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지역 반일유적지 순람 9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김 혁
▲ 화가의 고향 룡정에 그의 이름으로 조성 된 락연공원. (사진 리련화 기자)
유서깊은 룡정시에 또 하나의 명소로는 락연공원을 꼽아야 할것이다.
락연공원은 룡정이 낳은 걸출한 조선족 정치활동가이며 인민예술가인 한락연의 이름을 본따서 명명한것이다.
총투자가 3백만원, 부지면적이 2천여평방메로 조성된 락연공원은 해란강과 륙도하의 합수목에 위치해있다.
원 국가통일전선부 부부장이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리덕수의 친필이 새겨진 표지석을 지나 공원에 들어서면 교목과 관목이 어우러진 가운데 한락연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3층 높이의 락연정이 우뚝 서있다. 락연정 주변에는 정교하게 만든 6개의 경관등이 세워져있는데 경관등에는 리백, 두보, 백거이등의 시편들이 새겨져있다.
락연공원은 시민들의 훌륭한 휴식터이자 연변의 또 하나의 홍색관광명소로 부상되고있다.
한락연은1898년, 중국 길림성 룡정촌 토성포의 한 중산계급의 가정에서 맏이로 태여났다. 원명은 광우(光宇)이며 자는 락연(乐然)이다.
한락연은 그림에 대해 천부를 갖고있었다. 매번 학기 시험때마다 그의 미술성적은 만점이였다.
한락연이 9살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문의 맏이로서 가문의 생계를 위해 한락연은 손에 잡히는 대로 잡일을 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한편 그림만은 손에 놓지않았다.
비록 겨우 소학교를 졸업한 한락연이였지만 총명과 순발력으로 어려서부터 조선말과 중국말은 물론 일어와 영어도 배워 상당한 회화실력을 갖고있었다. 그 회화능력에 힘입어 한락연은 세관 직원 시험에 무난히 통과되였다.
이 시기에 한락연은 룡정에서 최신애라는 녀성과 결혼했다. 그뒤 그들 사이에는 딸 인숙이가 태여났다.
1919년 3월, 룡정의 반일지사들은 조선의 3. 1운동을 성원하는 성대한 반일시위를 벌리기로 결정했다. 3월 13일, 각지의 군중들은 노도와같이 룡정으로 밀려들었다. 3만여명 시위자들과 함께 한락연은 조선독립과 일본제국주의 통치를 반대하는 구호를 소리 높이 웨치며 연변땅에 항일의 불길을 지폈다.
시위를 하려면 프랑카드도 있어야 하고 태극기도 있어야 했다. 이렇게 되여 프랑카드와 태극기를 만드는 임무는 이미 “그림쟁이”로 소문 짜한 한락연에게 맡겨졌다.
한락연의 조선족 부인인인 최신애의 조카 최순희씨는 “고모부 한락연의 룡정에서의 나날을 회억하여”라는 추모문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더듬었다.
“나의 고모부는 영국해관사무서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흰 천 몇 필을 사다가 영조계지세무사집에서 밤새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태극기를 여러 학교에 나누어주어 시위때 사용하게 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이 시작됐다. 한락연은 당연히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명되여 있었다. 한락연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그 해 12월 중국인 복장을 갈아입고 조용히 룡정을 떠났다.
1920년 22세의 한락연은 동방의 제1도회지 상해로 갔다.
한락연은 그의 천부적인 기질로 상해미술전과학교에 단연 입학하였다. 상해미술전과학교 중국근대 대표적인 화가이며 교육가인 류해속(刘海粟)이 설립한 학교였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되였다.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향도”를 통하여 혁명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며 점차 중국공산당에 접근했고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조선족가운데서 제일 먼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다.
1924년 1월, 상해미술전과학교(上海美術專科學校)에서 주경야독하며 생활고를 엎누르고 그는 뛰여난 성적으로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의 그의 행보는 봉천(奉天.지금의 심양)으로 이어졌다. 상해기독교청년회의 명의로 심양 봉천기독회청년회에 가 미술전람을 하러갔지만 사실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화가의 신분을 걸고 새로운 혁명활동에 펼치기 위한것이였다.
봉천 기독교청년회의 간사 염보항(閻寶航)의 도움으로 청년회관에서 “상해미술전문학교졸업생 한락연의 유화전람회”를 열었다.
개인유화전시를 마친뒤 소남관 풍우대(小南關風雨臺)부근에 사립미술전과학교를 창설하였다. 로소비(鲁少飞)、허소생, 륙의 등 이름 쟁쟁한 화가들을 모셔와 교원진을 무었고 본인은 교무사업을 맡았다.
1925년 겨울, 한락연은 당에서 파견한 임국정(任國禎), 오려석(吳麗石)과 함께 심양의 최초로 되는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한락연이 심양에 있는 기간 배양한 청년들과 여려 진보적 단체의 성원들 대부분이 첫기의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이렇듯 한락연은 심양의 건당사업에 정초를 다지는데 큰 기여를 바쳤다.
1925년, 7월 중공북방구위(中共北方区委)의 파견을 받고 할빈으로 왔다.
할빈에서 한락연은 보육학교에서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지하당사업에 종사하였다.
교수를 하는 한편 초도남, 조상지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야학을 조직하고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전수하였고 반군벌투쟁을 벌려나갔다.
1926년 4월 중공북방국의 지시에 따라 할빈특별지부를 “중국공산당북만지방위원회”로 다시 조직하였다. 오려실이 서기로 한락연도 지위령도성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할빈에서의 한락연의 행동은 주의를 불러일이켰고 그의 신변에 위험이 닥침을 예감한 당조직은 그에게 할빈을 떠나도록 지시를 주었다. 한락연은 치치할로 향했고 치치할 룡사공원의 감리(监理)로 취직하게 되였다.
"연변일보" 2015-8-18
한락연은 공원내의 정자며 루각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청나라건물들의 고전풍격을 띄고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공원내의 단일화를 깨고 독특한 개성을 띤 구라파식 정자 하나를 설계해냈다.
높이 10메터가량 되는 정자는 백옥같은 8개의 원주형 기둥이 떠받치고 있고 삼각형의 루각우에 시계 하나를 떠이고 있다. 8개의 원주형 기둥에는 흠상하고있는 사람들의 신심을 정화시켜주는 격언들이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이름을 “격언정”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도 “격언정”은 룡사공원의 하나의 경관으로 되여있다.
이시기 한락연은 룡사공원 감리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치치할 뿐아니라 수분하(绥芬河)에도 중국공산당 련락소를 건립했다.
할빈에서 마수를 피해 치치할로 왔던 한락연은 또 다시 신분이 로출되여 군벌당국의 체포대상이 되였다. 이러한 백색테러속에 암울한 북국의 도시를 주름잡으며 당조직사업에 충성하고 기여했던 한락연은 그해 가을 치치할을 떠났다. 이번에 그가 행한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시대에 따른 미술사조의 흐름을 느낄수 있는 창작과 예술의 무대였다. 전세계 천재예술가들의 집합소인 이곳에서 르누아르, 반 고흐, 피카소와 같은 거장들도 모여들어 예술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동안 “백색테러”속에 피와 불의 세례를 거치면서 화필 한번 잡을 틈조차 없었던 그는 세계 예술의 전당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고있었다.
이역만리 먼 땅에 도착한 한락연은 놀라운 의력으로 짧은 시간내에 프랑스어를 배워 냈다. 한편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지 않으면 안되였다.
귀국하기전인 1937년까지 그는 스케치북을 지니고 유럽각지를 순회했고 무려 10여회나 되는 개인전을 가졌다.
▲빠리의 거리에서 사생하고 있는 한락연
몸은 중국을 떠나 번화한 프랑스에 있었으나 한락연의 미술가의 시선을 초월한 “태풍의 눈”은 언제나 중국대륙을 면밀히 주시하고있었다.
그는 중국 동북출신 류학생들과 공동으로 일본의 동북에 대한 침략과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회유를 규탄하는 “중국동북4성프랑스류학생선언”을 발표했다.
1936년 여름 한락연은 빠리에서 유럽 거주 화교들의 대표자대회인 화교항일구망단체(华侨抗日救亡团体)에 가입하여 교무부(侨务部)의 사업을 맡고 항일을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단체 제2차 대회때에는 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한락연은 《빠리시보(巴黎时报)》에 사진기자로 취업했다. 빠리에서 언론인의 신분으로 한락연은 반파쑈 선전사업에 종사하였다.
몸은 유럽의 “예술의 전당”에 있었지만 항일의 불길이 중국땅에서 세차게 번져나가는 이때에 한적하게 외국에만 머물러있을수 없다는 결단아래 그는 드디여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다.
1937년 초겨울 귀국한 한락연은 그 행선지를 무한으로 잡고 동북항일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이 조직은 중공중앙장강국에 속했는데 주은래의 령도하에 있었다.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한락연은 동북항일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동북항일구망총회는 중국 관내 동북민들을 항일의 대렬에 동참시키기 위해 “반공(反攻)”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이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다. 이 시기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은 인민들은 일떠나 일본제국주의를 소멸하자!”라는 거폭의 유화가 한구(汉口)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란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걸렸다.
1938년 10월말 동북항일구국총회는 동필무의 지시로 새로운 당조를 세웠는데 한락연은 그 중 한사람이였다.
번중한 사업에 몸을 혹사하면서도 한락연은 화가의 본분을 잊지않고 9월에 중경에서 개인 그림전을 가지기도 했다.
이 해 11월 주은래, 곽말약이 령도하는 중국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에서 활동하던 작가와 예술가로 구성된 연안참관단이 연안을 방문했다. 참관단에는 한락연도 있었다. 그는 연안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전쟁속의 민족문화예술”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모택동동지가 친히 그들이 들어있는 땅굴막에 찾아와 국민당지구에서 활약하고있는 진보적인사들을 친절하게 접견하였다.
무한에서 한락연은 두번째 사랑을 만나게 된다. 바로 무한녀청년회 향촌부 주임간사를 맡고있던 류옥하(刘玉霞)였다. 그후 한락연과 류옥하는 딸 한건립과 장남 한건행 남매를 보았다. 이 시기부터 한락연은 공산당원의 신분을 감추고 애국지사, 미술가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당의 통일전선사업에 정력을 다하였다.
▲ 한락연과 그의 중국인 부인 류옥하
1940년 6월, 서안에 있는 팔로군 대표사무소를 들렀다가 다시 보계(宝鸡)를 거쳐 중경으로 가던중 한락연은 보계 기독교청년회숙소에서 국민당의 특수 정보요원들이 동원한 경비사령부 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특무들은 한락연을 공산당으로 의심하였지만 사실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었었다. 감옥에서 한락연은 혹독한 고문도 이겨내고 태연자약하게 응전하면서 당의 비밀을 고수하였다.
한락연이 체포된 소식을 접한 당조직에서는 백방으로 구조에 나섰다. 그들의 노력과 담보로 1943년초에 한락연은 겨우 가석방되였다.
석방된후, 한락연은 화가의 신분으로 서북지구를 전전하면서 국민당 군정상층인물을 상대로 통일전선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제3집단군총사령 조수산(赵寿山), 배위, 곽령야 등 많은 국민당장령들과 래왕하며 중국공산당의 내전을 반대하고 새 중국을 세우려는 주장을 선전했다. 한락연의 강렬한 애국주의 정신, 숭고한 품성과 풍부한 학식은 도치악과 일부 고급장령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감숙성 주천(酒泉)시에서 경비책임을 맡은 하서(河西) 경비구 총사령 도치악장군이 국민당과 결렬하고 기의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도치악은 일제의 패망후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9년 9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중국공산당 쪽으로 귀순하였다. 이 배경에는 한락연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렇게 한락연은 서안, 란주, 신강 일대에서 국민당특무들과 우회하면서 국민당고급장령들을 교육하고 쟁취하는 사업을 대담하고 폭넓게 벌리였다.
글 김혁, 사진 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201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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