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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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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일송정에 달빛 비추거든... 댓글:  조회:1152  추천:8  2017-06-07
. 추모수필 .   일송정에 달빛 비추거든... 리태수 은사님의 타계를 애달퍼하며   김혁         그날은 “슈퍼 달”이 뜬다고 했다.  5월 9일, 올 들어 가장 큰 보름달이 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부푸는 심정을 강타하며 늦은 저녁, 선생님의 부음이 들려왔다.   잡지사의 청탁원고에 밀려 서재를 울리며 가락맞게 달리던 나의 키보드소리가 급기야 뚝 멎었다. 망지소조(罔知所措)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장이다가 창가로 다가가 서재의 뙤창을 열어젖혔다. 저리도 밝은 달이, 저리도 둥근 달이 유난스레 떠 있었다. 슈퍼달(Super Moon)은 지구와 가장 근지점에 있을 때에 보이는 큰 보름달, 저마다 소원을 빈다는 그 달뜬 밤에 비보를 들었다.   나의 서재 “청우재(听雨斋)”에서 낮이면 저 유명한 남산의 일송정이 훤히 내다 보인다. 밤이라도 산정우에 우람하게 솟아있는 방송탑곁에 그 무슨 초대처럼 꽂혀있는 일송정 정자의 실루엣을 그나마 가려볼수 있다. 슈퍼달은 높이 떠서 일송정을 훤이 비추고 있었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어언 33년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열기로 가득했던 초여름의 그날을 나는 내내 잊을수가 없다. 그날을 잊을수 없는건 내가 처음으로 당시 류행이던 청바지(당시 항간에서는 홀태바지라 불렀다)를 사입은 날이였고, 또 그 새물내나는 바지를 입고 처음으로 소설가라는 린봉(麟凤)같은 존재를 만나본 날이였기때문이다.   그때 나는 초라니(몹시 경망스럽고 야단스러운) 문학도였다. “눈 먼 장비 헛 창 질”하듯 뭣모르고 곰바지런히 설익은 필을 놀리는 극성스러운 문학도였던 나에게는 소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룡정에 계시는 리태수선생님을 만나고픈 열망이였다. 당시 “천지”(“연변문학”의 전신), “아리랑”등 여러 간행물에 “보름달, 둥근달” 등 중편소설들을 다량으로 발표하고 라지오 매주일가에서 인기리에 방송되는 류행가요의 가사도 써내고 항일설화를 소재로 한 장막극도 써내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선생님이였다.   나의 양모와 선생님의 사모님이 한 학교에서 근무하셨기에 그 연줄로 나는 행운스럽게 선생님을 만날수 있었다. 가슴패기에 놓고 손절구라도 찧는양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안추리며 자택에  들어섰을때 선생님은 안방에  엎디여서 한창 집필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이 엎드려 글 쓰시는 남다른 창작방식을 오래동안 고수해 왔음을 난 기억하고 있다. 내가 들어서자 선생님은 쓰던 글을 접어두고 맞아주셨다. 유명 소설가를 만난다는 설레임과 어려움에 한밤을 설쳤는데 선생님은 그렇듯 온화하고 부드럽게 나를 맞아 주셨다.   어줍게 소설이랍시고 어머니의 교안책 뒤장에 쓴 어지러운 소설 초고를 선생님에게 맡기고 돌아섰을때 선생님은 대문밖까지 날 배웅해 주셨다. 그러던 선생님의 눈길은 바지 아래단을 두겹 걷우어올린 나의 새 청바지에 머물렀다.   “바지단이 좀 긴것 같구나 가서 적당히 자르려무나.”   이것이 리태수 선생님과 나의 첫 만남이였다.     그후로 나는 때때로 소설 초고지를 들고 선생님의 집으로 뛰여들곤했다. 난삽하고 미숙한 작품임에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선생님께 읽어드렸고 선생님은 빙그레 미소를 띈채 그 긴 작품들을 마지막까지 들어주고는 세세하게 수개평을 달아주시곤했다.    어느 한번 룡정의 한 소학교 교실에서 소설합평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십대의 어린 나이인지라 내가 들고 간 소설은 편집들의 빈축을 받았다. 어린 나이인것도 있었거니와 종교색채까지 띈 소설이여서 나중에 편집들은 표절 내지 도작으로 의심하며 몰아갔다. 이때 선생님께서 상을 탁 치면서 일어섰다. 강경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혁이의 초고들을 적지않게 봤는데 아주 력량이 있는 애더구만. 내가 이 애의 부모와 일면식이 있어서가 두둔하는게 아니요. 난 혁이가 꼭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리라 믿소” 그때 나는 그야말로 왜틀비틀 걸음마 타던 아이가 큰 나무둥이에 의지해 넘어지지 않은듯한 심정이였다.      드디여 열아홉살 나던해 나의 처녀작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이 지면에 올랐다. 선생님은 그렇듯 기뻐하시면서 우리 집을 찾아 주셨다.  김재권 선생님, 오흥진 선생님, 전광하 선생님, 황병락 선생님등 룡정의 중견 문인들과 함께 밤늦게 까지 축하주를 들어 주셨다. 그리고는 밤늦게 방영하는 중앙영화채널의 심야영화까지 선생님들은 흑백의 텔레비죤앞에 오손도손 모여앉아 다 보셨다. 그 영화의 제목이 “나비의 꿈”이였음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외국영화임에도 우리 말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성우들의 더빙을 들으며 선생님은 곁에 앉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음(配音)을 참 잘 하지, 하지만 혁이야, 앵무새 따라 읊기를 해선 안돼, 자기 특색이 있는 작품을 써야지” 은사님의 그 살푼한 눈길과 목소리의 가르침을 난 지금까지도 잊을수 없다. 그날은 그야말로 어린 나의 성인식이요, 문학에로의 통과의례같은 축복의 날이였다.      1986년 나는 룡정의 젊은 문인들과 함께 문학협회를 발족시켰다. 당시는 문인들이 소박받는 요즘의 풍토와는 달리 문학의 전성시대였다. 룡정 주위의 조양천, 로투구, 지신, 삼합, 백금 지역에서 문학도들이 거의 백명가까이 협회에 가입했고 선생님을 비롯해 김재권 선생님, 전광하 선생님은 흔쾌히 협회의 고문을 맡아 주었습니다. 우리가 경필로 써서 프린트 해낸 “희망봉”이라는 협회지를 까근히 읽어 주셨고 소설 합평회에도 참가해 문학도들의 글짓기에서의 병소를 족집게처럼 집어 내 주셨다.   그후 선생님은 또 룡정에 “보름회”라는 문학협회를 발족시켰다. 지금은 이즈러져 있지만 언젠가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되리라는 깊은 뜻이 담긴 선생님이 친히 지은 동아리의 이름이였다. 그때 연길 “길림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밤늦게 차를 타고 보름에 한번씩 열리는 “보름회” 작품합평회에 빠짐없이 참여하곤 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알기 쉽고 유머섞인 단평을 경청하고 설익은 작품을 탁마하기 위해서였다. 동아리 성원들은 일송정이 금방 복구된 비암산 자락으로 원족을 가기도 했다.  시원한 솔바람 그늘에 앉아 문학을 안주로 삼아 매운 막소주를 나누기도 했고 선생님이 가사를 지으신 “들놀이 가자, 꽃놀이 가자”를 열창하기도 했다. 그때의 그 열렬하고 진지했던 문학분위기는 열혈문학도였던 나의 뇌리에 아직도 화인(火印)처럼 남아있다.     그동안 번중한 일과 창작에 딸려, 불운한 운명의 조롱에 치여 고향에도 자주 들리지 못하고 선생님도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은 나의 문학도 시절의 은사와 같은 존재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여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질시를 이겨내고 6년만에 은둔해 있던 서재를 나와 자치주 “진달래”문학상 시상대에 섰을때 어쩌면 공교롭게도 미더운 선생님과 나란히 서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년전, 선생님의 대하소설 “해란강”이 출간되였을때 나는 룡정으로 달려와 선생님을 찾아뵈였고 “연변문학”에 장문의 인터뷰를 낸적 있었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 손목의 통증을 호소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이 앓고 있는 그 통증의 학명은 “손목 턴넬 증후군”이였다. 빨래등 가사일에 혹사하는 주부들이 흔히 하는 병이였고 또 대하소설 세 부를 펴낸 한국의 소설가 조정래가 앓았던 병이였다. 컴퓨터와 같은 기기(机器)가 아닌 육필로 한글자 한글자 수백만자의 대하소설을 펴낸 선생님이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원주필로 원고를 집필한다고했다. 가벼운 원주필을 쓰면 손목의 통증을 덜수 있을뿐더러 연필을 깎거나 잉크를 채우는 등 번거로움을 줄일수 있다는것이다. 원고지의 필적 또한 선생님처럼 단아했다. 단정한 기운의 글씨가 원고지 칸을 가득가득 채워 원고지가 아주 묵직해 보였다.   각박한 표현 같지만 요즘들어 치렬한 자세와 의식을 지닌 작가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작가혼은 오간데 없고 속도나 경쟁 그리고 의뭉스러운 독선만이 보인다. 돈후한 아량은 없고 녹쓸은 명예의 상패에 기대여 후배들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전배(前輩)들도 보인다.   이러한 독선과 명리만이 란무하는 풍토속에서 선생님과 같이 룡정의 궁벽한 서재에 묻혀 육필을 고수하는 이들은 시대에 떨어진 모습으로 오인(误认)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진정 부박한 속도의 가치에 저항하면서 한 획, 한 획 새겨나가는 철저한 장인정신의 표출이 아닐가! 선생님이 마주 앉아 집필한 낡은 밥상, 겉가위를 알뜰히 씌운 키를 넘는 원고지 더미를 목전에서 지켜보며 나는 문학가의 장인정신이란 무엇인가? 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3년전,  고향 룡정에 대한 궁극적인 사랑과 고향의 력사와 인물을 재다시 발굴, 조명하려는 가상한 각오로 3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를 선생님은 반겨 맞아주셨다. 아픈 몸으로 기어이 술 한잔 사주겠다고 했다. 집에서 불과 사거리 하나를 건너는 짧은 거리도 택시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한 몸이였지만 선생님이 지팽이에 의지해 기어이 나를 잡아끈 곳은 샤브샤브 고기집이였다.   선생님이 평생 고기붙이와는 멀리하고 수도자들처럼 줄곧 소식을 하셨다는데 대해 아는 이가 적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선생님은 양고기를 드셨다.   “혁이, 팔십이 다 돼서 먹어 본 고기맛이 참 좋데그려”    오목눈이 붕어눈이 되고만 나의 경아한 반응에 선생님이 앓는 사람같지않게, 비쩍 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홍소를 터뜨리셨다.   병마에 시달리면서 치료에 배합하기 위해서는 몸을 추슬려야한다는 의사의 식단조절 권고에 수도자처럼 깨끗한 음식습관을 여태 고수해 왔던 선생님은 산수(伞寿)의 나이를 앞두고 “파계”를 한것이였다. 그날 나는 선생님의 강한 생활의지에 다시 한번 감동을 머금었다.     지난 2015년, 선생님의 문학생애 기념 55주년을 맞으며 축사를 도맡은 나는 억석당년(忆昔当年)으로 어젯날 문학스승과의 사제의 정을 다시 떠올렸다. 축사의 말미에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이 읊은 “등왕각서(滕王阁序)”의 한구절을 선생님에게 삼가롭게 드렸었다.   “老当益壮 宁移白首之心(늙은 몸 씩씩하니 백발이 된다고 초심을 움직이랴)” 그렇게 선생님의 건강을 기망했건만 그로부터 2년이 못되여 선생님은 달빛을 즈려밟고 이승의 강을 넌느셨다.    요즘 들어 우리의 문학은 무서운 진통과 부침을 겪고 있다. 그젯날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로 알려진 인끔 높던 내 고향 룡정도 그 물굽이를 피해갈수는 없었다.   하지만 룡정에는 선생님과 같이 수수하나 뿌리깊은 나무처럼 고향땅의 “파수군”을 자청하고 나선 선배들이 계셨다. 은사님과 같은 로익장들의 계시와 가르침이 이어져 내려가는 한 강경애, 안수길, 최서해, 윤동주, 김창걸등 기라성 같은 문호들을 배출한 룡정지역의 문학은 저 일송정처럼 사철 짙푸르게. 저 배꽃처럼 수수하나 강인하게, 저 해란강의 흐름처럼 면면하게 이어나갈것임을 나는 오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은사님을 보내며 “역보역추(亦步亦趋)”라는 성어 한구절을 마음속에 갈무리한다. 또 역(亦), 걸을 보(步) , 추창할 추(趋). “스승이 걸어가면 따라서 걷고 스승이 종종걸음을 하면 따라서 종종걸음을” 했던 스승 공자와 제자 안연의 이야기.   그 이야기처럼 나 또한 우리 문화의 발상지 룡정에서 또 한명의 “파수군”으로 거듭날것을 구구절절 애재(哀哉)의 문구 행간에 담아 서약해본다.   일송정 푸른 솔을 비추는 달이 오늘도 우련히 밝다… … … …   2017년 5월 11일.   “연변문학” 2017년 제6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5    [수필] 빱까 댓글:  조회:2842  추천:18  2016-01-04
. 수필 .     빱 까  - 고양이를 위한 랩소디    김 혁     고양이 '빱까'와 함께 한 여덟 살 적 나의 모습. 이 사진을 수필과 함께 기고하면서 잃어버렸다가 20년만에 어느 고마운 편집에 의해 편집부의 원고더미 속에서 되찾았다.  감회에 넘쳐 수필과 사진을 다시 올려 본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털에 고운 봄의 향기 어리우도다   금방울같이 호 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 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시 공부를 하던 때 습작 본에 베껴두었던 고월 이장희의 의 전문이다.    매양 고양이와 봄에 대해 감각적으로 체득한 이 탁월한 연상의 시를 읊조릴 때면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환영(幻影)으로 본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어제의 커튼을 북- 찢고 뛰쳐나와 내 가슴에 덥석 안긴다. 나와 함께 울고 웃고 뒹굴고 뛰놀며 동년의 능선을 넘었던 고양이 한 마리가...       그 암울했던 70년대의 중기에 나는 용정의 한 소학교의 3학년생 이였다.    검찰기관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가 로 낙인 되어 악명 높은 간부학교(중국의 문화혁명시기 불온분자들을 개조하던 감옥)에서 치른 역고를 빌미로 몇 년이고 병원에서 붙박이로 계셔 화기를 잃은 집안은 건조했고 어두웠으며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학교 일에 바쁜 몸이라 아버지의 병시중을 위해 어머니는 도문에 있는 외할머니를 모셔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고리끼의 중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인자하디 인자하신 외할머니가 오면서 왕골로 결은 들 가방에 무언가 넣어 가지 고왔다.    그것은... 고양이였다.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귀가 세모지고 눈매가 날카롭고 동침처럼 빳빳한 수염아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온몸은 오목처럼 까맸으나 발만은 운동화를 신은 듯 하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체념한 듯 들 가방 모서리에 턱을 얹고 생소한 환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고양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고양이가 낮으나 모가 실린 소리로 인사처럼 울었다. 나도 고양이를 보고 반가움에 말(馬)처럼 힝- 하니 웃었다.    앙증맞게 귀여운 작은 몸체의 고양이는 참담한 기운이 돌던 우리 집안에 작지 않은 생기를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만 그 고양이에 깜빡 환혹(幻惑)되어 버렸다.      우선 고양이의 이름을 짓노라 잔 속을 끙끙 앓았다. 그때까지 만도 게딱지같은 초옥(草屋)들이 한 움큼 속에 들어앉은 듯한 현 소재지였던 용정에는 시골마을과 진배없이 짐승을 치는 집들이 적지 않았고 고양이의 이름이래야 《미미》,《묘묘》따위가 고작이었다.    자기 집 아이의 이름을 따서 고양이의 이름을 《철호》라 툽상스럽게 지은 집까지도 있었다.    열 개도 더 되는 이름을 놓고 좋은 과일 고르듯 퉁긴 끝에 나는 고양이의 이름을 《빱까》라고 지었다. 그것은 당시 십분 유행되었던 러시아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였는가》중의 주인공의 아명을 본 딴 것 이였다. (썩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러시아 소설 속의 강직한 주인공의 이름을 시사 받은 나의 고양이는 원체 한 마리의 암코양이였다.)   《역시 교원 집 자녀가 다르긴 달라.》    고양이의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골 살을 찡그린 건 외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애가 코냥이 이름을 웨 이렇게 바쁘게두 지었누?》   외할매는 《빱까》라는 이름을 번지지 못해 고양이를 《바가》,《바가》하고 불렀다.      그때 현 소재지의 아이들에게서는 이산한 괴질(怪疾)이 돌았다. 임파(淋巴) 염증으로 저마다 턱 아래와 목 부위가 찐빵처럼 부어 올랐는데 항간에서는 그 병을 《돼지 병》이라 하였다. 민간 토방 법으로 병을 치료한답시고 목에 돼지고기의 비곗살을 가제를 대여 붙이곤 했다. 병이 남에게 전염 되였기에 병에 걸린 아이들은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나도 그 병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출근하고 할머니는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느라 병원에 붙박여 있었기에 빈집에서 패잔병처럼 턱을 동이고 낭패 상이 된 나를 동반해 준 것은 《빱까》뿐이었다.    함께 고무공을 굴리기도 했고 수염이 뺨에 대여 간질간질해 나도록 고양이와 머리를 맞대고 알고도 모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배고프면 나는 밥상에서 고양이는 문가에서 옥수수밥이라도 맛나게 먹었고 졸리면 따스한 가마 목 위쪽에 활처럼 꼬부리고 다정한 형제처럼 누워 자기도 했다.    《빱까》가 동무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지겨운 홀로의 시간을 나는 어떻게 지냈을는지 모른다. 《빱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는 목에 붙였던 비계덩이를 《빱까》의 점심 한끼로 내 주었다가 어머님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당시는 옥수수밥과 옥수수떡이 주식 이였고 고기붙이는 일년 치고 설 명절이면 겨우 맛볼 수 있었던 시국, 그렇게 돈냥을 부셔 《약》대용으로 사온 고기를 고양이밥으로 홀랑 대접했으니 꾸지람을 받을 법도 했다.       《빱까》에 대한 나의 정은 날로 도타워만 갔다.  오밤중에 밖에 나갔던《빱까》의 미약한 울음소리도 오직 나만이 헤아려 듣고 문을 열어 주군 했고《빱까》는 어김없이 나의 잠자리 곁에 방석과 내 털모자로 꾸며준 준 잠자리에 기여 들어 자군 했다. 《빱까》는 추우면 나의 이불 속에 곧잘 기여 들곤 했다.  설 명절에 일가친척이 한 구들 미여 지게 모였을 때도 어김없이 내 품만을 찾아 드는《빱까》를 보고 모두들은 고양이와 참으로 자 별난 사이라고 혀를 차군 했다.       피폐했던 당시의 문화환경에서 중국에서 크게 히트를 친 영화 한 부가 있었다.    북한예술영화 《꽃 파는 처녀》였다. 영화를 눈물을 흘리며 연거푸 보았던 나는 이렇게 좋은 영화를 《빱까》에게도 보여야지 하고《빱까》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갔다. 새끼를 품은 캥거루처럼《빱까》를 외투 속에 품고 갔다.    영화가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여 주인공의 불우한 운명을 두고 사처에서 훌쩍이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에 섞여 간간이 고양이 울음소리도 새여 나왔다. 관중들의 경아(驚訝)와 불만에 찬 눈길 속에 영화관 관리일군에게 귀를 잡혀 나는 문밖으로 《축출》당하고 말았다.      이와 유사한 일은 후에도 있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그 사이 훌쩍 웃자란  《빱까》를 구경시키러 갔다가 간호원의 사이렌 같은 비명 속에 허겁지겁 병동을 뛰쳐나온 적도 있다. 나는 그 무슨 남의 장독대를 깨뜨린다던가 길가는 계집애들 머리 태를 쥐여 당기는 그런 악동이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도 본지가 무척 오래된 《빱까》를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었을 뿐 이였다.       어느 해 여름, 우리가 쓰고있는 사기그릇을 만들어 내는 당산(唐山) 이라는 곳에서 세계를 놀래 운 대 지진이 일었다. 그 지진의 여파로 우리 이곳에서도  《대지진 설(說)》이 떠돌아 모두들은 공포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 즈음 소조공부를 하면서 주제모임으로《지진이 나면 누구부터 구하겠는가?》하는 대 토론이 벌어 지였다.    누구는 열사 유가족 할머니를, 누구는 영예군인 아저씨를, 누구는 모택동 주석의 초상을 맨 처음 구하겠다고 격앙된 목청들이었다. 그런데 나만은 고양이 《빱까》를 구하겠다고 말해 《계급입장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학급 간부들에게서 질책을 받았다.    초동머리 애들에게서까지도 정치와 불신의 분위기를 짙게 체취 할 수 있었던 그 기형의 세월에 남의 집 양자로 자라면서 내성적이고 섬약한 기질을 가졌던 나에게서《빱까》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친구였으며 나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값진 보물이었다. 하여 동네의  코 북데기 하나가 당시 유행되던 본보기 극(樣 戱)《홍등기》음악이 든 축음기판 한 장, 용감한 팔레스티나유격대어린이의 사적을 그린 그림책 한 권, 요지경 하나, 그리고 살구 씨 백 알로《빱까》를 바꾸려 했을 때 그 풍성한 조건 앞에서도 나는 왜놈들의 조건을 물리치고 사형장으로 나가는 중국영화중의 혁명자들 마냥 단연 그 유혹의 《물물교환》을 거절해 버렸다. 그때 나는 동네에서 《책이 많은 아이》혹은《고양이가 있는 집 아이》로 불렸다.    《빱까》의 그 자그만 몸집이 봄 들어 신속하게 붇기 시작했다.《빱까》의 배를 만져보더니 할머니는 고양이가 임신했다고 했다.   《임신이라니요?》   경아의 빛을 띄고있는 나의 볼을 다독여 주며 외할머니는《빱까》가 곧 새끼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맙소사! 《빱까》하나만도 용용 귀여워 죽겠는데《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가 몇 마리 또 생겨난단 말인가! 지나친 기쁨에 나는 삭신이 막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빱까》를 꼭 안고 집안을 맴돌며 열 뜬 사람처럼 당시의 유행가를 목청 깨져라 불렀다.     《북경의 금산에 금빛해살 비추네    모주석 그이는 금빛의 태양》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 따라 까닭 모를 기묘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자 윗방에는 난데없는 종이박스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속에 맙소사!《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 네 마리가 눈도 뜨지 못한 채 가지런히 누워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양이들은 꽃잎 같은 입술을 열며 미약한 소리로《애웅, 애웅!》울어 댔다. 외할머니는 병원의 아버지에게 보낼 명태 국에서 많이 덜어 밥을 말아《빱까》에게 내 주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경사가 난 집 같았고 숫제 명절기분 이였다. 동네에서도 희한해 하며 구경을 왔고 득의양양한 기분으로 나는 동네아이들에게서 살구 씨 열 알 씩 예물로 받고서야 새끼 고양이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일주일 가량 되자 제법 구들에서 뛰어 놀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책상다리며 이불장 모서리를 긁어 자리를 내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았다.     병상에 있던 아버지도《빱까》가 《4태자》를 낳은걸 축하해 병원의 링게르 주사 줄을 결어 만든《금붕어》손 노리개를 나에게 보내 왔다. 그《금붕어》에 줄을 매여 책상모서리에 달아 놓으니 새끼고양이들은 물고기 사냥이라도 하는 듯 《금붕어》를 툭툭 건드리며 재롱을 부렸다. 그 귀여운 새끼 고양이들이 다치면 부서질라 나는 감히 시름 놓고 품에 안아 보지조차 못했다.      그러다 스무날, 꼭 스무날만 이였다. 새끼고양이에게 온 정신을 앗겨있는 나의 애련한 마음에 강타를 안겨준 변고가 있었다.    하교하여 돌아와 보니 새끼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고 따져 물으니 외할머니가 어쩔 바를 모르며 더듬이며 말했다. 새끼고양이가 잃어 졌다는 것 이였다. 나의 눈앞에서 진짜배기로 그 풍문의 지진이 이는 듯 했다. 나는 책가방을 멘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황소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점심 녘에 햇볕 쪼임을 시키느라 내놓았던 고양이들이 뒤 바자 틈새로 사라진 것 이였다.       새끼를 잃은 《빱까》는 지붕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가슴 긁는 소리로 울어댔다. 《빱까》는 지붕 위에서 목청 짜내 울고, 나는 지붕아래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우리 집 뒤 바자와 인접된 곳은 거울 틀이며 상장 틀을 생산하는 공예미술공장이었다. 그곳 노동자들이 고양이를 채여 간 것 같다고 단정하고 할머니는 공장장을 찾아가 따졌다. 매일이고 울음을 달고있는 나의 지청 구에 밀려 할머니는 여러 번 공장지도부를 찾았고 새끼고양이를 찾을 길 없는 공장 측에서는 그 성화에 못 이겨 적당한 배상금을 내 주었다. 새끼고양이 한 마리에 50전씩 쳐서 도합 2원을 내 주었다.    그래 고작 이것이 새끼를 잃은《빱까》의 아린 상처와 눈물에 대한 보상이란 말인가? 나는 코 잔등이 시큰해 나서 울먹울먹하며 그 돈을 받았다. 그 돈을 특별히 아껴 보관해 두었다가 당시의 아동명작 《밤중에 우는 닭》을 샀다. 그 나의 동년의 정감이 배인 책이 지금도 나의 서가의 안쪽 깊숙이 꽂혀져 있다.     내가 소학을 마칠 무렵, 지긋지긋한 투병생활4년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버렸다.    아주 훌륭한 공무원 이였던 아버지인지라 용정 뿐 아니라 외지에서까지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2백여 명을 넘겼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변고와 그렇게 많이 몰려 든 사람들, 슬픔에 자기를 던지고 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놀란 나머지 나는 울음조차 울지 못했다. 그저 현관 구석 쪽에서《빱까》를 품에 안고 고양이와 사람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서 옹송그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고향의 말발굽산 기슭에 묻었다.    장례식을 치르던 날, 나는《빱까》을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외할머니가 꾸짖었지만 왜였던지 부득부득 우겨가며 《빱까》를 산에까지 데리고 갔다.    붉은 흙을 헤치고 아버지를 묻었다. 봉분(封墳)을 쌓은 뒤 검찰계통의 아버지의 옛 친우들이 권총을 빼들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랐던지《빱까》가 내 품에서 후닥닥 빠져 나와 산자락 아래로 내 뛰기 시작했다.     《빱까, 빱까!-》    갈린 소리를 지르며 나는 덴겁해《빱까》의 뒤를 쫓아갔다. 나무그루에 걸려 자빠지고 풀대 가지에 손을 긁히면서도《빱까》를 쫓아갔다.    그러다 어느 한 커다란 무덤 앞에서《빱까》가 멈춰 섰다. 멈춰 서서는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오는 나를 말똥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때는 늦가을이었고 추위 때문 이였는지 아니면 놀라움 때문이었던지《빱까》는 몹시도 떨고 있었다. 나는 덮쳐 가《빱까》를 품에 안았다. 그제야 하늘같은 슬픔이 감지되었고 나는 못나게도 남의 무덤을 바람막이로 삼고 앉아 《빱까》와 함께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새끼를 잃은 뒤《빱까》는 몹시 수척해 졌다. 일전과는 달리 사람 곁에 오기도 싫어했고 고기 국에 밥을 말아 주어도 잘 먹지를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 며칠 안 되어《빱까》는 집을 나가 버렸다.    하루가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빱까》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기재에 의하면 고양이가 사람 집에 살고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5천년 이상 된다고 한다. 이면에서 개에 비해서는 4만 5천년이나 늦다고 한다. 성경에도 고양이를 언급한 구절만은 없다.    그러나 동년의 이 한 단락의 정감의 경력 때문인지 나는 동물들 중에서 고양이를 가장 편애하는 쪽이다.    인간과 가장 도타운 신변의 또 다른 동물인 개에 비해서도 그렇다. 어찌 보면 고양이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길들여지지 않았다. 한 두 마디의 호령에도 엎디고 기고 혀를 빼무는 개에 비해볼 때 고양이의 자존은 더 높은 것이다. 고양이와《사촌지간》인 호랑이며, 치타며, 사자들만 봐도 고양이 가문의 위용이 엿보인다. 아직도 그들과 비슷한 《야성》을 고양이는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야성》은 인간이 그들에게 들 씌운 정의이고 그들 쪽의 정의를 보면 그것은 곧바로 인간이면 너나가 갈구하는 자유인 것이다.    흔히들 사람의 성격을 동물에 빗댈 때 사회 친화적 인간형을 《개 과(科)》로 분류하고 홀로 서기 인간형을《고양이 과》로 분류한다. 하여서인지 전설이나 이야기, 지어 아이들의 그림영화에서 까지 고양이는 주인공 역을 놀지 못한다. 어느 시공간, 어느 짐승의 집단에까지도 인간들과 꼭 같은 사회질서와 선악대립을 부여하고《개 과》의 영웅을 선호해야 직성이 풀려하는 사회의 진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보면 고양이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개성과 매력, 더 많은 낭만과 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유아적인 발상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던 동년에서 멀리 지나온 내가 의연히, 그리고 다시금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다.      촬영에 애호가 있었던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갈매기》표 사진기로 나와《빱까》가 함께 있는 장면을 남겼다. 사진 속의 여덟 살둥이인 나와 《빱까》는 유난히 반짝이는 눈매를 하고 앞쪽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색 바랜 사진조차 지금은 잃어버려 없다. 모 잡지사에서 《인간과 동물》기획특집을 꾸리면서 나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적은 글을 실으면서 그 사진을 그만 분실해 버렸던 것이다.    《빱까》는 이제 그저 잡지 속에 흐릿한 영상으로만 남았다.    매양 그 잡지를 뒤적여 낼 때마다 나는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진《빱까》의 이름을 되 뇌여 보군 한다.    내 동년의 꿈과 내 동년의 정감을 지니고, 부식된 기억의 어둠 속을 홀로 바람처럼 가버린 한 마리의 영물(靈物)을...   오, 나의 사랑 나의《빱까》!   "청년생활" 1995년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4    강가의 오얏나무 무성하여라 댓글:  조회:2020  추천:11  2015-08-07
. 축사 . ​   강가의 오얏나무 무성하여라 - "향토작가 리태수 문학생애 55주년 및 작품연구세미나"에서   김 혁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것은 지난, 85년의 어느 초여름이였습니다. 나의 양모와 소설가의 사모님이 한 학교에서 근무하셨기에 그 연줄로 나는 행운스럽게 당시 “천지”, “아리랑”등 여러 간행물에 중편소설들을 다량으로 발표하고 장막극과 가사도 써내시며 문단에 널리 알려진 유명 소설가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자택에  들어섰을때 선생님은 안방에  엎디여서 한창 집필을 하고 계셨습니다. 한때 선생님은 엎드려 글 쓰시는 남다른 창작방식을 오래동안 고수해 왔음을 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어서자 선생님은 쓰던 글을 접어두고 맞아주셨습니다. 유명 소설가를 만난다는 설레임과 어려움에 한밤을 설쳤는데 선생님은 그렇듯 온화하고 부드럽게 절 맞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리태수 선생님과 저의 첫 만남이였습니다. 그후로 나는 때때로 소설 초고지를 들고 선생님을 찾았고 바쁜 창작의 와중에도 선생님은 필을 놓으시고 나의 설익은 글들을 까근히 읽어주셨습니다.   어느 한번 룡정의 한 소학교 교실에서 소설합평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십대의 어린 나이인지라 내가 들고 간 소설은 편집들의 빈축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인것도 있었거니와 종교색채까지 띈 소설이여서 나중에 편집들은 표절 내지 도작으로 의심하며 몰아 갔습니다. 이때 선생님께서 상을 탁 치면서 강경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혁이의 초고들을 좀 봤는데 아주 력량이 있는 애더구만. 내가 이 애의 부모와 일면식이 있어서가 아니요. 난 혁이가 꼭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리라 믿소” 그때 나는 그야말로 왜틀비틀 걸음마 타던 아이가 큰 나무둥이에 의지해 넘어지지 않은듯한 심정이였습니다.   드디여 열아홉살 나던해 나의 처녀작이 고고성을 울렸습니다. 선생님은 그렇듯 기뻐하시면서 우리 집을 찾아 주셨습니다.  김재권 선생님, 오흥진 선생님, 전광하 선생님, 황병락 선생님 등 룡정의 중견 문인들과 함께 우리집 까지 찾아와서 밤늦게 까지 축하주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날은 그야말로 어린 나의 성인식이요, 문학에로의 통과의례같은 축복의 날이였습니다.   1986년 나는 룡정의 젊은 문인들과 함께 문학협회를 발족시켰습니다. 당시는 소박받는 요즘의 풍토와는 달리 문학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룡정 주위의 조양천, 로투구, 지신, 삼합, 백금 지역에서 문학도들이 거의 백명가까이 협회에 가입했고 선생님을 비롯해 김재권 선생님, 전광하 선생님은 흔쾌히 협회의 고문을 맡아 주었습니다. 우리가 경필글씨로 써서 프린트 해낸 “희망봉”이라는 협회지를 까근히 읽어 주셨고 소설 합평회에도 참가해 문학도들의 글짓기에서의 병소를 족집게처럼 집어 내 주셨습니다. 그후 선생님은 또 룡정에 “보름회”라는 문학협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지금은 보름달처럼 이즈러져 있지만 언젠가는 만월 처럼 둥글게 되리라는 깊은 뜻이 담긴 선생님이 친히 지은 동아리의 이름이였습니다. 그때 연길 “길림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밤늦게 차를 타고 보름에 한번씩 열리는 “보름회” 작품합평회에 빠짐없이 참여하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알기 쉽고 유머섞인 단평을 경청하고 설익은 작품을 탁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동안 번중한 일과 창작에 딸려, 불운한 운명의 조롱에 치여 고향에도 자주 들리지 못하고 선생님도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은 나의 문학도 시절의 은사와 같은 존재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질시를 이겨내고 6년만에 서재를 나와 자치주 “진달래”문학상 시상대에 섰을때 어쩌면 공교롭게도 미더운 선생님과 나란히 서서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수년전, 선생님의 대하소설 “해란강”이 출간되였을때 나는 룡정으로 달려와 선생님을 찾아뵈였고 “연변문학”에 장문의 인터뷰를 낸적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 손목의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이 앓고 있는 그 통증의 학명은 “손목 턴넬 증후군”이였습니다. 빨래등 가사일에 혹사하는 주부들이 흔히 하는 병이였고 또 대하소설 세부를 펴낸 한국의 문학거장 조정래가 앓았던 병이였습니다. 컴퓨터와 같은 기기(機器)가 아닌 육필로 한글자 한글자 수백만자의 대하소설을 펴낸 선생님, 선생님이 마주 앉아 집필한 낡은 밥상, 겉가위를 알뜰히 씌운 키를 넘는 원고지 더미를 목전에서 지켜보며 나는 문학가의 장인정신이란 무엇인가? 를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해,  고향 룡정에 대한 궁극적인 사랑과 고향의 력사와 인물을 재다시 발굴, 조명하려는 가상한 각오로 3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를 선생님은 반겨 맞아주셨습니다. 아픈 몸으로 기어이 술 한잔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불과 사거리 하나를 건너는 짧은 거리도 택시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한 몸이였지만 선생님이 지팽이에 의지해 기어이 나를 잡아끈 곳은 샤브샤브 고기집이였습니다. 선생님이 평생 고기붙이와는 멀리하고 소식을 하셨다는데 대해 아는 이가 많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선생님은 고기를 드셨습니다. “혁이, 팔십이 다 돼서 먹어 본 고기맛이 참 좋데그려”    병마에 시달리면서 치료에 배합하기 위해서는 몸을 추슬려야한다는 의사의 권고에 수도자처럼 깨끗한 음식습관을 고수해 왔던 선생님은 산수(傘壽)의 나이 팔십을 앞두고 파계를 한것이였습니다. 그날 나는 선생님의 강한 생활의지에 다시 한번 감동을 머금었습니다.   그 무슨 사주팔자를 점치는 역술쟁이가 아니지만 요즘들어 선생님의 리.태.수 석자 함자를 두고 나름 그 의미를 풀이를 해보았습니다. 여기서 성씨 리(李)는 오얏 리로 나무를 형용합니다. 또 남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풀이 됩니다. 태(泰)는 클 태로 넉넉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수(洙)는 산동성 곡부 지역의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고 후에 묻힌 곳의 이름으로 강을 의미합니다. 그러고보면 선생님의 함자에는 크고 넉넉한 강과 높은 나무가 있는 곳, 그 곳에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다는 의미로 풀이해도 되겠지요. 엉터리 역술인이라 말해도 좋지만 전 꼭 그렇게 풀이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 함자에는 산더기에 사과배 나무 무성하고 그 아래로 해란강이 굽이쳐 흐르는 배산림수(背山臨水)의 룡정의 풍수와도 꼭 같은 형국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고향 룡정에서 수수하나 뿌리깊은 나무처럼 고향땅의 지킴이로 한평생을 보내셨습니다.   요즘 들어 우리의 문학은 무서운 진통과 부침을 겪고 있습니다. 그젯날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로 알려진 인끔 높던 룡정도 그 물굽이를 피해갈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과 같은 로익장들의 계시와 가르침이 있는 한 강경애, 안수길, 최서해, 윤동주, 김창걸등 기라성 같은 문호들을 배출한 룡정지역의 문학은 저 일송정처럼 사철 짙푸르게. 저 배꽃처럼 수수하나 강인하게, 저 해란강의 흐름처럼 면면하게 이어나갈것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진정 두손 모아 선생님의 건강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7월 24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3    달마도 그리기 댓글:  조회:2821  추천:17  2015-06-25
. 수필 .     달마도 그리기   김혁    어릴적 나의 꿈은 화가였다. 베레모를 쓰고 색조판을 들고 현란한 색감을 붓에 듬뿍 묻혀서는 진한 붓 터치로 캔버스우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화가들이 그렇게 우러러보일수가 없었다.   네거리의 선전화나 영화포스터가 새로 바뀌면 정신없이 달려나가보군 했다. 그림을 좋아했기에 련환화(連環畵)에 넋을 홀딱 바쳤다. 련환화보기는 내 동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내용의 그림책에도 판본이 다르면 사들여 그 그림기법에 대해 비교해보았다. 그렇게 련환화를 저그만치 2천 여권을 사들였다. 그때 나는 룡정에서 책이 제일 많은 아이로 통했다. 그 그림책들이 지금껏 내 서재의 깊숙한 곳에 색바랜채 꽂혀져 있다.   중학교적에는 세계명화에 심취되여 잡지의 뒤면에 곧잘 실리곤 하는 명화들을 오려내여 스스로 마련한 앨범에 붙이곤 했다. 신문사에 입사한 뒤 기거했던 숙소 벽은 내가 그린 50여폭의 그림이 붙어있었다. 액자도 없이 회화련습본에 그렸던 그림들을 찢어내여 붙인 그림은 비록 엉성할망정 짜장 한차례의 화전을 방불케하였다. 80년대 초창기의 “길림신문”에는 내가 그린 몇 폭의 만화와 삽화도 실려있다. 나의 시 창작노트는 아예 그림 습작본이라는 쪽이 더 적합할것 같다. 시 먼저 그림이 떠올라 그림여백에 시를 써넣군 했던 것이다. 몇해전에 출판되였던 나의 에세이집과 중편소설집의 겉봉도 나의 창의에 쫓아 내가 선택한 그림으로 디자이너들이 완수한 것이다. 언젠가 나의 창작집에 나절로 삽화를 그려넣어 펴내는 것이 나의 제일 큰 소망이다.   다빈치요, 피카소요, 반 고흐요, 레노아요, 포비즘이요, 다다니즘이요 하고 미술가들의 이름과 미술류파들을 지금도 곧잘 외워 낼수 있지만 허나 나는 끝내 화가의 길을 걷지 못하고 말았다. 그저 2천여권의 련환화와 스스로 마련한 수 백장의 명화와 응접실에 걸려있는 세계명화모조품이 이루지 못한 나의 화가의 꿈을 달래주고 있다. 그렇게 화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 해서였던지 올곧게 직시하는 와중에도 비뚤어져나가는 세상사에 대해 곤혹을 느낄때가 많다. 공백지우에 그저 점과 선을 잘 조합시키면 될수 있겠다고 믿었던 세상사가 때론 인상파처럼 선명하게 안겨오다가도 때론 추상파처럼 몽롱하게 안겨 왔도 때론 다다니즘처럼 변형되여 때론 포비즘처럼 흉측스레 안겨 오기도하였다. 그 변화다단한 세상사를 아마추어화가로는 그 양상을 다 그려내는수가 없었다. 또 캔버스우에 기본을 무시하고 틀리게 그어지는 금과 란폭하게 칠갑되는 어두운 색채에 당혹해하기도 했다. 그런 엉성한 그림들이 도금칠한 액자에 들어 버젓이 걸리는 것을 경악하며 보기도 했다.또 금전의 권력에 힘입어 조야한 자기그림으로 명리를 얻는 모습도 보았다. 그에 당혹하고 그에 고뇌하고 그에 분개하기도 했지만 내 아마추어의 작은 붓 자루로는 그러한 것들을 시정해주기에는 너무 힘에 부쳤다. 따라서 나의 붓은 그러한 화풍속에 더불어 더러워지고 모지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붓 자루를 구석에 처박고 말았다.     그러다 아마추어일망정 다시 그림에 생각이 미친것은 어느 날 헌책가게에서 “달마흠상백도(達摩欣賞百圖)”라는 서법입문서를 골라 쥔 뒤로부터였다. 달마에 대해서는 면벽구년(面壁九年)의 법력이 뛰여난 진인(眞人)으로 알쏭달쏭 알고있었다. 허나 천태만상의 달마도가 담겨져 있는 책자를 들고 나는 그만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법력의 힘에 빠져들었던가?  입가에 웃음을 문 달마, 졸린 듯 반쯤 눈을 감은 달마, 화가 난 듯 눈을 딱 부릅뜬 달마, 천태만상의 달마의 모습은 나의 고단하고 얄팍한 심성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나는 순간에 그 그림 장들이 주는 신묘한 힘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헌책가게의 책치고는 엄청 비싼 책을 나는 주저없이 사들었다.그 리고 그날로 집구석에 처박았던 붓과 먹통을 찾아 내였다.   이렇게 많은 초상 중에서 대체 어느 것이 달마의 진짜배기 얼굴일가? 붓을 잡고 나는 오래도록 망설이였다. 모든 고난을 거치고 이기고 사대개공(四大皆空)의 경지를 이른 달마의 얼굴은 예술의 구체화와 평면의 립체화를 통해 오묘하게 표현되고 또 속인들의 마음속깊이에 있는 성정과 합치여 끝없는 모양을 이루고있었다.   나의 속안에 보이는 달마는 대체로 대머리에 부릅뜬 눈 우뚝한 코, 한 일자로 다물린 입과 통통한 볼 그리고 무성한 수염과 펄럭이는 도포가 전부였다. 달마도에 흥취를 가지면서 달마의 생평을 기록한 불교전서를 다시 찾아 자세히 읽었고 내심 자괴를 금치 못했다. 달마는 40여 년간 반야다라를 스승으로 삼아 일점의 게으름이 없이 수양을 쌓았고 60세에도 로구를 끌고 바다와 산을 넘어 중국에 와서 마침내 천고불멸의 종파를 세웠고 금강불괴(金剛不魁)의 정신을 기록하였다. 그 거룩한 뜻을 나 같은 그림의 아마추어가, 생활의 아마추어가 어찌 그림에 불어 넣을수가 있을가?       전문가들은 그림중에서 종교화를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예수를 그리거나 석가모니를 그리거나 관음보살을 그리거나 응당 그들의 뜻, 사상, 감정 등을 리해하고 그려야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호랑이를 그렸는데 고양이가 되고 백조를 그렸는데 집오리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 달마도입문서는 비록 모범을 알아도 필법을 소홀히 할 수 없는바 진짜 달마를 그리려는 사람은 가부좌하고 앉아 오룍오욕(五六五慾)의 마음을 몰아내고 붓을 잡기 바醮鳴?글머리에 씌여져있었다. 붓, 먹, 종이, 벼루는 단지 죽은 물체이고 눈과 손은 자신의 노예임으로 이러한 것이 하나로 되었을때에야만 비로소 좋은 달마도를 그려낼수있다고 한다. 입문서의 가르침에 따라 한 장 또 한 장의 달마도를 그리면서 나는 달마의 얼굴의 무궁한 변화를 더듬는 중에 기쁨을 찾고 차분해지는 심성을 느꼈고 그런 마음의 변화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나는 불화 (佛畵)를 그려 구도하는 이들의 성심을 본받아 매일 한 장씩 천장의 달마도를 그리기로 크게 마음먹었다.   습작기이기에 지금껏 나는 달마도를 신문지우에 그린다. 불공스러운 처사인지 모르지만 .화선지우에 그리는 사치를 부릴만한 자격도 없는 나임을 자각하여 그런 불공스러운 시작을 떼였다. 훌륭한 화가는 내가 어떤 것을 그려낼수 있다는 자부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려낼수 없다는 렬등감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자격지심을 누르며 나는 매일같이 달마도를 열심히 그렸다. 매일 내가 그리는 그림은 하나의 달마이지만 너나가 다르다. 내 그림의 수준의 변화로 인해서가 아니다. 때로 마음이 번거로워, 때로 되게 기분 좋은 일이 있어, 때로 까닭 없이 울적하여, 때로 술에 만취하여... 그때마다 내가 그린 달마도는 나의 속된 심경을 그렇게도 신통히 비쳐준다. 한번은 취중에 붓을 잡고 그린 달마도가 이튿날 숙취에서 께여 보니 그렇게 엉망일수가 없어 자신을 심히 꾸짖은 적이 있다. 이렇게 달마도는 내 일상을 가계부처럼 기록한다. 내 마음의 무늬를 년륜처럼 새긴다.   때론 나는 달마도 그리기를 시작한 것을 볼썽사납고 고단한 자신의 삶 살이를 도피하기 위한 자기 최면이 아닌가 자문도 해보았다. 허나 어지럽고 무모하고 고통스런 세상에서 자기 최면도 괜찮은 극복방법일 것이다. 종이우에 문질러대는 수많은 점과 선, 한없는 공간, 그에 대한 추구, 시도, 실패와 극복,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련습을 회화라는 측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게는 아직 여느 화가들처럼 그럴듯한 호도 없고 락관(落款)도 없다. 허나 그 어느 날인?깨끗한 화선지우에 지대지강(至大至剛)의 달마의 참모습이 커다랗게 그려지고 그 곁에 나의 호와 락관이 숙명처럼 새겨질 때를 몽상하는 나다. 하여 나는 오늘도 나의 마음을 다잡는다.   종이를 편다. 먹을 간다. 붓을 잡는다. 달마도를 그린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2    오! 류형(柳兄), 플로라이드 사진속의 류형! 댓글:  조회:4985  추천:30  2011-03-15
. 추모수필 .   오! 류형(柳兄), 플로라이드 사진속의 류형!     김 혁     경인년이 막 시작되던 어느 추운 아침, 매일의 일과처럼 컴퓨터에 마주앉아 메일함부터 열었다. 류연산 선배에게서 온 메일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열었고 다음순간 나는 얼음방망이에 맞기라도 한듯이 그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의 입으로는 부지중 주체못할 비명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동안 무사하오? 물론 무사치 못하리라 알고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도 시련을 주었소. 지난 11월 23일 연변대학 복지병원에 입원했소. 가볍게 치료하면 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27일 암 진단을 받았소. 28일 연변병원에서 다시 담도관 암으로 판정되였소. - 2010년 1월 3일 일요일.   선배에게 향한 새해문안으로 예쁜 엽서를 골라 축하메세지를 일껏 작성해 보내고 좋은 답복 기다렸는데 그 답멜의 내용은 지극히 충격적이고 가혹한것이였다. 그리고 그뒤로 일년하고 18일만에 류선배는 몸소 답사했던 “혈연의 강”을 거슬러 영원히 돌아로지 못할 강을 건너가고 말았다.   류선배의 이름을 맨처음 접한것은 문학도시절이였다. 당시 김훈등 나젊은 소설가들을 위시로 한 소설가들의 동인회가 발족되였는데 우리 문학도들에게는 그야말로 선망의 협회였고 기라성같은 회원들은 존경의 대상이였다. 동인회를 소개하는 “문학과 예술지”의 뒤 표지에서 처음 류선배의 모습을 보았다. “문학과 인생의 길을 연소하고 싶은 마음에 부모가 지어준 이름의 연(然)자를 사사로이 불타오를 연(燃)자로 고친 나”하고 문학과 인생에 대한 호언을 적은 자기소개서가 사뭇 인상적이였다.   선배와의 관계가 더욱 도타워진것은 95년경 연변일보 문예부 기자로 뛰던 시절 선배와 인터뷰를 가지면서부터였다. 그때 문예란에 “젊은 작가들의 현주소”라는 제명으로 류연산, 최홍일, 우광훈 세작가들을 묶어 인터뷰를 하게 되였다. 그때 나는 류선배가 우리민족의 력사를 소급하는 글들을 본격적으로 써보련다는 작가적 립지에 대해 알게되였고 그로부터 불과 몇해뒤에 그의 대표적인 기행문 “혈연의 강”이 세상에 나왔다.   그후 류선배가 편집을 맡았거나 기획한 “아리랑”문학상과 흑룡강신문사 “한얼”패 문학상을 내가 거듭 수상하면서 나는 류선배와 자연히 문학선후배의 도타운 관계로 우정을 쌓아갔다.   그동안 류선배의 작가생활은 가히 폭발적이였고 휘황했다. 작품을 발표하는 족족 이슈가 되였고 많은 애독자를 모았다. 잦은 발로 뛰고 방대한 자료를 추려낸 작품들은 어느것 하나 허투로 다루어진 작품이 없어 다작(多作)이지만 들쭉날쭉 없이 고른 성취를 보여주었다. 우수한 작품일수록 사회증언적 가치도 풍요하다는 문학사회학의 명제를 그의 작품들은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학의 위상이 땅바닥에 떨어져 문학을 미련없이 버리고 있는 사람들도 속출하고 있는 지금의 풍토에서 누구도 해낼수없는 함량이였고 무게였다.   나의 첫 작품집은 류선배에 의해 묶어져 나왔다. 1990년대 국문이 열리면서 온 사회는 출국붐에 들떠있었다. 그에 따른 불협화음과 진통도 컸다. 일부 몰지각한 일부 한국인들에 의해 중국전역에서 무려 3만여명이 3억이라는 막대한 사기피해를 당했다. 어느 하루 류선배가 나를 차집에 불렀다. 차집에는 류선배외에도 초면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몰골이 꾀죄죄한 그 사람들은 바로 사기피해의 덫에 치여 인생이 쑥밭이 된 불운한 피해자들이였다. 그들은 류선배의 작가라는 신분을 알고 그의 손목을 감쳐 붙들고 넋두리를 해대고 있었다. 그날 류선배는 나에게 특종기사감이라며 사기피해문제에 관한 글을 써볼 의향이 없냐고 물어왔다. 그러면서 그동안 자신이 수집해두었던 피해자들의 고소서와 배경자료들을 한 가방 가득 나에게 넘겨주었다. 글재주도 재주겠지만 민중의 대변인인 기자의 신분으로서의 내가 쓰는것이 가장 합당하다는것이였다. 류선배의 지지와 청탁에 등을 밀려 나는 이 엄청난 작업에 언감 필봉을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여동안 수십곳을 돌고 수백여명을 만나면서 한국인사기행각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추적해 보았고 드디여 “코리안드림”에 흔들리고있는 우리의 공동체 사회를 진맥하는 장편르포를 펴내게 되였다. 류선배의 진지한 청탁과 성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장편기사를 채 마무리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라는 제명의 장편르포는 “청년생활”지에 1년간 련재되였고 그후 류선배의 기획, 편집으로 단행본으로 묶어져 나왔다. 당시 조선족사회의 최대열점을 건드린 이 장편르포는 그해 “청년생활”화연문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흑룡강신문사 “한얼”표 실화문학 대상을 몇해후에는 또 자치주 최고문예상인 “진달래” 문예상도 거듭 수상했다. 또한 이 르포집은 피폐한 오늘의 출판풍토에서 무려 5천여권이 팔리는 전후무후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두번째 작품집 “천재 죽이기” 역시 류선배에 의해 나왔다. 당시 류선배는 추락하고있는 문학의 가치와 위상에 대해 통탄해 했고 총서 “아리랑”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고심하고있었다. 해마다 발간되는 “아리랑”의 몇부를 할애해서 작가들의 작품집을 찍어주는것이 어떠냐 하는 나의 제언에 류선배는 무등 기뻐하며 좋은 아이디어라고 거듭 칭찬해 주었다. 나의 이 제언은 인차 수납돠여 그후 많은 작가들의 작품집이 류선배에 의해 기획, 출판되였다. 그중 나의 중편소설집도 가장 나이 어린 작가로 그 계렬에서 출판되였다.   그 무렵 나는 여의치 못한 운명의 굴레에서 내내 신음하고있었다. 강보에 버려져 남의 집 수양아로 자랐고 박봉에 매달려 사는 청빈한 작가의 쭉줄린 신세라 혼인이 깨여져 버린데다 양모는 나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덜컥 출국해 버렸다. 그리고 출국하여 불과 3년이 못되여 양모는 나와의 일체 련락을 끊어버렸다. 나는 문자그대로 혈혈단신 무주고아가 되여 버렸다. 무정한 양모였지만 그동안의 길러준 정도 있고 또한 유일한 의탁이였기에 꼭 찾고싶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나가는 류선배에게 양모를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친척에게서 겨우 알아낸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류선배는 수소문하여 인천에서 나의 양모를 찾았고 어렵게 만났다.   귀국하여 류선배는 선참 나를 찾았다. 지금의 중앙소학교 부근의 “소수레” 다방. 류선배는 퍽 안쓰러운 기색으로 나를 지켜보다가 무겁게 말머리를 떼였다. 이제 양모는 나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절교를 표했다고 했다. 대신 양모에게 나대신 욕을 삼태기로 먹었다고 했다. 양모는 달랑 천원을 내게 넘겨주고 나와 절교해 버렸다. (그후 한국에서 10여년을 지내다 귀국해 불과 몇달만에 끝내 나를 만나주지 않고 내 가슴 가득 유감만 남긴채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내 신변에서는 류선배가 나의 양모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였다. 그날 의기소침한 나를 배동해 류선배는 밤늦게 까지 못마시는 술을 억병으로 술을 마셨고 나의 울음과 하소연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험난한 인생을 헤쳐나갈 용기를 내고 힘을 내라며 따라주던 그 따뜻한 술 한잔의 진미를 잊을수 없다.   일가친지 없는 내게는 오로지 문학이, 그리고 이 길에서 함께 하고있는 후배문학도들이, 내 삶의 의탁이자 의지였고 전부였다. 북대시장부근, 루항(陋巷) 의 맨끝에 자리잡은 월세 100원짜리 나의 세방집은 그 무렵 문학도들이라면 거의 모두가 운집해드는 짜장 “문학 구락부”였다. 지금도 문학을 그 무엇보다도 우위에 놓고 일심으로 문학의 도정에서 열심히 달리고있는 시인 H며 소설가 L며 모두가 우리집에서 몇해동안 교우하며 지냈다. 모든 세상사를 문학인의 빈약한 홀로의 어깨로 짊어져야하는 무게와 무원조라는 그 처연함으로 오는 스트레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편으로 일상화가 돼버린 매일같은 음주는 나의 신체를 극도로 쇠약하게 만들었고 어느 날 나는 목욕하고 돌아오다  나는 그만 길가에 쓰러져버렸다. 병원으로 가야했는데 주사약 뗄 돈조차 없었다. 곁에 있는 문학을 빼고는 또 문학밖에 모르는 후배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나보다도 빈약했다. 랭기도는 세방집에 나를 눕혀놓고 어쩔바를 모르고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고 류선배가 들어섰다. L가 황급한 나머지 류선배에게 알린것이였다. 온 집안에 침구 하나밖에 없고 대신 바람벽을 에돌며 토담처럼 쌓여있는 책더미와 생기잃은 문학후배들의 부연 얼굴을 보며 류선배의 만감이 교차하는 큰 한숨을 지었다. 어서 병원에 가라고 독촉하며 200원의 현찰을 내놓았다. 그날은 눈이 내렸다. 펄펄 날리는 눈발속에서 한숨을 허연 입김으로 날리며 고개돌려 배웅하러 나온 우리들을 연신 돌아보던 류선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려운 처경이였지만 문학은 나와 후배들에게 힘든 생활을 견디게해주는 버팀목이 되였다. 그해 나와 함께 했던 H와 L가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시부문상과 소설부문상을 동시에 유일하게 수상했고 Z가 연변일보 생활수기 상을 수상해 우리는 하늘 같은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잔혹한 운명은 오직 나만을 조준해 치명적인 직격탄을 날리는것만 같았다. 40대에 들어서던 첫해 어수룩한 일 어수룩한 사람들에 휘말려 일조일석에 번개를 맞고 나는 직장마저 떼우고 한지로 쫓겨나야 했다. 나의 생활의지로 꿈틀이던 력동적인 잔등에 사정없는 발길질을 해 천길나락에 처넣은 누군가가 아니라 뻔뻔한 등짝을 가진 나자신이 부끄러운것을, 누구 탓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박복해 그렇게 되고만 내 인생인것을, 그누구도 아닌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미숙하고 부끄러움투성이임을 깨치며 나는 사회와 담을 쌓고 몇해고 서재에만 자신을 가두어 버렸다. 자숙하며 다시 감사를 배우며 성찰의 눈을 벼리며 돌아온 길을 돌이켜보는 동안 나는 그 굽이에 류선배가 자주 서있었다는 생각을 뒤늦게 가지게 되였다. 그동안 대인기피증 증세까지 보였던 나를 류선배는 여러 번 불러주었고 때때로 메일을 보내여 위무와 격려를 그냥 주었다. 읽은 메일들을 금방금방 처리하는 결벽에 가까운 성미의 나였지만 그 고마운 메일편지만을 나는 보관함에 지금까지 그냥 저장해 두었다.   김혁선생 축하하오. 윤동주를 소설화하련다니 참으로 기쁘오. 누구도 하지못한 윤동주를 형상화하는 작업은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요. 이 작품이 꼭 성공되리라 믿고 당신의 창작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맞게 될 것이라 믿소. 6월 4일 한국에서 오는 길에 북경에 들려서 민족출판사하고 하나의 기획을 짜보았소. 조선족 인물 20명을 선정하여 평전(혹은 전기) 식으로 집필하는 것이오. 집필진으로 몇몇작가들을 잠정했소. 당신은 윤동주 외에 언젠가 말했던 석희만과 한락연 그리고 한 둘을 더 맡으면 좋겠소. 아주 어려우리라 믿소. 그런중에서도 많은 글을 써내는 당신이 자랑스럽소. 아마도 김혁이는 이승 보다 저승에서 더 빛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누만. 하지만 고진감래라고 오라지 않아 김혁이의 앞날에 탄탄대로가 열리리라고 믿소.   -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김혁선생 새해 건강하고 좋은 성취 기도드리오. 고난은 바울에게 있어서 성공의 디딤돌이였듯이 오늘날 당신은 시련을 겪고 그 시련속에 큰 작가로 성장하고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의 문학적 성취는 력사적 평가를 받기에 충분함을 잊지 말고 힘을 내오. 가내 평안을!!! - 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김혁선생 지난 달 29일 한국 갔다가 14일 돌아왔소. 한국 생활건강(암)연구소에 다녀왔소. 약방문과 식단을 받아왔소. 상해 중산병원에서 십이지장과 담낭을 떼여내고 위도 3분의 1을 제거했을때 나는 이미 모든 각오가 되여있었소.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소. 하나님께서 나한테 다른 작가들은 체험하지 못할 귀중한 생활을 마련해주셨음을 감사했소.   그리고 복지병원에 입원한 날부터 병상수기를 썼소. 현재 2부까지 끝났는데 4부로 마감하려 하오. 세상에 암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의 수기가 그들한테 힘이 되고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라오. 나는 수많은 분들이 나를 이처럼 아껴주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행복을 느꼈소. 세상은 사랑으로 넘치오. 수술을 하고 개복하면서 나는 모든것이 경이로움을 체험했소. 그리고 지금부터의 나의 삶은 모든 이들의 사랑으로 얻은것임을 실감하였소. 덤으로 얻은 여생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려고 하오. - 2010년 5월 18일 화요일   그 때때로 전해오는 메일 몇통이 나락에서 헤매고있는 나에게 전화 한통 주는데조차 린색한 다른 메마른 무관심의 인정들에 비해 얼마나 따뜻한 위무가 되였는지 모른다.   지난 여름, 악착같은 병마에 시달려 몰라보게 변한 선배를 만났다. 그런데 늦게 나타난 나의 손을 부여잡고 한 선배의 첫마디는 “몹시 어려울턴데 별 도움도 주지못하고…”였다. 당신의 육신이 병마에 한겹 한겹 뜯기여 가면서도 선배는 후배의 처경을 아파하고 계셨다. 나는 돋솟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고 환자앞에 못난 눈물을 보일가봐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이제 선배는 저 하늘의 별이 되였다. 무기력하고 못난 이 후배가 남아서 할수있는 일이 선배의 안식을 기원하는것뿐이라는 무력감앞에서 허탈감과 막막함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잔혹한 내 운명이 처처에서 내 육신을 쓰러뜨릴때, 본능적으로 누구에게라도 제 감정을 엎지르고 싶은 마음이 북받칠때 찾곤했던 선배, 메일로나마 내 쓰라린 심경을, 내 기쁨과 고뇌를 때때로 전하고 싶었던 선배, 이제 그 메일을 쓸 자그만 안도조차 누리지 못하게 된건가? 그 사람좋은 웃음도 그 소탈한 유머도 그 력동적인 모습도 이제는 못보고 못듣게 된걸가? 이제 우리는 그를 영영 잃은것인가! 선배에게로 향한 그렇게 쓰고 싶은 메일편지를 하늘 길 열고 보낸다. 나에게는 이제 영원(永遠)으로 통하는 이메일 주소가 하나 더 늘었다.   민족사를 제대로 정립하려는 그 막중한 책임과 제자리를 떠나 비틀어져있는 세상의 서툰 물정과 만취상태의 비틀거림같은 문단의 오류를 어쩌려고 이렇게 빨리 가시는것인지? 대신 할수없는 선배의 빈자리는 오래 우리를 불안하게 허탈하게 만들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의 타계가 특히 안타까운것은 어쩌면 문학에서도 자기 령역을 공들여 지키는이가 드문 시대가 되였다는 그 점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배는 무수히 많은 작품을 남겨 놓았다. 그를 애도할수 있는 길은 다시 그를 읽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에게 싸인해 준 그 책들을 서가에서 꺼내 다시 책상 앞에 쌓아놓았다. 많이 함께 했지만 어쩌면 류선배와 남긴 사진은 거의 모두가 집체 합영이고 단둘이 찍은 사진은1996년경, 한국의 언론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남긴 사진 한장뿐이였다. 그때 기자가 플로라이드(卽席寫眞機.  사진을 찍으면 그 자리에서 인화되여 바로 나오는 사진기.) 사진기로 우리 둘의 모습을 담았다.  즉석에서 나오는 그 사진에 나도 류선배도 무척 흥취를 보였다. 사진이 툭 떨어져 나오자 류선배는 사진을 손에 꼭 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따뜻하면 사진이 빨리 인화되여 나온다는것이였다. 화선지에 묵향이 번져나가듯이 트럼프장만한 사진종이에는 우리 두 사람의 실루엣이 요술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그 단 한장뿐인 사진은 내가 간직했다. 세월이 흘러 사진이 누렇게 바래여지자 나는 덴겁히 스캐너 해 두었고 나의 블로그에도 올려 놓았다. 사진속의 우리는 조금 젊은 모습, 그리고 유난히도 형형한 눈빛으로 함께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지지리도 춥던 1월 24일 연길 북산에 있는 경도릉원 장의관에서 선배를 보냈다. 남들처럼 흥감스럽게 표나게 고인을 추모할 처경도 면목도 없는 나는 그냥 구석쪽에서 검은 마스크로 부끄러운 얼굴을 가린 위축된 모습으로 선배의 령정만 지켜보고섰다.   눈물 가득 고인 눈동자에 나는 선배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인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 뜨거운 손을 얹었다. 빨리 인화되라고, 낱낱이 그리고 뚜렷이 인화되라고. 플로라이드 기능처럼 우리의 가치나 인정이 일회용으로, 즉석용으로 그치고 있는 요즘 세월이지만 선배님의 작가로서의 자부심과 민족에 대한 사랑, 올곧게 날이 선 그 정신은 내 가슴속에 또렷이 그리고 오래오래 각인되여 있을것이다.   류형! 오, 플로라이드 사진속의 류형!   “연변문학” 2011년 2월호        
11    미아(迷兒), 펜으로 정체성을 묻다 댓글:  조회:3777  추천:25  2010-12-11
. 칼 럼 . 미아(迷兒), 펜으로 정체성을 묻다 김 혁   * “문학창작과 민족정체성 지키기”세미나에서 발표한 문장   어떤 게으름뱅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할가한다. 그는 게으르다 보니 직업도 가정도 없고 사는게 말이 아니였다. 자신의 뒤탈린 운명을 두고 궁여지책 점집을 찾아갔는데 점쟁이는 그의 전생이 나폴레옹이였다는 놀라운 점괘를 내렸다. 이에 흥분한 게으름뱅이는 “전생의 나폴레옹이 이렇게 살면 안 되겠지”하는 늬우침과 생각과 결심을 뼈물러 먹고 무사안일(無事安逸)의 생활태도를 바꾸기시작했다. 결과 괜찮은 회사에 특채되였고 승승장구로 과장자리에까지 오르게되였다. 그는 점쟁이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뀐것이 무척이나 고마워서 인사라도 드릴 요량으로 다시 그 점집에 찾아갔다. 그러나 점쟁이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고 다시 점을 본뒤 “당신의 전생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였다, 전번의 점괘는 실수로 잘못 내려진것”이라고 새로운 점괘를 내렸다. 이에 그는 커다란 실의에 빠졌고 다시 옛날의 게으름뱅이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 우담(寓談)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변할수 있는가 하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나 역시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깊이 빠진적이 있었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처지를 알게된것은 사춘기때였다.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알게된 숙명적인 운명에 대한 락인으로부터 나 자신은 어데서 왔으며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과 방황은 그후의 나의 생활에 깊이 관여되였고 작품에도 깊이 반영되여 왔다. 어쩌면 창작초반의 거의 모든 작품의 주인공이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고 해결점을 찾지못한채 죽어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90년대 중기에 출간된 나의 첫 소설집에서 근 10편되는 중편소설중 주인공은 모두가 근원적인 아픔을 지니고 맞닥뜨린 운명속에서 해결책을 찾지못하고 죽어나가는 인물들이였다. 이에 평단은 “문단에서는 결여되였으나 세계문단에서 이미 오래전에 주류를 이루었던 비극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 “우리 문단에서 보기드문 ‘한풀이’ 문학의 한 쟝르를 제시해주고있다”고 나름 “어루 만지기”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자신의 불운한 운명과 굽이굽이에서 닥쳐온 절망적인 처지를 회피하지도 숨기지도 않았고 그동안 작품의 소재로 무척이나 많이 활용해 온것 같다. 그만큼 나의 실의와 방황의 크기가 컸고 깊었던것이였기 때문이였다. 그 와중에 한 랭철한 비평가의 한편의 평문이 나의 정곡을 모나게 찔렀다.  “천부적인 재능과 수려한 문체로 개인의 유리파편우를 걷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인 아픔이라는 숙명의 칼날우를 걷는 것이 모든 문단의 바램”이라는 명징한 비판이였다. 진정 작품에서의 나의 추구와 나의 아픔의 양상이 변모되기 시작한것은 96년경 중국전역에서 벌어진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의 조선족 한국초청사기건을 논픽션으로 다루면서였다. 3만여명이 무려 3억이라는 거금을 사기당하고 자살자, 병사자가 속출하고 회사가 부도당하고 마을이 폐교되는 그 아비규환의 수라장속에 수백명의 피해자들을 취재하고 키높이 되는 고소서, 진정서들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육신밖의 아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아픔을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사기를 치고 한국 사기군이 도망가버린 뒤 전 재산을 날리고 텅 비여버린 건물앞에서 괴물앞에 내동댕이 쳐진 먹이의 처지처럼 선지피와 같은 절규를 뿜는 사람들의 무리속에 섞여, 또 한국 종로거리에서 원상복구를 촉구하며 13일간의 단식을 벌리다 들것에 들려온 피해자대표들이 위경통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목전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역시 울대뼈를 밀며 올라오는 덩어리 진 비명과 위장이 탈리는듯한 아픔을 온 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드디여 나는 그들의 아픔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바로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이다. 요즘같은 피페한 출판풍토에 5천여부의 발매량을 기록하고 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흑룡강신문” 한얼문학상 대상, 그리고 연변인민출판사 청년문학지의 상을 거듭수상한 그 작품으로부터 갓길에 섰던 나의 필봉은 새로운 좌표를 찾기 시작했다. 그후로 나는 모든 쟝르를 동원해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공동체의 아픔과 그 행보에 대해 기록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우선 “중국조선족 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하에 변혁기 중국조선족의 고뇌를 다룬 작품들과 천입민족으로서의 그 력사의 행정을 다룬 작품들을 10여편 펴냈다.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자서전적 색채가 짙지만 역시 중국소수민족의 일환으로서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라는 홍역을 치루는 과정에서의 농도와 줄기가 다른 민족집단의 아픔을 다루었고 두번째 장편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에서는 도시로 외국으로의 진출 과정에서 조선족 녀성들이 겪게 되는 아픔을 다루면서 우리가 처한 현실, 그 원인에 대해 짚어보고자 했다. 요즘들어 나는 또 우리민족의 우수한 인걸들을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에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있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문단 처음으로 소설화하여 장편으로 련재를 마쳤고 중국조선족자치주의 전반 기반을 닦은 조선족의 “대부” 주덕해 초대주장에 대한 전기물의 집필을 마치고 출판을 앞두고 있다. 한편 조선족이 낳은 저명한 화가이며 반파쑈투사인 홍색화가 한락연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을 집필, 련재중에 있다. 이한 작업 역시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 인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어제날과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 보면서 그 와중에 오늘의 변화하는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갖추기 위한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과 문체적 창신의 발상에서였다.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들을 새롭게 투영하여 만방에 그 위상을 표방하는 이러한 작업이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氣)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라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정체성, 그것은 비단 개인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결과 변혁기의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치관은 완숙하게 정립되여 있지 않고, 방황과 좌절과 곤혹을 거듭하고있는것이다. 근년래 지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대성질호하고 나름 그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 지고있지만 아직도 부족하며 그한 노력은 계속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잘못 리해하면 민족의 결집과 발전에 방해가 됨은 자명한 일이다. 긍정적이면서도 이 민족의 우수한(面面)을 많이 발굴하여요즘의 이지러지고 흔들리고있는 정체성을 대신해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미래적인 지향을 가지도록 하는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사실 억지로 만들자는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것을 찾아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변혁기를 거치면서 위기론이 거론되고있는 오늘날, 위축되기 이전의 건강한 우리의 정체성은 분명히 있다. 이주하여 동이땀을 흘리면서 이 바람 거치른 척박한 불모의 땅을 일국(一國) 황제의 수라상에도 그 결실이 오를수있는 정도의 곡창으로 가꾸었고 가장 처절하게 반일항쟁의 선두에 서서 붉고 흥건한 피를 산산야야에 휘뿌렸고 독보적인 교육과 예술의 무르익은 향연을 휘모리로 펼쳐 세간의 주목속에 중화인민공화국 56개 민족중의 떳떳한 일원으로, 그 선두주자로 부상한 우리 자랑스럽고 위대한 중국조선족이 아닌가!!! 그것을 더듬어내고 고수하는것이야말로 목전의 진통을 엎누르고 다시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꼭 선결되여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엑스트라(配角)가 아닌 주인공이 되여 만들어 온 이 위대한 신화, 우리가 경유해 온 이 불멸의 력사는 지금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양상이요, 훌륭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부딪힐때 그 정체성을 파악을 하고 싶은 심리가 있다. 때문에 요즘같이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위기론이 거론될때 그한 호성은 더 높은것이다. 나의 뿌리가 닭이였는지 아니면 독수리였는지, 나폴레옹이였던지 염황(炎黃)이였던지 아니면 단군이였던지를 알아야 선각의 현자이든 위계높은 장군이든 파워있는 리더이든 나올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야만 현실에 안주해 보금자리를 지키든 울타리를 박차고 하늘높이 날아예든 할것이 아니겠는가? 요즘처럼 조화로움과 생성이 세계적인 화두로 되고있는 시점에서 자기를 잘 알아야 타인을 수용할수가 있고 자기 주체성이 있고 그우에 다른것을 리해하고 받아들일때에야만 발전이 이룩되고 그 발전이 빠를수 있는것이다. 민족의 생성과 현재와 미래를 우리의 학자들 그리고 작가들은 경험적, 문헌적, 지식적, 예술적으로 적극 구현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때에만 우리의 현재의 처경과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래일의 좌표를 구사하며 물결 세찬 강을 건너 온 우리의 “월강족속”들이 다시금 건너야 하는 숙명의 강에서 해일과 같은 시련속에서도 건전하게 항해할수 있을것이다. 민족공동체 전반에 위기론이 거론되는 요즘의 절체절명의 시점, “발등의 불”, “락미지액”의 시점에서도 안타깝게도 자기 중심주의의 독선이나 일말이라도 생산적이지 못한 당파의 파쟁(派爭)에 빠져있는 일부 작가들의 근시안적인 사고가 유감스럽고 가소롭기만하다. 진정 위기상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모색으로 자신이 스스로 얽동인 협애한 사유의 덫과 스스로 빠져든 “니전투구”의 감탕에서 벗어나 우리의 작가들이 “칼보다 강한 펜”으로 민족에 대해 고뇌하고 대안을 찾으면서 그에 대한 문학적인 성과물로 민족문학의 획을 그을수 있는 자세를 보여야할때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조선족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민족문학을 지향하는 문학인이라면 조속히 실천해야 할 그리고 조건없이 마땅히 리행해 나가야할 숙명의 과제가 아닐까!    갓길에 선 미아, 그리고 미아들, 이제 작은 감성의 펜에 흥건한 사상의 잉크를 재워들고 우리의 어제를 기록하고 나아 갈 탄탄대로를 찾는 작업에 그루를 박아 볼 볼 일이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0    무정천리 꽃이 지네 댓글:  조회:3250  추천:32  2009-01-30
. 추모수필 . 무정천리 꽃이 지네 - 유정의 “은사” 류원무 선생님 김 혁   비보를 인터넷에서 접했다. 선생님이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꼭 찾아보려했는데 이렇게 빨리도 가시다니! 선생님의 문학생평을 정리한 글과 사진들을 나의 문학블로그에 올리고 타계소식을 신문 문화면에 톱기사로 내면서 점차 이 망지소조(忘知所措)의 소식이 기성사실임이 피부로 느껴졌다. 선생님은 내 소시적의 문학우상이였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당시 선생님의 아동소설 “우리 선생님”과 “장백의 소년”은 서점가를 강타한 베스트셀러였다.  그리고 정탐소설 “숲속의 우등불”과 번역서인 “쇼헤마의 이야기”등 동심을 아우른 많은 작품들은 꽤 유명한 어린 독서가였던 나의 여린 동공(洞空)에 그렇게 많은 것을 부어넣어주었다. 짤깍돈을 모아 그 책들을 사서는 내 책장의 현요한 자리에 꽂아놓고는 몇번이고 곱씹어 읽었었고 라디오방송국 소년아동시간에 나오는 련재방송도 빼놓치 않고 들었었다. 나에게는 그렇게 큰 글재주를 가진 선생님이 당시 보았던 련환화 “바다를 소동한 나타”속 삼두륙비(三头六臂)의 기인으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선생님을 맨처음 뵙게된것은 80년대 중기 “천지” 잡지사에서 조직한 문학강습반에서였다. 여러 작가들이 나와서 창작담을 이야기했지만 나의 시선은 온통 선생님에게로 몰부어져 있었다. 중간휴식시간에 나는 쭈볏거리며 다가가 선생님과 사진을 찍자고 청구를 들었다. 숫기가 적은 애송이 문학도가 어떻게 유명한 작가와 그렇게 도담한 청을 들었던지 모를일이다. 선생님은 흔쾌히 대답해 주었고 쏘파에 나란히 앉아 사진을 남겼다. 그런데 다급한 마음으로 사진관에 달려가 사진을 뽑아보니 사진속의 내가 눈을 감고있는 것이 아닌가! 원체 눈을 슴벅거리는 습관이 있는 나였다. 하지만 그 사진을 나는 지금까지도 앨범에 고히 간직해 두고있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유명 작가와 남긴 사진이였으니깐. 그후 문학행사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꺼내며 다시 사진을 남기자고 여러 번 간청했었다.  94년께로 기억된다. 예술극장에서 무극 “춘향전”을 관람하고 있는데 막간휴식시간에 누군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류원무선생님이였다. 선생님은 조용하지만 조금은 근엄한 모습으로 내게 의문을 쳐들었다. 근간에 발표한 나의 아동력사소설이 도작이라는 말이 떠 도는데 정말로 본인이 쓴 것이 맞냐?고 물으셨다. 나는 “만약에 내 작품이 아니면 제 머리를 내놓겠습니다. 하고 격해지며 말했다. 선생님이 웃으셨다. “대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하필이면 다른것도 아닌 머리를 내걸어서야 되겠나? 난 혁이를 믿네.” 그후로 나는 련속 중편아동력사소설 “신라의 검”, “혼불”을 발표했고 도작이라 물의를 빚었던 그 소설 “거북구슬”은 연변인민출판사 “별나라” 아동문학상 1등상을 수상했다. 그후 문학행사에서 만난 선생님은 유난히 기뻐하셨다. “아동문학을 홀시하지 않고 성인문학과 병행하련다니 참 기쁘네. 사실 똘스또이 같은 대문호도 아동문학을 아주 돋보며 창작했다네.” 하면서 선생님은 근작인 장편동화 “코대황제와 울보황후”를 특별히 싸인해 선물해주셨다. 그때 아직 여린 나에게 직접 소설가라는 호칭을 붙여 싸인해 준 그 동화집을 나는 그렇듯 황공하게 무겁게 받아들였었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을 나에게 보내주셨다. 지어 한국에서 찍은 부수가 아주 적은 책도 특별히 나에게는 정히 싸인하여 보내주셨다. 새 책이 출간될때마다 잊지않는 그 모습에서 후배 소설가에 대한 다정한 기대를 나는 깊이 체념할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필봉이 시나브로 무르익고 있을 때, 나의 신상에 큰 변고가 일었다. 인위의 “번개”를 맞고 나는 창작의 전당에서 일조일석에 한지로 떨려나고말았다. 내 삶의 전체를 송두리째 흔드는 변고에 나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나의 몸을 향해 란타하는 부조리의 우박을 우산도 미처 갖추지 못한채 맞기만 하고있었다. 참말로 유감스럽게 가까이 다가와 우산을 건네는 사람도 몇이 없었다. 해빛 찬란하던 그제날 어깨겯고 양광대도를 함께 달리자 약속하던 소위 지인들조차 이 순간만은 어데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때 눈빛을 빛내며 온몸을 던져 이루었던 모든것들이 결국은 허접쓰레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때는 꿈꿀수 있어 행복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뤄내야 할 꿈도 상실해 버리고 무정과 소외의 높은 벽만이 굳건히 버티고 있을뿐이였다. 질량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력감이 온몸을 덮쳐와 나는 세상과 담을 쌓은채 몇해고 서재에만 지친 신심을 감추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내 벙어리가 돼있던 우리집 전화통이 문뜩 울렸다. “혁이요? 나 류선생일세. 해빛 쪼이려 한번 나오지그래.” 연변일보사 뒤골목에 있는 “한라산” 숯불고기집에서 나는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소주를 하시는 선생님이였지만 나의 맥주에 대한 기호를 알고 맥주를 많이 올렸다. 그리고 마음껏 마시라고 극진히 권했다. 말없이 그저 맥주잔을 벌컥벌컥 기울이며 선생님이 구워주시는 고기를 집어먹던 나는 홀연 선생님이 전혀 드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발이 온전치 않아 그러네. 혼자라도 많이 들게나.” 선생님은 금방 틀이를 다시 맞추셨지만 미처 고정하기전에 급박하게 나를 만나신것이였다. 그날 선생님이 하신 한마디 말이 강하게 나의 뇌리를 때렸다. “기죽지 말고 아프지 말고 틀이를 낄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봐. 그리고 악착같이 글을 써.” 선생님과 같은 유정한 선배님들의 괘념의 눈길속에 나는 몇해만에 웅크려있던 서재에서 나왔다. 나를 저버린 문단일망정 창작의 끈을 놓지않았고 또 생계를 위해 큰 사업건에 희망을 가지고 투신했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신문사를 차렸다. 나는 언감 조선족에서 처음으로 16면 모두가 동판지 칼라 타블로이드판으로된 호화롭고 내용이 알찬 주간신문을 만들려 시도했다. 창업의 길은 문자그대로 극난의 길이였다. 여태껏 책상물림으로 “두부값 콩값도 변변히 계산할줄 모르던” 내가 편집뿐아니라 경영까지 맡아해야 했다. 종이질과 인쇄값이 엄청 높은 칼라 동판지라 한달 인쇄비만도 만여원을 넘겼고 게다가 네, 댓명의 직원의 로임까지 대려니 그야말로 일보가 백보맞잡이로 힘에 부쳤다. 원체 청빈한 문인에 근년에는 수입 한푼 없이 못나게도 안해의 박봉에 기대여 사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륙지오리 바다 건느기”였다. 애된 편집들을 휘동하여 힘들게 신문을 편집하는 한편 출판자금을 얻으려 낯에 철판을 깔고 밤낮으로 뛰였다.   류원무 선생님을 모시고    첫 신문이 나온지 며칠 안되여 뜻밖에도 선생님이 세기호텔에 림시로 차린 편집부로 찾아오셨다. 시중에 발행된 신문을 보고 찾아오신것이였다. 선생님은 기쁘다기보다 걱정기 어린 얼굴이였다. “해낼수 있겠나? 우리 같은 글장이들이 경영에 붙을려면 쉽지않을건데…” 선생님은 걱정을 련발하시다가 한숨 한번 짓고 돌아가셨다. 그후로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번씩 꼭꼭 신문사로 찾아오시곤했다. 내가 자택에 까지 신문을 부쳐보내려니 운동삼아 와서 가져가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신문 몇장씩 드릴라치면 굳이 한장만 뽑아들었다.. 매 한장이 한잎의 돈이니 아껴야 한다고 말하셨다. 알찬 내용의 신문을 만들려 꿈꾸었던 나는 선생님에게 하나의 간청을 들었다. 신문의 련재란에 선생님께서 금방 출간하신 “연변취담”을 련재하고 싶었던것이다. 하지만 신문사 여건상의 어려움으로 원고비는 드릴수 없다고 모기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흔쾌히 대답하셨다. “그럲잖아도 어떻게 혁이를 도울가 생각이 많았네. 이렇게라도 도움을 줄수 있다면 참 기쁘이.” 그렇게 나는 선생님의 주옥 같은 글을 원고비도 드리지 못한채 신문에 그냥 련재했고 련재를 본 독자들의 반응은 사뭇 좋았다. 선생님은 월요일마다 찾아오셔 새로 나온 신문을 받고 나의 어깨를 힘있게 두드려주셨고, 때로 내가 자금을 미처 마련하지 못해 신문이 나가지 못한 날에는 퍽 걱정어린 모습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그러다 생계를 위해 오욕을 진채 단말마로 뛰고있는 나의 신상에 또 한번의 “번개”가 내려졌다. 글외에는 글밖에 모르고 대인관계에는 백치에 가까웠던 나는 또 한번 사람의 덫에 치여 본의아니게 신문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직원들의 로임도 바로 주지 못해 편집실에서 쓰던 컴퓨터와 같은 계기들로 대신했고 신문의 명맥을 이으려 리자돈을 겁모르고 꾸어 들이댔던 나는 문인의 수입으로서는 도저히 갚을수 없는 천문수자같은 빚짐에 깔려야 했다. 한두명도 아닌 빚쟁이들은 낌새를 알아채고 우리집에 몰려 들기 시작했다. 빚군들은 한밤중에도 뛰여들어 나보다 퍽 어린 녀자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말마디를 골라 극언을 퍼부었고 또 어떤이들은 나의 책밖에 없는 살림을 둘러보더니 조소를 흘리며 서재에 불을 달겠다고 위협 하기도 했다. 나는 빚쟁이들을 피해 지어 친지들과의 일체 련락도 끊은채 북대의 자그만 세방집에 근 여덟달 동안 피신해 지내는수밖에 없었다. 그날, 급한 일로 어쩌다 핸드폰을 열었는데 눈에 익은 번호가 현시되여있었다. “어디서 어찌 지내냐? 얼굴 한번 보자.” 선생님이셨다. 핸드폰이 먹통이 된데서 십여번은 전화를 했다고 하셨다. 다시 또 그 “한라산” 숯불고기 집, 나는 맥주를 마셨고 선생님은 소주를 마셨다. 선생님은 가난 때문에 학업도 미처 마치지 못했던 서러운 과거를 이야기 해주셨고 역시 엄청 난 빚을 지고 수년간 오로지 그 빚을 갚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힘들었던 시간을 이야기해 주셨다. 어린 후배에 대한 걱정에 안쓰러워하시며 위무(慰撫)의 이야기를 끊없이 해주셨던 선생님, 하지만 나는 그동안 선생님이 병환으로 사모님을 잃으신것도 모르고 그저 나의 설음만 읊조렸을뿐이였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만난건 내가 “윤정석 아동문학상”을 수상한 날이였다. “다시 창작에 돌아온 모습이 보기에 좋네. 아동문학 다시 시작하겠다니 반갑고”. 선생님은 남들처럼 오랜만에 보는 나를 향해 요란은 떨지 않았고 그저 또한번 조용히 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때 선생님의 병은 이미 골수에 깊어 있었고 그것이 내가 선생님을 본 마지막시간이였다… 힘들었던 한해가 또 저물었다. 세모(岁暮)에 선생님을 보내신 그 슬픔이 많은 힘든 사연중의 큰 리유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명함앞에 고자가 붙여져 나가는 그 어제라는 과거형의 시간이 너무나 슬프다. 그리고 많은 것을 돌이켜보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것없이 빈틈없는 시스템속에서 관리되고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세련된 삶, 근대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인 배려와 반응은 오늘의 절주빠른 사회 시스템에서 완벽하게 쇠외되고 지어 봉쇄되여있다. 도처에서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되여있는 “정”, 게다가 부담없이 드러내는 몰인정을 우리는 목격하고있다. 이미 이 체제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정이란 오히려 촌스러운것으로 비칠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촌스러운 끈끈한 정이 아직 살아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이라는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학도 사람의 일이라 치렬한 문학정신의 저변엔 탄탄한 인성이 깔려야 하는것, 정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좋은 글을 내놓을수 있을가? 진정 바람직한 문단의 풍기와 성장은 이러한 “정”으로 점철된 배려와 련대(连带), 선의의 협력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새삼 해본다. 독선이나 타락의 샛길로 빠지지 않고 문인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와 규률에 적응하도록 대선배님은 몸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사실 나는 선생님과 그렇게 자주 만난 편은 아니였고 경륜과 창작리념도 많이 달랐다. 하지만 선배와 후배로서 서로의 배려하고 존경어린 마음이 이런 에피소드를 낳은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도 선생님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중견의 작가로 성장하고있다. 선생님과 내가 묵묵히 나누고 드러내고자한 것은 문학에 대한 드팀없는 애정같은것이라든가, 실추하고있는 문단에 대한 걱정같은것이라든가 , 진정 올바른 삶에 대한 질의와 행동같은것에 모아진다고 생각하고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보기를 저어한 만큼 더 잔인한 삶이 숨겨져 있다. 그렇다고, 내 삶이 힘들다고 다른 이에게서 눈 돌려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불행을 맞이하는 태도와 남의 불행에 면려의 눈동자를 돌릴줄 아는 태도를 나는 선생님에게서 배웠다. 불행을 피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자세를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배워주었다. 나에게 “훌륭한 배사공은 거친 파도가 만드니 그 파도를 두려워하지도 피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고 “작은 작가에 그치는 끼와 열정이 아니라 지성인다운 기와 에네르기가 필요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눈물을 닦고 한숨을 거두고 내 안팎을 정리하고 덜어내고 채우고 되새기는 동안, 불행을 견뎌낼 수 있는 내성(耐性)이 생겨나고 해결사처럼 다가온 시간은 많은것들을 해결해주고있다. 다시 추운 겨울이다. 나에게는 마치 누군가 부당하게 반은 툭 잘라먹은것처럼 해가 짧아진 요즘 시간이요, 계절이다. 나는 작렬하는 빛이 무척이나 그리운 응달속에 웅크린 작은 작가이다. 그만큼 선생님이 계시지않은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워보인다. 하지만 불행과 추위를 반복하다보면 의외로 주변이 선명해진다. 선생님이 남긴 작품을 통해, 내 생애 가장 곤고했던 시절 이어졌던 선생님과의 인연을 통해 나의 행위를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볼수 있어 이번 겨울이며 이제 다가올 무수한 겨울의 추위는 무섭지 않을 모양이다. 근년래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우리의 스승들이 하나 둘 떠나시고 있다. 그들을 묵묵히 배웅하고 있노라니 진짜배기로 마치 혈육과 헤여지듯 마음이 고적해진다. 문단 서렬로는 아직도 한참 후배이나 인생 선배들이 많아 그분들의 떠나는 모습을 다 지켜보아야 할것 같은 마음에 우울하던 때도 있었다. 누군가 떠나는 뒤모습을 바라보다가 언젠가 자기도 떠나야 하는 세상살이… 어쩌면 우리들의 삶 전체가 그런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면 누군가의 뒤모습을 지켜보는것도 사람이 할수있는 중요한 일중의 하나이리라. 어떻게 보내고 또 어떻게 남겨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바이다 이로서 실제 교정에서의 수업절차를 가진 선생이 아니지만 류원무선생님과 나는 스승과 제자의 연(緣)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오호 애재(呜呼哀哉), “우리 선생님!”  "연변문학" 2009년 2월호      
9    공룡과 춤을 댓글:  조회:4007  추천:73  2007-06-29
. 수필 . 공룡과 춤을 김 혁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의 주변은 공룡이 전성시대를 누리던 먼먼 쥬라기로 돌아간 듯 하다. 아이들의 놀이감은 물론 음식에도 공룡의 캐릭터가 새겨져 있고 공룡관련 백과전서와 그림책도 수두룩하다. 아동채널에서도 공룡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제일 인기다. 그런가하면 광고에서도 공룡이 곧잘 나온다. 딸애는 녀자애임에도 수공공작용 진흙을 가지고 장난할 때면 공룡을 즐겨 빚는다. 나도 가세하여 함께 공룡을 빚어 만들곤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만들어 낸 공룡이 서가의 책꽂이에 컴퓨터책상에 침실의 침대머리에 지어 주방의 싱크대우에 까지 놓여져 우리 집은 삽시간에 쥬라기와 현시대가 교차된 기묘한 풍경으로 변하였다. 그일 때문에 안해에게 집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경고를 듣기도 했고 몇몇 공룡은 결벽에 가까운 안해에게 의해 형체 없이 짓이겨져 휴지통에 버려지기도 했다. 머리를 쉬어볼 겸 대화방에 채팅 하러 들어서면 나는 공룡이란 ID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자 채팅 열성 자들이 한결같이 워매! 별 괴상한 ID 다 있네.하고 놀려주기도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서 공룡을 재현한 영화는 둘도 없는 유흥의 성찬이였다. 할리우드의 거물급 명감독 스필버그가 만든 공룡영화 , 등과 일본에서 만든 계렬, 한국에서 만든 , 조선에서 만든 등으로 공룡관련 영화는 디스크로 빠침없이 나에게 수장 되여 있다. 지난해에는 할리우드에서 2억 딸라를 투입, 3년간의 시간을 들여 제작한 컴퓨터디지털(數碼)영화 이 영화 가를 놀래웠다. 그 예고소식을 영화잡지에서 본 뒤 나는 이처럼 일일이 여삼추로 영화의 개봉을 기다렸다. 해적판(盜版)이 나오자 남 먼저 사보았고 공개 상영되자 영화관을 찾아 시원한 광폭으로 다시 보았다. 요사이 DVD 정식 판이 나오자 또 한 개를 사들였다. 3D동화제작으로 된 핍진(逼眞)하기 그지없는 공룡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나오자 나는 세상에! 하고 딸애와 동조하여 환성을 질렀고 공룡이 혜성의 추락으로부터 황페해진 고향을 떠나 나중에 꿈속의 오아시스를 찾은 장면에 가서는 저도 모르게 눈확을 습윤하게 적시기도 했다. 나의 공룡에 대한 편집광(偏執狂)에 가까운 집착에 공룡을 덜 좋아하는 안해는 리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중에는 못말려!하고 풀럭 웃어주고 말았다. 그러했던 안해도 나중에는 우리의 취미에 옮아들어 우리와 함께 공룡영화를 경탄하면 보았고 함께 공룡 만들기 작업에 기꺼이 착수하기도 했다. 어디에서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면 그것이 이발 하나든 뼈 한 조각이든 나는 심히 격동되여 출근해서는 동료들과 한 옥타브 높은 소리로 이 위대한 발견에 대해 알리군 했다. 허나 그에 동감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날저녁 3차 4차 곤죽이 되게 술 마신 휘황한 전과. 하다못해 항간의 아무개와 아무개가 눈맞고 배맞았다는 소식이 그네들에게는 귀 구멍 보슴털이 바짝 일어설 솔깃한 소식일 뿐... 다행히 죽이 잘 맞는 시우인 Z군이 나처럼 공룡에 큰 취미를 보여 둘이 만나면 화제 거리를 만들곤 했고 공룡관련 영화디스크를 서로 빌려주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 동북의 한 박물관이 곁집 나이트클럽으로 인기된 화재를 입은 적 있다. 그 중에서 경악케 한 소식은 바로 그 박물관에 소장되였던 아세아 최대의 공룡전신화석이 몽땅 타버려 발 하나만 남았다는 것 이였다. 이름할 수 없는 애석함이 나의 가슴을 매운 겨울바람처럼 베며 스쳤다. 그 일을 두고 Z와 나는 술을 마셨고 몇 겁을 지나온 공룡의 또 한번의 죽음을 두고 애도의 잔을 들었다. 공룡에 관한 만화 한 폭을 보고 감흥만이 아닌 사색에 잠긴 적 있다. 인간처럼 배낭도 메고 도수안경도 걸고 한, 아마 발굴대원 같아보이 는 공룡들이 삽을 들고 어떤 화석을 발굴해 냈는데 골격으로 보아 틀림없이 인간의 화석이였다. 그 인간 화석을 공룡들이 잔뜩 사색 어린 얼굴을 하고 확대경으로 유심히 들여다보는 그런 만화였다. 인류가 생성하기전의 이 방대한 거물이 인류와 함께 마천루 숲에 어우러진 요즘의 진풍경은 또 하나의 사색을 우리게게 불러 준다. 왜 사람들은 그 누구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공룡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걸 가? 놀이 감으로 만들고 영화인물로 내세우고 마른 화석 한 쪼박으로 감성 풍부한 가상도(假象圖)를 그려내고 지어 DNA기술로 진짜 공룡을 만들어 내려 시도까지 하는가? 공룡은 이미 6500만 년전에 이 땅덩어리에서 소실 되였다. 세계각지에서 심심찮게 나타나는 공룡화석을 두고 사람들은 간거하고도 위대한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또 놀이 감으로 책자로 영화로 만들어 우리신변에 재현 시키고 있다. 그 한 구 또 한 구의 창백한 공룡화석은 하나의 생동한 실체로 부활되여 우리의 생활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바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구(懷舊)의 심리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추구가 아닐 가? 공룡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정신기탁으로 까지 승화 되였다. 공룡은 크다 공룡은 무섭다 공룡은 강대하다 이런 발상으로부터 인류가 생성하기 전에 먼저 지구를 제패했던 공룡에게 우리는 은연중 기탁을 가지게 되었고 공룡의 부활과 함께 우리의 정신기탁도 따라서 부활을 가져온 것이다. 더욱이 정신적 우상이 액틀 식으로 되었고 상투적이 되었던 우매에서 금방 깨여나 급속히 들이닥친 사회전환기의 홍수 앞에 어딘가 설둥해져 행동반경을 구하기 어려워하는 우리 앞에 리념이 강하고 교조적인 것보다는 쉽게 지어 유흥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기탁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는 괴물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나는 오늘도 감흥에 넘쳐 공룡의 족속의 이름을 줄줄 외워낼 수 있다. 패왕룡, 익룡, 완룡, 검룡... 나에게 무진한 감흥과 환상과 사색을 주었던 사전(史前)의 동물을, 쥬라기와 백악기에 온 누리에서 혼자 살다 혼자간 의젓한 령물을... 언젠가 공룡을 두고 습작한 시 한 수가 있다. 내 시재(詩材)로는 이 세기의 령물에 대한 감회를 이루다 말할수 없어 로천명님의 유명한 을 패러디한 시, 그 한 수의 시를 내가 좋아하는, 그대들이 좋아하는 공룡에게 드린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어제를 살다간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였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쥬라기의 화산을 바라본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영화 "쥬라기 공원" 동영상  
8    락타 한 마리 다운해 놓고 댓글:  조회:3502  추천:73  2007-06-29
  당신은 락타를 길러본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1 다마고찌(電子玩具)라는 놀이감이 있다. 몇해전에 류행되였던 애들의 흥심을 깡그리 앗아가는 놀이감이였다. 성냥갑 크기와 맞먹을 플라스틱함에 작은 스크린(螢光幕)이 달려있는데 그 아래 배렬된 팥알만한 버튼중에서 ON을 누르면 스크린속에 어떤 동물의 형체가 나타난다. 흑백만화 그리기 기법처럼 그저 간단한 형태만 짓고있지만 허나 그것을 애송이의 원시적인 장난감으로 치부해선 절대 안된다. 동물처럼 신통한 소리로 울줄도 알고 배고픔과 추위, 밝음과 어둠에 대해 표현할줄도 안다. 울음소리와 함께 hungru(배고프다) dark(어둡다)는 표시가 나오면 버튼을 눌러 먹이를 주고 물을 주고 불을 밝혀주어야 한다. 뿐만아니라 놀이감이 배설한 《용변》까지도 쳐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보채는 아이처럼 끝없이 울어댈것이고 소홀하면 나중에 《죽》어버릴수도 있다. 그러면 놀이감치고 꽤 비싼 그것은 던져버리게 되는것이다.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오락제품. 소, 말, 양, 개, 돼지, 캉가루… 벼라별 동물이 다 있었다. 딸애에게서 이런 신기한 놀이감도 있다는것을 알고 함께 백화점으로 갔다. 딸애는 공룡을 골랐다. 그리고 아빠도 하나 사라고 했다. 둘이서 함께 사서 누가 더 잘 키우나 내기를 하잔다. 잘 나가는 놀이감이라 다 팔리고 종류가 몇개 없었다. 손 가는대로 락타를 골라 들었다. 딸애는 그 놀이감에 깊이 빠져들었다. 하루종일 다마고찌를 손에 품고 다녔다. 잘 때에도 다마고찌를 머리맡에 꼭 놓아두곤 했다. 밤에 깨여나서는 스크린속에 켜지는 파란 야광불빛을 빌어 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뒤질세라 나도 열심을 보였다. 물을 주고 먹이를 주고 불을 밝혀주고 잠을 재워주고 용변을 쳐내주었다. 놀이방법에 익숙해감에 따라 락타는 나의 손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한번, 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보고 딸애가 퍽 상심한듯한 어조로 말했다. 《락타가 죽었어.》 2 요즘 들어 감명 깊게 읽은 시 한수는 라는 제명의 시. 그림속 락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락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섭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속에 박제가 되여있어야할 락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앞으로 걸어나올것이다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을 락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것이다 당신은 락타가 말한다 내 몸속의 물을 꺼내 마셔 바람이 불어와 락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속을 걸어나온다 문을 열면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륵골속, 기억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락타 한마리 따라서 사막을 건넌다 그림속의 락타는 눈섭이 길다 시를 읽고 감흥을 못이겨 락타가 무변의 사막을 가는 사진 한장을 다운로드(下載)하여 내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깔았다. 신문사에서 근무하던 때, 나는 자주 락타와 만나곤 했다. 신문사부근의 호수가에 사진사들이 촬영용으로 락타 한마리를 끌어다놓았다. 사람들은 희한해마지 않으며 이곳에서는 볼수 없는 락타를 배경으로 하거나 혹은 락타 등에 올라타서 사진들을 찍었다. 저녁이면 사진사들은 락타를 어디론가 끌고가곤 했다. 퇴근하여 신문사앞 로터리(轉盤道)를 돌아 집으로 가다 나는 락타와 자주 마주쳤다. 묵묵히 로터리를 도는 락타를 발길 멈추고 지켜보며 그때마다《넌 어떻게 되여 여기까지 왔냐?》하는 물음이 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지금도 로터리를 돌 때면 나는 가끔 그 락타를 생각하곤 한다. 락타를 위한 시를 읽고 다운해놓은 락타의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니 락타 한마리가 책에서, 모니터에서 걸어나온다. 태양은 머리우에서 무섭게 이글거리는데 머리를 수굿하고 터벅터벅 사막을 가는 락타. 산봉우리 같은 쌍봉(雙峰), 성큼성큼 내딛는 긴 다리, 끔벅거리는 방울눈에 어진 속눈섭. 무엇을 이야기하는듯 새김질을 머금는 입… 언제 보아도 불평 한마디 없고 권태 어린 표정도 없다.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믿고 삶을 주어진대로 받아들이는 락타이다. 모래바람 물리치며 갈증을 참으며 인내를 새김질하며 락타는 간다. 사막 어딘가에 자리잡고있을 오아시스를 찾아 길을 간다. 신기루를 찾아 길을 간다.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오르는 사막 저만치에서 누군가 부른다. 신기루이다. 그 신기루속에는 짙푸른 수풀이 있고 거울처럼 빛나는 호수도 보인다. 그 신기루 같은 꿈을 잡기 위해 락타는 간다. 의혹의 사막에서 방황하는이도 있으리라. 잔혹한 사막에서 몸부림치는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쫓아야할 길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고 락타는 묵묵히 간다. 아무리 목이 마르고 힘이 들어도 눈앞에 보이는 저 등성이만 넘어가면 신기루에 다달을수 있다는 그 믿음, 그 곧은 믿음이 락타의 고단한 삶에 활력소를 준다. 락타를 보면 자연히 등 굽은 로인이 련상된다. 풍상고초, 산전수전을 겪어온 로인네가 어쩌면 락타는 길가는 체험을 생을 확인하는 방편으로 생각하고있는듯하다. 나서부터 길을 가야 하는 역마살(驛馬煞)이 숙명처럼 끼쳐있나보다. 역마살에 대해 떠돌아다니도록 끼쳐진 액운으로 불길하게만 보면 안된다. 그런 락타를 웃는이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소극적으로 살아가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편협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로 가닿고자 하는 적극적 본연에서 우러나온 갈망과 충동으로 해석하는것이 더 낫지 않을가. 락타는 십리밖 물냄새도 맡는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락타는 삶의 풍경을 가장 멀리 보는 동물이며 궁극적인 존재의 리유를 보는 동물이런듯. 그래서 락타는 간다. 삭막한 사막을 묵묵히 헤쳐나가는 락타의 길은 구도의 길, 열반의 길에 가깝다. 다운해놓은 락타를 보며 길 가고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요즘처럼 길 떠나고싶은 의욕이 불붙듯한적이 없다. 복잡한 머리와 마음속을 비우고 어디로든 길을 떠날수 있다면 좋겠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을 눈으로 마음으로 스케치하며 세속에 막힌 나의 숨통을 다른 호흡으로 고르고 트이며 일탈의 자유로움, 모험의 유혹을 만끽하면서… 그와 함께 내 인생도 새롭게 스케치할수 있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그것은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고 기회이겠는가! 《내 마음을 해방하고 내 혼을 창달하기 위해 낯선 고장으로 가려고 한다. 가면서 눈과 귀를 다시 열고 혼을 넓게 펴는것이다. 내 령혼을 진정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수의 힘을 빌었다.》 유명한 화상 도륭(陶隆)의 필기에서 본 필적할만한 려행관이다. 우리에게는 이따금 백지상태로 몸과 마음을 비우고 에너지와 기를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길에서 얻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길가기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미래를 관조하게 하는 여유를 갖게 해준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위치나 인생행로에 대해서 반추해볼수 있는 보다 소중한 기회를 준다. 평소 자신과 익숙한것들로부터 결별하여 다른 곳에서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살펴본다는것은 마치 영화속 주인공이였던 자신이 밖으로 나와 관중석에서 관찰자적인 립장이 된것과 같다. 그를 통해 새로운 나를 찾는 기회를 갖게 되는것이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길 가기를 통해 수행되고있는 자아탐색과 정체성의 실체를 추적하는것은 아마 길을 잃은이들에게 가장 화급한 처방으로 돼줄것이다. 어떤 길을 잃었으며 어떤 길을 찾아야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방황해야 하는 류형의 우리들에게 락타는 우리자신의 존재값을 되묻게 하고 길을 가르치고있다. 인터넷에서 《길》을 검색해보면 백여개의 사이트와 수만개의 웹 페이지가 와르르 쏟아져나온다. 길에 대한 정의는 우리가 매일을 밟고 오가는 길의 의미에서부터 미래, 전망 등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의미까지 그야말로 다양하다. 어찌 보면 산다는것은 길을 간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길은 우리의 인생이고, 궁극이다. 길우에는 바쁘게 달려온 지난 우리의 애달픈 력사가 새겨져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묻어있고 이제 가야할 래일의 목표가 기다리고있다. 길을 가다보면 희망을 만난다. 그 희망을 바라고 가는것이 길가기의 본연의 목적일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락타는 우리에게 길이라는 화두를 풀고 길의 확장된 의미를 보여준다고 할수 있다. 길을 가볼가? 락타처럼. 사막을 건너가는 락타가 죽음과 맞서는 힘을 얻는것은 바로 자기 자신속에서이다. 락타의 혹안에는 굳은 기름 지방덩어리가 들어있는데 몸의 수분이 극도로 부족해지면 물로 바뀐다고 한다. 그런 락타처럼 혼자서 가고싶다. 둘이면 복잡하다. 홀로 가며 외로움을 즐기고싶다. 홀로 있음을 외롭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관념의 노예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아닐가. 홀로 누리는 자유는 오로지 개인이 누릴수 있는 체험과 영광이다. 홀로 있음에 저절로 주어지는 자유가 아름답다. 혼자서 외로이 조용한 시간을 가지게 되면 나와 내 주변의 모습이 다시 보이게 된다. 사무치는 외로움이 때로는 깊은 깨달음과 새로운 발견을 안겨준다. 그렇게 홀로 자신을 연소하며 가고싶다. 길을 가야겠다. 락타처럼. 길가기를 통해 삶의 지리책을 만들어보련다. 어느 곳에 험산준령이 있고 어느 곳에 넘기 어려운 여울목이 있으며 어느 길을 택하는것이 가장 평탄한 바른 길인가를 알려주는 정보들을 알아서 낱낱이 적고싶다. 그러면 내 길가기는 주어지는 삶의 숙제를 풀기 위한 값있는 공부의 길이 될것이다. 가는 길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거대한 자연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느끼고 좀 더 겸허해지는 마음을 갖고싶다. 시행착오투성이였던 자신을 반성하고 근신의 마음을 가지며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려정을 만들고싶다. 그렇게 오만과 협애, 탐욕을 벗어버리고 마지막에 닳고닳은 뼈와 질긴 가죽 하나만 남기고 숱한 정신적고투를 거쳐서 잘 빚어진 정신만 가지고 돌아오고싶다. 길을 떠난다! 락타처럼. 두눈엔 가득 의욕과 희망을 담고 등우엔 잔뜩 인내와 그리움을 짊어지고 오아시스를 찾아 길을 떠난다. 사랑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거나에 깊이 빠지는 일, 그리하여 송두리째 나를 버리고 그 대상에 몰입하는 일, 급기야는 몰아지경에서 내가 그 대상이 되여버리는 경지를 락타에게서 배우며 길을 떠난다. 경문(經文)에서 이르듯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혼탁과 미혹을 버리며 마음의 안일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않으며 속이지 말고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며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세상을 저버림없이.》 사막의 락타가 물냄새를 쫓아 세찬 모래바람을 뚫고 가듯 길을 떠난다. 그리하여 보다 명징해진 내 눈동자가 락타의 검은 눈망울을 닮고 마음속에 짊어진 고통과 그리움의 무게가 길을 마친 락타처럼 가벼워질 때 나는 진정 삶과 령혼의 오아시스를 찾을수 있으리라. 3 이제 내 마음속에 락타 한마리 길러야 하겠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7    고양이를 위한 랩소디 댓글:  조회:3810  추천:73  2007-06-29
수필 고양이를 위한 랩소디 김 혁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털에 고운 봄의 향기 어리우도다 금방울같이 호 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 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시 공부를 하던 때 습작 본에 베껴두었던 고월 리장희의 의 전문이다. 매양 고양이와 봄에 대해 감각적으로 체득한 이 탁월한 련상의 시를 읊조릴 때면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환영(幻影)으로 본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어제의 카텐을 북- 찢고 뛰쳐나와 내 가슴에 덥석 안긴다. 나와 함께 울고 웃고 뒹굴고 뛰놀며 동년의 릉선을 넘었던 고양이 한 마리가... 그 암울했던 70년대의 중기에 나는 룡정의 어느 한 소학교의 3학년생 이였다. 검찰기관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가 악명 높은 간부학교에서 치른 역고를 빌미로 몇 년이고 병원에서 지눕이를 하고 계셔 화기를 잃은 집안은 건조했고 어두웠으며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교원사업에 바쁜 몸이라 아버지의 병시중을 위해 어머니는 도문에 있는 외할머니를 모셔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고리끼의 중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인자하디 인자하신 외할머니가 오면서 왕골로 결은 들 가방에 무언가 넣어 가지 고왔다. 그것은... 고양이였다.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귀가 세모지고 눈매가 날카롭고 동침처럼 빳빳한 수염아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온몸은 오목처럼 까맸으나 발만은 운동화를 신은 듯 하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체념한 듯 들 가방 모서리에 턱을 얹고 생소한 환경을 두릿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고양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고양이가 낮으나 모가 실린 소리로 인사처럼 울었다. 나도 고양이를 보고 반가움에 말처럼 힝- 하니 웃었다. 작은 몸체의 고양이는 참담한 기운이 돌던 우리 집안에 작지 않은 생기를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만 그 고양이에 깜빡 환혹해 버렸다. 우선 고양이의 이름을 짓노라 잔 속을 끙끙 앓았다. 그때까지 만도 게딱지같은 초옥들이 한웅큼 속에 들어앉은 듯한 현 소재지였던 룡정에는 촌마을과 진배없이 짐승을 치는 집들이 적지 않았고 고양이의 이름이래야 《미미》,《묘묘》따위가 고작이였다. 자기 집 아이의 이름을 따서 고양이의 이름을 《철호》라 툽상스럽게 지은 집까지도 있었다. 열 개도 더 되는 이름을 놓고 참외 고르듯 튕긴 끝에 나는 고양이의 이름을 《빱까》라고 지었다. 그것은 당시 십분 류행되였던 이야기그림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였는가》중의 주인공의 애명을 본따 온 것 이였다. (썩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강직한 주인공사내의 이름을 시사 받은 나의 고양이는 원체 한 마리의 암코양이였다.) 《역시 교원 집 자녀가 다르긴 달라.》 고양이의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골 살을 찡그린건 외할머니 한 분 뿐이였다. 《애가 코양이 이름을 웨 이렇게 바쁘게두 지었누?》외할매는 《빱까》라는 이름을 번지지 못해 고양이를 《바가》하고 불렀다. 그때 현 소재지의 아이들에게서는 이산한 괴질이 돌았다. 림파선염으로 턱 아래와 목 부위가 찐빵처럼 부어 올랐는데 향간에서는 그 병을 《돼지 병》이라 하였다. 민간 토방법으로 병을 치료한답시고 목에 돼지고기의 비곗살을 가제를 대여 붙이곤 했다. 병이 전염 되였기에 보름 넘게 학교에 나가지도 못했다. 나도 그 병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교학하러 나가고 할머니는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느라 병원에 붙박혀 있었기에 빈집에서 패잔병처럼 턱을 동이고 랑패상이 된 나를 동반해 준 것은 《빱까》뿐이였다. 함께 고무공을 굴리기도 했고 수염이 뺨에 닿이여 간질간질해 나도록 고양이와 머리를 맞대고 알고도 모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배고프면 나는 밥상에서 고양이는 문가에서 옥수수밥이라도 맛나게 먹었고 졸리면 따스한 가마 목 웃 쪽에 활등처럼 꼬부리고 다정한 형제처럼 누워 자기도 했다. 《빱까》가 동무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지겨운 홀로의 시간을 나는 어떻게 지냈을는지 모른다. 《빱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는 목에 붙였던 비곗덩이를 《빱까》의 점심 한끼로 내 주었다가 어머님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당시는 옥수수밥과 옥수수떡이 주식 이였고 고기붙이는 일년 치고 설 명절이면 겨우 맛볼수 있었던 시국, 그렇게 돈냥을 부셔 《약》대용으로 사온 고기를 고양이밥으로 홀랑 대접했으니 꾸지람을 받을 법도 했다. 여하튼《빱까》에 대한 나의 정은 날로 도타워만 갔다. 오밤중에 밖에 나갔던《빱까》의 미약한 울음소리도 오직 나만이 헤아려 듣고 문을 열어 주군 했고《빱까》는 어김없이 나의 요자리 곁에 방석과 내 털모자로 일껏 만들어 준 잠자리에 기여 들어 자군 했다. 추우면 나의 이불 속에 곧잘 기여 들곤 했다. 설 명절에 일가친척이 한 구들 미여 지게 모였을 때도 어김없이 내 품만을 찾아 드는《빱까》를 보고 모두들은 고양이와 참으로 자별난 사이라고 혀를 차군 했다. 피페했던 당시의 문화환경에서 가장 히트를 친 영화 한 부가 있었다.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였다. 영화를 눈물을 흘리며 연거푸 보았던 나는 이렇게 좋은 영화를 《빱까》에게도 보여야지 하고《빱까》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갔다. 새끼를 품은 캥거루처럼《빱까》를 외투 속에 품고 갔다. 영화가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여 주인공의 불우한 운명을 두고 사처에서 훌쩍이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에 섞여 간간이 고양이 울음소리도 새여 나왔다. 관중들의 경아와 불만에 찬 눈길 속에 영화관 관리일군에게 귀를 잡혀 나는 문밖으로 축출 당하고 말았다. 이와 류사한 일은 후에도 있었다. 병상에 누웠는 아버지에게 그 사이 훌쩍 웃자란 《빱까》를 구경시키러 갔다가 간호원의 사이렌 같은 비명 속에 허겁지겁 병동을 뛰쳐나온 적도 있다. 나는 그 무슨 남의 장독대를 깨뜨린다던가 길가는 계집애들 머리 태를 쥐여 당기는 그런 악동이가 아니였다. 그저 아버지도 본지가 무척 오래된 《빱까》를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었을 뿐 이였다. 어느 해 여름, 우리가 쓰고있는 사기그릇을 만들어 내는 당산(唐山) 이라는 곳에서 세계를 놀래 운 대 지진이 일었다. 그 지진의 여파로 우리 이곳에서도 《대지진 설(說)》이 떠돌아 모두들은 공포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 즈음 소조공부를 하면서 주제모임으로《지진이 나면 선참 누구를 구하겠는가?》하는 대 토론이 벌어 지였다. 누구는 오보호 할머니를, 누구는 영예군인 아저씨를, 누구는 모주석 초상을 선참 구하겠다고 격앙된 목청들이였는데 나만은 선참 《빱까》를 구하겠다고 말해 《계급립장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학급 간부들에게서 질책을 받았다. 초동머리 애들에게서까지도 정치와 불신의 분위기를 짙게 체취할수 있었던 그 기형의 세월에 남의 집 양자로 자라면서 내성적이고 섬약한 기질을 가졌던 나에게서《빱까》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친구였으며 나에게 있어서 가자 값진 보물이였다. 하여 동네의 코북데기 하나가 본보기 극(樣 戱)《홍등기》음악이 든 축음기판 한 장, 영용한 팔레스티나유격대어린이의 사적을 그린 그림책 한권, 요지경 하나, 그리고 살구 씨 백 알로《빱까》를 바꾸려 했을 때 그 풍성한 조건 앞에서도 나는 하도야마의 조건을 물리치고 사형장으로 나가는 《홍등기》중의 혁명자 리옥화마냥 단연 그 유혹의 《물물교환》을 단연 거절해 버렸다. 그때 나는 동네에서 《책이 많은 아이》혹은《고양이가 있는 집 아이》로 불리 웠다. 《빱까》의 그 자그만 몸집이 봄 들어 신속하게 붇기 시작했다.《빱까》의 배를 만져보고 나서 할머니는 고양이가 임신했다고 했다. 《임신이라니요?》 경아의 빛을 띄고있는 나의 볼을 다독여 주며 외할머니는《빱까》가 곧 새끼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맙시사! 《빱까》하나만도 용용 귀여워 죽겠는데《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가 몇 마리 또 생겨난단 말인가! 지나친 기쁨에 나는 삭신이 막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빱까》를 꼭 안고 집안을 맴돌며 열뜬 사람처럼 당시의 류행가를 목청 깨져라 불렀다. 《북경의 금산에 금빛해살 비추네 모주석 그이는 금빛의 태양》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 따라 까닭 모를 기묘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자 웃방에는 난데없는 종이박스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속에 맙시사!《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 네 마리가 눈도 뜨지 못한 채 가지런히 누워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양이들은 꽃잎 같은 입술을 열며 미약한 소리로《애웅, 애웅!》울어 댔다. 외할머니는 병원의 아버지에게 보낼 명태 국에서 많이 덜어 밥을 말아《빱까》에게 내 주었다. 우리 집은 경사가 난 집 같았고 숫제 명절기분 이였다. 동네에서도 희한해 하며 구경을 왔고 득의양양한 기분으로 나는 동네아이들에게서 살구 씨 열 알 씩 례물로 받고서야 새끼 고양이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일주일 가량 되자 제법 구들에서 뛰여 놀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책상다리며 이불장 모서리며를 긁어 자리를 내여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았다. 병상에 있던 아버지도《빱까》가 《4태자》를 낳은걸 축하해 병원의 링게르 주사 줄을 결어 만든《금붕어》손 노리개를 나에게 보내 왔다. 그《금붕어》에 줄을 매여 책상모서리에 달아 놓으니 새끼고양이들은 물고기 사냥이라도 하는 듯 《금붕어》를 툭툭 건드리며 재롱을 부렸다. 그 귀여운 새끼 고양이들이 다치면 부서질라 나는 감히 시름 놓고 품에 안아 보지조차 못했다. 그러다 한달, 꼭 한 달만 이였다. 새끼고양이에게 깜박 환혹(幻惑)되여 있는 나의 애련한 마음에 강타를 안겨준 변고가 있었다. 하학하여 돌아와 보니 새끼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고 따져 물으니 외할머니가 어쩔 바를 모르며 더듬이며 말했다. 새끼고양이가 잃어 졌다는 것 이였다. 나의 눈앞에서 진짜배기로 그 풍문의 지진이 이는 듯 했다. 나는 책가방을 멘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황소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점심 녘에 햇볕 쪼임을 시키느라 내놓았던 고양이들이 뒤 바자 틈새로 사라진 것 이였다. 새끼를 잃은 《빱까》는 지붕우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가슴 긁는 소리로 울어댔다. 《빱까》는 지붕 우에서 목청 짜내 울고《나는 지붕아래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우리 집 뒤 바자와 린접된곳은 거울 틀이며 상장 틀을 생산하는 공예미술공장이였다. 그곳 로동자들이 고양이를 채여 간 것 같다고 단정하고 할머니는 공장장을 찾아가 따졌다. 매일이고 울음을 달고있는 나의 지청구에 밀려 할머니는 여러 번 공장지도부를 찾았고 새끼고양이를 찾을 길 없는 공장 측에서는 그 성화에 못 이겨 적당한 배상금을 내 주었다. 새끼고양이 한 마리에 50전씩 쳐서 도합 2원을 내 주었다. 그래 고작 이것이 새끼를 잃은《빱까》의 아린 상처와 눈물에 대한 보상이란 말인가? 나는 코 잔등이 시큰해 나서 울먹울먹하며 그 돈을 받았다. 그 돈을 특별히 아껴 보관해 두었다가 당시의 아동명작 이였던 《고옥보》의 편단을 뽑아 묶은 소책자 《밤중에 우는 닭》을 샀다. 그 나의 동년의 정감이 배인 책이 지금도 나의 서가의 안쪽 깊숙이 꽂혀져 있다. 내가 소학을 마칠 무렵, 지긋지긋한 투병생활4년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버렸다. 아주 훌륭한 공무원 이였던 아버지인지라 룡정뿐만 아니라 대소, 의란, 백금, 등지에서까지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백여 명을 넘겼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변고와 그렇게 많이 몰려 든 사람들, 슬픔에 자기를 던지고 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놀란 나머지 나는 울음조차 울지 못했다. 그저 현관 구석 쪽에서《빱까》를 품에 안고 고양이과 사람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서 옹송그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고향의 말발굽산 기슭에 묻었다. 장례식을 치르던 날, 나는《빱까》을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외할머니가 꾸짖었지만 왜였던지 부득부득 우겨가며 《빱까》를 산에까지 데리고 갔다. 붉은 흙을 헤치고 아버지를 묻었다. 봉분을 쌓은 뒤 검찰계통의 아버지의 옛 친우들이 권총을 빼들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랐던지《빱까》가 내 품에서 후닥닥 빠져 나와 산더기 아래로 내 뛰기 시작했다. 《빱까야, 빱까!-》 갈린 소리를 지르며 나는 덴겁히《빱까》의 뒤를 쫓아갔다. 나무그루에 걸려 자빠지고 풀대 가지에 손을 긁히면서도《빱까》를 쫓아갔다. 그러다 어느 한 커다란 봉분앞에서《빱까》가 멈춰 섰다. 멈춰 서서는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오는 나를 말똥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때는 늦가을이였고 추위 때문 이였는지 아니면 경황때문 이였던지《빱까》는 몹시도 떨고 있었다. 나는 덮쳐 가《빱까》를 품에 안았다. 그제야 하늘같은 슬픔이 감지되었고 나는 못나게도 남의 봉분을 바람막이로 삼고 앉아 《빱까》와 함께 가냘프게 울기 시작했다. 새끼를 잃은 뒤《빱까》는 퍽 수척해 진 듯 했다. 일전과는 달리 사람 곁에 오기도 싫어했고 고기 국에 밥을 말아 주어도 잘 먹지를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 며칠 안 되어《빱까》는 집을 나가 버렸다. 하루가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빱까》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기재에 의하면 고양이가 사람 집에 살고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5천년 이상 된다고 한다. 이면에서 개에 비해서는 4만 5천년이나 늦다고 한다. 성경에도 고양이를 언급한 구절만은 없다. 허나 동년의 이 한 단락의 정감의 경력 때문인지 나는 동물들 중에서 고양이를 가장 편애하는 쪽이다. 인간과 가장 도타운 신변의 또 다른 동물인 개에 비해서도 그렇다. 어찌 보면 고양이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길들여지지 않았다. 한 두 마디의 호령에도 엎디고 기고 혀를 빼무는 개에 비해볼 때 고양이의 자존은 더 높은 것이다. 고양이와《사촌지간》인 호랑이며, 치타며, 사자들만 봐도 고양이 가문의 위용이 엿보인다. 아직도 그들과 비슷한 《야성》을 고양이는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야성》은 인간이 그들에게 들 씌운 정의이고 그들 쪽의 정의를 보면 그것은 곧바로 인간이면 너나가 갈구하는 자유인 것이다. 흔히들 사람의 성격을 동물에 빗댈 때 사회 친화적 인간형을 《개 과(科)》로 분류하고 홀로 서기 인간형을《고양이 과》로 분류한다. 하여서인지 전설이나 이야기, 지어 아이들의 그림영화에서 까지 고양이는 주인공 역을 놀지 못한다. 어느 시공간, 어느 짐승의 집단에까지도 인간들과 꼭 같은 사회질서와 선악대립을 부여하고《개 과》의 영웅을 선호해야 직성이 풀려하는 사회의 진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보면 고양이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개성과 매력, 더 많은 랑만과 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유아적인 발상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던 동년에서 멀리 지나온 내가 의연히, 그리고 다시금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는 리유다. 촬영에 애호가 있었던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갈매기》표 사진기로 나와《빱까》가 함께 있는 장면을 남겼다. 사진 속의 열살 둥이 인 나와 《빱까》는 유난히 반짝이는 눈매를 하고 앞쪽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색 바랜 사진조차 지금은 잃어버려 없다. 모 잡지사에서 "인간과 동물" 란에 나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적은 글을 실으면서 분실해 버려《빱까》는 그저 잡지 속에 부잇한 영상으로 찍혀서 남았다. 매양 그 잡지를 뒤적여 낼 때마다 나는 천지에 자치도 없이 사라진《빱까》의 이름을 되 뇌여 보군 한다. 내 동년의 꿈과 내 동년의 정감을 지니고 부식된 기억의 어둠 속을 홀로 바람처럼 가버린 한 마리의 령물(靈物)을... 오, 나의 사랑 나의《빱까》!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    춤추는 엔돌핀 댓글:  조회:3043  추천:73  2007-06-29
. 수필 . 춤추는 엔돌핀 김 혁 안해가 점 보러 갔다왔다. 가탈만 자꾸 지는 운수 사나운 팔자인 나를 위한답시고 외지에까지 가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점을 보고 왔다. 저녁 무렵에야 들어 선 안해의 표정은 썩 개운치 못했다. 점괘가 좋지 못하다고 했다. 이렇게 나쁜 점괘는 처음 본다며 점쟁이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다. 뭐 내 인생이 같은 팔자라나... 무감각한 채 책을 펼쳐들고 있는 나를 나무람하며 무언가 나에게 내밀었다. 붉은팥을 골 막하니 채워 넣은 작은 주머니. 를 한답시고 그것을 저녁마다 베개 밑에 깔고 자란다. 내내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해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안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일이다. 미국병사 몇 명이 찦차를 몰고 경축회장으로 가다가 차 사고를 내고 죽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충돌에 머리가 묵사발이 된 그들이 웬일인지 대단히 행복한 표정,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흥미를 가지고 과학자들이 죽음, 나아가서 행복의 의미, 쾌락의 의미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대에서 신경학을 강의하고 있는 포스터 올리브 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이에 대한 연구를 장기간 진행해 왔다. 그들은 실험용 쥐들에게 알콜, 코카인, 암페타민, 니코틴, 식염수 등을 투여해 보았다. 그 결과 알콜, 코카인, 암 세포 등을 투여했을 때 쥐의 뇌 부위에서 어떤 물질의 분비 량이 급격히 증가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돌로 죽은 그 미국병사들의 뇌 속에도 이러한 물질이 대량 분비되어 있었다. 그 물질을 엔돌핀(endorphin)이라 부른다. 엔돌핀은 사실 단어 자체만 놓고 보면 체내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진정제, 즉 '몸속의 아편'을 뜻하는 말이다. 몸에 통증자극이 가해질 때 뇌는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해 자연진통제인 엔돌핀을 분비하는데 통증이 심할수록 엔돌핀 분비가 최고도에 달하여 극단 상황에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엔돌핀은 마약 모르핀보다 100배정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엔돌핀은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그에 대항해 통증, 불안 등을 경감시켜 즐거움과 진통 효과를 나타나게 하는 아주 고마운 물질이다. 인간의 린색한 뇌는 일생동안 그 엔돌핀을 이쑤시개 끝으로 찍어 맛볼 정도로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100번의 구애(求愛)끝에 사랑의 승낙을 받았을 때, 자식을 보지 못해 내내 고생하다 중년의 나이에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생각지도 않던 먼 친척에게서 거액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달랑 한 장만 쥔 복권이 거액으로 당첨됐을 때... 이런 환희에도 엔돌핀은 좁쌀눈만큼 나온다. 그런데 죽음에 림박하면 엔돌핀이 마지막 축복처럼 샤워라도 하듯이 뿌려 진다고 한다. 어깨가 처져있는 안해에게 그 무슨 의대교수처럼 인체호르몬에 대해 신나게 강의하며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엔돌핀 분비 량이 많은 사람이라고 웃어 보였다. . 안해가 받아 온 점괘를 되여보며 나는 지지부진한 한 자기의 인생을 은연중 되새김질 해 보았다.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정말로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 왔다. 어떻게 되다보니 내가 걸어 온 길은 다른 사람들이 여유 작작 노량으로 걷고 있는 탄탄대로가 아닌 뒤안길, 아니면 국도를 벗어난 진창 길이 아닌가 싶다. 삶의 길이 너무나 울퉁불퉁했다. 연거번거 들이닥치는 불상사가 호된 일격처럼 육신을 강타했고 무릎이 탁탁 접히는 것 같은 고통이 정신을 촛농처럼 만들어버리곤 했다. 세상살이의 올곧지 못함에 부대껴온 나날 이였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것 과 내 인생은 거리가 멀었다. 그저 구질구질하고 고달픈 것의 련속이였다. 장애물경주에 나선 사람처럼 그런 것들을 나는 회피할 수 없었다. 때로 운이 좋아 작은 휴식과 성취를 맛볼 수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굽이 우에 떠올랐다 꺼지고 마는 거품과도 같은 것 이였다. 그리고 세상은 한번도 나에게 출구를 내여 주지 않았다. 설사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조금 보였다하더라도 언제나 개구멍을 지나는 것 같은 주눅들림과 비굴함으로 그것을 통과하게 했을 뿐. 허나 나는 중력에 굴복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였다. 세상의 불쾌한 먼지와 소음의 기류를 덮어쓰고 나는 절망감의 정체와 아득바득 싸웠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어둠에 적응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나를 고통의 류황불에서 빠져 나오게 한 구원의 빛이 바로 문학 이였다. 절망의 정체를 저울질하게 하는 도구, 말 못 할 사정과 가슴 터질 슬픔을 상쇠 해 주는 엔돌핀이 바로 문학 이였다. 문학, 그 비 실제적인 효응에 대한 매혹을 기르며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탐미해 들었다. 작품의 문학성보다는 환금성이 중요시되는 세월에 하필이면 이 세상 가장 열렬한 문학 광으로 등장했다. 현학적인 표현이 넘치는 왕성한 실험으로 현실과 환상사이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자신의 령역을 만들었다. 내 작품의 제재는 모두가 욕망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의 구도 속에서의 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과 그 개체가 어떻게 부서져 가는지를 갈파한 작품들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모두가 상식, 륜리, 가정, 법의 규정된 테두리 속에서 숨 막혀 죽어 가는 인물들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내장을 상하게 하는 맹독(猛毒)의 절실한 아픔이 남에게는 풀잎에 손 베는 아픔처럼 일편의 동정도 자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픔을 웃음 속에 삭이고있는 내가 어데 가나 귀를 열어야 하는 것은 똑같은 화제인 집을 산 얘기, 자가용을 갖춘 얘기, 승진한 얘기, 돈 번 얘기, 애인을 사귄 얘기... 들 이였다. 그런 항간의 귀 맛 도는 얘기들은 마냥 나와 무관한 것 들 이다. 자기보다 잘 난 녀자를 추구해 결혼하고 승진하고 집 늘이는 거에 목숨걸고 사는 사람들, 어쩌면 내가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세계가 그들의 인생 속에서 그렇게 순탄하게 그렇게 찬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돈, 권력, 출세, 류행... 모두들은 한사람같이 남들이 택한 욕심의 가치를 숭배하고 그 길에 합류해 한몫보려 뒤질세라 달려간다. 하나의 자대로 몰아대는 똑 같은 삶의 형태를 추구하며 그 대오에서 탈락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똑 같아 진다. 똑 같은 말을 하고 똑 같은 복장을 하고 ... 사회가 만들어 낸 그런 실용적인 관계의 체계에 나는 도무지 호흡을 맞추지 못해 했다. 세속의 요령에 젖어있는 능수 능란한 그들과 나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다. 나는 그들과 엉겨붙고 싶어하면서도 밥의 뉘처럼 단호하게 고립된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누군가 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타협이 무언지 몰랐다. 낮은 처마 밑에 머리 수그리고싶지 않았다. 무리가 규정하고 무리가 인정하는 확실하다는 가치에 무언의 반항을 보여 왔다. 그래서 마냥 내가 제물(祭物)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횡포의 주먹에 매맞고 코피를 흘리곤 했다. 금전과 권력의 오만이 나의 성한 육신을 격리시키는 것을 보았고 내가 일껏 만들어 낸 가치가 다른 가치에 종속되거나 수단화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어찔할 바를 몰라했다. 내 몸 우로 쏟아지는 부조리의 폭우를 막을 우산이 없어 그냥 맞기만 해 왔다. 그래서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이 시대에서 멀어지는 련습을 하는지도 모른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기실 괴로운 일이다. 어쩌면 줄곧 예술적인 요구와 현실사이의 간극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의 률법대로 살아가는 실성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유페된 자아를 지니고 세상으로부터 중절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생의 어느 시기 블랙홀에 잘못 빠져 들어가 중력을 상실해 버린 사람일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 진 운명을 속여 비켜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나는 혼자서 달리는데 익숙해 있다. 내 서재에 스스로 붙인 이름은 이다. 빈 언덕, 몸과 마음을 비운 곳이라는 뜻. 그 가 나의 소우주(小宇宙)다. 그 속에 쌓여있는 5천여권의 책과 2천여부의 영화 테잎이 나의 전부다. 신간 잡지와 서적들을 미친 듯이 사 읽고 새로 개봉되는 영화 테잎들을 대량 소장하고는 보고 읽고, 읽고 본다. 그리고 쓴다. 그 피스톤의 작동 같은 따분한 동작이 여태껏 내가 해 온, 그리고 하고 있는 짓거리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 이였고 회원 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원 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일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일년사이에 3천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 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프점에서 나를 모르는 보스가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개봉영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 그리고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들여 본다. 열심히 영화지를 사들여 새 영화의 개봉일시를 알아내고 련인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새로운 개봉 작을 기다린다. 어느 음향점의 구석에서 남들이 내쳐 둔 흑백의 경전을 찾아내도 나는 그 테잎 한 장에서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한다. 좋은 작품 한 권에, 좋은 영화 한 부에서 나는 법열(法悅)을 느끼듯 몸을 부르르 전률한다. 그 속에 진리의 말씀이 있고 슬기의 샘터가 있고 고난을 이겨 나가는 주문이 있고 뮤즈의 노래가 있다. 순수한 심안(心眼)으로 보고 읽는 그것이 내 인생에 보탬이 될 황금의 열쇠인줄을 나는 안다. 그것은 내 불운을 해 줄 팥 한 주머니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 그런 아름다움에 집요히 천착(穿鑿)하며 나는 불운한 내 신세를 잊는다. 어쩌면 나는 문학과 예술을 위해 태여 나고 내내 그에 목말라 하며 홀로 서성이는 우주적인 짐승 한 마리 일가! 그래서 치명적인 아픔을 껴안고도 남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언 제보나 여유있는 모습이다. 마냥 정장을 거부하는 편한 캐주얼(休閑)차림으로 어깨를 솟구고 다니며 입만 열면 유머가 폭포로 쏟아져 나오고 맥주 집 가서는 맥주 반 박스쯤은 거뜬히 재끼며 남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온갖 화제를 터뜨리고 둥글게 만드는... 주체하지 못할 감성으로 팽배해 있고 터무니없이 행복해 하는 남자. 어찌 보면 산다는 건 객기이다. 삶은 그저 도취이며 마술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숙을 꿈꾸는 자는 늘 미숙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 처지를 최악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여유와 달관이 보인다. 그런 긍정적 자세와 행동은 엔돌핀의 분비를 촉진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체 내의 호르몬 체계와 세포의 활성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엔돌핀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기분이 좋을 때 많이 분비된다. 그러나 반대로, 걸핏하면 재수 타령을 하면서 짜증을 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라는 우리를 불안하고 긴장하게 하며 피곤하게 하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목표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측면만 캐고 드는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물질만능의 사고에 젖어 호사스런 여유를 보이는 유한인, 시대의 명제에 응분의 힘을 주지 못하고 시간의 전부를 외형의 보전에 소비시키는 무책임한 권력인,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작은 것에 탐하는 소인, 큰 것에 질려 아부하는 겁쟁이, 자기의 일신만을 위해 양심의 벽을 무너뜨리는 자,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엔돌핀은 오늘에 머물지 않으려는 자의 육신 속에 저장된 무진한 에너지,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자의 마음속에 고여진 진 다홍빛 희망이 아닐가! 스스로의 무드를 만들고 그로서 생성되는 엔돌핀에 도취되는 나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씻김굿의 휘모리에 신들려 있다. 그래서 의 짓눌림 밑에서도 싹을 쳐드는 이 되어 있다. 죽음 같은 유혹의 감미로움으로 그 엔돌핀의 생성을 위해 나는 계속 꿈꾸어야 할 가보다. 계속 뛰여야 할 가보다. 샌프란시스코의 연구팀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내인성 호르몬이라는 뜻에서 발견해 낸 성과에 엔돌핀이라는 학명을 붙였다. 내가 추출해 낸 엔돌핀에도 이름을 지어본다. 나를 나 이게 하는 엔돌핀의 학명은- 문학이라 부른다. 예술이라 부른다. 그리고 아집(我執)이라 부른다...  "연변문학" 2004년 7월호      
5    모니터속의 달 댓글:  조회:4491  추천:73  2007-06-29
  수필   모니터속의 달   김 혁           추석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하늘은 청청 맑고 소소히 높다. 무심코 이고 다니던 도시의 대공이 이렇게 맑고 높아 뵈기는 처음이다. 청량한 과즙(果汁)같은 바람이 뺨을 쓸어주어 기분이 호쾌하고 추석을 맞느라 열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오가는 이들의 손마다에 들린 월병구럭이 눈맛에 즐겁다.   허나 올 추석은 잡지사의 청탁에 밀린 빼곡한 창작스케쥴 때문에 안해를 친정집에 보내고 홀로 맞게 되었다. 컴을 마주하고 옹근 사흘을 보냈다. 모두가 뻐근히 즐기는 명절에도 홀로 남아 죽어라 자판기를 두드려 대야하는 이 껄렁한 문인신세, 환절기의 날씨처럼 마음은 감개무량하다.   홀로 맞은 추석날 아침에는 한국 MBC방송 프로로부터 생방송 취재를 받았다. 중국 조선족들의 추석을 쇠는 모습을 자상히 소개해 드렸다. 대담중에 재미나는것은 한국측의 PD나 아나운서가 중국의 월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것이였다. 송편과 같은 음식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담의 많은 부분을 할당해서 월병의 형태며 맛에 대한 소개를 해드렸다. 요사이 문우들과 함께 만든 인터넷 문학동호회 게시판에도 해외문인들로부터 월병에 관한 질문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또 열심히 해답을 주었다. 음식문화의 차이와 그 비교로부터 배우고 교류를 나눈 즐거운 시간이였다.      조선족의 전통추석음식으로는 송편 시루떡 인절미 등등으로 각양각색인데 그중 송편을 대표음식으로 꼽는다. 송편속에 꿀 밤 깨 콩 등속을 넣어서는 가마에 솔잎을 깔고 쪄낸다. 송편을 보기좋게 빚어야 시집을 잘 간다하여 처녀들이 예쁜 손자욱을 내며 알뜰히 빚는다. 이렇게 단 미각뿐이 아닌 후각과 시각의 맛과 멋을 골고루 내는 송편이다. 만월(滿月)이 뜨는 추석에 반달형의 송편을 빚는것은 반월이 일일성(日日盛)하므로 발전의 상징에서 너와 내가 모두 빚어 꽉 찬 달이 아니라도 하루하루 채워간다는 공동체의식의 표현이라고 민속학가들은 운운.   그처럼 중국의 월병만들기도 무척 재미있다. 이라는 시구가 있듯이 월병은 중국의 추석명절에서 빠칠수 없는 주요 음식이다.      중국의 전통추석음식-월병     달제를 지내며 달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호두 땅콩 팥을 넣고 빚어만드는 과자등속, 달의 형태를 따온것도 있겠지만 일가족이 둥글게 모이고 해나가는 일이 원만하라는 길상의 의미가 부여되여 둥글게 빚어 만든다.   월병은 일찍 은나라와 주나라때에 강소 절강 일대에서 발상되여 애초에는 태사병(太師餠), 호병(胡餠)으로 불려져 왔다. 당나라때에 이르러 당태종과 함께 달을 감상하며 호병을 맛보던 그 유명한 양귀비가 호병이라는 말이 속되니 달의 형태와 비슷한 이 맛나는 과자를 월병이라 부르자 하여 지어진 이름.   요즘의 월병은 단 맛보기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 친우끼리 서로 명절례물로 선물하면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 해나가는 매개물로 되고 있다. 월병의 포장도 더 아치하고 운치있게 변하여 포장곽에 달을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구나 경구 리언들을 새겨넣거나 중국 4대고전의 유명 인물상도 계렬로 그려넣어 다 먹고도 던지기 아까울 정도, 작년에 먹고난 월병포장지를 나는 지금도 소장해 두고 있다. 올해는 록색식품을 선호하는 세계적인풍조에 맞추어 월병포장의 디자인에서도 록색이 주류라고 한다.   이렇게 유래도 많은 월병을 홀로 씹으며 그 멋과 맛을 새삼스레 음미해 보다 머리도 쉬울겸 메일을 열어보니 고마웁게도 친구들이 보내온 명절축복의 메일카드도 넘쳐나게 들어 차 있었다.  모두가 추석맞이를 내용으로 한 메일카드였다.   황금빛 풍요로운 가을밭에 악동이처럼 섰는 허수아비와 그 코끝에 앉은 잠자리가 그려진 카드, 딩동!하는 초인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 정교롭게 포장한 월병 선물꾸러미가 나타나는 카드도 있었고 광야에 떠있는 달아래 면면한 우수를 자아내게 하는 얼후(二胡)명곡 이 흘러나오는 음성메일도 있었다. 대접에 들먹히 담겨진 먹음직한 송편이 그려져있고 그 여백에 라는 글발이 씌였는 카드는 안해가 홀로 쇠는 명절이 마음에 안스러워 추석날에 기어이 PC방을 찾아 도문에서 내게로 보낸 카드였다.   그중에도 나의 이목을 끄는 메일은 옛도읍의 밤경치를 그린 수묵화카드였다. 교교한 달빛아래 옛장안의 루각들마다에는 등불이 휘황했고 그림 위로 너나가 애송하는 리백의 천고절구 이 운치있는 붓글씨로 떠오르고 있었다.       시성 리백     보내온 카드중에서 달밤에 하얀 저고리입고 껌정고무신을 신은 개구장이 오누이가 두눈이 올롱해 달을 쳐다보며 과일을 따는 그림을 택해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깔았다.      그러한 메일의 축복속에 나는 홀로이지만 명절의 기분을 짙게 체취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 축복과 면려에 힘을 입어 짧은 시간에 편집부의 청탁을 맡은 4편의 작품을 쳐냈다. 흡족한 기분으로 월병을 안주로 하여 홀로 할빈맥주 세병을 거뜬히 축냈다. 추석무렵이면 곡식이 익어가고 햇과일이 나오고 계절도 춥지도 덥지도 않아 즐길만한데서 이라는 말이 있더니 글 타작을 끝내고 유유자적하면서 그 기분을 알것 같다.   이렇게 명절때마다 나는 친지와 친우들로부터 많은 축복과 문안을 받군한다. 그 축복들을 나는 삭제해 버리지않고 메일보관함에 저장해 두곤 한다. 그렇게 보관함에 저그만치 60여쪽의 축복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절친한 문우가 보낸 내가 좋아하는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이 있는가 있는가 하면, 창작에 애면글면하는 나의 신체를 걱정하며 머리 좀 쉬우라고 금방 출간한 도색잡지 가위의 발가벗은 모델의 누드사진을 업로드(下載)해 보내는 달작(達作)스러운 선배님도 있고, 어느 장난기 짙은 문학도가 보낸 코밑에 왕방울만한 코방울을 달고 개구쟁이가 요란한 소리로 재채기를 하는 라는 애니메이션메일도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충격속에 우리의 생활양식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서로의 문안방식도 재래의 길고 격정에 넘치는 서한문안으로부터 육성을 가려들을수 있는 전화문안, 이제는 아무곳에서도 시시때때 보내고 받을수 있는 컴문안에 까지 이르렀다. 급변하는 생활양식속에 당혹감을 머금으면서도 그 양식을 어차피 받아들이는 오늘의 현대인들이다.    이 며칠간의 중앙TV뉴스에서 볼라니 개인 컴퓨터의 비주얼베이직(可視圖像)을 통해 추석문안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시간에 매여 스케쥴에 매여 하루하루를 매끈하게 꾸며나가는 현대인들에게서 명절이면 술빚고 떡치고하던 생활양식은 돈후한 어제에 대한 추억을 안고 색바랜 앨범속에 간직되고 있다. 조련찮게 모두가 함께 모여 어제를 추억하며 화끈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을테지만 복받은 현대화한 통신계기들을 충분히 리용하여 서로의 따뜻한 문안과 격려를 나누는것도 오늘의 시체멋나는 좋은 방식이라 보여진다.    물질의 향상과 더불어 매일이고 되풀이되는 명절같은 나날에 더 문명하고 더 실용적인 명절맞이방식이 우리에게 소기(所期)된다. 이는 현대생활양식은 구경 어떤 양상이여야 하는가? 하는 숙제로 우리 모두에게 부과되여 있다.     스모그(매연, 안개)에 오염된 요즘의 세태에서도 추석달은 예이제이없이 떠오른다. 는 렬양세시기(冽陽歲時記)중의 속담 한구절이 생각난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    봄은 메일을 타고 댓글:  조회:3429  추천:73  2007-06-29
수필 봄은 메일을 타고 김 혁 1, 절친한 문우들이 보내온 메일카드를 열어보고 봄이 왔음을 소스라쳐 감지하게 되였다. 아직 창 너머 보이는 맞은 켠 옥상의 눈이 녹아내리지도 않았고 길을 나서면 매운바람이 목덜미를 채찍질하건만 메일카드가 담긴 보관함 속은 봄기운으로 그득 차있다. 《봄을 느끼세요.》, 《봄나들이》, 《봄날의 구두수리장이 아저씨》... 제목만 봐도 봄기운을 짙게 체취할 수 있는 정교롭고 아치(雅致)한 카드들이 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회답을 줄 양으로 나도 메일카드를 골라보니 그러한 봄을 주제로 한 카드가 10여개나 되였고 이달의 추천카드도 거의 모두가 봄에 관련된 카드였다. 그중 몇 개를 정성스레 골라 메일에 띄우며 나는 금세 봄을 배달하는 즐거운 우편배달원 같은 감흥에 흠뻑 잠겨버렸다. 지난겨울은 근년 들어 진짜 겨울답게 반세기동안 보기 드문 큰 눈도 내리고 하였다. 내 좋은 사람끼리 눈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모여 달콤한 술잔도 나누고 얼룩 없는 우정도 나누고 지성 배인 대화도 나누면서 눈이 주는 부피만큼 두터운 감흥에 내내 사로잡혀 지냈었다. 그런데 어느새 봄이 막간극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막 뒤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고 나를 놀래고 있는 것이다. 메일카드를 읽으며 급변하는 세월의 조화에 나는 그만 마우스에 손을 얹은 채 천치처럼 정체불명의 감개에 잠겨버렸다. 겨우내 추위에 지지름을 당했던 박제된 마음을 풀어주는 봄은 왔다. 번요한 일상의 소요 속에서도 봄은 소리 없이 왔다. 잠들었던 모든 것들이 눈을 부비며 일어나고 온갖 물상들이 저마다의 몸짓, 저마다의 소리를 얹어 생기를 부여하는 그런 봄이 빨리도 다가왔다. 솔로몬왕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봄으로 구애(求愛)했다고 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눈도 그쳤고 땅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되었는데…》 사랑에 빠진 왕처럼 두 팔 벌리고 하늘 우러러 감동하며 대기의 중간을 청량한 기운으로 채우는 봄 양기를 더듬어본다. 계절의 은밀한 변화와 함께 한겨울 신고를 치르던 비염도 많이 나아져 한결 개운해진 몸과 마음이다. 그래서 언젠가 읽었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어느 시인의 《겨울속의 봄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읊어본다. 아침 한때, 순금의 부리로 새들은 남은 잔설을 쪼아 대고 무어라고 읽고 가는 바람의 전언 눈 뜨는 나무 눈 뜨는 풀꽃들의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 수피의 깊은 안쪽에서는 몇 개의 새순이 자라나고 있고 사랑의 품사로 점점이 물들어가는 나의 눈과 목소리처럼 비쭉비쭉 푸른 혈관이 일어서면 홀연 눈썹위에 내려앉는 청아한 뻐꾸기 울음소리 겨울 냉기는 땅강아지 발목 앞에서 바쁘게 무너지고 있다. 일습을 개변하여 한결 홀가분해진 여인네들의 봄단장이 한결 눈에 다습다. 전신의 우울을 벗어버리고 겨우내 아름다운 몸매를 지겹게 포박했던 솜붙이를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고도 여흥적인 모습이 된 여인들, 현란한 디자인과 색조의 의상으로 원체 아름다운 모습에 더 밝고 화사한 이미지를 부여한 여인들, 봄과 그네들 사이에 기다란 두 줄기 같기 부호를 그어본다. 2, 봄이라 제명을 밝히면 언제나 햇빛, 꽃, 향기, 여인 이런 순으로 우리의 뇌리에 버릇처럼 서열을 지어 다가온다. 봄은 꽃을 분만하는 계절이요, 여인은 또한 꽃처럼 아름답다는 투박하나마 본능적인 연상의 조합인가 보다. 항간에서 애창가요로 내내 불리는 《여성은 꽃이라네.》라는 노래가 그런 연상을 한층 더 유발시키는듯하다. 하기에 봄이 오면 누님같이 친절하고 애인같이 사랑스럽고 이웃집마누라같이 후덕해 보이는 그런 여자를 찾아 자꾸만 무언가 입담거리를 만들어 주근주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일군 한다. 좋은 입담거리 하나 만들어보면, 요즘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변조된 포즈가 놀랍다. 단지 감상적으로 한 두 송이의 계절 꽃과만 어울려볼 요즘의 여인들이 아니다. 꽃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에 어제의 감상가치가 있다면 또한 마음껏 열고 마음껏 자기존재를 현시하는 것이 오늘날 꽃의 다른 한 양상이다. 가혹함에 가까운 상품화시대, 경쟁이 소기되는 시대에도 남정네들과 동조하여 참여의식을 키우고 있는 여인들, 여기저기에서 그만의 지혜와 정열과 운치와 기품을 보이고 있는 여성들, 이것이 곧바로 규방을 멀리한 오늘날 여성들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 《내면의 무(无)에 대해 여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어릴 적 무섭게 들은 옛말속의 귀신보다 소녀 적 밤길에서 만난 악한보다 더 두려워한다. 하기에 여자는 자신의 무로부터 탈주를 하게 된다. 즉 그녀들은 자기 혼자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망을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할일 없다는 것은 자기 혼자서 무한한 암흑 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플랑크는 이렇게 분석한바 있다. 이는 전통에서 탈주하고 전통의 이미지를 파격하고 있는 현시대 여성들의 심태에 대한 정론이며 분석이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엄동의 추위와 같은 긴긴 터널을 여인들은 경유해왔다. 역사의 장하를 거슬러보면 거의 모든 민족, 거의 모든 종교, 고대거나 근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여성은 남성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왔다. 권력의 척도는 언제나 남성이 우월하다는 학설 쪽으로 기울여져왔다. 지어 명지하다는 철학가들마저도 여성들에 대해 색안경을 걸고 이단에 가깝게 대해왔다. 고대희랍의 저명한 객관적 관념론 철학가인 플라톤도 여인은 그저 남편의 재산의 일부분으로서 말, 소, 개와 같은 사유물이라고 인정했다고 한다. 성(性)선택 진화론에서도 일전까지는 성유전자 중에서 남성의 우월성을 전제로 해왔었다. 이 공정치 못한 관점은 《양성은 생리학의 의의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과학적인 검증에 의해 뒤늦게야 바로잡혀졌다. 이렇게 우리의 여성들은 장장 몇 세기를 무지하고 고루한 전통적인 인습과 편견의 저애에 본능, 자유, 실존을 여지없이 짓눌리고 종속적인 위치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강력한 유교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하여 여성은 사회참여는 제쳐놓고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되어왔으며 여성에게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란 그저 혈통계승의 도구대역일 뿐이었다. 그렇게 지겨운 불운의 그늘 속에서 지내왔던 그녀들이 자신들의 소외와 불이익을 자각하게 되였고 보조자의 대역만이 아닌 주체 적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부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복종과 희생이 더 이상의 미덕이 아님을 알아차렸고 뛰어 일어나 사회적으로 조장하는 뿌리 깊은 남성중심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으며 여성의 인간화와 해방의 궁극적 명제를 위하여 몸을 바쳐왔다. 그렇게 높은 벽을 넘어 드디어 지금은 자유스레 자기에게 주어진 시공(時空)을 처리하는 주체적인 실존자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그네들은 진정 삭막한 환경에도 닻을 내리우고 끈질긴 인고로 완강하게 피어나는 무수한 꽃송이이다. 더욱이 멱을 바싹 죄는 듯한 혹심한 경쟁이 주어진 오늘날 기계문명이 빚어낸 잡다한 소음과 스모그 오염 속에서도 꽃은 완강하게 피어나고 있으며 그 꽃처럼 어여쁨과 성숙의 관능미를 지닌 여성들이 날로 붇고 있다. 《음성양쇠(陰盛陽衰)》의 풍조를 두고 혹자는 조소하고 우려하고 힐난하고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역시 기꺼운 풍조가 아닐까 모계사회를 거쳐 온 우리 인류는 기실 심성바탕에 언제나 여성에 기탁하는 근성의 일면을 은연중 깔고 있다. 허다한 종족의 신앙계를 살펴보면 화신(火神)은 에누리 없이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태고 적 한개 부락에서 그 명맥을 이어주는 필수품인 불씨를 보존하는 중임은 부락에서 가장 지혜롭고 존경받는 여성에 돌려졌으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가 우러르는 인끔 높은 존재로 우상화 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설화를 펼쳐 봐도 여성숭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진맥해 낼 수 있다. 《후한서 옥저전(後漢書 沃沮傳)》의 기재에 의하면 옛날 함경도 지방에 생존해왔던 동옥저의 동쪽바다가운데 섬 하나가 있는데 그 섬은 사내라고는 한사람도 없이 말짱 여인네들만이 어우러져 사는 여인국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시조인 석탈해의 어머니도 원체 《적녀국》이라는 여인국의 여자였다는 설이 있다. 이 설화의 전래 때문이었던지 중세기 서양 사람들의 우리 민족에 관한 견문가운데서 조선에는 여자만 사는 여인국이 있다는 대목이 어김없이 들어있다. 자기 씨족의 시조를 신성화해야 할 소박한 심경으로부터 그네들은 단지 흥감스러움이 아닌 경건함으로 신기루 같은 여인국을 설정, 그로부터 여인을 우상화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할진대 오늘날 여성들의 새로운 부상과 그 존재의 과시를 두고 온 곱지 못한 눈길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봄의 자체는 창조적의미를 품고 있다. 그만큼 봄과 꽃과 동일시되고 있는 여성들의 창조적 이미지에서 짙은 봄 양기와 함께 우리는 경이로움에 앞선 기쁨과 동감과 자부를 느껴야 할 것이다. 남다른 순발력으로 시대와 접속하고 있는 여성들의 양상을, 메일을 타고 온 봄은 진한 메시지로 나에게 남겨주었다. 그래서 내 사색의 컴퓨터자판기도 봄 양기의 율동으로 가락 맞는 봄꽃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나보다.   "연변녀성" 2001년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    은둔하는 령혼 댓글:  조회:2774  추천:73  2007-06-29
  . 수 필 . 은둔(隱遁)하는 령혼   김 혁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집필하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던 작품은 J D 샐린저의 《호밀 밭의 파수꾼》이였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년대를 조명하려 시도했던 나에게서 역시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미국사회상을 다룬 샐린저의 작품이 좋은 보기로 되었기 때문 이였다.     50년대 초에 발표된 후 전세계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떠오르며 사랑 받는 고전자리를 지켜온 《호밀 밭의 파수꾼》의 저자  샐린저는 언론에 로출되길 꺼리면서 일체 인터뷰를 거부하는 은둔자적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수십 년째 미국의 한 시골에 칩거하고 있다. 책을 낼 때마다 샐린저는 작품에 해설 문을 붙이지 않고 작가 사진도 싣지 않는다. 이는 그가 모든 출판사에 요구하는 정해진 조건이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존 맥스웰 쿳시, 10여 년간 해마다 노벨 문학상후보로 지명돼 온 쿳시는 한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주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도 두 차례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아 온 작가다.   그 역시 철저한 은둔자로 유명하다. 두 차례에 걸친 부커상 시상식에 불참했으며, 노벨 문학상 발표 뒤에도 작가와 직접 련락이 닿지 않아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 소식을 직접 알리지 도 못했다.      올해에도 일본문단에서 또 한 명의 은둔작가가 나타났다.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 중 한 명이 일체의 신상정보를 거부하고 가명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이 순수하게 읽혀지길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평의원들에게 전해 온 작가의 짤막한 메시지에서 수상이라는 명예 대신 작품만이 기억되길 바라는 작가의 은둔자적인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허명(虛名)에 창작력을 랑비하는 이들이 보이는 요즘의 문단풍토이다. 고작 몇 편의 작품을 내고는 좀 뜬다 싶으면 유명한 작가요 시인임을 자처한다. 수식이 요란한 명함을 찍고 화려한 필명부터 지으며 자비로 출판한 책에도 자기의 조야한 얼굴들을 문지광(窓門)처럼 크게 싣는다. 해외에 나가서도 서로 남을 폄하(貶下)하면서 자기만이 《조선족문단의 기수》니 뭐니 망언한다. 나르시시즘(自愛)의 거울을 마련해 놓고 해 종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붙인 화려한 수식에 자아만족의 미주를 기울인다. 나가는 글은 멋지고 고상해 보여도 한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자기만 봐달라고 앙탈하는 애들 같다.     굳이 자기를 내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그 배후엔 명리(名利)라는 흑심이 뱀처럼 커다란 똬리를 틀고있다. 명리의 론리는 겸손을 뒤 전으로 한다. 명리는 일단 화려한 외양과 자극적인 목소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 없이 몸을 뒤채고 경박하게 떠들어댄다. 문학도 시절, 홀로의 공간에서 부지런히 창작궤적을 남기던 행태에서 벗어나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는 무대우의 주인공이 되려고 뒤질세라 요란하게 치장하고 남보다 한 목청 높은 소리를 내느라 분주살스럽다. 그 모든 가증스럽고 천박한 행동거지, 자기 현시욕과 극도의 리기주의, 독선, 그리고 꼴같잖은 오만으로 점철된 저렬한 의식구조에 문단이 병들어 있으며 따라서 문인상경(文人相輕)의 아수라장의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경박한 충동에 자신을 위탁해버렸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명리를 앞세우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이 욕심이 란무하는 시대에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살아가는 작가들은 분명 어딘 가에는 있을 것인데...   사실 거슬러 보면 문학과 예술의 뿌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닿아 있다. 개인으로서의 작가. 예술가는 근대의 산물이다. 중국의 옛 선비들은  세속의 영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아나가는 은둔자를 현인으로 여겼고, 깊이 은거할수록 명성의 높이는 그에 비례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각 조대를 살펴보면 학문과 자기 수련에 혼신을 던지면서 세속적인 영달에는 초연한 선비들이 수없이  은거하고 있다.     그들은 문학과 예술을 너무 사랑하지만 아무도 그것으로 이름을 얻기를 욕망하지 않았다. 또 그러한 은둔을 통해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별개의 독자적 세계인》이 되고 《오직 스스로 결정하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얽매여 있지 않는 자유를 찾아나 설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어떤 자아 적인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심으로 정신세계를 심화, 확장해 가려는 순수 문학정신의 표출이다. 그들에게는 그 욕심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이 있었고, 속기(俗氣)를 버림으로써 명징(明澄)을 얻는 지혜를 터득했음이 남들과 달랐다. 그리고 그 고고함을 고독으로 안고 사는 삶의 경지가 실은 얼마나 충만한 삶인가를 일찍이 깨달았던 명철함이 있었다. 그런 고독의 세계에서도 작품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재능과 용기를 가진 그들에게는 진정 《위대함 》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세월도 거스르는 명작의 감동과 그 진가의 리유는 과연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명성에 자족하지도 않고 편승하지도 않으며 명리를 따지지 않는 작가의 자세와 그에서 우러나온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의 작품이 만고류방(萬古留芳)으로 매우 지적이지만 그것이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외표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의 전략에 있지 않을까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범인(凡人)작가는 로동자이고, 뛰어난 작가는 감독 (監督)이며, 대작가는 건축가이다. 소설의 보통독자는 신자이고 참다운 의미의 정독자(精讀者)는 승려이면, 그 중에서도 위대한 정독자는 스스로 승좌(僧座)에 앉아서 근행(勤行)하는 수도승이다.》     어느 평론가가 남긴 말이다. 결국 이 말은 작품의 창작에 림하는 작가의 자세와 정신적 풍모 그리고 그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들의 요구를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정신에 의해 문학의 사상성을 형상화하여 예술성으로 결정(結晶)된다. 때문에 여기에는 작품에 몰두하는 창작의 자세가 중요하다. 세속적인 욕망의 거품이 걷혀 지지 않은 채 글쓰는 사람 모두를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혼돈이다. 시간의 응축된 에너지가 없이는 누구나 이 명예를 가질 수 없다. 속된  현시 욕으로 단지 공리에 매여 글을 짓는 것은 문학적 흐름을 간과한 어리석은 짓이며 그러한 작품 그러한 작가가 오래 가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다.     스위스나 독일에는 지금도 수공으로 칼과 가위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며, 명장(名匠)이 만들었던 오래 된 칼과 가위는 엄청 높은 값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현대산업사회에서는 기계로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 생산하기 때문에 옛날과 같은 장인과 제도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장인들이 가지고 있는 철저한 직업정신은 오늘날에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하는 일과 그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긍지를 가지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을 예술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직업에 림(臨)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경제적, 사회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장인들이 후세에 경모를 받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조용히 세월의 행간을 메워 나가며  인간존재를 해명하고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모습이 그 무엇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진정한 가(家)라면 그렇게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을 저버리고 고절(高絶)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지 않을까! 우리가 명작과 대가에 근접할 수 없음은 은둔한 장인들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고독을 고고함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급급한 현시 욕 적인 속물 근성의 잠재의식 때문이 아닐가?      지금 우리의 문단에서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러한 은둔자들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와 끈기, 오랜 시간 동안의 잊혀짐을 감수하면서도 단 한편의 작품을 위해 생의 모든 것을 거는 장인정신이 요청된다. 최근에는 작품들이 너무나 쉽게 량산되고 글 짓는 이들에게 너무나 쉽게 명예가 부여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의 작가와 작품들이 좀 더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시대와 력사에 한 획을 긋는 그런 작품으로 그런 예술적 주인공으로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시점에서 취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작가들이 부박(浮薄)한 문단풍토에서 벗어나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서재에 묻히는 자세가  아닐가!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명상음악 "영혼의 피리"  
2    애인같은 맥주, 메기같은 친구들 댓글:  조회:3990  추천:75  2007-06-29
 수 필  애인같은 맥주, 메기같은 친구들  김 혁       내가 호주가(豪酒家)라는것은 문객들이고 보면 다 아는 일이다. 10년전이던가 내가 경모하는 어느 한 작가분이 이외의 사고로 애닯게 요절했을때 비감을 못이겨 동년배 문우 s와 함께 맥주 한박스를 다 재끼고도 열병을 더 터뜨려 마인 일화가 있듯이 주량도 크고 그 애주사도 꽤 길다 할수 있다. 내가 선호하는 쪽은 맥주쪽, 일상에 치대여 볼품없이 이즈러진 몸과 마음의 구김살을 펴이러 미샤를 가는 사람처럼 명심해 찾는곳이 맥주집이다. 회사에서는 조금 멀리 벗어나 국자가로 곧추 대여 가다 옛 뻐스역 부근의 꿈속같이 조매로운 골목길을 찾아들면 작은 간판을 이마전에 떠인 내 단골맥주집이 나타난다. 맥주집. 술군들의 역반심리를 꼬드기는 차암 묘한 이름의 맥주집, 그 는 곳으로 나는 자꾸만 온다.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몸매도 성미도 맥주같이 풍요로운 맥주집 마담의 반겨맞는 웃음이 맥주거품처럼 부풀어 오른다. 마담이 소방두같은 손으로 북북 찢어서 마른 안주를 챙겨준다. 랭장고에 언녕 넣어두었던 찬 기운이 불려앉은 맥주병을 날라온다. 언제봐도 반갑기만 한 맥주병을 가슴앞에 다정스레 껴안고 살풋이 마개를 딴다. 배불뚝이 유리컵에 맥주를 넘쳐날듯 부어 놓는다. 그다음에는 맥주를 마이기전의 나만의 독특한 제슈체어(行爲)가 있다. 저가락 뒤끝으로 맥주잔을 몇번 휘젓는것이다. 그러면 맥주거품이 활화산의 용암처럼 자오록히 분만해 오른다. 거품은 단지 외적인 멋스러움뿐아니라 탄산가스의 방출을 억제하고 공기와 접촉해 맥주맛이 변하는것을 막는 차단막역할을 한다. 때문에 차고 거품많은 맥주를 나는 좋아한다. 사랑순위에서 맥주를 마누라 먼저 놓는 독일사람들은 맥주거품을 이라고 부른다. 부르멘이란 독일어로 꽃이라는 뜻. 그렇게 꽃에 입맞추는 기분으로 거품이 피여나는 맥주에 입술을 담그고 두눈을 느스름히 감은채 단번에 비운다. 울대뼈가 피스톤처럼 작동하며 지극히 신선하고 지극히 구수하고 지극히 아싸한 맛이 식도를 타고 가슴가운데로 흘러내린다. 일신의 혈관을 들말처럼 줄달음놓는 그 감미에 정신이 노곤해 진다. 육체와 정신의 엑스타시상태가 곧 바로 이 순간이다. 불에 달구어진 무쇠처럼 정신이 노글노글해지고 기분이 좋은 이때면 어느 시인의 맥주를 바다와 애인에 비유하여 읊은 시가 맥주잔속에서 굼닌다. 술에 대한 나의 감수성도 이 한수의 시처럼 자유분방하다. 비해 말한다면 매운 소주는 내게서 형님같고 걸죽한 탁주는 내게서 외할배같고 화려한 포도주는 내게서 귀부인 같다. 그리고 맥주는 내게서 애인같다. 어덴가 걸맞지 않는 련상인지는 몰라도. 시시때때 보고 싶고 유독 나만의 맛망울을 알아주고 내가 버려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아니하는 맥주, 사내들이 은근히 추구하는 애인의 양상이요 타입이 아닌가?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혹애하는 특이한 안주가 있다. 마른 메사구 안주이다.즉 포를 뜬 메기를 말한다. 보기에 해볕에 그슬린 농부자 나그네의 근육이 삐여지고 검실검실한 팔뚝같은 그 툽상스럽기 그지없는 메사구의 맛이 그렇게 맥주에 꼬옥 사개맞을수가 없다. 메사구 안주 하나면 맥주좌석을 충분하게 둥글게 가꾸어 갈수있다. 우리 문인들중에서 메사구안주를 전파한 장본인이 바로 나다. 어느 한번 신문사에서 밤일을 하고 자정이 넘게 되였는데 불빛이 있는 맥주집을 찾았다가 처음 메사구안주를 접하게 되였다. 북어가 다 떨어지고 없기에 주인이 이라며 메사구 안주를 내놓은것이다. 그런데 미안쩍게 내놓는 그 메사구 안주가 맥주에 벼려진 맛망울에 일점불차없이 들어 맞을 줄이야! 지만 이렇게 맛나는 술안주를 어찌 나만 맛볼수 있으랴! 그래서 역시 나처럼 맥주라면 사죽을 못쓰는 친구들을 메사구집에 청해들였다. 다도(茶道)를 전수하는 사범처럼 조심스레 메사구를 찢어주며 맛보라고 했다. 쓴 첩약맛보기처럼 어덴가 보기에 안쓰러운 메사구를 조심스레 입에 넣던 그들의 입에서 급기야 맥주거품과 함께 굳(good)!호우(好)! 조오타!가 연줄로 튀여 나왔다. 술몇잔 못하면서도 안주만은 무척 가리는 까탈스런 량반들은 골살을 찡그렸지만 성미가 헌활한 우리 친구들은 거개가 메사구를 즐겼다. 그로부터 맥주를 좋아하고 메사구를 좋아하는 그룹이 자연스레 형성되게 되였다. 그중에는 소설가도 있고 시인도 있고 평론가도 있고 박사도 있고 편집인도 있고 요사이엔 녀류작가들도 몇분 가세하여 제법 문학파티, 메사구 파티가 열려 지고 있다. 날씨가 자못 쾌청한날, 퇴근을 반시간쯤 앞둔 즈음에 핸드폰이 울리면 그것은 어김없이 메사구집에가서 맥주를 들자는 신호이다. 주고받는 통화도 지극히 간단하다. 암호같은 짤막한 말마디를 주고받고 나서는 택시를 타고 절박하게 달려가 이제는 문학인들의 쌀롱이 되다싶이 한 그 메사구집에서 만난다. 는 술군들의 유머가 있다. 밥과 물이 육체의 수요라면 술은 정신의 수요라 할가? 여하튼 일상에서 술이 없으면 외려 마음의 좌표를 정하지 못하는 우리다. 사흘에 한번꼴로 잦게 만나서 맥주잔 기울이고 메사구를 뜯군한다. 이 몇년간 우리가 뜯은 메사구가 화물차로 몇바곤쯤은 될거다.우리가 단골자리를 바꾸자 몇몇 메사구집은 문을 닫은 일례 까지 있다. 메사구맛에 환혹된 우리들에게 자밌는 일화도 많다. 어느 한번 누군가 술상에서 얼결에 묻자 너나가 말문이 딱 막혀 버린적 있다. 내가 중국어 음을 따서 우수개로 이라고 번역했더니 했더니 친구들이 구을러 가며 웃었다. 허나 그에 대한 문학박사 G의 분석은 자못 진지하다. 라 함이 어떠냐고 했다. 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 (沒)는 없다는 뜻, (色)은 불교에서 말하는 즉 비였다는 뜻, (鬼)는 말그대로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니 역시 형체가 없다는 뜻, 몸과 마음을 비운 편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는것이다. 그 명분석에 감복하여 갈채를 올리며 우리는 술 석잔씩 크게 기울였다. 시인 L은 국외에서 몇달간 체류한적 있는데 그곳의 이방적인 음식이 입에 쇠통 맞지 않아 식탁에만 앉으면 온통 고향의 bc맥주와 메사구가 머리에 떠오르더란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 들리지 않고 트렁크를 든채로 메사구집으로 곧추 찾아 갔다. 시원하고 입맛에 맛는 고향산 bc 맥주에 오매불망 그리던 메사구를 어금이 아프게 아귀아귀 뜯고나서 그제야 직성이 풀린듯 만족의 신음을 토하며 집으로 갔다고 한다. 몇달전에는 전국각지의 뜻맞는 기성문인끼리 인터넷 동호회 하나를 만들었는데 문학정보담이며 우정이 담긴 이야기가 오가는 동호회게시판에서 메모뒤끝이면 의례히 메사구가 등장한다. 메사구가 그 무슨 련인들지간의 사랑의 징표인 장미나, 토착민들이 동굴을 여는 주문처럼 우리들의 사용빈도가 높은 어페로 되여 버렸다. 하도 메사구가 많이 등장하기에 우리 동호회 홈에 들렸던 한국문인 몇몇이 하고 궁금증을 삭이지 못하겠다는듯 게시판에 질문을 올렸다. 마른 메기안주를 말한다고 말하자 한국에서는 메기로 탕을 하지 포는 뜨지않는다며 그 무슨 황궁의 임금이 맛보는 이기나 한듯 메사구에 대해 흥취를 보이는것이였다. 명년의 연변행차 스케쥴을 잡고 만남과 교류를 약속하는 한국문인들의 메일뒤끝에도 어김없이 라는 메모가 덧붙군 했다. 이제 메사구는 연변의 작은 맥주집 식탁에 오르는 평범한 안주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세계적인 메사구로 되였다. 맥주안주로는 단것을 피하고 땅콩이나 쏘세지, 햄, 팝콘, 샐러드 같은것을 곁들면 좋다고 료리백과에 씌여있다. 료리의 왕국인지라 중국에서는 술에 따라 곁드는 료리에 대한 학문이 더구나 많다. 에는 새우나 게같은 어류 료리, 에는 닭고기 료리, 에는 불고기, 에는 단것을 곁들어 먹어야 제격이고 했다. 허나 우리에겐 단 메사구면 족하다. 우리 메사구친구들은 랑비벽이 심한 신세대와는 다르다. 거개가 청빈한 문인들인지라 얄팍한 호주머니사정에 맞춰 싸구려 안주가 있는 메사구집에 온곱게 모여드는것이다. 그 사정을 헤아린듯 마담이 볶은 해바라기며 자기집에서 먹던 마늘장아찌며를 곁들어 주어 그 유니크(獨特)한 단위법으로 우리의 매일같은 술상이 만들어 진다. 메사구를 뜯으며 만드는 우리의 화제는 간단한 안주상과는 달리 풍요롭다. 요즘 읽은 판타지 의 환상세계며, 요즘 상영되고있는 드라마 에 대한 감동이며, 애급금자탑 발굴과 관련한 기문이며, 컴퓨터 조작에서의 난해점이며, 영원한 숙제같은 가정문제며...고금중외 동서남북을 넘나드노라면 상이 둥굴어지고 머리속도 맥주배처럼 그윽히 차오른다. 그러다 메사구 육질같은 툽상스런 상소리도 가끔 올라 술상이 들썽하게 웃음잔치가 벌어질때도 있다. 술을 보면 로자로 남은 몇낱의 엽전마저 호기롭게 내쳤던 김삿갓은 안주가 없이도 술마시고 천하의 문장을 지어냈다. 그가 시구로 적다싶히 , 즉 안주가 없이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서도 시상에 취해 즐거워 마지 않아 한것이다. 우리가 간단한 메사구안주에도 술잔을 기껍게 기울이는 리유도 그와 비슷한데가 있는것 같다.   술을 즐기다보니 너나가 술에 관한 취문도 많이 알고 있고 우리가 취문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미국의 생리학자 크리스찬, 아돌프가 발견한데 의하면 술에 엉망으로 취한 사람들을 세워놓으면 자기마당의 작용인지는 몰라도 10명에서 8명은 동쪽으로 간다고 했다. 이 론문발표를 듣고 로스안젤스의 경찰들이 실험을 해 보았는데 술집에서 나오는 취한들을 단속하여 벌금을 시키고 경찰서에서 내보내면 처음에는 어리벙벙해 하다가 모두가 동쪽을 향해 가더란다. 우리 메사구동아리들중 술량이 크다고 자부하는 이는 나와 평론가 f이다.모두다 다혈질이라 술을 마셔도 크게 마신다. 허나 묘하게도 두 사람 다 집이 동쪽켠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아리들은 그렇게 술을 억벽으로 마셔도 집은 곧게 찾아간다. 소설가 c는 일전, 만취한 귀가길에 태기가 있는 안해가 시쿤 포도가 먹고싶다던 말이 요행 떠올라 밤시장에서 포도 몇송이를 사들었다. 새끼걸음을 꼬며 가다가 목이 갈해서 가는 도중에 포도를 다 뜯어먹고 맨 포도줄기만 들고 집에 들어섰다. 그래도 자기를 잊지않은 고주랑망태 남편이 고마워 안해는 꿀물을 진하게 풀어 드리더란다. 이렇게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우리 애주가들이다. 란세를 버리고 오골있게 살아간 옛 선비동아리들중의 대표로 떠오른 , 세상의 탁음이 싫어 대나무숲에 들어가 한평생 올바르게 살고자한 선비였던 그들은 한결같이 애주가였다고 한다. 그들중 맏이인 원적은 련일 60일을 술마신 기록이 있고 어머니가 림종했을때는 두말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외 류령은 15말, 산도는 8말로 주량이 엄청 컸고 술을 제일 적게하는 혜강은 술을 마시고는 노래와 사를 읊어 술상을 둥글게 했으며 팔달은 괴이한 버릇이 있어 아예 발가벗은채 몸과 마음을 한껏 풀어놓고 마셨다고 한다. 그들은 술도 모르는 속물을 보면 백안(白眼) 즉 흰눈으로 대하고 술 지기를 보면 청안(靑眼) 즉 보통시선으로 대한 일화로 유명하다. 벼슬을 싫어했던 그들중에서 원적이 군관직의 말단의 벼슬이라도 맡은것은 군영의 창고에 수백석의 술이 저장되여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였다고 한다. 또 주량을 알수없는 대주가 류령은 술의 효용(效用)을 칭송하는 이라는 작품을 짓기도 했다. 유유자적한 그 술의 찬미는 번거로운 현실에서 빠져나와 천지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함이였다. 넉넉한 생성과 소멸의 섭리에 몸을 맡기는것이야 말로 참된 인간존재의 모습이라는 로자사상의 리념을 보여주고 있는듯하다. 이 장대한 몽상을 자신의 몸속에 끌어들이는것이 바로 술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우리의 메사구 동아리도 마침 일여덟명, 매사가 환금성으로 가늠되는 요즘 세월에 하필이면 문학에 현혹되고 문학에 기대여 사는 인물들이다. 우리는 장난기에 절어 스스로를 이라고 부른다.이란 의 준말. 분위기에 어울리는 화제와 술병을 찾아놓고야 비로서 풍류를 아는 선비로 대접했던 옛선비들처럼 일정한 술량과 메사구 안주를 즐기는 이들로 우리는 무어졌다. 우리들은 터무니 없고 매끄러운 대인관계를 싫어하고 금전 권력 명예따위에 초연하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문인상경(文人相敬)이 문인상경(相輕)으로 전락되여버린 요즘의 가슴 아픈 풍조속에서도 문인의 우정을 첫자리에 놓고저 하는 사람들이다. 술마시기 위한 본래적 행위가 아니라 술로써 매개되는 다른것을 이룩하기 위한 동감이 오가는 동아리이다. 이 어우러지면 맥주 한박스쯤은 잠간새에 동이 난다. 리백님이 으로 유명하다지만 당시 도량형으로 1두는 바로 1홉, 지금으로 보면 2리터의 분량이니 그닥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술을 그렇게 애착하면서도 문학공부에는 게으름없이 문단의 중견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 친구들이 바로 오늘의 이요, 라고 자호하고 싶다. 그리스인들은 친구끼리 술상에서 약속을 다질때면 한손은 술잔, 다른 한손은 서로의 성기에 얹는다고 한다. 그들처럼 만취해서도 우리는 자못 진지하다. 우리도 술상에서 서로 약속을 다질때가 많다. 거개가 작가 아니면 편집인이라 서로의 문학지에 작품을 써주겠노라고 다짐하는것이다. 물론 그리스신들처럼 괴의한 방식이 아니여도 마음에 마음을 얹고 서로 이한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며 빈혈증세를 보이고 있는 우리의 문학예술지들에 신선한 활력을 주입할것을 서약하는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에서는 품값의 일부를 맥주로 지불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농민은 하루에 1리터, 관리원 학자들은 5리터, 녀직원들도 대추야자의 과즙을 탄 달콤한 맥주를 좀씩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정기적으로 맥주를 신심속에 주입해야 하는 우리는 문학의 위상이 떨어진 요즘세월에도 붙박이로 문학의 터전을 고수해나가는 자신들을 스스로 맥주라는 상패로 안위하고 장려하는것일가? 그 무슨 희한하지도 않은 메사구 하나를 놓고 흥감질이냐고 혹자는 웃을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메사구가 좋다. 그런 BC가 좋다. 중국속담에 고 했고 로씨아 속담에는 고 했다. 사람의 인품을 알려면 함께 술을 마셔봐야 안다고 했다. 즉 는것이다. 나는 나의 도타운 메사구 동인들을 사랑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있는 문학을 사랑한다. 그 툽상스러우면서도 소박하고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친구같은 메사구와 순하면서도 사납고 사나우면서도 귀여운 애인같은 맛의 술을 사랑하듯이! 지리에서 북위 40~ 50도 사이를 라고 부른다. 밀위키며 삿뽀로며 뮌헨이며 맥주가 많이 나는곳이 전부 다 이 위도에 위치해 있기때문이다. 그렇게 지도에 기록될만큼 맥주는 온 누리의 사내들이고보면 생명으로 선호하는 음료이요, 생명수다. 술은 사내들의 영원한 지중해이다. 그 물결속에는 사내들의 소모되여버린 수많은 추억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고 사내들이 넘어야 할 수많은 시련의 파도가 기다리고 있다. 매일같이 호매롭게 술의 해양속으로 잠수하는 사내들, 그곳에 진정 사내들만의 천지가 있다. 정토의 신천지를 찾아 미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추수감사절때면 오염된 물이 몸과 마음을 더럽힐가봐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한다.하여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술(spirit)이란 말은 령혼이라는 말과 꼭 같이 쓰인다. 잔잔한 술로 머리를 식히고 유쾌히 마시는 기분으로 삶의 의욕을 다시 북돋아주는 술, 나는 한잔의 술이 나의 령혼을 맑게 정화해 주리라 애주가의 변(辯)이 아닌 마음으로 믿는다. ♡  
1    겨울새 댓글:  조회:3003  추천:73  2007-06-29
  . 수필 .   겨울새  (1993년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수상작) 김 혁     두 번째 눈이 내리던 날, 그러니까 11월 초순께의 일이었다.   신문사 이웃부인 사회교육부의 동료인 A선생이 아침나절에 나를 불렀다. 20년간 기자행업에 몸 담근 연장자인데다가 원체 성정미가 도고한지라 돋보여 평소에는 요긴한 말 외에는 구구한 면담도 없이 여태껏 지내 온 선배였다. 나는 약간 어줍은 기색이 되어 그의 뒤를 따랐다.     A선생이 악동같이 장난기 묻은 웃음을 지으며 조금조금 사무실 서랍을 잡아 당겼다. 서랍 속의 실체를 일별하는 순간, 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경아성이 튕겨 나갔다.     새였다.   빨간 부리, 비취색 깃을 가진 새였다. 얼핏 보기에는 미니완구로 착각이 들 만큼 작은 새 한 마리였다. 할딱이는 흰 가슴, 자주 깜박이는 작은 눈은 그 역시 하나의 소중한 생명임을 말해주는 상 싶었다.   홀연 새가 되알진 소리로 우짖었다. 그렇게 높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용한 사무실, 스팀속의 출렁이는 물소리와 서걱서걱 글 쓰는 소리만이 단조로운 음향의 그라프를 긋는 사무실에서, 이색적인 그 모난 우짖음이 주는 공명성은 컸다. 하여 주춤 놀라기 까지 한 나였다.   A선생은 출근길에 길가에서 주어 온 이라고 새의 출처를 밝혔다. 빙설에 박제된 콘크리트 숲에서 추위와 소음에 떨고 있는 가여운 생명을 보고 그저 지나칠 수 없어 큼직한 외투호주머니에 신주 모시듯 하여 왔다는 것이었다. 한편 집집마다 굳게 창을 봉한 이 혹한에 어디서 어떻게 날아온 새인지 로를 일이라며 의뭉스런 낯빛을 지었다.       모두가 자연을 멀리한 책상물림들이어서 새의 이름을 감별하기 어려워했다.     A선생과 함께 제 나름대로  새의 이름 짓기 작업에 뇌 즙을 짜던 나의 노리로 저도 모르게 시인들이 즐겨 구사할 그런 조합이 획을 그었다.       A선생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여직 돌의 표피처럼 딱딱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던 A선생 이 그렇듯 즐겁게 홍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신문과 편지를 조달해 주는 통신원 여자애가 새를 보고 귀여워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우체국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집에 들려 좁쌀까지 한 줌 넣고 왔다.   나는 좁쌀알을 손바닥위에 펴놓고 새의 부리 앞에 내밀었다. 새는 조금 멈칫거리다가 머리를 주억거리며 쪼아 먹기 시작했다. 작으나 억센 부리가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잠자리의 날개 짓처럼 미세한 감각의 파장이 일신에 뻗쳐왔다. 나는 간지러운 나머지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피부에서 가슴으로 뻗치는 아릿하면서도 무거운 그 감동은 가슴 속에 침전되어 있던 인간의 원초적인 박애의 감정을 환기시켜 주는 듯 했다. 한 작은 생령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만부해 오름을 억제할 길 없어 했다.   점심, A선생이 맥주 집으로 가서 한잔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해 왔다. 나는 흔쾌히 따라 나섰다.   우리는 삶은 조개를 안주로 맥주를 흠뻑 마셨다. 비닐 컵에 담긴 0,5킬로 생맥주를 대번에 굽 냈고 쇠돈을 조개껍질의 틈바구니에 박아 넣어 벌컥 젖히고는 그 속에 솔 곳이 담겨진 붉은 살을 걸 탐스레 후벼먹었다. 경쟁이 강요되는 요즘세월, 긴장한 호흡만이 흐르던 일상 중에 서로 가려왔던 생경한 탈을 벗기듯 딱! 딱! 신나게 조개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하였다.   요즘 풍미되고 있는 애견 열(熱)이며, 맥주의 안주 챙기기며, 힘들게 읽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며, 베스트셀러 이며, 상품시대 방황하는 문인들의 현황이며...에 대해.   작은 새의 출현은 여유 없던 우리들의 사이에 그 어떤 공명을 유발시켰으며  그 새를 화제로 하여 우리는 서로 갑문을 터치고 추호의 가감도 없는 세계에서 구애됨이 없는 면담을 나눌 수 있었다.   그날로부터 새를 돌보는 일은 우리들의 따분한 일상에 신선한 활력을 주입하는 일과로 되어 버렸다.   손목 시큰하고 어깻죽지 뻐근하게 글을 쓰다가도 A선생의 사무실로 찾아 들어가서는 그 무슨 진귀품이라도 감상하듯 새를 구경하곤 했다 .먹이도 때때로 주고 보온병 덮개에 물을 담아 먹이기도 했다. 퇴근 시에는 스팀과 제일 가까운 서랍 속에 넣어두고는 호흡에 영향이라도 줄까봐 서랍을 빠끔 열어놓고 가기도 했다.   동 시장 부근에 가면 새 초롱을 파는 전문매장이 있다고 열심히 알려주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고 롱을 걸어오는 시럽 쟁이 동료도 있었다. 모여 선 사람바자 속에서 새는 꺅! 꺅! 사뭇 즐겁게도 우짖었다. 빙설로 박제된 계절이지만 새는 인위로나마 따뜻한 봄내음을 주조해 주는 상 싶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꼭 닷새밖에 안 되었다. 신선한 맥락으로 이 며칠을 지내오던 우리들의 가슴 가슴에 새로운 충격이 밀착해 왔다.   새가 죽었던 것이다. 새가 죽었다. 낡은 책상서랍의 뒤 부분에 구멍하나가 뚫려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날아 내린 새가 차가운 콘크리트바닥에서 한 밤을 지새우다 얼어 죽었던 것이다.       A선생이 추연한 눈빛이 되어 말했다. 혹여 살아날 수 있을까 새를 털모자에 싸서 스팀위에 올려놓아도 허사였다. 눈을 꼭 감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새는 하나의 잘 만들어진 박제품을 방불케 하였다. 죽음 역시 아름다울 때가 있고나하고 나는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새의 죽음에 지지름을 당하고 있는 마음을 느껴 나는 앙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허전한 감이 한가슴 가득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A선생은 새를 버리지 않았다. 새를 창턱에 놓인 화분통의 꽃을 떠내고 그 밑에 묻었다. 그 무슨 대장(大葬)이라도 치르듯 묵연한 몸가짐을 지켜보노라니 홀연 어느 문예지에서 읽었던 시 한수가 환청같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새의 음향이/나의 동공에 안기어/싱싱한 꽃 피우면/   나의 마음은/레몬 빛 단 즙에 취하여/꿈을 꾼다./   꿈속에 아리송하게 보이는/ 봄 언덕 봄 다리를 지난 나는   열매 맺힌 새의 이름을/앞산더기 밭고랑에 뿌렸다.    새는 죽었다.   겨울새는 죽었다.   하지만 겨울새가 묻혀있는 화분통의 선인구(仙人球 )는 여느 때보다도  왕성하게 자라났다. 물기를 머금은 동근 초록빛 몸체는 새의 파란 깃을 방불케 했고 몸체의 융기점마다 돋친 가시는 새의 부리를 방불케 했다.   그 선인구를 볼 때마다 새를 생각하곤 한다. 겨울새를 생각하곤 한다.   살아가기가 너무 힘이 부친 요즘의 엄동에, 우리 사무원들의 메마른 인정세계에 윤활한 우짖음을 뿌려주고 간 새, 계절을 앞질러 준 한 마리의 겨울새를...   이제 정녕 봄이 오면 새의 심성이 담겨있는 꽃은 더 예쁘게 더 싱싱하게 자라오를 것이고 온갖 철새는 무양하게 떼 지어 찾아 올 것이고 그때에 우리는 화려하게 물드는 지상의 계절 한  켠 에서,  초록의의 향연 속을 거닐며 짧으나마 우리에게 봄 양기를 만끽하게 해준 한 마리의 영물- 겨울새를 다시 그려보게 될 것이다.   "연변일보" 1993년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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