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2)
“죄악의 소굴”
- 간도일본총령사관
김 혁
룡정의 많은 유적지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이는 곳이 있다. 바로 룡정의 도심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어마어마한 부지를 안고 둘러쌓인 주홍빛 담장과 그 안에 솟은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룡정시 륙도하로 869번지. 그곳은 바로 바로 악명이 자자한 간도일본총령사관옛터이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전신은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였다.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은 기고만장하여 로씨야로부터 료동반도 조차권과 남만철도 운영권을 따내였다. 그와중에서 일본은 “간도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아래 1907년 8월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게 된다.
여기서 통감부란 을사조약에 의해 강제로 성립된 조선의 주권을 간섭하는 일제의 기관을 가리켜 말한다.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은 완전히 저들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에서 당시 일본 추밀원 의장이였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일황의 특사로 파견했다. 이토히로부미는 바로 모두가 다 아는 안중근에 의해 할빈역두에서 저격당한 조선침략의 괴수이다. 1906년 2월 1일에 통감부의 개청식이 있었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히로부미가 취임했다.개청식을 가진 통감부는 그 이듬해에 급급히 간도지역에 진출해 파출소를 세우는 신속한 행동을 취한다.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는 륙군중좌 사이토 스에지로(齐藤季次郎)에게 간도출병임무를 맡겼다.
“순종실록 3권”에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재되여 있다.
“일본은 명치(明治) 40년 2월 1일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하고 동경(東京)에 사무소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8월23일에 이 사무소를 간도(間島) 용정촌(龍井村)에 옮기고 그에 대한 사무를 시작하였다. 명치 41년 4월 10일 통감부임시 간도 파출소의 관제를 발포(發布)하고 육군 보병(陸軍步兵) 중좌(中佐) 사이토 스에지로를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1907년 8월, 사이토는 군경 63명을 회녕에 집결시켜 3개 반으로 나누고 19일, 헌병대를 령솔하여 간도에 침입했다.
이들은 1907년 8월 23일에“조선통감부 간도림시파출소”란 간판을 내걸고 사무를 보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고시문”을 내다붙였다.
초기의 “간도일본총령사관”의 모습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는 바로 현 룡정 고중학교자리에 세워졌다. 일제는 그곳에 기념비석을 세웠었는데 광복이 나고 일제가 패망하면서 그 비석은철거되였다.
이후 간도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호시탐탐 꾀하던 일본은 1909년 9월4일 청나라를 강요하여 “간도협정”을체결한 일제는 길림으로부터 조선회령에 이르는 길회철도수축권을 얻었으며 국자가, 배초구, 투도구, 룡정 등을 일본에 개방하는 상업도시로 정하고 연변에서의 령사재판권을 얻었다.
“간도협약” 제2조, 제7조의 규정에 의하여 그해 11월1일 일제는 룡정에 설치하였던 “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간도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활동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같은해 11월에는 린근의 국자가와 두도구, 훈춘등지에 령사분관까지 설립하고는 엄청난 조직으로 발톱을 키워나갔다.
그러던1922년 11월 27일 밤, 룡정 일본총령사관은 느닷없는 화재로 전소되였다. 이는 반일청년들에 의한 방화로 추정되고있다.
일제는 서둘러 령사관을 재건했다. 20여 만 엔을 들여 3년 이란 시간에 령사관청사를 재건하였는데 울안 면적이 4만 2944평방메터 이고 주요청사 건축면적은 2397평방메터, 부속건물면적은 4300평방메터였다. 청사 둘레는 높이 2메터가 넘는 당장에 싸여있어 큰 울안으로 형성되였다. 주요청사는 미황색의 타일을 붙이고 록색 뼁끼를 칠한 양철지붕의 3층집이였는데 지하에 1층이 있고 중간 남쪽이 5층으로 되였다. 청사는 1926년에 준공되였다.
령사관을 재건한뒤 일제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총령사관 경찰부의 관할밑에 룡정촌, 국자가, 투도구, 동불사, 로투구, 팔도구, 천보산, 의란구, 팔도하자, 배초구, 훈춘 등 18개곳에 경찰서 혹은 경찰분서를 증설하였다. 1935년5월의 통계에 의하면 이에 배치된 경관은 646명이였다.
이처럼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외교사무를 떠난 일제의 명명백백한 침략기구였다.
령사관 주청사뒤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있다. 이곳은 반일지사들의 취조했던 감옥이다.
지하고문실은 시정부가 지난 1990년초 항일전쟁승리 50주년 기념행사 일환으로 3만원을 들여 “룡정 혁명력사 전시관”으로 꾸며놨다.
지하고문실의 재현에 직접 관여했던 룡정시 민속박물관 전임관장 김동수씨는 “당시 일본총령사관은 간도지방에서 가장 악명높은 만행을 저질렀던 곳이였습니다”고 설명했다”.
지하실문을 여니 한 여름에도 훅 끼쳐오는 랭기와 더불어 좁고 음산한 복도가 나진다. 복도 량켠에는 여러 칸의작은 방들이 있었는데 간방과 고문실이였다고 한다. 정부울안을 정비하면서 발굴한 일제가 사용하던 총칼이며 취조시 사용했던 수갑, 족쇠, 채찍, 집게, 참대꼬챙이, 망치등 도구들이 그곳에 진렬되여있다. 그리고 반일지사들을 상대로 사용했던 물감옥과 고문형틀, 일본 헌병들의 총과고문피해자 옷가지 등 모두 2백70여점의 력사유물과 유품이 전시돼 있다. 그 몸서리치는 고문기구들에서 당시 일제의 잔학한 핍박속에 절규했을 지사들의 옥고가 떠오른다.
“령사관에서는 반일정서를 탄압하고자 미친듯이 반일지사와 혐의인들을 체포했는데 ‘9.18’사변이후인 1934년 한해의 례만 들어도 놀랍습니다. 한해동안에 3635명이 체포되였는데 그때 연변에 조선족들이 42만 6000여명이였으니인구비례를 따지면 170명당 1명이 체포된셈이지요. 혐의자들을 가둘 감방이 모자라 여북하면 보이라실까지 감방으로 고쳐만들었겠습니까?”
김동수씨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였던 고박창욱선생의 론문 “1907년 - 1945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하에 연변조선족인민들이 받은 피해정황”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45년사이에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사촉하에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조선족반일군민 4만여명을 살해했고 3만8000여명을 체포구류했다. 그중 반일 인사가 1만 165명이다.
“총적으로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연변을 침략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탄압하고 연변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수뇌부였습니다.”고 김동수씨는 개괄해 말했다.
흉물스러운 괴물처럼 도사리고앉아 음위(淫威)를 떨쳤던 건물은 외견상 석조의 고풍스러움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반일지사들이 당했을 고초와 멍든 한이 짙게 베여있는듯 을씨년스러움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도 함께 전해주고 있다.
80여년의 풍상속에 수차례 주인이 바뀌며 변해버린 총령사관 본관은 현재 룡정시청사로 사용되고 있고 건물 뒤편2층 연립의 총령사 및 부령사 관저는 공안국 부속건물과 길림성 룡정 시 라디오TV방송국으로 바뀐지 오래다.
또한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당년의 일제의 잔학상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 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2015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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