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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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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열반(涅槃)의 황학루 댓글:  조회:1725  추천:14  2020-04-04
칼럼   열반(涅槃)의 황학루   김 혁       요즘 세간의 모든 이목은 온통 무한에 쏠려 있다. 혹한과 함께 덮쳐든 바이러스 병독에 사상 초유 도시봉쇄의 비극을 맞이한 무한, 그 바이러스의 병명은 “코로나” 혹은 “무한 폐염”이라고도 부른다.    병마와 간거한 고전을 치르고 있는 시민들과 의무일군들을 위한 비원과 성원이 담겨진 포스터들에는 무한의 절경이자 징표인 황학루가 자주 등장한다.   천하절경 황학루.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滕王阁), 호남성 악양의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강남 3대 루각”으로 꼽히는 루각이다.   루각을 세운 시기는 저 유명한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 루각은 오나라의 왕 손권이 초나라 류비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운 망루이다. 지금도 황학루에는 손권의 강한 의지가 남아있어 “초천극목(楚天极目)”이라고 적힌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다. 초나라의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뜻의 성구이다.       황학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화재의 세례속에 7차례나 소실되고 중건되기를 반복하면서 군사들이 망을 보던 장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루각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당대와 송대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황학루에 대해 례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 당나라 시인 최호(崔颢)가 쓴 시 “황학루”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昔人已乘黄鹤去/옛 선인은 누른 학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余黄鹤楼。/이곳 황학루만 텅 빈 채 남아있네. 黄鹤一去不复返/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白云千载空悠悠/흰 구름은 천년 동안 한가히 떠도네     시성이라 일컫는 리백도 그의 작품을 보고 황학루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내려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황학루 초입에서 만나는 각필정(搁笔亭)이 바로 리백이 붓을 내려 놓았다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다.    시 짓기를 즐겼던 모택동 주석도 역시 황학루를 두고 지은 률시가 있다.   100여년 전 황학루의 모습   황학루에는 자자한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어떤 주막이 있었는데 주인장은 어느 날 찾아와 공짜 술을 퍼마시는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없이 환대해 주었다. 거나하게 걸치고 길을 떠나게 된 도사가 밀린 술값이라며 주막의 바람벽에 누른 빛갈의 학 한 마리를 그려주었다.    "손님이 오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시오. 그러면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   도사는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닌게 아니라 주인장이 노래를 할 때마다 학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주막이 크게 번성하였다. 10년 뒤 도사가 다시 찾아와서는 피리를 불어 학을 불러내더니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후 부자가 된 주인이 도사와 학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막을 헐고 “황학루”라는 이름의 루각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리백, 백거이, 최호(崔顥), 륙유(陸遊), 장거정(张居正) 등이 황학루를 읊었고, 황학루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것으로 그 인끔을 뽐냈다. 그 기라성 같은 문인문사들의 자취가 서린 곳에 조선족 화가이자 혁명가인 한락연도 족적을 남겼다.    1937년 초겨울, 한락연은 십여년 만에 류학을 갔던 프랑스로부터 귀국했다. 당시 외국류학을 다녀온 미술가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우심화되는 상황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불탔던 한락연은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볼 사이가 없이 전운이 감도는 무한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었다.    누른 빛의 장강과 푸른 빛의 한수가 만나는 이 곳에서 한락연은 공산당의 령도아래 결성된 항일민족통일전선조직인 동북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한락연은 “동북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무한시절의 한락연     이 시기 “총회”에서 발행하는 “반공(反攻)”이라는 반월간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고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는 이들은 일떠나 일제를 소멸하자!”라는유화도 한구(汉口)의 표지성 건물인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라는 거폭의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높이 걸렸다.  황학루, 그 고풍어린 루각에 높이 걸린 한락연의 그림은 민중들의 항일의지를 크게 격려했다.   황학루 루각에 오르면 무한 3진이 한눈에 들어 온다. 한수강과 양자강의 합수목에 자리한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무한은 한구, 한양, 무창  등 린접 된 3개 도시가 합쳐져 이루어진 대도시이다.  고도(古都) 무한은 중국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적벽(赤壁), 형주(荊州) 등 력사 현장의 대부분이 무한 주위에 모여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무한은 장강 수운의 리점을 활용해 발전을 구가하며 한때 상해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곳은 또 중국현대사의 주무대로 되여 두드러진 역할을 해왔다.  중국민주혁명의 발상지로서 신해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도 이 지역에서 시작되였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거둔 혁명군의 첫번째 성공은 중국 전토로 확산되며 청조의 멸망을 불러왔다.     무한에는 지난 세기 30년대 우리의 겨레들의 반일의 자취도  력력히 서려 있다.  1938년 일제는 상해 남경을 거쳐 화중의 중심지 무한을 겁박(劫迫)하려 들었다. “항전의 수도 무한을 보위하자!” 절체절명의 순간 무한군민들의 함성이 터져올랐고 무한 삼진이 산악같이 일떠섰다.   1938년 10월10일 무한시 무창(武昌)구 자양로(紫阳路) 234호 대공중학교 강당에는 120여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군청색 군복을 입고 비장하게 창립식을 올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기발을 높이 들고 용감한 중국 형제들과 손을 맞잡아 필승의 신념으로 정의의 항일전선으로 용감히 전진하자."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하게 선서하는 대원들은 모두가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졸업생들이였다.  창립식에 특별히 중공의 대표들이 참석해, 주은래는 동방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곽말약은 문호답게 축시로 조선의용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창립식이 끝난 뒤 경축행사도 열렸다. “아리랑” 합창과 “두만강변”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창립식이 열리는 동안 밖에서 가끔 포성이 들려왔다.  무한에서 한민족의 반일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단체- 조선의용대가 세상을 향해 우렁찬 고고성을 지르는 순간이였다.      조선의용대 창립사진 동그라미 속 밝은 부분이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선생이시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즉각 포탄이 터지고 초연이 자오록이 피여오르는 무한 시내로 투입됐다.  무한 중심가에서 반일 선전전을 벌렸다.  그들은 사다리를 메고 다니며 담벽과 길바닥에 콜타르로 선전구호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 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려라”     항일표어를 쓰고 있는 의용대 전사    이 광경이 그후 중국문학사에서 문호의 반렬에 오른 곽말약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의용대원들은 네댓명 씩 한조가 돼 콜타르나 페인트로 거리나 벽에 대적 표어를 쓰고 다녔다. 모두 조선의용대뿐이였다. 무한함락 직전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뿐이였다"   곽말약이 저서 “홍파곡(洪波曲. 1979년 발간)”에서 묘술한 무한 함락시의 조선의용대에 관한 생동한 묘사의 한 구절이다.   대문호 곽말약과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이 수록된 회고집 "홍파곡"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였던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도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무한, 태항산에서의 항일력정을 세세히 기록해 후세에 남겼다.      한시나 고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루각은 흔히 세월과 력사의 견증물로 사람들의 시선 속에 간주되여 있다.  세상사의 뜬 구름과 전란의 초연을 지켜 본 황학루는 또 한번 세기의 증언자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초천극목(楚天极目)”.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호매로운 성구의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는 황학루, 그어떤 역경도 이겨내며 세월의 행간에서 넘어지지 않고 우뚝 선 황학루는 고사와 희망을 우리에게 전언해 준다.  이제 검은 구름은 걷히고 더욱 명징(明澄)해진 하늘아래 학은 다시 돌아 올것이며, 다시 돌아 온 학은 열반을 거친 루각우에서 너울거리며 새로운 전설을 춤사위에 담아 이야기 해 줄 것이다.      - 3월 5일 “청우재”(听雨斋)에서    
12    동주와 아베 댓글:  조회:1768  추천:12  2017-09-12
  . 칼럼 .   동주와 아베   김혁     “동주”가 다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간다. 영화 《동주》가 오는 7월부터 8월까지 도꾜 시네마 신쥬큐 (東京シネマ新宿)에서, 오사카 시네마 신사이바시(心斎橋)에서 상영된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2015년에 개봉된 영화 《동주》는 “왕의 남자”로 중국에도 널리 알려진 한국 영화계 리준익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 언어도, 이름도 모든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어두운 일제강점기, 북간도 룡정의 한 집에서 태여나 자란 동갑내기 사촌 윤동주와 송몽규의 일대기를 담백하면서도 절제감있는 미학으로 담아낸 수작이다. “동주”라는 명료한 제목과는 달리 영화의 일본 명은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의 생애《空と風と星の詩人−尹東柱の生涯》”이다. 요즘 일본이 “테러대책법안(조직범죄처벌법 개정안)” 추진을 강행하고 있는 시끌벅적한 가운데, 일제감옥에서 한줌의 재로 되여 백자기에 안겨 돌아왔던 윤동주가 다시 스크린에 담겨 현해탄을 건넌다. 아사히신문은 영화 “동주”를 소개하며 치안유지법과 테러대책법안의 류사성을 지적했다. 이 치안유지법은 바로 일제가 윤동주 시인을 체포할 때 적용한 법률이기도 하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식민지시대 일본에 류학하여 교토(京都)와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재학중 조선문화와 민족의식 고양을 도모했다는 리유로 체포되였고, 1944년 징역 2년의 유죄 판결을 받고 1945년 2월과 3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숨졌다. 꼭 같은 그들의 사인은 생체실험이라는 주장이 안받침되고 있다.   테러대책법안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치안유지법”과 비슷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베 정권이 이 법안을 통과시켜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는 비판이거세다. 윤동주 시인 시비가 경립(敬立)되여 있는 도시샤 대학 코리아연구센터의 오타 오사무(太田修) 교수는 "치안유지법과 유사한 법안이 론의되고 있는 지금, 그저 모여서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 처벌된 윤동주 시인을 돌아보고교훈을 얻는 것은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일제감옥에서 미완의 청춘으로 스러져간 윤동주가 올해로 탄신 100주년을 맞는다. 루루 세월의 장하가 흐른뒤에도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군국주의 극우세력은 아직도 황국사관에 경도되여식민사관의 미몽(迷夢)에서 깨여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동주"가 또 한 번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쉽게 씌어진 시”를 부끄러워 하며 “다만 홀로 침전(沈澱)”한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과 새로운 패권주의적 움직임은 작은 스크린에 흑백의 영상으로 담긴 우리의 시인을 새삼 기억하게 한다. 력사의 교훈을 모르는 아베에게 영화 “동주”를 한 번 보라고 권장하고 싶다.   2017년 5월 22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1    영화 “밀정”과 “의열단”단원 유자명 댓글:  조회:3181  추천:15  2016-10-11
  . 역사칼럼 .   영화 “밀정”과 “의열단”단원 유자명   김혁    ▲ 영화 포스터   1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에 나섰던 “의열단”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밀정”이 최근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암살”에 이은 또 한편의 의열단소재에 대중적 관심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따라서 영화 속 에 부각된 의열단의 실존 인물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시대, 독립지사들이 1919년에 설립한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 운동단체이다. 단체의 명칭은 “정의(正义)의 사(事)를 맹열(猛烈)히 실행한다”는 취지에서 유래됐다. 의열단은 일제 경찰서, 헌병대, 조선총독부 등 관공서를 폭파하고 친일 지주자본가, 총독부 관리등 요인의 암살로 일제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의열단”은 그후 중국 상하이를 주무대로 외국인 치외 법권지역인에서 폭력 항쟁으로 일본제국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상하이의 프랑스인 보호구역을 근거지로 삼아 1919년부터 192525년에 걸쳐 약 300여 건의 테러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밀정”은 1920년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의열단의 경성 폭탄반입 사건이 그 배경이다. 의열단의 수많은 의거 중에서도 1923년 의열단이 중국에서 직접 제조한 폭탄을 대량으로 국내에 반입하여 벌이려던 파괴공작 계획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의열단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에 폭탄을 반입하여, 식민통치기관을 대상으로 동시다발적 폭탄투쟁을 전개할 예정이었다. 파괴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들과 물자들을 나르는 주요 철도였고, 암살 대상은 사이토 총독 이하 조선총독부 수뇌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계획은 사전에 탄로났고, 김시현과 황옥을 비롯해 작전에 참여했던 의열단원들 전원이 검거되었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영화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황옥 ▲ 영화 속 송강호가 분한 황옥의 형상   황옥 경부(영화 속 이정출)를 비롯해 영화 속 주인공의 모델은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영화 속 송강호가 주역을 맡은 주인공 이정출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황옥(黃鈺)이다. 그렇다면90 여년 전 실존했던 인물 '황옥'은 과연 독립운동가였을까? 아니면 일제 밀정이었을까? 역시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유자명(柳子明, 1894~1985) 선생의 수기 “나의 회억”, (랴오닝민족출판사.1984년)에서 황옥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비밀참모로도 활동했던 유자명 선생은 수기에서 "황옥은 경기도 경무국의 고급정탐으로서 독립운동가들과도 비밀한 연락을 하고 있어서 내가 경성에서 김한과 같이 활동하고 있을 때도 나도 그를 만나봤다. 그런 황옥이 천진까지 오게 된 것은 폭탄과 권총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서다."라고 적고 있다. 의열단의 폭탄과 권총을 건네받은 '황옥'은 텐진에서 만난 다른 의열단원 3명과 함께 안동(지금의 단둥)으로 향했고, 단둥에서 평소 자신과 친분이 있던 일본 외교관 김우영(당시 안동 주재 일본영사)과 만났다고 수기는 기록했다.   일제와의 항쟁을 그린 영화에서 독립운동가가 아닌 일제 총독부의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 의 흥행과 함께 또 다시 역사적 조명을 받는 의열단의 이야기, 그 증언자였던 유자명의 일대기를 돌아 본다.       ▲ 젊은 시절의 유자명   2 일제강점기의 아나키즘 운동에서 빠드릴수 없는 인물인 유자명은 충청북도 충주에서3남매 중 막내로 태여났다. 호는 우근(友槿)이고 원명은 유흥식(柳兴湜), 유자명은 중국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충주 간이농업학교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3.1”운동을 맞아 학생시위를 계획한데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유자명은 임시정부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한동안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천진 지역에서 신채호, 이회영등과 교유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특히 아나키즘 이론에 밝아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한 유자명 (앞줄 맨 오른쪽)   1920년대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 유자명은 의열단의 요원으로 극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이 시기 조선 식산은행(殖产銀行)과 동양척식회사(东洋拓植会社) 폭탄투척 등 의열단의 수차 의거에 깊이 관여하는 등 활동력을 보였다. “의열단 참모 유자명”으로 이름을 드날리면서 일본인과 친일파의 제거 작업에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인민을 탄압,학살하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는 일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일제 침략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의 폭파는 곧 반일 애국행동”이라는 론리로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정당화하였다. 그 후 선생이 1981년에 집필 한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은 중국 내 조선인 아나키즘 운동 및 의열단 활동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2월, 유자명은 난징에서 김규식 및 중국인 무광록,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어•중국어•한국어로 발간하여 관계된 여러 나라에 발송했으며 비밀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운동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항일독립의 연합전선을 펴나가는 한편, 조선인 청년 다수를 난징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민족혁명의 대열에 서도록 주선했다. 유자명은 이론에 밝았으며 탁월한 어학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항일운동계의 일급 참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대에는 상하이의 농업학교 립달학원(立达学院)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남화(南华)한인청년련맹”을 결성하였다.   난징이 일제에게 함락되자 연맹은 무한으로 옮겼다. 무한에서 유자명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대표 이사의 한사람으로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와 더불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사업을 맡아보았다. 선생은 자신이 쓴 조선민족전선련맹 창립선언문에서 “한•중련합을 통한 항일투쟁역량의 집중, 국제적 반일세력과의 련대”를 강조하였다. 또 난징, 상하이, 천주(泉州) 등지를 무대로 중국의 “이상촌(理想村) 건설활동”에 몰두하였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1941년 중국 푸젠성 영안(永安)에 거처를 잡고 농예연구와 농작물 재배실험에 달라붙었다. 농예면에서 성과를 올렸기때문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과 고위관원들이 유자명을 주목하게 되었고 여러곳에서 초청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계림(桂林)에도 농장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1943년 유자명은 중경으로 갔다. 그는 농장운영에 관련해 중경의 고위관원들을 만나고 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인 김구와 김원봉의 단합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하고 임시정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일했다. 농립학교를 졸업했던 그는 이후 복안(福安)현 계병(溪柄) 농장에서 일개 농부같은 생활을 하면서농업기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늘 성실하였으며, 인도주의 정신으로 중국을 사랑하였고, 선생 또한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부터 후난성 창사에서 후난대학 농예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간 유자명은 농학교수로 많은 연구를 거듭하여 농학사, 원림 화훼, 채소재배, 벼의 기원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자명은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의 특수벼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으며 한나라 묘지인 마왕퇴에서 출토된 씨앗과 종자 분석에 참여하여 볍씨의 품종과 형태 등을 판별해 냈다. 유자명은 원예면에서도 지위가 매우 높았다.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던 후난에서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또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1995년 중국농업출판사에서는 전기물 “훈장을 단 원예학자-유자명전”을 출간했는데 이는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 농예사로 지낸 만년의 유자명   1985년 4월 17일 후난성 창사에서 타계했다. 1978년 북한, 1991년 한국 정부에서 훈장을 받았고 2002년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2003년부터 농학자, 교육자로서의 유자명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중국과 그의 고향 한국 충주에서 수차 열렸으며2004년에는 그의 평전이 발간되기도 했다. 2009년 후난농업대학에서는 그의 거소를 문물 명록에 신청하여 복구하고 실내에 유자명 사적 진열관을 꾸며 놓았으며 교정내에 그이의 동상을 세웠다.   ▲ 호남농업대학 교정에 세워진 유자명의 동상   3 “다음번엔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밀정”에서 황옥을 모티브로 했던 주인공 이정출이 읊은 대사다. 친일이냐? 항일이냐? 그런 경계 위에서 선택의 줄타기를 해야 했던 여러 부류 인간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에 반하여 유자명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묵묵히, 흔들림없이 항쟁해오면서 민족사의 갈피에 그 족적을 도렷이 남겼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0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댓글:  조회:2431  추천:12  2016-02-24
룡정지역 반일유적지 순람 9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김 혁     ​▲ 화가의 고향 룡정에 그의 이름으로 조성 된 락연공원. (사진 리련화 기자) ​ 유서깊은 룡정시에 또 하나의 명소로는 락연공원을 꼽아야 할것이다. 락연공원은 룡정이 낳은 걸출한 조선족 정치활동가이며 인민예술가인 한락연의 이름을 본따서 명명한것이다. 총투자가 3백만원, 부지면적이 2천여평방메로 조성된 락연공원은 해란강과 륙도하의 합수목에 위치해있다. 원 국가통일전선부 부부장이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리덕수의 친필이 새겨진 표지석을 지나 공원에 들어서면 교목과 관목이 어우러진 가운데 한락연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3층 높이의 락연정이 우뚝 서있다. 락연정 주변에는 정교하게 만든 6개의 경관등이 세워져있는데 경관등에는 리백, 두보, 백거이등의 시편들이 새겨져있다. 락연공원은 시민들의 훌륭한 휴식터이자 연변의 또 하나의 홍색관광명소로 부상되고있다. ​ 한락연은1898년, 중국 길림성 룡정촌 토성포의 한 중산계급의 가정에서 맏이로 태여났다. 원명은 광우(光宇)이며 자는 락연(乐然)이다.  한락연은 그림에 대해 천부를 갖고있었다. 매번 학기 시험때마다 그의 미술성적은 만점이였다. 한락연이 9살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문의 맏이로서 가문의 생계를 위해 한락연은 손에 잡히는 대로 잡일을 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한편 그림만은 손에 놓지않았다. 비록 겨우 소학교를 졸업한 한락연이였지만 총명과 순발력으로 어려서부터 조선말과 중국말은 물론 일어와 영어도 배워 상당한 회화실력을 갖고있었다. 그 회화능력에 힘입어 한락연은 세관 직원 시험에 무난히 통과되였다.  이 시기에 한락연은 룡정에서 최신애라는 녀성과 결혼했다. 그뒤 그들 사이에는 딸 인숙이가 태여났다.  ​ 1919년 3월, 룡정의 반일지사들은 조선의 3. 1운동을 성원하는 성대한 반일시위를 벌리기로 결정했다. 3월 13일, 각지의 군중들은 노도와같이 룡정으로 밀려들었다. 3만여명 시위자들과 함께 한락연은 조선독립과 일본제국주의 통치를 반대하는 구호를 소리 높이 웨치며 연변땅에 항일의 불길을 지폈다.  시위를 하려면 프랑카드도 있어야 하고 태극기도 있어야 했다. 이렇게 되여 프랑카드와 태극기를 만드는 임무는 이미 “그림쟁이”로 소문 짜한 한락연에게 맡겨졌다.  한락연의 조선족 부인인인 최신애의 조카 최순희씨는 “고모부 한락연의 룡정에서의 나날을 회억하여”라는 추모문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더듬었다.  “나의 고모부는 영국해관사무서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흰 천 몇 필을 사다가 영조계지세무사집에서 밤새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태극기를 여러 학교에 나누어주어 시위때 사용하게 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이 시작됐다. 한락연은 당연히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명되여 있었다. 한락연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그 해 12월 중국인 복장을 갈아입고 조용히 룡정을 떠났다.    1920년 22세의 한락연은 동방의 제1도회지 상해로 갔다.  한락연은 그의 천부적인 기질로 상해미술전과학교에 단연 입학하였다. 상해미술전과학교 중국근대 대표적인 화가이며 교육가인 류해속(刘海粟)이 설립한 학교였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되였다.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향도”를 통하여 혁명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며 점차 중국공산당에 접근했고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조선족가운데서 제일 먼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다.  1924년 1월, 상해미술전과학교(上海美術專科學校)에서 주경야독하며 생활고를 엎누르고 그는 뛰여난 성적으로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의 그의 행보는 봉천(奉天.지금의 심양)으로 이어졌다. 상해기독교청년회의 명의로 심양 봉천기독회청년회에 가 미술전람을 하러갔지만 사실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화가의 신분을 걸고 새로운 혁명활동에 펼치기 위한것이였다. 봉천 기독교청년회의 간사 염보항(閻寶航)의 도움으로 청년회관에서 “상해미술전문학교졸업생 한락연의 유화전람회”를 열었다. 개인유화전시를 마친뒤 소남관 풍우대(小南關風雨臺)부근에 사립미술전과학교를 창설하였다. 로소비(鲁少飞)、허소생, 륙의 등 이름 쟁쟁한 화가들을 모셔와 교원진을 무었고 본인은 교무사업을 맡았다.   1925년 겨울, 한락연은 당에서 파견한 임국정(任國禎), 오려석(吳麗石)과 함께 심양의 최초로 되는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한락연이 심양에 있는 기간 배양한 청년들과 여려 진보적 단체의 성원들 대부분이 첫기의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이렇듯 한락연은 심양의 건당사업에 정초를 다지는데 큰 기여를 바쳤다.    1925년, 7월 중공북방구위(中共北方区委)의 파견을 받고 할빈으로 왔다.  할빈에서 한락연은 보육학교에서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지하당사업에 종사하였다.  교수를 하는 한편 초도남, 조상지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야학을 조직하고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전수하였고 반군벌투쟁을 벌려나갔다. 1926년 4월 중공북방국의 지시에 따라 할빈특별지부를 “중국공산당북만지방위원회”로 다시 조직하였다. 오려실이 서기로 한락연도 지위령도성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할빈에서의 한락연의 행동은 주의를 불러일이켰고 그의 신변에 위험이 닥침을 예감한 당조직은 그에게 할빈을 떠나도록 지시를 주었다. 한락연은 치치할로 향했고 치치할 룡사공원의 감리(监理)로 취직하게 되였다. ​ ​"연변일보" 2015-8-18 한락연은 공원내의 정자며 루각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청나라건물들의 고전풍격을 띄고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공원내의 단일화를 깨고 독특한 개성을 띤 구라파식 정자 하나를 설계해냈다. 높이 10메터가량 되는 정자는 백옥같은 8개의 원주형 기둥이 떠받치고 있고 삼각형의 루각우에 시계 하나를 떠이고 있다. 8개의 원주형 기둥에는 흠상하고있는 사람들의 신심을 정화시켜주는 격언들이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이름을 “격언정”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도 “격언정”은 룡사공원의 하나의 경관으로 되여있다. 이시기 한락연은 룡사공원 감리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치치할 뿐아니라 수분하(绥芬河)에도 중국공산당 련락소를 건립했다. 할빈에서 마수를 피해 치치할로 왔던 한락연은 또 다시 신분이 로출되여  군벌당국의 체포대상이 되였다. 이러한 백색테러속에 암울한 북국의 도시를 주름잡으며 당조직사업에 충성하고 기여했던 한락연은 그해 가을 치치할을 떠났다.  이번에 그가 행한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시대에 따른 미술사조의 흐름을 느낄수 있는 창작과 예술의 무대였다. 전세계 천재예술가들의 집합소인 이곳에서 르누아르, 반 고흐, 피카소와 같은 거장들도 모여들어 예술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동안 “백색테러”속에 피와 불의 세례를 거치면서 화필 한번 잡을 틈조차 없었던 그는 세계 예술의 전당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고있었다. 이역만리 먼 땅에 도착한 한락연은 놀라운 의력으로 짧은 시간내에 프랑스어를 배워 냈다. 한편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지 않으면 안되였다. 귀국하기전인 1937년까지 그는 스케치북을 지니고 유럽각지를 순회했고 무려 10여회나 되는 개인전을 가졌다.   ▲빠리의 거리에서 사생하고 있는 한락연   몸은 중국을 떠나 번화한 프랑스에 있었으나 한락연의 미술가의 시선을 초월한 “태풍의 눈”은 언제나 중국대륙을 면밀히 주시하고있었다. 그는 중국 동북출신 류학생들과 공동으로 일본의 동북에 대한 침략과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회유를 규탄하는 “중국동북4성프랑스류학생선언”을 발표했다. 1936년 여름 한락연은 빠리에서 유럽 거주 화교들의 대표자대회인 화교항일구망단체(华侨抗日救亡团体)에 가입하여 교무부(侨务部)의 사업을 맡고 항일을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단체 제2차 대회때에는   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한락연은 《빠리시보(巴黎时报)》에 사진기자로 취업했다. 빠리에서 언론인의 신분으로 한락연은 반파쑈 선전사업에 종사하였다. 몸은 유럽의 “예술의 전당”에 있었지만 항일의 불길이 중국땅에서 세차게 번져나가는 이때에 한적하게 외국에만 머물러있을수 없다는 결단아래 그는 드디여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다.     1937년 초겨울 귀국한 한락연은 그 행선지를 무한으로 잡고 동북항일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이 조직은 중공중앙장강국에 속했는데 주은래의 령도하에 있었다.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한락연은 동북항일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동북항일구망총회는 중국 관내 동북민들을 항일의 대렬에 동참시키기 위해 “반공(反攻)”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이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다. 이 시기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은 인민들은 일떠나 일본제국주의를 소멸하자!”라는 거폭의 유화가 한구(汉口)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란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걸렸다. 1938년 10월말 동북항일구국총회는 동필무의 지시로 새로운 당조를 세웠는데 한락연은 그 중 한사람이였다. 번중한 사업에 몸을 혹사하면서도 한락연은 화가의 본분을 잊지않고 9월에 중경에서 개인 그림전을 가지기도 했다. 이 해 11월 주은래, 곽말약이 령도하는 중국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에서 활동하던 작가와 예술가로 구성된 연안참관단이 연안을 방문했다. 참관단에는 한락연도 있었다. 그는 연안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전쟁속의 민족문화예술”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모택동동지가 친히 그들이 들어있는 땅굴막에 찾아와 국민당지구에서 활약하고있는 진보적인사들을 친절하게 접견하였다.   무한에서 한락연은 두번째 사랑을 만나게 된다. 바로 무한녀청년회 향촌부 주임간사를 맡고있던 류옥하(刘玉霞)였다.  그후 한락연과 류옥하는 딸 한건립과 장남 한건행 남매를 보았다.  이 시기부터 한락연은 공산당원의 신분을 감추고 애국지사, 미술가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당의 통일전선사업에 정력을 다하였다.   ▲ 한락연과 그의 중국인 부인 류옥하   1940년 6월, 서안에 있는 팔로군 대표사무소를 들렀다가 다시 보계(宝鸡)를 거쳐 중경으로 가던중 한락연은 보계 기독교청년회숙소에서 국민당의 특수 정보요원들이 동원한 경비사령부 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특무들은 한락연을 공산당으로 의심하였지만 사실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었었다. 감옥에서 한락연은 혹독한 고문도 이겨내고 태연자약하게 응전하면서 당의 비밀을 고수하였다. 한락연이 체포된 소식을 접한 당조직에서는 백방으로 구조에 나섰다.  그들의 노력과 담보로 1943년초에 한락연은 겨우 가석방되였다. 석방된후, 한락연은 화가의 신분으로 서북지구를 전전하면서 국민당 군정상층인물을 상대로 통일전선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제3집단군총사령 조수산(赵寿山), 배위, 곽령야 등 많은  국민당장령들과 래왕하며 중국공산당의 내전을 반대하고 새 중국을 세우려는 주장을 선전했다. 한락연의 강렬한 애국주의 정신, 숭고한 품성과 풍부한 학식은 도치악과 일부 고급장령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감숙성 주천(酒泉)시에서 경비책임을 맡은 하서(河西) 경비구 총사령 도치악장군이 국민당과 결렬하고 기의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도치악은 일제의 패망후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9년 9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중국공산당 쪽으로 귀순하였다. 이 배경에는 한락연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렇게 한락연은 서안, 란주, 신강 일대에서 국민당특무들과 우회하면서 국민당고급장령들을 교육하고 쟁취하는 사업을 대담하고 폭넓게 벌리였다.   글 김혁, 사진 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2015-8-25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9    민중의 소리- 《민성보》 댓글:  조회:1902  추천:11  2016-02-04
룡정지역반일유적지 순람 7 민중의 소리- 《민성보》 김 혁 ▲ "민성보" 신문사의 20년대 모습. 룡정에는 민성가라는 거리가 있다. 지난 세기 20년대에 그 거리에 민성보라는 신문을 꾸리는 신문사가 있었고 거리의 이름은 그에서 연유되였다. 그 신문사 옛터는 조선말로 된 간행물의 탄생지로서만이 아니라 “중공룡정촌지부”유적지로도 유서가 깊다. 1919년 중국 5·4운동은 문화운동의 영향하에 연변의 진보인사들은 반일무장투쟁을 배합하여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많은 간행물을 꾸렸다. 1919년 3월, 연변지역에서 발행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일민보》, 《신국보》, 《중외통신》, 《구국일보》, 《조선민보》가 있었다. 그러던중 1928년 1월, 《민성보》가 룡정에서 고고성을 올렸다. 신문사는 룡정촌 신안거리(현 민성거리)에 세워졌다. 《민성보》의 최고지도기구는 40명으로 구성된 “보무위원회”였다. 강위청(연길 현상회 회장)이 위원장으로, 관준언(화룡현교육국 국장)이 신문사 사장으로, 방지함(룡정촌 전화국 국장)이 경리로 추대되였다. 《민성보》는 한문과 조선문으로 된 4절지 4개 면으로 된 일간신문이였다. 그중 1, 2면과 3면의 전반부는 한문판이고 3면 후반부와 4면은 조선문판이였다. 한문판 총편집은 안회음이 겸했고 조선문판 총편집은 윤화수였다. 일발행량은 2000부, 연변에서 그 영향이 컸다. 신문은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취지에서 《민성보》라고 이름을 달았다. 그 취지에 걸맞게 《민성보》는 신학제, 신문풍, 백화문을 구사하였으며 혼인자유, 남녀평등을 제창하는 등 진보적인 언론의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1928년 2월 주동교가 신문사 편집일군으로 초빙되여 왔다. 주동교는 겉으로는 편집일군의 명색을 띠였으나 실제로는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민중의 토대와 혁명적극성이 높은 연변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을 하러 온것이였다. 하여 1928년 2월 연변에서의 첫 공산당조직인 중공룡정촌지부가 민성보사를 거점으로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민성보》의 한문판 주필 안회음은 신문사내의 진보세력들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1928년 여름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이를 기회라 생각한 주동교는 중공만주성위에 청시하여 당간부를 증파해줄것을 요구했다. 곧 공산당원 손좌민, 리별천이 파견되여 와 신문사에 취직했다. 이리하여 《민성보》의 주필로부터 책임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원들이 필을 잡게 되였고 《민성보》는 실제상 중공룡정촌지부의 전투보루로 되였다. 중공룡정촌지부가 건립된후 중공북방국에서는 지방교육부문에서 북평의 해당 당국에 교원을 파견해달라고 요구를 제기하는 기회를 빌어 1928년 3월부터 6월까지 연변에 파견되여오는 북평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의 졸업생속에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함께 파견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17명 당원, 단원은 인차 주동교와 련락을 맺고 중공룡정촌지부의 령도밑에서 지하건당사업을 전개하였다. 불과 몇달이 못되여 그해 7,8월에 국자가, 동불사,로투구, 광개욕, 팔도하자, 옹성라자, 삼도구, 화룡, 훈춘 등 9개 지역에 당지부가 설립되였다. 8월에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중공동만구위가 건립되였다. 동만구위를 민성보사에 두었다.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류건장, 선전위원을 조지강이 맡았다. 이들은 《민성보》를 하나의 선전도구로 삼고 용감하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 규탄하였으며 피압박자들이 일떠나 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우라고 호소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룡정의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고 2월에는 서기대리인 류건장도 체포되였다. 손좌문, 리별천 등 북평에서 온 당원들도 선후로 피신하여 연변을 떠나는바람에 중공동만구위는 실제상 와해되고말았다. 국공합작의 분렬, 국민당의 간섭, 지방관원들의 무능 등 원인으로 1931년 “9.18”사변후 민성보는 부득불 정간되였다. 지금 룡정시연수학교 정원에는 기념석 하나가 세워져있다. 2010년 룡정시 당위와 정부에서 건립한 기념석에는 조, 한 두가지 문자로 룡정촌당지부 건립상황이 주홍빛 글자로 음각되여있다. 기념석의 건립을 주도했던 룡정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박호만회장은 “민성보는 푸른 벽돌로 지은 불과 240여평방메터 되는 단층집이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룡정촌의 당지부가 들어서면서 이로써 항일투쟁은 새로운 단계에로 들어서게 되였고 연변의 당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적어내려갔습니다”고 말했다. 또 “《민성보》의 옛터는 이곳에서 남으로 수십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으나 그곳에 민가가 밀집하기에 룡정시연수학교내에 세우게 되였다”고 소개했다. 《민성보》는 20세기 20년대 동북에서 중문과 조선문으로 꾸린 유일한 신문이였다. 또한 《민성보》는 예봉을 직접 일제와 국내통치계급에 돌렸고 인민대중들에게 각성하고 단합하여 다같이 대적하며 외환을 막아나서라고 호소한 진보적 신문이였다. "연변일보" 2015-8-5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8    피로 물든 장암촌 댓글:  조회:1881  추천:11  2016-01-20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6) 피로 물든 장암촌  김혁   "장암동참안유적" 표지석 (사진 리련화 기자) 세전이벌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있는 오붓한 마을 하나가 있다. 지금은 동명촌 제2촌민소조라 불리지만 옛적에는 장암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노루골이라는 이름의 마을, 초가집과 벽돌 기와집이 어우러져 섞인 작은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 이지만 수십년전 이곳에서는 일제의 몸서리치는 만행이 자행된 참변의 현장이였다. 봉오동, 청산리 대첩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일제는1920년10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조선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였다. 그중에 장암동 마을이 당한 참화가 가장 컸다. 마을 마을 앞쪽 언덕을 따라 오르니 기념석 하나가 유표히 보였다. 철책에 둘러쌓인 석비정면에 “장암동참안유적(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뒤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6月30日 유적비에는 몇글자로 응축된 그날 장암동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일었던가! 청산리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조선인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으로 혈안이 되였다 조선인들이 독립군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뻗친데 대한 분풀이였다. 이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ㆍ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이대첩을 이룰수 있었던것은 지역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군을 쫓아 씨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변에서 조선인 마을만 보면 수색하여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녀성들을 간음하며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삼광전략(三光戰略)” 즉 모조리죽이고, 략탈하고, 불지르는 초토화 섬멸 작전이였다. 1920년 참안을 앞둔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 있었다. 마을에능 영신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 “3,13”반일시위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원들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한다. 이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1920년10월30일 새벽 0시30분, 룡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였다.(일본 제19사단사령부, )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리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다시 불속에 던져넣었다. 가슴치며 절규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그런데 며칠후,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강요했다. 유족들이 위협에 못이겨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조짚단우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귀축같은 만행을 지르고도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을 축하했다. 그후 이중학살된 참혹한 시체가 누구의것인지도 가릴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일제는 장암촌에서 류례가 없는 잔악한 행위을 우리 동포에게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장암촌은 폐허가 되고말았다. 이를 목격한 룡정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기시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와 “로이터 통신사”등에 보도되였다. 사책들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해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참변”과 함께 우리 민족이 동북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였다. 유적비에 묵념을 올리고 마을 동쪽골짜기에 자리잡고있는 노루바위를 찾아보았다. 마을의 주병근(79세) 할아버지에 의하면 “노루바위는 원래는 제법 운치가 있는 바위였는데 한때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바위 일부를 부셔버렸다”고 한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하지만 답사 내내 노루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처연히 들려오는 꿩 우는 소리만이 어제날의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픈 수난을 이야기 하는듯 했다. "연변일보" 2015년 7월 21일
7    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댓글:  조회:2476  추천:13  2016-01-15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5) 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상) 김 혁​ ▲ 의거를 주도한 6명의 반일지사들   몇해전, 한국 영화계에서 한 편의 영화가 극장가를 열광의 도가니로 달구었다.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칸국제영화제 초청, 한화 200억원이라는 억대의제작비 등으로 “놈놈놈”은 갖가지 화제를 모으다가 개봉한지 불과 한 달도 못되여관객 600여만 명을 불러 모으며 당년 한국영화의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 올랐다. 여기서 놀라운것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다름 아닌 지난세기 20년대 룡정에서 벌어진 “15만원 탈취사건”이라는 사실이다.  룡정에서 일었던 “3.13” 반일집회가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된뒤 반일지사들은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바로 이 당시 로시야에서는 홍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체코군단이 패배를 직감하고 헐값에 무기를 처분하려고 서두르던 시점이였다. 이에1915년전후 북간도와 로씨야 연해주 반일열혈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조직인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은 빠른 시일 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습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책략을 모았다. 거사를 기획한 사람들로는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김준, 박웅세, 최봉설등 여섯 명이었다. 이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전홍섭(全洪燮)이조선은행 룡정 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들은 전홍섭에게독립무장을 위한 행동에 참여하자고 건의 했다. 이에 일본기관에서 일보고 있지만 역시 일제괴수들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있던 전홍섭은 인차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전홍섭은 자기는 놈들의 은행권수송에 몇번 참가한적 있다면서 “왜놈들이 회령에서 룡정 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구체 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해결할수 있지 않을가”고 자신의 생각을 터놓았다. 이에 영웅들은 일제의 수송자금을 중도에서 탈환하기로 하였다. 전홍섭은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련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1919년 12월 그믐 날 전홍섭은 룡정 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에게서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30만원의 현금을 수송해 오게 된다는 비빌을 알아내였다. 전홍섭은 즉각 철혈광복단에게 이 비밀행동에 대해 쪽지로 전달했다. 쪽지에는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수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고 씌여 있었다. 4,5일이면 시간이 이틀밖에 없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등 6명은 명동에 집결하여 면밀하게 습격계획을 짰다. 거액의 현금을 운송하는 일이니 놈들은 전신무장한 순사들로 호위로 경비가 삼엄할것이다. 인적이 적고 산발이 험하고 나무가 무성한 오랑캐령이나 선바위밑에서는 더욱 경각성을 높힐것이다. 그러나 등잔밑이 어둡다고 총령사관이 있는 룡정촌 근처에서는 상대적으로 경비가 느슨해 질수도 있다. 드디여 그들은 습격지점을 동량리 어구(지금의 승지촌으로부터 100여메터 상거한 길)로 정했다. 행동의 편리를 위하여 여섯 사람을 두 개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였다. 두 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 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일제를 향한 증오의 총칼을 서슬푸르게 벼르고 있던 철혈광복단은 즉각 행동에 들어 갔다.  1920년 1월 4일,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여섯명의 철혈광복단 대원들은 결전의 길에 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림속을 꿰질렀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가르며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 어구에 도착하게 되였다. 동량리 어구는 룡정시 남쪽으로 흐르는 륙도하를 따라 동남쪽으로 뻗은 골짜기좌안의 도로를 따라 약 4㎞ 가량을 가면 닿게 된다. 동량리 어구에서 그들은 큰 길옆 버들방천에 숨어서는 오로지 수송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여 적들의 수송대가 나타났다. 수송대는 느릿느릿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행렬의 륜곽이 점점 똑똑히 알렸다. ​▲ 15만원 군자금 운송지점인 조선은행 룡정 출장소 옛터 (사진 리련화 기자). (계속) "연변일보" 2015년 7월 7일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5) 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하) 김 혁​ ▲ 동량리 어구에 세워 진 의거 기념비 (사진: 리련화 기자)     “땅!” 어스름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다. 그 신호와 같이하여 대원들은 일제히 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가 총에 맞아 말우에서 굴러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세웠다. 그런데 이때 총소리에 놀란 맨 앞장 선 말이 네굽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 말을 붙들라!” 윤준희와 최봉설은 15리나 쫓아가서 어느 산중턱에서 간신히 말을 멈춰세웠다. 말에 실은 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그들의 입에서는 환성이 터져 올랐다. 주머니속에는 도합 15만원의 새 지폐가 꽉 차있었던것이다. 그들은 돈을 나누어 지니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와룡동의 최봉설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휴식을 취한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출발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두 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울라지보스또크를 향해 떠났다. 로씨야 모구위(毛口崴)에서 배를 타고 울지보스또크로 향발, 23일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신한촌에서 그들은 당지의 반일지사인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사건이 일자 온 간도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인 1월 5일, 룡정 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수백명의 중일경찰들을 동원해 평강일대에서 조선인들은 검거체포했다.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반일지사들을 잡으려고 악에 바쳐 광분하고있을때 무기구입을 책임진 임국정은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론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으로 될줄이야. 임국정이 찾았던 엄인섭은 언녕 변절하여 일제의 끄나불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울라지보스또크의 반일투쟁대오에까지 숨어들어 온 엄인섭은 무기를 사는 일을 근심말라고 호언장담하면서 황급히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일본헌병대를 찾아가 상황을 밀고해버렸다. 헌병대의 정보를 받은 일제는 즉각 출동했다. 조선 라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까지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할 정도로 신속한 대응을 벌렸다. 1월 31일 밤 신한촌에 대한 일제의 피비린 대검거가 시작됐다. 꿈나라에서 무기교섭의 성공을 꿈꾸던 그들은 한밤중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대자 잠을 털고 일어났다. 바깥동정을 느끼고 서둘렀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렸던것이다.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뒤문으로 빠져나가려던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뒤방 문곁에서 자고있던 최봉설이 사태의 엄중성을 느끼고 맨발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앞을 가로막는 일본군헌병을 발길로 걷어차 넘어 뜨리고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헌병들이 최봉설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최봉설은 상처를 한손으로 감싸면서 계속 앞으로 뛰였다. 얼마 못뛰여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총알을 맞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추슬리며 최봉설은 단말마로 뛰고 또 뛰였다. 일제의 검거로 단원들이 목숨걸고 탈취했던 15만원중에서 12만8천여원을 압수당했다. 아울러 울라지보스또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는 대가를 치렀다. 1921년 8월 25일 윤준희 등 세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에 언도되였다. 윤준희는 30살, 임국정은 27살, 한상호는 23살의 애젊은 나이였다. 당시 최신 소총 한 정이 30원 이였다고 하니 15만원은 반일독립군 5000명을 단번에 중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였다. 간발의 차이로 비장하게 마무리 된15만원 탈취사건이 있은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련이어 일었다. 15만원 탈취거사가 무기구입 성사로 마무리 되였더라다면 전반 조선민족 항일무장투쟁의 판도를 바꿔놓았을것은 물론일것이다. 일제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전설처럼 살아남은 최봉설(崔鳳卨)은 상처를 치료한후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로씨야 백파군과 맞서 싸웠다. “15만원탈취사건”이 발생한지도 이젠 90여년 세월을 경과했다. 그동안 사건경위에 대해 각이한 기술이 있지만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씨의 증언과 관련자료들이 아직도 그냥 발굴되면서 사건의 진상은 진실에 한걸음 가까와졌다. 지금 룡정지역에는 “15만원탈취사건”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당년 일제의 군자금 조달지점이였던 조선은행건물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원모습 그대로 보존되여 있다. 지금의 룡정 시정부 서쪽문, 신화서점 사거리에서 룡정 서시장쪽으로 빠지는 골목 바로 오른편의 회색 2층건물이 바로 그 곳이다. 한때 룡정시 공상은행 영업청으로 사용되였다다. “15만원 탈취사건”의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유적지로는 탈취사건 지점에 세워진 거사 기념비이다. 룡정 시에서 동남쪽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지신진 승지촌, 바로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의 고향 마을이 있는 그 부근에 거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포장도로 오른편 륙도하가 흐르는 강언덕, 돌로 3메터 가량 쌓은 축대언덕주변은 세멘트로 단을 쌓고 오르는 계단도 만들었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탈취십오만원사건유지(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15만원탈취사건은 조선민족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장을 장식하면서 아주 큰 력사 적 의미를 가진다.” 학계는 15만원 탈취사건은 룡정 3•13 만세운동으로 대표되던 비폭력 항일운동에서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같은 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거사라고 정평하고 있다. "연변일보" 2015년 7월 14일  
6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댓글:  조회:2271  추천:15  2016-01-04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4)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상)   김 혁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룡정 반일시위 당시의 광경​   룡정시가지에서 남녘 삼합 방향으로 버드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의사릉에는 그 젯날 반일의 호성을 목청껏 울리다 순직한 13인렬사의 봉분이 두 줄로 안장돼 있다. ​ 1919년, 경성의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여 연변지역에까지 미쳤다. 그 무렵 연변지역에서는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가지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고있었다. 연해주에 파견된 간도 간민회 회장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지사들은 협의를 거듭하여 룡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룡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룡정촌이 당시“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룡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과 배형식을 대회 집행회장과 부회장으로추천하고 회의순서, 시위 로선 및 대회의 구호 등 문제를 세세하게 상의하였다. 날짜는3월 13일로 정했다.   드디여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아침부터 연변 각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룡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날 개산툰 지방의 사람들은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과 함께 12일 밤중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사람들은새벽에 출발하여 명동학교에 도착하여 명동학교학생들과 함께 북과 나팔을 울리며 룡정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루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렬을 지어 룡정에 도착하였다. 간도 각지역에서 사람들은 냇물의 지류가 강을 바라고 흘러들듯이 사면팔방에서 룡정을 향해흘러 들었다. 원래 집회의 예정지점은 상부지 밖의 영신학교 앞 공지였다. 하지만 당지 군경들이거느린 보병과 기병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이리하여 집회대오는 부득불 원래의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700여 메터 되는 곳으로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당시 간도보통학교 뒤쪽(지금의 룡정제1유치원마당) 부근이였다. 지금 유치원 정원에 반일시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방에서 모여 온 3만 여명에 달했다. 당시 룡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실정을 감안해 보면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였다. 이때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종은 당시 15세의 소년 림민호가 쳤다. 당년의 “종치기 소년” 림민호는 그 후 연변대학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는 연변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민족교육자이다.   림민호선생은 그날의 감격에 대해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였고 우리 집은 바로 룡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다. 이날 나는 동네의 한 친구와 함께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있었다. 룡정에서 전에 없었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나는 친구와함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그때 우리가 종을 울린것은 우리 대회의 시작을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홍안소년에 의해 울려퍼진 이 종소리는 지난 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의 개막을 이끌었다. 이 력사적인 종소리와 함께 김영학이 대회를 선포했다. 우선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랑독되였다. ​ (계속)​ ​ "연변일보" 2015년 6월 24일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4)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하)     김 혁 ​ [출처] 봄날의 함성|작성자 김 혁 룡정시 외곽에 조성 된 3.13반일의사릉.​ (사진 리련화 기자)   ​이어 시위행진이 거행되였다. 시위대오 맨 앞장에 명월구에서 온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들고나섰고 명동학교, 정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열대가 앞장에 섰다. 그리고 그 뒤로 각지에서 모여온 군중대오가 따라 섰다. 시위자들은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높이높이 외치면서 호호탕탕하게 상부지 안의 일본 간도총령사관을 향하였다. 상부지 가까이에서 시위군중들과 막아서는 군경들 사이에 몸 싸움이 시작되였다. 격노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가로막는 군경들을 향해 뿌리면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긴박감과 결연함에 왜놈들은 질겁했다.   땅! 이때 총성이 울렸다. 맨 앞장에 오장기를 들고 나섰던 기수 공덕흡이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 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련이어 울렸고 앞장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시위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여 흩어졌다. 혼란 속에서 주도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휘동하여 쓰러진 사상자들을 “제창병원”으로 호송하였다.   3월 13일에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당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0명으로서 공덕흡, 박상진, 정시익,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였다. 13일 후 17일 사이에 최익선, 현상호, 리유주, 차정룡 등 4명이 희생되였다. 이밖에 17일 후에 희생된 이들로는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 등이였다. 또 이날 시위에서 48명이 부상을 입고 남성 90여명이 체포된것으로 이 수자는 1920년 1월 22일 "독립신문"에 집계되여 실렸다.   3월 17일, 룡정의 각계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였다. 3천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민중들이 다시 룡정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룡정 제창병원 앞에 모여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란 현수막과 14명 수난자들의 령구를 메고 룡정 동남교회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안장했다. 묘소에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1989년 룡정 3.13사업위원회 초대회장 최근갑옹등은 다섯 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쳐 1990년 4월 10일에 의사들의 묘소를 확정했다. 이어 5월에 “3,13반일 의사릉묘 수복 및 순난의사 추모식”을 장중하게 거행했다. 1994년 이 묘역은 룡정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였다. 반일의사들의 묘역의 조성에 큰 힘을 바쳤던 최근갑옹은 “이 날의 반일시위운동은 학계에 의해 ‘해란강반의 봄우뢰’라고 지칭되고 있습니다. 이 성세호대한 시위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그젯날의 연변지역의 반일투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습니다. 이는 연변지역 조선인민대중의 첫번째로 되는 대규모적인 반일투쟁사건이였습니다.”고 말했다.   3.13반일시위운동은 일제와 그 사촉을 받은 중국 군경들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이 의거는 그 이듬해 1920년 룡정에 있은 간도 일제은행의 15만원 탈취사건과 봉오동, 청산리투쟁으로 이어진다.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무장독립투쟁으로 전환한것이다.   반일지사들의 충혼이 잠들어 있는 묘역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연변일보" 2015년 6월 30일   [출처]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하)|작성자 김 혁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    민족교육의 효시- 명동학교 댓글:  조회:2025  추천:11  2015-12-21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3)   민족교육의 효시- 명동학교 ​ 김 혁 ​   명동학교의 창립당시의 모습 ​ 민족의 교육사와 반일운동사에서 단초를 열어젖힌 리상설의 "서전서숙"은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폐숙 (废塾)되였지만 그와 더불어 룡정에서 수십리 떨어진 명동이라는 마을에서는 큰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 구한말 일제의 횡포로 나라를 읽고 고향을 잃은것을 통탄했던 김약연 등 회령의 학자들은 1899년 가족과 10여 가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명동지역(지금의 룡정시 지신향 명동촌)정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차렸던 몇 개의 서재를 합쳐 사립 명동서숙을 세우고 룡정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받기로 의기투합되였다. 그리하여 "명동서숙"이 1908년 4월 27일에 창립되였다. 초대숙장으로는 김약연이 맡게 되였다. 숙장부터 교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피 끓는 조선의 반일애국지사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였다. "명동서숙"은 창립된 첫해부터 잘 꾸려져 이듬해 4월에 현대 멋이 물씬 풍기는 명동학교로 개창 되였다. 1911년 3월 김약연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명동학교에 녀학부를 세웠다. 이 역시 중국조선족 이주사에서 처음으로 있은 녀성교육으로 된다. ​ 김약연은 학과목의 중심을 조선민족의 말과 글을 가르치고 조선의 유구한 력사와 지리를 가르치는데 두고 학생들에게 민족자부심과 반일의식을 키워주기에 힘썼다. 후에 일제침략자들이 사립학교들에서 조선어와 조선력사, 조선지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던 시기에도 김약연은 여전히 가르치게 하였다. 명동학교는 갈수록 생기를 띠고 명성이 높아져 뜻있는 청년들은 연변 각지와 남북만, 조선, 로씨야의 연해주 등지에서 륙속 이주민들의 “리상향”인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조선에서 피신해 온 독립지사들은 교원으로 되여 강단에 서서 수많은 반일지사들을 길러냈고 이들은 후날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등불이 됐다. ​ 1914년 5월 28일자 “신한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간도에 있는 명동예수교학교는 설립한 지 4년에 교무가 날로 진흥하며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여 150여 명에 달하였으므로 장차 학교를 크게 건축하고 교육을 더욱 확장하고자 하는 중이라 하더라” ​ 명동학교는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였다. 당시 선생들에게는 월급이 따로 없었다. 독신으로 와 있는 선생님은 돌림 차례로 학부모네 집에서 한 달씩 주숙 하거나 한집을 정해놓고 주숙하게 되면 그 땔나무와 쌀을 학부모들로부터 거두어 하숙집에 들여놓았다. 가족이 있는 선생은 학전(學田)을 적당히 부치게 하였다. 이렇듯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명동학교의 여러 가지 사업은 정연하게 잘 진행되였다. 수업이 눈에 뜨이게 성과적으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외활동과 사회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되여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반일민족의식과 독립사상으로 학생들을 각성시켰다. 명동학교후원회에서는 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10여년간 열심히 노력하여 모은 의연금 800여원으로 1917년에 13개월이란 시공을 하여 드디여 현대식 교사를 짓게 되였다. 철저한 교육운동, 치렬한 항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었던 명동촌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들이 즐겨 찾는 아지트가 되였다.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중근도 명동촌의 뒤산의 명암골을 찾아 들어 권총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이곳에 두달 가량 체류하면서 김약연 등 지사들과 항일구국의 장구책을 론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부대와 김좌진 부대 그리고 1920년 1월 3일 명동과 불과 10여리 리 떨어진 동량리어구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선 회령으로부터 룡정으로 보내는 일화 15만원을 "철혈광복단"에서 탈취한 의거에는 명동학교 출신이거나 명동과 관련된 독립군 용사들이 적지 않았다. ​ 명동촌은 당연히 일제의 눈에 든 가시”로 되였다. 일제는 명동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더욱 엄밀히 감시하였다. 1920년 10월 북간도지역을 피바다로 만든 "경신년 대토벌"이 일제에 의해 일어났다. 김약연은 반일시위의 주모자로 관헌에 체포되였고 일제는 명동에 덮쳐 들어 수백명 군중을 명동학교운동장에 몰아다 놓고 독립운동자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일제토벌대의 위협공갈앞에서도 명동사람들은 의연했다. 헛물만 켜게 된 극악무도한 일제는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명동사람들이 터를 닦고 세운 명동학교를 재더미로 만들었다. ​ 1922년 가을, 민국관청에서 석방되여 명동에 돌아온 김약연은 또다시 명동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1924년 갑자년 특대 흉년이 덮쳐왔다. 명동학교는 운영난에 시달렸고 왕년의 생기를 잃어갔다. 로령에도 불구하고 명동을 지켜내려는 김약연의 노력은 외롭고 처절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중학부가 취소되고 중학부의 교원들과 일부 학생들이 룡정의 여러 중학교로 옮겨지자 명동학교도 교회에서 경영하는, 남녀공학학교로 바뀌였다. ​ 1928년 환갑연의 김약연은 솔가하여 룡정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가 창설한 명동학교는 력사의 갈피에 그 존재를 또렷이 적었다. 명동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중학부가 1925년에 페지 될 때까지 18년간 학교는 무려 1천명의 애국청년들을 양성하여 졸업시켰다. 이 졸업생들은 모두가 항일투쟁에 나섰거나 민족교육사업 그리고 문학가와 저명한 예술가로 청사에 길이 빛날 업적들을 쌓았다. 그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읊조렸던 윤동주는 김약연의 누이동생의 아들이자 명동학교 학생으로서 김약연이 가르친 제자였다. 그리고 영화 “아리랑”을 만든 춘사 라운규, “통일의 아버지” 문익환,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등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이곳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물려받았고, 근대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다. ​ ​ 새로 복원된 명동학교 (사진, 리련화 기자)​   ​ 이후8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학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채 담배밭으로 변했으며 “명동학교 옛터”라고 쓰인 표지석만이 외로이 남아 과거 민족운동의 산실이였음을 알려왔다.   그러던 지난 2010년 력사의 뒤안길에 사라졌던 명동학교가 사람들의 주목속에 드디여 복원되였다. 룡정시에서는 중국조선족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룡정을 중국조선족 민족문화도시로 건설하려는 취지로130만원을 투입, 근 일년간의 시간을 거쳐 원 명동학교 자리에다 사연많은 명동학교를 복원하였던것이다. 명동학교 옛 터에 복원된 학교는 당시 평면도에 따라4채의 단층 벽돌 건물로 이뤄졌던1920년대 초의 명동학교 모습을 그대로 재현, 건축면적은265평방메터이고 4개 교실에2개의 사무실로 구성되였다. 중국조선족 교육의 효시이자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던 명동학교는 옛터에 다시 일떠서 당년의 위용을 자랑하고있다.   ​ "연변일보" 2015년 6월 17일   ​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    “죄악의 소굴” 댓글:  조회:2594  추천:12  2015-10-24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2)   “죄악의 소굴” - 간도일본총령사관   김 혁   룡정의 많은 유적지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이는 곳이 있다. 바로 룡정의 도심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어마어마한 부지를 안고 둘러쌓인 주홍빛 담장과 그 안에 솟은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룡정시 륙도하로 869번지. 그곳은 바로 바로 악명이 자자한 간도일본총령사관옛터이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전신은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였다. ​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은 기고만장하여 로씨야로부터 료동반도 조차권과 남만철도 운영권을 따내였다. 그와중에서 일본은 “간도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아래 1907년 8월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게 된다. 여기서 통감부란 을사조약에 의해 강제로 성립된 조선의 주권을 간섭하는 일제의 기관을 가리켜 말한다.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은 완전히 저들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에서 당시 일본 추밀원 의장이였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일황의 특사로 파견했다. 이토히로부미는 바로 모두가 다 아는 안중근에 의해 할빈역두에서 저격당한 조선침략의 괴수이다. 1906년 2월 1일에 통감부의 개청식이 있었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히로부미가 취임했다.개청식을 가진 통감부는 그 이듬해에 급급히 간도지역에 진출해 파출소를 세우는 신속한 행동을 취한다.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는 륙군중좌 사이토 스에지로(齐藤季次郎)에게 간도출병임무를 맡겼다. “순종실록 3권”에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재되여 있다. “일본은 명치(明治) 40년 2월 1일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하고 동경(東京)에 사무소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8월23일에 이 사무소를 간도(間島) 용정촌(龍井村)에 옮기고 그에 대한 사무를 시작하였다. 명치 41년 4월 10일 통감부임시 간도 파출소의 관제를 발포(發布)하고 육군 보병(陸軍步兵) 중좌(中佐) 사이토 스에지로를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1907년 8월, 사이토는 군경 63명을 회녕에 집결시켜 3개 반으로 나누고 19일, 헌병대를 령솔하여 간도에 침입했다. 이들은 1907년 8월 23일에“조선통감부 간도림시파출소”란 간판을 내걸고 사무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고시문”을 내다붙였다.     초기의 “간도일본총령사관”의 모습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는 바로 현 룡정 고중학교자리에 세워졌다. 일제는 그곳에 기념비석을 세웠었는데 광복이 나고 일제가 패망하면서 그 비석은철거되였다. 이후 간도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호시탐탐 꾀하던 일본은 1909년 9월4일 청나라를 강요하여 “간도협정”을체결한 일제는 길림으로부터 조선회령에 이르는 길회철도수축권을 얻었으며 국자가, 배초구, 투도구, 룡정 등을 일본에 개방하는 상업도시로 정하고 연변에서의 령사재판권을 얻었다. “간도협약” 제2조, 제7조의 규정에 의하여 그해 11월1일 일제는 룡정에 설치하였던 “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간도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활동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같은해 11월에는 린근의 국자가와 두도구, 훈춘등지에 령사분관까지 설립하고는 엄청난 조직으로 발톱을 키워나갔다. 그러던1922년 11월 27일 밤, 룡정 일본총령사관은 느닷없는 화재로 전소되였다.  이는 반일청년들에 의한 방화로 추정되고있다. 일제는 서둘러 령사관을 재건했다. 20여 만 엔을 들여 3년 이란 시간에 령사관청사를 재건하였는데 울안 면적이 4만 2944평방메터 이고 주요청사 건축면적은 2397평방메터, 부속건물면적은 4300평방메터였다. 청사 둘레는 높이 2메터가 넘는 당장에 싸여있어 큰 울안으로 형성되였다. 주요청사는 미황색의 타일을 붙이고 록색 뼁끼를 칠한 양철지붕의 3층집이였는데 지하에 1층이 있고 중간 남쪽이 5층으로 되였다. 청사는 1926년에 준공되였다. 령사관을 재건한뒤 일제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총령사관 경찰부의 관할밑에 룡정촌, 국자가, 투도구, 동불사, 로투구, 팔도구, 천보산, 의란구, 팔도하자, 배초구,  훈춘 등 18개곳에 경찰서 혹은 경찰분서를 증설하였다. 1935년5월의 통계에 의하면 이에 배치된 경관은 646명이였다. 이처럼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외교사무를 떠난 일제의 명명백백한 침략기구였다.   령사관 주청사뒤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있다. 이곳은 반일지사들의 취조했던 감옥이다. 지하고문실은 시정부가 지난 1990년초 항일전쟁승리 50주년 기념행사 일환으로 3만원을 들여 “룡정 혁명력사 전시관”으로 꾸며놨다. 지하고문실의 재현에 직접 관여했던 룡정시 민속박물관 전임관장 김동수씨는 “당시 일본총령사관은 간도지방에서 가장 악명높은 만행을 저질렀던 곳이였습니다”고 설명했다”. 지하실문을 여니 한 여름에도 훅 끼쳐오는 랭기와 더불어 좁고 음산한 복도가 나진다. 복도 량켠에는 여러 칸의작은 방들이 있었는데 간방과 고문실이였다고 한다. 정부울안을 정비하면서 발굴한 일제가 사용하던 총칼이며 취조시 사용했던 수갑, 족쇠, 채찍, 집게, 참대꼬챙이, 망치등 도구들이 그곳에 진렬되여있다. 그리고 반일지사들을 상대로 사용했던 물감옥과 고문형틀, 일본 헌병들의 총과고문피해자 옷가지 등 모두 2백70여점의 력사유물과 유품이 전시돼 있다.   그 몸서리치는 고문기구들에서 당시 일제의 잔학한 핍박속에 절규했을 지사들의 옥고가 떠오른다. “령사관에서는 반일정서를 탄압하고자 미친듯이 반일지사와 혐의인들을 체포했는데 ‘9.18’사변이후인 1934년 한해의 례만 들어도 놀랍습니다. 한해동안에 3635명이 체포되였는데 그때 연변에 조선족들이 42만 6000여명이였으니인구비례를 따지면 170명당 1명이 체포된셈이지요. 혐의자들을 가둘 감방이 모자라 여북하면 보이라실까지 감방으로 고쳐만들었겠습니까?” 김동수씨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 연변대학 력사학교수였던 고박창욱선생의 론문 “1907년 - 1945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하에 연변조선족인민들이 받은 피해정황”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45년사이에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사촉하에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조선족반일군민 4만여명을 살해했고 3만8000여명을 체포구류했다. 그중 반일 인사가 1만 165명이다. “총적으로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연변을 침략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탄압하고 연변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수뇌부였습니다.”고 김동수씨는 개괄해 말했다.       흉물스러운 괴물처럼 도사리고앉아 음위(淫威)를 떨쳤던 건물은 외견상 석조의 고풍스러움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반일지사들이 당했을 고초와 멍든 한이 짙게 베여있는듯 을씨년스러움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도 함께 전해주고 있다. 80여년의 풍상속에 수차례 주인이 바뀌며 변해버린 총령사관 본관은 현재 룡정시청사로 사용되고 있고 건물 뒤편2층 연립의 총령사 및 부령사 관저는 공안국 부속건물과 길림성 룡정 시 라디오TV방송국으로 바뀐지 오래다. 또한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당년의 일제의 잔학상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 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2015년 6월 10일 ​
3    “항일민족교육의 요람” 서전서숙 댓글:  조회:2310  추천:13  2015-09-01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1)   “항일민족교육의 요람” 서전서숙   김 혁   ​올해는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쑈전쟁 승리 70돐이 되는 해이다. 중국조선족이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치른 공훈은 력사의 한페지로 뚜렷이 남아 있다. 본지는 중국조선족 문화의 발상지이자 항일의 책원지였던 룡정지역을 중심으로 소설가 김혁과 함께 하는 유적지 순람을 "겨레의 창"에 련재한다. ​ - 편집부​ ​ 룡정시 문화로 91번지에 위치한 룡정시 실험소학교 정원에 들어서면 철봉대며 그네로 조성된 운동장 동쪽 가녘에 소소리 솟은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보인다. 일견에도 수령이 만만치 않은 나무이다. 나무아래에는 현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현판에 새겨진 내용은 이러하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의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비술나무곁에는 자연석을 다듬어 건립한 기념표지석이 있다. 석비에는 한자와 조선문으로 “서전서숙(瑞甸书塾) 옛터”란 글자가 음각되여 있다. 석비옆에는 또 하나의 작은 석비를 두어 서전서숙옛터 비문을 담았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조선족근대학교요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   연변력사학회와 룡정 3.13기념사업회가 2007년에 펴낸 “서전서숙 100돐기념문집 '력사의 종소리’”를 펼치면 당년의 서전서숙의 원 모습이 찍힌 색 바랜 사진 한 장을 볼수있다. 정갈한 초가 앞마당에 흰옷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마당의 울바자기둥에 “서전서숙(瑞甸书塾)”이라고 새긴 현판이 또렷이 걸려있는 사진이다. ​ ​ ​ 서전서숙의 원 면모를 보여주는 옛 사진   1906년 초 여름, 리상설, 리동녕, 려준 등 반일지사들은 해외에다 민족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할것을 결정, 곳을 북간도 룡정촌으로 정했다. 그 반일지사들의 선두에 섰던 리상설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여났다. 25세때에 조선왕조의 최후의 갑오문과 병과에 급제하면서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여러 관직은 일제가 통제함으로 일일이 사임하고 최후로 의정부 참찬으로까지 발탁되였으나 그것도 마다하고 동지들과 망명의 길에 올랐다. 리상설은 인천에서 중국 상선을 타고 상해로 갔다가 다시 울라지보스토크를 경유, 여름철에 룡정촌에 도착하였다. 룡정촌에 도착한 리상설은 유지  최병익이 새로 지은 널직한 8간집을 매입하고 “서전서숙”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맨 처음 학생 22명을 받아들이고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때가 바로 1906년 10월경이였다. "서전서숙"의 건평은 70평가량되였고 교원의 월급이거나 교재, 학생들의 지필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는 초대숙장 리상설의 자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서전서숙은 모든 수업에서 반일사상을 관철하는것을 첫째로 가는 준칙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시켰다. 동척에서 발행한 “간도사정”이라는 책자에서 보면 당시 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전서숙을 기웃거리다가 랭대를 받은 일본 밀탐의 일화가 사뭇 극적이다.  1907년 일본통감부는 륙군중좌 사이또와 사무관 등 일행은 룡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을 찾았다. 이자들은 상업관찰 도중에 들렸다고 에두르면서 때는 정심시간이므로 지니고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온수와 식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교원들은 빌려줄수 없다며 랭랭히  이를 거절했다. 리상설의 경우는 일언반구의 질문도 없이 출타하였다. 때문에 일행은 하는수 없이 강변에 가서 강물로 목을 축여가며 식사를 끝냈다고 했다. 당시 이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강인하였는가 알수 있는 대목이다. 1907년4월, 화란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게 되면서 리상설은 룡정을 떠나게 되였다. 떠나면서 리상설은 려준에게 서전서숙 숙장의 중임을 맡겼다. 려준은  김우용, 황달영, 박정서 등과 함께 계속하여 서숙을 운영해나갔다. 일본통감부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는곳마다에서 간섭, 저애했다. 회유정책으로 보조금을 지불하겠으니 합작하여 운영하자고 구슬리기도 했다. 이에 서전서숙은 오연하게 거절했다. 련이어 들이닥치는 경제난과 일제의 부단한 간섭속에서도 서전서숙은 몸부림치며 그 올곧은 자세를 이어나가고자 했다.  1907년9월경 서전서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로씨야로 갈 목적으로 룡정을 떠나 훈춘현의 탑도구(塔道沟)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기에서 1년간의 수업을 끝맺고 비장한 졸업식을 올린 후 3개 반 74명을 졸업시켰다.   ​ 반일지사 리상설   현재 룡정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쪽 켠에는 쏘련홍군동북해방기념탑”과 “심련수시비”와 더불어 “리상설 정(李相卨亭)”가 세워져 있다.  6각정자의 천정에는 리상설선생의 화상(画像)이 그제날 서전서숙교사를 뒤배경으로 모셔져 사생들과 관광객들을 굽어보고있다. 한편 일제의 횡포를 세상에 알리고자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로 떠난 리상설은 리준, 리위종등 특사들과 함께 각국의 대표단을 만나고 거리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며 조선독립을 호소한다. 그러나 일본측의 강압적인 방해로 회의참석은 좌절되고 특사들은 회의장밖으로 쫓겨나고 만다. “간도서전서숙와산실록”에는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서전서숙의 표정이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헤그만국회의에 조선대표들을 참가시키지 않기로 하였다는 비보가 우리 학교(서전서숙)에 전하여오자 전교의 교직원, 학생들은 대성통곡하였다.” 통한을 품고 헤이그에서 돌아선 리상설은 구미와 씨비리, 중국에서 전전하면서 독립활동기지를 세웠고 지사들과 조직을 결성하며 반일과 독립운동을 위해 로심초사하였다. 1917년 3월, 리동녕 등 애국지사들은 쌀쌀한 겨울바람이 부는 수분하 강가에서 한 반일지사의 시신을 화장한다. 그는 바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을 얻어 1917년 47세에 이국 낯선 땅에서 눈을 감은 리상설이였다. 안중근은 "리상설의 포부는 대단히 크다. 세계 대세에 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그의 인물을 보니 기량(器量)이 크고 사리(事理)에 통한 대인물로서 대신의 그릇을 잃지 않는다."고 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 아쉬워했다.   ​ 서전서숙 기념표지석 (사진: 리련화 기자)   서전서숙은 그후에도 세월의 영욕을 같이하며 100여년의 로정을 걸어왔다. 학교는 력사의 변천과 더불어 16차나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가 투항하기전에는 간도보통학교, 간도중앙학교, 흥중국민우급학교 등으로 불리웠고 그후에는 3.1소학교, 룡정중심소학교 등등의 이름으로 개칭되였다가 오늘의 룡정실험소학교로 되였다. 지난 백여년간 룡정실험소학교는 총 4만여명 학생을 졸업시켰다. 그 가운데는 항일에 뛰여들어 렬사가 된 이들도 있고 고위급 군관이 된 이들도 있으며, 과학기술 연구등 첨단 분야에서 커다란 기여를 한 분도 있다. 서전서숙은 비록 1년미만의 짧은 력사를 기록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중국조선족민족교육의 첫장을 펼침으로 하여 민족의 반일운동사와 교육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연변일보" 2015년 6월 2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    신천지와 고적지 댓글:  조회:3019  추천:12  2015-04-13
 칼럼   신천지와 고적지   김 혁     1   “동방의 명주”- 상해로 가면 곳곳이 명소일터이지만 상해의 현란한 밤문화를 향수하려면 꼭 들려야하는 곳이 있다. 바로 “신천지”라고 하는 곳이다. 상해의 경물들을 눈뿌리 아프게 발품 팔아가며 찾아보던중 필자는 “신천지”를 찾았다. 중국의 금융 및 상업 허브이자 “상전벽해”의 대명사인 포동과 상해의 최대 번화거리 남경로와 함께 명소로 손 꼽는곳- 말그대로 새로운 하늘과 땅(新天地)이 열려 있었다.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축양식과 로천카페가 어우러졌고 오래된 건축과 록음수목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낮에는 옛 상해의 문화를 간직한 쇼핑가와 레스토랑이, 밤에는 상해 최고의 밤문화를 즐길수 있는 바와 클럽으로 유명했다. 임시정부 청사의 옛 모습     2   사실 상해에서 필자의 심중을 유난히 사로잡는 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였다. 림시정부 유적지는 바로 “신천지”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상해 로완구 마당로 롱4호(上海卢湾区马当路306弄4号). 림시정부 유적지 청사는 “신천지”와는 대조되게 매우 낡고 좁은 도로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수도 있을만큼 평범했다. 좁은 골목길 안에 적색벽돌로 건축된 허름한 3층 건물이였다. 건물곁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살고있었는데 골목길에는 자전거가 세워져 있고 베란다에는 빨아 넌 옷가지들이 나붓기고 있었다. 일반 주택으로 사용되다가 지난 1992년 상해시 로완구 인민정부가 대한민국 림시정부유적지 보존단위로 결정함에 따라 다시금 꾸며졌고 일반인에게도 개방됐다고한다. 지난세기초 한민족이 일으킨 거족적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잠들어있던 한민족이 깨여나 하나 되는 계기가 되였다. 일제 식민지의 억압에서 풀려나려는 민족적 저항운동의 홰불이 들판의 불길처럼 맹렬히 번져 가던 1919년 4월 10일. 20여명의 지사들이 당시의 법조계(法租界, 프랑스 조계) 마랑로(马浪路) 보경리(普庆里) 4호에 모여들었다. 그날 밤 국회 격인 “림시 의정원”을 구성했고 머리를 맞대고 민족의 중흥을 위한 지혜를 모았다. 림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로는 조동호, 여운형,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리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리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리회영, 리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리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등 29인 이였다. 이날 탄생한 정부는 항일투쟁을 지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각지에 설립되였던 정부들이 통합하여 발족된 대한민국의 림시정부였고 민주공화제 국가 수립을 위해 그들이 건넌 징검다리의 맨 처음 디딤돌이였다. 그로서 이곳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던 소중한 장소로 각인되여왔다. 림시정부 요인들은 중국공산당 지하당과도 련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승냥이처럼 번뜩이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서였다. 림시정부 요인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림시정부를 여러차례 옮겼다.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폭탁투척사건 이후 일본군의 탄압에 절강성 가흥시로 옮겨가게 되였다. 그외에도 항주, 장사, 광주, 중경 등지로 고달픈 려정은 1945년 일제가 무너질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상해 림시정부는 시종 일제에 맞서 외롭고 의롭게 투쟁했다. 이렇게 선후로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국의 신분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5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청사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마루를 깔았는데 관객들은 저마다 가이드가 넘겨주는 비닐 덧신을 신고 들어섰다. 제복차림을 한 몇명의 녀성 직원이 안내를 맡아주었다. 유적지 청사는 15평 정도나 될까한 아주 좁은 공간이였다. 각 층마다 당시 활동모습을 추적하여 전시관으로 꾸며 놓고 림시정부의 활약을 담은 관련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여 있어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청사 주 출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백범 김구선생의 흉상이 보였다. 1층에는 회의실과 주방이 있었다. 1층에서 림시정부의 건립과 활동에 관한 비디오를 5분쯤 시청하고 웃층으로 올라갔다. 나무로 된 좁고 낮은 계단은 머리가 닿을듯 하여 고개를 숙이고서야 올라갈수 있었다. 2층에는 림시정부 수반의 집무실과 회의실이 있었다. 집무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태극기와 나무침대와 식탁, 조촐한 주방가구가 있었다. 식탁우에는 백범 김구선생의 가족사진도 놓여 있었다. 회의실에는 여러명이 앉을수 있는 의자와 회의용 탁자가 놓여 있었다. 집무실 책상에 림시정부 요인들의 밀랍인형이 설치되여있었는데 그들은 금방이라도 일어나 뜨거운 악수를 청할것만 같았다. 3층에는 림시정부 요인숙소가 있었고 림시정부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 주요 인사들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속에서 과거의 주역들은 신념으로 그득찬 찬 형형한 눈빛을 짓고있었다. 아쉽게도 전시실에서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여 있었다. 녀성직원들이 서투르나 분명한 조선말로 “사진 찍지마세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림시정부청사 머리돌(定礎式)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며 아쉬움을 달랠수 밖에 없었다. 출구쪽에는 기념품점을 앉혔다. 기념품점에서는 백범 김구선생의 얼굴이 찍힌 마크며 림시정부 유적지 사진을 박은 열쇠고리며 우표, 휘장, 배지, 악세사리, 장식품 등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현재의 림시정부 유적지는 한국 삼성물산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한국의 독지가들의 성금으로 복구되였는데 상해시 려행국에서 맡아 관리를 하고 있다고한다. 한해 20만명이 넘는 한국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3   상해에 몰아치는 개발의 광풍으로 림시정부 유적지 주변은 모두 고층 빌딩과 현대식 주거 시설에 포위되여 있었다. 여일중천(如日中天)한 “신천지”에서 비록 지금은 작고 허름한 건물만이 남아 주택가사이에 묻힌 “고적지”로 되여 버렸지만 좁고 루추한 거처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선렬들의 채취가 력력하게 남아있는듯 해 숙연하게 옷깃을 여미였다. -“청우재(聽雨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 룡정자택을 찾아서 댓글:  조회:4486  추천:75  2007-06-29
. 역사기행 .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 룡정자택을 찾아서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에서의 필자   지난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     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서대숙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 “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11월22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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