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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3
2017년 11월 22일 09시 39분  조회:1677  추천:13  작성자: 김혁


 

. 련작칼럼 .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김혁


공책 셋
“별”을 쏘다
 
모 잡지에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라는 인물칼럼을 련작한적 있다. 
2년반 되게 련재한 칼럼은 조선족 수십명 인걸들의 생애를 사전형식으로 가나다라 순으로 짧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는 소전기물이다. 
민족을 위해 커다란 족적을 남긴 기라성같은 별들을 헤아리는 작업에 기꺼이 투신하면서 아낌없이 산화해간 별들을 두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한면 그가운데 이름은 화려해도 아무런 빛도 내지 않은 암흑성(暗黑星)도 끼여있어 선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룡정의 명인들을 정리하면서 그러한 어려움은 곱배로 밀려왔다. 
룡정에서 윤동주의 시대에 함께 족적을 남긴 저 유명한 동요 “반달”의 작곡자 윤극영, 녀류시인 모윤숙 모두가 친일의 혐의에서 여유롭지 못했기때문이였다. 
 
윤극영은 1926년경  피아니스트 오인경과의 애정행각으로 서울에서 룡정으로 도피를 했다. 
윤동주와 문익환이 다녔던 광명중학교등 학교들에서 음악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했다. 이후1940년에는 할빈에서 예술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룡정에서 간도성협화회(間島省協和會)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윤극영이 가담한 이른바 협화회는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협화회에는 조선인과 한족, 만주족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가담했는데, 이들의 역할은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서 만중을 선동하고 감시하는데 있었다.
고 박창욱 연변대학 교수는 일찍 "협화회(協和會)는 소위 민중조직이라고 하나, 사실은 비밀공작을 위한 특무조직이다. 협화회는 일반적인 만중조직인 동시에 내부에는 특무가 있는 것이다. 협화회의 선무반, 특별공작반 등은 완전히 일본군 토벌대와 같이 독립운동 세력을 토벌하는것이다."고 밝힌바 있다. 
 
일본이 투항하자 1946년에 체포되여 3년형 선고를 받고 연길 감옥에서 복역중 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1950년대초 북경에서 조선족 음악인 김정평과 김철남이 윤극영의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했다. 노래는 근 30년간 애창되였으며 1979년 전국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였다.
 
윤극영이 협화회 책임자로서 적극적 친일을 한 경위는 90년대 조선족 소설가 고 류연산씨의 추적을 통해 속속 드러났다.
 
모윤숙은 1931년 리화녀전 영문과를 졸업했고 그해 친지의 주선으로 룡정에 있는 명신(明信)녀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바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과 나란히 이웃한 학교였다.
 
명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새긴 당신의 얼골을”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뒤 교사, 기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중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 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친일 강연을 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등에 친일 론설을 기고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론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녀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소년 학도병에게”,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등을 련달아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이 시기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로천명과 함께 문인중 가장 로골적인 친일파로 전락했다.
 
몇해 전 한국에서 펴낸 “친일파인물사전”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파의 정의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규정했다.
편찬자들은 친일파선정 원칙에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고 밝혔다. 
높은 위치의 정계인사들뿐아니라 문화예술계의 이름이 쟁쟁한 인사들도 대량 포함되여 세간을 경악케 했다. 
 
지난세기 30,40년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고 민족문학사가 실종된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였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물자를 수탈하고, 징용령을 만들어 조선인을 군인, 보국대, 로무자, 위안부로 징발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게 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조상이 준 이름을 일본식대로 뜯어고치게 했다. 
그 마수는 문화예술계에도 미쳤다. 조선말로 된 유명 일간지며 문학지들을 폐간시켰고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 어용 문학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민족의 수난기에 안일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무릎 꿇은 문인들의 친일행위였다. 그동안 민족주의 작가로 주목받던 문단의 대표적 인사들이 대거 친일문학의 대렬에 끼여든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오명을 진 문학인들로는 신체시 “바다에게서 소년에게”로 민족시의 전환점을 지었던 시인 최남선, “화사집”, “귀촉도”등  탐미적인 시편들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것으로 평가되였던 시인 서정주,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감자”, “운현궁의 봄”의 저자 소설가 김동인… 등등이다. 
 
그 전형으로 개화계몽기부터 1920년대까지 언제나 민족주의적인 립장에서 앞장 섰던 “무정”, “흙”의 작가 리광수를 들수있다. 리광수는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그 뛰여난 문필가의 기량을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글을 써내는데 허비했다.
남보다 앞서 꼭두 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인으로서의 본질과 껍데기까지 모조리 던져버리고 일본인으로 변종할”것을 공공연히 웨쳤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들을 선하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천황폐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자고 선동했다.
근시안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행태는 우리의 민족문학사에 치명적인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문단을 대표하고 민족의 지성을 상징한다는 이들이 하나 같이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칭송하고 “황군(皇军)”을 위해 비루한 붓을 들고있을때, 숭앙했던 문인들과 자기 학교의 교장마저 친일에 앞장설때 중국 동북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작은 촌부락에서 태여난 한 문학청년이 괴로움에 찬 시편“참회록” (忏悔录)을 내놓았다.
윤동주, 식민지시기 스물네살의 문학청년이 령혼의 잉크를 재워 각혈처럼 지었던 그 시작(诗作)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전률하게 만든다.
 
“참회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류학을 준비할 무렵에 쓴 시이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고백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각인해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원고의 하단 여백에는 도일(渡日), 시란? 문학, 생존, 생과 같은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절절한 락서들이 남아있다. 
 
“…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굴욕, 치욕, 릉멸, 방황,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그때 그 시가 담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반성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 
 
 

윤동주 "참회록" 육필고
 
그리고  2년 후 일본 도지샤대에 수학하던 윤동주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여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윤동주는 식민지체재에 동화될수도 저항할수도 없던 여리고 섬세한20대의 문학 청년이었다. 당시 그에게서 생의 출구는 막혀있고 현실은 랭혹하고 폭력적이며 미래는 어둡고 삶의 리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분렬을 거듭했다. 윤동주는 “나약”했고 “감성적”이였지만 감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주변부 식민지의 생활과 속악한 삶의 행태에 수치심을 느꼈다. 의지할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의 마음은 종국에는 때묻지않은 령혼의 시줄에 깃들었다.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고있는 정신적 바탕은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방관자적 립장에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뇌라 할수 있다. 그의 시의 중심적인 심상을 이루고있는 “부끄러움”은 이 같은 자기 반성과 고뇌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물론 당시는 극한의 식민지 현실에서 그 누구도 정상적인 문학을 할수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에 가장 먼저 민족문학의 전통과 자존을 지켜야할 문인들이 저항은 커녕 오히려 굴종과 어용과 변절로 민족문학사를 훼손한 친일행위에 민족사의 심각한 비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력사의 갈피에 지울수없는 오점으로 남은 이러한 문인들의 행태처럼 오늘 날에도 여전히 보잘 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에 매달려 권력과 리념과 공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문인들을 찾아볼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를 다시금 떠올려 보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윤동주, 그의 시를 읽을때마다 우리는 먹먹한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민족과 언어를 빼앗겼던 정말 암울하고 힘들었던 식민지 시대에 자아와 민족이 부재한 력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윤동주는 참회와 헌신의 신앙적 결의로 마침내 도래 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확신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시인의 고향의 하늘에 별은 오늘도 또렷하다. 그 밤 하늘을 쳐다보노라니 윤동주의 “달을 쏘다”라는 산문의 한 구절이 또록이 떠오른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곳곳한 나무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매어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오늘날 우리는 “보람처럼 풀이 무성한” 고향의 언덕배기에 잠든 시인을 더더욱 기리고 있으며 시인이 읊었던 별의 밝음과 어둠을 낱낱이 헤아리고 있다.
찬란한 별무리 속에 은닉(隱匿)해 있는 별 조차 낱낱이 헤여보다 “좀 탄탄한” 오안(五眼)의 빛을 “화살로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별”을 쏜다. 
 
“도라지” 2017년 제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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