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4)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상)
김 혁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룡정 반일시위 당시의 광경
룡정시가지에서 남녘 삼합 방향으로 버드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의사릉에는 그 젯날 반일의 호성을 목청껏 울리다 순직한 13인렬사의 봉분이 두 줄로 안장돼 있다.
1919년, 경성의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여 연변지역에까지 미쳤다.
그 무렵 연변지역에서는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가지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고있었다. 연해주에 파견된 간도 간민회 회장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지사들은 협의를 거듭하여 룡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룡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룡정촌이 당시“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룡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과 배형식을 대회 집행회장과 부회장으로추천하고 회의순서, 시위 로선 및 대회의 구호 등 문제를 세세하게 상의하였다. 날짜는3월 13일로 정했다.
드디여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아침부터 연변 각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룡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날 개산툰 지방의 사람들은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과 함께 12일 밤중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사람들은새벽에 출발하여 명동학교에 도착하여 명동학교학생들과 함께 북과 나팔을 울리며 룡정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루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렬을 지어 룡정에 도착하였다. 간도 각지역에서 사람들은 냇물의 지류가 강을 바라고 흘러들듯이 사면팔방에서 룡정을 향해흘러 들었다.
원래 집회의 예정지점은 상부지 밖의 영신학교 앞 공지였다. 하지만 당지 군경들이거느린 보병과 기병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이리하여 집회대오는 부득불 원래의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700여 메터 되는 곳으로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당시 간도보통학교 뒤쪽(지금의 룡정제1유치원마당) 부근이였다. 지금 유치원 정원에 반일시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방에서 모여 온 3만 여명에 달했다. 당시 룡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실정을 감안해 보면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였다.
이때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종은 당시 15세의 소년 림민호가 쳤다. 당년의 “종치기 소년” 림민호는 그 후 연변대학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는 연변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민족교육자이다.
림민호선생은 그날의 감격에 대해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였고 우리 집은 바로 룡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다. 이날 나는 동네의 한 친구와 함께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있었다. 룡정에서 전에 없었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나는 친구와함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그때 우리가 종을 울린것은 우리 대회의 시작을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홍안소년에 의해 울려퍼진 이 종소리는 지난 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의 개막을 이끌었다. 이 력사적인 종소리와 함께 김영학이 대회를 선포했다. 우선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랑독되였다.
(계속)
"연변일보" 2015년 6월 24일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4)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하)
김 혁
[출처] 봄날의 함성|작성자 김 혁
룡정시 외곽에 조성 된 3.13반일의사릉. (사진 리련화 기자)
이어 시위행진이 거행되였다. 시위대오 맨 앞장에 명월구에서 온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들고나섰고 명동학교, 정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열대가 앞장에 섰다. 그리고 그 뒤로 각지에서 모여온 군중대오가 따라 섰다.
시위자들은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높이높이 외치면서 호호탕탕하게 상부지 안의 일본 간도총령사관을 향하였다.
상부지 가까이에서 시위군중들과 막아서는 군경들 사이에 몸 싸움이 시작되였다. 격노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가로막는 군경들을 향해 뿌리면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긴박감과 결연함에 왜놈들은 질겁했다.
땅! 이때 총성이 울렸다. 맨 앞장에 오장기를 들고 나섰던 기수 공덕흡이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 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련이어 울렸고 앞장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시위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여 흩어졌다.
혼란 속에서 주도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휘동하여 쓰러진 사상자들을 “제창병원”으로 호송하였다.
3월 13일에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당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0명으로서 공덕흡, 박상진, 정시익,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였다. 13일 후 17일 사이에 최익선, 현상호, 리유주, 차정룡 등 4명이 희생되였다. 이밖에 17일 후에 희생된 이들로는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 등이였다.
또 이날 시위에서 48명이 부상을 입고 남성 90여명이 체포된것으로 이 수자는 1920년 1월 22일 "독립신문"에 집계되여 실렸다.
3월 17일, 룡정의 각계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였다. 3천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민중들이 다시 룡정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룡정 제창병원 앞에 모여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란 현수막과 14명 수난자들의 령구를 메고 룡정 동남교회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안장했다. 묘소에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1989년 룡정 3.13사업위원회 초대회장 최근갑옹등은 다섯 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쳐 1990년 4월 10일에 의사들의 묘소를 확정했다. 이어 5월에 “3,13반일 의사릉묘 수복 및 순난의사 추모식”을 장중하게 거행했다. 1994년 이 묘역은 룡정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였다.
반일의사들의 묘역의 조성에 큰 힘을 바쳤던 최근갑옹은 “이 날의 반일시위운동은 학계에 의해 ‘해란강반의 봄우뢰’라고 지칭되고 있습니다. 이 성세호대한 시위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그젯날의 연변지역의 반일투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습니다. 이는 연변지역 조선인민대중의 첫번째로 되는 대규모적인 반일투쟁사건이였습니다.”고 말했다.
3.13반일시위운동은 일제와 그 사촉을 받은 중국 군경들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이 의거는 그 이듬해 1920년 룡정에 있은 간도 일제은행의 15만원 탈취사건과 봉오동, 청산리투쟁으로 이어진다.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무장독립투쟁으로 전환한것이다.
반일지사들의 충혼이 잠들어 있는 묘역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연변일보" 2015년 6월 30일
[출처]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하)|작성자 김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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