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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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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론 . ​ 대상화와 소외화의 장치 해제를 위한 열쇠 - 젠더(gender) 시점으로 읽는 김혁의 장편소설“춘자의 남경”   시노무라 리에 (교토 불교대학, 문학박사) ​   ​ 들어가면서 ​ 우선 여기에서 말하는 젠더란 무엇인가, 그 개념에 대해 분명히 밝혀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요즘에도 곡해된 젠더개념들이 표류되고 있기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젠더(gender)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성(性)차이’이다. 즉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서 보여지는 남성과 녀성의 구별이다. 남성성과 녀성성이 생리적인 차이로부터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젠더는 단지 구별이지 차별은 아니다. 그런데 오랜 력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유교적가부장제도하에서, 그리고 전통적인 문화환경속에서 형성된 남성성과 녀성성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성적 역할분담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녀성을 “제2의 성”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녀성의 지위가 사회와 가정에서 낮았음으로 인해 녀성문화(정신문화와 물질문화)가 차별시되고 무시되여 왔다. 그 녀성성(녀성문화)이 근대에 들어서서 페미니스트와 인류학자, 민속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여 가치가 부여되고 정당화되였다. 말하자면 반제도적이었던 것이, 반문화적이었던 것이 정당화 되여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되였다. 따라서 페미니스트가 이 시점으로 작품을, 특히 남성 작가의 작품을 논할 때엔 늘 신랄한 비판과 야유가 쏟아지군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젠더리론에 대해 승인하고 있다. 남성성과 녀성성의 존재를 승인한다면 한 작품을 둘러싸고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작자와 독자사이, 그리고 독자사이의 성적 차이에 의한 충돌은 피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상정내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충돌도 결국에는 그 작품에 귀속되는 것으로서 충돌에 의하여 작품의 세계가 보다 넓어 지게 된다. 작자 김혁씨가 나에게 작품을 보여 주었을 때엔 아마 이 점을 념두에 두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작품에 다루어진 문제가 문제인 것 만큼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다룬 소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에 대해 진지히게 고민해본적은 없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녀성독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  현실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또한 전쟁의 참혹성을 말해주기 위한 산 증명이고 강유력한 력사 자료이다. 통치배의 폭력과 침략자의 만행에 의해 인권과 녀성권을 박탈당한 피해자중의 피해자이다. 폭력과 만행을 폭로하고 슬픔과 아픔을 전하는데 있어서 실물과 실언보다 더 유력하고 감화력이 있는 표현이 따로 있을까? 명명백백한 실제 사실을 굳이 허구로 표현하려 했을 때엔 현실을 의식영역에 끌어 올려 전술한 현실적 의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파헤치기 위해였을 것이다. 작자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했고 어떤 문제를 내 주었을까? 소설이라는 문학쟝르에 설치되여 있는 가지가지의 대상화, 소외화의 장치를 과연 어떻게 해제할 수 있을까?   마술에 의한 실상과 허상의 숨바꼭질     우선 작자가 어떤 마술로 사실을 허구로 꼬았는가, 아니, 어떻게 허구라는 실로 사실이라는 구술을 꿰였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은 봇짱 시계탑 앞에서 시작되여 봇짱 시계탑 앞에서 끝난다. 이것이 우선 로련한 소설가의 첫번째 테크닉, 꾸밈새이다. ​ 나쓰메소세키의 문학에 도취되여 있는 조선족 청년 종혁이와 그런 종혁에게 반해버린 하루꼬가 시간을 공유하려고 한다. 청년 남녀의 이 행위가 상징하는것은 즉 미래를 함께 하고저 하는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 앞에 장애가 나타난다. 하루꼬의 할아버지이다. 하루꼬의 할아버지를 이어 종혁의 할머니, 나아가서 력사가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있다. 그들이 과연 이 모든것을 이겨내고 맺어 질수 있을까? 드라마나 소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의 패턴, 로미오와 줄리에의 패턴이다. 이렇게 꾸며진 이 러브스토리가 소설을 처음에서 마지막으로 이어가는 주선이다. 스토리를 엮어나감에 있어서 굳이 흔히 있는 패턴을 선택했을 땐 작자가 노리고 있는 것이 이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 소설에서 허구의 분위기를 북돋아 주는것은 하루꼬의 ‘할아버지’라는 기묘한 캐릭터이다. 다른 등장인물은 실재한 인물을 모델로 했거나 현실속에 있을수 있는 인물이지만 유독 이 ‘할아버지’만이 그 어데도 없는 인간이다. 이것이 두번째의 꾸밈새이다. ​ ‘량쪽으로 치켜 올라간 카이저 수염’,  ‘절의 문켠에 선 수문장처럼 찢어져 올라간’ 두 눈섭에 ‘채도가 칙칙한 기모노 옷차림’으로 개화장을  휘두르는 ‘할아버지’는 일본 에도말기나 메이지시대에서나 볼수 있는 인물상이다. 전설속의 인물같기도 하고 어덴가 소세키를 닮은것 같기도 한 외모이다. 현재 천엔짜리 지폐에서 소세키가 사라진것처럼 일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보습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실은 남경에 간적있는 원 일본군, 즉 가해자이다. ‘할아버지’의 형상에는 일본 전설속의 용맹한 무사나 근대문학사의 대문호, 그리고 극악무도한 전쟁범 등 여러 인물상이 겹쳐져 있다고 볼수 있다. 일본이 갖고 있는 여러 얼굴이 겹쳐진 상징적인 캐릭터이다. ​ 다음 세번째 꾸밈새는 이름의 일치이다.  춘자와 하루꼬는 각기 조선어와 일본어로서 발음은 다르지만 한자 표기는 일치하다. 봄 春자에 자식 子자이다. 봄에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다. 근대 언문일치운동 이전에 조선이나 일본은 모두 漢文을 正統文, 美文으로 인정하고 썼다. 근대에 한자를 거의 버리다싶이 한 조선민족이지만 이름을 한자로 짓고 한자로 쓰는 문화가 아직 남아 있다.  춘자의 봄은 아픔과 슬픔과 굶주림과 죽음의 계절이였다. 한편 일견 풍요로운 물질세계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는듯한 하루꼬이지만 정신상 고뇌에 시달리고 있다. 춘자와 하루꼬는 각기 자신을 원점으로 하는 자그마한 원안에서 돌았었다. 종혁이와 하루꼬의 만남이 없었다면 두 원은 서로 아득히 멀리 떨어진채 영원히 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표면상 종혁이에 의하여 두 원이 우연히 접하게 된 것으로 보여주면서 이름의 일치로 실은 그 것이 필연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두 원의 접함은 춘자와 하루꼬가 태여나기전에 먼 옛날 고대에 벌써 약속되여 있었다. 둘은 서로 접해야 하고 겹쳐져야 할 숙명이였다. 하여 필연적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남경(난낑)에서 겹쳐지게 된다. ​ ‘춘자의 남경’과 ‘하루꼬의 난낑’이 바로 네번째 꾸밈새이다.  위의 꾸밈새들은 모두 이 네번째를 위하여 준비된것이라고 볼수 있다. 여름 방학에 종혁이와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을 따라 ‘난낑”에까지 간 하루꼬였지만 차마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만행을, 그 만행하에 처참히 쓰러져 간 죽음들을 직시할 수있는 용기조차 하루꼬에게는 없다. 고물시장에서 장사치들의 경멸과 수모를 받는 하루꼬는 가해자의 손녀로부터 일변하여 피해자로 된다. 하루꼬를 피해자로 만든 진정한 가해자는 바로 ‘할아버지’이다. 여기서 춘자와 하루꼬는 완전히 겹쳐진다. 가해자 ‘할아버지’가 저지른 만행의 피해는 동시대의 춘자를 비롯한 타민족 녀성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70년후에 자신의 혈육인 하루꼬에게까지 미쳤다. ​ 소설의 세부마다 보여지는 작자의 테크닉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논하기엔 편폭의 제한이 너무 크다. 마법 풀기를 이만쯤 해 놓아도 작자가 보여주려는것이 뚜렷이 나타난듯 싶다. 상술한 허구에 의해 부각된것은 모두 허상(현실속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나 사건)이다. 그런데 이 허상이 아니면 보여 줄수 없는 실상(현실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나 사건, 또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자. ​ 그런데 이 소설을 단순한 허구로 읽기엔 너무나도 많은 실상이 산재되여 있다. 사슴골의 참변으로 부터 시작하여 ‘상남군부위안소’, ‘상북군부위안소’, ‘일본군 위안부’, 남경대학살,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실재적 존재이다. 이러한 실상을 다룸에 있어서 작자는 두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 하나는 리얼한 묘사이다. 18세기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사실주의사조의 뒤를 이어 전 지구를 휩쓴 자연주의사조에 의해 완성된 리얼리즘의 모사(模寫)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것이였다. 흔히 작자자신의 경험과 인생 그자체였다. 소설 “춘자의 남경”의 리얼한 묘사는 작자자신의 경험에 의한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생동하여 당혹감조차 주는 소설속의 ‘리얼한 묘사’는 리얼리즘과는 다른것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또 하나는 허구화이다. 사슴골의 참변으로 부터 ‘일본군 위안부’사건, 남경대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실제사실들이 춘자라는 인물형상에 의해 하나로 이어지고 다시 종혁이와 하루꼬의 러브스토리와 얽힌다. 실제사실뿐만아니라 흑룡강성 동녕현에서 발견된 피해자 할머니를 비롯하여 실재한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자가 모두 한 선으로 이어진다. 소설에 그려진것이 실재한 인물과 사건이기에 실상이라고 믿고 잡아 보려면 잡을수 없는 허상이다. 작자의 마술에 의한 실상과 허상의 숨바꼭질이다. 작자는 현실을 허구화하였고 형이하학적인것을 형이상학적인것에로, 물리적 령역의것을 의식적 령역에 끌어 올렸다. 하여 현실속에서는 일어 날수 없는 현상을, 즉 실상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을 허상을 통하여 표현할수 있었다. 점점이 널려 있던 하나하나의 아픔과 고통이 춘자의 형상에 집결되고 거대화되여 피해자가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하루꼬의 ‘할아버지’ 형상은 물론 사슴골 참변을 일으킨 일본군이나 남경대학살을 감행한 일본군, 그리고 춘자의 몸과 령혼을 짓밟은 일본군의 추악한 형상과 겹쳐진것이다. ​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작자는 그를 무자비한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성격이 괴벽하기는 하지만 고양이들을 살뜰히 껴안고 쓰다듬어 주는 따스한 인간이고 무엇보다도 손녀를 끔찍히 여기는 인정이 많은 인간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머리속에 그리고 있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그리고 있을 ‘피해자의 이미지’와 ‘가해자의 이미지’, 즉 의식속의 실상인 것이다.  소설에서 하루꼬의 ‘할아버지’는 끝내 속죄를 하지 않고 가해자인 채로, 춘자도 끝내 용납을 못하고 피해자인채로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춘자와 하루꼬의 겹침이 의미하는것처럼 가해와 피해, 속죄와 용서는 두 사물의 두 문제인 것이 아니라 한 사물안의 한 문제이다. 종혁이도 하루꼬도 피해서 갈수 없는 문제이다. 하여 종혁이는 이 모 것을 다 끌어 안고 가려고 한다. 종혁(또한 작자)의 변증법적 철학관의 형상화이다. 종혁이는 도망하려는 하루꼬를 붙잡으려 하고 하루꼬와 다시 봇짱 시계탑앞에 선다. 실존주의적 사상에 립각한 종혁의 주동성과 책임성이 있는 행동이다. 이는 작자가 독자들에게 내준 문제이기도 하다.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연변인민출판사 2018년)   객체화와 소외화의 견고한 장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성폭행, 남경대학살과 같은 만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하여 유관 증명자료들을 없애려 하고 사건자체를 부인해 왔던 일본의 우익적 인간들도 엄연한 증언과 증명자료 앞에서 이젠 부인할수 없게 되였다.  더는 부인할수 없게 되자 이제는 다른 구실을 찾는다. 당시 남경의 인구가 30만이 안 되었는데 어떻게 30만이 학살되였다고 할수 있느냐고 수자라도 줄여 보려고 떼를 쓴다. 그리고 일본군에만 위안부가 있었느냐, 미국군에도 있었고 한국군에도 있었다 운운 련대자를 찾아 책임을 회피하려거나 수치감을 덜려고 한다. 혼자 벌을 받기보다 함께 받는 상대가 있으면 수치감을 덜수 있다는 소학생들이나 해보는 유치한 생각이다. 원 오사카시장 하시모토도오루가 몇년전에 이런 망언을 하여 세계의 주목거리로 된적이 있다. ‘위안부’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결핍한것은 물론 이런 말을 내뱉는 심사가 비틀어진 것이고 태도가 건방지기 그지없다. ​   ‘위안부’문제의 본질을 해명하려면 그 발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캐야 할것이다. 한마디로 찍어 말해서 남자들의 성욕을 채우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제도화한데서 온 것이다. 남권사회의 가부장제도는 남자의 혈통과 성으로 이루어 지고 이어져 내려가는 가문제도이다. 가문의 번영창성과 나아가서 나라의 번영창성을 위한 남자의 성행위는 정당화 되고 제도화 되였다. 남근중심주의의 극단화가 만든 것이 기방(일본에서는 遊廓)제도이다. 녀자를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물질화한 것이 기생, 또는 遊女이고 기생, 유녀가 바로 ‘위안부’의 모델이다. 일본의 유곽은 아즈치모모야마시대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치세(1585년-1603년)하에 권력의 통제와 보호를 받아 성립되였다. 근대 자유민권운동과 더불어 일어난 녀성해방운동의 추동하에 1872년, 메이지정부는 예창기해방령을 내렸지만 실제상 폐지된것은 극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유곽이 이름만 바꾸고 영업을 계속하였다. 간자키키요시의 보고(“매춘” 1974)에 의하면 1946년 1월24일, GHQ(연합국군 총사령부)의 공창제도폐지명령에 의하여 업체 316개, 창기 1만417명이 폐지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전을 선포한 사흘뒤, 내무성경보국장 하시모토마사미가 각청부현장관에게 ‘진주군(進駐軍)특수위안시설을 만들라’는 명령을 무선전으로 발사하였다. 26일, 경시청의 청탁을 받은 업자들이 모여 자본 1억원으로 RAA(특수위안부시설협회)를 설립하여 27일 개업하였다. ‘전후처리 국가긴급시설에서 신일본녀성 모집’이라는 광고를 내고 1360명을 채용(간자키 1974)하였다. 1946년 3월21일, 위안부의 90퍼센트, 미국군인 70퍼센트가 성병에 걸렸다는것을 파악하게 된 GHQ는 급기야 ‘미군장병의 일본부인에 대한 공공연한 애정 표시’를 금지시켰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베아테・시로타・골돈 등의 지도하에 녀성참정의 새 선거법(1945년 12월), 남녀 평등교육법 등이 성립되였다. 녀성해방을 위한 일본정부의 움직임이 얼마나 철저한 내적 반성이 결핍한, 외부 압력에 의한 억지공사였는가를 알 수 있다. 전쟁후의 일본은 페미니즘의 이론만 방대하고 실천이 결핍하였다. 바로 전쟁후의 이런 일본의 사회환경이 하시모토와 같은 인간을 길러냈다.    각설하고, 가문의 순결한 혈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녀성의 성욕은 금지되여야 했다. 하여 녀성의 신체는 아이를 낳아 주는 신체와 성욕을 만족시켜 주는 신체로 이분화 되였다. 전자가 물론 녀성의 기범이다. 한편 정당화 되고 제도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생은 신분이 미천했고 멸시를 받았다. 왜냐하면 기방제도가 유가의 도덕에 어긋나기 때문이였다. 기생의 미천한 신분과 그에 대한 사회전반의 차별시는 바로 남근중심사회 자체의 모순의 악과이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원 ‘일본군 위안부’가 선뜻 증언에 나서지 못한것도 바로 사회전반에 침투되여 있는 이러한 봉건적 사상관념때문이였다. 경멸의 눈총과 비난으로 하여 또 다시 상처를 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후 ‘일본인 노리개’라는 죄목으로 꼬깔모자를 쓰고 목에 헌 신짝을 걸고 조리돌림을 당한적 있는 춘자는 한국에서 온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앞에서 좀처럼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헌 신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어 낡은 신(破鞋)은 남권사회에서 기생을 모욕하는 말로 씌였을 뿐만아니라 여러 남자와 성적관계를 맺는 녀성에 대한 목욕적인 말이기도 했다. 녀성의 성기가 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웠다는 설도 있고 옛날 북경의 유명한 팔대골목에 문패가 없이, 즉 관가의 허가가 없이 사사로이 문패대신 꽃신을 걸고 남자 손님을 받은 집들이 있었는데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니 새 신이 물이 날아서 낡은 신이 되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것이라는 설도 있다. 녀성에 대한 모욕적인 말이나 표현이 공공장소에서 꺼리낌 없이 사용되였다는것은 해방후에도 의연히 사회에 남권사회의 낡은 관념이 농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불원천리하고 간신히 어머니곁으로 돌아왔건만 춘자는 어머니한테 냉대를 받는다. 어머니한테서마저도 소외화되는 춘자의 이중, 삼중적인 피해를 그림으로써 작자는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과 일본군의 악행을 보여주는 피상적인 묘사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원 ‘일본군 위안부’들이 증언에 나서게 된 때는 이미 ‘기생’이라는 단어가 사어로 되였고 상술한 낡은 관념이 희박해져 그들을 소외화 하는 제도적 문화적 장치가 다소 풀려졌을 때였다. 원 ‘일본군 위안부’들을 보호해 줄수있는 사회제도와 문화배경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증언을 하려면 또 한가지 각오해 두어야 할 문제가 있다. 성폭행의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가 몸소 증언을 한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끊임 없이 자기자신을 객체화하고 물질화하는 과정이였다. 현실속에서 성폭행피해자가 기소를 철수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타자를 향해 성폭행과정을 적라라하게 공개할 때마다 그들은 끊임 없는 자기자신의 타자화와 소외화를 통하여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견딜수가 없어서 기소를 철수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에서 종혁의 어머니의 설득에 의해 겨우 입을 열려고 한 춘자였지만 남성 청중은 견결히 거부한다. 손자인 종혁이도 례외가 아니다. ‘스나들은 나가줍소’, ‘그래 아매가 제 손자새끼한테꺼정도 제를 홀딱 벗길 그 맴이 아픈 얘기를 해야 되오’는 춘자의 령혼의 부르짖음이다. 실존의 각도에서 보면 춘자의 수치심은 녀성인 춘자의 남성앞에서의 자기자신에 대한것으로서 수치심을 통하여 한 인간으로서 뿐만아니라 한 녀성으로서의 가능성의 죽음과 자기자신의 근원적인 실태를 경험해야 한다. 작자는 이 부분을 필묵을 들여 그리고 있다. 물론 작자의 의도가 일제의 만행이 70여년전 ‘일본군 위안부’에 가한 육체적인 폭행에서 끝난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피해자 녀성들의 령혼마저 무참히 짓밟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진실을 형상화 하려는데 있었을것이다. 그러면서 증언자체가 춘자를 소외화하는 또 하나의 견고한 장치임을 제시한다. ​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를 문학작품에 그린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녀류문학’이라는 단어가 세기초 내가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에 재적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활용되고 있었던 사실이 말해 주다싶이 근대문학은 남성문학이였다. 이른바 정통적인 문학사는 남성문학을 주축으로 엮어지고 ‘여류문학’은 주변문학으로서 ‘그 외에’의 형식으로 슬쩍 언급되거나 아예 무시되여 버렸다. 그도 그럴법하다. 근대에는 엘리터 남성을 맹주로 문학결사가 이루어지고 여러 유파를 형성하였다. 문학을 지향하는 녀성도 엘리터 남성의 문하생이 되여 추천을 받아야만 동인지에 발표를 할수 있었고 작가로 인정 받을수 있었다. 조선반도나 중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다고 할수 있다. 하여 근대소설은 남성의 사유방식과 론리체계에 따라 구성을 이룬 문학쟝르라고 할수있다. 그 근저에는 남근중심사상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재녀라 할지라도 녀성문학은 주변화 될수밖에 없었다. 녀성은 녀성의 고유한 문체를 발견했을 때만이 비로소 진정으로 문학을 소유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문학에서 양적으로 남성문학이 압도적이었으니 근대문학에 넘쳐나는것은 당연히 녀자의 신체묘사이다. 쓰보우치쇼요가 회화의 이론을 소설리론에 도입하여 사실주의로부터 시작된 근대일본소설에는 처음부터 근대적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세상을 객체화 하고 타자화 하는 기능으로서의 개인(남성)의 눈이 장치되였다. 반자연주의 기수인 나쓰메소세키의 문학이 일본을 풍미했던 20세기초에 도일하여 근대소설을 배운 로신과 리광수를 개척자로 하는 중국근대문학과 조선근대문학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남성의 시각에 의하여 관찰되고 모사된 녀성은 미화되고 신성화되기도 하였는가 하면 또 추화되고 비하되기도 했다. 설사 그 묘사가 녀성해방을 위한 혁명적인것이라 할지라도, 또 설사 그 것이 억압된 의식하에 있는 해방의 기동력으로서의 성묘사라 할지라도 거기에 투영된 것은 남성의 기호이고 성적인 욕망이며 관념이다. 결과적으로 녀성을 남성의 창조력안에서 성적소비의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객체화 되고 타자화 되고 물질화 되고 소외화 되는 이미지를 대량 생산하였다. 이에 녀성작가들, 특히 전후 현대녀성작가들은 보복이나 하려는듯이 같은 방법으로 남성을 대상화 하였다. 이것이 문학에서 발생하는 젠더현상이다. 문학속에 설치되여있는 이와 같이 견고한 장치때문에 소설에 ‘일본군 위안부’를 그린다는것은 그야말로 외줄타기와 같이 위험한 일이 아닐수 없다. 자칫하면 피해자 녀성을 다시 현대 남성의 욕망의 지배하에 전락시킬수 있기때문이다. 하여 작자에게 제기되는 물음은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셋째도 왜 ‘일본군 위안부’를 그리는가이다. 이는 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결과론적인 문제이다. ​ 상술한바와 같이 소설 “춘자의 남경”이 진실을 철저히 허구화 하여 형이하학적인것을 형이상학적인 차원에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소설속의 리얼한 녀성의 신체묘사와 성묘사는 실존임과 동시에 관념이다. 작자는 ‘일본군 위안부’사건을 재현시키려고함과 동시에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그 사건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과정과 인식의 과정을 그리였다. 70여년전의 지금 이 순간 즉 ‘이 때’, ‘이 곳’, ‘이 것’이라는 실존의 재현으로부터 70여년후에 회억으로 의해 나타나는 ‘그 때’, ‘그 곳’, ‘그 것’, 그리고 그 회억이 물질화 되여버린 ‘저 때’, ‘저 곳’, ‘저 것’이 다시 당사자가 아닌 후세의 사람(타자)들의 의식속에서 관념화 된다. 악몽의 력사가 되풀이되여서는 안된다. 봇짱 시계탑앞에서 다시 만난 종혁이와 하루꼬는 그들에게만 소유될 지금 이 순간 ‘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이 미래를 향한 ‘이 때’, ‘이 곳’의 ‘이 것’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거듭 되풀이하지만 종혁이는 춘자도 하루꼬도, 그리고 춘자와 하루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끌어 안고 미래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것은 종혁(또는 작자)의 변증법적 철학관의 표현이고 또 휴머니즘 사상의 표현이다. 이렇듯 작자는 현실적인것을 의식의 령역에로 끌어올리는 것으로써 상술한 문학속에 설치되여 있는 견고한 장치를 해제하고저 하고 있다. 총적으로 볼 때 가장 관건적인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객체화, 소외화의 장치는 해제하였지만 그러나, 국부적인 면에서 론쟁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 이 작품은 누가 읽어도 남성문학일것이다. 하루꼬의 외모라든가 일본인 ‘위안부’인 시오노 등 녀성등장인물의 신체묘사에서 느껴지는것은 역시 남성의 눈길이다. 또한 그 것은 작자의 눈길이기도 하니 녀성독자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남성작가와 녀성작가를 막론하고 문학령역 전체에 남겨진 숙제이기도 하다. 남성성과 녀성성의 차이를 무화하려는것은 극단적이고 또 불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상술한 폐단을 극복하면서 성차이를 표현할것인가 이다.   제3의 눈의 암시 ​ 이 소설에는 각기 다른 립장에서의 서로 다른 시점이 존재한다. 즉 피해자의 시점과 가해자의 시점, 피해자의 후손의 시점과 가해자 후손의 시점, 그리고 전지전능의 화자(작자)의 시점, 독자의 시점, 남성의 시점과 녀성의 시점 등 다각적인 시점이 제기되였다. 그런데 소설에는 또 피해자의 눈도 가해자의 눈도, 그리고 남성의 눈도 녀성의 눈도 아닌 제3의 눈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눈’은 력사와 사회를 보는 력사관과 세계관이다. 여기서 ‘제3의 눈’이란 바로 고양이의 눈이다. ​ 소설의 첫 시작에서부터 등장한 고양이는 하루꼬의 할아버지의 곁에도 있고 종혁의 할머니의 곁에도 있고 일본군 위안소에도 있었다. 작자는 또 제3부에서 ‘봄을 우는 고양이’장을 설치하여 그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원 ‘일본군 위안부’ 춘자의 손자 종혁이는 도쿄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에서 나쓰메소세끼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나쓰메소세끼문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역시 그를 소설가로 만든 대중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떠올릴것이다. 이름 없는 수코양이 ‘이몸’(吾輩)의 눈으로 본 인간사회의 단면을 풍자와 해학의 수법으로 그린것으로 유명하다. 소설속에서 종혁이와 하루꼬도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은 소세끼가 37살 되던 해(1904년)에 그의 집에 기여들어온 검은 털의 길고양이이다. 고양이는 1908년9월13일에 죽었는데 그 때 소세끼는 모처럼 친한 지인들에게 고양이의 죽음에 대한 통지를 내였다고 한다. 종혁이가 이러한 소세끼문학을 연구한다는 설정은 실은 고양이의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 우선 화자와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은 하루꼬가 도쿄에서 잠시 시코쿠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있는 실가에 내려와 할아버지앞에서 다도를 표현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이문화속의 등장인물과 독자(일본인외의 독자)의 시선이 서로를 대상화하고 또 각기 자기자신을 대상화하게 한다. 차문화를 둘러싼 전통과 미학의 차이가 서로가 타자임을 확인하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문화는 달라도 인정은 매일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의 건강을 우려하고 있는 손녀의 마음과 그런 손녀를 애모쁘게 여기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독자는 인츰 자신과 등장인물을 동일시하게 된다. 독자는 자신의 시선을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시선에 일치시켜 그들의 눈을 통하여 사물을 보고 그들의 운명을 걱정하게 된다. 지어는 ‘할아버지’가 막무가내로 손녀의 련인이라고 자처하는 종혁이에게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하여도 좀 괴벽한 성미이지만 손녀를 끔찍히 아끼는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리해까지 하게 된다. 하여 종혁이가 외려 객체화된다. 다음, 소설은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시점에서 종혁이와 ‘할머니’의 시점에로 옮긴다. 이문화가 아니라 자문화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에 독자는 처음부터 자신을 겹쳐 본다. ‘할머니’뿐만아니라 이문화속에 이방인으로 등장하여 객체화되었던 종혁이도 하루꼬와 위치를 바꾸어 주체화되고 이번에는 하루꼬가 이방인으로 등장하여 객체화된다.  여기에도 서로를 끔찍히 사랑하는 조손이 있다. 독자는 종혁이와 ‘할머니’의 시선으로 사건의 진전을 지켜보게 된다. 인지상정의 시점에서 볼 때 하루꼬는 ‘할아버지’를, 종혁이는 ‘할머니’를 배신할수 없는 립장에 세워져 있다. 이렇게 하루꼬와 ‘할아버지’, 종혁이와 ‘할머니’에 밀착해 있던 전지전능의 화자는 이번에는 수십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슴골 사람들에게 밀착하여 ‘지금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악몽의 참변을 그린다. 우선 쫓기고 있는 끝순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가 다시 타임슬립하여 그 얼마전에 있었던 일을 ‘우물댁’, ‘마을 사람들’, 룡정 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초점을 둔다. 그 와중에 태여나는 춘자의 출생을 계기로 화자의 초점은 어머니 끝순으로부터 춘자에게로 옮겨진다. 이하 화자는 기본상 춘자에 밀착하여 일련의 사건들을 현재진행형으로 그린다. 춘자와 다른 자매들의 립장에서 야수와 같은 일본군과 그들의 만행을 적대시하고 비하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다시 70년후의 현재 종혁이와 하루꼬의 몸에 밀착한다. 그들이 볼수있는 것은 길림성 기록보관소에 남은 일본 관동군의 문서나 련합군이 남긴 사진, 그리고 보호문물로 남은 위안소건물,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설치된 극렬한 모습의 조형물 등이 전부이다. 그들은 춘자와 피해자들이 본 침략자의 만행을 그대로 볼 수 없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경험할수 없다. 그들이 할수 있는것은 다만 물체화 된 ‘저 것’에 눈길을 주는 것을 통해 가해자의 극악무도한 만행과 피해자의 형언할수 없는 고통을 관념화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세상의 시점을 ‘저 것’에 모으는것뿐이다.  이어서 화자는 다시 하루꼬와 ‘할아버지’에 초점을 맞춘다. 파이프에 새겨진 글자의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할아버지’가 다름아닌 70여년전의 가해자임이 밝혀진다.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눈길이 서로를 객체화하고 타자화한다. ‘할아버지’는 끝내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하고 침략군의 군가를 부르며 가해자인채로 죽어간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향한 독자의 시선도 ‘할아버지’를 철저히 타자화할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종혁의 몸에 밀착한채 다시 이문화속으로 들어간다. 그저 ‘이문화’라 하기보다 이번에는 ‘가해자의 문화’라 하기가 적절할것이다. 종혁이는 그런 타문화속에 자기를 내주는 것으로 주체화를 실현한다. 종혁이는 일본근대문학의 전형적인 쟝르인 하이쿠로 력사를 직시할수 없어 사랑앞에서 도망하려는 하루꼬를 잡으려 한다. 일본문화속에서 주체를 획득한 종혁의 시선에 의해 일본의 지방문화인 마쓰야마의 전통문화가 객체화되여 간다. ​  이와 같이 전지전능의 화자(작자)는 여러 등장인물에 밀착하면서 그 인물의 시선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의 시선까지 대상화하는 ‘제3의 눈’이 있다. 즉 고양이의 시점이다. ​  하루꼬의 할아버지는 ‘흰 바탕에 검은색의 점이 어우러져 있고 짧고 몽툭한 꼬리와 삼각형의 머리, 빨쪽한 큰 귀를 가진 토종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련인인 종혁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하려하나 끝내 입을 열지 못하는 하루꼬는 고양이의 호동그란 눈을 들여다 보며 말을 돌린다. 이 순간 인간이 아닌 고양이의 눈에 의하여 하루꼬는 물론 등장인물들이 상대화된다. 뿐만아니라 고양이의 눈길을 마주하는 류사체험을 하게되는 독자도 상대화된다.  이렇게 소설의 첫 시작에서부터 등장인물과 독자의 시점을 대상화하고 객체화하는 또 하나의 시점이 제시된다. 독자는 시시각각 이 초인간적인 ‘제3의 눈’을 의식하고 소설을 읽게 된다. 고양이가 두번째로 등장한것은 종혁이가 하루꼬를 데리고 찾아간 ‘할머니’의 집에서이다. ‘일신이 까만 고양이가 종혁이를 보고 울었다. 할머니 대신 고양이들이 손님을 반겨맞아주는듯 했다’. 독자는 여기에서 처음에 등장한 하루꼬 실가의 고양이들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한국에서 온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의 등장으로 하여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음이 밝혀지면서 가해자 일제라는 추상적인 력사개념이 막연하게 부상한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요즘 하는 짓거리가 어떠하며 그들이 저지른 위안부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은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다는걸’ 라고 하는 종혁의 어머니의 말에 의해 그 것은 결코 지나간 력사가 아니라 현재진행중의 사건이라는것이 확인된다. 70여년전에 중국과 조선을 비롯한 아세아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일제’와 패전후 속죄는 커녕 지은 죄를 인정조차 하지 않고있는 현재 ‘일본사람들’과의 링크가 하루꼬와 고양이에 향한 ‘할아버지’의 ‘애모쁜 눈길’을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재현시킨다.  여기서 고양이의 ‘눈’은 서로 대립되는 시점의 존재 즉 패러독스를 제시한다. 다음, 고양이가 세번째로 등장한것은 일본군위안소이다. 철창속 같이 밀페된 공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뿐이다. 야수와 같은 놈들한테 처참하게 유린당한 춘자는 밥 먹을 기운조차 없다. 거기에 제3자인 고양이가 기여든다. ‘고양이는 살금살금 늦은 보법으로 들어와 춘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음식그릇에 덮쳤다. 혀를 날름이며 순식간에 춘자의 밥을 다 먹어 버렸다’. 이 곳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든, 또한 자기가 먹으려는 것이 비절참절한 처경에 처한 피해자의 밥이든 고양이는 상관하지 않는다. 여기서 고양이는 사건 당사자외의 제3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사건에 대한 판결과 가해자에 대한 징벌,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늘 제3자에 의뢰하여 해결된다. 그런데 그 제3자란 이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랭혹한 존재이다. 부조리한 일이지만 공정한, 조금도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주관으로서의 제3의 시점이다. ​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령혼을 달래주는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할머니’가 떠나간 빈 집에는 ‘할머니’가 생전에 기르던 고양이들만 남았다. ‘마쓰야마의 할아버지가 키우는 명품 고양이인 “재패니즈 밥테일”에 비하면 일견에도 어딘가 짝지는 수수한 물종의 고양이였다. 하지만 그 수수함에서 남다른 친화감이 엿보이는 시골농가의 고양이였다’. 명품이든지 물종이든지 하는 것은 고양이 자체의 본질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부여한 가치이다. 고양이들한테 붙여진 ‘일본군 위안부’들의 이름도 다름아닌 피해자들의 정의에 대한 희망이고 호소이다. 그리고 정의는 종국적으로 승리할것이라는 확신이다. ​ 마지막으로 소설은 다시 한번 마쓰야마의 고양이들을 조명한다. 중풍으로 쓰러진 ‘할아버지’의 발치에 누워 있는 고양이들을 보며 하루꼬는 ‘할머니’의 고양이들을 떠올린다. 서로 대립되는 두 시점이 부딛치는 크라이막스이다. 침략전쟁을 ‘동양평화를 위한’ 성전이라고 믿어마지 않는 ‘할아버지’의 가해자시점과 ‘젊은 려염집 녀자들을 종군위안부로 끌어가고 무고한 사람들을 참수하는 경기를 벌린것이 동양 평화를 위한것이였나요’하는 춘자를 대신한 하루꼬의 피해자의 시점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정면으로 부딛치고 모순이 극도에 달하고있는 장면이다. 고양이의 등장인물과 독자를 대상화하는 기능, 패러독스로서의 기능, 냉철한 제3자의 주관으로서의 기능, 정의의 희망으로서의 기능이 동시에 발휘되고 있는 그야말로 명장면이다. ​ 그렇다면 이 제3의 시점은 대체 누구의 시점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작자의 시점이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에 밀착하여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화자로서의 작자의 시점과 그 화자를 객체화하는 ‘제3의 눈’으로서의 작자의 시점으로 구성되였다고 볼 수 있다. 시시각각 현재진행형으로 현실을 그려나가는 화자의 서술은 진행되는 순간 ‘제3의 눈’에 의해 대상화된다. 상술하다싶이 제3의 시점은 가해자의 시점도 피해자의 시점도, 그리고 남성의 시점도 녀성의 시점도 아닌 초인간적인 랭철한 제3자의 철저한 주관이다. 그 것이 과연 가능한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것이 작자의 지향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근대소설에 설치되여있는 견고한 장치를 해재하기 위해 준비된 열쇠이기도 하다.   나가면서 ​ 이상 젠더시점에서 소설 “춘자의 남경”을 읽어 보았다. 소설을 읽는 한가지 방법으로써의 젠더시점이라는것을 재강조해 두고 싶다. 페미니즘이론이 다양화됨에 따라 녀성성에 대한 정의가 다시 추구되고 있다. 말하자면 녀자는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 종교 그리고 력사와 정치를 뛰여넘어서 육체적인 공동성이라는 막연한 정의외에 과연 어디까지 녀성성의 카테고리를 귀납할수 있을까?   작자는 소설에서 젊은 녀성들을 꾀여 일본군위안소에 넘기는 정체불명한 녀인을 그리고 있다. 물론 동성에 대한 믿음과 안심이라는 함정을 설치하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페미니즘속의 레이시즘을 엿볼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일찍 구라파와 미국의 녀성들이 흑인 녀성이나 동남아 녀성을 지배하고 차별시 하는것으로 자률성의 획득을 실천해 보려고 한적이 있다. 구미의 페미니즘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에서도 같은 례를 찾아 볼 수있다. 특히 내쇼널리즘이 성행하고 국수주의에 빠져 있던 전시하에 침략전쟁이 ‘성전’이라고 세뇌된 일본 녀성들은 정부의 편에 서서 ‘대일본국방부인회’ 등 단체(소설에서는 ‘녀자애국봉사대’라는 녀성단체가 나온다)를 조직하여 일본군을 돕고 식민지에서 이민족을 지배하는것으로 정치활동에 참가하는 권리와 사회적지위의 인상등 리득을 얻기도 했다. 일본인 종군위안부인 시오노는 조선 녀성을 관리하는것으로 위안소의 책임장교 나카무라노부유키와 동등한 지배층의 위치에 있다. 이른바 ‘성전’을 위한 서로의 역할이 다르다고 하면 우습게도 일본인 종군위안부에게는 일본군인과 대등한 인간녀성으로서의 자율성이 부여된다. 일본군을 위안함에 있어서 시종일관하게 적극적이었던 시오노는 죽음을 앞두고 춘자에게 자기도 피해자임을 호소한다. 전쟁후의 일본인위안부도 일본군국주의의 희생품이였다고 하는 문맥에 일치한것이다. ​ 현재 일본이 다시금 전쟁을 할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아베정권은 녀성의 사회진출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가 급촉해지고 있는 일본은 경제성장을 위한 인력이 부족하다. ‘녀성이 빛나는 일본’이라는 아베의 구호는 정권의지를 위한 전략에 불과하나 녀성은 자립과 권리를 택하려면 동시에 헌법개정에도 찬동을 표하여야 한다. 일본에는 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녀성들이 많다고 일본의 창가학회(創價學會)와 정치평론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전후에 태여나 왜곡된 력사를 배워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세대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헤아릴수 없고 전쟁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전에 있은 참의원선거에서 아베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이 압승한 원인의 하나로 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제의 만행과 위안부의 아픔을 재현시키고 하루꼬와 같은 녀성을 부각한 소설을 펴낸다는것은 그야말로 현실적인 의의가 있는 일이다. ​ 위안부문제는 력사적 정치적 문제일 뿐만아니라 젠더와 관여된 문제이고 또 섹슈얼리티와 관여된 민감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위안부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일종 과감한 도전이 아닐수 없다. 이는 작자 자신에 대한 도전이며 문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김혁 소설가의 또 한편의 주옥의 장편의 성공을 축하하는 바이다.   "연변문학" 2017년 1월호    
6    소설로 읽는 남경대학살 댓글:  조회:1989  추천:14  2017-02-10
​ 소설로 읽는 남경대학살 -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중에서​ 김 혁 ​​​ 오늘 12월 13일은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 97주기가 되는 날이다. 중국 정부는 2014년부터 12월 13일을 남경대학살에 따른 '국가 애도일'로 지정하고 전국적인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 ​ 1937년 12월 13일 고도(古都) 남경은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졌고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 이후 한달여 동안 적수공권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미친듯이 살륙했다. 남녀로소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고문, 강간, 생매장등으로 끔찍한 처형 방법도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세계사적인 참극이다. 인류사에 이처럼 짧은 기간에 무차별적인 살륙전을 벌린 사례가 없다. 한개 도시의 일원(一圓)에서만 자행된 만행은 단기간에 저질렀다는 점에서 나치의 학살을 릉가한다. ​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 몇줄의 기록이 내가 조선족 첫 위안부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을 집필한 동기가 되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진술,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문서, 르포 등 갖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력사의 질곡에 붙매였던 그녀들을 대상화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한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자 했다.​ ​ 2015년 옹근 한해 12회에 나뉘어 조선족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련재된 "춘자의 남경"의 말미에는 주인공 춘자가 목도한 대학살의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남경의 아비규환의 ​모습이 국부로나마 재현되여 있다. ​ ​ 소설 집필기간 남경대학살 기념관을 찾은 필자​​ ​ 혈우(血雨) ​ 네모난 해가 지고 네모난 달이 떠올랐다. 그 해와 그 달이 몇번 지고 몇번 떠올랐는지 춘자는 모른다. 뙤창 하나 없이 사면이 벽뿐인 방에서 출입문의 틈새로 새여 들어오는 빛은 장방형의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환영같은 그 네모 난 해, 네모난 달을 헤아리면서 춘자는 날이 바뀜을 느끼고 자신이 놀랍게도 아직 살아있음을 매일 매일 느끼고 있다. 몸은 피둔하고 정신은 비몽사몽의 진펄사이에서 빠져들었다 빠져나왔다를 반복한다. 비소리가 들렸다. 한겨울인데도 이곳에는 비가 내린다. 춘자는 쑥색의 담요를 몸에 두르고 몸을 한껏 웅그렸다. 등을 대고 앉은 벽은 얼음기둥처럼 한기가 랭랭하게 스며든다. 추적추적 비소리와 더불어 꾸르륵 텅 빈 뱃구레는 배고픔을 하소연했다. 위안부들에게 매일 차려지는 음식은 멀건 옥수수죽과 조막손같이 작은 만두 그리고 죽순짠지뿐이였다. 그것도 처벌방에 갇힌 사람에게는 매일 한끼밖에 주지 않는다. 아래배쪽 속살이 아직도 띠끔띠끔 아파 온다. 춘자는 저고리속에 손을 넣어 배를 만졌다. 지렁이 지나간듯 오돌토돌한 흉터가 만져졌다. 상처는 이제 딱지가 앉으려 하고 있었다. 춘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춘자는 “쇼바쯔(처벌방)”라는 방에 갇혀 있다. 일어 서면 머리가 닿고 앉으면 두 다리를 뻗을수 없어 쪼그리고 앉아야만 하는 조롱같이 작은 방이다. 위안소에서 소위 계률을 위반한 처녀들은 가차없이 “처벌방”에 갇혀야 했다. 처벌의 리유란 혹간 몸이 아파 들어온 병사를 거부했다던가, 위안소 관리인 “오까상”과 말대꾸를 했다든가 하는것들이였다.  “돌격1번”을 사용하지 않아도 처벌방에 갇혀야 했다. ​ 그날 춘자는 광분하여 달려드는 장관의 손가락을 물고 늘어졌다. 어깨에 벌건 계급장을 달고 사병들의 옹위를 받으며 들어선 장관은 몹시 취해 있었다. 인중에 가증스럽게 쪼막 수염 한 가닥이 김쪼박처럼 붙어 있다.  “기레이(이쁜데)” “쪼막수염”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춘자의 턱을 쥐여 들어 올렸다. 외투의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납작한 철제술병 하나를 끄집어 냈다. 철제술병을 춘자에게 내밀었다. “노므(마셔라)” “모릅니다. 술 마실줄을” 춘자가 고개를 틀었다. 놈의 외투를 벗겨 벽에 걸려 했다. 그러는 춘자의 어깨를 놈이 왁살스럽게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벽에 밀어 붙혔다. 털부숭이 손으로 춘자의 볼을 움켜잡고는 벌려진 춘자의 입속으로 술을 부어 넣었다. 사레가 들려 춘자는 목줄기를 부여잡으며 괴롭게 기침을 했고 놈이 흐아흐아 웃었다. “쪼막수염”은 또 기어이 “돌격 1번”을 착용하려 들지 않았고 착용을 권고하는 춘자의 귀뺨을 때려 쓰러 뜨렸다. 춘자는 가까스로 야수처럼 달려 들어 온몸을 부숴뜨릴듯 하는 놈의 수모를 견뎌 냈다. 수욕을 다 채운 놈이 춘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쪼막수염”은 허우적거리며 바지 혁띠에서 무언가 떼냈다. 단도였다. 칼집에서 빼낸 칼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철제술병을 들어 칼에 술을 부었다. 칼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술방울을 “쪼막수염”은 혀로 핥았다. 놈이 어떤 연극을 벌리는지 하회를 알수 없어 춘자는 불안한 눈길로 놈의 손길을 쫓았다. 놈이 칼에서 눈길을 떼고 탈진하여 누워있는 춘자를 내려다 보았다. 쪼막수염을 밀어 올리며 음습하게 웃었다. 홀연 놈이 춘자에게 다시 덮쳐들었다. 추자의 배를 가로타고 앉았다. 순간 살갗을 파고 드는 아픔에 춘자는 비명을 질렀다. 놈은 춘자의 박속같은 아래배쪽을 칼끝으로 긋고 있었다. “이쁜 아가씨, 기넹(기념) 한번 남기자고” “쪼막수염”은 춘자의 속살에 자기 이름자를 새기고있었다.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했으나 놈은 완력으로 춘자를 제압하고 배애 한글자 한글자 새겨나갔다. 놈은 한손으로 새기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한사코 반항하는 춘자의 얼굴을 짓뭉개 눌렀다. 그런 놈의 장지가 춘자의 비명을 토하는 입에 닿였다. 그 손가락을 물고 늘어졌다. 놈이 거세하는 돼지처럼 비명을 질렀다. 놈의 얼굴이 구겨진 마지(麻紙)처럼 일그러졌다. “조센삐!” 놈이 주먹으로 춘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춘자가 의식을 찾고 보니 “처벌방”이였다.​ 한달여전,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를 걸치고 그들이 이른 곳은 남경이였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연도에서 강을 보았다. 폭이 넓고 길게 이어진 큰 강이였다. 겨울에도 강은 얼지 않고 있었다. “양자강이다. 지나(支那)에서 가장 긴 강이라더군…” 역에서 그녀들을 맞아 다시 마차에 태운 어눌한 조선말을 구사하는 일본 녀인네가 말했다. 그녀들을 보자 녀자는 광대를 말라올리며 웃었는데 웃을때 입안 가득 덧이가 보였다. 관례대로 그녀를 “오까상”이라 불렀다. 마차는 성문으로 들어섰고 제법 번화한 거리가 활짝 펼쳐졌다. 하늘 변을 가리며 치솟은 높은 건물, 분주히 오가는 멋진 복색차림의 인파, 그 사이 들려오는 낯선 말씨… 신사, 숙녀를 태운 인력거가 그들이 탄 마차를 앞질러 달렸다. 댕. 댕. 댕. 종소리 울리며 전차가 그들의 곁을 스쳤다. 길 복판으로 질주하는 기차바곤같은것을 처녀들은 희한한 눈길로 바라 보았다. 낯선 풍경을 두리번거리는 춘자를 보고 혜숙이 말했다. “오다가다 이젠 대처로 왔네” 하지만 그 이색적인 풍경속으로 들어가면서도 처녀들은 석연치 않은 모습들이였다. “집에서 점점 멀리 떠나오는구나” 한숨 한번 짓고나서 누군가 쫑알거렸다. 보따리를 가슴에 꼭 껴안으며 춘자가 말했다. “여긴 칩(춥)지 않아 좋구나”​ 그들이 거처하게 될곳은 누른 흙으로 담장과 벽체를 두른 가옥에 주홍빛 창문을 낸 2층집 구조였다. 대문에 “상군남부위안소(上军南部慰安所)”라는 패말이 걸려 있었다. 함께 끌려온 30여명의 조선인 처녀들에 앞서 위안부들이 이미 와 있었다. 그네들이 탄 마차가 뜨락에 들어서자 창문으로 녀자들이 목을 빼들고 내려다 보았다.  복식이 판달랐고 소근거리는 말씨들이 달랐다. 바지런히 해바라기씨를 까서 부수듯 자잘한 말씨를 구사하는 그녀들은 중국인 처녀들이였다. 누군가 2층에서 달아 내려왔다. 출입문앞에 기대여 서서 마차에서 내리는 춘자네를 지켜 보았다.   춘자는 우로는 목, 아래로는 발의 복숭아뼈까지 흘러내린 기다란 장포(長袍)차림의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량볼에 보조개가 깊이 파인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하얀 저고리 검은 치마에 외머리태를 한 춘자를 신기하다는듯 지켜보고 있었다. 춘자는 저도모르게 옷깃을 한번 다듬었다. 떠날때 이모가 내준 새 옷은 이미 헌 걸레처럼 되여버렸다. 보푸라기 투성이에 여기저기 탈색이 되여있다. 옷 앞섶에 언제 튀였는지 피자욱같은것이 단추처럼 동그랗게 배였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와 눈과 눈이 한데 얽히자 그녀는 눈길을 다른데로 돌려버렸다. 까만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거렸으나 그것도 잠시, 내리 깐 눈매는 순간에 생동함을 잃고 있었다. 다시보면 생기를 잃은 눈이였다. 마치 마른 우물의 동공과도 같은 무원조하고 구원을 갈구하는듯한 그런 눈길이였다. 그 눈동자에서 춘자는 다른 눈을 떠올렸다. 그 눈은 룡드레 촌에서 온 혜숙의 눈이였다.​ 광옥이가 달리는 군용트럭에서 뛰여 내린 소동이 벌어진뒤 트럭은 다시 달렸다. 흐느끼는 춘자를 실은 트럭은 달리고 달려 어느 간이역까지 와서는 또 한번 처녀들을 기차에 실었다. 꿈틀거리는 이무기같아 뵈는 기차가 춘자는 싫다. 처음 타보면서 호기심에 할랑거리는 마음으로 올랐던 기차였지만 그 기차는 수많은 턴넬들을 지나고 또 지나서 그녀를 지옥에 실어다 주었다. 이번에는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다. 창문하나없이 무지하게 큰 쇠문을 무작스럽게 드르륵 밀어 열고 그녀들의 등을 마구 떠밀어 짐짝 실듯 기차에 실었다. 찬 바닥에는 그저 짚이 깔려져 있을뿐이다. 눈앞을 가려볼수 없을정도로 기차바곤은 컴컴했다. 그저 부딛히는 팔뚝과 어깨 그리고 서로의 입에서 풍겨나오는 긴장한 단김만으로 상대가 누군가를 간신히 가릴수 있었다. 기차의 덜컹거리는 동음이 춘자의 심장박동수와 겹쳤다. “또 어델(어디를) 델꼬(데리고) 가는거야?” 어둠속에서 장님이 더듬듯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훑으며 춘자가 불안감을 못이겨 물었다. 그 불안감으로 허우적이는 손을 누군가 잡아주었다. “혜숙이니?” 손의 임자를 알듯해 춘자가 물었다. 후유… 상대가 아무말도 없이 긴 한숨을 뱉어 냈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누구도 알길없다. 그저 기차의 동음만이 집요하게 귀바퀴에서 맴돌뿐이다. 이 세상 풍파 심하고 또 환난 질고 많으나 춘자가 홀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거리든 해야 육신을 친친 동이고 있는 이 어둠의 공포에서 벗어날것 같아서였다.   나 편히 쉬게 될 곳은 주 예비하신 주의 전​ “이 세상 풍파 심하고”라는 성가를 불렀다. 그젯날 사슴골 교회에서 장모세 선생님이 배워주었던 성가였다. 깎은 밤처럼 단정한 밤색 옷차림에 빛나는 반듯한 이마를 가졌던 선생님은 지금 어데 계시는지? 우리가 겪는 이 환난을, 이 질고를 알고 계시는지? 그렇게 애틋해 하던 신영이가 귀축같은 놈들에게 유린당하고 무간나락으로 떨어져 갔는지를 알고 계시는지? 광옥이는 지금쯤 어떻게 되였는지? 총탄에 쓰러졌는지 아니면 살아남아 아직도 수림속에서 헤매는지? 우리가 겪는 이 환난 이 질고를 선생님은 알고 계시는지? 주님은 알고 계시는지? 광옥이에게 생각이 미치자 춘자는 심장이 뜯겨나간듯한 괴로움에 앙가슴을 부여 잡았다. 이제 이 생에 울 분량을 다 울어버려 더는 흐를것 같지 않던 눈물이 또다시 보뚝을 허문 봇물처럼 흘러 내렸다.​ 주 믿는 형제 자매들 그 몸은 떠나 있으나…​ 목메이는 소리로 춘자는 마지막절 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혜숙이가 꼭 안아 주었다. 춘자의 손을 꼭 잡아 자기 가슴에 대여 주었다. 춘자와 꼭 같이 슬픔의 레일우에 올른 그녀의 가슴도 기차의 동음과 함께 오르내리고 있었다. 덜커덩. 기차가 어떤 역에 멈춰 섰다. 드르륵 무지하게 큰 철문이 열렸다. 갑작스레 덮쳐들어오는 한기 그리고 불빛에 처녀들은 눈시울을 좁혔다. 그것은 손전등의 불빛이였다. 수십개의 손전등의 불빛들이 란무하는 칼날처럼 처녀들의 육신을 훑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흐아! 괴성같은 홍소가 터져 올랐다. 춘자는 손전등 불빛뒤에서 쩌억 벌려져 홍소를 흘리고 있는 군인들의 벌건 입속을 보았다. 노부유키가 종이 메가폰을 들고 나와 그들을 향해 마주 섰다. 두 발꿈치를 착소리나게 모으고나서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성전을 위해 싸워주신 황군용사 여러분 수고많으셨습니다. 우리들이 몸과 마음으로 제공하는 호우시(봉사)를 받아주십시오. 주어진 시간은 한시간뿐이니 차바곤 세개로 나누어 공작하기를 바랍니다. 용사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반드시 ‘돌격1번’을 사쿠요(착용)하시길 바랍니다.” 병사 몇몇이 킬킬 거리며 노부유키가 건네준 군용배낭에서 피임도구를 꺼내 나누어 주었다. “용사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반드시 ‘돌격1번’을 사쿠요(착용)하시길 …” 노부유키가 메가폰을 들고 거듭 강조했으나 그 말을 맺기도 전에 병사들이 그를 밀치고 우르르 기차바곤에 뛰여 올랐다. “유끄리, 유끄리 데이오(천천히 천천히 해요)” 노부요키가 목에 피줄기를 세우며 소리질렀으나 광분하는 병사들은 이미 방죽을 무너뜨린 홍수였다. 병사들이 밀치는 바람에 노부유키는 바람개비처럼 맴을 돌았고 그의 손에서 메가폰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그야말로 산에서 내려 온 이리떼가 어린 병아리들이 있는 축사를 덮쳐드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밀치닥거리며 뛰여 올라 저마끔 위안부들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차바곤은 경악에 찬 비명과 괴기스러운 홍소소리로 가득했다. 미처 오르지 못한 사병들은 차바곤안에 손전등을 들이 비추며 킬킬거렸다. “빨리빨리 끝내” “늑장부리지마”, “다음은 내 쥰방(순번)이다” 기다림에 급해난 병사들은 멱따는 소리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때 역사쪽에서 노래소리가 터져 나왔다. 왁살스럽게 터져나오는 노래소리에 춘자는 와뜰 몸을 떨었다. 너무나 익숙한 노래였다. 그날, 춘자네가 이름 모를 역에서 군영에 실려 가서 맨 처음 처녀를 앗기던 그날, 온 군영과 그녀들의 육신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그 마당에서 들려왔던 바로 그 노래였다. 행진곡풍의 노래소리는 역사의 지붕에 처매 단 스피카에서 울려와 작은 역의 상공에 울려 퍼졌다. 방어도 공격도 쇠로 만든 성이라 믿음직하네 떠 있는 그 성은 해 뜨는 황국의 사방을 수호하리라 . 차바곤 바닥에 대자로 누운 춘자와 혜숙의 머리는 서로 맞닿아 있었다. 이리떼에 몸퉁이를 짓눌리고 휘둘리우며 두 사람의 머리가 쿵쿵 맞부딛했다. 둘의 눈이 한데 얽혔다. 어둠속에서 손전지불빛에 언뜻언뜻 드러난 그 눈길은 그렇듯 무원조했고 그렇듯 절망적이였다. 그렇게 처연한 눈길을 춘자는 여태 본적이 없었다. 춘자는 두눈을 감아 버렸다.​ 떠 있는 그 성은 해 뜨는 황국의 사방을 수호하리라​ 흔들리는 손전지불이, 귀청을 란타하는 노래의 고성이 그녀들의 몸을 훑고 흔들고 때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광란의 잔치가 끝나고 처녀들이 미처 혼나간 정신을 수습할사이도 없이 노부유키가 기차바곤에 뛰여 올랐다. “17번, 21번, 23번, 36번, 42번 나와라” 손전지불로 얼굴들을 하나하나 비추어 보며 되는대로 10여명의 처녀들을 점명해 내였다. 처녀들은 노부유키의 윽박지름에 차바곤에서 내렸다. 너나가 비칠거리며 기차에서 내렸다. 그중에는 혜숙이도 있었다. 하신의 통증으로 혜숙이는 서지도 못한채 배를 부여잡고 쭈그리고 앉았다. 역구내의 한켠으로 트럭 한대가 왕방울눈같은 헤드라이트 불빛을 쏘며 달려 왔다. 달려와 처녀들 앞에 멈춰 섰다. 기차바곤에 앉은채 이 광경을 보는 춘자의 가슴으로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아가르(타라)” 노부유키가 처녀들을 떠밀었다. “부대의 수요로 너희들은 다른곳으로 이도오(이동)한다” 혜숙이가 트럭에 오르다 말고 춘자쪽을 건너다 보았다. 또 한번의 무원조한, 절망적인 눈길을 춘자는 보아야 했다. 하염없이 춘자쪽을 바라고섰는 그녀의 눈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쓰러져 있던 춘자는 팔꿈치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겨든 목소리를 살려 불렀다. “혜숙아!” 이때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무작스럽게 철문이 닫혔다. 철문의 쇠소리가 춘자의 부름소리를 잘라 먹었다. 꽤액! 사나운 짐승의 포효처럼 기적이 울었다. 덜컹, 뒤로 한번 움칠하다가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흔히 “처벌방”에는 하루의 시간을 가두곤 했다. 소위 위안부들이 어긴 위안소의 계률이 크더라도 이틀, 사흘이 고작이였다. 하지만 춘자가 처발방에 내쳐진 시간은 길었다. 그 이전에도 춘자는 “처벌방”에 갇힌적 있었다. 위안소 탈출을 기도하다 잡혔던것이였다. 혼자서 트럭에서 뛰여 내린 광옥이를 생각하면 이 낯선 지역에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또 그처럼 왜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을가 자신이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위안소밖을 벗어나 갈래갈래 뻗은 골목길에서 춘자는 방향감을 잡지못하고 허둥댔고 인차 쫓아온 사람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갔다. 눈두덩이가 붓도록 맞았고 이틀간 처벌방에 갇혔다. 아마 그때의 일도 있고하니 더 갑절로 처벌을 주는상 싶었다. 배에 난 상처에 딱지가 앉은것만 봐도 일주일은 더 되는것 같다. “쪼막수염”이 내뱉었던 말이 다시 귀청을 때리며 떠올랐다. 조센삐 그녀와 같은 조선의 위안부들을 비하하는 욕이였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욕을 귀에 못박히게 들으며 자랐던 춘자였다. 허나 엄마의 그 것은 끝없는 생활고에 찌들은 엄마가 습관처럼 내뱉는 어투였고 또 귀한 자식이 애틋한 나머지 하는 사랑의 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놈들이 내뱉는 욕은 이와 달랐다.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이 사이로 찌익 내뱉는 그 욕설은 그녀들의 자존을 란타해 탕갈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살갗을 파고들어 뼈를 부수고 골수깊이 박히는 말이였다. 노부유키가 늘 내뱉었던 말이였다. 이제 그 덤턱스러운 놈의 상판대기를 보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에서 또 그 채찍형벌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처벌방”에 갇혀 처음에는 귀축같은 놈들의 얼굴을 보지 않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랭하고 독한 어둠살만이 가득한 독방에 갇혀 있는 시간이 오래되자 불안이 그물그물 덮쳐왔다. 하루에 한번 들이미는 만두와 죽도 이제는 배당되지 않았다. 이대로 굶어죽이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물을 마시지 못해 목이 탔다. 자긋자긋 깨문 보풀딱지로 가득한 입술에서 배릿한 피냄새가 느껴진다. 바깥의 동정을 살펴 출입문에 귀전을 바싹 가져다 대기도 했다. 처벌방은 위안소 2층건물에서 담 하나 사이둔 폐가의 한방에 설치되여 있었다. 풍향이 바뀌면 위안소 2층의 소리가 귀에 잡혀 오기도 했다. 깊은 밤이면 노래소리도 간혹 들려왔다. 중국인 위안부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쇼탕(小唐)이라고 하는 량볼에 보조개가 깊이 파인 앳된 위안부소녀가 악기를 타며 노래를 부르곤했다. 소녀가 타는 것은 거북등 같은 곳에 네줄을 메운 비파라는 악기였다. 쇼탕은 연주를 하려고 그랬던지 오른손의 손톱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그 손톱으로 튕겨내면 청아한 곡조가 뿜어져 나오곤 했다. 곡조에 꼭 걸맞게 쇼탕은 명주실처럼 가는 소리로 노래부르곤했다.​ 금릉의 성은 크기도 하여라 안으로 십팔리 밖으로 십팔리 그 풍경은 천하의 으뜸으로 알려 졌네​ 아름다운 곡조였지만 겨울바람이 소슬한 밤에 들을려니 왠지 청승맞기 짝이 없다. 비록 알아들을수는 없지만 그 곡조와 그 노래소리에 춘자네도 함께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병사들이 찾아드는 날이면 명주실처럼 가는 소리를 내던 그녀는 위안소에서 변형된 고성으로 울부짖곤 했다. “이따이(아파요), 이따이!” 야수같은 놈들에게 고통을 호소하려 겨우 배운 일어 한마디로 목놓아 하소했다. 허나 수욕에 리성을 상실한 야수들은 그 절규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유난을 떤다고 “처벌방”에 가두까지 했다. 어느 한번 노래를 부르던 쇼탕이 비파를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춘자네는 그녀와 그저 눈빛으로만 의사소통을 했다. 허나 이 순간만은 그 신산한 울음의 의미를 알것 같았다. 알수 있었다. 이튿날 쇼탕은 끊어진 비파의 줄을 다시 메웠다. 그리고 비파의 원뿔형 줄감개에 붉은 술을 달았다. 그리고는 춘자를 향해 비파를 들어 보였다. 파리한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이 떠올랐다. 새로 단장한 비파를 들고 쇼탕은 또 노래를 부르기 지작했다.​ 금릉의 성은 크기도 하여라 안으로 십팔리 밖으로 십팔리​ 그러던 그 노래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 춘자네가 도착한 이 곳은 첫날부터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쾅 쾅 어디선가 포성이 간헐적으로 울려 왔다. 탕탕, 따다당 총소리도 들려 왔다. 마치 콩볶는 소리처럼 끝없이 들여 왔다. 덤턱스럽게 큰 것이 지나가는듯 으르렁하는 쇠바퀴 소리도 들려 왔다. “으고꾸나아(꼼짝하지 말고 있어라)” “지금은 센지죠교오(전시상황)이다. 위안소 밖을 한발자국도 나가면 안된다. 섿다이(절대) 안된다” 덧이 “오까상”이 처녀들을 향해 윽박지르는 소리도 들려 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부터인가는 쥐죽은듯이 고요해 졌다. 그 고요함이 더욱더 불안을 가배 시켰다.     “누구 없소? 게 누가 없나요?”     목청껏 소리질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나레까 기데?(누구 없어요?” 위안소에서 엉성하게 나마 배워둔 일본어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밖은 역시 물밑처럼 괴잠잠하다. 춘자는 쾅쾅 문을 두드렸다. 그러다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판난 버선발에 걸친 고무신도 해여져 밑창이 말랑말랑했다. 발이 못견디게 아팠으나 춘자는 필사적으로 처벌방의 문을 걷아찼다. 물밑에서 솟아오르려는 사람처럼 단말마로 비명지르며 필사적으로 문을 걷어 찼다. 우지끈!   나무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찬 바람이 훅 들이 닥쳤다. 추위에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덴겁히 쑥색 담요를 머리우부터 뒤집어 썼다. 비칠거리며 처벌방을 나왔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나온 춘자는 밝은 빛에 현기증을 느끼며 두 손으로 눈을 가리였다. ​ 위안소는 텅텅 비여 있었다. 어느새 철수 했는지 횅댕그렁하게 말끔히 비여 있다. 기차에 실려 왔던 수십명의 조선인 처녀들도, 어눌한 조선말, 중국말을 쓰며 꺼드럭대던 관리인 “오까상”도 앳된 얼굴의 쇼탕도 어디로 갔는지 없다. 대문가에 걸었던 위안소 간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춘자는 담요를 뒤집어 쓰고 골목길로 나왔다. 혹시 누군가 뒤쫓아 나오지 않나 해서 위안소쪽을 되돌아 보았다. 아무도 쫓아오는이가 없다. 허겁지겁 걸음을 옮기는 그의 황황한 눈길에 무언가 밟혀왔다. 그 물건을 확인하는 순간 까닭없는 공포가 후려치듯 덮쳐왔다. 그것은 비파였다. 분명 쇼탕이 타던 현악기 비파였다. 비파의 원뿔형의 줄감개에 빨간 술이 달려 있으니 분명 그의 악기가 맞았다. 비파는 공명함이 깨져 있었고 줄이 끊어져 문어발처럼 너불거리고 있었다. 더럽혀진 빨간 술이 소슬한 바람에 나붓겼다. 쇼탕이 그렇게 아끼던 악기였다. 어느 한번 신기하게 눈여겨보는 춘자에게 만져보라고 내주었다. 가야금비슷한 그 악기를 받아들고 춘자는 조심스럽게 줄을 튕겨 보았다. 탱! 맑고 쟁쟁한 소리가 났다. 둘은 마주보며 어줍게 처량하게 웃었다. 으깨진 비파를 보노라니 쇼탕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고 불안감이 엄습해 들었다.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춘자는 알수 없었고 그 미지의 상상이 그녀에게 국수발 불듯 공포를 배가시켜주었다. 다시 위안소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주홍빛 대문과 주홍빛 창틀이 눈에 안겨오자 새삼스러운 공포가 느껴졌다. 올크러진 상상과 공포를 주체할길 없어 춘자는 뒤미처 뛰기 시작했다. 먹지 못한 몸은 삭풍에 내쳐진 허수아비같았다. 하지만 허우적거리며 일심으로 뛰기 시작했다. 위안소만 멀리 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뛰였다. ​ 골목길을 벗어났고 포구가 눈앞에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 다음순간 춘자는 그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몽매(夢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현실감을 다잡기 위해 두눈을 올롱하게 치떴다. 넘실거리는 강을 마주한 포구에서 춘자는 무엇을 보았던가? 포구에는 무언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산채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그것이 당금 배에 실을 그 무엇인줄로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보는 순간 춘자는 정수리로 우럭우럭 뜨거운 피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시체였다. 시체더미였다. 시체가 집채처럼,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시체들은 그 무슨 넝마조각처럼 형체가 비탈려져 있었고 피칠갑이 된 얼굴은 저마다 기괴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시체더미주위에 흥건한 피가 고여있었는데 이미 응고되여 온 포구 바닥이 주홍빛으로 번들거렸다. 수십명의 쿠리(苦力)들이 장갑을 끼고 시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시체들을 들어 방파제 우에서 강에 던져 넣었다. 그 무슨 공사장에서 토벽돌을 옮기는 인부들처럼 무덤덤한 기색으로 시체들을 맞들어 양자강에 던져 넣었다. 시체는 강바닥에 덧쌓여 새로운 둑을 만들고 있었다. 인부들의 장갑이 벌건 피로 물들어 있다. 던져 넣을때마다 방파제 아래 얼지않은 양자강의 물이 철썩 튕겨 올랐다. 튕겨오르는 물보라는 진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붉은 물결이 수귀의 혀바닥마냥 널름거렸다. 문득 욕지기가 느껴져 춘자는 쭈그리고 앉으며 토악질을 해댔다. 먹지도 못한 속으로 멀건물을 토해 냈다. 무언가 발에 물컹한 기운이 느껴졌다. 춘자는 깜짝 놀라 발을 옮겼다. 그것은 사람의 팔뚝이였다. 잘려진 사람의 팔뚝이였다. 게걸음치는 그의 발에 또 무언가 걸채였다. 또 사람의 시신이였다. 물컹물컹 시체의 조각들이 허둥대는 그의 발에 밟혔다. 악악 춘자는 새청맞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하나 그녀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바탕 피의 광풍이 휩쓸고 간 성은 기괴하리만치 고요한 체념에 빠져 있었다. 석고를 바른듯 하얗게 질린 얼굴, 체념한듯한 얼굴의 사람들은 짐짝을 메고 들고 길바닥에 뒹구는 시체를 징검다리 넘듯 훌쩍 훌쩍 뛰여 넘어서 어디론가 황급히 가고 있다. 그들의 발치에 걸려 잘려진 머리통이 그 무슨 뽈처럼 데구르르 구울기도 한다.   그저 부지런히 옮기는 걸음들만에서 어서빨리 이 지옥의 성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들이 엿보였다. 둘러보니 온 시가지는 오물의 사태를 뒤집어 쓰기라도 한듯 순식간에 더럽혀져 있었다. 깡그리 부서져 있었다. 건물도 성벽도 나무도 차량도 그리고 사람도… 포구 둘레의 사거리 구석구석에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다. 집채들은 불에 타버렸고 성벽은 무너져 있고 그 가녁을 따라 또 시체들이 쌓여 있다. 아직도 저 멀리서 뭉게뭉게 연기가 자우룩하게 피여 오른다. 어디선가 토혈하는듯한 녀인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끔찍한 현장앞에 움음소리라도 들려오면 실감이 나련만 울음은 인차 그쳤다. 이 도시 사람들은 이제 울음조차도 잃어버린듯 했다. 트럭들이 포구를 향해 몰려 오고있었고 트럭에 실린것은 모두가 시체였다. 화물을 부리듯 시체들을 우르르 쏟아놓으면 다른 트럭이 또 다가와 쏟아내는것 역시 시체였다. 꿈이리라, 꿈이면 아주 지독한 꿈이리라. ​춘자는 우묵한 악몽의 구덩이에 빠져들어 가위눌린 사람처럼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소한 겨울비는 피비린내를 몰고 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물에 바닥에 응고되였던 피물들이 다시 벌창해져 흐르기 시작했다. 비바람에 춘자의 검은 치마가 차랑차랑 나붓겼다. 하늘과 땅이 몰경계(沒經界)로 자오록히 내리는 피빛 겨울비속에 춘자는 망연자실 서버렸다. ​ "연변문학" 2015년 9월호 ​  
5    아픔은 링크되여 있다 댓글:  조회:2705  추천:12  2015-01-15
  . 작가의 말 .   아픔은 링크되여 있다 ​ 김 혁​   ​ ​남경대학살 기념관에서​   1,   몇해전 조선족력사에 관심을 갖고있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우직한 답사를 강행한적 있었다. 경신년 대참안이 일어난 장암동으로 향한 답사였다. 룡정에서 동남쪽으로 다섯시간 가까이 수십리 산길을 톺아 목적지에 이르렀다. 장암동에서 수난자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다시 먼먼 산길을 되돌아섰다. 발에 물집까지 생겼고 힘에 부쳐 그자리에 주저앉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지나 가는 농부를 붙잡고 사정사정한 끝에 경운기를 삯내여 힘들었던 답사를 겨우 마무리할수 있었다. 그날 유적지에서 우리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피부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제는 민가와 학교와 교회를 깡그리 불사르고 남정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성차지않아 녀인네들이 눈물로 묻은 시체를 다시 파내여 소각하는 귀축같은 “이중학살”을 저질렀다.   답사를 마친뒤에도 따끔거리는 발의 통증은 길에 나서기도 힘들 정도로 며칠 련속 나를 괴롭혔다. 그보다도 일제가 장암동에서 자행한 만행에 대한 기억이 더욱더 나의 신심을 오래도록 괴롭혔다.   2,   장암동답사를 하기 몇해전에는 한부의 르포에서 심히 충격을 받은적 있었다. 소설쓰기와 병행해 매체에서 20여년을 기자직으로 일해온 필자로서는 르포가 갖는 매력에 대해 십분 잘 알고있다. 르포의 매력에 푹 빠져 한때 꽤 잘 나간 장편르포집을 집필, 출간한적도 있었다. 그 쟝르에 흥미를 가진지라 르포집이라면 통독은 물론 그 창작자에 대해 의례 주시하곤했다. 장순여(张纯如)라는 르포작가가 있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사학가인 그녀는 남경대학살에 대해 저술한 르포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량심적인 집필은 일본 극우세력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들로부터 끈임없는 협박을 당해 왔던 그녀는 정신적 고통을 못이겨 2004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작가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그녀의 문명(文名)을 알린 장편르포 “력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를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었다. 1937년의 그 겨울, 남경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 그 만행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린 보고서였다. 저자는 각종 기록과 생존자들의 인터뷰 자료등을 통해 일본군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폭력을 마치 공포소설을 보는것같은 끔찍한 문체로 세세하게 그려내였다. 희생자인 중국인의 관점에서, 미국과 유럽의 시각에서, 다각적으로 남경의 대학살을 이야기했고 또 일본이 어떻게 력사속에서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 기도(企圖)했는지 낱낱이 밝혔다. 부피가 두터운 르포를 읽으며 혹한에 들린듯 부르르 진저리를 쳤었다. 그 진저리는 나의 엄청 많은 열독리력중에서도 자주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떨림이였다. 그후로 cctv의 일곱시 뉴스에서 나는 또 한번 그 떨림을 경험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다. 뉴스는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했다.   3,   그리고 지난 2014년 가을, 나는 저 유명한 남경대학살의 현장에 섰다. 사비를 팔아 굳이 남경으로 향했던것은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남경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터미널 표시판과 지하철 도어의 전광판에 그리고 네 거리 곳곳에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가는 선로가 뚜렷이 표기되여 있었다. 기념관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서 커다랗게 새겨져있는 “300000”이라는 수자가 나의 시망막을 모나게 찔렀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이다. “100인 참수경쟁”을 벌린 일본인 장교, 잘려져 뒹구는 중국인의 머리와 팔 다리, 산 사람을 과녁삼아 총검으로 찌르고 생매장하는 광경… 일본군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만여점의 자료들이 무거운 침묵과 간간의 흐느낌소리가 깔린 기념관내에 전시돼 있었다. 1937년 12월 13일 고도(古都) 남경은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졌고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 이후 한달여 동안 적수공권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륙했다. 남녀로소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고문, 강간, 생매장등으로 끔찍한 처형 방법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 잔인함이란 차마 입에 담을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세계사적인 참극이다. 인류사에 이처럼 짧은 기간에 무차별적인 살륙전을 벌린 사례가 없다. 한개 도시의 일원(一圓)에서만 자행된 만행은 단기간에 저질렀다는 점에서 나치의 학살을 릉가한다. 전람이 거의 끝나가는 기념관의 출구쪽에는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대학살 당시 12초에 한 명씩 살해당했음을 상기시키는 소리였다. 그 숨통 죄이는듯한 시간의 소리를 한초 한초 헤며 나는 또 한번의 혹독한 떨림을 경험했다. 남경대학살은 종전후인 1946년 이 사건을 다룬 남경군사법정에서도 명백하게 확인된 참안이다. 그리고 남경대학살의 전범들은 남경군사법정과 도꾜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량심세력만이 이를 인정할뿐 “이는 중국인의 환상이다” ,”학살은 없었다”는 뻔뻔한 부인이 계속되고있다. 그 극우세력의 대오속에는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들도 들어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부인하고있다. 불과 수십년전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다. 수십만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다. 위안부 배상촉구문제는 1992년 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시작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이를 랭랭하게 외면하고 있다. “위안부는 자발적인 성매매이다”며 그 오욕의 력사에 대해 세탁하려하고있다. 남경대학살의 부인에 이은 후안무치한 궤변의 연장이다. 그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들중에도 역시 중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펴낸 유명한 일본녀류작가도 있었다. 력사를 왜곡하는 그들의 역주행에 같은 소설가로서 커다란 유감을 느껴 나는 우리의 간행물들에 련이어 관련 칼럼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와중에 “력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이 외려 그 력사를 다시 기억해 내고 기록하게끔 한 소설가의 창작충동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영욕이 교차하는 무대인 남경, 통한이 서린 땅에서 나는 여러가지 아픔이 동시다발적으로 덮쳐드는 트라우마(재난을 겪은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를 대신 경험할수 있었다. 장암동 참안, 위안부들의 참상, 남경대학살… 이 부동한 곳, 부동한 사람들이 꼭 같은 사람들에 의해 겪은 수난의 아픔들이 연결고리가 되여 나의 심장을 옥매듭으로 파고들었다. 급기야 나는 그 동질성의 아픔들이 올올이 링크(두개 이상으로 련결되는 물건이나 사건)되여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남경에서 돌아오는 고속렬차에서 허깨비처럼 흔들리며 그 아픔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다졌다. 어떻게 쓸가고 막연하게 그리고 환몽처럼 머금었던 생각들이 링크되여 한꺼번에 뇌리에 떠올랐다. 돌아와 서재를 뒤적여 보니 내가 소장한 작품들중에 위안부소재의 작품은 몇부 안되였다. 품을 들여 검색해봐도 뜻밖에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다.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적지않았으나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다. 영화나 드라마는 더러 있었으나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다. 그중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간직한 이들의 아픔을 위배한채 위안부 테마를 상술에 리용하는 작품도 적지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어두운 우리 민족 현대사의 희생자들로서 전쟁을 통해 인간의 인권이 어떻게 유린됐는지 확인시켜주는 산 증인이다. 하지만 위안부의 몸을 노리개로 바라본 이런 작품들은 력사의 진실에 대한 재조명은 커녕 멍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슴에 다시 못질하는 행위로 볼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력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을 잊고 더욱이 그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망각과 상혼을 쫓는 세태가 부끄러웠다. 거기에서 우리 민족 작가들이 쓴 소설작품은 더구나 적었고 외려 일본이나 미국쪽에서 쓴 작품들이 몇부 있을뿐, 작품성이 들쭉날쭉해 수작(秀作)은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조선족 작가들의 이 소재에 대한 픽션작품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었다. 지성화된 기계적 감정에 길들어 있는 우리 작가와 가련할 정도로 적은 독자군은 이런 제재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실제 근년래 근대력사를 다양한 쟝르로 재조명하는 일에 빠져들어 있는 나를 두고, 나의 문학블로그에 들어와 “이 따위로 죽은 사람들만을 위해 구닥다리 냄새 나는 글을 쓰지 말라”는 악풀이 루차 달린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소설, 인물전, 칼럼, 기행수필등을 동원해 우리의 영욕이 엇갈린 력사를 조명하는 나의 작업은 이 수년간 지속되고있다. 그래서 다섯부의 장편을 펴내고 다음 소재에 대한 선택에 심려와 숙고를 거듭하던중 여섯번째 장편소설의 소재로 단연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소재를 골라잡았다. 그 력사적 대사건의 들머리에 바로 우리 신변에서 일어난 장암동 참안도 곁들어 기록하기로 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진술,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문서, 르포 등 갖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력사의 질곡에 붙매였던 그녀들을 대상화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자 한다.    통한으로 얼룩진 그 페이지를 쉬이 넘기지도 접지도 말고 계속 적어내려가려는 소명(召命)의 의지는 나의 끊임없는 창작행위와 링크되여 있다.    2014년 초동(初冬) “청우재.聽雨齋”에서 "연변문학" 2015년 1월호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진혼곡 - 모짜르트
4    김혁장편소설《마마꽃, 응달에 피다》 재판 댓글:  조회:2328  추천:10  2014-10-10
“지리멸렬한 진혼곡을 다시 울리며...”  김혁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재판  ​ ​   문화대혁명이라는 특수한 년대를 배경으로 10여명 청춘들의 부동한 운명을 그려낸, 김혁의 자서전적 색채가 짙은 《마마꽃 응달에 피다》가 재판됐다. 소설은 제5기 연변작가협회 계약작가작품으로 선정됐고 중편원작이 《도라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후에 장편으로 재창작되여 단행본으로 출간, 《장백산》문학상과 제6회 “진달래”문예상 창작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김혁작가는 10년사이에 도합 네부의 장편을 펴냈고 인물전기, 력사기행 등 중후한 작품들을 선보였지만 자신의 첫 장편인 《마마꽃, 응달에 피다》가 주는 엑스터시를 잊을수 없다고 한다.  일찍 1998년에 “설태를 내보여라, 어제라는 거울에”라는 제목으로 중편소설로 발표됐었고 이를 다시 장편화한 작품은 단행본으로 발표되여서 독자와 평단의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이 작품에 대한 평문도 적지 않게 나와 그중 한편은 이 작품에 대한 론문으로 석사학위를 따냈고 또 다른 한편은 한국방송대학 평론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55회짜리 라지오소설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초판본이 수상자들에 대한 특혜로 출간해준 작품이기에 그 출간수량이 극히 적어 서점가에 오르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제목만 들어보았지 읽지는 못했다.하여 이번에 새롭게 중판본을 내기로 마음먹은것이다.    소설은 자서전적 요소를 띄였고 우리 문단의 장편분야에서 흔치 않은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했으며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저자의 고향이기도 한 룡정을 배경으로 했다. 김혁작가는 이 장편이 자신의 창작성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시간이 검증해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현대 중국인들에게 문화대혁명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암흑기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안해가 남편을 학생이 선생을 단죄대에 올리고 주먹질하고 침을 뱉아야 했던 그 시대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기때문이라고 김혁작가는 말한다. 혹은 흥건하던 상처의 아픔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딱지가 앉고 딱지가 떨어지고 흉터가 아물어가자 사람들은 그 상처를 잊었을수도 있다고 말한다.    현재 물질의 풍요에 노곤해져 모두들 일종의 카르텔(동일 업종의 사람들이 리윤의 증대를 노리고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맺아 형성되는 안일한 형태)같은 침묵과 회피의 완충지대에서 안일만을 즐기고 있는것은 아닌지 반문하며 이렇게 침중한 과거에 대한 평이와 미온적인 태도, 그리고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에 비해 우리 문단에 한심할 정도로 미미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다른 펴낼 작품이 많음에도 기어이 십년전 작품을 뒤적여 다시 중판본을 내는 리유라고 밝혔다.    “혹자는 하필이면 그 아픈 상처를 들쑤셔야 하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력사란 달력처럼 찢어던지면 그만인 일회용의 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전제입니다.”    문혁에 아버지를 잃고 이름자조차에 그 시대의 각인을 아프게 받아야했던 문혁시기 태생의 필자로서는 이 제재를 간과할수 없었다고 한다.    김혁작가는 이 장편이 자신의 첫 장편작품이라 설익은 작품일망정 력사라는 이름의 호랑이 등에 본의아니게 올라타 들썩임을 당해야만 했던 젊은 청춘들, 세상의 폭력과 반인륜적 관습, 그 형극의 틈바구니에서도 유토피아로의 열망과 생존본능으로 몸부림치던 모든 문혁경력자들을 위한 진혼곡으로 읽혀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리련화 기자  ​ "연변일보" 2014-9-26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    지리멸렬한 진혼곡을 다시 울리며 댓글:  조회:2368  추천:12  2014-06-12
지리멸렬한 진혼곡을 다시 울리며 -  "마마꽃, 응달에 피다" 중판본을 내면서         첫 장편이 발표된지 꼭 10년만에 중판본을 펴낸다.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나의 창작생애에 나름 중요한 작품이다. 나의 자서전적 요소를 띄였고 우리 문단의 장편분야에서 흔치않은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했으며 또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인 룡정을 무대로 했다는 의미에서 애초의 나의 창작성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시간의 검증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십년간 도합 네부의 장편을 펴냈고 또 인물전기와 력사기행등으로 거의 한해에 한부 꼴로 자칭 "중후한" 작품들을 선보였지만 첫 장편의 습작이 내게 준 그 엑스터시의 과정을 내내 잊을수 없다.   순수문학지인 “도라지”잡지에 1998년경에 발표한 중편소설 “설태를 내보여라, 어제라는 거울에”를 다시 장편화한 작품은 발표되여서 독자와 평단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제5회 연변작가협회 계약작가 선정작품으로 되였고 “도라지”문학상에 이어 “장백산”문학상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을 거듭 수상했다. 또 이 작품에 대한 평문도 적지 않게 나와 그중 한 편은 이 작품에 대한 론문으로 석사학위를  따냈고 한편은 한국방송대학 평론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2012년에는 55회짜리 라디오 소설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초판본이 수상자들에 대한 특혜로 출간해준 작품이기에 그 출간수량이 극히 적어 서점가에도 오르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들어는 보았지만 읽지는 못했다. 작가자신에게 차려진 책자의 수는 더구나 적어 대부분 문우들에게 증정하지조차 못한 면괴스러움을 내내 안고있다. 그리하여 이번에 새롭게 중판본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2005년에 출간된 초판본의 표지     현대 중국인들에게 문화대혁명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암흑기다. 부모가 자식을, 안해가 남편을, 학생이 선생을 단죄대에 올리고 주먹질하고 침을 뱉어야 했던 이념 과잉시대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혁에 아버지를 잃고 이름자조차에 그 시대의 각인을 자자(刺字)처럼 아프게 받아야했던 문혁시기 태생의 필자로서는 이 제재를 간과할수 없었다.   물질풍요의 전성기를 누리고있는 요즘에는 어쩌구려 문혁이라는 말조차도 쉽게 꺼내지 않는다. 수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10년간 아비지옥(阿鼻地獄), 규환지옥(叫喚地獄)의 맨 밑바닥에 내쳐져 지옥의 불에 인두질 당하고 릉모(凌侮)를 당했지만 요즘은 아무도 거기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그 상처의 넓이와 깊이에 비해 남아있는 기록은 우리 문단에서는 한심할 정도로 미미하다. 흥건하던 상처의 아픔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딱지가 앉고 딱지가 떨어지고 흉터가 아물어가자 사람들은 그 상처를 잊었다. 또 하필이면 그 아픈 상처를 들쑤셔야하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허나 력사란 달력처럼 찢어 웅그려 던지면 그만인 일회용의 망각이 아니다. 그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전제이다. 우리의 현재를 규정짓고 미래와 직결되는 그 지리멸렬한 과거에 대해 어찌 일신의 향락에 마취되여 잊을수가 있을가? 물질의 풍요에 꺼둘리고 노곤해져 모두들은 일종의 카르텔(동일 업종의 사람들이 리윤의 증대를 노리고 자유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되는 안일한 형태)같은 침묵과 회피의 완충지대에서 안일만을 즐기고있다. 이렇게 침중한 과거에 대한 평이와 미온적인 태도가 주는 좌시와 부재가 이 내가 펴낼 작품이 많음에도 기어이 십년전 작품을 뒤적여 다시 중판본을 내는 리유이다.   첫 장편이라 설익은 작품일망정 이 작품이 시대라는 이름의 호랑이 등에 본의아니게 올라타 추썩임을 당해야만 했던 젊은 청춘들, 세상의 폭력과 반인륜적 관습, 그 형극의 틈바구니에서도 유토피아로의 열망과 생존 본능으로 몸부림한 모든 문혁경력자들을 위한 진혼곡으로 읽혀지기를 원한다.   2014년 5월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과”의 대담   -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의 창작 과정과 에피소드   P  D: 남 철 진행: 신금철 방송일: 2011-06-09 방송시간: [목]     신금철: 본 방송국 라지오소설 프로에서는 금년 4월 10일부터 6월 6일까지 58회에 걸쳐 라디오 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를 방송했습니다. 이 소설은 연변문학에 련재되였던 당시 독자들의 크나큰 흥미를 끌었고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5년이 지난 오늘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를 창작하신 저명한 청년작가 김혁 소설가를 모시고 이 소설의 창작을 둘러 싸고 이야기를 나누고저 합니다. 이 작품의 인상적인 점은 우리문단에서 드물게 녀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장편소설이라는 점이다. 작가적인 의도는? 김혁: 우리가 감동하며 읽었던 명저들을 살펴보면 안나 까레니나. 보바리 부인, 나나, 제인 에어, 테스, 헤스터, 스칼렛 등으로 독자들중에 쟁쟁한 이름으로 남은  녀성주인공들의 운명을 다룬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허나 우리 문단에 아직 한 녀성의 운명을 주선으로 다룬 장편은 거의 없다싶이 되였다. 외유내강의 특유의 성정미를 가진 조선족녀성의 일상사와 그에서 관조해본 우리의 현사회, 이한 시점이 가져다주는 창작방식이 나에게 주는 흥미가 컸다. 그래서 어떤 녀인상(像)을 그리고싶었다. 안나 까레니나 같은, 제인 에어 같은, 빠리 노뜨르담 아래의 애스메랄다 같은, 아니면 더버빌 가의 테스 같은 그렇게 분명 기억될 녀인들을  쓰고싶었다.      어느날인가 무심코 내가 주물 해낸 소설 속 인물들을 머리에 하나 둘 떠올려 보다가 60 여 편이 되는 작품 중에 녀주인공이 겨우 한 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집계에 스스로 놀란 적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녀성 주역을 내세워 그네들이 치렬하게 통과해온 삶을 직성 풀리게 쓰고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다. 중국문단을 살펴보면 중량급작가들도 독자들의 취미와 작품의 상업화를 위해 본격문학제재에 통속문학형식을 접목하여 좋은 본을 보이고 있다. 이는 우리 조선족작가들이 배울바이다. 중국문단의 번역서나 한국의 취미소설이 그렇게 독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여러 잡지들에 다투어 게재 되는데 반해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 문단에는 아직 련정이나 추리, 현념, 무협, 판타지을 비롯한 통속제재가 전무하다고 말할수 있다.   이에 비추어 우리 동포사회의 문제점이 편파적으로 처처에 깔려있어 글의 무게를 구축하지만 대중적 통속소설의 형태로 글을 이어나가면서 글의 중후감을 보장하는외 자칫하면 재미위주에 빠지기 쉬운 결함을 아름다운 언어구사와 신선한 결말이 주는 비극미로 보완하고자했다.   신금철:  이 소설은 운명이 기구하고 순박한 농촌녀성이 가난탈출을 위하여 도시에 진출하고 간난신고를 겪다가 결국에는 밀항배에서 죽어가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평론의 시각에서도 이 작품을 비애소설, 저층서사라고 했는데 작가가 작품의 구조를 이렇게 설치한 까닭은?   김혁: 저층서사(底層敍事)란 변혁기의 중국사회에 이미 표면화된 민생문제에 대한 관조를 나타내면서  빈부차이, 새로운 도시빈민층, 도시에 진출한 농민공 등 밑바닥인 생을 영위하는 계층의 궁핍한 삶과 정신실존을 사실주의방법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저층서사소설에서는 아직까지도 도시에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분망한 소외된 계층을  주요 묘술대상으로 삼고  이 부류 사람들의 처지를 우리 시대의 대사로 대할것을 주장하며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면서 이를 통하여  시대의 일부 삐뚤어진 가치관념을 비판하고 아울러 개체생명의 독립과 존엄을 고양하고있다. 글에서 나는 산업화과정의 부산물로서의 시골녀성들이 고향을 떠나고 산업예비군으로 충당되며 그한 과정에 육체적파멸 정신적 파멸로 이어지는 도식과 현사회를 증언하는 녀인들의 다양한 삶의 양상을 한 인물에 집대성시켜 풀이하려 했다.   모든것이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되고 돈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세태의 횡포속에 수동적인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한 개체로 살아남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녀성상과 그 과정에서의 눈물겨운 좌절과 몰락에 대해 살펴보려 했다.    사회의 욕망구조와 남성중심의 문화권속에서 사회와 충돌하고 대립하는중에 랑자하게 락인되는 녀성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저 하며 축복받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그네들이 어떻게 운명에 우롱당하고 내쳐지는가를 전경식으로 펼치고 그 고통스럽고 무원조한 존재를 형상화 하려 했다.   신금철: 박신애가 대표하는 인물군체는? 작가가 박신애를 통해 표현하려는 우리민족 내지 사회상은? 김혁: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여느 작품의 구상때보다 나의 창작충동을 특히 강렬하게 불러준 작품이다.   장시기의 기자생활에서 필자에게 가장 크게 안겨온 것은 농촌인구의 도시대거 진출과 그속에 선봉으로 나선 녀인들의 운명이다. 최근년래 땅을 버리고 도시로 진출하는 조선족수는 년년이 급증하는 수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핍박에 의해 월강이민해왔던 우리 중국조선족의 또 한번의 이민열조라 분석한다. 80년대말로부터 지금까지 산해관이남을 넘어선 조선족수는 2,30만이라 한다. 220만으로 헤아리는 중국조선족의 인구수효로 볼 때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수치이다.   그중 맨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조선족녀인들이다. 짠지장사,음식장사로 나갔고 내지의 외국합자기업으로 나갔고 한국에 품팔이로 나갔다. 이들중 또 상당수는 유흥업소의 “3배동”아가씨들과 한국인현지처, 매춘녀들로 륜락된다. 북경시만해도 현재 유흥업소의 66프로는 조선족의 소유이며 적발된 조선족매춘녀의 수자만 해도 7천여명이라 한다. 따라서 섭외혼인으로 한국에 시집가는 조선족 녀인수도 90년초에는 해마다 1400명좌우로부터 중기에는 7600여명으로 요사이엔 만여명으로 그 수가 급증하고 있다. 얼마전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 나가있는 조선족수는 20만명, 그중에 녀성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대이동은 조선족사회의 경제, 문화 모든면에서 충격을 주고 있고 우리의 조선족사회는 전례없던 진통을 겪고 있다. 그 진통속의 삶을 형상화하는 것은 작가로서는 하나의 미룰수없고 감이 큰 작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박신애라는 이 인물에 접근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것은 박신애는 현대화건설의 물결속에서 도시에 진출한 수십만 조선족의 일원, 하나의 생명개체라는것이다.    또한 나는 조선족자치주의 수부에서 살며 이곳에 운집해드는 농촌 처녀들의 출현과 그들의 변해가는 삶의 양상을 본의 아니게 지켜볼때가 많았다.     내가 경영하던 자그만 식당에서 복무원으로 일하던 애가 있다. 시골에서 상경한 순박한 뜨내기였다. 경영부진으로 식당도 망가 먹고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그 애를 노래방에서 보았다. 요염하게 치장하고 노래방 배동녀로 된 그 애는 나를 보자 난감한 기색이 되여 랑하끝 쪽으로 허겁지겁 도망을 가는 것 이였다.      70먹은 령감과 위장결혼을 하여 한국으로 간 먼 친척 녀자가 있다. 어떻거나 한국 가서 떼돈 벌어오겠다던 그녀가 한국에서 뜻밖의 사고로 비명에 갔다. 우리가 자주 다니는 단골다방에 겨우 신분등록증을 타고 카운터에 나선 여린 녀자애가 있었다. 그 다방이 파가 이주를 맞고 그만 두게 되자 다방마담과 우리와 정들었던 레지애가 난 어쩌면 좋아요? 하고 울먹이는 것 이였다. 이렇게 내가 90년초에 직접 경영하였던 식당과 책방에서 복무원으로 일했던 처녀애, 우리가 단골로 다니는 음식점이나 다방에서 녀급으로 일하는 처녀들, 우리 이웃이나 친지들중에 너나가 엇비슷한 처녀애들의 출국과 일자리 찾기 ... 그네들의 다양하고 불운하기 그지없는 삶들이 곳곳에서 촉발되는 감개를 주었고 따라서 나더러 이 소설을 구상하고 익히게 했으며 강렬한 창작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인물들의 운명이 집대성되여 태여난 것이  바로 신애였다. 그들 저마다는 시골서 보내온 생감자처럼 풋풋하면서도 아린 이야기를 가지고있다. 그 참담한 동질성의 가슴 저린 이야기들을 요즘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운명의 진공(眞空)속에 살아가는 그네들의 몇 가지 모습이 몽타주되여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피 돌림이 같은 사촌누이같이 애정이 가는 그들의 비극적인 삶이 환영으로 눈앞에 나타나군 했고  내 정감의 상온(常溫)을 뛰여 넘어 시시 때때 형벌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네들의 드라마 같은 삶을 쓰고싶었다.      그네들의 삶을 아슬아슬한 곡예의 줄타기에로 몰아간 오늘의 세태를 쓰고싶었다.      마을을 비우고 집을 비우고 사랑을 비우고 떠나간 우리의 녀인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오늘의 현실이다. 그 막중한 현실을 정시하고싶었다.     그리고 박신애의 주변의 인물들을 고찰해보면 광천수차 사기 양인철, 운수회사의 버스 사기 박털보, 김밥집 마담, 장아주머니, 고향친구 경자, 그다음 신애보다 후에 국자가에 들어온 효준, 림호, 그리고 상인 윤성원, 시인 안경준 등을 하나하나 분석해보면 신애와 마찬가지로  운명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다수이고 진정으로 신애를 사랑하는 사람, 도와주려는 사람은 소수임을 쉽게 보아낼수 있다. 이처럼 개혁개방후 중국 조선족의 삶이 길도 여러 갈래로 뻗었으며 삶의 양상도 다양해지였다.  박신애의 삶은 그중 한가지 부류 사람들의 삶의 양상일뿐이다. 박신애를 통해 격변기 조선족 공동체 사회의 여러 양상도 더불어 보여주려 했다. 박신애라는 인물을 통하여 나는  박신애처럼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삶이 현장을 림리하게 조명하려 했으며  그들에게 무한한 동정의 마음을 표했다.  개혁개방 30년래 우리 나라의 경제는 고속도로 발전하고 총체상에서 중국사람들의 삶의 질이 크게 세인을 놀래울 정도로 제고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또 일찍 사람들이 에측하지 못했던 많은 사회문제들이 생성된것은 사실이다. 그 하나의 문제가 바로 빈부차이의 확대와 도시와 농촌의 경제생활수준과 문화생할수준 차이의 확대,  새로운 도시빈민층의 생성,  도시에 진출한 농민들의 사회적보장문제의 미해결 등 문제이다.   게다가 중국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공동체는  천성적으로  자체의 문제가 수두룩한데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그것들이 총발로되는 양상을 보여주고있다. 조선족 농촌인구의 대량 도시진출과 조선족인구의 대량 해외진출에 의하여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집거지구의 조선족의 인구는 급속히 축소되고있으며 그 결과로  이미 조선족 민족사회는  문화적으로  해체되고있으며 급속히 동화되는 조짐을 보이고있으며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는 조선족인구가 다른 어느 민족보다 많아지고있다는 절규도 어렵잖게 들을수 있다.   신금철: 이 작품은 당시 연변문학에 련재할때 독자층에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했는데 그때의 에피소드는? 김혁: 이 소설은 “연변문학”지에 2003년 10월호부터 ~ 2005년 2월호까지 련재되였다. 나의 두번째 장편이다. 지금은 장편을 여러부 냈지만  그때는 상당히 실험단계에 내놓은 장편, 첫 장편을 마쳐 두달만에 연재를 시작한 장편이였다. 소설은 2008년에 독자들의 요청으로 “종합신문”지에 1년간 련재되였다. 일면 쓰면서 연재했기에 편집자들도 마지막 순간까지 신애의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마지막 회를 접하고 편집자로부터 왜 죽였느냐고 엄숙한 질문이 올라왔다. 문우들은 이 작품을 읽은후 나를 킬러, 살인흉수라 부르기도 했다. 친구가 한번은 퇴근해 오니 안해가 눈이 퉁퉁 부어 있더란다. 영문을 캐 물으니 신애가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이 장레식에는 안가냐고 물으니 안해가 신애는 근간에 읽고있는 작중인물이라고 대답한데서 파안대소를 했다고 한다. 모 시에서는 노래방 배동녀들이 이 작품을 사기 위해 서점에 찾아와 문의 한 현상까지 일었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2009년 나는 역시 한 녀인의 치렬한 삶을 다룬 “와늘”이라는 중편을 썼다. 역시 운명의 질곡에서 헤매다가 나중에 밀입국을 택했던 녀인, 하지만 밀입국 하던 배가 난파된 현념으로 마무리 했지만 나는 주역이 죽는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 어쩌면 신애의 눈물겨운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또 한부의 녀성상을 그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서점에서 10여명의 생면부지의 독자에게서 왜 책으로 출시되지 않느냐, 또 메일로도 질문을 받았고 나의 블로그에도 질문이 여러차 올라왔다. 독자들의 애대에 힘입어 요사이 책자로 출간하려 한다.   신금철: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라디오소설로 제작되여 58회에 걸쳐 방송됐다. 활자로 찍힌 평면적인 소설과 립체적인 드라마식 소설의 구별점을 작가자신으로는 어떻게 느껴보는가?   김혁: 사실 문인들중에서 ‘영화광’이로 통하고 있는 나는 이 작품에서 영화나 드라마의 몬따쥬 수법을 시종 즐겨 썼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고 모두들 한부의 텔레비 드라마를 보는것 같다고들 했다. 사실 이 소설은 드라마로 각색되여 제작하려고 시도도 했던 작품이다. 한 유명 영화감독의 요청에 이 작품을 드라마로 각색했고 광전총국의 비준을 맡으려 중문으로 번역까지 해두 었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결국 자금문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지금의 영화나 방송문학은 그 발전 전기에 문학과 기타 예술의 힘을 입어 자신의 본체 내함을 크게 풍부히 하였고 오늘 더욱이는 현대 고신 기술의 힘을 입어 질적인 비약을 가져 왔다. 눈앞을 현란하게 하는 촬영기교와 컴퓨터 조합은 영화의 서사적 전개에 커다란 활동공간을 가져다주었고 성우의 매혹적인 목소리와 그에 곁들인 음악과 자연의 소리에 대한 재현은 문학을 보는것이 아니라 듣는 쟝르로 립체적으로 거듭나게 했다. 텔레비나 컴퓨터 디브이디가 없었던 한때 휘황한 전주곡을 울렸던 방송문학은 지금 이전보다 많이 외면되고 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움의 쟝르로 남아있다. 요즘의 다양해진 문화참조계로 하여 수용자들 즉 독자나 청중들은 참조계들 사이의 애정 분배를 강요당하게 된다. 행복한 고민이다. 이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문학이며 예술은 변신해왔고 발전해왔다. 수용자가 원 하는 수요를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공급하는 것이 작가의 생존방식이라고 믿는다. 모든 생산이 그러하듯이 문학과 예술도 수요자에 대한 서비스가 최종목적으로 간주되는 세월이다. 아무리 자신이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하더라도 수요층이 없고 돈이 되지 않은 글은 작가 스스로 도태될 뿐 지속적인 재 공급이 불가능한 것이다. 인류의 생활양식이 변화하고 수요자들의 수요가 달라지면 공급자들은 여기에 부합해야만 하고 적응해야 생존할 수 있다. 때문에 참조계의 바다속에서도 방송문학은 그 독일무이한 매력으로 그의 청중은 어디까지나 있으며 그 매력도 영원하리라 믿는다. 드라마의 꿈을 꾸다 무산되였던 작품, 그러한 아쉬움이 있는 작품인데 이번에 방송소설로 각색되여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나 덜어주었다. 이 기회를 빌어연출과 청아한 목청의 성우들 그리고 전체 제작진에 감사를 드린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    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장편으로 다루기까지 댓글:  조회:2967  추천:17  2010-10-20
방송대담 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장편으로 다루기까지       프로그램명: 연변 “아리랑” 방송 “FM88,좋은 세상”  방송날자:   2010년 9월23일 (목요일) 아침 8:00~8:40  래빈:,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위원장. 연변일보 “종합신문”편집장) 책임편집:   강순선 사회자: 박성국, 김설화 심열:         태장:김명신 총편: 김정길    주임: 김건호    담당PD: 강순선   박성국, 김설화; 반갑습니다. 우선 명절휴가에도 쉬지 못하시고 오늘 이렇게  생방송에 출연해 주신 김혁 작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혁: 네 반갑습니다. 김설화: 윤동주시인은 생전에 불후의 명시들을 많이 남기신 분이신데요. 선생님 께서는 어떻게 되여 “시인 윤동주”를 장편으로 다룰 생각을 갖게 되였는지 그 계기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 주시렵니까? 김혁: 연변이 낳은 이 걸출한 민족시인의 위상이 력사와 시간의 검증속에 큰 존재로 자리매김하면서 연변, 한국, 일본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서 그의 고고한 삶에 대한 추모붐이 다시금 일고있습니다 . 한국에서는 그의 시를 문화재로 등재를 신청하고 새로이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고, 문화제가 폭넓게 열리고있습니다 . 지어 윤동주의 명시가 새겨진 핸드폰도 출시되여 팔리고있습니다. 가해국인 일본에서는 그의 시, 평전이 번역 출판되고 그의 시 읊기 활동이 해마다 펼쳐지고있으며 그의 생애를 그린 연극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얼마전에는 한국에 거주하고있는 스웨덴과 아일랜드 대사가 어느 모임에서 각각 자신이 좋아한다는 윤동주의 시를 랑독해 화제가 된적도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론문으로 석사, 박사가 된 사람도 50명이 넘구요,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론문도 수백편이 나왔습니다. 평전이나 위인전기물도 수십권 나왔구요. 이렇게 논픽션 작품은 많이 나왔는데 그에 비해 픽션작품 즉 소설과 같은 창작물은 전무한 실정이였습니다. 너무나 알려져있는 시인이였지만 그 높은 위상때문에서였을가요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작품화하려한 사례가 극히 적었습니다. 소설로는1992년경에 한국에서 한부가 나온줄로 알고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방송드라마의 시나리오라고 볼수 있지요. 그 공백의 부분이 저에게 어딘가 사명감 띄 창작충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이 낳은 시인윤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오래전에 벌써 윤동주 관련 까페(http://cafe.naver.com/dz.cafe)도 개설하면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려는 작업을 한번 해보려고 오래전부터 뼈물러 먹었었다. 또 저는 순 룡정태생입니다. 룡정에서 태여나고 또 학창시절을 포함하여 많은 시간을 룡정에서 보냈는데 이 요소가 의 창작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있는 룡정중학을 졸업했구요. 윤동주의 가족이 명동에서 이사를 와서 거주한 영국더기 부근도 우리가 즐겨 봄소풍을 다니던 곳이였고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에도 학교 동창친구가 몇명이 있어 자주 놀러다니곤 했습니다. 사실 윤동주의 숨결은 우리가 살고있는 지역의 곳곳에 어려있었습니다. 고향 연변에서는 그의 모교 명동학교를 복원하고 그의 동시비를 구축하고 문화제준비작업이 한창이지만 고향이라는 이 지리적으로 특수한 지역에서 그에 대한 추모와 연구작업은 아직도 미비한 편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성국: 선생님께서는 우리 연변문학계에서도 장편소설, 장편실화, 수필, 시, 칼럼 그리고 편찬 저서같은 여러 장르의 많은 작품을 내놓은 다산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요. “시인 윤동주”를 장편으로 다룸에 있어서 적지 않은 어려움에 맞띠운줄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점들이 어려웠는지요?    장편소설 윤동주가 련재되고있는 "연변문학" 표지     김혁: 참으로 힘든 작업이였습니다. 윤동주시인은 천고절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우리한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기신 분이지만 그이의 생활경력은 오히려 알려진 부분이 극히 적습니다. 때문에 그 생활화폭수집이 아주 힘들었지요. 이곳에서 발표된 윤동주에 관련 론문 수십편을 거의 다 읽었고 한국에 가서도 윤동주에 관련된것이라면 평전으로부터 론문집, 지어 아이들을 위해 씌여진 윤동주 전기물까지도 시중에 있는것이라면 모조리 사들여 읽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인 문익환 평전, 문익환의 친지들의 회고록, 윤동주의 후배들이 남긴 일화, 추모문들도 세세히 읽었습니다. 관련된 론문, 평전들을 읽는 외 윤동주가 연변에서 생활했던 곳들, 명동과 같은 지역들을 돌아보았고 옛 은진중학 졸업생들을 찾아보면서 당시 시대상, 풍물, 일화들을 들어보고 자료집과 인터넷에 떠도는 그 년대의 귀중한 사진들도 모으고 스캐너 하여 들여다보면서 당시의 분위기를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친지와 많은 윤동주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윤동주시인의 녀동생인 윤혜원 녀사도 세번 정도 만났습니다. 이곳 연변문학지에서 세운 윤동주문학상과 같은 시상식 관련 행사를 위해 윤혜원 부부는 여러번 오스트랄리아에서 연변을 찾은적 있습니다. 그때마다 윤종주를 소설화하려는 의도를 표명하면서 그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윤동주를 연변에 처음 알린 오무라 마스오 교수와도 만났습니다. 1994년 제가 “연변일보” 문화기자로 뛰고있을 무렵 그분을 큰 편폭으로 취재한적 있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교수로서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한분이지요. 그리고 “윤동주평전”의 일본어판 역자인 아이자와 가크씨와도 만났습니다. 번역가의 성함이 어쩌면 나와 이름이 꼭같은 혁, 윤동주라는 위인을 통한 인연이 참으로도 절묘했다 자료들을 읽고 관련 연구자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차 머리속에 작품의 륜곽을 세우고 내용을 채워 나갔습니다.   박성국: ”시인 윤동주” 장편소설은 모두 몇부작으로 현재 어느단계에까지 완 성되였는지요? 김혁: 연변작가협회에서는 몇년에 한번꼴로 벌려나가는 계약작가라는 좋은 창작제도가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창작기획을 세우고 스토리와 창작의도서를 제출하면 연변의 유명 대학가 교수, 평론가, 원로작가들로 평심단을 뭇고 제출된 많은 기획서중에서 가능성있는 작품을 엄선해 냅니다. 그리고 그후 일년간 선정된 작가의 작품에 창작기원금을 지원하게 되지오. 장편소설 는 이런 절차를 통해 선정되였습니다. 여태껏 계약작가제도가 7회에 이르고있는데 저는 제5회때 한부의 장편소설이 선정되였고 이번에 또 한번 선정되였는데 지금까지 유일하게 두번째로 작품이 선정된 사례입니다. 작품에 명분을 얹어준 연변작가협회에 이 기회를 빌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잘 알려진 인물의 일생을 그리는 건 작가로서 부담감이 아주 컸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였습니다. 이때문에 창작생에 처음으로 창작 슬럼프에 빠져들 정도로 애초에 세웠던 창작계획에 맞추지 못하고 근 1년간 한 글자도 써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부담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것들을 해소하기 위해 윤동주 관련 서적들을 닥치는대로 통독했습니다. 또한 당시 당시의 국면의 더 깊게 료해하기 위하여 일본력사며 태평양전쟁에 관한 력서서적들도 대량 통독했습니다. 또 제가 원체 영화광이라 소장해둔 테잎과 cd가 많은데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다큐, 영화와 드라마들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 영상물들이 제게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습니다. 그리고 “연변문학”월간지에 올해 1월호부터 시작하여 지금 10회째 연재 되고 있습니다. 올해 말까지 련재하려 합니다. 련재하는 한편 탁마를 그냥 거치고있는데 세번째의 대 수정을 거치고 잇습니다. 연변문학의 련재는 편폭상 30만자 미만에 그치는데 완결본은 아마 자수로 45만자 정도로 나올것 같습니다. 꽤 큰 편폭입니다. 김설화: 책으로는 언제 출시되는지요? 김혁: 조건이 허락되면 명년 봄께에 국내외에서 책자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김설화: 평시 책을 즐겨 읽어 “독서광”으로 소문났다 들었습니다. 현재 읽고 계시는 책들은 주로 어떤 책들인지요? 김혁: 작가는 잡가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읽고있는 책은 다양합니다. 소설뿐아니라 문학비평서, 종교, 철학, 영상학, 민속학등으로 신간이 출시되는대로 손에 잡히는대로 읽고있습니다. 매일이고 사들이는 그렇게 많은 훌륭한 책들을 시간때문에 미처 다 읽어내지 못하는 한계가 안타깝습니다. 근래에는 중국조선족의 생성과 발전에 관한 관련 문헌자료집들을 대량 사들여 읽고있습니다. 휴일마다 연길시의 헌책가게들을 돌며 그중에서 오래전에 출판된 조선족 관련 책자들을 찾아내고 사들이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그외 중국과 세계의 력사에 대한 서사성적인 작품들과 중국명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제에 관한 책들을 주로 읽고있습니다. 요즘 금방 읽었고 읽고있는 책들은 조선의용군의 일화를 다룬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와 “闯关东”이라는 중국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중국근대사에서 화북지역인들의 동북에로의 이민을 엮고있습니다. 우리 민족 역시 이주사를 다룬 작품들이 많은데 중국작가들은 이러한 제재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 서술기법을 읽고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요즘의 베스트셀러인 코엘료의 판타지 “연금술사”를 중문으로 읽었고 일본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들을 읽고있습니다. 요즘 붐을 이루고있는 판타지에 대한 리해와 추리소설가가 추리기법으로 풀이한 사회문제 등에 대한 흥미때문입니다. 박성국: 선생님은 문인들중에서 이름 짜한 영화 수집광이라고 들었는데 취미와 애호는 어떠하신지요? 김혁: 내가 열광적인 영화수집애호가라는 것은 문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이프 점들에서 나를 모르는 경영자들이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입니다. 명작개편영화와 할리우드의 대작영화 중국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테프와 VCD디스크로 대량 사들였다. 세계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부터 상업흥행작 “타이타닉 호”에 이르기까지, 4,50년대의 명감독 히치콕의  ”나비 꿈” 으로부터 당대 명감독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이르기까지 중국명감독 진개가의 “패왕별희”로부터 중국신세대감독의 신작”플랫폼”에 이르기까지 4천여부의 영화작품을 소장, 우리 집은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습니다. 개봉영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 그리고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들여 봅니다. 영화CD에 대한 엄청난 지출때문에 집사람한테 자주 혼나기도 하지요 살아가면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중 적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어떤 가치의 획득이고 소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자기유지이다. 적극적인 보상을 립증하기 위해서는 자기유지를 해야 합니다. 이제 독서와 영화보기는 내 생리적인 행위에 가깝게 체질화된것 같습니다.  김설화: 현재 어떤 일에 주력하고 계신지요? 김혁: 네, 요즘 지기들과 함께 조선족력사문화 동호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지금 여느때 보다 더 큰 부침을 겪고 있다.  도시,해외로의 대규모 인구이동과 그에 따른 인구의 마이나스 성장, 농촌마을과 교육단체들의 피폐, 언어의 동화등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론이 돌고있다. 이러한 고비에 매스컴과 문학단체에 몸담그고있는 소위 지성인으로서 민족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단순한 등산이나 낚시같은 건강과 유흥을 목적으로 한 단체와는 차별화 된 동호회- 조선족의 어제를 소급하고 현재를 진맥하기 위한 역사 동호회를 만들 구상을 하게 된것입니다. 동인들은 조선족 매스컴에 종사하는 기자, 소설가, 시인, 수필가 그리고 교직원들로 그 년령층은 30대초반에서 40대중반으로 무어졌습니다. 룡정에서 발족식을 가졌고 이미 몇차례의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김설화: 앞으로의 창작 계획은 어떠 하신지요? 김혁: 많은 창작스케줄을 잡고 있습니다. 위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쓴다는 부담감에서 해탈되여 요즘은 그동안 미루어 왔던 중단편 몇편을 써서 한번 직성을 풀고 그동안 잡지사 편집들의 청탁을 미루어 왔던데 대한 송구스런 마음에 보상을 주고싶습니다. 올해는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한 룡정 지명 기념 1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룡정이라는 이 조선민족의 자취가 깃들고 얼이 서린 이 곳의 생성과 현황에 대해 분석하는 장편르포를 집필하고있는데 역시 명년 상반년에 책자로 출판하려 합니다. 그리고 명년 3월 5일은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반 기반을 닦으신 초대주장 주덕해 탄신 100주년을 맍는 날입니다. 그에 대한 경모의 심정으로 아이들의 시각으로 쓴 위인전기 주덕해 이야기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주덕해 탄신 100주년을 맞추어 3월 초에 책으로 출시할 예정입니다. 2011년은 또한 지난세기 60년대에 중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재난의 문화대혁명 발발 4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찍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로 이 전대미문의 재난에 대해 다룬적 있는데요. 이번에는 몇부의 중편을 조선족 권위 간행물들에 발표하는것으로 당시 시대상을 고발하고 문화대혁명이 남긴 핵폭발과도 같은 후유증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작가로서 벅찬 계획이야 많이 세울수 있지요 문제는 이 많은 계획들을 하나하나 차근히 실행해나가는것입니다. 그리고 사명감을 갖고 우리 조선족의 어제를 소급하고 래일의 진로를 모색할 이러한 작품들을 계속해 한편 한편 써나가려고 합니다. 김설화;이번 창작을 통해 예전보다 윤동주시인에 대해 한층 더 깊은 료해로 감정을 깊이 하지 않았을가 싶은데요? 김혁: 윤동주는 이제 한민족의 걸출한 시인으로 온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으로 추앙되였습니다. 연변이나 한국 지어 윤동주가 숨진 가해국 일본에서 까지 추앙받는 시인으로 오늘날 윤동주의 위치가 매김되고 그 붐이 일고있는 것은 그의 천고절창처럼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인생을 살려고 앴던 그의 인격이 빛을 발하고 거기에 작가적인 추구와 종교인으로서의 두터운 신앙심이 얹혀져서였기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의 시는 어떤 민족에게 한정된특수한 상황하에서 지어진것이지만 그의 의식은 창작당시의 상황을 훨씬 릉가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로 승화되여 있습니다   오늘 날 윤동주는 단 시인이라는 수식을 뛰여넘고 있습니다 . 윤동주는 어떠한 암울한 시대에서도 자포자기하거나 포기하지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고 그 느낌을 노래하면서 희망을 표출해 냈다. 이 처럼 시대를 넘어 민족문제를 가로질러 미래를 향한 근본적인 목표로 한 작품이기에 개인의 고뇌와 시대적 압박에 의해 생성된 시이지만 그것의 열매는 그 틀에 그치지않고 더 높고 더 높이 향기를 뿜고 있는것이다.  그러니 윤동주는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흔들리고 또 일제강점기라는 그 민족의 수난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굳건히 걸어나간 한 위대한 인간으로 우리들의 사표로, 아이콘으로 그 모습이 격상되였다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윤동주의 삶과 그 작품은 시공간과 여러계층을 초월하여 현대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 생각됩니다. 그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않는 아이콘을 그려내는 벅찬 작업을 완수할수있게된데 대해, 그리고 그 작품이 시인의 타계와 조명붐에 편승할수 있어 뿌듯하다. 이제 시인의 고고한 삶과 정신은 이미 내 삶속에 한발자욱 깊게 들어와 있습니다 . 박성국, 김설화; 명절에도 귀중한 시간을 내여 좋은 말씀 들려주신 김혁작가님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김혁: 좋은 방송프로에 긴 시간 할애해 주셔 감사합니다.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안치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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