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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gender) 시점으로 읽는 김혁의 장편소설“춘자의 남경”
2019년 01월 27일 16시 30분  조회:782  추천:7  작성자: 김혁
 
 
. 평론 .
대상화와 소외화의 장치 해제를 위한 열쇠
- 젠더(gender) 시점으로 읽는 김혁의 장편소설“춘자의 남경”
 
시노무라 리에 (교토 불교대학, 문학박사)

 
들어가면서
우선 여기에서 말하는 젠더란 무엇인가, 그 개념에 대해 분명히 밝혀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요즘에도 곡해된 젠더개념들이 표류되고 있기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젠더(gender)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성(性)차이’이다. 즉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서 보여지는 남성과 녀성의 구별이다. 남성성과 녀성성이 생리적인 차이로부터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젠더는 단지 구별이지 차별은 아니다. 그런데 오랜 력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유교적가부장제도하에서, 그리고 전통적인 문화환경속에서 형성된 남성성과 녀성성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성적 역할분담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녀성을 “제2의 성”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녀성의 지위가 사회와 가정에서 낮았음으로 인해 녀성문화(정신문화와 물질문화)가 차별시되고 무시되여 왔다. 그 녀성성(녀성문화)이 근대에 들어서서 페미니스트와 인류학자, 민속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여 가치가 부여되고 정당화되였다. 말하자면 반제도적이었던 것이, 반문화적이었던 것이 정당화 되여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되였다. 따라서 페미니스트가 이 시점으로 작품을, 특히 남성 작가의 작품을 논할 때엔 늘 신랄한 비판과 야유가 쏟아지군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젠더리론에 대해 승인하고 있다. 남성성과 녀성성의 존재를 승인한다면 한 작품을 둘러싸고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작자와 독자사이, 그리고 독자사이의 성적 차이에 의한 충돌은 피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상정내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충돌도 결국에는 그 작품에 귀속되는 것으로서 충돌에 의하여 작품의 세계가 보다 넓어 지게 된다. 작자 김혁씨가 나에게 작품을 보여 주었을 때엔 아마 이 점을 념두에 두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작품에 다루어진 문제가 문제인 것 만큼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다룬 소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에 대해 진지히게 고민해본적은 없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녀성독자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현실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전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또한 전쟁의 참혹성을 말해주기 위한 산 증명이고 강유력한 력사 자료이다. 통치배의 폭력과 침략자의 만행에 의해 인권과 녀성권을 박탈당한 피해자중의 피해자이다. 폭력과 만행을 폭로하고 슬픔과 아픔을 전하는데 있어서 실물과 실언보다 더 유력하고 감화력이 있는 표현이 따로 있을까? 명명백백한 실제 사실을 굳이 허구로 표현하려 했을 때엔 현실을 의식영역에 끌어 올려 전술한 현실적 의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파헤치기 위해였을 것이다. 작자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 했고 어떤 문제를 내 주었을까? 소설이라는 문학쟝르에 설치되여 있는 가지가지의 대상화, 소외화의 장치를 과연 어떻게 해제할 수 있을까?
 
마술에 의한 실상과 허상의 숨바꼭질
   
우선 작자가 어떤 마술로 사실을 허구로 꼬았는가, 아니, 어떻게 허구라는 실로 사실이라는 구술을 꿰였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은 봇짱 시계탑 앞에서 시작되여 봇짱 시계탑 앞에서 끝난다. 이것이 우선 로련한 소설가의 첫번째 테크닉, 꾸밈새이다.
나쓰메소세키의 문학에 도취되여 있는 조선족 청년 종혁이와 그런 종혁에게 반해버린 하루꼬가 시간을 공유하려고 한다. 청년 남녀의 이 행위가 상징하는것은 즉 미래를 함께 하고저 하는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 앞에 장애가 나타난다. 하루꼬의 할아버지이다. 하루꼬의 할아버지를 이어 종혁의 할머니, 나아가서 력사가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있다. 그들이 과연 이 모든것을 이겨내고 맺어 질수 있을까? 드라마나 소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의 패턴, 로미오와 줄리에의 패턴이다. 이렇게 꾸며진 이 러브스토리가 소설을 처음에서 마지막으로 이어가는 주선이다. 스토리를 엮어나감에 있어서 굳이 흔히 있는 패턴을 선택했을 땐 작자가 노리고 있는 것이 이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소설에서 허구의 분위기를 북돋아 주는것은 하루꼬의 ‘할아버지’라는 기묘한 캐릭터이다. 다른 등장인물은 실재한 인물을 모델로 했거나 현실속에 있을수 있는 인물이지만 유독 이 ‘할아버지’만이 그 어데도 없는 인간이다. 이것이 두번째의 꾸밈새이다.
‘량쪽으로 치켜 올라간 카이저 수염’,  ‘절의 문켠에 선 수문장처럼 찢어져 올라간’ 두 눈섭에 ‘채도가 칙칙한 기모노 옷차림’으로 개화장을  휘두르는 ‘할아버지’는 일본 에도말기나 메이지시대에서나 볼수 있는 인물상이다. 전설속의 인물같기도 하고 어덴가 소세키를 닮은것 같기도 한 외모이다. 현재 천엔짜리 지폐에서 소세키가 사라진것처럼 일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보습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실은 남경에 간적있는 원 일본군, 즉 가해자이다. ‘할아버지’의 형상에는 일본 전설속의 용맹한 무사나 근대문학사의 대문호, 그리고 극악무도한 전쟁범 등 여러 인물상이 겹쳐져 있다고 볼수 있다. 일본이 갖고 있는 여러 얼굴이 겹쳐진 상징적인 캐릭터이다.
다음 세번째 꾸밈새는 이름의 일치이다. 
춘자와 하루꼬는 각기 조선어와 일본어로서 발음은 다르지만 한자 표기는 일치하다. 봄 春자에 자식 子자이다. 봄에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다. 근대 언문일치운동 이전에 조선이나 일본은 모두 漢文을 正統文, 美文으로 인정하고 썼다. 근대에 한자를 거의 버리다싶이 한 조선민족이지만 이름을 한자로 짓고 한자로 쓰는 문화가 아직 남아 있다. 
춘자의 봄은 아픔과 슬픔과 굶주림과 죽음의 계절이였다. 한편 일견 풍요로운 물질세계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는듯한 하루꼬이지만 정신상 고뇌에 시달리고 있다. 춘자와 하루꼬는 각기 자신을 원점으로 하는 자그마한 원안에서 돌았었다. 종혁이와 하루꼬의 만남이 없었다면 두 원은 서로 아득히 멀리 떨어진채 영원히 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표면상 종혁이에 의하여 두 원이 우연히 접하게 된 것으로 보여주면서 이름의 일치로 실은 그 것이 필연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두 원의 접함은 춘자와 하루꼬가 태여나기전에 먼 옛날 고대에 벌써 약속되여 있었다. 둘은 서로 접해야 하고 겹쳐져야 할 숙명이였다. 하여 필연적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남경(난낑)에서 겹쳐지게 된다.
‘춘자의 남경’과 ‘하루꼬의 난낑’이 바로 네번째 꾸밈새이다. 
위의 꾸밈새들은 모두 이 네번째를 위하여 준비된것이라고 볼수 있다. 여름 방학에 종혁이와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을 따라 ‘난낑”에까지 간 하루꼬였지만 차마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만행을, 그 만행하에 처참히 쓰러져 간 죽음들을 직시할 수있는 용기조차 하루꼬에게는 없다. 고물시장에서 장사치들의 경멸과 수모를 받는 하루꼬는 가해자의 손녀로부터 일변하여 피해자로 된다. 하루꼬를 피해자로 만든 진정한 가해자는 바로 ‘할아버지’이다. 여기서 춘자와 하루꼬는 완전히 겹쳐진다. 가해자 ‘할아버지’가 저지른 만행의 피해는 동시대의 춘자를 비롯한 타민족 녀성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70년후에 자신의 혈육인 하루꼬에게까지 미쳤다.
소설의 세부마다 보여지는 작자의 테크닉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논하기엔 편폭의 제한이 너무 크다. 마법 풀기를 이만쯤 해 놓아도 작자가 보여주려는것이 뚜렷이 나타난듯 싶다. 상술한 허구에 의해 부각된것은 모두 허상(현실속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나 사건)이다. 그런데 이 허상이 아니면 보여 줄수 없는 실상(현실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나 사건, 또는 사물의 본질)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 소설을 단순한 허구로 읽기엔 너무나도 많은 실상이 산재되여 있다. 사슴골의 참변으로 부터 시작하여 ‘상남군부위안소’, ‘상북군부위안소’, ‘일본군 위안부’, 남경대학살,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실재적 존재이다. 이러한 실상을 다룸에 있어서 작자는 두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리얼한 묘사이다. 18세기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사실주의사조의 뒤를 이어 전 지구를 휩쓴 자연주의사조에 의해 완성된 리얼리즘의 모사(模寫)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것이였다. 흔히 작자자신의 경험과 인생 그자체였다. 소설 “춘자의 남경”의 리얼한 묘사는 작자자신의 경험에 의한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생동하여 당혹감조차 주는 소설속의 ‘리얼한 묘사’는 리얼리즘과는 다른것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또 하나는 허구화이다. 사슴골의 참변으로 부터 ‘일본군 위안부’사건, 남경대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실제사실들이 춘자라는 인물형상에 의해 하나로 이어지고 다시 종혁이와 하루꼬의 러브스토리와 얽힌다. 실제사실뿐만아니라 흑룡강성 동녕현에서 발견된 피해자 할머니를 비롯하여 실재한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자가 모두 한 선으로 이어진다.
소설에 그려진것이 실재한 인물과 사건이기에 실상이라고 믿고 잡아 보려면 잡을수 없는 허상이다. 작자의 마술에 의한 실상과 허상의 숨바꼭질이다. 작자는 현실을 허구화하였고 형이하학적인것을 형이상학적인것에로, 물리적 령역의것을 의식적 령역에 끌어 올렸다. 하여 현실속에서는 일어 날수 없는 현상을, 즉 실상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을 허상을 통하여 표현할수 있었다. 점점이 널려 있던 하나하나의 아픔과 고통이 춘자의 형상에 집결되고 거대화되여 피해자가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상처의 크기와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하루꼬의 ‘할아버지’ 형상은 물론 사슴골 참변을 일으킨 일본군이나 남경대학살을 감행한 일본군, 그리고 춘자의 몸과 령혼을 짓밟은 일본군의 추악한 형상과 겹쳐진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작자는 그를 무자비한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그는 성격이 괴벽하기는 하지만 고양이들을 살뜰히 껴안고 쓰다듬어 주는 따스한 인간이고 무엇보다도 손녀를 끔찍히 여기는 인정이 많은 인간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머리속에 그리고 있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그리고 있을 ‘피해자의 이미지’와 ‘가해자의 이미지’, 즉 의식속의 실상인 것이다.
 소설에서 하루꼬의 ‘할아버지’는 끝내 속죄를 하지 않고 가해자인 채로, 춘자도 끝내 용납을 못하고 피해자인채로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춘자와 하루꼬의 겹침이 의미하는것처럼 가해와 피해, 속죄와 용서는 두 사물의 두 문제인 것이 아니라 한 사물안의 한 문제이다. 종혁이도 하루꼬도 피해서 갈수 없는 문제이다. 하여 종혁이는 이 모 것을 다 끌어 안고 가려고 한다. 종혁(또한 작자)의 변증법적 철학관의 형상화이다. 종혁이는 도망하려는 하루꼬를 붙잡으려 하고 하루꼬와 다시 봇짱 시계탑앞에 선다. 실존주의적 사상에 립각한 종혁의 주동성과 책임성이 있는 행동이다. 이는 작자가 독자들에게 내준 문제이기도 하다.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연변인민출판사 2018년)
 
객체화와 소외화의 견고한 장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성폭행, 남경대학살과 같은 만행을 덮어 감추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하여 유관 증명자료들을 없애려 하고 사건자체를 부인해 왔던 일본의 우익적 인간들도 엄연한 증언과 증명자료 앞에서 이젠 부인할수 없게 되였다. 
더는 부인할수 없게 되자 이제는 다른 구실을 찾는다. 당시 남경의 인구가 30만이 안 되었는데 어떻게 30만이 학살되였다고 할수 있느냐고 수자라도 줄여 보려고 떼를 쓴다. 그리고 일본군에만 위안부가 있었느냐, 미국군에도 있었고 한국군에도 있었다 운운 련대자를 찾아 책임을 회피하려거나 수치감을 덜려고 한다. 혼자 벌을 받기보다 함께 받는 상대가 있으면 수치감을 덜수 있다는 소학생들이나 해보는 유치한 생각이다. 원 오사카시장 하시모토도오루가 몇년전에 이런 망언을 하여 세계의 주목거리로 된적이 있다. ‘위안부’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결핍한것은 물론 이런 말을 내뱉는 심사가 비틀어진 것이고 태도가 건방지기 그지없다.
  ‘위안부’문제의 본질을 해명하려면 그 발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캐야 할것이다. 한마디로 찍어 말해서 남자들의 성욕을 채우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제도화한데서 온 것이다. 남권사회의 가부장제도는 남자의 혈통과 성으로 이루어 지고 이어져 내려가는 가문제도이다. 가문의 번영창성과 나아가서 나라의 번영창성을 위한 남자의 성행위는 정당화 되고 제도화 되였다. 남근중심주의의 극단화가 만든 것이 기방(일본에서는 遊廓)제도이다. 녀자를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물질화한 것이 기생, 또는 遊女이고 기생, 유녀가 바로 ‘위안부’의 모델이다. 일본의 유곽은 아즈치모모야마시대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치세(1585년-1603년)하에 권력의 통제와 보호를 받아 성립되였다. 근대 자유민권운동과 더불어 일어난 녀성해방운동의 추동하에 1872년, 메이지정부는 예창기해방령을 내렸지만 실제상 폐지된것은 극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유곽이 이름만 바꾸고 영업을 계속하였다. 간자키키요시의 보고(“매춘” 1974)에 의하면 1946년 1월24일, GHQ(연합국군 총사령부)의 공창제도폐지명령에 의하여 업체 316개, 창기 1만417명이 폐지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전을 선포한 사흘뒤, 내무성경보국장 하시모토마사미가 각청부현장관에게 ‘진주군(進駐軍)특수위안시설을 만들라’는 명령을 무선전으로 발사하였다. 26일, 경시청의 청탁을 받은 업자들이 모여 자본 1억원으로 RAA(특수위안부시설협회)를 설립하여 27일 개업하였다. ‘전후처리 국가긴급시설에서 신일본녀성 모집’이라는 광고를 내고 1360명을 채용(간자키 1974)하였다. 1946년 3월21일, 위안부의 90퍼센트, 미국군인 70퍼센트가 성병에 걸렸다는것을 파악하게 된 GHQ는 급기야 ‘미군장병의 일본부인에 대한 공공연한 애정 표시’를 금지시켰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베아테・시로타・골돈 등의 지도하에 녀성참정의 새 선거법(1945년 12월), 남녀 평등교육법 등이 성립되였다. 녀성해방을 위한 일본정부의 움직임이 얼마나 철저한 내적 반성이 결핍한, 외부 압력에 의한 억지공사였는가를 알 수 있다. 전쟁후의 일본은 페미니즘의 이론만 방대하고 실천이 결핍하였다. 바로 전쟁후의 이런 일본의 사회환경이 하시모토와 같은 인간을 길러냈다.
  
각설하고, 가문의 순결한 혈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녀성의 성욕은 금지되여야 했다. 하여 녀성의 신체는 아이를 낳아 주는 신체와 성욕을 만족시켜 주는 신체로 이분화 되였다. 전자가 물론 녀성의 기범이다. 한편 정당화 되고 제도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생은 신분이 미천했고 멸시를 받았다. 왜냐하면 기방제도가 유가의 도덕에 어긋나기 때문이였다. 기생의 미천한 신분과 그에 대한 사회전반의 차별시는 바로 남근중심사회 자체의 모순의 악과이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원 ‘일본군 위안부’가 선뜻 증언에 나서지 못한것도 바로 사회전반에 침투되여 있는 이러한 봉건적 사상관념때문이였다. 경멸의 눈총과 비난으로 하여 또 다시 상처를 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후 ‘일본인 노리개’라는 죄목으로 꼬깔모자를 쓰고 목에 헌 신짝을 걸고 조리돌림을 당한적 있는 춘자는 한국에서 온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앞에서 좀처럼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헌 신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어 낡은 신(破鞋)은 남권사회에서 기생을 모욕하는 말로 씌였을 뿐만아니라 여러 남자와 성적관계를 맺는 녀성에 대한 목욕적인 말이기도 했다. 녀성의 성기가 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웠다는 설도 있고 옛날 북경의 유명한 팔대골목에 문패가 없이, 즉 관가의 허가가 없이 사사로이 문패대신 꽃신을 걸고 남자 손님을 받은 집들이 있었는데 날이 지나고 달이 지나니 새 신이 물이 날아서 낡은 신이 되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것이라는 설도 있다. 녀성에 대한 모욕적인 말이나 표현이 공공장소에서 꺼리낌 없이 사용되였다는것은 해방후에도 의연히 사회에 남권사회의 낡은 관념이 농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불원천리하고 간신히 어머니곁으로 돌아왔건만 춘자는 어머니한테 냉대를 받는다. 어머니한테서마저도 소외화되는 춘자의 이중, 삼중적인 피해를 그림으로써 작자는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과 일본군의 악행을 보여주는 피상적인 묘사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원 ‘일본군 위안부’들이 증언에 나서게 된 때는 이미 ‘기생’이라는 단어가 사어로 되였고 상술한 낡은 관념이 희박해져 그들을 소외화 하는 제도적 문화적 장치가 다소 풀려졌을 때였다. 원 ‘일본군 위안부’들을 보호해 줄수있는 사회제도와 문화배경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증언을 하려면 또 한가지 각오해 두어야 할 문제가 있다. 성폭행의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가 몸소 증언을 한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끊임 없이 자기자신을 객체화하고 물질화하는 과정이였다. 현실속에서 성폭행피해자가 기소를 철수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타자를 향해 성폭행과정을 적라라하게 공개할 때마다 그들은 끊임 없는 자기자신의 타자화와 소외화를 통하여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견딜수가 없어서 기소를 철수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에서 종혁의 어머니의 설득에 의해 겨우 입을 열려고 한 춘자였지만 남성 청중은 견결히 거부한다. 손자인 종혁이도 례외가 아니다. ‘스나들은 나가줍소’, ‘그래 아매가 제 손자새끼한테꺼정도 제를 홀딱 벗길 그 맴이 아픈 얘기를 해야 되오’는 춘자의 령혼의 부르짖음이다. 실존의 각도에서 보면 춘자의 수치심은 녀성인 춘자의 남성앞에서의 자기자신에 대한것으로서 수치심을 통하여 한 인간으로서 뿐만아니라 한 녀성으로서의 가능성의 죽음과 자기자신의 근원적인 실태를 경험해야 한다. 작자는 이 부분을 필묵을 들여 그리고 있다. 물론 작자의 의도가 일제의 만행이 70여년전 ‘일본군 위안부’에 가한 육체적인 폭행에서 끝난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피해자 녀성들의 령혼마저 무참히 짓밟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진실을 형상화 하려는데 있었을것이다. 그러면서 증언자체가 춘자를 소외화하는 또 하나의 견고한 장치임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를 문학작품에 그린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녀류문학’이라는 단어가 세기초 내가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에 재적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활용되고 있었던 사실이 말해 주다싶이 근대문학은 남성문학이였다. 이른바 정통적인 문학사는 남성문학을 주축으로 엮어지고 ‘여류문학’은 주변문학으로서 ‘그 외에’의 형식으로 슬쩍 언급되거나 아예 무시되여 버렸다. 그도 그럴법하다. 근대에는 엘리터 남성을 맹주로 문학결사가 이루어지고 여러 유파를 형성하였다. 문학을 지향하는 녀성도 엘리터 남성의 문하생이 되여 추천을 받아야만 동인지에 발표를 할수 있었고 작가로 인정 받을수 있었다. 조선반도나 중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다고 할수 있다. 하여 근대소설은 남성의 사유방식과 론리체계에 따라 구성을 이룬 문학쟝르라고 할수있다. 그 근저에는 남근중심사상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재녀라 할지라도 녀성문학은 주변화 될수밖에 없었다. 녀성은 녀성의 고유한 문체를 발견했을 때만이 비로소 진정으로 문학을 소유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문학에서 양적으로 남성문학이 압도적이었으니 근대문학에 넘쳐나는것은 당연히 녀자의 신체묘사이다.
쓰보우치쇼요가 회화의 이론을 소설리론에 도입하여 사실주의로부터 시작된 근대일본소설에는 처음부터 근대적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세상을 객체화 하고 타자화 하는 기능으로서의 개인(남성)의 눈이 장치되였다. 반자연주의 기수인 나쓰메소세키의 문학이 일본을 풍미했던 20세기초에 도일하여 근대소설을 배운 로신과 리광수를 개척자로 하는 중국근대문학과 조선근대문학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남성의 시각에 의하여 관찰되고 모사된 녀성은 미화되고 신성화되기도 하였는가 하면 또 추화되고 비하되기도 했다. 설사 그 묘사가 녀성해방을 위한 혁명적인것이라 할지라도, 또 설사 그 것이 억압된 의식하에 있는 해방의 기동력으로서의 성묘사라 할지라도 거기에 투영된 것은 남성의 기호이고 성적인 욕망이며 관념이다. 결과적으로 녀성을 남성의 창조력안에서 성적소비의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객체화 되고 타자화 되고 물질화 되고 소외화 되는 이미지를 대량 생산하였다. 이에 녀성작가들, 특히 전후 현대녀성작가들은 보복이나 하려는듯이 같은 방법으로 남성을 대상화 하였다. 이것이 문학에서 발생하는 젠더현상이다.
문학속에 설치되여있는 이와 같이 견고한 장치때문에 소설에 ‘일본군 위안부’를 그린다는것은 그야말로 외줄타기와 같이 위험한 일이 아닐수 없다. 자칫하면 피해자 녀성을 다시 현대 남성의 욕망의 지배하에 전락시킬수 있기때문이다. 하여 작자에게 제기되는 물음은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셋째도 왜 ‘일본군 위안부’를 그리는가이다. 이는 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결과론적인 문제이다.
상술한바와 같이 소설 “춘자의 남경”이 진실을 철저히 허구화 하여 형이하학적인것을 형이상학적인 차원에로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소설속의 리얼한 녀성의 신체묘사와 성묘사는 실존임과 동시에 관념이다. 작자는 ‘일본군 위안부’사건을 재현시키려고함과 동시에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그 사건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과정과 인식의 과정을 그리였다. 70여년전의 지금 이 순간 즉 ‘이 때’, ‘이 곳’, ‘이 것’이라는 실존의 재현으로부터 70여년후에 회억으로 의해 나타나는 ‘그 때’, ‘그 곳’, ‘그 것’, 그리고 그 회억이 물질화 되여버린 ‘저 때’, ‘저 곳’, ‘저 것’이 다시 당사자가 아닌 후세의 사람(타자)들의 의식속에서 관념화 된다. 악몽의 력사가 되풀이되여서는 안된다. 봇짱 시계탑앞에서 다시 만난 종혁이와 하루꼬는 그들에게만 소유될 지금 이 순간 ‘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이 미래를 향한 ‘이 때’, ‘이 곳’의 ‘이 것’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거듭 되풀이하지만 종혁이는 춘자도 하루꼬도, 그리고 춘자와 하루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끌어 안고 미래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것은 종혁(또는 작자)의 변증법적 철학관의 표현이고 또 휴머니즘 사상의 표현이다. 이렇듯 작자는 현실적인것을 의식의 령역에로 끌어올리는 것으로써 상술한 문학속에 설치되여 있는 견고한 장치를 해제하고저 하고 있다. 총적으로 볼 때 가장 관건적인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객체화, 소외화의 장치는 해제하였지만 그러나, 국부적인 면에서 론쟁의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이 작품은 누가 읽어도 남성문학일것이다. 하루꼬의 외모라든가 일본인 ‘위안부’인 시오노 등 녀성등장인물의 신체묘사에서 느껴지는것은 역시 남성의 눈길이다. 또한 그 것은 작자의 눈길이기도 하니 녀성독자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남성작가와 녀성작가를 막론하고 문학령역 전체에 남겨진 숙제이기도 하다. 남성성과 녀성성의 차이를 무화하려는것은 극단적이고 또 불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상술한 폐단을 극복하면서 성차이를 표현할것인가 이다.
 
제3의 눈의 암시
이 소설에는 각기 다른 립장에서의 서로 다른 시점이 존재한다. 즉 피해자의 시점과 가해자의 시점, 피해자의 후손의 시점과 가해자 후손의 시점, 그리고 전지전능의 화자(작자)의 시점, 독자의 시점, 남성의 시점과 녀성의 시점 등 다각적인 시점이 제기되였다. 그런데 소설에는 또 피해자의 눈도 가해자의 눈도, 그리고 남성의 눈도 녀성의 눈도 아닌 제3의 눈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눈’은 력사와 사회를 보는 력사관과 세계관이다. 여기서 ‘제3의 눈’이란 바로 고양이의 눈이다.
소설의 첫 시작에서부터 등장한 고양이는 하루꼬의 할아버지의 곁에도 있고 종혁의 할머니의 곁에도 있고 일본군 위안소에도 있었다. 작자는 또 제3부에서 ‘봄을 우는 고양이’장을 설치하여 그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원 ‘일본군 위안부’ 춘자의 손자 종혁이는 도쿄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에서 나쓰메소세끼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나쓰메소세끼문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역시 그를 소설가로 만든 대중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떠올릴것이다. 이름 없는 수코양이 ‘이몸’(吾輩)의 눈으로 본 인간사회의 단면을 풍자와 해학의 수법으로 그린것으로 유명하다. 소설속에서 종혁이와 하루꼬도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은 소세끼가 37살 되던 해(1904년)에 그의 집에 기여들어온 검은 털의 길고양이이다. 고양이는 1908년9월13일에 죽었는데 그 때 소세끼는 모처럼 친한 지인들에게 고양이의 죽음에 대한 통지를 내였다고 한다. 종혁이가 이러한 소세끼문학을 연구한다는 설정은 실은 고양이의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 우선 화자와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은 하루꼬가 도쿄에서 잠시 시코쿠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있는 실가에 내려와 할아버지앞에서 다도를 표현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이문화속의 등장인물과 독자(일본인외의 독자)의 시선이 서로를 대상화하고 또 각기 자기자신을 대상화하게 한다. 차문화를 둘러싼 전통과 미학의 차이가 서로가 타자임을 확인하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문화는 달라도 인정은 매일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의 건강을 우려하고 있는 손녀의 마음과 그런 손녀를 애모쁘게 여기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독자는 인츰 자신과 등장인물을 동일시하게 된다. 독자는 자신의 시선을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시선에 일치시켜 그들의 눈을 통하여 사물을 보고 그들의 운명을 걱정하게 된다. 지어는 ‘할아버지’가 막무가내로 손녀의 련인이라고 자처하는 종혁이에게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하여도 좀 괴벽한 성미이지만 손녀를 끔찍히 아끼는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리해까지 하게 된다. 하여 종혁이가 외려 객체화된다. 다음, 소설은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시점에서 종혁이와 ‘할머니’의 시점에로 옮긴다. 이문화가 아니라 자문화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에 독자는 처음부터 자신을 겹쳐 본다. ‘할머니’뿐만아니라 이문화속에 이방인으로 등장하여 객체화되었던 종혁이도 하루꼬와 위치를 바꾸어 주체화되고 이번에는 하루꼬가 이방인으로 등장하여 객체화된다. 
여기에도 서로를 끔찍히 사랑하는 조손이 있다. 독자는 종혁이와 ‘할머니’의 시선으로 사건의 진전을 지켜보게 된다. 인지상정의 시점에서 볼 때 하루꼬는 ‘할아버지’를, 종혁이는 ‘할머니’를 배신할수 없는 립장에 세워져 있다. 이렇게 하루꼬와 ‘할아버지’, 종혁이와 ‘할머니’에 밀착해 있던 전지전능의 화자는 이번에는 수십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슴골 사람들에게 밀착하여 ‘지금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악몽의 참변을 그린다. 우선 쫓기고 있는 끝순이에게 초점을 맞추었다가 다시 타임슬립하여 그 얼마전에 있었던 일을 ‘우물댁’, ‘마을 사람들’, 룡정 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초점을 둔다. 그 와중에 태여나는 춘자의 출생을 계기로 화자의 초점은 어머니 끝순으로부터 춘자에게로 옮겨진다. 이하 화자는 기본상 춘자에 밀착하여 일련의 사건들을 현재진행형으로 그린다. 춘자와 다른 자매들의 립장에서 야수와 같은 일본군과 그들의 만행을 적대시하고 비하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다시 70년후의 현재 종혁이와 하루꼬의 몸에 밀착한다. 그들이 볼수있는 것은 길림성 기록보관소에 남은 일본 관동군의 문서나 련합군이 남긴 사진, 그리고 보호문물로 남은 위안소건물,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에 설치된 극렬한 모습의 조형물 등이 전부이다. 그들은 춘자와 피해자들이 본 침략자의 만행을 그대로 볼 수 없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경험할수 없다. 그들이 할수 있는것은 다만 물체화 된 ‘저 것’에 눈길을 주는 것을 통해 가해자의 극악무도한 만행과 피해자의 형언할수 없는 고통을 관념화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세상의 시점을 ‘저 것’에 모으는것뿐이다. 
이어서 화자는 다시 하루꼬와 ‘할아버지’에 초점을 맞춘다. 파이프에 새겨진 글자의 수수께끼가 풀리면서 ‘할아버지’가 다름아닌 70여년전의 가해자임이 밝혀진다. 하루꼬와 ‘할아버지’의 눈길이 서로를 객체화하고 타자화한다. ‘할아버지’는 끝내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하고 침략군의 군가를 부르며 가해자인채로 죽어간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향한 독자의 시선도 ‘할아버지’를 철저히 타자화할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종혁의 몸에 밀착한채 다시 이문화속으로 들어간다. 그저 ‘이문화’라 하기보다 이번에는 ‘가해자의 문화’라 하기가 적절할것이다. 종혁이는 그런 타문화속에 자기를 내주는 것으로 주체화를 실현한다. 종혁이는 일본근대문학의 전형적인 쟝르인 하이쿠로 력사를 직시할수 없어 사랑앞에서 도망하려는 하루꼬를 잡으려 한다. 일본문화속에서 주체를 획득한 종혁의 시선에 의해 일본의 지방문화인 마쓰야마의 전통문화가 객체화되여 간다.
 이와 같이 전지전능의 화자(작자)는 여러 등장인물에 밀착하면서 그 인물의 시선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의 시선까지 대상화하는 ‘제3의 눈’이 있다. 즉 고양이의 시점이다.
 하루꼬의 할아버지는 ‘흰 바탕에 검은색의 점이 어우러져 있고 짧고 몽툭한 꼬리와 삼각형의 머리, 빨쪽한 큰 귀를 가진 토종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련인인 종혁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하려하나 끝내 입을 열지 못하는 하루꼬는 고양이의 호동그란 눈을 들여다 보며 말을 돌린다. 이 순간 인간이 아닌 고양이의 눈에 의하여 하루꼬는 물론 등장인물들이 상대화된다. 뿐만아니라 고양이의 눈길을 마주하는 류사체험을 하게되는 독자도 상대화된다. 
이렇게 소설의 첫 시작에서부터 등장인물과 독자의 시점을 대상화하고 객체화하는 또 하나의 시점이 제시된다. 독자는 시시각각 이 초인간적인 ‘제3의 눈’을 의식하고 소설을 읽게 된다. 고양이가 두번째로 등장한것은 종혁이가 하루꼬를 데리고 찾아간 ‘할머니’의 집에서이다. ‘일신이 까만 고양이가 종혁이를 보고 울었다. 할머니 대신 고양이들이 손님을 반겨맞아주는듯 했다’. 독자는 여기에서 처음에 등장한 하루꼬 실가의 고양이들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한국에서 온 ‘위안부문제대책위원회’의 팀원들의 등장으로 하여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음이 밝혀지면서 가해자 일제라는 추상적인 력사개념이 막연하게 부상한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의 요즘 하는 짓거리가 어떠하며 그들이 저지른 위안부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은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다는걸’ 라고 하는 종혁의 어머니의 말에 의해 그 것은 결코 지나간 력사가 아니라 현재진행중의 사건이라는것이 확인된다. 70여년전에 중국과 조선을 비롯한 아세아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일제’와 패전후 속죄는 커녕 지은 죄를 인정조차 하지 않고있는 현재 ‘일본사람들’과의 링크가 하루꼬와 고양이에 향한 ‘할아버지’의 ‘애모쁜 눈길’을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재현시킨다. 
여기서 고양이의 ‘눈’은 서로 대립되는 시점의 존재 즉 패러독스를 제시한다. 다음, 고양이가 세번째로 등장한것은 일본군위안소이다. 철창속 같이 밀페된 공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뿐이다. 야수와 같은 놈들한테 처참하게 유린당한 춘자는 밥 먹을 기운조차 없다. 거기에 제3자인 고양이가 기여든다. ‘고양이는 살금살금 늦은 보법으로 들어와 춘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음식그릇에 덮쳤다. 혀를 날름이며 순식간에 춘자의 밥을 다 먹어 버렸다’. 이 곳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든, 또한 자기가 먹으려는 것이 비절참절한 처경에 처한 피해자의 밥이든 고양이는 상관하지 않는다. 여기서 고양이는 사건 당사자외의 제3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사건에 대한 판결과 가해자에 대한 징벌,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늘 제3자에 의뢰하여 해결된다. 그런데 그 제3자란 이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랭혹한 존재이다. 부조리한 일이지만 공정한, 조금도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주관으로서의 제3의 시점이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령혼을 달래주는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할머니’가 떠나간 빈 집에는 ‘할머니’가 생전에 기르던 고양이들만 남았다. ‘마쓰야마의 할아버지가 키우는 명품 고양이인 “재패니즈 밥테일”에 비하면 일견에도 어딘가 짝지는 수수한 물종의 고양이였다. 하지만 그 수수함에서 남다른 친화감이 엿보이는 시골농가의 고양이였다’. 명품이든지 물종이든지 하는 것은 고양이 자체의 본질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부여한 가치이다. 고양이들한테 붙여진 ‘일본군 위안부’들의 이름도 다름아닌 피해자들의 정의에 대한 희망이고 호소이다. 그리고 정의는 종국적으로 승리할것이라는 확신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은 다시 한번 마쓰야마의 고양이들을 조명한다. 중풍으로 쓰러진 ‘할아버지’의 발치에 누워 있는 고양이들을 보며 하루꼬는 ‘할머니’의 고양이들을 떠올린다. 서로 대립되는 두 시점이 부딛치는 크라이막스이다. 침략전쟁을 ‘동양평화를 위한’ 성전이라고 믿어마지 않는 ‘할아버지’의 가해자시점과 ‘젊은 려염집 녀자들을 종군위안부로 끌어가고 무고한 사람들을 참수하는 경기를 벌린것이 동양 평화를 위한것이였나요’하는 춘자를 대신한 하루꼬의 피해자의 시점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정면으로 부딛치고 모순이 극도에 달하고있는 장면이다. 고양이의 등장인물과 독자를 대상화하는 기능, 패러독스로서의 기능, 냉철한 제3자의 주관으로서의 기능, 정의의 희망으로서의 기능이 동시에 발휘되고 있는 그야말로 명장면이다.
그렇다면 이 제3의 시점은 대체 누구의 시점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작자의 시점이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에 밀착하여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화자로서의 작자의 시점과 그 화자를 객체화하는 ‘제3의 눈’으로서의 작자의 시점으로 구성되였다고 볼 수 있다. 시시각각 현재진행형으로 현실을 그려나가는 화자의 서술은 진행되는 순간 ‘제3의 눈’에 의해 대상화된다. 상술하다싶이 제3의 시점은 가해자의 시점도 피해자의 시점도, 그리고 남성의 시점도 녀성의 시점도 아닌 초인간적인 랭철한 제3자의 철저한 주관이다. 그 것이 과연 가능한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것이 작자의 지향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근대소설에 설치되여있는 견고한 장치를 해재하기 위해 준비된 열쇠이기도 하다.
 
나가면서
이상 젠더시점에서 소설 “춘자의 남경”을 읽어 보았다. 소설을 읽는 한가지 방법으로써의 젠더시점이라는것을 재강조해 두고 싶다. 페미니즘이론이 다양화됨에 따라 녀성성에 대한 정의가 다시 추구되고 있다. 말하자면 녀자는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 종교 그리고 력사와 정치를 뛰여넘어서 육체적인 공동성이라는 막연한 정의외에 과연 어디까지 녀성성의 카테고리를 귀납할수 있을까?
 
작자는 소설에서 젊은 녀성들을 꾀여 일본군위안소에 넘기는 정체불명한 녀인을 그리고 있다. 물론 동성에 대한 믿음과 안심이라는 함정을 설치하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페미니즘속의 레이시즘을 엿볼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일찍 구라파와 미국의 녀성들이 흑인 녀성이나 동남아 녀성을 지배하고 차별시 하는것으로 자률성의 획득을 실천해 보려고 한적이 있다. 구미의 페미니즘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일본에서도 같은 례를 찾아 볼 수있다. 특히 내쇼널리즘이 성행하고 국수주의에 빠져 있던 전시하에 침략전쟁이 ‘성전’이라고 세뇌된 일본 녀성들은 정부의 편에 서서 ‘대일본국방부인회’ 등 단체(소설에서는 ‘녀자애국봉사대’라는 녀성단체가 나온다)를 조직하여 일본군을 돕고 식민지에서 이민족을 지배하는것으로 정치활동에 참가하는 권리와 사회적지위의 인상등 리득을 얻기도 했다. 일본인 종군위안부인 시오노는 조선 녀성을 관리하는것으로 위안소의 책임장교 나카무라노부유키와 동등한 지배층의 위치에 있다. 이른바 ‘성전’을 위한 서로의 역할이 다르다고 하면 우습게도 일본인 종군위안부에게는 일본군인과 대등한 인간녀성으로서의 자율성이 부여된다. 일본군을 위안함에 있어서 시종일관하게 적극적이었던 시오노는 죽음을 앞두고 춘자에게 자기도 피해자임을 호소한다. 전쟁후의 일본인위안부도 일본군국주의의 희생품이였다고 하는 문맥에 일치한것이다.
현재 일본이 다시금 전쟁을 할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아베정권은 녀성의 사회진출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가 급촉해지고 있는 일본은 경제성장을 위한 인력이 부족하다. ‘녀성이 빛나는 일본’이라는 아베의 구호는 정권의지를 위한 전략에 불과하나 녀성은 자립과 권리를 택하려면 동시에 헌법개정에도 찬동을 표하여야 한다. 일본에는 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녀성들이 많다고 일본의 창가학회(創價學會)와 정치평론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전후에 태여나 왜곡된 력사를 배워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세대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헤아릴수 없고 전쟁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전에 있은 참의원선거에서 아베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이 압승한 원인의 하나로 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제의 만행과 위안부의 아픔을 재현시키고 하루꼬와 같은 녀성을 부각한 소설을 펴낸다는것은 그야말로 현실적인 의의가 있는 일이다.
위안부문제는 력사적 정치적 문제일 뿐만아니라 젠더와 관여된 문제이고 또 섹슈얼리티와 관여된 민감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위안부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일종 과감한 도전이 아닐수 없다. 이는 작자 자신에 대한 도전이며 문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김혁 소설가의 또 한편의 주옥의 장편의 성공을 축하하는 바이다.
 
"연변문학"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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