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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담
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장편으로 다루기까지
프로그램명: 연변 “아리랑” 방송 “FM88,좋은 세상”
책임편집: 강순선
사회자: 박성국, 김설화
심열:
태장:김명신
총편: 김정길
주임: 김건호
담당PD: 강순선
박성국, 김설화; 반갑습니다. 우선 명절휴가에도 쉬지 못하시고 오늘 이렇게 생방송에 출연해 주신 김혁 작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혁: 네 반갑습니다.
김설화: 윤동주시인은 생전에 불후의 명시들을 많이 남기신 분이신데요. 선생님 께서는 어떻게 되여 “시인 윤동주”를 장편으로 다룰 생각을 갖게 되였는지 그 계기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 주시렵니까?
김혁: 연변이 낳은 이 걸출한 민족시인의 위상이 력사와 시간의 검증속에 큰 존재로 자리매김하면서 연변, 한국, 일본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서 그의 고고한 삶에 대한 추모붐이 다시금 일고있습니다 .
한국에서는 그의 시를 문화재로 등재를 신청하고 새로이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고, 문화제가 폭넓게 열리고있습니다 . 지어 윤동주의 명시가 새겨진 핸드폰도 출시되여 팔리고있습니다. 가해국인 일본에서는 그의 시, 평전이 번역 출판되고 그의 시 읊기 활동이 해마다 펼쳐지고있으며 그의 생애를 그린 연극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얼마전에는 한국에 거주하고있는 스웨덴과 아일랜드 대사가 어느 모임에서 각각 자신이 좋아한다는 윤동주의 시를 랑독해 화제가 된적도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론문으로 석사, 박사가 된 사람도 50명이 넘구요,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론문도 수백편이 나왔습니다. 평전이나 위인전기물도 수십권 나왔구요. 이렇게 논픽션 작품은 많이 나왔는데 그에 비해 픽션작품 즉 소설과 같은 창작물은 전무한 실정이였습니다.
너무나 알려져있는 시인이였지만 그 높은 위상때문에서였을가요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작품화하려한 사례가 극히 적었습니다.
소설로는1992년경에 한국에서 한부가 나온줄로 알고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방송드라마의 시나리오라고 볼수 있지요. 그 공백의 부분이 저에게 어딘가 사명감 띄 창작충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이 낳은 시인윤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오래전에 벌써 윤동주 관련 까페(http://cafe.naver.com/dz.cafe)도 개설하면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려는 작업을 한번 해보려고 오래전부터 뼈물러 먹었었다.
또 저는 순 룡정태생입니다. 룡정에서 태여나고 또 학창시절을 포함하여 많은 시간을 룡정에서 보냈는데 이 요소가 <시인 윤동주>의 창작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있는 룡정중학을 졸업했구요. 윤동주의 가족이 명동에서 이사를 와서 거주한 영국더기 부근도 우리가 즐겨 봄소풍을 다니던 곳이였고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에도 학교 동창친구가 몇명이 있어 자주 놀러다니곤 했습니다.
사실 윤동주의 숨결은 우리가 살고있는 지역의 곳곳에 어려있었습니다.
고향 연변에서는 그의 모교 명동학교를 복원하고 그의 동시비를 구축하고 문화제준비작업이 한창이지만 고향이라는 이 지리적으로 특수한 지역에서 그에 대한 추모와 연구작업은 아직도 미비한 편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성국: 선생님께서는 우리 연변문학계에서도 장편소설, 장편실화, 수필, 시, 칼럼 그리고 편찬 저서같은 여러 장르의 많은 작품을 내놓은 다산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요. “시인 윤동주”를 장편으로 다룸에 있어서 적지 않은 어려움에 맞띠운줄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점들이 어려웠는지요?
김혁: 참으로 힘든 작업이였습니다.
윤동주시인은 천고절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우리한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기신 분이지만 그이의 생활경력은 오히려 알려진 부분이 극히 적습니다. 때문에 그 생활화폭수집이 아주 힘들었지요.
이곳에서 발표된 윤동주에 관련 론문 수십편을 거의 다 읽었고 한국에 가서도 윤동주에 관련된것이라면 평전으로부터 론문집, 지어 아이들을 위해 씌여진 윤동주 전기물까지도 시중에 있는것이라면 모조리 사들여 읽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인 문익환 평전, 문익환의 친지들의 회고록, 윤동주의 후배들이 남긴 일화, 추모문들도 세세히 읽었습니다.
관련된 론문, 평전들을 읽는 외 윤동주가 연변에서 생활했던 곳들, 명동과 같은 지역들을 돌아보았고 옛 은진중학 졸업생들을 찾아보면서 당시 시대상, 풍물, 일화들을 들어보고 자료집과 인터넷에 떠도는 그 년대의 귀중한 사진들도 모으고 스캐너 하여 들여다보면서 당시의 분위기를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친지와 많은 윤동주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윤동주시인의 녀동생인 윤혜원 녀사도 세번 정도 만났습니다.
이곳 연변문학지에서 세운 윤동주문학상과 같은 시상식 관련 행사를 위해 윤혜원 부부는 여러번 오스트랄리아에서 연변을 찾은적 있습니다. 그때마다 윤종주를 소설화하려는 의도를 표명하면서 그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윤동주를 연변에 처음 알린 오무라 마스오 교수와도 만났습니다. 1994년 제가 “연변일보” 문화기자로 뛰고있을 무렵 그분을 큰 편폭으로 취재한적 있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교수로서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한분이지요. 그리고 “윤동주평전”의 일본어판 역자인 아이자와 가크씨와도 만났습니다. 번역가의 성함이 어쩌면 나와 이름이 꼭같은 혁, 윤동주라는 위인을 통한 인연이 참으로도 절묘했다
자료들을 읽고 관련 연구자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차 머리속에 작품의 륜곽을 세우고 내용을 채워 나갔습니다.
박성국: ”시인 윤동주” 장편소설은 모두 몇부작으로 현재 어느단계에까지 완 성되였는지요?
김혁: 연변작가협회에서는 몇년에 한번꼴로 벌려나가는 계약작가라는 좋은 창작제도가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창작기획을 세우고 스토리와 창작의도서를 제출하면 연변의 유명 대학가 교수, 평론가, 원로작가들로 평심단을 뭇고 제출된 많은 기획서중에서 가능성있는 작품을 엄선해 냅니다. 그리고 그후 일년간 선정된 작가의 작품에 창작기원금을 지원하게 되지오.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는 이런 절차를 통해 선정되였습니다. 여태껏 계약작가제도가 7회에 이르고있는데 저는 제5회때 한부의 장편소설이 선정되였고 이번에 또 한번 선정되였는데 지금까지 유일하게 두번째로 작품이 선정된 사례입니다. 작품에 명분을 얹어준 연변작가협회에 이 기회를 빌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잘 알려진 인물의 일생을 그리는 건 작가로서 부담감이 아주 컸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였습니다. 이때문에 창작생에 처음으로 창작 슬럼프에 빠져들 정도로 애초에 세웠던 창작계획에 맞추지 못하고 근 1년간 한 글자도 써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부담감에 시달렸습니다.
그 것들을 해소하기 위해 윤동주 관련 서적들을 닥치는대로 통독했습니다. 또한 당시 당시의 국면의 더 깊게 료해하기 위하여 일본력사며 태평양전쟁에 관한 력서서적들도 대량 통독했습니다. 또 제가 원체 영화광이라 소장해둔 테잎과 cd가 많은데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다큐, 영화와 드라마들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 영상물들이 제게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습니다.
그리고 “연변문학”월간지에 올해 1월호부터 시작하여 지금 10회째 연재 되고 있습니다. 올해 말까지 련재하려 합니다.
련재하는 한편 탁마를 그냥 거치고있는데 세번째의 대 수정을 거치고 잇습니다. 연변문학의 련재는 편폭상 30만자 미만에 그치는데 완결본은 아마 자수로 45만자 정도로 나올것 같습니다. 꽤 큰 편폭입니다.
김설화: 책으로는 언제 출시되는지요?
김혁: 조건이 허락되면 명년 봄께에 국내외에서 책자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김설화: 평시 책을 즐겨 읽어 “독서광”으로 소문났다 들었습니다. 현재 읽고 계시는 책들은 주로 어떤 책들인지요?
김혁: 작가는 잡가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읽고있는 책은 다양합니다. 소설뿐아니라 문학비평서, 종교, 철학, 영상학, 민속학등으로 신간이 출시되는대로 손에 잡히는대로 읽고있습니다. 매일이고 사들이는 그렇게 많은 훌륭한 책들을 시간때문에 미처 다 읽어내지 못하는 한계가 안타깝습니다.
근래에는 중국조선족의 생성과 발전에 관한 관련 문헌자료집들을 대량 사들여 읽고있습니다. 휴일마다 연길시의 헌책가게들을 돌며 그중에서 오래전에 출판된 조선족 관련 책자들을 찾아내고 사들이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그외 중국과 세계의 력사에 대한 서사성적인 작품들과 중국명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제에 관한 책들을 주로 읽고있습니다.
요즘 금방 읽었고 읽고있는 책들은 조선의용군의 일화를 다룬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와 “闯关东”이라는 중국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중국근대사에서 화북지역인들의 동북에로의 이민을 엮고있습니다. 우리 민족 역시 이주사를 다룬 작품들이 많은데 중국작가들은 이러한 제재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 서술기법을 읽고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요즘의 베스트셀러인 코엘료의 판타지 “연금술사”를 중문으로 읽었고 일본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들을 읽고있습니다. 요즘 붐을 이루고있는 판타지에 대한 리해와 추리소설가가 추리기법으로 풀이한 사회문제 등에 대한 흥미때문입니다.
박성국: 선생님은 문인들중에서 이름 짜한 영화 수집광이라고 들었는데 취미와 애호는 어떠하신지요?
김혁: 내가 열광적인 영화수집애호가라는 것은 문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이프 점들에서 나를 모르는 경영자들이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입니다.
명작개편영화와 할리우드의 대작영화 중국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테프와 VCD디스크로 대량 사들였다. 세계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부터 상업흥행작 “타이타닉 호”에 이르기까지, 4,50년대의 명감독 히치콕의 ”나비 꿈” 으로부터 당대 명감독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이르기까지 중국명감독 진개가의 “패왕별희”로부터 중국신세대감독의 신작”플랫폼”에 이르기까지 4천여부의 영화작품을 소장, 우리 집은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습니다. 개봉영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 그리고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들여 봅니다. 영화CD에 대한 엄청난 지출때문에 집사람한테 자주 혼나기도 하지요
살아가면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중 적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어떤 가치의 획득이고 소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자기유지이다. 적극적인 보상을 립증하기 위해서는 자기유지를 해야 합니다. 이제 독서와 영화보기는 내 생리적인 행위에 가깝게 체질화된것 같습니다.
김설화: 현재 어떤 일에 주력하고 계신지요?
김혁: 네, 요즘 지기들과 함께 조선족력사문화 동호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지금 여느때 보다 더 큰 부침을 겪고 있다. 도시,해외로의 대규모 인구이동과 그에 따른 인구의 마이나스 성장, 농촌마을과 교육단체들의 피폐, 언어의 동화등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론이 돌고있다.
이러한 고비에 매스컴과 문학단체에 몸담그고있는 소위 지성인으로서 민족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단순한 등산이나 낚시같은 건강과 유흥을 목적으로 한 단체와는 차별화 된 동호회- 조선족의 어제를 소급하고 현재를 진맥하기 위한 역사 동호회를 만들 구상을 하게 된것입니다.
동인들은 조선족 매스컴에 종사하는 기자, 소설가, 시인, 수필가 그리고 교직원들로 그 년령층은 30대초반에서 40대중반으로 무어졌습니다.
룡정에서 발족식을 가졌고 이미 몇차례의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김설화: 앞으로의 창작 계획은 어떠 하신지요?
김혁: 많은 창작스케줄을 잡고 있습니다. 위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쓴다는 부담감에서 해탈되여 요즘은 그동안 미루어 왔던 중단편 몇편을 써서 한번 직성을 풀고 그동안 잡지사 편집들의 청탁을 미루어 왔던데 대한 송구스런 마음에 보상을 주고싶습니다.
올해는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한 룡정 지명 기념 1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룡정이라는 이 조선민족의 자취가 깃들고 얼이 서린 이 곳의 생성과 현황에 대해 분석하는 장편르포를 집필하고있는데 역시 명년 상반년에 책자로 출판하려 합니다.
그리고 명년 3월 5일은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반 기반을 닦으신 초대주장 주덕해 탄신 100주년을 맍는 날입니다. 그에 대한 경모의 심정으로 아이들의 시각으로 쓴 위인전기 주덕해 이야기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주덕해 탄신 100주년을 맞추어 3월 초에 책으로 출시할 예정입니다.
2011년은 또한 지난세기 60년대에 중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재난의 문화대혁명 발발 4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찍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로 이 전대미문의 재난에 대해 다룬적 있는데요. 이번에는 몇부의 중편을 조선족 권위 간행물들에 발표하는것으로 당시 시대상을 고발하고 문화대혁명이 남긴 핵폭발과도 같은 후유증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작가로서 벅찬 계획이야 많이 세울수 있지요 문제는 이 많은 계획들을 하나하나 차근히 실행해나가는것입니다. 그리고 사명감을 갖고 우리 조선족의 어제를 소급하고 래일의 진로를 모색할 이러한 작품들을 계속해 한편 한편 써나가려고 합니다.
김설화;이번 창작을 통해 예전보다 윤동주시인에 대해 한층 더 깊은 료해로 감정을 깊이 하지 않았을가 싶은데요?
김혁: 윤동주는 이제 한민족의 걸출한 시인으로 온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으로 추앙되였습니다.
연변이나 한국 지어 윤동주가 숨진 가해국 일본에서 까지 추앙받는 시인으로 오늘날 윤동주의 위치가 매김되고 그 붐이 일고있는 것은 그의 천고절창처럼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인생을 살려고 앴던 그의 인격이 빛을 발하고 거기에 작가적인 추구와 종교인으로서의 두터운 신앙심이 얹혀져서였기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의 시는 어떤 민족에게 한정된특수한 상황하에서 지어진것이지만 그의 의식은 창작당시의 상황을 훨씬 릉가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로 승화되여 있습니다
오늘 날 윤동주는 단 시인이라는 수식을 뛰여넘고 있습니다 . 윤동주는 어떠한 암울한 시대에서도 자포자기하거나 포기하지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고 그 느낌을 노래하면서 희망을 표출해 냈다. 이 처럼 시대를 넘어 민족문제를 가로질러 미래를 향한 근본적인 목표로 한 작품이기에 개인의 고뇌와 시대적 압박에 의해 생성된 시이지만 그것의 열매는 그 틀에 그치지않고 더 높고 더 높이 향기를 뿜고 있는것이다.
그러니 윤동주는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흔들리고 또 일제강점기라는 그 민족의 수난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굳건히 걸어나간 한 위대한 인간으로 우리들의 사표로, 아이콘으로 그 모습이 격상되였다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윤동주의 삶과 그 작품은 시공간과 여러계층을 초월하여 현대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 생각됩니다.
그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않는 아이콘을 그려내는 벅찬 작업을 완수할수있게된데 대해, 그리고 그 작품이 시인의 타계와 조명붐에 편승할수 있어 뿌듯하다.
이제 시인의 고고한 삶과 정신은 이미 내 삶속에 한발자욱 깊게 들어와 있습니다 .
박성국, 김설화; 명절에도 귀중한 시간을 내여 좋은 말씀 들려주신 김혁작가님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김혁: 좋은 방송프로에 긴 시간 할애해 주셔 감사합니다.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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