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봄은 메일을 타고
김 혁
1,
절친한 문우들이 보내온 메일카드를 열어보고 봄이 왔음을 소스라쳐 감지하게 되였다.
아직 창 너머 보이는 맞은 켠 옥상의 눈이 녹아내리지도 않았고 길을 나서면 매운바람이 목덜미를 채찍질하건만 메일카드가 담긴 보관함 속은 봄기운으로 그득 차있다.
《봄을 느끼세요.》, 《봄나들이》, 《봄날의 구두수리장이 아저씨》... 제목만 봐도 봄기운을 짙게 체취할 수 있는 정교롭고 아치(雅致)한 카드들이 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회답을 줄 양으로 나도 메일카드를 골라보니 그러한 봄을 주제로 한 카드가 10여개나 되였고 이달의 추천카드도 거의 모두가 봄에 관련된 카드였다. 그중 몇 개를 정성스레 골라 메일에 띄우며 나는 금세 봄을 배달하는 즐거운 우편배달원 같은 감흥에 흠뻑 잠겨버렸다.
지난겨울은 근년 들어 진짜 겨울답게 반세기동안 보기 드문 큰 눈도 내리고 하였다. 내 좋은 사람끼리 눈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모여 달콤한 술잔도 나누고 얼룩 없는 우정도 나누고 지성 배인 대화도 나누면서 눈이 주는 부피만큼 두터운 감흥에 내내 사로잡혀 지냈었다. 그런데 어느새 봄이 막간극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막 뒤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고 나를 놀래고 있는 것이다. 메일카드를 읽으며 급변하는 세월의 조화에 나는 그만 마우스에 손을 얹은 채 천치처럼 정체불명의 감개에 잠겨버렸다.
겨우내 추위에 지지름을 당했던 박제된 마음을 풀어주는 봄은 왔다. 번요한 일상의 소요 속에서도 봄은 소리 없이 왔다. 잠들었던 모든 것들이 눈을 부비며 일어나고 온갖 물상들이 저마다의 몸짓, 저마다의 소리를 얹어 생기를 부여하는 그런 봄이 빨리도 다가왔다.
솔로몬왕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봄으로 구애(求愛)했다고 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눈도 그쳤고 땅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되었는데…》
사랑에 빠진 왕처럼 두 팔 벌리고 하늘 우러러 감동하며 대기의 중간을 청량한 기운으로 채우는 봄 양기를 더듬어본다. 계절의 은밀한 변화와 함께 한겨울 신고를 치르던 비염도 많이 나아져 한결 개운해진 몸과 마음이다. 그래서 언젠가 읽었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어느 시인의 《겨울속의 봄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읊어본다.
아침 한때, 순금의 부리로
새들은 남은 잔설을 쪼아 대고
무어라고 읽고 가는 바람의 전언
눈 뜨는 나무 눈 뜨는 풀꽃들의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
수피의 깊은 안쪽에서는
몇 개의 새순이 자라나고 있고
사랑의 품사로 점점이 물들어가는
나의 눈과 목소리처럼
비쭉비쭉 푸른 혈관이 일어서면
홀연 눈썹위에 내려앉는
청아한 뻐꾸기 울음소리
겨울 냉기는 땅강아지 발목 앞에서
바쁘게 무너지고 있다.
일습을 개변하여 한결 홀가분해진 여인네들의 봄단장이 한결 눈에 다습다. 전신의 우울을 벗어버리고 겨우내 아름다운 몸매를 지겹게 포박했던 솜붙이를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고도 여흥적인 모습이 된 여인들, 현란한 디자인과 색조의 의상으로 원체 아름다운 모습에 더 밝고 화사한 이미지를 부여한 여인들, 봄과 그네들 사이에 기다란 두 줄기 같기 부호를 그어본다.
2,
봄이라 제명을 밝히면 언제나 햇빛, 꽃, 향기, 여인 이런 순으로 우리의 뇌리에 버릇처럼 서열을 지어 다가온다. 봄은 꽃을 분만하는 계절이요, 여인은 또한 꽃처럼 아름답다는 투박하나마 본능적인 연상의 조합인가 보다. 항간에서 애창가요로 내내 불리는 《여성은 꽃이라네.》라는 노래가 그런 연상을 한층 더 유발시키는듯하다. 하기에 봄이 오면 누님같이 친절하고 애인같이 사랑스럽고 이웃집마누라같이 후덕해 보이는 그런 여자를 찾아 자꾸만 무언가 입담거리를 만들어 주근주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일군 한다.
좋은 입담거리 하나 만들어보면,
요즘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변조된 포즈가 놀랍다. 단지 감상적으로 한 두 송이의 계절 꽃과만 어울려볼 요즘의 여인들이 아니다. 꽃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에 어제의 감상가치가 있다면 또한 마음껏 열고 마음껏 자기존재를 현시하는 것이 오늘날 꽃의 다른 한 양상이다. 가혹함에 가까운 상품화시대, 경쟁이 소기되는 시대에도 남정네들과 동조하여 참여의식을 키우고 있는 여인들, 여기저기에서 그만의 지혜와 정열과 운치와 기품을 보이고 있는 여성들, 이것이 곧바로 규방을 멀리한 오늘날 여성들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
《내면의 무(无)에 대해 여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어릴 적 무섭게 들은 옛말속의 귀신보다 소녀 적 밤길에서 만난 악한보다 더 두려워한다. 하기에 여자는 자신의 무로부터 탈주를 하게 된다. 즉 그녀들은 자기 혼자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망을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할일 없다는 것은 자기 혼자서 무한한 암흑 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플랑크는 이렇게 분석한바 있다. 이는 전통에서 탈주하고 전통의 이미지를 파격하고 있는 현시대 여성들의 심태에 대한 정론이며 분석이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엄동의 추위와 같은 긴긴 터널을 여인들은 경유해왔다.
역사의 장하를 거슬러보면 거의 모든 민족, 거의 모든 종교, 고대거나 근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여성은 남성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왔다. 권력의 척도는 언제나 남성이 우월하다는 학설 쪽으로 기울여져왔다. 지어 명지하다는 철학가들마저도 여성들에 대해 색안경을 걸고 이단에 가깝게 대해왔다.
고대희랍의 저명한 객관적 관념론 철학가인 플라톤도 여인은 그저 남편의 재산의 일부분으로서 말, 소, 개와 같은 사유물이라고 인정했다고 한다. 성(性)선택 진화론에서도 일전까지는 성유전자 중에서 남성의 우월성을 전제로 해왔었다. 이 공정치 못한 관점은 《양성은 생리학의 의의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과학적인 검증에 의해 뒤늦게야 바로잡혀졌다. 이렇게 우리의 여성들은 장장 몇 세기를 무지하고 고루한 전통적인 인습과 편견의 저애에 본능, 자유, 실존을 여지없이 짓눌리고 종속적인 위치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강력한 유교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하여 여성은 사회참여는 제쳐놓고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되어왔으며 여성에게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란 그저 혈통계승의 도구대역일 뿐이었다.
그렇게 지겨운 불운의 그늘 속에서 지내왔던 그녀들이 자신들의 소외와 불이익을 자각하게 되였고 보조자의 대역만이 아닌 주체 적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부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복종과 희생이 더 이상의 미덕이 아님을 알아차렸고 뛰어 일어나 사회적으로 조장하는 뿌리 깊은 남성중심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으며 여성의 인간화와 해방의 궁극적 명제를 위하여 몸을 바쳐왔다. 그렇게 높은 벽을 넘어 드디어 지금은 자유스레 자기에게 주어진 시공(時空)을 처리하는 주체적인 실존자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그네들은 진정 삭막한 환경에도 닻을 내리우고 끈질긴 인고로 완강하게 피어나는 무수한 꽃송이이다. 더욱이 멱을 바싹 죄는 듯한 혹심한 경쟁이 주어진 오늘날 기계문명이 빚어낸 잡다한 소음과 스모그 오염 속에서도 꽃은 완강하게 피어나고 있으며 그 꽃처럼 어여쁨과 성숙의 관능미를 지닌 여성들이 날로 붇고 있다.
《음성양쇠(陰盛陽衰)》의 풍조를 두고 혹자는 조소하고 우려하고 힐난하고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역시 기꺼운 풍조가 아닐까
모계사회를 거쳐 온 우리 인류는 기실 심성바탕에 언제나 여성에 기탁하는 근성의 일면을 은연중 깔고 있다. 허다한 종족의 신앙계를 살펴보면 화신(火神)은 에누리 없이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태고 적 한개 부락에서 그 명맥을 이어주는 필수품인 불씨를 보존하는 중임은 부락에서 가장 지혜롭고 존경받는 여성에 돌려졌으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가 우러르는 인끔 높은 존재로 우상화 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설화를 펼쳐 봐도 여성숭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진맥해 낼 수 있다. 《후한서 옥저전(後漢書 沃沮傳)》의 기재에 의하면 옛날 함경도 지방에 생존해왔던 동옥저의 동쪽바다가운데 섬 하나가 있는데 그 섬은 사내라고는 한사람도 없이 말짱 여인네들만이 어우러져 사는 여인국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시조인 석탈해의 어머니도 원체 《적녀국》이라는 여인국의 여자였다는 설이 있다. 이 설화의 전래 때문이었던지 중세기 서양 사람들의 우리 민족에 관한 견문가운데서 조선에는 여자만 사는 여인국이 있다는 대목이 어김없이 들어있다. 자기 씨족의 시조를 신성화해야 할 소박한 심경으로부터 그네들은 단지 흥감스러움이 아닌 경건함으로 신기루 같은 여인국을 설정, 그로부터 여인을 우상화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할진대 오늘날 여성들의 새로운 부상과 그 존재의 과시를 두고 온 곱지 못한 눈길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봄의 자체는 창조적의미를 품고 있다. 그만큼 봄과 꽃과 동일시되고 있는 여성들의 창조적 이미지에서 짙은 봄 양기와 함께 우리는 경이로움에 앞선 기쁨과 동감과 자부를 느껴야 할 것이다.
남다른 순발력으로 시대와 접속하고 있는 여성들의 양상을, 메일을 타고 온 봄은 진한 메시지로 나에게 남겨주었다. 그래서 내 사색의 컴퓨터자판기도 봄 양기의 율동으로 가락 맞는 봄꽃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나보다.
"연변녀성"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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