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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빱까
2016년 01월 04일 09시 02분  조회:2851  추천:18  작성자: 김혁

. 수필 .
 

 

빱 까

 - 고양이를 위한 랩소디 

 

김 혁
 

 

고양이 '빱까'와 함께 한 여덟 살 적 나의 모습.

이 사진을 수필과 함께 기고하면서 잃어버렸다가
20년만에 어느 고마운 편집에 의해 
편집부의 원고더미 속에서 되찾았다. 

감회에 넘쳐 수필과 사진을 다시 올려 본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털에

고운 봄의 향기 어리우도다

 

금방울같이 호 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 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시 공부를 하던 때 습작 본에 베껴두었던 고월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의 전문이다. 

  매양 고양이와 봄에 대해 감각적으로 체득한 이 탁월한 연상의 시를 읊조릴 때면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환영(幻影)으로 본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어제의 커튼을 북- 찢고 뛰쳐나와 내 가슴에 덥석 안긴다. 나와 함께 울고 웃고 뒹굴고 뛰놀며 동년의 능선을 넘었던 고양이 한 마리가... 

  

  그 암울했던 70년대의 중기에 나는 용정의 한 소학교의 3학년생 이였다. 

  검찰기관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가 <<반혁명분자>>로 낙인 되어 악명 높은 <<5.7>>간부학교(중국의 문화혁명시기 불온분자들을 개조하던 감옥)에서 치른 역고를 빌미로 몇 년이고 병원에서 붙박이로 계셔 화기를 잃은 집안은 건조했고 어두웠으며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학교 일에 바쁜 몸이라 아버지의 병시중을 위해 어머니는 도문에 있는 외할머니를 모셔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고리끼의 <<동년>>중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인자하디 인자하신 외할머니가 오면서 왕골로 결은 들 가방에 무언가 넣어 가지 고왔다. 

  그것은... 고양이였다.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귀가 세모지고 눈매가 날카롭고 동침처럼 빳빳한 수염아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온몸은 오목처럼 까맸으나 발만은 운동화를 신은 듯 하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체념한 듯 들 가방 모서리에 턱을 얹고 생소한 환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고양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야- 옹!>> 고양이가 낮으나 모가 실린 소리로 인사처럼 울었다. 나도 고양이를 보고 반가움에 말(馬)처럼 힝- 하니 웃었다. 

  앙증맞게 귀여운 작은 몸체의 고양이는 참담한 기운이 돌던 우리 집안에 작지 않은 생기를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만 그 고양이에 깜빡 환혹(幻惑)되어 버렸다.

  

  우선 고양이의 이름을 짓노라 잔 속을 끙끙 앓았다. 그때까지 만도 게딱지같은 초옥(草屋)들이 한 움큼 속에 들어앉은 듯한 현 소재지였던 용정에는 시골마을과 진배없이 짐승을 치는 집들이 적지 않았고 고양이의 이름이래야 《미미》,《묘묘》따위가 고작이었다. 

  자기 집 아이의 이름을 따서 고양이의 이름을 《철호》라 툽상스럽게 지은 집까지도 있었다. 

  열 개도 더 되는 이름을 놓고 좋은 과일 고르듯 퉁긴 끝에 나는 고양이의 이름을 《빱까》라고 지었다. 그것은 당시 십분 유행되었던 러시아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였는가》중의 주인공의 아명을 본 딴 것 이였다. (썩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러시아 소설 속의 강직한 주인공의 이름을 시사 받은 나의 고양이는 원체 한 마리의 암코양이였다.)

  《역시 교원 집 자녀가 다르긴 달라.》 

  고양이의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골 살을 찡그린 건 외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애가 코냥이 이름을 웨 이렇게 바쁘게두 지었누?》

  외할매는 《빱까》라는 이름을 번지지 못해 고양이를 《바가》,《바가》하고 불렀다.

  

  그때 현 소재지의 아이들에게서는 이산한 괴질(怪疾)이 돌았다. 임파(淋巴) 염증으로 저마다 턱 아래와 목 부위가 찐빵처럼 부어 올랐는데 항간에서는 그 병을 《돼지 병》이라 하였다. 민간 토방 법으로 병을 치료한답시고 목에 돼지고기의 비곗살을 가제를 대여 붙이곤 했다. 병이 남에게 전염 되였기에 병에 걸린 아이들은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나도 그 병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출근하고 할머니는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느라 병원에 붙박여 있었기에 빈집에서 패잔병처럼 턱을 동이고 낭패 상이 된 나를 동반해 준 것은 《빱까》뿐이었다. 

  함께 고무공을 굴리기도 했고 수염이 뺨에 대여 간질간질해 나도록 고양이와 머리를 맞대고 알고도 모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배고프면 나는 밥상에서 고양이는 문가에서 옥수수밥이라도 맛나게 먹었고 졸리면 따스한 가마 목 위쪽에 활처럼 꼬부리고 다정한 형제처럼 누워 자기도 했다. 

  《빱까》가 동무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지겨운 홀로의 시간을 나는 어떻게 지냈을는지 모른다. 《빱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는 목에 붙였던 비계덩이를 《빱까》의 점심 한끼로 내 주었다가 어머님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당시는 옥수수밥과 옥수수떡이 주식 이였고 고기붙이는 일년 치고 설 명절이면 겨우 맛볼 수 있었던 시국, 그렇게 돈냥을 부셔 《약》대용으로 사온 고기를 고양이밥으로 홀랑 대접했으니 꾸지람을 받을 법도 했다.   

 

 《빱까》에 대한 나의 정은 날로 도타워만 갔다. 

오밤중에 밖에 나갔던《빱까》의 미약한 울음소리도 오직 나만이 헤아려 듣고 문을 열어 주군 했고《빱까》는 어김없이 나의 잠자리 곁에 방석과 내 털모자로 꾸며준 준 잠자리에 기여 들어 자군 했다. 《빱까》는 추우면 나의 이불 속에 곧잘 기여 들곤 했다. 

설 명절에 일가친척이 한 구들 미여 지게 모였을 때도 어김없이 내 품만을 찾아 드는《빱까》를 보고 모두들은 고양이와 참으로 자 별난 사이라고 혀를 차군 했다. 

  

  피폐했던 당시의 문화환경에서 중국에서 크게 히트를 친 영화 한 부가 있었다. 

  북한예술영화 《꽃 파는 처녀》였다. 영화를 눈물을 흘리며 연거푸 보았던 나는 이렇게 좋은 영화를 《빱까》에게도 보여야지 하고《빱까》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갔다. 새끼를 품은 캥거루처럼《빱까》를 외투 속에 품고 갔다. 

  영화가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여 주인공의 불우한 운명을 두고 사처에서 훌쩍이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에 섞여 간간이 고양이 울음소리도 새여 나왔다. 관중들의 경아(驚訝)와 불만에 찬 눈길 속에 영화관 관리일군에게 귀를 잡혀 나는 문밖으로 《축출》당하고 말았다. 

 

  이와 유사한 일은 후에도 있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그 사이 훌쩍 웃자란  《빱까》를 구경시키러 갔다가 간호원의 사이렌 같은 비명 속에 허겁지겁 병동을 뛰쳐나온 적도 있다. 나는 그 무슨 남의 장독대를 깨뜨린다던가 길가는 계집애들 머리 태를 쥐여 당기는 그런 악동이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도 본지가 무척 오래된 《빱까》를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었을 뿐 이였다. 

  

  어느 해 여름, 우리가 쓰고있는 사기그릇을 만들어 내는 당산(唐山) 이라는 곳에서 세계를 놀래 운 대 지진이 일었다. 그 지진의 여파로 우리 이곳에서도  《대지진 설(說)》이 떠돌아 모두들은 공포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 즈음 소조공부를 하면서 주제모임으로《지진이 나면 누구부터 구하겠는가?》하는 대 토론이 벌어 지였다. 

  누구는 열사 유가족 할머니를, 누구는 영예군인 아저씨를, 누구는 모택동 주석의 초상을 맨 처음 구하겠다고 격앙된 목청들이었다. 그런데 나만은 고양이 《빱까》를 구하겠다고 말해 《계급입장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학급 간부들에게서 질책을 받았다. 

  초동머리 애들에게서까지도 정치와 불신의 분위기를 짙게 체취 할 수 있었던 그 기형의 세월에 남의 집 양자로 자라면서 내성적이고 섬약한 기질을 가졌던 나에게서《빱까》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친구였으며 나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값진 보물이었다. 하여 동네의  코 북데기 하나가 당시 유행되던 본보기 극(樣 戱)《홍등기》음악이 든 축음기판 한 장, 용감한 팔레스티나유격대어린이의 사적을 그린 그림책 한 권, 요지경 하나, 그리고 살구 씨 백 알로《빱까》를 바꾸려 했을 때 그 풍성한 조건 앞에서도 나는 왜놈들의 조건을 물리치고 사형장으로 나가는 중국영화중의 혁명자들 마냥 단연 그 유혹의 《물물교환》을 거절해 버렸다. 그때 나는 동네에서 《책이 많은 아이》혹은《고양이가 있는 집 아이》로 불렸다.

 

 《빱까》의 그 자그만 몸집이 봄 들어 신속하게 붇기 시작했다.《빱까》의 배를 만져보더니 할머니는 고양이가 임신했다고 했다. 

 《임신이라니요?》

  경아의 빛을 띄고있는 나의 볼을 다독여 주며 외할머니는《빱까》가 곧 새끼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맙소사! 《빱까》하나만도 용용 귀여워 죽겠는데《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가 몇 마리 또 생겨난단 말인가! 지나친 기쁨에 나는 삭신이 막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빱까》를 꼭 안고 집안을 맴돌며 열 뜬 사람처럼 당시의 유행가를 목청 깨져라 불렀다.

 

  《북경의 금산에 금빛해살 비추네

   모주석 그이는 금빛의 태양》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 따라 까닭 모를 기묘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자 윗방에는 난데없는 종이박스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속에 맙소사!《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 네 마리가 눈도 뜨지 못한 채 가지런히 누워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양이들은 꽃잎 같은 입술을 열며 미약한 소리로《애웅, 애웅!》울어 댔다. 외할머니는 병원의 아버지에게 보낼 명태 국에서 많이 덜어 밥을 말아《빱까》에게 내 주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경사가 난 집 같았고 숫제 명절기분 이였다. 동네에서도 희한해 하며 구경을 왔고 득의양양한 기분으로 나는 동네아이들에게서 살구 씨 열 알 씩 예물로 받고서야 새끼 고양이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일주일 가량 되자 제법 구들에서 뛰어 놀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책상다리며 이불장 모서리를 긁어 자리를 내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았다.  

  병상에 있던 아버지도《빱까》가 《4태자》를 낳은걸 축하해 병원의 링게르 주사 줄을 결어 만든《금붕어》손 노리개를 나에게 보내 왔다. 그《금붕어》에 줄을 매여 책상모서리에 달아 놓으니 새끼고양이들은 물고기 사냥이라도 하는 듯 《금붕어》를 툭툭 건드리며 재롱을 부렸다. 그 귀여운 새끼 고양이들이 다치면 부서질라 나는 감히 시름 놓고 품에 안아 보지조차 못했다. 

 

  그러다 스무날, 꼭 스무날만 이였다. 새끼고양이에게 온 정신을 앗겨있는 나의 애련한 마음에 강타를 안겨준 변고가 있었다. 

  하교하여 돌아와 보니 새끼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고 따져 물으니 외할머니가 어쩔 바를 모르며 더듬이며 말했다. 새끼고양이가 잃어 졌다는 것 이였다. 나의 눈앞에서 진짜배기로 그 풍문의 지진이 이는 듯 했다. 나는 책가방을 멘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황소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점심 녘에 햇볕 쪼임을 시키느라 내놓았던 고양이들이 뒤 바자 틈새로 사라진 것 이였다. 

  

  새끼를 잃은 《빱까》는 지붕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가슴 긁는 소리로 울어댔다. 《빱까》는 지붕 위에서 목청 짜내 울고, 나는 지붕아래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우리 집 뒤 바자와 인접된 곳은 거울 틀이며 상장 틀을 생산하는 공예미술공장이었다. 그곳 노동자들이 고양이를 채여 간 것 같다고 단정하고 할머니는 공장장을 찾아가 따졌다. 매일이고 울음을 달고있는 나의 지청 구에 밀려 할머니는 여러 번 공장지도부를 찾았고 새끼고양이를 찾을 길 없는 공장 측에서는 그 성화에 못 이겨 적당한 배상금을 내 주었다. 새끼고양이 한 마리에 50전씩 쳐서 도합 2원을 내 주었다. 

  그래 고작 이것이 새끼를 잃은《빱까》의 아린 상처와 눈물에 대한 보상이란 말인가? 나는 코 잔등이 시큰해 나서 울먹울먹하며 그 돈을 받았다. 그 돈을 특별히 아껴 보관해 두었다가 당시의 아동명작 《밤중에 우는 닭》을 샀다. 그 나의 동년의 정감이 배인 책이 지금도 나의 서가의 안쪽 깊숙이 꽂혀져 있다.

 

  내가 소학을 마칠 무렵, 지긋지긋한 투병생활4년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버렸다. 

  아주 훌륭한 공무원 이였던 아버지인지라 용정 뿐 아니라 외지에서까지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2백여 명을 넘겼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변고와 그렇게 많이 몰려 든 사람들, 슬픔에 자기를 던지고 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놀란 나머지 나는 울음조차 울지 못했다. 그저 현관 구석 쪽에서《빱까》를 품에 안고 고양이와 사람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서 옹송그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고향의 말발굽산 기슭에 묻었다. 

  장례식을 치르던 날, 나는《빱까》을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외할머니가 꾸짖었지만 왜였던지 부득부득 우겨가며 《빱까》를 산에까지 데리고 갔다. 

  붉은 흙을 헤치고 아버지를 묻었다. 봉분(封墳)을 쌓은 뒤 검찰계통의 아버지의 옛 친우들이 권총을 빼들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랐던지《빱까》가 내 품에서 후닥닥 빠져 나와 산자락 아래로 내 뛰기 시작했다.  

  《빱까, 빱까!-》

   갈린 소리를 지르며 나는 덴겁해《빱까》의 뒤를 쫓아갔다. 나무그루에 걸려 자빠지고 풀대 가지에 손을 긁히면서도《빱까》를 쫓아갔다. 

  그러다 어느 한 커다란 무덤 앞에서《빱까》가 멈춰 섰다. 멈춰 서서는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오는 나를 말똥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때는 늦가을이었고 추위 때문 이였는지 아니면 놀라움 때문이었던지《빱까》는 몹시도 떨고 있었다. 나는 덮쳐 가《빱까》를 품에 안았다. 그제야 하늘같은 슬픔이 감지되었고 나는 못나게도 남의 무덤을 바람막이로 삼고 앉아 《빱까》와 함께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새끼를 잃은 뒤《빱까》는 몹시 수척해 졌다. 일전과는 달리 사람 곁에 오기도 싫어했고 고기 국에 밥을 말아 주어도 잘 먹지를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 며칠 안 되어《빱까》는 집을 나가 버렸다. 

  하루가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빱까》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기재에 의하면 고양이가 사람 집에 살고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5천년 이상 된다고 한다. 이면에서 개에 비해서는 4만 5천년이나 늦다고 한다. 성경에도 고양이를 언급한 구절만은 없다. 

  그러나 동년의 이 한 단락의 정감의 경력 때문인지 나는 동물들 중에서 고양이를 가장 편애하는 쪽이다. 

  인간과 가장 도타운 신변의 또 다른 동물인 개에 비해서도 그렇다. 어찌 보면 고양이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길들여지지 않았다. 한 두 마디의 호령에도 엎디고 기고 혀를 빼무는 개에 비해볼 때 고양이의 자존은 더 높은 것이다. 고양이와《사촌지간》인 호랑이며, 치타며, 사자들만 봐도 고양이 가문의 위용이 엿보인다. 아직도 그들과 비슷한 《야성》을 고양이는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야성》은 인간이 그들에게 들 씌운 정의이고 그들 쪽의 정의를 보면 그것은 곧바로 인간이면 너나가 갈구하는 자유인 것이다. 

  흔히들 사람의 성격을 동물에 빗댈 때 사회 친화적 인간형을 《개 과(科)》로 분류하고 홀로 서기 인간형을《고양이 과》로 분류한다. 하여서인지 전설이나 이야기, 지어 아이들의 그림영화에서 까지 고양이는 주인공 역을 놀지 못한다. 어느 시공간, 어느 짐승의 집단에까지도 인간들과 꼭 같은 사회질서와 선악대립을 부여하고《개 과》의 영웅을 선호해야 직성이 풀려하는 사회의 진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보면 고양이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개성과 매력, 더 많은 낭만과 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유아적인 발상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던 동년에서 멀리 지나온 내가 의연히, 그리고 다시금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다.

 

   촬영에 애호가 있었던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갈매기》표 사진기로 나와《빱까》가 함께 있는 장면을 남겼다. 사진 속의 여덟 살둥이인 나와 《빱까》는 유난히 반짝이는 눈매를 하고 앞쪽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색 바랜 사진조차 지금은 잃어버려 없다. 모 잡지사에서 《인간과 동물》기획특집을 꾸리면서 나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적은 글을 실으면서 그 사진을 그만 분실해 버렸던 것이다. 

  《빱까》는 이제 그저 잡지 속에 흐릿한 영상으로만 남았다. 

  매양 그 잡지를 뒤적여 낼 때마다 나는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진《빱까》의 이름을 되 뇌여 보군 한다. 

  내 동년의 꿈과 내 동년의 정감을 지니고, 부식된 기억의 어둠 속을 홀로 바람처럼 가버린 한 마리의 영물(靈物)을...

  오, 나의 사랑 나의《빱까》!


 

"청년생활" 1995년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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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성자 : hannah
날자:2019-03-08 12:43:18
고양이를 키우시는 깊은 사연이 있었네요.
1   작성자 : 야옹이와벗들
날자:2016-01-19 09:20:21
잔잔한 슬픔이, 그리고 눈물이,
60후, 70후라면 크게 동감하고 같이 희로애락을 느낄수있는 시대적 아픔이 진하게 수필전반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네요.잘 봣습니다.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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