한 영감인지라 집 식구들이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영감이 부엌으로 씽-내려가더니 솥 가마를 뽑아들었다. 웬일이냐고 모두들 경악하는데 영감이 가마 밑굽에 앉은 흙 그을음을 긁어내더니 대접에 물을 담아 그 먼지를 삭혀냈다, 먼지를 삭혀낸 물을 아기의 입에 흘려 넣었다. 순간 목구멍에 꽉 막혔던 담이 내려갔고 아기가 급기야 미약하게나마 울음을 터뜨렸다.   민간토방법의 힘을 입어 가마 밑굽의 먼지를 삭힌 물을 먹고 살아난 아이, 불운의 화인(火印)을 찍고 세상을 버리지 않은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동년 옹근 동년을 나는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엄중한 칼슘결핍증에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라있었고 대신 머리만은 어른의 모자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어릴 적 내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가 되 박처럼 크고 눈이 알전구만한 가분수모양, 꼭 마치 할리우드 공상영화 속에 나오는 외계인 같은 형상이다. 나의 생모가 배속의 나를 떨어뜨리려고 각가지 약들을 람복한 결과였다.   신체가 약한 만큼 성정미도 여리였던 나는 종일 양모의 치마꼬리를 떠날 줄 몰랐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몇 년 간 휴학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심심풀이삼아 나에게 글을 배워주었다. 다섯 살에 나는 철자를 다 떼였고 독서가 가능하였다. 학교에 붙던 날, 나는 등록하는 선생들 앞에서 고과서 읽기는 물론 모택동주석의 이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시 이며를 줄줄 외워 모두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 장 출입에 온 몸 어디라 없이 주사바늘을 꽂고 부어오른 곳을 뜨거운 물어 담근 수건으로 찜질을 해주며 아파서 우는 나를 달래는 방식의 하나가 바로 그림책을 사주는 것 이였다. 나는 병원에서 집에서 내내 그림책하고 벗해 지냈다. 어찌 보면 련환화(連環畵) 읽기는 내 동년의 전부라 할 수 있었다. 48권으로 된 며, 40권으로 된 이며, 22권으로 된 며, 15권으로 된  과 같은 고전명작들, 그리고 구쏘련 작가 고리끼의 자서전적 3부작  ,   ,  이며를 나는 맨 처음 모두 그림책으로 접했다.           당시 나를 매료시켰던 그림책들- '삼국지', '수호지', '악비전' , '손오공이 백골정을 세번 치다' 지금도 나의 서가에 고히 보존되어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책이 한꺼번에 한 질이 출판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사이 두고 한 권 한 권씩 나오는 바람에 그 기다림 나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 이였다. 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매일이고 서점에 붙박여 신간 련환화들이 나오면 모조리 사들였다.(지금도 룡정 신화서점의 퇴직일군들은 당년의 극성스런 꼬마단골이었던 나를 한눈에 알아본다.)         내가 맨 처음 좋아했던 작가 고리끼와 그의 대표작을 각색한 그림책 고리끼의 '동년'   아버지는 신발장에 페인트를 칠해서 책장을 만들어주었고 나중에 더 넣을 자리가 없게 되자 또 찬장을 고쳐 책장을 만들어주었다. 그 신발장 책장에, 찬장 책장에 잃어질세라 서배에 번호를 단 련환화들을 차곡차곡 꽂아 넣었다. 이렇게 옹근 동년에 나는 천 권에 달하는 련환화를 소장했다. 그때 나는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아이로 불렸다.   그렇게 진중하다고 정평이 나있던 내가 어느 한번 온 룡정을 놀래 우는 사건을 저질렀다. 어쩌다가 방화범이 되여 헛간에 불을 질렀던 것이었다. 불은 헛간을 다 태우고 번져 나와 곁에 붙여지은 변소와 이웃집 반 채를 태워버렸다. 온 동네가 불끄기에 떨쳐나섰고 소방차 두 대까지 동원되어서야 드디어 불을 끌 수가 있었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 김치 움에 숨은 채 큰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이웃 아낙에게 발견되어 어스름이 내릴 때에야 김치 움에서 끌려나왔다. 모두가 그 영문을 따져 물었다. 나는 울먹이며 내가 저지른 동기를 말했다.라는 그림책이 있었다. 홍군의 덕택으로 소작농이 겨우 집 한 채를 마련했는데 토비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홍군토벌음모를 꾸미는지라 토비들을 소멸하게 위해 소작농의 아들애가 소중한 자기 집에 불을 다는 그런 이야기의 그림책, 그 그림책을 읽고 나는 소작농의 아들의 본을 내여 그처럼  거사를 치르려 했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웃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 후로 소학 시절 내내 나의 별명은 이였다.         문제의 그림책- '화소야우' 이제보니 겉봉의 애의 모습이 어쩌면 당시의 나를 닮은 꼴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성인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장편도 손에 쥐였다.  ,   ,   ,   ,   ,  ... 지금처럼 어린이들의 심성에 맞는 아동도서가 많지 못했던 그 시절 죄다 어른들의 책을 읽었다. (많지 않은 아동도서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구 사회를 경유해온 이의 자서전적 소설였다)       당시 아동문학서중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소설 '고옥보'   그러다 비판용으로 앞머리에 모택동주석의 어록이 몇 폐지나 붙은   이 나왔는데 그 록림호걸들의 이야기는 나를 환혹시키기에 족했다. 수호전을 줄줄 외우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 학교선생들이 아직도 철자를 바로 익히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훈시하는 말의 한마디가 아무 반급의 혁이라는 애는 장편을 왕왕 내리읽는다던데 너희들은 이게 무슨 꼬라지냐?였다.) 반급 애들이 내게서   이야기를 들으러 방과 후면 우리 집에 가맣게 모여들곤 했다. 개구쟁이들이 한 구들 모여 앉은 그 양말 구린내가 천지를 진동하는 방에서 재봉침우에 올라앉아 나는 중국 옛 찻집의 평서(評書) 이야기꾼처럼 장회체로  을 내리엮곤 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양부였지만 나에게 친아버지 못지않은 사랑을 몰 부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문화대혁명 때  나치스집중영 같은 에서 치른 옥고를 빌미로 장기간 투병 끝에 한 많은 눈을 감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장례 날, 동료들이 많이도 모여왔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리였다. 모두들 비감에 물젖어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그 조총을 쏠때 튕겨 나온 탄알 깍지가 못내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기 바쁘게 허겁지겁 탄알 깍지를 줏는데 어머니가 하고 오열하며 나의 뒤통수를 철썩 아프게도 때렸다.(나의 첫 장편소설  중에 이러한 나의 동년의 모습이 가감 없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그때 탄알 깍지나 탐내던 개구쟁이였던 나는 양부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덧쌓여지게 될 불행에 대해서는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    김혁 프로필 댓글:  조회:5078  추천:127  2007-12-19
    김 혁 (金革)  中國 길림성 룡정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석사연구생, 북경 로신문학원 수료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중국작가협회 회원 “길림신문” , “연변일보” 등 매체에서 20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 "노아의 방주"로 데뷔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완용황후” "춘자의 남경" "무성시대"   소설집: “천재죽이기” "피안교"   인물전: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 "별헤는 밤: 윤동주 평전" "청년문사의 꿈: 송몽규 평전" "실크로드에 서다: 한락연 평전" "소금꽃: 강경애 평전"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페스카마 호]사건" 련작칼럼집: "윤동주 코드"  인물만필계렬: “소설가 김혁의 중국조선민족인물시리즈” 편찬저서: "중국조선족전통미덕이야기"(1,2), "룡두레" 외 다부   수상: "윤동주" 문학상  “연변문학” 문학상 “김학철” 문학상 “장백산” 장편소설상 “도라지” 중편소설상 연변일보 “해란강” 수필문학상 연변일보 CJ문학상 소설대상 흑룡강신문 “한얼패” 실화문학 대상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 소설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 시 문학상 연변작가협회 “화림”문학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민족문학" 년도 소설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 문예상 한국 계몽사 해외특별상 한국재외동포재단 “제1회 한민족청년상” 한국문인협회 해외문학상 등 수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中文博客:http://blog.sina.com.cn/jg6599 메일: khk6699@naver.com 邮箱:13704483299@sina.cn 핸드폰: 137- 0448- 3299 사무실 전화: 322-191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