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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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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김학철을 다시 읽다 댓글:  조회:4958  추천:20  2015-03-02
. 칼럼 .   김학철을 다시 읽다   김 혁 1 우리앞에 한 거인이 우람하게 뻗쳐 서 있다. 량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척각의 로인, 하지만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그이가 바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맨 들머리에 우뚝 각인된 김학철 옹의 모습이다. 어제 저녁(3월1일) 우리는 또 오랜만에 그이의 거룩한 형상과 마주할수 있었다. SBS방송에서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 방영된 것이다. 스페셜은 선생이 생전에 끔찍이도 아꼈던 손녀 김서정양이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의 하북성, 한국의 밀양, 일본의 나가사키를 순례하는 과정을 통해  할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까지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였는지? 그 답을 찾는 려정을 선생의 많은 영상기록물과 더불어 보여주었다. 평생 펜으로 불의와 싸웠던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의  파란많은 삶을 다시 돌이켜 본다. 2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처음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반일지하테로활동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뒤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하였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여기서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면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였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미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전신,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되였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그해에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 1939년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김학철은 24살의 젊은 나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했다.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되였다. 약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되였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끼형무소에서 원폭피해는 요행 면할수 있었으나 감옥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리유로 총상당한 왼쪽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여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았다.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여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을 언도받았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되였다. 광복,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한 다리를 잃고 석방되여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1946년 조선으로 건너가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였으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였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했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자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어 10년 유기징역 으로 판결, 추리구(秋梨沟)감옥에서 복역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였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여 1983년에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리유로 연변주법원에서는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받는 공판정에서는 김학철은 “나는 일찍이 이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군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은 사람이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강산이 두세번씩 바뀌여서야 겨우 벗어날수 있습니다.”고 감개에 넘쳐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1983년 김학철은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국적을 가졌으며 정식으로 공직에서 리직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였으며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였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만강의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였다. 1986년 3월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였으며 1987년 6월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였다.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였다. 수백편의 수필과 잡문을 여러 신문, 잡지에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그었다.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이 책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리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 내다보았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에 건립된 김학철 동상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타계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는데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김학철은 반일투사이며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민족작가로서 일평생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눈물겹도록 맛보면서 지낸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일제침략자의 감옥에서의 인고의 시간, 서울, 평양, 북경, 연변에서의 지역을 넘나든 폭넓은 문필생활…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이 정평하다싶이 “세상에 실로 렬화속에서 아홉번 나보고 빙설속에서 아홉번 얼어보고 피못속에서 아홉번 목욕해본” 작가가 있다면 그가 곧 김학철일 것이다.    김학철옹의 서재에서의 필자​   3   잘 아는듯, 하지만 잘 아지 못한 김학철의 삶을 다시금 읽으며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인물이 있다는데서 큰 자호감을 머금었다. 전통의 련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것들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 우리 조선족 공동체는 격변의 물굽이에서 미중유의 파고(波高)를 경험하고있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수 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수 있는 계시로도 될수 있을것이다. 우리에게 김학철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류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청우재(聽雨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 com/khk6699 ☜ 나의 김학철 예고  
42    흑백 오스카 댓글:  조회:3201  추천:11  2015-02-26
. 칼럼 .   흑백 아카데미 김 혁 ​ ​1, ​87회 오수카 (아카데미) 시상식이 막을 내렸다. 영화인들의 최고의 축제이건만 어딘가 싱겁다. 그리고 시끄럽다.​ 이번 오스카 시상식은 력대 가장 뻔한 시상식이였다는 조롱을 면치 못했다.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 주연상과 조연상 등 주요 부문의 수상작과 수상자는 미국 빅데이터 분석 업체와 베팅 사이트 등이 내놓은 전망과도 어쩌면 100% 일치했다.​ 또한 올해 오스카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로 하얬던 해”인 1998년 이후 17년 만에 다시 백인 일색의 후보를 지명해 논란을 불러왔다. 이미시상식이 열리기 전부터 흑인 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일대기와 그의 유명한 연설이 있었던 1963년의 평화대행진을 재현한 전기 영화 '셀마'가 감독상과 연기 부문상 후보에서 제외되자 흑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셀마’는 지난 해 퍼거슨 사태를 필두로 미국 곳곳에서 있었던 인종차별주의와 관련한 끊임없는 이슈들을 동반해  화제를 모았던 영화였다. 결과 '셀마'는 이번 오스카상에서 겨우 주제가상 하나를 달랑 건졌을뿐이다.​ 이번 오스카 시상식을 진행한 닐 패트릭 해리스는 "오늘 'best and whitest' 작품들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는 '최고이자 가장 하얀' 작품들이란 뜻이다. 자신들을 향한 논란을 유머스럽게 받아들이고 이번 논란에 대해 오스카에 일침을 가한 발언이였다. 배우 숀펜은 '버드맨'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를 향해 "저 사람에게 왜 그린카드를 줬냐"고 농담을 던졌다. 그린카드는 이민자들에게 발급되는 영주권이다. 그리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는 멕시코 인이였다. 이 발언 역시 논란이 되었다. 그의 발언이 다소 경솔했다는 반응이다. 시상식에서 보통 수상소감이 길어지면 수상 소감을 끝내라는 의미로 음악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날 ‘셀마’로 주제가상을 받은 로니 린이 수상 소감을 전할 때는 음악이 등장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주요 부문 후보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은것에 대한 불만을 어느 정도 잠재우려는 시도로 보인다.​ 영화가 주역이 되는 세계 최고 영화축제이건만 오스카시상식은 올해에도 ‘백인 중심의 잔치’라는 오명을 털어내지 못한채 우리에게 '인종주의'의 논란을 다시 한번 화두로 던져줬다. ​ 2,​ 87회 오스카 시상식은 미국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해 8월 10일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18세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관의 총을 맞아 숨졌다. 머리와 팔 등에 최소 여섯발을 맞았으며 숨진 뒤에도 4시간 동안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되였다. 브라운이 비무장 상태에서 무고하게 사살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 11월25일, 브라운을 총으로 쏴 사망케 한 백인 경찰 대런 윌슨에 대해 대배심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뉴욕 거리에서 담배를 팔던 흑인 에릭 가너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백인 경관에 대해서도 뉴욕시 대배심이 12월 3일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9월에는 백인인 남편에게 키스를 하던 다니엘르 왓츠라는 흑인녀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매춘녀로 오인 받은 그녀는 즉각 “이 사람이 나의 남편이다”라고 항변했으나 매춘부가 아니고 남편이 그녀의 고객이 아니라는것을 경찰이 인정할때까지 수갑을 찬 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체포당하며 그녀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에게 키스하는 흑인 녀성은 매춘부라고 봐야 하느냐"며 사건은 또 한 번 인종 차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아이러니 적인 것은 그녀가 바로 인종차별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흑인 노예로 출연했던 녀배우였다. ​영화의 감독 타란티노는 "미국은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미국의 원죄 중 하나다. 아직도 그 죄를 씻지 못했고 여전히 흑인과 백인이 서로를 대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고 갈파했다. ​3, 퍼거슨 사태 이후, 흑인을 상대로 한 각종 증오 범죄, 스나이퍼들이 사격 연습 때 흑인 범죄자 얼굴을 표적으로 사용한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흑인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도 미국은 스크린과 현실에서 “부당한 흑백스토리”를 그냥 연출하고 있다.​ 뜬금없는 련상일지 모르지만 오스카 시상식을 보면서 해외에서 차별 받으며 3D업종에 혹사하는 수십만에 달하는 우리 족속들의 이야기들이 그물그물 떠올랐다. 이는 비단 먼 서구나 영화에서만 자행되는 일이 아니다. 피부색이나 나라를 두고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은 우리가 고국이이라는 감동과 민족적 동질감에 대한 기대를 품고 찾아갔던 그 곳에서도 낯익은 소재다. 숀펜이 ‘조크’를 던진 감독상 수상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의 수상 소감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의 이민자들이, 예전 이민자의 나라를 만든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고 존중받길 기도한다".​ -“청우재(聽雨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1    “윤동주 데이” 댓글:  조회:4749  추천:14  2015-02-14
. 칼럼 .    “윤동주 데이”  ■ 김 혁 올해는 정월 대보름과 밸런타인데이가 같은 날로 겹쳤다. 민족의 전통명절과 젊은 이들의 모던한 기념일이 어우러 진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또 다른 각별한 날이기도 했다. 100여년전 할빈역에서 민족 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일본이 사형선고를 내린 날인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산화해 간 안중근 영웅. 하지만 젊은이들은 련인에게 줄 꽃다발이나 쵸콜렛 챙기고 저녁에 함께 할 레스토랑의 음식주문에 바빠 민족의 영령에 대한 관심조차 없다. 그러다 한국에서 한 대학교수의 제안에 의해 2월14일을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는 날 “안중근 데이(day)”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민족영웅을 추모하면서 밸런타인데이를 즐기고, 전통명절의 풍속을 이어가니 “일석삼조”의 시너지 효과를 볼수 있다는 참신한 아이디어 였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애국”, “애족”, “기억”, “존경”, “사랑”등 다양한 의미를 담은 쵸콜렛과 꽃다발을 련인에게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는 왕년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날로 안겨 왔다.   해외의 동향을 보면서 따라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우리도 이참에 “윤동주 데이”를 만들어 보면 어떨가하는 바램이였다. 구관조(九官鳥)처럼 곧 남을 따라하기의 흉내짓이 아니다.   윤동주의 고향에서 태여난 필자로서는 그동안 윤동주의 생애를 장편소설화하는 등 그이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 작품들을 집필하고 또 각 언론사들에 윤동주 추모 관련 행사보도를 빠치지않고 줄곧 대서특필해 왔었다. 그와중에 윤동주에 대한 기념과 추모가 아직도 미온(微溫)적인데 대해 안타까움과 유감을 머금던차 이번 발렌타이데이날의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뒤미처 떠오른 생각이였다.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한 숭모사업은 고향에서 내내 이어졌음에도 그이의 아시아를 넘나드는 위상에 비해 아직 그 열기가 크지 못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그나마 큰 영향력을 과시했던 권위간행물의 “윤동주문학상”은 10년간 유지되다 마무리 되고 지금은 몇몇 민간단체의 가상스러운 노력에 의해 우리는 윤동주를 때때로 기억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 론문집, 윤동주의 동시비 역시 그들 민간단체에서 펴내고 건립했다. 정부의 지원으로 근년들어 윤동주 생가가 크게 보수 되는 등 반가운 거동이 일고 있지만 해외의 윤동주 언덕,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 시비 조성, 윤동주 축제, 윤동주 관련 책자의 출간, 윤동주 뮤지컬과 연극의 개봉등 내내 이어지는 방흥미애 (方兴未艾)의 열기에 비하면 고향인 연변은 아직도 그 숭모사업이 활약상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세월에는 그무슨 기념일들이 그야말로 소털처럼 많다. 재래로 절기가 부여한 기념일, 자신과 부모와 친지, 친구들과 관련된 대소사의 기념일외에도 왕년에는 듣도보지도 못했던 만천하의 기념일들까지도 모조리 챙기고 지어 없는 기념일까지 만들어가면서 누린다. 기억해야 할 날이 많은것을 나쁘다고 할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가 물질화에 빠져들면서 향락에만 젖어드는 기념일들이 란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의미로 소중히 보듬는 기념일 대신 우리가 정작 지내고 있는것은 향락주의에 젖어 질펀한 매일매일 이어지는 기념일들이다.   때문에 윤동주와 같은 고향을 빛낸 선각자들을 기리는 날이 따로 없음은 부끄러움이요, 응당 이제라도 그 기념일을 챙겨야 한다는것이다. 고향의 터전을 닦고 그를 빛내여 오늘에 이르게 한 이들을 잊지않고 기리는것은 우리들 모두의 책무라고 본다. 이는 우리 삶의 터전인 사회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가치이자 근본원칙이다. 그 가치를 소중히 할줄 모르고 지어 무감각한 민족은 그로서의 명분과 리유를 찾기 힘들다. 이러한 기념일을 통해 민족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하고 산화해 간 그들의 력사적 업적을 제대로 알아야 할것이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야 할것이다. 그이들의 고귀한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마음을 모아 그 뜻을 잊지 않고 계승발전시켜 우리의 공동체 사회가 목전의 진통을 엎누르고 더 크게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것이다.   날을 받아(탄생일, 서거일 혹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이의 생가나 묘소를 찾거나 그이의 주옥같은 시 한줄을 읊조리는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가 자호할만한 민족시인의 존재를 알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기회가 될것이다. 2월16일 오늘이 바로 윤동주가 일제 감옥에서 생체실험의 의혹을 남긴 채 비명에 간 날이다. 97년전, 북간도 명동촌의 춥디 추운 겨울의 마지막 날(12월 30일)에 태여나 북간도의 첫 근대교육기관인 명동학교, 룡정의 미션계 학교들인 광명과 은진중학을 나와 경성의 연희전문에 진학했고 그후 일본류학길에 올랐다가 일제의 마수에 유린당한 시인은 한줌의 재로 고향에 돌아와 그가 즐겨 거닐었던 동산마루에 묻혔다. 스물아홉에 갔지만 그를 낳은 고향, 그가 학문을 닦았던 경성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에서 조차 숭모해 마지않고있는 민족의 “시성” 윤동주이다. 천형(天刑)처럼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온 문학적 열망과 민족애로 북간도 오지의 한 문학지망생이 민족 최고의 시인으로 떠올랐으며 그렇게 엮여진 그의 작품은 알알이 진주처럼 값지고 빛나오르고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읊조렸던 룡정의 하늘은 오늘도 맑고 시인이 묻힌 동산 마루 무덤에는 오늘도 "보람처럼 봄풀이 무성"하다. 닥쳐오는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면서 순수한 마음과 투명한 감수성으로 한 시대를 갈파하고 량심을 노래한 윤동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윤동주, 그런 학우(學友)같은, 형님같은, 애인같은 윤동주를 우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랴 우리도 “윤동주 데이”를 만들자! 2014년 2월 16일   "문화시대" 2014년 3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0    731 닷컴 댓글:  조회:3698  추천:11  2015-02-09
  . 칼럼 .   731 닷컴 김 혁 1 731이라는 숫자가 악마의 기호처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섬찟하게 각인 된 건 지난 1980년대의 일이다. 흑룡강성 조선민족출판사에서 “악마의 락원”이라는 책자를 출간,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신작은 조선족 독자들중에서 그야말로 토네이도 급 반응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족 독자층에서는 추리물이 상당히 유행되었는데 모든 조선족 간행물에서는 다투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추리소설을 싣곤했다. 그의 대표작 “인간의 증명”을 각색한 영화도 전국각지 영화관에서 상영되었고 영화의 삽곡 “초모자의 노래”가 네 거리의 스피카를 타고 울려퍼졌다. 어찌보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이 잡지발행의 보증수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독자들 중에서는 “모리무라 붐”이 일었었다. 또 한 편의 정채로운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악마의 락원”을 펼쳤지만 이번의 작품은 추리물이 아니라 다큐물이었다. 처음에는 좀 실망한듯 했지만 독자들은 인차 책에 빠져들었다. 커다란 공포와 경악 속에 그 책을 접했다.  작품은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난 일본군731 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이라는 경악한 실상을 다루고있었다.  작품은 일본에서1982년에 련재되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가 중문으로 번역, 1985년경에 조선족독자들에게도 알려 졌으니 당시 락후한 우리 말 출판풍토에서 보면 그야말로 신속히 나온 책이었다. 일본판본의 원제는 “악마의 포식”, 중문으로 번역하면서 “악마의 락원”으로 개칭되여 나왔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 731 부대나 일본군의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일제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아세아 여러나라에서 일반에 까지 알려지지 않은 극비(極秘)의 실상이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731 부대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이 세상에 공개되었고 세상은 경악으로 입을 ‘하누라지’가 다 보이게 딱 벌리고 말았다.  ▲ 할빈의 731부대 유적지    2 악명 높은 ‘731부대’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한 인터넷 박물관(www.731yz.com)이 중국에서 개설되었다. 흑룡강성 정부가 하얼빈시에 있는 ‘일본군 731부대 죄증(罪證) 진렬관’에 의뢰해 개설 한 사이트는 할빈에 남아 있는 731부대 사령부 등 유적 현황과 이 부대가 자행한 만행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1천700여 점의 문서자료와 1000여장의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중국은 2015년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앞두고 일제가 포로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 유적을 최고 등급인 ‘AAAAA급’까지 5단계로 격상시킨 뒤에 이어 731부대의 생체실험 만행을 입증하는 증거물을 새해 녀초부터 추가로 육속 공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헤이룽장성 할빈 지역에 주둔하며 생체 해부실험과 냉동실험등을 자행했다. 중국 학계는 현재까지 발견된 일본 측 과거 기록물 등을 토대로 731부대의 생체 실험 희생자가 최소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 20개 이상 성(省), 시(市)에서 161차례에 걸쳐 세균무기 공격을 감행해 237만명을 감염시킨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생체실험 희생자들 중에는 조선인도 적지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길림성 기록보관소는 일제 관동군이 패주하면서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땅 속에 묻은 이들 문서를 분석한 결과 최소한 372명의 중국인, 조선인, 로씨야인 등이 731부대로 “특별이송” 돼 생체실험 등 세균 무기 개발의 도구로 씌였다고 발표했다.  관동군헌병대가 1938년 1월 제정한 “특별이송에 관한 통첩”은 이송 대상자인 범죄자를 크게 간첩(파괴분자)과 사상범(민족해방운동가 및 공산주의운동가)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어 일제가 독립투사 등을 생체 실험도구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이 중 조선인 4명을 포함한 318명에 관해서는 이름과 별명 공작명 원적 출생지 나이 직업 주소 활동범위 수집정보 학력 체포장소 및 시간, 731부대 이송시기 등이 상세히 밝혀졌다. 조선인 6명중 신원이 나타난 4명은- 이기수(李基洙)ㆍ28ㆍ함북 신흥군 동흥면ㆍ1941년 7월20일 체포)  한성진(韓成鎭. 30ㆍ함북 경성군ㆍ1943년 6월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 함북 길주군ㆍ1943년 7월31일 체포)  고창율(高昌律ㆍ42 강원 회양군 난곡면ㆍ1941년 7월25일 체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에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됐다. 이 문건은 731문제 중국전문가들과 김성민(조선족) 731연구소장이 20여년에 걸쳐 중앙과 흑룡강성, 길림성 등의 문서 보관소에서 찾아 냈다. 이 문서는 일본 관동군 헌병사령부 사령관이 서명해 발송한 것으로 표지에는 “특별이송”과 “절밀(絶密)”이라고 적혀 있다.  ▲ 731부대의 죄악상을 실사적으로 그려 센세이숀을 일으켰던 영화 "검은 태양 731"   지난해 731 이라는 숫자가 적힌 자위대 훈련기에 올라타 중국, 한국등 동북 아시안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던 아베의 나락을 향한 국우행보는 계속 되고 있다.  신세대 정치 주역이라는 아베는 앞장서서 자신들의 침략 력사를 부인하고 각가지 기행과 망언으로 아시아의 상처를 들쑤신다.  731이라는 숫자가 적혀진 훈련기를 타고 웃고있는 아베는 그 수자에 얼마나 많은 아시아인들의 피와 눈물이 배어있는지 모를가? 중국 외교부에서 일침을 가하고 있다싶이 “진상을 감추려고 하다가 도리여 드러 난다, 닦으면 닦을수록 검어질 뿐이다'(欲盖彌彰 越抹越黑)” 아베는 정계에 금방 나온 황구지작(黃口之雀. 입술이 노란 새끼 참새, 풋내기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그는 731부대가 중국 및 아시아 여러개 국에 대해 저지른 악행에 대해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진상을 덮어 감추려 하면서 인류양심과 국제적 도리와 위배된 잘못된 력사관을 완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아베의 행각은 그야말로 인류의 리성과 량심에 대한 새로운 “생체실험”이다.  생체실험 희생자들의 원혼(寃魂)이 아직도 거치른 만주의 옛 벌판에서 떠돌고 있는데… - “청우재(听雨斋)”에서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 com/khk6699 ☜      
39    스크린에 오르는 정률성 댓글:  조회:3884  추천:11  2015-02-02
칼럼   스크린에 오르는 정률성   김혁       1   북경 “해안화청”텔레비드라마유한회사와 한국 동성제작사(사)가 지난 1월 16일 북경에서 제작인과 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영화 “청년 정률성” 제작사인회를 가졌다. 영화는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과 혁명의 도가니에 빠져든 정률성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다룬다. 영화에 한국과 중국의 젊은 배우들을 대거 기용, 이미 정률성 역과 부인 정설송 역을 분할 주요 배우들이 선정되였다. 영화는 3월 한국의 광주와 중국의 연안등지에서 곧 크랭크인 하게 된다. 영화의 제작측인 “해안화청” 회사는 지난해 1월 “파이판(派饭)”이라는 음식과 생활 소재의 코미디 영화로 한국에 진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얻은바 있다.   약관의 정률성   2   정률성은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해를 거쳐 중국 남경에 이르렀다. 남경에서 “의렬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열아홉 살의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연안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로신예술학원을 나왔고 “연수요”, “항전돌격운동가”등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그의 노래는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널리 유전되였다. 그후 그의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다. 1990년 9월 북경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바로 정률성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연안 시절 후날 중국 최초의 녀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다. 연안시기 정률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하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률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가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과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이로서 정률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다. 1952년 정률성은 중국에 돌아와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운남, 대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률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1978년 북경음악출판사에서 “정률성가곡선”이 출판되었고 2009년에는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였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있다. ​   3   지난해7월 초 방한한 습근평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률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률성의 위상은 높다. 정률성의 일대기는 일찍 영화로 제작되여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1992년 조선의 “2.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음악가 정률성”을 전, 후편 긴 편폭으로 제작했다. 영화는 1950년대 북한으로 간 정률성이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첫 단장으로 되여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여 그려냈다. 2002년 중국에서도 정률성 관련 영화 “태양을 향하여”를 출품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였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중국인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률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연안에서 뿐만 아니라 북경, 천진, 장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 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였다.   한국등지에서는 아직도 겨레의 걸출한 음악가 정률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률성의 활동한 주무대가 중국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률성선생이 한국에서 태여나 중국에서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민족의 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롭게 제작되는 또 한 부의 정률성 관련 영화가 중국 나아가 남북이 모두 애대하는 음악가에 대한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영화로 스크린을 수놓기를 바라며, 그이의 생애 그리고 그이의 음악이 하루 빨리 한국 나아가 만방에 알려 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2015년 1월 28일 “청우재”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38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댓글:  조회:4029  추천:13  2015-01-22
body { background-image:url("http://cfile270.uf.daum.net/image/255D3644520B4BB713E680" ); background-attachment: fixed; background-repeat: no-repeat; background-position: bottom right; } table { background-color: transparent; } td { background-color: transparent; } 칼럼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김혁   1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함락될 때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충절을 찬양한 변영로의 시의 한 구절이다. 임진년 왜란을 일으킨 왜적은 진주성을 여러 번 쳤으나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분기탱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진주성을 무너뜨려 사람과 짐승 씨 하나 남기지 말라 명했다. 야수떼 같은 왜군과 맞서 여러 차례 혈전에서 지켜낸 진주성은 1593년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왜적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렸다. 축하연에서 왜적들은 물가의 돋은 바위에 선 한 여인의 아리따움에 홀려 버렸다. 그가 바로 임진왜란이 일자 의병장인 남편을 따라 화살이 비발치는 전장을 찾아온 논개였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주연에 참석했다.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마음”의 ‘논개’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낀 채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한 섬약한 여인의 거사는 왜군의 기세를 꺾었고 이후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2   흑룡강성 목단강으로 가면 강녘에 “빈강”이라는 이름의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이제는 목단의 상징물처럼 된 기념비가 있다. 여덟 여인들의 군상, 일견에도 예사롭지 않은 석조물이다.  손에는 총대를 꽉 부여 잡고 뒤쫓는 적을 응시하는 모습, 여전사들의 표정은 결연하고 눈빛은 강렬하다. 그 비장하고 결연한 모습들이 살아숨쉬는 듯해 보는이들을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중 두 명의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전사가 유난히 눈에 띄인다. 이 군상 속 여전사들로는 동북항일연군 부녀퇀의 지도원 랭운을 비롯한 여덟 명인데 그중 안순복과 이봉선은 조선족이다.  “안언니”라고 친절하게 불리운  안순복은 여전사들중의 골간인물이었다. 아버지와 오빠를 왜놈에게 잃고 항일에 뛰어든 그는 항일련군의 지도인물인 박덕산과 결혼하여 딸 아이 하나를 보았다. 그후 남편은 태어 난 아이도 보지못한 채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그리고 엄동설한에 적의 소탕을 피하여 부대가 이동하던중 안순복과  여전사들은 아이들을 당지 사람들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그후 그 아이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봉선에 대한 자료는 아주 적다. 그저 조선인이며 20세 남짓하고 림구현 사람이라는 것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만주사변"이후 일본관동군은 만주지역에서 피비린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1938년 10월, 원정하여 목단강 하류에 도착하였던 항일부대는 무단장 강 기슭에 모닥불을 지피고 숙영하다 밀정의 밀고로 그만 일본괴뢰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일본괴뢰군의 수효는 엄청나 1000여명이나 되었다.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8명의 여전사가 나섰다.    그녀들의 유인으로 대부대는 순조롭게 적을 따 돌리고 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8명의 여전사들은 삼면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립무원에 빠지고 탄약이 떨어졌지만 여전사들은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개의 수류탄을 뿌리고 탄약이 떨어진 총을 바위에 쳐 부수어 버렸다. 왜놈들이 각일각 조여오자 일본군의 포로가 될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손에 손잡고 강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한송이 또 한송이의 낙화처럼 꽃같은 육신을 차디찬 강물에 서슴없이 던진 것이다.   몇해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주년을 맞아 정부가 선정한 ‘건국영웅 100인’에  재중동포  3명이 선정되었는데 그중 제1위로 “8녀투강”의 여전사들이 뽑힌 가운데 안순복과 이봉선이 방명을 올렸다.    3   할일소재의 텔레비드라마 “8녀투강”이 제작중, “8녀투강”의 이야기가 다시 사람들에게 회자(脍炙)되고있다. 지난해 11월부터 북경”강윤”영화텔레비제작사에서 항일소재의 드라마 “8녀투강”을 당시 여전사들이 몸을 던졌던 유적지인 흑룡강성 림구현에서 제작 중, 장예모 감독의 영화 "황금갑"에서 주요역을 맡았던 배우도 출연하는 등 드라마에 인력, 물력을 대거 투입해  제작하고 있다.   일전 드라마의 컷을 공개 했다. 공개된 사진 속 조선인 여전사 안순복의 역이 눈에 띄인다.   "8녀 투강"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영화, 연극, 그림책 등 다양한 쟝르로 각색되어 중국전역에서 항일경전이야기로 떠올랐다. 1950년과 1987년에 두차례 영화로 각색되어스크린에 올랐는데 1950년에 “중화의 딸들”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는 신중국이 건립된 후의 첫 전쟁영화이며 또 “카로위발리 영화절”에서 “자유투쟁상”을 수상해 중국영화사의 첫 국제수상작으로 되기도 했다.   왜적들의 강포앞에서 두려움없이 태산보다 높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여인들. “붉은 마음”을 품고 “푸른 강”에 뛰여든 여인들의 서사시는 오늘도 전해지고있다. ​ 2015년 1월 14일 "청우재"에서   "8녀투강"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중화의 딸" 포스터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락화/장사익      
37    일송정 푸른 솔 댓글:  조회:3259  추천:22  2015-01-09
칼럼   일송정 푸른 솔   김 혁   1,   양처럼, 수굿이 걸음을 옮겨 을미년 새해의 첫 등산을 했다. 고도(古都) 룡정에서 서남쪽방향으로 약 4키로메터쯤에서 룡정을 보듬어 안은 세전이벌과 평강벌의 복판에 분수령으로 솟았는 비암산이라는 고운 이름의 산에 올랐다. 막상 이 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것은 한 그루의 나무때문이다. 물론 산에 오르면 사처에 사철 푸른 소나무 투성이지만 이 소나무만은 그 위상이 남다르다. 1930년대에 이미 있었던 이 소나무는 흡사 큰 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은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부른다.     일송정 푸른 솔은 흘러 흘러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저 유명한 “룡정의 노래”의 첫구절에 나오며 세간에 더욱 알려진 나무, 룡정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송정은 그야말로 룡정을 징표하는 “마스코드”이다. 2,   일찍 룡정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고색찬연한 일송정은 룡정을 지켜주는 “당산나무"격이였다. 결혼하여 젊은 녀인들은 "일송정”이 뿌리를 박은 바위를 기자석(祈子石.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바위)으로 삼았고 가물이 들면 농부들은 일송정을 기우제를 지내는 신주나무로 모셨다. 비암산은 언젠가부터는 반일투사들의 비밀아지트 역할도 했다. 반일지사와 학생들이 일제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멀리 산에 올라 일제를 쳐부시고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기원하던 곳이 일송정나무 아래였다.    일송정이 룡정사람들의 드높은 기상을 보여주는 징표로 부상하자 불안한 일제는 나무에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잔악한 일제경찰은 일송정에 대못을 박아넣고 구멍을 내고 후추가루를 넣고 급기야는 나무에 대고 사격련습을 하는등 악랄한 수단으로 나무를 고사(枯死)시켰다. 1930년대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하면서 취재차 룡정행차를 하였던 김기림의 “간도기행” (조선일보 1930년 6월13일~26일) 에서도 당시 일송정의 모습을 찾아 볼수 있다. “평강령 남단을 가로막고 앉은 일송정 봉오리는 고절을 자랑하던 소나무도 옛이야기. 지금은 마른 거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리하여 간도에 남아있던 최후이며 유일한 소나무도 다만 일송정 이름속에 남아있는것이다.” 3,   1980년대 룡정시의 사회단체들은 그 옛날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설화가 담긴 소나무를 복원하기로 합의를 보고 복원식수를 하였다. 소나무를 떠다 심었고 나무곁에 팔각정자도 세웠다. 하늘향해 비첨이 건뜩 들리고 단청무늬가 아름다운 정자의 천정에는 가곡 “룡정의 노래”에 나오는 주요한 줄거리를 소재로 하여 우물, 말 탄 사람, 달빛 어린 해란강, 룡주사, 룡문교, 대성중학교등 룡정의 경관들을 그려넣었다. 이후 일송정이 섰는 산정에로 오르는 돌층계, 일송정 기념비, 팔각정자, 조선족 유명 작가 시인들이 지은 룡정관련 시구를 새긴 노래비등을 건립하여 한동안 인적기 드물던 산정에 제법 하나의 풍경구가 조성되였다. 지금 룡정시의 텔레비중계탑, 강경애 문학비와 함께 비암산에 자리잡은 일송정은 룡정의 빠칠수 없는 하나의 주요한 경관으로 되였고 일송정은 정녕 유서깊은 룡정과 더불어 중국조선민족의 애환과 분발을 상징하는 문화유물로 민족의 전설과 력사를 이야기 해주는 신목(神木)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였다.   지난해 말, 룡정시에서는 또 한번 일송정을 새롭게 수선하였다. 300여만원을 투입하였고 한국의 저명한 조경사를 초빙하여 일송정기념비주변을 새롭게 조경하였다. 사철 푸르른 잎새, 철갑을 두른 듯한 몸체, 소나무는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다.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도 잘 견뎌내며 허연 눈발을 떠이고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는 그래서 모진 력사의 시련을 견디며 오늘에 이른 우리 민족정신과도 많이 닮았다. 새롭게 조경한 일송정은 오늘도 비암산의 창공 한 자락을 떠인채 그 전설을 읽으며 찾아드는 유람객들을 맞아 주고있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6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댓글:  조회:3787  추천:13  2015-01-05
칼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김혁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의 전문이다. 1942년 저 유명한 “참회록”을 읊조리고는 현애탄을 넘은 윤동주의 일본류학시절 첫번째 작품이다. 편편마다 훌륭해 “옥석”을 가리기 힘든 윤동주의 시 중에서 양띠해를 맞아 특별히 이 시를 뽑아 읊어 봤다. 시를 보면, 화자는 하루 종일 황혼이 짙어지도록 어떤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시에서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인 “흰 그림자”는 즉 시인을 괴롭게 만든 수많은 고민이며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은 어두운 곳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상황을 은유하는듯 하다. 화자는 마음 깊숙이 이런 고민을 갈무리하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괴로워 한다. 드디여 시인은 “하루종일 시들도록 귀”를 기울인 끝에 이제 어리석지만 늦게나마 모든것을 깨닫고 오래 마음 깊은속에 괴로워하던 해결할수 없는 고민들을 하나, 둘 버리기 시작한다. 그 동안 연연하면서 사랑하기까지 했던 그 고민들을 돌려보낸 뒤에 “땅거미”를 옮길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의젓하게 풀을 뜯기시작하고 있는것이다. ​ 2015년 새해는 을미(乙未)년 양의 해다. 새로운 문턱을 넘는 섣달 그믐의 밤에 모두 밝은 꿈을 꾸었기를 바래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시절 꾼 꿈은 바로 양 꿈이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꿈속에서 양을 보았는데 양의 뿔과 꼬리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놀라 잠에서 깼다. 꿈자리가 요상해서 무학대사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더니 대사는 곧 임금에 등극할 것이라고 해몽했다. 한자의 “양(羊)”에서 뿔과 꼬리에 해당하는 획을 빼내면 “왕(王)”자만 남게 되니 곧 임금으로 등극할거라는 풀이였다. 이로서 양 꿈은 길몽, 양은 상서로움의 상징이 됐다. 여기서 상서로움의 ”상(祥)”자를 보면, 왼쪽의 보일“시(示)”자는 원래 “신(神)”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러니 신이 양을 만나면서 상서로움을 뜻하는 “상(祥)”이 된것이다. 음(音)으로는 밝은 양(陽)과 같아 더욱 길상의 의미가 있다.   아홉 번 굽어진 양의 창자처럼 세상이 복잡해 살아가기 어렵다는 구절양장 (九折羊腸)이라는 말이 있다. 올해의 수호신 양이 어떤 기운을 몰고 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앞길이 아홉번 굽어진 길이 주어질지라도 양처럼 깊은 생각, 인내로 그 위기를 넘어야 할것이다. 그러할진대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조용히, 서두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조화롭게 적응하는 양의 이미지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빨리 달리기에만 급급해 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과 계시를 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속에서도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주어진 길”을 걸어갔던 윤동주님의 시를 다시 읊어 보는 을미년의 첫 아침이다. 을미년, 푸른 풀밭의 양떼처럼 모두가 행복하고 길상스러운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2015 을미년의 첫 아침 “청우재(听雨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    달맞이 꽃(夜來香), 지다 댓글:  조회:4391  추천:15  2015-01-03
. 칼럼 .   달맞이 꽃(夜來香), 지다   김 혁   1,   남풍은 쓸쓸하게 불어오고 꾀꼬리 구슬피 우옵니다. 달아래 꽃들은 모두 꿈에 젖는데 오직 달맞이꽃만이 향기를 뿜네요. 망망한 어둠속에 꾀꼬리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그 꽃같은 꿈을 난 더더욱 사랑합니다. 꽃을 품에 안고 꽃잎에 입맞춤하며 달맞이꽃 나 그대를 위해 노래하고 그대를 그리워합니다   주옥같은 노래로 억만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중가수 등려군의 대표작 “야래향” 전문이다. 야래향(夜來香)은 밤에 피는 꽃이다. 야래향을 일명 월하향(月下香), 월견초(月见草), 기생화(妓生花)라 부른다. 낮에는 꽃술이 오므라들었다가 달뜨는 밤이 되면 활짝 벌어지기 때문에 일명 “달맞이꽃”이라고도 한다. 해외에서는 나이트자스민(night scented jasmine)이라 부르는데 역시 밤이라는 “나이트”가 따라 붙는다.   바늘꽃과에 속하는 2년생 식물로 학명은 Oenothera odorata라고 한다. 키는 50~90㎝, 꽃은 지름이 3㎝ 정도 노란색이며 7월부터 가을까지 가늘고 긴 통꽃이 피는데 남아메리카의 칠레가 원산지이며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귀화식물로 자란다. 그러면 달맞이꽃은 왜 밤에만 피여나는 것일까? 그 해답은 달맞이꽃의 수정을 도와주는 곤충에 있다. 바로 박각시나방이 그 주인공인데 이 나비는 꽃잎이 벌어지는 박꽃을 찾아가 꿀을 얻는데서  신랑인 박을 찾아온 각시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박각시 나방”이라고 불린다. 박각시 나방이 밤에만 다니며 수정을 도와주기에 달맞이꽃이 밤에만 그 수술을 벌려 나비를 맞이하는것이다. 서로 경쟁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밤을 택한 참 지혜로운 식물이요, 곤충이다. 달맞이꽃은 우리에게 유용한 식물이기도 하다. 달맞이꽃의 종자에서 짜낸 기름에는 “감마리놀린산”이라는 성분이 함유되여 있어 혈액순환과 콜레스테롤 개선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천연화장품의 원료로도 리용된다고 한다. 희랍신화속에도 야래향이 나온다. 별을 사랑하는 님프들속에서 홀로 달을 사랑하던 님프가 모함을 받아 달이 없는 곳으로 추방된다. 이를 본 올림포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가 그를 쌍히 여겨 그 령혼을 달맞이꽃으로 환생시켜 달이 뜨는 밤이면 꽃을 피우게 해주었다고 한다.   2,   밤에만 조용히 향기를 뿜는 달맞이 꽃처럼 애타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 등려군의 “야래향”은 개혁개방을 맞은 중국에서 카세트테프로나마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또한 광동어, 일본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어, 한국어 등으로 동남아지역의 베스트 가요로 떠올랐다. 등려군 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번안해 불렀다. 하지만 막상 이 노래의 원창자는 등려군이 아니다. 영화의 주제곡으로 맨 처음 이 노래를 세상에 선 보인 사람은 리향란(李香兰)이란 이름의 가수이다. 그리고 그는 이름자와는 달리 중국인이나 한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그의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요시코의 아버지는 로일전쟁후 중국 동북으로 왔고 이어 1920년 요시코가 태여났다. 요시코는 당시 중국과 일본,  로씨야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만주에서 일본어 중국어 로씨야어등 다국 언어를 자연스레 익혔다. 그후 아버지의 중국친구인 퇴역장군 리계춘이 야마구치 요시꼬를 양녀로 삼았고 향란이라는 중국이름을 붙여줬다고한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소녀 시절 폐병을 치료하려고 성악을 배웠는데 1933년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시)방송국이 중국인청중을 끌기 위해 기획한 프로- “만주 신가곡”에 발탁되여전문가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친구가 지어준 이름인 리향란이라는 이름을 예명을 썼다. 1931년 “9.18사변”을 일으켜 위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겨우 열세살난 요시코를 방송국 전속가수를 시켜 제국주의를 선전하기 시작했다. 만주영화협회는 1937년 “위만주국”정부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满洲铁道株式会社)가 50%씩 투자하여 “만주국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설립했는데 만주인들에게 보여줄 영화를 만주인들이 찍는다고 표방했으나 실지로는 일본인들이 조종했고, 목적은 “오족협화”, “일만친선”을 국책으로 하는 문화정책추진이였다.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음악영화를 기획했는데, 중국녀배우들이 노래를 부를 줄 모르고 대역도 찾지 못해 골치를 앓던 차에 제작자가 우연히 신경방송국이 방송하는 “만주신가곡”을 듣고 리향란이라는 인물을 기용하려 마음먹었다. 섹시하고 이국적인 용모와 뛰여난 가창력. 여기에 중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배우로도 활동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리향란은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면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야래향” “소주야곡(苏州夜曲)” 등을 불렸다. 일석에서는 이 “야래향”을 민족적 울분이 함축된 노래라고 본다. 이후 셜리 야마구치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야마구치 요시코는 미군 장병들과 사랑에 빠진, 동양에서 온 신비한 녀인을 연기했다.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녀인으로 분한 리향란은 대중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했고 중국과 일본 나아가 할리우드에서까지 사랑받을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중국정부는 친일, 친미 행위를 한 반역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리향란 역시 처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시킨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선동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된 리향란은 결국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과정에서 리향란의 진짜 정체가 밝혀졌다. 그녀는 자신이 일본의 선전도구로 리용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리향란이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부모가  가까스로 호적등본을 찾아내 일본인임을 립증했고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그후 리향란은 중국에서 추방됐고 중국에서는 그의 영화와 노래가 금지됐다. 따라서 “야래향”이라는 노래도 40여년간 중국땅에서 사라지게 된것이다.   3,   일본인 신분을 속인 완벽한 중국인 녀배우로 격동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일본 녀배우 야마구치 요시코씨는 지난 가을, 도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향년 94세.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일전에 있은 정례브리핑에서 야마구치 씨의 사망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리향란녀사는 전후 적극적으로 중일 우호 평화사업을 추진하며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며 "우리는 그의 서거에 애도를 표시한다"고 론평했다. 야마구치씨가 비록 일제제국주의를 선전하는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 행위가 그녀의 예술적 성취등을 모두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평가를 내린것이다.   중국에서 강제 추방당한뒤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본명으로 배우 활동을 재개했다. 1950년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영화 “추문”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1950년대에는 미국 영화와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다. 1951년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와 결혼했다가 4년 뒤 헤여지고 1958년 일본인 외교관과 결혼하면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팬들의 부름에 떠밀려1969년 TV 토크쇼 진행자로 복귀했고 국민적 인기를 배경으로 1974년부터 1992년까지 근 20년동안 자민당 참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 시절 환경성 정무차관까지 지내기도 했다. 연예계 생활 은퇴 후에는 윁남전과 중동전쟁 등에 현장 취재기자로 뛰여다녔고 당시 베일에 쌓여있던 조선의 김일성 수상을 사상최초로 단독 인터뷰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일성은 언론 로출을 꺼리는 인물이지만 리향란의 팬이라 결국 인터뷰를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야마구치는 만년에 자서전 “李香蘭私の半生”을 펴냈다. 중국인이다, 혼혈아다, 간첩이다, 뭐다 등등 끈질기게 따라붙던 여러 가지 설들을 해명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한 그 책을 길림문사(吉林文史)출판사가 1990년 4월에 번역출판했는데 자서전에서 그녀는 “리향란으로 출연했던 영화를 다시 보니 정말 부끄럽다”며 선전영화에 출연했던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스타”라는 타이틀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야마구치 요시코는 두 권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 행각을 반성했다. 또 “아시아녀성기금” 부리사장을 지내며 전쟁 피해자와 종군 위안부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것을 일본정부에 촉구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 했다. 2005년에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도 반대해 나섰다.   력사의 증인 한명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나마 안위되는것은 그가 보여준 만년의 행보가 어제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로인네의 웅숭깊고 착한 자세를 보여줬기때문이다.   “만주국”의 실력자로서 “만주오인방(滿洲五人幇)”의 하나였고 전후 일본정계를 주물렀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신죠 일본총리처럼 죄책감이 없는 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작은 무대에서 력사를 위배한 광대극을 놀고있것이 작금의 일본이다. 이러한 상황에 요시코의 반성과 노력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리향란, 아니 요시코라는 인물의 서거에 대중이 눈길을 모으며 그녀의 노래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리유라면 리유다. 야래향은 이제 아름답게 졌다.   2014년 9월 18일 “청우재(听雨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4    나 홀로 집에 댓글:  조회:4054  추천:12  2014-12-25
  . 칼럼 .   나 홀로 집에   김혁   1,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꼭 나오는 영화가 있다. 크리스마스 특선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각지의 여러 영화채널에서 방영한다. “나 홀로 집에 (小鬼当家)”라는 영화이다. 1990년 미국에서 제작된 코미디 영화이다. 8살난 아이 케빈은 부모들이 휴가차로 프랑스로 떠나면서 홀로 집에 남겨진다. 성탄절날 아이가 혼자 있는 집에 두 명의 도둑이 들이닥치고 아이는 홀로 도둑들을 맞서 나간다. “나 홀로 집에”는 개봉한지 얼마 안되여 미국내에서 흥행률 1위를, 전 세계에서는 흥행률 3위를 기록했다. 결과 세계적으로 흥행수입 4억 7천만 딸라라는  기록을 올렸다. 그에 힘입어 시리즈로 몇부 더 제작되여 그냥 신화같은 흥행가도를 달렸다. 그후로 이 영화는 반드시 크리스마스 황금 시간대에 편성되곤했다. 2011년에는 5백만이 넘는 가구가 시청하여 력대 크리스마스 최고 시청률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어제저녁, 중앙텔레비방송 영화채널에서도 황금시간대인 9시에 이 영화를 상영했다.   2,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뜬금없이 홀로 집에 남겨진 우리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에 청승맞은 하소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부모없이 “나 홀로 집에” 남겨진 아이들, 이 아이들을 우리는 “류수아동(留守儿童)”, “편부모 가족”, "결손가정“이라 부른다. 이 문제는 현재 우리 조선족사회의 최대의 문제점으로 부상되였다. 리산(離散)으로 인한 조선족 가정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편부모 가족은 조선족의 도시진출, 출국로무열과 더불어 날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학교 결손가정자녀교양연구모임”에서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연변의 결손가정이 60%, 일부 학교의 학급은 지어 87%를 차지했다.   과반수이상의 우리의 아이들이 “나 홀로 집에” 남겨진것이다.   또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길림지역 7개중소학교에서도 편부모거나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가 재교생총수의 60.65%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중에 부모가 리혼했거나 사망한 학생의 비례수는 12.3%인 반면 해외 로무송출로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는 67.4%나 달했다. 그중 량부모가 다 없는 학생비례수도 34.1프로, 적지않은 수자이다.    료녕성 심양에서도 시내 5개 조선족 소학교와 2개 조선족 중학교 학생 1천641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은 35%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65%가 결손 가정의 자녀였다. 조사 대상 가운데 부모가 리혼했다는 응답은 13.9%였으며 부모 가운데 한 명만 있다는 응답이 27%, 부모 모두 없어 조부모 등 친척과 함께 생활한다는 응답도 24.1%에 달했다. 이러한 집계자료에 따르면 결손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부모 쌍방 혹은 일방의 출국이였고 다음 부모의 리혼이였는데 사실상 부모 일방의 출국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리혼 및 외국인과의 결혼 등)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현대판 “리산가족”의 비운을 겪고있는지,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동강나고 비여진 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러한 삭막한 가정환경에서 생활면에서, 학업에서 다각적으로 좌절과 갈등을 겪고있다. 부모와 장기간 리별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가야만 하는 아이들의 증후(症候)는 심각하다. 강보의 아이들을 품에서 떼놓고 해외로 나가서는 5년, 6년 지어 20년까지 보내면서 지어 자기 아이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사례는 한 집 건너 주변에 수두룩하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부모란 그저 한국에서 몇달에 한번씩 걸려오는 전화속의 목소리로 달마다 부쳐보내는 돈의 액면으로만 기억되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낯익으면서도 낯설은 존재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공부에 골몰할수가 없고 학업이 뒤떨어지면 곁에서 부축여주는 보호자도 없이 결국 학교생활을 쉽게 포기하고 사회로 나와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리고 비여진 자신의 책무를 돈으로 상환하려는 부모들에 의해 어려서부터 돈에 맛을 들인 아이들은 그 금전관에도 문제가 생기기 일쑤다. 아이들은 너무나도 일찍이 금전만능, 한탕주의에 환혹되고 있다. 학교의 문제생들 대부분이 이런 가정에서 속출되고 있다는것이 사례와 집계로 증명되고있다. 아이들의 성격 형성과 사회적 관계는 많이는 부모를 통해 배우게 되는데 가정의 부재로 인한 “나 홀로” 아이들에게는 이런 환경이 비여지고 관계가 차단될 수밖에 없다. 돈을 벌어와 금쪽같은 자식들에게 쏟는다고는 하다지만 그 과정이 외려 가족간의 그리움과 애정에 목 말라가고 있는 자식들의 어린 가슴에 멍이 들게 하고있다. 부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한 아이들에 대한 소외가 자녀들의 성장과 꿈과 미래에 상처를 덧나게 하고있는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줄어들고 비여 있는만큼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대상이 줄어들고 아이들은 외로움 지어 원망까지 키우며 살아가고있다. 이 문제를 절감하고 보호와 지원 시스템 마련 등 사회적인 거동이 일고는 있지만 날로 속출하고있는 이 군체에 대한 노력의 손길은 아직도 판부족이고 미비하다.   이미 “빨간 불”이 켜진 우리의 공동체사회에서 결손가정으로 인한 사회적인 증후가 더욱 심하게 불거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땅한 처방전의 마련이 화급하다…   3,  영화에서 주인공 캐빈이 두볼을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래서 영화의 포스터에도 올랐고 많은 배우들이 그 모습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 아롱다롱 성탄수가 불밝혀져있는 따뜻한 방안에서 부모와 풍성한 식탁에 오순도순 마주앉아 캐럴송을 부르며 재롱을 떨어야할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 홀로 텅 빈 방에서 마음의 비명을 지르고 있지않을런지 모른다.   2014 12월 25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3    잔혹 "흑백 스토리" 댓글:  조회:4086  추천:12  2014-12-18
. 칼럼 .   잔혹 “흑백 스토리”   김 혁   1,   타란티노라는 할리우드 감독이 있다. 바나나처럼 길숨한 얼굴을 가진, “악동”이라는 불미한 별명을 가진 감독이다. 1992년 영화데뷔해 “저수지의 개들(落水狗)”, 저속한 소설(低俗小说), “킬빌(杀死比尔)”, 등 내놓는 영화마다 히트작을 연출했다. 영화광인 나지만 타라니티노 감독의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않는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것은 시각과 청각에 대한 고문이다. 킬러, 변태, 게이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나오며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사에 무엇보다도 영화 전편은 선혈로 얼룩진 지나친 폭력이 관통된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전부의 영화를 DVD로 갖추고있는것은 비순차적인 서사구조, 다중 플롯, 허를 찌르는 반전 등 분명 그만의 색갈있는 문체와 쟝르를 다루는 솜씨가 나의 소설창작 탐구에도 은근한 영향을 주었기때문이다. 그의 근작 영화 "해방된 장고(被解救的姜戈)”는 이 바나나같이 길숨한 얼굴의 B급감독에 대한 색안경을 벗게 했다. 미국에서 련이어 인 인종차별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고 맨 처음 이 영화를 떠올렸다. 번중한 창작 여가에 이 영화를 다시 들추어내여 보았다. “장고”는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몇해전인 1859년, 폭발직전의 “화산구”에 거의 다다른 시점에 선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 남부. 노예로서 삶을 전전하던 장고는 악질 무법자들을 죽이고 현상금을 받는 닥터 슐츠를 만나게 되고 그와 손잡는 대가로 자유를 얻는다. 둘은 함께 손을 잡고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들을 쫓는다. 일명 “현상금 사냥군”으로 활약하며 최고의 파트너가 되여 미국 곳곳을 누빈다. 사라진 안해의 행방을 추적하던 장고는 그녀가 악명 높은 마스터 캔디에게 팔려간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장고와 슐츠는 캔디의 농장을 찾아간다.  농장주 캔디는 자신의 흑인노예가 개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을 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한이다. 장고와 닥터 킹은 그의 사업 투자를 빌미로 거액의 거래를 제안하며 안해를 구출하려 한다. 노예농장에서 한차례 피로 얼룩진 복수전이 벌어진다. 타란티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노예제도 이야기를 하기 원했다. 또 그 이야기를 통해 미국이 제대로 대처하기를 원한다"라고 전에없이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영화에서는 노예 학대에 대한 잔혹한 묘사와 함께 흑인을 비하하는 깜둥이(Niger)라는 대사를 110번이나 등장시켜 미국 노예 제도에 대한 비판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영화에는 "타이타닉 호”의 주역으로 중국관객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긴 할리우드의 톱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출생애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한다. “만민의 련인”으로 준수한 용모를 가진 그가 악역으로 변신해 뇌까리는 얼토당토않는 리론이 그냥 인상에 남는다. 영화에서 그는 흑인노예의 백골을 쳐들고 골상학(phrenology)리론을 펴면서 “대체 왜 노예들은 총을 들고 우리와 싸우지 않을까?", “노예들이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흑인의 뇌 속에 노예 근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이비 과학을 장황설로 풀어낸다. 영화는 흑인노예제도가 가장 극심화 됐던 미국 남장을 배경으로 택해 미국 력사상 어두운 부분을 조명한다. 감독은 재미위주의 전형적인 서부영화가 아닌 노흑인예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영화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장고는 안해가 팔려간 백인의 거대한 농장에서 노예들을 학대하는 모든 백인을 사살한다. 그리고 백인의 대저택을 폭발하여 그의 복수를 완성시킨다. 미국 노예제를 상징하는 백인 캔디의 저택이 무너지는 건 노예제의 붕괴를 의미하는듯 하다. 영화는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호쾌한 서부극을 통해 인종 차별이라는 미국의 “원죄”의 책임을 다시 묻고있다. 타란티노는 할리우드에서 "악동"으로 불린다. 그 악동의 영화는 화끈하지만 력사와 인권문제에 대한 그의 립장은 차갑다. 백인임에도 흑인 문화를 자신의 작품 세계로 승화시킨 타란티노는 역시나 기대 이상의 멋진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스타일과 작품성, 상업적 흥행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것이다. 영화는 2013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 했다.   타란티노 감독 2   미국에서는 타란티노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잔혹한 “흑백의 스토리”가 현실에서도 마냥 재현되고있다. 지난 8월 10일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18세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관의 총을 맞아 숨졌다. 머리와 팔 등에 최소 여섯발을 맞았으며 숨진 뒤에도 4시간 동안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되였다. 브라운이 비무장 상태에서 무고하게 사살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 11월25일, 브라운을 총으로 쏴 사망케 한 백인 경찰 대런 윌슨에 대해 대배심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이에 유색인종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대의 화염병과 경찰의 최루탄 공방이 이어졌다. 사건은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인종 갈등 문제까지 련계되면서 항의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이런 가운데 뉴욕 거리에서 담배를 팔던 흑인 에릭 가너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백인 경관에 대해서도 뉴욕시 대배심이 12월 3일 불기소 결정을 내리자 사태는 더욱 격화했다. 주요도시에서 경찰 공권력을 규탄하고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폭력시위가 이어지면서 미국 사회 전체가 크게 요동쳤다. 지난 9월에는 백인인 남편에게 키스를 하던 다니엘르 왓츠라는 흑인녀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매춘녀로 오인 받은 그녀는 즉각 “이 사람이 나의 남편이다”라고 항변했으나 매춘부가 아니고 남편이 그녀의 고객이 아니라는것을 경찰이 인정할때까지 수갑을 찬 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체포당하며 그녀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에게 키스하는 흑인녀성은 매춘부라고 봐야 하느냐"며 사건은 또 한번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러니 적인것은 그녀가 바로 인종차별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 영화 “해방된 장고”에서 흑인 노예로 출연했던 녀배우였다. 오늘날에도 백주에 미국의 네거리에서 꺼리낌없이 자행되는 인종차별 현상을 보노라니 타란티노 감독의 "미국은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미국의 원죄 중 하나다. 아직도 그 죄를 씻지 못했고 여전히 흑인과 백인이 서로를 대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던 갈파가 다시 떠오른다.                                                                                                                                                    종족기시에 항의하는 시위자들   3   흑인노예제도는 미국 근현대사의 지울수 없는 상흔이다. 링컨의 남북전쟁 승리는 노예해방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백인들의 마음 속에서 노예제의 그림자와 인종차별 의식이 분해되기까지에는 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버락 오바마가 흑인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인종차별을 초월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무지개빛 환상이 떠올랐지만 “퍼거슨 사태”와 련달아 이어지는 종족차별 사건들로 그 환상은 아연(俄然) 바래지고 있고, 무참히 깨지고 있다. 미국은 스크린 아닌 현실에서 “잔혹한 흑백스토리”를 연출했고 미국 력사 200년 동안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한복판에 다시 서게 됐다. “해방된 장고”는 재미도 있고 나름 묵직한 주제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흑인 노예해방이 선언되고 15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종에 근거한 차별은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에 상업흥행위주의 할리우드에서 “장고”와 같은 영화가 등장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사족(蛇足): 뜬금없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해외에서 차별받으며 3D업종에 혹사하는 수십만에 달하는 우리 족속들의 이야기들이 그물그물 떠올랐다. 이는 비단 먼 서구나 영화에서만 자행되는 일이 아니다. 피부색이나 나라를 두고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은 우리가 고국이이라는 감동과 민족적 동질감에 대한 기대를 품고 찾아갔던 그곳에서도 낯익은 소재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의 인종차별 사건에 더 분노하고, 한부의 영화에 남다른 감흥을 머금는 또 다른 리유다.    “청우재(聽齋雨)”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영화 "장고" 예고편
32    다카쿠라 겐, 천국의 강을 건너다 댓글:  조회:6300  추천:46  2014-11-19
  . 칼 럼 .   다카쿠라 겐(高仓健), 천국의 강을 건너다   김혁  1,​ 80년대 최고의 우상으로 몇세대 중국인들에 두꺼운 팬층을 확보했던 일본의 국민배우 다카쿠라 켄이 타계했다. 지난 10일 오전 악성 림파암으로 도꾜의 한 병원에서 숨졌으며, 이 같은 사실을 아사히신문이 뒤늦게 보도했다. 향년 83세. 아사히신문은 이례적으로 호외까지 발행하며 그의 죽음을 기렸고 관방장관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계 대스타였다며 하나의 큰 시대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고 애도했다. "가는 길은 정진하고, 끝나면 후회는 없다."고 하면서 천명을 완수한 편안한 미소를 띄고 가셨다고한다. 이 말은 어느 사찰의 유명 주지스님이 일찍 다카쿠라 켄에게 보내온것으로 다카쿠라 씨의 평생의 좌우명이였다. 불과 몇달전 일본의 전설적인 톱스타 야마구찌 모모에의 아버지역을 맡아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따도모(大岛茂)”-유키티나리의 타계소식을 접하고 비감에 잠겨 추모수필을 썼었는데 또 한분의 영화거장의 타계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서재의 일본영화코너에서 골라보니 내가 소장한 다카쿠라 켄의 영화 DVD가 십여장도 더 되였다. 창작스케줄이 빼곡하고 편집부의 청탁재촉이 아우성이였지만 해조처럼 밀려드는 비감함에 집필을 해나갈수 없었다. 컴퓨터를 끄고 스크린앞에 마주앉아 하루 종일 그가 열연한 영화들을 하나하나 다시 보아 내려 갔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 “철도원”, “역”, “먼산의 부름”, “추격” 어쩌면 하나같이 정직과 진지함과 의리의 화신같은 남성상을 보여준 외골수 캐릭터로 열연한 영화들이였다.​ 내가 소장한 다카쿠라 켄의 영화들 중국의 유명한 장예모감독 역시 다카쿠라 켄의 열성 팬이라 몇해전 굳이 고령의 그를 중국의 스크린으로 불러내 "천리주단기(千里走單騎)”를 제작, 영화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주인공과 그 아들간의 갈등과 부자애를 감동적으로 다루었다. 다카쿠라 켄은 지난 2008년에는 북경올림픽 총감독을 맡았던 장예모에게 일본 전통의 무사도를 선물하는 등 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영화인생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다카쿠라 켄은 1931년 2월 16일 후쿠오카에서 태여났다. 메이지대학 상학과(商学科)를 다녔다. 졸업하고 가업을 돕다가 1955년 상경, 예능 프로 제작에 관심이 있어 면접을 봤는데 그 자리에 있던 영화사 “도에이”의 간부에게 스카웃 돼 배우로 활동하게 됐다. 1955년 배우 모집에 합격하면서 영화계에 입문, 1956년 “전광공수치기 电光空手打”에서 주연을 맡아 스크린에 데뷔했다. 애초에는 ”미야모토 무사시 (宮本武藏)”, “일본협객전” 등의 무협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 ​1970년 다카쿠라 겐 프로모션을 설립했고1976년 제22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1977년 “행복의 노란 손수건”과 “핫코다산(八甲田山)”으로 제51회 키네마 준보 주연남우상, 제32회 마이니치 콩클 남우연기상, 제1회 일본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두번째로 제24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9년 몬트리올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지난해엔 상기 영화제로부터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이후 “철도원”으로 제23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일본아카데미 최우수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 영화배우로는 처음으로 정부 주관 문화공로자에 선정됐으며, 작년에는 문화 발전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문화훈장까지 받았다. 2012년 마지막 영화 “당신에게”로 그해 일본 호치(報知)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생애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뛰였다. 이번에도 차기작 준비 도중 갑자기 입원했던것으로 전해졌다. 데뷔 이후 총 200여 편의 영화에서 구김없는 그 모습 그대로 열연, 뛰여난 연기력과 인품을 갖춰 일본 팬들에게 “겐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다.   2, 다카쿠라 켄의 타계에 대해 중국에서도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각 사이트와 개인 블로그가 그의 타계소식으로 메인을 장식했고 중국의 톱스타들이 분분히 그의 사망을 애도하는 한편, 정부차원에서도 즉각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홍뢰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어제 정례회견에서 "다카쿠라 겐 선생은 중국 인민에게 널리 알려진 예술가라며, 중·일 량국 문화 교류 추진에 중요한 공헌을 했던 그의 별세에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중일 관계가 외교적으로 껄끄러운 상황에서 일본 배우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애도 성명을 발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다카쿠라 켄을 중국에 알린 영화는 바로 “추격”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그대여 비분의 강을 건느라”이며 사실 다카쿠라 켄의 영화생애에서 그닥 중요한 위치를 갖지 못하는 영화이다. 지어 다카쿠라 켄의 영화출연목록에서 이 영화를 찾아 보기 힘들며, 지금 영화의 전성시대를 펼치고있는 한국에서는 이 영화가 상영되지조차 않았다고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흥행가도를 달렸다. 당시 중국의 영화작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박진감 넘치는 스릴러물이라는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주역 다카쿠라 켄의 공로가 과반으로 컸다. 의리와 과묵함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선 굵은 연기를 펼친 다카쿠라 켄의 이미지는 대번에 당시 중국인들의 심성을 사로잡았다. 거리와 골목에서는 이 영화의 주제가가 스피카로 싫증을 모르고 반복되여 울려퍼졌다. 가사는 단 한마디도 없이 “라야, 라” 하는 후렴구같은 두마디만 복창하는 그 주제가의 중독성있는 선률이 어쩌면 당시 모든이들의 마음과 귀를 그렇듯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늘 바바리 코트의 옷깃을 세우고 다니는 영화 주인공 모리오카(杜丘)의 형상때문에 중국에서는 바바리 코트 복장이 기하급수적으로 류행되였다. 당시 젊은이고 보면 너나가 코트 한벌 갖추기를 원했다. 거리에 나서면 모두가 꼭 같은 형태의 코트를 입고 바람도 없는 날에도 하필이면 옷깃을 세우고 어깨를 살리고 다녔다. “다카쿠라 켄”효과였다.​ ​ 문혁이라는 십년동란을 거친 중국은 오래동안 좌적인 멍에와 교리(敎理)의 가쇄(枷鎖)에 옥죄여 있었다. 그러다 80년대 초, 조금 원활해진 풍토에 힘입어 엄격한 검열의 관문을 뚫고 간신히 대륙에 상륙한 해외의 문화는 영화로부터 시작, 그중에서도 일본영화가 압권이였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출연한 드라마 “의심스러운 혈형”이 안방극장을 사로잡았고 다카쿠라 겐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추격”, “먼산의 부름”, “행복의 노란 손수건”등이 영화관의 모든 객석을 점하면서 상상 그 이상의 인기몰이를 하였다. 그 와중에 다카쿠라 겐은 중국 관객들의 최고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중국 여러 계층의 관객들은 천편일률적인 “본보기극”이라는 몇종의 경극으로만 간신히 문화욕구를 해결해야 했던 암울한 시기를 지내왔었다. 문화 콘텐츠의 공백을 허무한 눈으로 장장 십여년간 봐야했고 수억명을 헤아리는 신세대들의 다양한 문화 욕구는 분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맨 처음 외부 세계에 눈뜨기 시작한것이 일본영화였고, 다카쿠라 켄이였다. 때문에 그 화약같은 강렬한 인상은 오랜시간이 흘러도 그 세대의 심방 깊은곳에 깊숙히 각인되여 있는것이였다. 옹근 80년대 중국은 일종의 일본문화의 돌풍을 경험하고있었다. 콘텐츠의 빈한함에 질려있는 상태였던 당시 상황속에서 들어왔던 일본 영화들이 중국사회에 던진 파문은 결코 가벼운것이 아니였다. 이러한 문화적 쇼크는 그동안 “정치적 이데아(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것)에 갇혀졌던 중국문화의 틀을 조금씩 깨는데 이바지하게 되여서 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되고있다.   3, 다카쿠라 겐은 그 화려한 정평중에서도 “일본의 잃어버린 전통적 남성상을 보여준 스타”로 평가되고 있다. 옛부터 군자를 리상적인 남성상으로 삼아 온 우리 민족에게는 대범함, 강직함, 신중함, 과묵함 등이 남성다움의 덕목이라는 의식이 깊이 뿌리 내려 있다. 하지만 근년들어 세상은 어쩌구려 남성상실의 시대를 맞아왔다. 가부장적인 남성스러움을 잃어버린 현대 남성들이 늘어나면서 남성들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회의를 가진지 오래다. 하여 기존의 남성다움을 어필하지 않고 녀성화 된 남성들이 최근 사회에서 버젓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여있는 현실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남성들은 홀로 선술집의 구석쪽에서 독한 자조의 술을 마시며 자기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있다. 강한 남성에 대한 향수는 남성으로서 원초적인 본능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강한 남자, 시대를 이끌어가고 가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중심추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남자에 대한 환상은 남성들이 공유하고저하는, 어쩌면 이 시대가 잃어버린 향수 일듯하다. 우리가 수십년전 80년대에 우리에게 다가왔던 일본의 한 배우를 내내 잊지못하고 그의 타계에 대해 남다르게 애닯아 하는 또 다른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가?   2014년 11월 19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1    로총각 증후군 댓글:  조회:2723  추천:11  2014-09-16
. 칼럼 .   로총각 증후군   김 혁   1, 총각의 어원을 살펴보면 총(總)은 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 등으로 쓰였다. 은 물론 이고. 옛날 머리양식을 보면 년소자들은 머리를 량쪽으로 갈라 뿔 모양으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머리를 가리켜 이라고 했다. 이런 머리를 한 사람은 대개 장가가기 전의 남자였다. 총각은 여기에 연유해 생긴 말이다, 우리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총각김치는 손가락 굵기만한 어린 무우를 무우청 째로 양념에 버무려 담은 김치인데, 그것이 마치 총각의 머리와 같은 모습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2, 로총각증후군(症候群)은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지 오래다. 변혁기를 맞아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농촌 처녀들은 모두 도회지로 해외로 떠나 갔다. 도시의 삶에 익숙해 지고 그 편의성에 심취된 처녀들이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 오지 않았고 거기에 국제결혼까지 겹치면서 농촌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된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연변주 모 시 농촌의 31세부터 40세사이 남성들중 미혼남성이 864명이나 되였는데 그중에서도 조선족이 769명으로 거의 90%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것은 41세부터 45세까지 장가가지 못한 261명 고령남성중 조선족이 93.5%차지한다는 사실이다. 기타 현, 시의 정황도 매일반이였다. 주인구및계획생육위원회 인구발전전략처의 관련책임자는 고 분석했다. 로총각들의 혼인문제는 이제 개인의 사생활 령역의 자유나 소관으로 맡겨 두고 구경만 하고 있을 지경이 아닌 것이다. 3, 요즘들어 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연변주에서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로총각인구에 대한 구체적 정황을 조사하고 상응한 당안을 만들어 인터넷, 신문, TV, 방송 등 매체를 통해 사회에 그 정보를 공개한다. 도문시 인구계획생육국에서는 로총각 구혼 홈페이지를 만들어 아주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 여러 계획생육부문에서 적극적으로 남녀청년련합회를 뭇고 로총각들의 중매인으로 나서고 고있다. 화룡시 두도진에서만 해도 진과 촌의 100여명 계획생육간부들이 100여명 로총각들의 중매인으로 되였는데 이미 8쌍이 인연을 맺고 결혼등록을 하였다. 로총각들에게 치부정보를 제공해주고 소액담보대부금을 내주어 창업, 치부의 길로 이끌었다. 올해 연변주 인구계획생육위원회에서 내준  소액담보대부금은  120여호, 110만원에 달한다.  그외에도 로동부문과 손잡고 로총각들에게 취업강습을 시키고 로무송출 기회도 마련해주었으며 감숙, 사천, 운남, 흑룡강 등지와 련계하여 그들에게 배우자를 알선해주도록 힘쓰고있다. 엄연한 사회문제의 복판에 서있는 로총각들이 하나둘 가족단위를 이루어 사회와 영농에 매진할 수 있는 풍토가 이룩되기를 바래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0    천재지변 그리고 ... 댓글:  조회:2885  추천:10  2014-09-16
. 칼럼 .    천재지변 그리고 ... 김 혁     1 지진이란 낱말은 76년 맨 처음 접했다. 우리가 매일 쓰는 그릇을 만들고 있는 당산이라는 곳에서 지진이 일었다는것이다. 그리고 연변에도 지진이 인다는 풍문이 돌아 적이 겁에 떨었었다. 당시 소학생이였던 우리에게 “우상”은 요즘처럼 그무슨 탈렌트가 아니고 천문학자 장형이였다.   동한(东汉)시대 과학자인 장형(张衡)은 “후풍지동의(候风地动仪)”라는 계기를 만들어 지진의 발생을 감측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지동의는 외벽에 8마리의 룡이 부착돼 있는데 룡은 저마다 작은 구리공을 물고 있다. 그 룡두밑에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리고 있는 8마리의 개구리가 있는데 만일 어느 지역에 지진이 발생할 경우 룡입 속에 있던 구리공이 그 방향의 개구리입에 떨어지는 기계였다. 장형과 그의 지동의는 당시 교과서에도 실렸고 우리가 주문해 보는 잡지들에도 칼라로 큼직하게 소개되였다. 그 예술품을 방불케 하는 지동의를 보며 저마다 감탄을 머금었던 기억이 있다. 2 그렇게 감성적으로나마 알았던 지진이 다시 한번 우리들의 신심을 강타했다. 2008년 5월 12일 규모 8.0급의 대지진이 사천성 문천 등지를 강타해 그 지역이 초토화됐다.  풍부한 물산으로 사람들의 살림 형편이 넉넉해 “천부지국(天府之国)”으로 불렸던 곳, “삼국지”의 류비가 제갈량의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计)”에 따라 터전으로 삼았던 곳, 국보 판다가 서식하고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관광명소로 유적도 풍부한 곳, 새 세기에 들어서 매년 10% 넘는 고도성장을 이루며 “서부대개발”의 중심이자 선두 도시로 이름 난 곳, 그 곳을 지진의 마수가 덮쳤다. 주택 50만채가 붕괴됐고 학교 건물 7000여 채가 무너져 내렸으며 20여만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명의 아이들이 일조일석에 부모을 잃고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됐다.  3 중국에서 예로부터 지진에 대한 기록은 드물지 않다.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에 서도 “지진이 다섯 번, 산과 봉우리가 무너지는것이 두 번, 그 밖에 재이(灾异)의 기록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고 전하고 있다. 불과 30년전인 당산대지진의 악몽을 재현하며 덮쳐든 이번 지진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 250개 이상의 위력이라 한다. 하지만 렬악한 위기속에서도 휴머니즘은 꽃을 피웠다. 정부는 식량, 생수, 옷, 텐트를 비롯한 구호품을 신속히 지원하고 있으며 호주석과 온총리는 여진이 남아있는 피해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 구호활동을 선두 지휘했다. 구조대원들은 "1프로의 희망이 보이면 100프로로 뛴다"는 구호를 걸고 밤낮으로 뛰고 있다. 련이은 여진과 악천후속에서도 생사를 다투며 매몰 주민들을 구해냈다. 찢어진 길을 잇고 무너진 잔해들을 걷어내며 망가진 도시 기능을 하나씩 복구해 나갔다. 무너진 “천부지국”을 다시 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사천에서 매일이고 생명의 기적, 사랑의 경이가 이어지고 있다.  형제자매의 불행을 함께 헤아리고 슬퍼하는 “동병상련”의 마음은 기부활동을 촉진해 중국 전역을 무대로 성금모금, 헌혈활동이 확산되고 있다. 불운한 이들을 돕기 위해 기업가, 연예인, 일반시민으로부터 고사리손 애들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온정이 줄을 잇는다.   14억 중국인이 하나로 뭉쳐 난국을 헤쳐나가며 나눔과 베품의 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와 행복이 증대되고 있다. 대지진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아픔을 아픔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떨쳐나선 우리들에게 재난극복과정은 공통의 경험이 되면서 한편으로 단결과 일체감, 위기 극복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진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류에게 지진, 해일, 홍수, 번개 등의 천재지변은 공포의 대상이 되여 왔다. 인간으로서 감당해 낼 수 없는 자연재해는 인간들이 쌓아온 물질과 능력의 한계를 철저히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재앙은 인간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천재지변이 가져다준 재앙, 하지만 그 재앙속에서 보여준 삶의 의지는 강진보다 강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삼각 버튼을 누르세요)
29    횡단보도 풍경 댓글:  조회:3417  추천:11  2014-09-12
. 칼럼 . 횡단보도 풍경 김 혁   △ 횡단보도, 중국어로는 얼룩말선(斑馬線)이라 부른다. 횡단보도의 표지가 얼룩말의 무늬를 꼭 닮은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얼룩말은 주로 아프리카에 분포하여 서식한다. 얼룩말하면 아름다운 무늬로 유명할뿐더러 조화로운 단체 생활로도 이름있다.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데 많이는 그 수효가 수천 마리의 큰 무리를 이룬다고 한다.   령양이나 기린들과 곧잘 어우러지는 온순파인 그들은 이른 아침과 해질녘이면 물을 찾아 먹는데 그렇게 많은 수효임에도 늙은 수컷이 이끄는대로 줄을 지어 물을 먹는다고 한다. 참으로 동물계의 위계질서에 감탄이 절로 나게하는  가관이다.   △  연변에 가면 횡단보도가 필요 없슴돠.     그냥 냅다 뛰여가면 자동차가 느려가지고     사고가 나더라도 상처가 안남돠.    해외인터넷에서 류행되고 있는 연변개그다. 그저 개그로만 웃어 넘길수 없는 대목이다. 해외에서도 거론될만큼 사거리에 나서면 붉은 등을 무시한채 무단횡단을 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횡단보도가 마치 자기 집 뒤뜰인양 지축자축 노량으로 지나는 아저씨, 붉은 등을 그 무슨 모델쇼의 조명등으로 아는지 무시한채 교태를 흘리며 지나는 아가씨, 혼자서는 직성이 풀리지않는양 어깨동무 하고 무리지어 지나는 이들... 하기에 순경들이 목청깨져라 소리 지르고 곤봉을 내저으며 질서바로잡기에 마냥 드바쁘다. 그야말로 부끄럽기짝이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보행자와 자전거의 횡단보도 무단횡단은 교통사고 및 교통체증을 유발시킬뿐더러 한개 도시와 도시인들의 위상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교통부문에서 교통질서 확립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횡단보도 무단횡단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 줄을 긋는다는 것은 방향을 정해주고 기호로 만들어 조직화하는 행위이다. 줄무늬는 자연의 무질서를 질서 있게 정돈해서 정화시키고 재정비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을 접하는 횡단보도의 풍경은 줄지은 얼룩말들이 찾은 못가와도 같은 미경이 아니다. 가장 지능화 된 동물로 군림하여 만물의 질서를 규제한 인간들이 스스로 그 기본적인 질서를 흩트리고 있는것이다.   이로볼때 줄무늬도 구도적으로 잘 새겨진 얼룩말의 행동반경은 인간에게 많은것을 시사해 준다.   질서 바로잡기라는 화두는 다만 교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모두에게 부여된 구체화되고 인성화 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너나가 이 공덕의 대시험장에서 참다운 응시자의 자세를 보일때 이는 량호한 사회품질 및 개인수양의 발현으로 자리잡게 될것이다.   횡단보도, 눈과 발로 걷던 그곳을 마음으로 건너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8    아하! 헤밍웨이 댓글:  조회:3137  추천:15  2014-09-12
. 칼럼 .   아하! 헤밍웨이 김 혁       1   헤밍웨이의 경전 “로인과 바다”를 맨 처음 접하게된것은 1980년대 중기,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총서에서였다. 비정기적으로 20권 가량 간행되다 나중엔 정간되였지만 문학도 시절 나는 그 작은 총서에서 세계문학의 진수를 대량 접할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또 다른 경전작품들인 “킬리만자로의 눈”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90년대초 모두 영화로 먼저 접했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주인공 그리고리 팩은 멜로영화 “로마의 휴가일”에서 오드리 햅번과의 열연을 펼쳤던, 남자가 봐도 멋있는 끼끗한 스타로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은 히치콕크의 추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로서, 좋아한데서 두 작품을 접하게 되였다. 사실 애초의 헤밍웨이의 작품은 이렇게 어린 문학도인 나에게 있어서는 좋아하는 영상물의  주인공에 대한 팬의 시각으로 다가왔던것이다. 그후 헤밍웨이의 작품들을 제대로 다시 읽게된것은 본격적인 문학창작에 매진한 다음의 일이다. 그 명저들을 단지 열성 팬의 스크린속 우상에 대한 유흥의 시각으로서가 아니라 문학창작인의 신분으로 다시금 가슴에 새기며 읽었다.     “미국문학의 대부”로 불리고있는 헤밍웨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사후 50년인 올해말로 만료된다고한다. 하여 세계적인 헤밍웨이 작품 출간붐이 다시 일고있다. 중국에서도 헤밍웨이의 전집이 상해역문출판사(上海译文出版社)에 의해 다시 출간, 변강오지인 이곳 서점가에도 올랐다. 따라서 헤밍웨이가 또 한번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고있다. 강하고 힘찬 문필과 대담하고 공개된 생활로 유명한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는 사냥과 낚시를 좋아한 의사인 아버지와 미술에 관심 있던 어머니의 맏아들로 시카코에서 태여났다. 중학교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17년 중학교를 졸업하자 대학에 가는 대신 캔자스시티로 가서 당지주요한 신문이였던 “스타”지의 기자로 활약했다. 눈병으로 계속 군입대를 거절당하다가제1차 세계대전때 가까스로 미국 적십자사의 구급차 운전사로 참전, 이딸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었고 그 위훈으로 19세도 채안된 나이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건강을 찾은뒤 다시 집필을 시작, 1925년 최초의 단편집인 “우리 시대에”를 뉴욕에서 출간했다. 이듬해에 전쟁후의 “잃어 버린 세대”를 다룬 장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발표, 비관적이지만 활기 넘치는 이 소설 작품으로 그는 처음으로 출판계와 독자들에게 문명(文名)을 알렸다. 그동안 아들 존을 얻고 첫번째 결혼은 실패했으며 그뒤 다른 녀자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그는 빠리에 살면서 스키· 투우, 낚시, 사냥과 려행에 빠져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많은 글의 배경을 이루었다. 그는 많은 모험을 기초로 책을 썼는데 문학적인 경험을 위해서도 그러한 모험을 열렬히 추구했다. 에스빠냐에 대한 사랑과 투우에 대한 열정으로1932년 “오후의 죽음”을 창작, 펴냈는데 이것은 그가 투우를 스포츠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의식으로 보고 깊이 있게 연구해서 쓴 작품이였다. 그무렵 에스빠냐는 내전이 한창이였다. 행동파 작가로서의 헤밍웨이는 군사 독재자에 맞서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돈을 모았으며 포위된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한 희곡 “제5렬”(1938년)을 창작했다. 에스빠냐 내전뒤 그는 꾸바의 아바나 교외에 농장을 구입했으며 안해와 함께 또 다른 전쟁, 일본의 중국침략을 취재하러 중국으로 오기도 했다. 1940년 에스빠냐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 이 소설은 판매부수면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꾸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으며8년 년상의 녀인과의3번째 결혼 역시 파탄에 이르자 4번째로 런던에서 만난 통신원 메리 웰시와 결혼해 여생을 함께 보냈다. 1952년에 늙은 어부의 고독한 싸움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낸 작품 “로인과 바다”를 발표했다. 소설은 전세계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애대를 받았다. 이 작품은 1953년에 플리처상 소설부문상을, 그 이듬해인1954년에 드디여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극적인것은 그 생애의 최고의 해에 헤밍웨이는 두번이나 항공기 사고를 당한다. 두 번 다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중상을 입고 시상식에도 나가지 못했다. 그 두번의 사고로 이후 그의 특징이였던 강인한 신체와 활동적인 생활을 돌려받을수 없었다. 호탕하고 개방적이고 헌신적이였던 그는 타고난 스포츠맨으로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복잡한 생활을 했다. 만년에 사고의 후유증에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활동도 점차 막히기 시작하자 결국 1961년 아이다호주에서 렵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문학관은 전쟁과 폭력이 란무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지독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실존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간 실존의 부조리한 상황을 수긍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최고 덕목으로 치면서 희망을 념원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고있다. 20세기의 미국 작가들중 헤밍웨이가 얻은 명성을 뛰어넘은 사람은 몇명 되지 않는다.   2   그러나 헤밍웨이가 재다시 회자되면서 동시기 활동했던 작가들과의 불협화음이 뒤늦게 공개되여 충격적이다.   헤밍웨이는1920년대 미국문학의 제2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인물로 정평받고있는데 그와 함께 이 제2의 부흥시기를 주도한 인물이 또 있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이다. 피츠제럴드    피츠제럴드하면 이곳 문학풍토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우리 조선족문단에 그의 작품이 단 한편도 소개되지 않았기때문이다. 굳이 그에 대해 환기시키려면 최근 나온 영화 “벤자멘트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本杰明·巴顿奇事)”를 말하면 될것이다. 할리우드의 꽃미남 브래드 피터의 주연으로 크게 흥행을 본  영화, 이 영화가 바로 피츠제럴드의 원작을 개편한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유명 작품으로는 또 20세기 가장 뛰여난 미국 소설로 꼽히는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1920년대 미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이 소설은 “20세기 미국 현대 문학의 최고봉”, “미 대학생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 1위라는 눈부신 찬사를 받고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뒤의 미국은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는데 “위대한 개츠비”는 이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신의 풍경을 예리하고 생생하게 보여 주고있어 미국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할 작품”으로까지 꼽힌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두 작가는 프랑스 빠리에서 처음으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헤밍웨이는 이름없는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무명 작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문단과 독자들이 알아주는 유명작가였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 작품을 읽고 감명받아 그에게 싸인을 받으러 찾아가면서 처음 면목을 익히게 된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신진이였던 헤밍웨이의 문학적 재능을 혜안으로 알아보았다. 이후 그는 헤밍웨이를 등단시키기 위해 물심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조언했고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그의 작품 출판을 도왔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 소설이며 헤밍웨이의 작품중에서도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력작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였다. 헤밍웨이는 책의 부제에 "스콧 피츠제럴드의 우정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특별히 밝혀 실으며 둘 사이의 우정을 과시했다. 당시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 데뷔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다보니 정작 자신의 작품을 쓰는데는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를 만난것은 작가로서 나의 행운이였다”고 거듭 감사를 드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피츠제럴드의 생활에 금이 가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랑비벽이 심한 부인때문에 경제적 파국을 맞게 되였으며 나중에 그 부인이 정신병까지 앓게 되자 피츠제럴드의 생활고는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박록 (薄祿)의 원고비라도 벌어 생활고에서 벗어나기위해 피츠제럴드는 닥치는 대로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쓴 작품이 무려 160편에 달했다. 벼랑에 선 피츠제럴드와는 반대로 그 사이 피츠제럴드의 사심없는 도움을 발판으로 헤밍웨이는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등을 발표하며 헤밍웨이는 하루밤새에 미국 출판업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어제날 피츠제럴드의 싸인을 받으러 찾아갔던 올챙이 문학도 헤밍웨이는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어찌보면 은인격인 피츠제럴드에게 감사나 동정의 손길대신 조소와 야유의 비틀려진 입꼬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피츠제럴드가 돈을 벌기 위해 되지도 않는 작품을 쓴다고 내놓고 폄하(貶下)를 했다. 9년 만의 신고끝에 탄생한 피츠제럴드의 장편 “밤은 부드러워”에 대해서도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비록 상업적으로도 실패했지만 피츠제럴드의 소설 중 가장 감명을 주는 이 소설에 대해 헤밍웨이는 “번지르한 문장으로서 세상을 리해하지 못하며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혹평했다. 지어 자신의 그 유명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피츠제럴드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작품의 실패와 친구와의 반목으로 절망에 빠진 피츠제럴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알콜중독에 시달렸다. 그후로 내내 병고에 시달렸던 피츠제럴드는 결국44세의 나이에 요절하고말았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죽은 피츠제럴드를 “꽃가루 떨어진 나비”로 까지 비하했다. 비록 피츠제럴드가 유감을 품고 사망했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끊기지 않았다. 피츠제럴드의 사망후 그의 작품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고 헤밍웨이와 두사람은 끊임없는 비교를 당해야 했다. 헤밍웨이 역시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62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유명한 작가들의 정신과 작품과는 다른, 실제의 숨겨진 삶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위대성을 탈신화하는 작업은 찬반론란속에 계속되고있다. 명성으로 가려지고 분장된 위인들에게서 허울을 벗기고 어두운 곳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야누스적인 얼굴(Janus. 로마 신화에 나오는 성이나 집따위의 문을 수호하는 신,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과 평화를 나타내기도 한다)에 대해 연구가들은 가차없이 동전의 량면처럼 뒤짚어 보이고있는것이다. 아무리 뛰여난 작품을 내놓은 이름난 작가라 할지라도 그 역시 인간임에는 분명하다. 우리가 감탄했던것은 우선 그의 사상이며 작품이지 그의 인품과 인격이 먼저가 아닐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려낸 세계의 서술과 그가 살고있는 삶의 실제는 같은것일수가 없다. 저 위대한 똘스도이도 젊은 시절에는 도박에 깊이 빠져있었고 성병에 걸릴만큼 녀자관계가 문란했으며 로년에는 갖가지 주제로 책을 쓰고 설교를 하며 성자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그 내용은 상투적이고 고리타분할 뿐이라는 인간평도 있다. 영국의 대문호 쉐익스피어는 호색한에 량성애자라는 론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쉐익스피어 는 유부녀를 임신시킨 난봉군이였다. 바이런은 자신에게 진정한 영양분은 섹스라며 베니스에서 1년동안 자그마치 녀자 250명과 잠자리를 했다. “선량한 회색 시인”이라고 불렸던 월트 휘트먼은 섹스에 대한 로골적인 찬미로, 평론가로부터 “그 시대의 가장 불결한 짐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매우 도덕적인 작품 “작은 아씨들”을 쓴 올컷은 평생을 약물에 중독돼 살았다. 건전한 아동소설보다 에로틱하고 저속한 작품 쓰기를 즐겼던 그녀다.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톨킨은 세금 내기를 거부한 지독한 구두쇠였다. 윌리엄 포크너는 우체국장으로 일하다 다른 사람들의 우편물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이 종종 목격돼 직장을 잃은적 있다. 언감 몇몇 대가들의 이름을 언급하고있지만 이는 적지않은  작가들의 사례중의 한두 경우일뿐이다. 여기서 그들의 인간적 약점들만을 들추어 심리 (审理)하면서 세속의 자대로 그들의 전존재를 부정하려는것은 아니다. 우리의 소설사를 위대하게 만들고 몇세대 독자들에게 끊임없는 감동을 주고 있는 이들의 문학적 성과를 무의미한것으로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자는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존재가 그림자를 가져야 하듯이 그 위인들도 그림자를 숨기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이룩해낸 위대한 사상적, 문학적 세계와 그것이 세상에 끼친 거대한 영향은 절대 폄하하지도 못한다. 다만 그들의 문학생애중에 왜 그런 배리적 모습도 보였는지  우리의 학자들이 심입되게 더 연구하고 우리 독자들이 숙고할바이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헤밍웨이 닮은꼴 찾기 선발대회”가 열린다고한다. 이 선발대회는 헤밍웨이 탄생일인 7월 21일을 기념해 매년 7월 이면 열리는 “헤밍웨이의 날” 축제의 하이라이트이다. 번마다 100여명이 되는 참가자들은 헤밍웨이가 생전 즐겨 찾던 “슬로피 조바”라고 하는 술집에서 선발 경쟁을 벌린다. 이 술집에서 헤밍웨이가 “무기야 잘 있거라”를 집필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가자들은 그처럼 다복솔같은 수염을 기르고 그가 생전에 즐겨 입던 옷차림을 하고 낚시대를 든채, 혹은 렵총을 든채 닮은 꼴에 도전한다. 참가자들은 지어 지글지글 끓는 한여름에도 그가 겨울이면 즐겨입던 굵은 실 스웨터를 입고 땀을 벌벌 흘려가면서까지 자신들이 애대를 하는 위인의 모습에 한결 다가가자고 한다. 느닷없는 비화(秘話)로 우리들을 혼란케하는 헤밍웨이, 그런 헤밍웨이가 아닌, 진정 우리들의 머리와 마음을 선점(先占)했던 그 엘리트적인 모습의 헤밍웨이의 닮은꼴에 다가가고 싶다.   “도라지” 2012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헤밍웨이의 작푸을 각색한 영화 "로인과 바다"주제곡  
27    [월드컵 別曲- 4]패자만가(敗者挽歌) 댓글:  조회:3345  추천:11  2014-07-16
월드컵 별곡(別曲)- 4 패자만가(敗者挽歌)   김 혁   그라운드를 누비며 왕자(王者)의 기염을 토하던 강호탐들의 줄에 줄을 이은 탈락은 이번 월드컵의 가장 큰 이슈였다. 2010 남아공월드컵 챔피언인 에스빠냐팀은 이번 대회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러나1차전 화란전에서 유례 없는 1-5 대패를 당하면서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했던 칠레전마저 0-2로 패하면서 조별리그 2경기 만에 탈락이 확정되고 말았다. “축구 종가”로 불리던 잉글랜드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56년 만의 탈락, 그야 말로 축구 종가의 몰락이다. D조 이딸리아와 코스타리카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코스타리카는 웃었지만 잉글랜드는 울었다. 2패를 당한 잉글랜드는 이딸리아가 승리해야만 16강 진출의 희망을 밝힐수 있었지만 코스타리카가 승리하면서 16강 탈락을 확정했다. 주최국인 브라질도 몰락했다. 독일전에서 1-7이라는 대참패에 이어 3-4위 전에서 자존심 회복을 꿈꿨지만 또 다시 0대3으로 화란에 무너진 브라질은 “축구제국”이라는 위상의 실추와함께 력대 최악의 경기로 월드컵을 마무리 지었다. 충격적인 참패에 주최국의 자호감을 머금었던 브라질 관중들은 허탈해하거나 울부짖었다. 한 중년 녀성은 경기 결과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월드컵이 막을 내리던 날, 브라질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남녀노소 모두 울었다. 팬들은 물론 선수들까지 모두가 망연자실, 넋 나간 표정이였다. 온 국민이 패닉 상태에 빠진 가운데 호세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슬프고 안타깝다"며 "브라질이여, 다시 털고 일어나자"고 허탈감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여 나섰다. , 경기장에서의 희비가 엇갈린 승자와 패자의 형국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도식적인 경쟁구조속에서 결과에 따라 아퀴를 지어야 하는 경기장은 비정하고 잔혹하다. 당연 승자는 성공이요, 패자는 실패라고 본다. 우리는 흔히 승자에 환호하고 승자를 칭송하며 승자의 미덕을 배우려 한다. 리해와 위무가 수요되는 패자에 대해서는 외려 타매하고 조소하기가 일쑤다. 승자의 화단에 화려한 이름을 새긴 이들보다는 패자의 회한을 간직하고 눈물을 씹어삼키는 이들에게 더 눈길을 주어야  할턴데 세상사가 어디 그렇던가? 운명의 조화에, 더 강한 자에 가로막혀 꿈을 접어야 했던 패자는 사실 타매의 대상이 아니며 패배는 결코 수치로만 락인찍을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자세가 중요하다. 하여야만 다시금 새로운 승리를 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수 있을뿐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한 자세를 준비할수 있다. 한번 승자는 영원히 앞서고 한번 패자는 영원히 뒤쳐진다고 정해져 있지 않다. 다시 일어설수 있다, 할수 있다고 일심 하나 품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결국 승자이다. 우리앞에는 실패에 인내하면서 재기하여 의지의 인간상을 보여준 위인과 고사가 많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내려앉은 그늘속에 자포자기하지말고 그 무겁고 참담한 너울을 헤치려고 다시 몸을 솟구칠때 비로서 다시금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는 찬란한 빛무리를 볼수 있을것이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    [월드컵 別曲- 3] 월드컵을 보며 로자를 생각하다 댓글:  조회:3341  추천:13  2014-07-15
월드컵 별곡(別曲)- 3   월드컵을 보며 로자(老子)를 생각하다   김 혁 25일, 16강 진출이 걸린 티켓을 두고 맞대결을 펼쳤던 이딸리아와 우루과이의 경기에서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어처구니가 벌어졌다. 팽팽하던 후반전 경기에서 우루과이 선수 수아레스가 그 무슨 독 오른 강아지처럼 상대 선수인 키엘리니의 어깨를 물어뜯었던것이다. 수아레스는 선제골이 들어가기 직전인 후반 33분 경 이딸리아 수비수인 키엘리니와 몸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키엘리니의 어깨를 이로 깨물었던것이다. 키엘리니의 어깨 살갗에 는 수아레스의 치렬이 명확하게 찍혔다.     수아레스의 렵기적인 행동은 전 세계 축구팬들을 경악케 했다. 이를 팬들은 “핵이빨 사건”이라 부른다.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패러디 영상들이 륙속 올라오고 있다. 패러디속에서 팬들은 수아레스에게 사나운 강아지에게 씌우는 입마개를 씌우기도 하고 수아레스의 이빨을 병따개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또 년말 총결산에서 수아레스는 월드컵 트로피 대신 이빨로 만든 금상을 수상한다. 월드컵이 마무리되고 총결하는 시점에서 이번 월드컵의 각종 사건사고의 톱은 단연 “핵 이빨”로 꼽혔다. 국제축구련맹은 수아레스에게 아홉차례의 경기출전 정지와 4개월 간 축구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금지시켰고  벌금 10만 스위스프랑(인민페 약 600만원) 등의 중징계를 내렸다. 수아레스는 우라과이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잉글랜드의 프로 축구 득점왕에도 오르는 등 전성기를 맞은 선수이다. 꼴을 넣는 감각이 “메시와 필적한다”는 격찬을 들을 만큼 유망주였고 부상 중인 상황에서도 놀라운 활약으로 우루과이를 16강에 올려놓았다. 그런 유망주가 화급한 성격과 기행으로 사랑하던 잔디밭에서 축객령을 받게 된것이다. 수아레스와 비견될만한 인물이 또 있다. 미국 전 프로복싱 우승자 마이크 타이슨이다. 1997년의 어느 한 경기에서 타이슨은 상대선수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는 력사에 남을 기행을 벌였다. 중징계와 여론의 타매속에 침체되였던 타이슨은 그후 수차례의 복귀전을 가졌으나 련전련패했다.   혹 동에 닿지않을 련상일는지는 모르지만 월드컵을 보면서 도가의 창시자인 로자(老子)에 관한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로자의 스승은 상용(商容)이란 사람이였다. 스승은  림종을 앞두고 마지막 강의 자리를 마련하고는 로자에게 하나의 과제를 던졌다. 상용은 로자에게 이가 다 빠진 합죽이를 벌리며 물었다. "내 입속을 보거라. 혀가 있느냐? 아니면 이발이 있느냐?" 이에 로자는 스승이 가르치고저하는바를 인차 느껴 알아냈다.    "스승님의 치아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 남아있는 것 아닙니까?" 상용이 머리를 끄덕였다. 로자는 이미 거친 세상에서 생존하는 법을 깨우치고 있었던것이다. 로자가 살던 시대는 중국 전역에 군웅이 할거해 천하를 얻기 위한 싸움이 치렬한 란세였다. 그런 혼란의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갈수 있는 처세술을 익히고 제시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도덕경(道德經)을 쓴 로자였다. 무한경쟁이 과열화되고있는 세상을 살고있는 우리는 쇠도 씹어 먹을 만큼 강한 이빨을 가져야 생존할수 있는것으로 알고있고 또 그렇게 매일이고 자신을 추스리고 있다. 하지만 고사나 우리 신변의 에피소트에서도 보면 실제 그렇게  강용했던 이들이 외려 남보다 빨리 경쟁의 무대에서 사라진 경우도 많다. 이발과 혀의 고사가 던져주는 생존리치! 경쟁이 백열화되는 월드컵 경기장에서 잠간 곁가지를 쳐본 생각이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5    닭울음소리 한 가닥 들을작시면 댓글:  조회:5548  추천:16  2014-07-14
. 잡문 .    닭울음소리 한 가닥 들을작시면   - 을유(乙酉)년 잡감   김 혁         이 세상 닭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싶었던 때가 있었다. 소학시절 《밤중에 우는 닭》이란 소책자를 보고서였다. 빈하중농들의 고열을 더 짜내기 위해 지주 놈이 신 새벽에 닭장으로 기여 들어 자는 닭을 들쑤시면서 닭울음소리를 내게 하다 들통이 났다는 아동이야기. 문화대혁명의 여파에 국민모두가 환혹(幻惑)에서 깨지 못한 풍토에서 그 이야기는 붉은 홍소병 이였던 나에게 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본격적인 기자로 발탁되기 전까지 내가 하고있던 일이 양계장부란공이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적다.연길의 동광양계장에서 1년 남짓이 달걀을 깨웠었다. 밤잠을 바로 자지 못하면서 부란기 속의 달걀들이 열을 고루 받도록 반시간에 한번 꼴로 달걀을 번져놓는 따분한 짓거리, 몹시 힘들었던 나는 달걀이 깨나는 시간이 21 일 이여서 망정이지 인간처럼 열 달이 아님에 안도를 머금었었다. 그러나 그런 경력 때문에 닭과 나 사이는 여느 때보다도 그 누구보다 도타워 졌다. 지금도 혹시 슈퍼에서 들렸다가도 가금 알 매장에서 나는 달걀을 손에 올려놓은 채 멍청하니 회심의 미소를 짓기가 일쑤다.   올해는 닭의 해   닭이 사람들과 친해진 지는 약 5 천년쯤 된다고 한다. 닭은 야계(野鷄)가 원래 종자였다. 인도나 동남아지방에서 맨 처음 야생 멧닭을 잡아다 사육 개량한 것으로, 우리민족에게는 6,7세기에 들어온 것으로 문헌은 전하고 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도 꼬리 긴 닭이 등장하는데 삼국시대 이전부터 길러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이나 《후한서》《해동력사》에는 조선에서는 꼬리 긴 장미계(長尾鷄)를 키운다는 기록이 있으며 닭을 부를 때 《구구 라고 한다》고 씌여있다.  고대 인도사람들은 고구려를 《쿠쿠테 에스바라》라고 불렀던 바, 범어(梵語)로 쿠쿠테는 닭, 에스바라는 귀(貴)함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닭을 서조(瑞鳥)로 여겼다. 어둠 속에서 려명을 알리고 빛의 도래를 예고하기에 천조이고, 태양의 상징으로도 인식되어 왔다.《주역》에서 봐도 그렇다. 닭은 팔괘(八卦)에서 손(巽)에 해당하고, 손의 방위는 남동쪽으로, 려명이 시작되는 곳이다. 중국의 《회남자(淮南子)》에서도 《해 뜰 때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따라서 운다》고 하여 닭이 새벽을 알리는 령물임을 밝히고 있다.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닭의 울음소리로 시각을 알곤 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면 닭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하여 뫼를 짓고 제사를 거행했다. 고려시대에는 시보용(時報用)으로 궁중에서 닭을 길렀고 또 먼길을 떠날 때 시간을 알기 위해 몸집이 작은 당닭을 갖고 갔다는 기록도 있다. 침계(枕鷄)라고 하는 아주 작은 닭이 있어서 속이 빈 베개 속에 이 닭을 넣고 자면 자명종처럼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려 준다고 했다.    닭이 벽사( 邪)의 능력을 갖는다는 속신(俗信)도 그에서 발상 된 것이다. 사람들은 동이 틀 때 횃돼에 올라가 새날이 옴을 예고하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어둠이 끝나 밤을 지배하던 마귀나 유령도 물러간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액막이나 재앙 쫓기에 닭이 많이 등장했다. 새해를 맞은 가정에서는 닭이나 룡, 범을 그린 세화(歲畵)를 벽에 붙여 잡귀를 쫓고 액이 물러나기를 빈다. 닭 머리를 문설주에 매달거나 닭 피를 집 주위에 뿌리기도 했다. 한편 복날 닭을 먹는 것도 삼복의 류행병을 막자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새벽에 닭의 울음이 열 번이 넘으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고 닭이 제때에 울지 않으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닭은 출세와 공명(功名)을 상징하는 그림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은 서재에 닭의 그림을 높이 걸었다. 닭이 이고 있는 볏은 관(冠)과도 흡사한데 관을 쓴다는 것은 바로 벼슬한다는 뜻, 그리고 수탉, 즉 공계(公鷄)의 公과 功의 음이, 울음 운다는 鳴과 名의 음이 같은 데에 착안해서 서로 련상시킨 것이다.   결혼식 초례상에는 반드시 닭이 필요하다. 혼인은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평생 의례인데 이때에 닭이 등장하는 것은 처자를 잘 보살피는 수탉의 도리와 알을 잘 낳고 병아리를 잘 키우는 암탉의 도리를 부부가 되는 이들에게 인지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본다.   닭은 사람과 늘 함께 하는 가축이므로 그와 관련된 속담도 많다. 닭에 관한 속담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있다.     《소 닭 보듯 한다 》《닭 싸우듯 한다》《닭도 제 앞 모이는 긁어먹는다》《닭의 볏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마라》... 외에도 닭대가리라는 말은 사려가 깊지 못하고 지혜가 얕은 사람을 비꼬는 말이요,닭 고집이라는 말은 하찮은 일에 고집을 부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가고 옴을 상징하는 닭의 울음소리는 인간에게 온갖 희비를 엇갈리게 하면서, 우리의 민속과 문학 작품에서 많이 형상화되고 있다.   닭아, 닭아 우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기는 섧지 않으나/ 의지 없는 우리 부친 어찌 잊고 간단 말인가 !   고전소설 《심청전》에서  공량미 300석에 팔려 가는 심청이가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자탄하는 장면이다.    고기가 귀했던 옛날, 따로 먹이를 주지 않아도 지렁이 메뚜기 따위의 벌레와 갖가지 식물의 씨앗들을 주워 먹으며 자라서 살이 오지게 붙은 닭은 가난한 서민들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고기 밑천이었다.약효도 우수하여 명나라의 본초학자 리시진은 《본초강목》에서 《중국사람들은 조선 닭이 좋다 하여 이를 구하러 조선으로 나들이를 간다》고 적었다. 《동의보감》에서는《닭고기는 허한 것을 보 하는데 매우 좋아서 음식으로 병을 치료하는 처방에 많이 사용된다.》고 하였다.   그중  일미가 삼계탕이 아닌가 싶다. 우리 조상들은 지친 몸을 보 해주고 내장을 따뜻하게 하여 기운을 끌어올리는 좋은 음식인 삼계탕으로 삼복더위에 떨어진 원기를 되살렸다.    펄펄 끓는 뚝배기 속에 보얀 국물, 인삼과 찹쌀, 밤, 대추를 닭의 밑에 넣고 푹 고아 우러난 삼계탕, 그 맛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류는 어느 소설에서 삼계탕을 최고의 음식이라 극찬하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젓가락을 갖다대면 껍질이 벗겨지고, 살이 뼈에서 떨어져 나와 쫀득하고 하 얀 덩어리로 변한 찹쌀과 함께 수프 속에 녹아든다. 봄에 녹아 내리는 빙 산처럼...》   아무튼 닭은 약용으로나 고기 맛으로나 그 가치가 뛰여날 만큼 우리한테만 주어진 소중한 보물이다.    요즈음에 와서 시골이나 유원지 같은 곳에 토종닭으로 곰을 해주는 음식점을 흔히 볼 수 있다. 연길에서도 북쪽으로 교외를 벗어나 대성이라는 촌마을에 이르면 닭곰을 해주는 집이 저 그만치 50여 집, 《닭 미식 촌》으로 불리고 있다.   닭에 대한 기문취담   세상에서 가장 알찬 사업은?    - 알(계란)장사  세상에서 가장 야한 닭은?      - 홀딱(닭) 닭은 닭인데 먹지 못하는 닭은? - 까닭                  세상에서 가장 급한 닭은?      - 후다닥(닭) 숨이 넘어가는 닭은?           - 꼴까닥(닭) 병아리가 제일 잘 먹는 약은?   - 삐약      딸애가 재밌다며 내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올렸던 유머이다. 여느 짐승처럼 닭에 대한 기문과 취담은 많고도 많다.     닭에 대한 애착은 다만 우리 민족만이 있는 것 아닌 것 같다. 닭에 대한 끈끈한 인연을 가진 나라가 있다. 프랑스다.   프랑스 인은 원래 골 족이라고 하는 프랑크족의 한 부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여기서 골(Gallus)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닭이라는 뜻이다. 중세 시대, 골의 닭은 종교적인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고 집정내각에서 사용한 식기와 국새(國璽)에서도 닭은 새겨져있었다. 그것은 희망과 믿음을 상징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집정하면서 닭은 홀대를 받았다. 그는 닭보다 독수리를 즐겼다.《닭에게 무슨 힘이 있겠소. 그런 작은 미물이 프랑스와 같은 제국을 상징할 수 없소.》이것이 나폴레옹님의 지론이다. 나폴레옹에게 멸시 당하던 닭은 제3공화국에 이르러 거의 공식적인 상징으로 되였다. 국민 근위대의 깃발과 의복 단추에도, 19세기말에 건설된 엘리제궁의 철책에도, 20프랑 짜리 금화에도 모두 닭의 모습이 주조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는 4년간에 걸친 독일군의 점령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당시 닭의 용기를 빌어 항독운동에 나선 프랑스인의 담을 북돋기도 했다. 닭이 나치스의 독수리와 맞서 싸운 것이다.   근래에는 특히 스포츠 행사를 위시하여 해외에서 프랑스를 환기시킬 때 주로 사용된다.   일본과 우리 민족사이에도 닭을 두고 벌린 력사적인 암투가 있었다.    한일합방 직전에 조선에서는 일본에 보급되던 백색종자 닭을 들여와 민간에 나누어주고 기르도록 장려했다. 그러나 곧 나라가 일본의 마수에 떨어지자 뜻 있는 우국지사들은 《본디 흰 닭은 귀신으로 둔갑을 잘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울긋불긋한 조선 닭을 기르던 사람들은 흰털의 일본 종을《왜 닭》이라고 부르며 일본 사람을 보듯이 싫어했다.     몇 해전 중앙TV에서 보았던 기사 하나가 떠오른다. 서북부 신강일대가 메뚜기 떼의 습격을 당했다. 하늘땅을 가맣게 메우며 덮친 메뚜기 떼는 평방 당 4,000마리나 되었다. 예산이 부족해 항공방제를 하지 못하게 되자 지혜로운 사람들은 닭을 풀었다. 1만 마리나 되는 닭 장군들이 메뚜기 소탕전에 나서 인간과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지켜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즘의 취담을 들어보면, 미국에서는 해마다 기발하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연구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이그 노벨상》이라는 패러디 노벨상이 있다. 뉴욕의 과학유머잡지에서 선정하는《이그 노벨상》은 품위가 없이 천하다는 단어와 노벨이라는 단어를 합친 신조어.   이 잡지의 편집인은  《과학자들 가운데 노벨상을 결코 수상하지 못할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며《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과학적 흥미를 유발하고 과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었기에 이 상을 설립했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올해의 《이그 노벨상》은 《닭은 멋진 외모의 남성과 녀성을 좋아한다》는 연구를 수행한 스웨덴 스톡홀름대의 매그너스 연구팀이 차지했다.   이들이 닭들에게 많은 인물사진을 보여준 결과 닭은 건장하고 잘 생긴 남성과 긴 머리에 도톰한 입술을 가진 잘 생긴 녀성만을 쫓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리상형을 보는 눈에서 사람과 닭이 비슷한 기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게 이 연구팀의 연구결과.    닭과 함께 춤을    닭은 흔히 다섯 가지 덕(德)을 지녔다고 칭송된다.   머리에 있는 볏(冠)은 문(文)을 상징하고, 삼지창 같은 발은 내치기를 잘 한다 하여 무(武)로 여겼으며,적과 용감히 싸우므로 용(勇)이 있다고 하였고, 먹이가 있으면 자식과 무리를 불러 먹인다 하여 인(仁)이 있다 하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간을 알려주니 신(信)이 있다 하였다. 게다가 우리 인간에게 알과 고기를 주니 그보다 더한 익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조상들의 생각이었다.    닭은 다른 가축에 비해 취소(就巢, 알을 품음)성이 강하다. 몸은 작지만 한꺼번에 20알 정도를 품어 부화시킬 수 있다. 알을 품으면 매우 열심인데 식음을 끊고 뜨거운 가슴으로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새매 따위의 육식 새들이 병아리를 낚아채려 들면 급하게 새끼들을 불러 품안으로 모으고 만약 병아리가 새들의 발톱에 걸려들면  어디에 그런 힘과 용기가 숨어 있었던지 날개를 푸드득 이며 크게 싸움을 벌인다.《암탉이 제 새끼를 품안에 모으듯 한다》는 말은 바로 지극한 모성애를 상징하는 말이다.    다산 정약용은 닭의 그런 모성에 감격하여 《어미 닭과 병아리》라는 시를 지은 적 있다.   제 새끼를 건드리면/목털은 곤두서서/ 고슴도치를 닮았네/ 낟알을 찾아내면/ 쪼는 체만 하고/ 새끼 위한 마음으로/ 배고픔을 참네   사실 닭처럼 부지런한 동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모이를 쪼지 않고 멍하니 있는 닭을 본 적이 별로 없을 것이다. 알을 품을 때와 홰를 치며 울 때 정도만 빼 놓고는 하루 종일 먹이를 먹으러 고개를 조아리며 다닌다.    또한 수탉은 그 자부심과 사나움,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점을 닭싸움이라는 일종의 스포츠에 활용해왔다. 볏을 곤두세우고  상대에게 용감하게 달려드는 모습에서 닭의 강인함과  용맹성을 찾을 수 있다.   또 수탉이라는 이름은 남성의 성적 능력을 상징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수탉은 남성이 갖춰야 할 조건인 가정을 지키려는 용기와 시간의 변화를 판단하는 현명함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리상적인 남성 상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생태학자인 데스먼드 모리스는 닭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닭은 자연상태에서는 고도로 사회적인 동물로서 농장이나 야생지, 모이통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흔히 《쫓기서렬》로 알려진 사회적 위계(位階)질서를 발전시킨다. 자기보다 우인 닭에게는 복종하고, 아래인 닭은 거느리는 것이다. 개개 닭들이 무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하는데, 많게는 90마리의 무리에서도 그 서렬이 유지된다고 한다. 닭은 한낱 흙 속을 헤집고 뒤져 벌레와 풀 따위를 알아서 찾아 먹는 놓아먹이는 새이다. 하지만 그들은 해와 바람과 별을 알았다. 이는 자연순환에 깊이 조률돼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이들에 비추어 볼 때 혼란에 허둥대는 우리의 사회적 위계와 질서는 극히 중요하다.    해가 바뀔 때마다 누구나 다음은 무슨 띠의 해인가 살피고 그 띠 동물에서 새해의 운수를 예점(豫占) 하려 한다. 새로운 띠 동물을 대하면서 그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어떤 새로운 기대를 걸어 보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올해에는 을유년 닭의 해, 우리모두 시간을 알리는 닭처럼 새끼를 품는 닭처럼 새매와 싸우는 닭처럼,자부심을 지니고 사랑을 알며 신의를 지키는 강인한 인간으로 자신을 가꾸어 봄이 어떨가!    불교에서는 닭을 깨달음의 주체를 지닌 동물로 여기고 있다. 닭울음소리에 귀기울인 서산대사의 일화가 그 일례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70의 나이로  승병을  모집하여 서울을 되찾는 데  공을 세운 승려.  큰 의문에 부닥쳐 울증(鬱症)에 빠져 있던 서산대사가 하루는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낮닭이 홰를 치며 크게 울었다.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대사는 의문이 풀리면서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대사는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홀연히 본래의 내 집을 얻고 보니(忽得自家底)/모든 것이 다 이러할 뿐(頭頭只此爾) 천만금의 보배도(萬千金寶藏) 본래 한 장의 빈 종이일 뿐이로다. (元是一空紙) 이제 외마디 닭 울음소리 들을작시면 (今聽一聲鷄)/장부의 할일 모두 마쳤어라(丈夫能事畢)      대사의 이 시구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바라나니 을유년 닭 해를 맞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짧은 닭 울음이 깨달음의 기연(機緣)이 될진저.     - 원숭이해를 보내면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4    [월드컵 別曲- 1] 자책꼴 댓글:  조회:3576  추천:13  2014-07-11
    수십년간의 기자생활중에 짧으나마 스포츠기자도 겸했던 리력이 있고하여 축구에 대해 꽤 즐기는 편이다. 하여 2006 독일월드컵때부터 월드컵때마다 빠치지않고 관련 칼럼 시리즈를 써왔었다.  하지만 전문가들 앞에서는 “로반문전농대부(魯班门前弄大斧)”라 즉, 대목수 로반의 문전에서 큰 도끼를 자랑할 어설픈 짓거리가 두려워 경기전반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나 예견 대신 월드컵을 둘러싼 사회이슈나 문화적 분위기에 대한 잡감들을 주로 써온것이다. “푸주간에서 앞에서 고기 먹는 시늉만 해도 낫다. (자기가 원하는것은 설사 이루지 못하더라도 생각만으로도 즐겁다는 뜻.)”는 궁냥으로 써오던 그런 잡감들을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미처 쓰지 못했다. 밀려있는 잡지사들의 소설원고 청탁건때문이였다. 하지만 컴퓨터의 메인 화면을 월드컵 경기일정표로 깔고 새벽잠에서 깨여나 눈시울 집어뜯어가며 경기들을 보노라니 환음이 절로 터져나오는 현란하기 그지없는 경기들과 경기장밖 이슈들은 나로하여금 월드컵 막바지이나마 또 다시 글로 적어내려갈 충동을 금할수 없게 하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신나는 월드컵 주제곡 "위아 원"의 신명나는 곡조에 맞추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역시 전문과는 거리가 먼 잡감이라 스스로 “별곡”이라 시리즈의 부제를 칭해 둔다.     월드컵 별곡(別曲)- 1   자책꼴   김 혁   자책꼴, 축구경기에서 실수로 자기편에 공을 넣어 외려 상대편에게 점수를 주는 경우를 가리켜 말한다. 중국에서는 오룡구(乌龙球)라 별칭하기도 한다. “오룡구”는 성구 “자파오룡(自摆乌龙)”에서 비롯된 말이다. 옛날옛적에 수년간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하늘 우러러 무릎꿇고 룡왕에게 비를 내려 줍시사 비손질을 하였다. 그러자 푸른 청룡이 나타나 비를 흠뿍 내려 주었다. 사람들이 감격해 마지 않는데 이번에는 검은 룡이 나타났다. 그런데 검은 룡은 비를 내리는 재간이없는지라 그저 하늘땅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훼살을 주기만 했다.   “오룡구”는 자기편에 오히려 훼살을 주는 검은룡이라는 은유로 재해석된것이다. 짙어가는 여름의 열기와 더불어 시작된 2014브라질월드컵의 개막전은 어쩌구려 자책꼴로부터 시작되였다. 브라질과 크로찌아의 개막전에서 전반 11분에 브라질의 수비수 마르셀로가 자책꼴로 5만여 명 주최국의 홈장 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다행이 브라질은 인차 한꼴 넣어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고 추가꼴도 넣어 최종  3대 1로 역전승을 거뒀다. 첫 경기서 하필이면 자책꼴로 주최국으로서의 실추될뻔한 체면을 돌려세운것이다. 력대 월드컵경기에서 자책꼴이 대회 첫 꼴이 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책꼴이 선수에게 주는 압력은 크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꼴롬비아 축구선수 안드레스 살다리아가 자책꼴을 넣었는데 며칠후 한 나이트클럽에서 축구팬에게 총격을 받아 살해되는 비극이 일기도 했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유난히 자책꼴이 많이 나오고 있다. 16강전이 끝날때까지만도 무려 5개의 자책꼴이 나왔다. 이는 기존 월드컵에서 최다 자책골이 나온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6년 독일 월드컵의 기록 4개를 경신했다고한다. 마르셀로   여기서 실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실수는 어디로 튈지 예측이 어려운 축구공과도 같다. 땀동이를 쏟으며 정성을 다한다해도 자칫의 깨알같은 실수가 커다란 실패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살면서 이러저러한 대소실수를 저지를수 있다. 하지만 요즘 처럼 실리주의에만 얽매여 눈에 보이는것만 전부로 생각하고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실수는 용납못할 대죄로 치부되기가 일쑤다. 그렇다고 한순간의 실수를 자탄해 오금을 꺽어서는 안된다. 실수는 자아를 위축시킬수 있지만 반대로 그 실수를 볼수있게하는 눈과 확대된 경험을 준다. 실수를 정시하면서 일어설때야만 다시 그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되는것이다. 다 아는 격언과도 같이 “실수라는 나무에는 두 가지 열매가 달린다. 실패라는 쓰디쓴 열매와 성공이라는 빛 좋고 맛있는 과일이다.” 실수를 딛고 일어나 그 실패가 승패를 위한 변주곡 전주곡으로 되게 해야한다. 월드컵의 열기와 함께 인터넷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월드컵 응원곡인 “위아 더 원We Are The One”이라는 노래의 가사말이 바로 실수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위해 꼭 걸맞는 노래가 아닌가 한다.   실패해본 자만이 (오!) 역전의 맛을 아니   짓밟일 수록 (하!) 또 다시 일어나 잡초같이 넘어질순 있어도 쓰러질수는 없어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고개숙인 친구여 심장 뛰고있다면 뛰여라 뛰여라 뛰여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3    악플러들의 초상화 댓글:  조회:5480  추천:20  2014-06-09
칼럼 시리즈    악플 유감(有感)- 3   악플러들의 초상화 김 혁      “악플러”란 다른 네티즌의 글에 악의적인 욕설이나 비방의 악성 리플을 다는 네티즌을 일컫는 인터넷 신조어이다. “악플족”이라고도 부르며 축구류망들을 가리키는 “훌리건”과 합성해 “인터넷 훌리건”이라고도 하고 네티즌과 훌리건을 합쳐서 “네티건”이라고도 부른다.   악플을 지속적으로 다는 악플러들의 비루한 행각은 자신의 상태나 욕구를 알리고자 하는 과시욕과 사람들의 반응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변형된 심리의 발현이다. 그 행각들을 보면 흔히 스트레스 해소에서 시작되여 감정표출, 그리고 이목집중, 중독, 공격으로 이어진다.   사회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퇴근후 집에 돌아와 쓰게 되는 악플로 인해 풀었다는 실제 악플러들의 진언이 있다.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답답한 감정을 욕설이 담긴 공격성 댓글로 해소하려고 하는 비뚤어진 생각에서 악플달기를 시작한것이다. 이들은 사회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피해의식때문에 사소한 자극에도 흥분하면서 악플을 달면서 비로소 가련한 자신에 대한 위무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이는 왜곡된 사회심리적 행동이다. 이런 부류는 흔히 내면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다.   성격, 질투, 일상에서의 마찰등의 원인으로 자신이 특별히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악플을 다는 경우가 그중에서도 비교적 많다. 이들은 악플을 통해 그 상대를 파괴시켰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화난 모습을 련상하거나 확인하며 위안을 얻는다. 상대방이 자극을 받고 크게 흥분할수록 쾌감을 느낀다. 인기가 많고 영향력이 큰 사람을 공격할수록 자신의 위치 역시 높아지고 그와 동급이 된다고 착각한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단순히 사람들의 이목 집중을 즐기는 사람들이 악플을 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자신이 쓴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더 튀고 조금더 자극적인 내용을 써야하기에 과장, 기만과 요언으로 가득찬 악플을 선택하게 되는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의 론리를 펼치는 글에 대한 반박을 하기 위해 악플을 쓰는 경우도 아주 많다. 모든 글에는 반대의 의견이 있을수 있으며 건전하고 건설적인 론쟁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악플은 그 도를 넘어서 내용을 무시한채 글쓴이에 대한 비방과 인신공격으로 얼룩진 댓글을 말한다. 이들은 흔히 자신의 생각과 가치만 옳다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독선가” 류형이다. 때문에 이들과 반대의 지점에 서있는 사람들은 설득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말살과 타도의 대상일 뿐이다. 반대의견에 경청할 내심한 귀가 이들에게는 갖추어져 있지않다. 그러니 그저 자신의 생각과 가치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헐뜯기에만 급급해 하는것이다.   이제는 우리들의 싸이트에서 어디를 가더라도 이런 “악플러”들과 마주칠수 있다. 그들은 상대가 녀성이던 어린 아이던 로인장이던 사회명류던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문인으로서 정말로 참괴를 머금을수밖에 없는것은 우리의 싸이트들에서 다른 코너에 비해 문학코너에서 그 증세가 심각하다는것이다. 지난 수십년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에서의 “문인상경”이 온라인에서도 여전히 이어져나가고 있으며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더 광증증세를 보이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인들지간의 훈훈한 덕담과 교류는 오간데 없고, 문인들에게서 가장 큰 희사인 신작이 발표되거나 신간이 출간되고 상을 수상하면 축복대신 외려 악플러들의 공격을 받는다. 문학의 위상이 바닥에 떨어진 오늘날 “동병상련”의 처지인 문인들끼리 외려 자기가 골라낼수 있는 가장 극악한 말들만 골라내여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질하고 인신모욕을 퍼붓는다. 신간이 나왔거나 상을 수상한 사람들끼리 축하의 기쁨대신 “이제 또 인터넷에서 한바탕 난리겠구만”하고 고소(苦笑)를 머금는 이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남의 희사때마다 기쁨을 동조할 대신 외려 훼살부터 지으려는 이 작태, 참말로 어처구니 그 자체다. 지어 가슴아픈 지인의 타계소식에, 불치병의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이에 대해서까지도 악착같이, 극악하게 달리는 “흡혈 거마리”같은 악플들을 보고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한적이 있다. 입으로는 유식한 말마디를 내뿜고 원고지에는 아름다은 말마디만을 적어내릴 이들이 인터넷 저켠 배후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을지 그야말로 호러영화의 한장면처럼 등짝에 소름이 돋도록 서늘해 짐을 금할수 없었다.   물리적으로 당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하지만 언어로 인한 폭력은 약도 없고 때로 회복하기 힘든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의 동료, 지인들에게서 오는 상처일때는 그 마음의 상처는 배가가 된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악플들을 보면서 단순히 넘어갈 문제가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 두말할것도 없이 악플은 표현의 자유라기보단 리성적 판단을 못하고 감정에 치우친 배출이라고 볼수 있다. 다는 이들은 일시적인 감정의 표출로 혹은 유희의 감정으로 손쉽게 달겠지만 그 악플을 받은자의 고통은 상상할수 없을만큼 크기 때문이다. “악플러”들은 자신의 본능에만 사로잡혀 과대망상적이며 비륜리적,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나 량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들의 인생을 부숴버린다 그러한 악의적인 비방과 욕설이 인터넷에 넘쳐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들이 해외에서는 비일비재로 생겨나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전체 악플의 절반가량을 5%에 불과한 소수의 악플러가 채운다는 한 연구조사 결과가 있다. 대부분의 네티즌은 좋은 댓글이나 혹은 그저그런 댓글을 단다는것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듯”이 그 “소수”가 큰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이 소수“악풀러”들의 출현은 인터넷 세상과 우리 사회가 낳은 병리현상이다. 실제 카나다 연구진에 의해 악플러들은 사디즘(상대방에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이상 성욕) 등 정신 이상 성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악플러들은 사디즘, 이상인격,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의 성향을 가질 확률이 남들보다 높다”고 연구진은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연구팀은  “악플러들은 뚜렷한 목적도 없이 기만적이고 파괴적이며 분렬적인 행동을 일삼는다”고 지적했다. 인터넷공간에서 불신과 싸움만을 부추기는 이 극소수의 “악플러”는 인터넷의 “종양”과 같은 존재이다. 이들의 류형에 대해 면밀히 분석해 내고 무시하거나 비판하거나 적극적인 차단을 통해 고립시켜 버려야 한다. 두절시켜버려야 한다. 추방시켜버려야 한다. 비루하고 단순한 욕망에 꺼둘린 그들의 행각이 어사망파(鱼死网破), 나아가 우리가 함께 합승하고 있는 배가 침몰하는 비극의 형국을 초래할수 있을터이니… 지금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악플을 달고 있을 “악플러”들, 낭떠러지로 향한 키보드의 질주를 멈추기를 권고하고 싶다. 하루 아침에 인터넷 공간에 깊숙히 파급되여 있는 그 “종양”을 도려 낼수 없듯이 이 유감과 참담으로 가득한 작은 글에도 악플은 반드시 달리리라는 무가내를 금치못하면서 말이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2    인터넷 마녀사냥 댓글:  조회:11785  추천:13  2014-06-06
악플 유감(有感)- 2   인터넷 마녀사냥 김 혁   지난 중세기적에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라는 사람을 겨냥한 사냥과 살육이 집단적 광기의 추썩임을 당하며 유럽 전역을 무대로 일었다. “마녀사냥”은 15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여 16세기 말∼17세기에 광분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당시 유럽 사회는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종교집단은 이단자들을 색출, 제거하는 목적으로 재판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희생자 수가 적었지만 점점 광기에 휩싸이게 되면서 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녀라는 죄목을 뒤집어썼다. 일방적인 지명뒤에 마녀라는 락인이 찍힌 녀성들은 죄임쇠로 손가락을 으스러뜨리기,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지지기, 몸에 바위덩어리를 매달아 관절에서 뼈를 빼버리기등 이루다 말할수없는 잔인한 고문을 당했고 뒤이어 화형이라는 극형으로 처형되였다.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마녀사냥”은 18세기이후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그 광란은 20세기에도 “매카시즘”이라는 형태로 계속됐다. 1950년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는 반대파 정치인들은 물론 예술계와 언론계의 인사들까지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는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를 낳았는데 이를 “매카시즘”이라고 한다. 영화계와 방송계의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라는 멍에를 쓰고 검은 명단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경력을 망쳤으며 옥살이를 했다. 아인슈타인, 피카소, 채를린등 당대력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많은 유명인사들도 매카시즘의 쇠사슬에 목죄임을 당했다. 많은 사람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고있었으나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경력위조, 음주추태로 정치판에서 수세에 몰린 매카시가 자신의 상황을 반전하기 위해 만든 막수유(莫須有)의 황당극이였다. 그후 매카시는 상원외교관계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도 그가 말한 공산주의자가 누구인지 스스로도 진술할수 없었다. 그 한사람의 세치 혀끝에 의해 유명 엘리트들이 련줄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험지에서 허덕이였으니 이는 또 한차례의 현세의 “마녀사냥”이였다.   요즘들어 “네카시즘”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인터넷과 매카시즘을 합성한 말, 다수의 네티즌들이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사회의 공적으로 삼고 매장시켜 버리는 현상을 일컫는다. 쉽게 극단적이게 되고 도덕성이 실추되는 인터넷공간의 악행을 고발하는 신조어이다. 같은 맥락으로 “인터넷 마녀사냥”이라는 신조어도 있다. 바로 이와 류사한 집단심리가 현재 우리 인터넷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인터넷 마녀사냥들의 공통된 특징은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삼아 특정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가능하다. 하지만 그 글을 읽고 사실의 진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전파시키거나 악성댓글을 다는것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현대판 마녀사냥이라 할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녀사냥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의 시대에 하필이면 발생되였다. 점점 수위를 넘고있는 악플행위도 우리가 인터넷에 어섯눈을 뜨고 그 문화를 수용, 활용하고있는 시점에서 기염을 보이고있으니 이런 온라인 세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우리는 이미 저 끔찍한 10년 대동란이라는 아비규환의 세월을 겪어 왔다. 그것이 인터넷에서도 자행되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광분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다시금 살게 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1    악플이라는 독버섯 댓글:  조회:5025  추천:20  2014-06-06
칼럼 시리즈    악플 유감(有感)- 1   악플이라는 독버섯 김 혁     우리의 인터넷 문화는 아직도 걸음마 타기의 양상을 보이고있다고 해야 겠다. 개혁개방의 물결에 편승하여 일찍 출국의 겹대문을 열어젖힌 이들로부터 인터넷을 활용, 우리로 말하면 어딘가 생경스럽던 인터넷문화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변강의 오지에 운집해 살던 우리는 지금껏 상상할수 없었던 엄청난 량의 정보를 쉽게 검색하고 류통시킬수 있게 되였다. 또 “출국리산가족”이라는 신조어가 나올정도로 “리산의 삶”을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인터넷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친지들을 손쉽게 실시간으로 련결해주는 매개물로 되였다. 그로부터 인터넷은 우리들에게 점차 익숙한, 떨어질수 없는 옛말속의 “백보상(百寶箱)”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애초의 메일을 통한 가족끼리의 문안으로부터 그후 블로그, 까페, 미니홈, 트위터등을 통해 해외견문이나, 리향자의 처경, 문화차이로부터 오는 갈등에 대한 소견등등을 일기처럼 때때로 적던데로부터 취향이 맞는 이들끼리 정보를 교류하고 친목을 다지기위한 까페를 꾸미고 나중에는 일정한 규모의 사이트를 만들기까지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에 힘입은 빠른 전파성의 특징으로 인터넷은 어느새 우리의 생활에 깊숙히 들어왔고 서로지간의 새로운 소통의 공간이 되였다. 하지만 창문을 열먼 “꽃향기와 더불어 파리도 날아 들어오듯이” 그 공간에 각종 혼잡한 내음이 섞여들기 시작했고 불협화음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매일 매시각 업데이트되는 각종 정보와 사유의 만개로 인터넷 화원은 백화만발한듯 하지만 아직 성숙되지 못한 인터넷 문화의 토양에 하나의 독버섯도 끼여서 현란한 색조로 사람들의 신심을 현혹(眩惑)시키고 있다. 바로 악플이라는 독버섯이다. “악플”. 나쁠 악(惡) 자와 리플(reply) 즉 화답이라는 글자 중의 “플” 자를 합성한 신조어로서 다른 사람이 게시판에 올린 글에 대해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내용을 담아서 올린 댓글을 의미한다.   우리의 인터넷기술은 아직 해외에 비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조선족의 많은 블로그와 사이트들은 해외의 서버(근거리 통신망 등을 통해서 다른 복수의 컴퓨터나 워크스테이션으로부터 공용되는 각종 자원을 제공하는 장치)를 차용품처럼 빌려쓰고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 서름한 와중에 우리의 인터넷마당은 그 뒤틀린 춤사위를 엿보이기 시작하고있다. 댓글에서 놀이하며 다는 댓글들이 진지한 고민을 거친 댓글들을 량적으로 압도하고 있다. 그보다도 악성 댓글, 명예훼손 등이 거친 춤사위를 보이며 우리의 인터넷공간은 어쩌면 제어장치를 아직 달지않은 폭주자동차 꼴이 돼 버렸다. 조선족의 몇몇 사이트들에서 악플이라는 독버섯처은 엄연히 자라고 있으며 그 수위가 도를 넘었고있다.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 좋은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건전한 댓글문화를 우리의 사이트들에 찾아보기가 힘들다. 자신과 단지 의견이 다르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사람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 오수(汚水)를 와락 퍼붓고 나아가 칼보다 강한 말의 “흉기”를 무차별 휘두른다. 따라서 인터넷 문화의 폐해성을 두고 사회 각층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인터넷에서의 악플 과연 이대로 방치해도 좋을가? 인터넷에 심취해 일찍부터 주제별로 블로그와 까페도 적지 않게 꾸려나가고있는 필자는 악플의 위해에 대해 무지근하게 계속되는 치통(齒痛)처럼 겪어왔었다. 몇기에 나뉘여 악플에 대한 유감록 몇편을 적어 본다. 물론 악플에 대해 론한 이 글이 악플달기의 애호를 갖고 있는 이들의 “아취(雅趣)”를 건드렸기에 가장 극악한 악플의 세례를 받을것을 감내하면서 말이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0    우리들의 딜레마 댓글:  조회:3964  추천:73  2007-06-29
칼럼 우리들의 딜레마 김 혁 애니메이션(動畵) 를 오락물이 아닌 시각으로 열심히 본적 있다. ... 거대한 섬이 있었는데 그곳엔 장대한 산맥과 온갖 동물들이 번성하는 푸른 벌판이 있고, 또 아름답고 신기 한 과일들이 많이 난다. 비옥한 땅 속에는 무지개 빛 귀금속과 보석이 묻혀 있었다. 섬의 한가운데에는 돌로 지은 아름다운 공공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으며, 도시들은 항만과 운하로 연결되어 있는데...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인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에 대해서 적어놓은 글의 일부이다. 기원전 347년에 이러한 기록들을 남긴 채 지상의 락원 아틀란티스는 이 땅 우에서 사라져 버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 관련 자료를 새삼스레 찾아 읽으면서 우리가 살고있는 중국조선족사회도 언젠가는 이렇게 사라지지 않을가? 하는 로파심 아닌 걱정에 잠겨들었다. 민족이란 사회, 력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운명공동체이다. 민족이라는 공고한 사람들의 집단을 형성케 하는 기본징표는 핏줄, 언어, 지역의 공통성이며 민족성원 자신의 힘과 지혜로 자신의 운명을 지키면서 발전하는 것이 민족사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우리민족은 이민, 정착, 형성, 발전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100여 년을 경유해 왔다. 이 과정에 이주현장에서 우리는 청나라 봉건통치계급, 군벌정권, 일본제국주의의 착취와 유린을 겪으면서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목숨 바쳐 반일, 반봉건투쟁에 가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 민족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였다. 또한 해방 후 50년 력사에 우리 민족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해 앞서가는 민족으로 자리 매김 되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피와 땀을 바쳐 애지중지하면서 만들고 발전시켜온 형태의 집이, 다수가 하나와 같이 일사불란한 동질성을 이룬 이 집이 지금 미증유의 충격을 받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발달국가들이 일전에 겪어온 보편적인 과정을 우리는 지금 겪고 있다. 10여 년래 우리의 농촌인구는 해마다 5프로의 속도로 감소 되여 경작지가 묵어나고 촌 부락이 소실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녀성들이 섭외혼인으로 외국에 나가는 류실때문에 인구가 마이너스 장성을 기록하고 조선족 학교가 련이어 페교되고 있다. 도시화의 물결, 출국바람에 의해 농촌을 중심으로 하던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으며 따라서 조선족 소실설,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의 불확정성은 우리가 직면한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 시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바로 자아확립과 주체성확립이다. 그것은 곧바로 민족적 자각과 의지이다. 민족운명의 주인이라는 높은 자각과 민족자신의 힘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민족의 소실이 아닌 민족의 생존과 부강을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기본 정신자세와 신념으로 되어야 한다. 초기의 민족주의 사상가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공동체를 문화공동체로서 받아들인 뒤,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핵심 요소로서 민간전승과 민족적 전통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민족의지를 형성하는 구성원 전체의 협력을 강조하고 일반 대중을 진정한 문명의 주체로 간주함으로써 프랑스 민족주의에 리론적 바탕을 제공했다. 참된 정신으로 흔들리는 민족의 중심을 잡고 우리 민족이 재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도록 할 때이다. 우리 민족작가들의 출두와 동참이 수요되는 시점이다. 민족작가는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 태어나며 민족의 뉴대 속에서 커 가는 존재이다. 민족의 품안에서 살면서 개인의 외모와 육체적 특성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적 교육을 받고 그 사고와 행동양식, 사상과 감정, 도덕과 풍습을 익혀 민족작가로 된다.하기에 매 작가에게서 풍기는 멋과 품위와 슬기, 정서, 지향, 사고방식 등이 모두 민족적인 것으로 된다. 따라서 우리의 작품은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으며 민족과 동고동락하는 인연으로 얽혀 있다. 변화하는 우리 문화내용의 성격을 규제하고 조절하며 방향을 제시하면서 보존 계승해 나감은 우리 지성인들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민족작가로서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본다. 우리 앞에 초미(焦眉)로 다가 온 아픔을 직시하며 현실적인 절박성으로 나는 근년래 , , , , , , 등 소설들을 펴냈다. 작품들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의 정착과 형성, 조선족공동체의 흔들림, 도시에 진출한 민초들의 삶, 출국자녀 문제, 조선족의 진로와 대안에 대한 화제들을 펼쳐보았었다. 이번 작품부터는 이라는 부제를 붙여 본격적으로 창작하면서 나의 창작자세를 극명히 표현하려 한다. 지금 지구상에는 2천여 개의 민족이 2백 개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들의 운명의 공동체이며 생활의 기본단위인 민족의 존립과 발전을 이룩하는 중에는 간거한 난제들이 란마(亂麻)처럼 꼬여 있고 미해결의 상태로 각 민족에게 부하 되어있다. 우리들의 딜레마(진퇴량난의 극악한 상황)는 여실하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이어 민족의 총명과 슬기를 되살리며 목전의 진통을 이겨내고 다시 세인 앞에 나설 그날의 밝은 조선족의 군체 형상을 기대하는 나의 이한 작업도 지속적으로 될 것이다.              
19    남자의 목젖 댓글:  조회:4478  추천:73  2007-06-29
. 칼럼 . 남자의 목젖 김 혁   오랜만에 동창회를 갔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녀동창생들은 (어느덧 눈 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줌마 티 나는 녀동창생들은) 십여 명 잘되는데 남자는 나까지 해서 고작 두 명뿐 이였다. 식사를 마친 뒤 의례 노래방에 갔는데 술에 약한 그 남 동창생 님께서 쓰러지는 바람에 남자란 나 하나만 남은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렸다. 녀성중대를 거느린 당대표의 심정이 되여 흥취 거나한 녀성분들을 맞추어 주었다. 그들에게 끌려 일당백으로 일일이 대창을 하고 나니  나중엔 목소리가 쉬여 나가주질 않았다. (잔 등과 이마 전은 땀으로 질펀했고) 솔직히 즐거워야 할 동창회가 힘들어 죽을 뻔한 기억으로 남았다.      오랜 기자생활에 버릇이 되였던지 나는 가끔 시장거리의 음식가게에 끼여들어 아무나 (초 두부요 순대요 옥수수 죽이요 하는 음식들을) 잘 먹어준다. 그러면서 볼라니 음식을 만들어 파는 아낙네들의 배후엔 나그네들이 있었다. (한결같이) 그 나그네들이 한결같이 하는 일이란 쌀도 사오고 간장도 사오고 기름도 사오는 일, 헌헌대장부들이 아낙네들의 뒤치닥거리를 도와 허드레 일을 도맡아 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다 손님이 뜸한 주말 같은 때면 그 나그네들끼리 모여 술잔도 기울인다. 어느 한번 귀 도적질하여 들은 나그네들의 말이 례사롭지 않았다. 녀편네 쪽을 흘깃거리다 감개하여 내뱉는 나그네들의 말을 요약해 보면  “요즘 같은 세월에 남자구실 하기가 정말 힘들어 죽겠구만이라!”였다.         몇 해전인가 한국의 어느 댄스그룹이 이곳에 와서 음악회를 연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장마비가 내렸다. 음악회 신문발표회에서 어느 지도자 님의 기인 연설을 듣느라 우리 기자 수십 명은 그만 시간을 늦추게 되었다. 헐레벌레 체육관으로 달려가 보니 음악회가 당장 시작될 기미였지만 체육장 출입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팬들의 소란이 무서워 큰 대문은 열지 못한 채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작은 문만 열고 있었다. 주최측의 전갈을 받고 대문을 지켜나선 경찰들이 기자들을 우선 들여 보내주었다.   그런데 팬들까지 우르르 합세하는 바람에 장내는 그만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음악회는 시작되여 음악소리가 쿵쾅거리는데 아직도 대문 밖에 내쳐진 기자들을 보고 어느 경찰 분이 방법을(사뭇 엉뚱한 아이디어를) 댔다.    “녀 기자들은 우선 문으로 들여보내고 남자 기자들은 대문을 뛰여 넘으시오!”   체육장의 대문은 엄청 높았다. 하지만 취재임무를 위해 우리는(남자기자 분들만은)울며 겨자 먹기로 철창에 매달렸다. 정수리를 쫓는 비속에 미끈거리는 쇠창살을 한사코 부여잡고 (어떤 령장류 동물처럼)아득바득 넘는데 누군가 탄식을 뿜는 소리가 비속에 들렸다.    “허이고! 하필이면 남자가 돼갔고”...      요즘 세월에 남성으로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남성은 과연 강한 존재인가?    인류의 진화에 대해 천명한 다윈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생물학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실은 허상이었음을 밝혀주었다. 혼자서는 자손을 만들 수 없는 생식계의 부수적인 존재, 암컷과 유전자를 이어 쉽게 멸종되지 않는 종으로 거듭나게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퇴화의 위기에 처한 제2의 성. 그것이 남자의 진면목이었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연구결론에 의하면 남자는 뭐 “자연의 유일한 실수"라나?!" (맙시사!)        이제 남자는 심지어 새끼가 태어날 때 필요조차 없게 될지도 모른다. 몇 해전 정자 없이  란자의 복제만으로 태어나는 데 성공한 복제 양 “돌리”는 우리 남성들에게 과학성취의 경이로움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대신 어떤 자격지심을 유발하는 소식이였을지도 모른다. (과학환상소설을 읽기 좋아  해 라는 잡지를 내내 주문해 보고있는 나에게서도 돌리의 존재는 별루다. 더욱이 얼마 전 그 “돌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된 어떤 야릇한(?) 자아위안의 감정.)      유명한 동물학자들은 원체“녀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진화했다"라고 설명한다. 그 지론을 구구히 펴보면-   뇌 단층의 연구로 보면 녀자는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말을 잘한다.   후각, 청각, 촉각 등 오감 역시 녀자는 남자보다 민감하다.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녀자는 남자보다 커서 오래 생존하고 넉넉한 지방 덕에 (녀자 25% 남자 12.5%) 배고픔에도 잘 견딘다.   또한 대표적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면역력을 억제해 남자는 녀자에 비해 가난과 질병, 독신생활, 위험에 견뎌내는 능력이 훨씬 떨어진다      태어난 후에도 남자는 녀자와 달리 색맹과 같은 X염색체의 결함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죽을 통계적 확률도 남자가 녀자에 비해 훨씬 높다나?        요약하자면 남성의 육체는 녀성에 비해 구조적으로 불완전한 유전자 조합을 가진 취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녀자가 남자보다 우세라는(어느 모로 보나) 이야기다.    이렇게 인간의 성별에 대한 의식이 점차 성숙돼 가고 있긴 하지만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인 시행착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선 실존의 차원에서 본다면 남성에게서 그 특징은 의지력, 대담성, 목표지향성, 독립성, 등으로 요약돼 왔다. 녀성의 특징은 그 반대쪽에 선다. 허약함, 겸손함, 관용, 순종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량극적인 성 모델은 일종의 사회적 강령처럼 우리는 내내 받아들여 왔다.      사내아이는 사춘기를 전후해 남자라는 혹독한 부여를 (억다지로) 받는다. 그를 통해 그때까지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고독과 고립무원의 감정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우리는 갓난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 아이가 속한 성에 모든 것을 맞춰나가려 한다. 아직 성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남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윽박지른다. 특히 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민족일수록 더욱 그렇다. 유달리 강한 우리 사회의 가부장성이 남성들에게 강력한 자기 최면과 집단적이고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답습시킨 데서 온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남자는 끊임없이 사회적인 요인들에 좌우지 될 수밖에 없는 압력을 갖고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도태돼야 하는 불행한 숙명을 안고 있다. 결과 남성은 스스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조되여 눈물을 감추고 진솔한 감정을 억제하도록 길들여진 “씩씩한” 인공물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녀성의 사회무대로의 등장이였다. 금세기 들어 녀성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고 그 자각의 결과들이 사회에 꽃펴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흐름을 조소하고 저항하던 남성들도 이젠 이를 대세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강하고 지배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는 남자에 대한 통념이  뒤집혀 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페미니즘(女性主義)의 한 조류로서 남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이제 페미니즘은 녀성만의 화두가 아니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남성의 화두이기도 하다.      남성의 기존 권위는 (소리내며) 무너지고 있다. 약한 남성이 기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정에서 발언권이 줄어들고 가무 일이며 육아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는 대신, 사회에선 여전히 강한 남성일 것을 요구받는다. 이로서 남성들의 위기는 자신에 대한 위기, 사회의 위기로 직결된다. 즉 남성들이 위기에 처했다면 이 사회 또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총체적 위기를 제대로 바라보고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남성의 주체적 자각과 남성성에 대한 올바른 리해가 필요하다. 때문에 지금의 남성사는 백지상태에서 다시 씌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녀자의 손에서?)     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폭력적인 남성 문화 속에서 녀성들이 살아나기가 어렵지만 물론 남성 또한 살아나가기가 (심히) 어렵다. 지나친 성별 고정 관념에 의하여 받침 되고있는 현재와 같은 사회구조 내에서 지나친 경쟁, 권위주의에 매달려 끊임없이 더 높은 효률과 생산을 위해 무작정 뛰기만 하는 과정에서 남자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남성도 남성 지배문화의 피해자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 글을 짓는 순간도 우리 남성들은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쓰린 가슴을 달랜다. 직장에서는 넘쳐나는 업무와 경쟁력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정에서는 갈수록 사나워지는 녀편네와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밀려난 삶의 변경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고자 미로를 헤매인다. (불쌍할 손 남자들이여!)      남자의 성대는 18mm로서 녀자(13mm)보다 길다고 한다. 녀자의 후두도 남자의 7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남자는 큰 목젖을 흔들며 거센 시원(始原)의 음성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어떻게 남자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남자다운 호기에 젖은 쩌렁쩌렁한 소리를 다시 낼 수 있을가?     동창회 그날 노래방에서 쉰 소리를 짜 내여 (짐짓 뜻 있는 가사를 골라) 불렀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 말을 다시 적어 본다.      남자는 너무 피곤해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이 피곤해    남자는 도움도 받을 수 없고 혼자 버티기도 힘들어    남자도 울고 싶지만 늘 화장실에 숨어 울어야만 하지    남자는 너무 힘들어    사랑하는 것도 힘들어    건강해야 하고    용감해야 하고     유머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취미도 있어야 하고     랑만도 있어야 하지.     나는 아무 것도 없는데    저기 저 아름다운 아가씨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8    후생가외(後生可畏) 댓글:  조회:3946  추천:73  2007-06-29
 . 칼럼 . 후생가외(後生可畏) 김 혁 몇 해전, 지의 요청으로 30대 중견작가 몇몇과 어우러져 문학신세대의 단층문제를 두고 대담취재를 받은 적 있다. 그때 우리와 아래세대의 문학인구의 감소에 대해 짙은 우려를 표했었다. 그러던 우리로서는 내내 끊기지 않는 문학의 맥락을 지켜보면서 지나친 로파심에 앙감질하지 않았나 자조를 머금게 된다. 라는 리언이 있다. 요즘의 우리 문단에서 창작자의 저령화(低齡化)가 모두들의 경희의 눈길 속에 어떤 추세를 보이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소년작가라면 10대에 작품집 을 내놓은 김영옥 하나를 겨우 손에 꼽을 뿐이였다. 허나 세기의 문턱을 넘음과 함께 변혁과 조약의 미묘한 기대감으로 부풀어있는 우리 앞에 새로운 문학인구가 련줄로 고고성을 지르고 있다. 요즘도 5월 호 에 대학생문학특집이, 2월 호 (격월간)에는 이 실려 푸른 5월을 장식해 주었다. 또 한번 거론되는 에 5월바람 같은 청신함으로 그 걱정기 어린 마음들을 씻어주었다. 이를 두고 고 기획자들은 말했다. 이번 를 장식한 리진화, 박미옥 등 외에도 홍예화. 강천사 등이 신진들이 문학지에 심심찮게 이름을 보이고 있으며 그중 몇몇은 비중 있는 상까지 수상하여 문단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고 있다. 일찍 10대 중반에 장편소설 을 내놓은 석현 소녀를 위시로 하여 작문 집일망정 자신의 창작집을 낸 소학과 초중생이 10여명이나 된다. 비록 미흡한 구석이 보일지라도 문단엘리트들만이 운집해드는 정규문학지에서 그 풋풋한 변성기의 목소리를 나름대로 내고 있다. 중국문단에서는 문단의 저령화 창작추세를 두고 이들에게 라 시체스런 호칭을 달아 주었다. 이 세대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인문관심 속에서 성장했는바 단일문화권속에서 보내온 로 세대들과는 달리 다종(多種)문화의 융합과 충돌을 만끽하고 있다. 사회정보량의 날로 되는 증장과 참조계의 다양성은 이 한 문학 신 인류의 발육과 성장에 비옥한 밑거름으로 되고 있다. 평론가들은 신 인류의 작품들은 소년작가들이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현시로서 성장기소년들의 단순하면서도 구속을 모르는 사유와 그들만의 번뇌에 대한 묘술을 성인작가로서는 도저히 흉내낼수 없는바 이는 그들 세대의 독자 군을 재빨리 이룰 수 있는 우세라고 분석하고 있다. 10여 년간 우리의 고등학부들에서 다른 류 인재들의 속출에 반해 작가만은 거의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병페로 보아도 우리문단의 문학 신 인류의 출현에서 우리는 단층 잇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의 위상이 전에 없이 저락된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현황에서 저령화 창작에 대한 시야비야를 떠나 우리는 우선 문단에 신선한 활력소를 주입하고 있는 이들 신생대의 작은 몸짓에 대해 돌장이들의 이쁜 짓거리처럼 받아들이고 그들의 서툰 걸음마 타기라도 갈채를 주고 손목을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연변일보" 1997년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7    고도를 기다리며 댓글:  조회:4239  추천:73  2007-06-29
. 잡 문 . 고도를 기다리며 김 혁 하나 . 더러는 엉뚱하지만 더러는 진지한, 여하튼 유명짜한 극이다. 문학도 시절에 서에서 처음 극에 대해 짤막한 줄거리로 접하고 커다란 호기심을 가졌다가 후에 완정한 극본을 찾아 읽었다. 극장가에 앉아 몸으로 체험하고 싶었지만 변강의 오지에 살고있는 지라 그런 사치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몇해전 한국행차를 했을 때 서초구 에서 극작가의 탄신일을 기념해 공연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귀국날자와 겹치여 아쉬움을 씹으며 돌아선적 있다. 4만원의 표값이라도 내치고 볼려 작심했었는데… 그러다 작년 봄 이라는 DVD물을 사들여 화면으로나마 드디여 이 명극을 보게 되였다. 작자 베케트 탄생 100주년만에 드디여. 그로서 다년간의 감질난 욕구를 달랠수 있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만이 서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일명 라고 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길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림이 시작된 듯하다. 라는 인물이 딱히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 조차 분명치가 않다. 이제는 습관이 되여버린 지루한 기다림을 과제처럼 수행해가며 지칠 대로 지쳐있지만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본다. 고도의 사자(使者)인듯한 남자애 하나가 나타나 하고 알려주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튿날 고도는 오지 않는다. 사흗날에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 다음 그 다음 날에도 고도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소망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고도는 곧 온다고 하면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사뮈엘 베케트   아일랜드 출신의 괴재스러운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에 의해 1952년 발표된 극작품, 1953년1월3일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됐다. 초연당시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몰려 극의 엉뚱함에 즐거워 했다고 한다. 그 기다림의 상대인 에 대해 관객과 평론가들은 그 의미를 깨치려 애쓰며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왔다. 혹자는 자동차 운전수라고 혹자는 빵이라고, 혹자는 명배우라고 혹자는 신이라고 혹자는 사람이 하니라 희망이나 동경, 자유라고... 로 인해 베케트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극은 20여종의 언어로 번역되여 구 유럽 무대를 휩쓸었고 새로운 연극운동의 한 방향을 제시하는 부조리 연극이라 칭송되여 1961년에는 국제출판 대상을, 1969년에는 실존주의 시대의 부조리극을 이끈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감옥 공연까지 허락되어 수천 여명의 죄범들을 열루(熱漏)에 젖게 했다.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나길 바라는 시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화 했다고 한다. 기다림이라는 근본적인 내재적 삶을 끌어들여서 말이다. 하지만 베케트는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누군가 집요하게 물을라치면 라고, 그자신도 기다리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고보면 의 정체에 대한 정답은 없는 셈이다. 기다림의 상대에 대한 정의는 관객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다. 각자의 바램에 따라 그 기다림의 대상이 변할수 있는거고… 우리의 일상, 그리고 일생이 그렇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라고 보면 되지않을까. 실제로 극중인물들은 하릴없어 보이긴 해도 기다림이라는 것에는 충실히 리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라는 사람이 그들에게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거나 혹은 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조차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마음 가운데 고도가 올거라는 희망이 잠재되여 있기에 그렇게 느긋한지도 모른다. 고도는 그렇게 지금까지 기다림을 던져주고 있다. 무대우에서도 무대아래에서도 기다림의 활극은 계속된다. 둘 기다림에 대해 너나가 다른 각자의 체험을 갖고 있으련마는 돌이켜보면 나 역시 기다림에 남다른 체념적인 역고를 치러 왔었다. 결혼초기, 부평초 같은 셋방살이 신세에 부대끼다 못해 시교를 멀리 떨어진y향의 장모님 집에 얹혀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연길까지 차로 대어오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려야 했다. 출근 시간을 지키기 위해 아침6시를 좀 넘겨 정류소로 나와야 했다. 추위에 발을 구르며 차를 기다리기가 십상이었다. 연길 역에 내려서는 또다시 공공 버스를 갈아 타야했다. 발을 잇는 또 한 번의 기다림... 저녁에 돌아올 때도 마냥 한 본새였다. 목을 빼들고 굽이 길목을 바라 조갈 들게 차를 기다리는 그것, 그것이 그때 내 일상의 전부였다. 그 때 안해는 임신7개월, 허나 생활의 부하에 못 이겨 박봉이라도 바라면서 출근길에 올라야 했다. 그 숨 가쁜 몸으로 정류소의 일각에서 추위에 몸 떨며 피곤한 모습으로 기다려 서있는 아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살같이 아픈 시각의 밀착이었다. 어느 한번, 막차를 놓치고 요행 개체운수를 하는 소형버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운전수는 사람이 다 차서 오를 수 없다며 나와 안해의 간절한 애청을 매정히 물리쳐 버렸다. 사위는 어스름이 이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차만 놓치면 친척집에 가서 군색스럽게 한밤을 지내지 않으면 려관방으로 가야 했다. 나는 얼굴에 두툼히 철판을 깔고 달리기 시작한 차를 따라 달리며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차가 멈춰 섰다. 안해가 일루의 희망을 품고 무거운 몸을 숨 가삐 놀리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차가 엔진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맥을 놓으며 서 버렸는데 차가 또 멈춰서는 것이었다. 또다시 숨이 턱에 닿아 차를 따라잡았는데 차는 또 한 번 우리를 코앞에 두고 내빼는 것이었다. 분명 우리를 조롱하고 있었다. 격노한 나는 광분하는 사자처럼 달려갔다. 주먹으로 차 유리를 내질렀다. 옆쪽 차 우리가 산산 조각이 났고 나와 그 덕성이 무여지한 운전수 사이에 드잡이가 오갔다. 결국 서로가 코가 깨지고 눈 두덩이가 참대 곰을 꼭 닮은 모습으로 단락을 맺고 말았다. 터진 입술을 감빨고 섰던 내가 결김에 친척집에서 한밤을 지내자고 애원하는 안해의 청을 무질러 버리고 우둔한 짓거리를 벌이고 말았다. 30여리 밤길, 금방 눈 온 뒤의 길을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걷기만 하였다. t촌 부근까지 왔을 때 앞서서 분기를 곰 삭이며 씨엉씨엉 걷기만 하던 내가 머리를 돌렸다. 힘겹게 뒤를 따르고 있는 안해, 안해는 분명 울고 있었다. 깃을 세워 올린 외투 속에 목을 잔뜩 움 추리고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입김에 서리가 하야니 불린 앞 머리칼, 달빛에 번뜩이는 안해의 추연한 눈물을 본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사내의 소중한 눈물이 주체할 길 없이 송진처럼 눈귀로 꾸역꾸역 배어 나왔다. 코를 훅 들이마시며 나는 어금니를 사려 물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매일을 기다려왔고 지겨운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셋 국제 만화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일본만화 한 폭을 감개에 젖어 본적이 있다. 이란 표제의 만화. 전통의상차림의 중년 녀인 하나가 나들이 행색으로 철길 곁에 다소곳이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조용한 맵시로 기다리고 있는 그녀 앞에 놓인 철길은 앞뒤가 단절된 토막 난 짧은 레일. 그 어떤 교통도구도 실어낼 수 없는 짧다란 레일 토막이였다. 이 만화 한 폭이 내게 준 감회는 컸다. 이 녀인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멀리 고향 계신 친정어머니의 일 년에도 몇 번씩 속구구를 뼈 물러야 이룰 수 있는 딸집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도회지에서 재교 중인 대학생 아드님의 방학 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세대주의 중임을 떠메고 타향에서 땀 동이 흘리다 돌아오는 막벌이꾼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해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읊조리게 하며 무정하고 랭혹한 현실처럼 안타까이 눈앞에 놓여 진 짧은 레일, 아무도 올 수 없고 갈수 없는 그 레일 앞에서 인고(忍苦)에 각인된 듯 한 뒷모습으로 녀인은 그렇듯 조용히, 그렇듯 온 곱게 기다려 서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인의 기다림은 어차피 영겁(永劫)의 기다림이리라!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기다림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시각 시각마다 변용되어 일상에 숨어 있는 기다림과 접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삶이란 기다림의 련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대상은 모두 다 다르다. 벤치 곁에서 땀에 흥건한 손으로 생화송이를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선 련인, 창가에 고착된 듯 정물처럼 박혀 자식의 귀환을 기다리는 머리 발 센 어머님, 가물철에 감농군들마다가 조갈 든 입술을 감빨며 기다리는 단비, 조국을 잃고 천하에 집도 없이 광복의 날을 기원하는 지사의 일념, 술 사환을 멀리 주막에 보내고 목이 타는 애주가의 고민, 진통 끝에 다듬어낸 글발을 투고한 뒤 채용을 기다리는 문학도의 잠재울 수 없는 마음. 패전에 당착하여 응원 병의 도착을 기다리는 장병의 눈물...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추구, 동경, 환락, 리상, 목표는 언제나 멀리에 있다. 그 긴 추구의 려정을 통하여 우리는 완성의 막바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 막바지로 이르는 과정이 바로 기다림이다. 위수 가에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유한자로 꾀한 채 기다리고 기다리다 주문왕을 기다려내어 력사의 한 획을 그은 강태공의 일화도, 고역에 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으로 굳어져 버린 맹강녀의 전설도 모두 다 기다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긴긴 기다림 속에 세월의 이랑에 씨 뿌리고 퇴비 주고 물주며 달디 단 열매를 맞아온 인간의 끈질긴 인고의 상정이 그 기저에 깔려있음으로 해서, 이한 이야기들이 널리 전해지고 경전적인 신화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요사이 시교와 린접된 우리 동네에는 로무의 선풍이 불어치고 있다. 연이 아버지도 선호 아버지도 란이 아버지도 너나없이 싸이판으로 리비아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나갔다. 2년이고3년이고 희망을 약조한 채... 그와 함께 눈물겨운 기다림도 막을 열었다. 남편이 탄 선박이 해풍을 만나지나 않을는지? 그 곳의 폭양이 너무 뜨겁지 않을는지? 그 고역을 남편이 견디여 낼만할는지?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일 매일을 일일이 여삼추같이 기다리고 있는 그네들, 자식 양육의 중임과 부모공경의 의무를 달가이 묵묵히 리행해 가고 있는 그네들, 그네들이 보이고 있는 것은 정녕 가정이란 소중한 진주를 빚기 위해 아픔을 참는 조개의 몸부림이었고 기다림이였다. 대나무를 심으면 첫 해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둘째 해에도 역시 보이는 것은 없다. 셋째, 넷째 해에도 똑같다. 그러나5년 째 무렵에는 대나무 뿌리가 이미 땅 밑으로 쫘악 퍼져 있다. 그리고 작은 죽순들이 땅을 뚫고 조금씩 올라온다. 그리고6주 정도 기다리면 온 산을 푸르고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버린다 대나무의 성장과도 같은 그들의 올곧은 삶을 지켜보며 나는 인내에 대해 생각했다. 기다리며 관망하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기의 삶을 가꿔가는 연이 어머니, 선호 어머니, 란이 어머니... 데데한 그 시골 아낙들이 요사이 어쩐지 범연히 안겨 오질 않는다. 기다림이란 바로 이런 거다. 기다림에 당착하여 지치면서도 어차피 그 기다림의 양상을 무양히 보존해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진세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진실한 모습이다. 우리의 소망에는 곧바로 이루어지는 소망도 있지만 시일이 오래 걸리는 소망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기다림에는 행복에 대한 바람과 설렘이 있다. 기다리는 시간은 희망의 시간이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다. 기다리는 동안 홀로 피 흘리는 아픔과 외로움을 경험한다. 그 살을 으깨는 고통을 거쳐 마침내 새살이 돋는다. 유가(儒家)에서는 라고 했다. 진정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하는 일상을 누릴 줄 알며 래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안으로 끌어안고 현재에 살면서 래일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본능적, 지향적 추구의 배불림을 위해 우리는 울고 있는 것이다, 웃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음악같이 아름다운 시로 기다림에 대해 갈파한 시인 김영랑의 천고절창(天古絶唱)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난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사족(蛇足): 그 유명한 가 일전에 중국의 국수(國粹)인 경극과 만났다고 한다. 서양의 고전을 동양적 경극과 결합해 주목받고 있는 대만의 당대전기극장이 출품, 6월말에는 한국으로 까지 출두하여 공연했다고 한다. 경극으로 분칠 다시 하고 나온 는 베케트의 연극을 경극의 과장된 몸짓과 분장으로 표현했고 중국의 전통시가를 삽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실로 명작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6    월드컵단상(1) 엔돌핀 제조기- 축구 댓글:  조회:3366  추천:74  2007-06-29
    월드컵 단상 –1 엔돌핀 제조기- 축구   . 하나 . 치솟는 여름 날씨에 열기를 더해 주며 2006독일월드컵이 시작되였다. 도가니 같은 그 광환의 소용돌이 속에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축구에만 몰부어져 있다. 모든 메스컴에서 월드컵 소식과 이야기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상가 쇼 윈도안의 텔레비에서도 경기실황이 방송되고 길거리의 가판대는 온통 축구관련 간행물로 메우고 있다. 학교에서도 식당에서도 거리에서도 집에서도 심지어는 공동화장실에서까지도 축구가 최대의 관심사와 이야기거리다. 변강의 오지인 연변에서 요사이 유선텔레비 가설호가 급증하고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새집에 든 사용호들이 월드컵경기전을 보기위해 설비를 가설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기 때문이다.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네트워크회사는 2만여호의 사용호를 확보하고있는데 이 회사의 설비가설조에서는 평소에 하루에 5-6차씩 설비점검보수에 나가지만 요새는 하루에 40여차씩 나간다고 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축구에 이렇게 목숨을 걸고 살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축구는 모든 사람들의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러한 유월, 사람들의 몸에서는 엔돌핀이 시원한 분수처럼 샘솟는다. . 둘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일이다. 미국병사 몇 명이 찦차를 몰고 경축회장으로 가다가 차 사고를 내고 죽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충돌에 머리가 묵사발이 된 그들이 웬일인지 대단히 행복한 표정,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흥미를 가지고 과학자들이 죽음, 나아가서 쾌락의 의미, 행복의 의미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대에서 이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들은 실험용 쥐들에게 각종 물질을 투여해 보았다. 그 결과 알콜, 코카인, 암 세포 등을 투여했을 때 쥐의 뇌 부위에서 어떤 물질의 분비 량이 급격히 증가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돌로 죽은 그 미국병사들의 뇌 속에도 이러한 물질이 대량 분비되어 있었다. 그 물질을 엔돌핀(endorphin)이라 부른다. 엔돌핀은 체내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진정제, 즉 '몸속의 아편'을 뜻하는 말이다. 엔돌핀은 마약 모르핀보다 100배정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엔돌핀은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그에 대항해 통증, 불안 등을 경감시켜 즐거움과 진통 효과를 나타나게 하는 아주 고마운 물질이다. 인간의 린색한 뇌는 일생동안 그 엔돌핀을 자주 내보내지는 않는다고 한다. 100번의 구애(求愛)끝에 사랑의 승낙을 받았을 때, 자식을 보지 못해 내내 고생하다 중년의 나이에 첫 아이를 보았을 때. 달랑 한 장만 쥔 복권이 거액으로 당첨됐을 때... 이런 환희에 엔돌핀이 분비된다. 요즘같은 광환의 나날에는 엔돌핀이 매일이고 샤워라도 하듯이 뿌려 지는 것 같다. . 셋 .   영국의 소설가 닉,호비는 수만 관중들의 틈바구니에 끼여앉아 록색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순간의 감흥을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으로 묘사하며 감탄했다. 다양한 인종과 대륙이 작은 축구장에 모여 하나의 공을 응시하며 축구로 하나되는 인류를 제시한다 축구의 매혹은 이러한 대단위 스펙테클(壮观)에서 비롯된다. 축구가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압도적인 스펙테클이 주는 중독성 때문이다. 혹자는 축구를 전쟁에 비유하기도 한다. 전쟁에서 병사들의 개인적 력량과 명장의 신출귀몰한 전술이 승리를 결정하는 것이 축구와 절묘하게 들어맞는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구를 지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세계를 하나로 묶는 평화와 화합의 이벤트’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자유, 평등, 박애, 아름다움과 다양성이 넘쳐 흐르는 매력적인 스포츠라고 고상하게 말하기도 한다. 축구는 다른 스포츠가 갖지 못하고 흉내낼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가장 원시적이고 본능적이지만 축구는 또한 민족성이 가장 강하게 부각되는 스포츠이다. 우리가 본능에 종교에 가깝게 축구에 열광하는 또 다른 커다란 리유는 축구가 각 집단 고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하나의 가장 표현적인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 민족의 뜨거운 피와 실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에서 비롯된 브라질 축구 력사적 전통과 관련된수비지향성에 기인된 이탈리아 축구 훈련에 의한 물샐틈없는 조직력이 강조되는 경향을 보이는 독일 축구 보수적인 습성으로 변화를 꺼려온듯하지만 일관적인 끈기를 보이고 있는 잉글랜드 축구 이러한 축구브랜드의 양상에서 알아볼수 있다싶이 축구는 하나의 가시적인 행위 속에 그들의 문화, 정서, 전통을 담아낸 좋은 보기라 할수 있다. 축구의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축구는 시방 진화 중이다. 개인의 전술은 점진적으로 진화하며 팀의 전술은 급진적으로 진화한다. 우리는 앞으로 더욱더 발전되여가는 축구의 모습을 보며 가배로 되는 즐거움을 만낄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한다. 축구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씩 미쳐가는 것 같다. 이제 축구는 만국의 공통어가 되어버렸다. 그 재미와 그 감격과 온 인류가 하나 된 뜨거운 마음들을 다시 한 번 더 생생히 느끼면서 날에 날마다 새라새라웁게 엔돌핀이 샘솟는 이 6월을 즐기고자 한다.  
15    월병소고 (小考) 댓글:  조회:3825  추천:73  2007-06-29
  . 칼럼 . 월병소고 (小考) 김 혁    △ 해마다 추석을 앞둔 이쯤이면 시장은 월병판매공세로 시끌벅적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월병이 없는 추석은 상상할 수 없다. 추석이 되면 친지나 이웃들은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월병을 선물로 주고받아왔고 이 풍습은 수천 년이 넘게 이어져 왔다. 중국에서는 추석을 전후해 무려 20만톤의 월병을 먹어치우며 월병 판매액이 1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 그런데 시장경제 도입 이후 매년 초호화, 초고가 월병이 등장하곤 하는데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미풍량속이 뢰물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자 이에 국가질량총국과 국가표준위원회는 급기야 이라는 월병법을 만들어 너무 비싼 월병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 이라는 긴급조치도 실시, 지난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 방안에 따르면 월병 포장재는 월병 가격의 25%를 넘지 못하고 포장 부피도 내용물인 월병의 35%를 초과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이제는 월병의 호화포장을 통한 뇌뢰물수수 관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하북성의 석가장에 황금월병이 등장했다. 월병은 순수 황금으로만 만든 것으로 개당 가격이 2천180원에서 비싼 것은 2만6천160원에 이른다. 황금월병을 만든 상인은 고 강조하면서 황금을 좋아하는 중국인에게 적합한 마케팅기법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황금월병이 풍미하는데 대해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라고 비난을 쏟고 있다.  ▲ 한 식구나 친지, 뜻 맞는 사람끼리 서로 주고받으며 나누어 먹음으로써 일심동체 단란을 도모한다 하여 이라고도 불리는 월병이다. 월병은 떡 표면에는 , 등의 길상스러운 글귀가 새겨져있거나 달 속에서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 등 그림이 그려져 있게 마련으로 순탄과 건강장수를 기원하는 저의가 깔려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일년의 신고 끝에 맞는 추석, 수확의 계절에 맞는 첫번째 명절에 둥글고 맛좋고 보기 좋은 월병을 좋아하는 듯 하기도 하다. 따라서 떡이란 곡식으로 만든 먹거리 중에서 가장 맛있고, 고귀하고 정결하다는 리유로 제사나 집안의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준비해 왔는데 떡문화는 이러한 아름다운 것과 먹음직스러운 양쪽 명제를 모두 만족시키는 음식 문화의 대표적인 례이다. 이렇게 한가위를 징표하는 유구한 전통의 음식이 다른 용처의 로 변하고 있는 데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워 한다. 지구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먹거리를 만들어 낸 인간들은 유무형의 가치를 미각과 시각적 요소로 환치시키려는 욕망을 끝없이 발산시켜왔다. 그런데 그 욕망이 변형되고 도를 넘으니 그 맛이 외려 쓸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변일보 주간 "종합신문" 2007- 9- 25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4    용두레우물 댓글:  조회:4031  추천:73  2007-06-29
. 칼럼 .   용두레우물 김 혁     △ 우물은 끊임없는 자연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우물의 위치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물맛이 좋아야 복덕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물을 파거나 칠 때에도 반드시 길일을 택했다. 용두레우물은 두레박이 달린 두렛대가 설치된 우물로 이는 기중기와 같은 지레대의 원리를 리용한 것으로서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날 정도로 유래가 깊다. 함경북도나 평안북도와 같은 지방은 날씨가 추워 겨울에도 얼지 않은 물을 구하려면 깊은 지하수를 찾아야 했는데 긴 줄을 다루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용두레를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 룡정은 조선족들이 이주해온 력사가 아주 긴 고장이다. 19세기 7, 80년대에 조선사람들이 이주해와 살면서 이곳을 용드레촌이라 불렀다. 룡정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우물에서 룡이 날아 올라갔다고 하여 룡정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로고를 바친 곳의 길상을 기망(祈望)하는 개척민들의 흥감스러운 전설일테지만 여하튼  이 우물로 말미암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였다. 고증에 의하면 용두레우물은 1839년부터 1880년사이에 조선이민인 장인석과 박인덕에 의해 발견 되었다 한다. 이 우물은 일찍이 녀진족이 쓰던 우물이였다.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지자 두레박 즉 용두레를 해놓아 그때부터 용두레우물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 이름도 용두레촌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1934년 11월에 용두레촌의 리기성의 발의로 우물을 수선하고 약 2메터 높이의 비석을 세우고 비문에 이라 새겼던 것이다. 광란의 문화혁명시기, 비석은 는 사조에 의해 홍위병들의 손에 산신이 부서져 자취를 감추었고 우물도 메워져 버렸다. 그러다 1986년 룡정인민정부에서 애국주의 교육과 향토애교육의 차원에서 력사문물인 용두레우물을 수건하고 비석을 복원했다. 지금 룡정지명지우물터는 시민들의 휴식과 국외관광객들이 다투어 찾는 유람명소로 부상되였다. ▲ 용두레우물은 룡정의 상징, 이주민들의 애환의 상징물로 고착되였지만 이 유명 우물에 대한 관리는 미비한 점들을 보이고 있다. 우선 같다던 그 소문난 우물의 물을 마실수 없다. 우물 아구리에 철판을 대고 자물쇠를 잠근 데서 사시장철 쌉스름한 물이 자작하게 괴여 있었다는 우물물을 볼수 없다. 그러니 진짜 우물보다는 그 무슨 무대세트를 방불케 한다. 관리자에 따르면 우물에 가로 막힌 돌 때문에 우물 밑에까지는 물이 직접 들어오지 못하고 거기에 가설한 지하 20메터 도관을 통해 스위치를 눌러야 우물에 물이 차게 된다고 한다. 그 절차가 번거로워 현재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시정건설은 해마다 진행되고있지만 룡정지명지 우물에 대한 관리와 개선작업은 확연히 뒤떨어진 상황이다. 따라서 우물주위가 트럼프나 화투를 치는 유한자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전락되여 살풍경이다. 이라고 룡정의 각계인사들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민족 문화의 발상지이고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책원지인 고도(古都) 룡정에서 룡정지명지우물이 가지는 의미는 한낱 갈증을 해소해주는 도구의 의미를 넘어 깊고 크다. 과학적인 규획, 원상태 복구와 보존의 원칙하에 보호와 중시 그 대책이 시급하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3    축배가 댓글:  조회:3606  추천:73  2007-06-29
. 칼럼 .   축 배 가 김 혁     1, 축배가는 주로 술을 마시면서 부르게 작곡된 친목적인 주제의 노래를 일컫는것으로서 19세기의 오페라에서 관례적으로 나온다. 요한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유럽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아 축배의 노래는 미국 뮤지컬에도 고정적으로 나오는 노래가 되였다. 20년대 미국의 어느 한 극단의 책임자는 미국 의회에 출두해 축배의 노래가 금주령에 의해 위축됨으로써 미국 뮤지컬 극단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며 금주령에 대해 항의하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각나라에서 “축배”의 참뜻은 “건강”이라 한다.   만찬에 초대한 손님과 잔을 높이 들며 "건강을 위하여!"하고 건배하는 오늘의 품습은 우정을 강조하고 래일을 기원하는 흐뭇한 제스처라고 하겠다.    2, 마시자/즐거운 잔속에 아름다운 꽃이 피네/마시자/사랑의 잔속에 참행복 얻으리다 오페라 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는 이딸리아의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제1막 제2장에 나오는 유명한 권주가 “축배의 노래”의 한 구절이다. 이는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부르는 축배가이기도 하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프랑스가 배출한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가 1848년 발표한 유명한 소설 “동백꽃 아가씨”가 원작. 빠리 사교계의 빛나는 무희, 그 불같은 사랑과 비극적 운명으로부터 사랑을 위한 고귀한 희생과 인간적인 헌신을 보여준 명저이다. 소설의 호평에 힘입어 작자는 이를 5막의 희곡으로 각색, 1852년 상연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 3대 테너인인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카레라스가 각축전을 벌리듯 이 축배가를 불렀었다. 조선족의 유명한 성악가 김영철과 림정도 중앙TV에 출연하여 이노래를 열창한적있다. 음악과 문학의 조화, 거기에 연기와 연출, 무대미술, 조명, 의상 등의 요소가 완벽하게 하모니를 이룬 유명한 오페라, 유명한 축배가이다.  3, 우리 조선족에도 축배가가 만들어 졌다. 중국의 소수민족들 저마다 자기민족의 축배가가 있는 반면 〝노래와 춤에 능수능란한 민족〞이라 지칭(指稱)되는 우리 조선족에게 자체의 축배가가 없는 실정을 감안, 연변음악가협회가 “중국조선족 축배가응모활동”을 벌렸다. 동북3성에서 도합 81수의 응모곡을 접수, 최종 16수의 축배가가 입선, 황운선 사, 박학림 곡의 “축배의 노래〞가 1등상을 수상했다.  조선족들의 간암, 위암 발병률이 다른 민족보다 높다는 적신호는 이미 오래전에 내려졌다. 자치주 연변의 경우, 암 환자가 년 평균 3000명 속도로 늘어나고 해마다 암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2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길림성 평균수준보다는 높은 수치, 조선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간암, 위암 발병률이 한배가량 높다. 장기간의 음주가 암발생의 화근이라 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암증을 유발하는 음주, 식사 등 여러 면에서 효과적으로 통제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 년말년시 술의 계절이 돌아왔다. 송년회, 망년회, 동창회 등등으로 음식업소들이 여느때보다 흥청거린다.  축배가가 널리 보급되여 건강한 음주문화를 고착하는데 일조할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축배의 노래    
12    원앙새 쌍쌍 댓글:  조회:4314  추천:76  2007-06-29
. 칼럼 .   원앙새 쌍쌍 김 혁   1 계절을 앞질러 유난히 화창했던 4월11일, 자치주 수부 연길시를 가르는 부르하통하에 느닷없이 원앙새가 나타났다. 족히 50 여마리는 될 원앙새들은 현란한 깃털의 고운 자태를 뽐내며 짝을 지어 유유히 강심을 누볐다. 부르하통하는 이 몇년간의 기초건설과 환경건설을 통해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선으로 간주되여 있는데 그로서 물고기도 점점 많아지고 또 뭇새들이 날아들고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다. 시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모여들어 연변에서는 보기힘든 조류인 원앙새를 희한하게 관람했다.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원앙새를 폰렌즈에 담기도 하면서 감탄들이 자지러 졌다. 2 명의 리시진의 “본초강목”에서는 원앙을 일컫어 “암수가 어우러져 종일 물에서 노닌다. 숫놈을 가리켜 원, 암놈을 가리켜 앙이라 한다”고 적혀있다. 원앙은 중국과 로씨야, 한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원앙의 몸체는 보통 43㎝정도, 삼림이 울창한 산골짜기 계곡에서 생활하는데 겨울에는 저수지, 호수와 늪, 해변, 내가에서 무리로 겨울을 난다. 한 배에 7∼12개의 엷은 황갈색 알을 낳고 28∼30일이면 부화된다. 풀씨, 나무열매, 달팽이류, 민물고기 등을 먹는다. 원앙은 세계적으로 20,000∼30,000여 마리 밖에 남아있지 않은 새일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각 나라들에서는 다투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원앙(鸳鸯)이라는 두 글자가 음양(阴阳)이라는 음에서 전화되였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원앙새를 부부애가 지극한 동물로 인정했다. 그래서 이제 막 혼인 례식을 치르는 신랑신부에게 주례자가 “원앙처럼 금실 좋게 살라”고 당부하곤 했고 이어 나무로 만든 원앙 한 쌍도 선물로 주곤 했다. 원앙금(鴛鴦衾)이라는 원앙을 수놓은 이불과, 원앙침(鴛鴦枕)이라는 베개모에 원앙을 수놓은 베개도 신혼부부의 행복을 위해 당연히 주어지는 필수품이였다. 요즘 원앙새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깊어지면서 우리들의 바램과는 달리 수컷은 바람기 많은 무책임한 녀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지만 원앙은 시대와 력사를 통해 부부 금실의 상징으로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사랑이 지속되길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원앙에게 깊숙히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3 조선족은 본래 중국이란 거대한 다민족 국가에서 살아오면서 70년대 말까지 도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금욕사상이 뿌리 깊어 결혼관과 정조관이 가장 보수적이였다. 그리하여 조선족은 아주 순결한 이미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던 조선족 사회가 개혁개방을 맞아, 특히 한중수교 이후 결혼관과 정조관은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었다. 가족의 안정성보다 개인의 행복이 우선시되고 부부와 부모자녀 사이의 책임과 의무보다 선택과 자유가 우선시되면서 요즘 우리의 가정은 속전속결로 깨지고 있다. 조선족의 리혼률은  20%로 치달아 다른 민족에 비해 월등 높다는 통계도 나왔다 리혼률의 급증은 우리의 공동체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 떠올랐고 우리 는 이미 그 후유증을 톡톡히 앓고 있다. 사실 리혼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 의 시작이다. 변화하는 사회여건상 리혼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이를 예방하고 줄이기 위한 조처와 노력 역시 중요시 되여야 할 것이다.  가족의 쇠락과 위기를 경험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요즘들어 가족의 공동체성 회복이 강력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가족의 안정이냐 일신의 행복이냐를 대립적 가치로 설정하기보다 가족의 행복이 개인의 안정과 성숙을 가져오는 지름길임을 각성하자는 것이다. 변치않는 사랑의 상징- 원앙을 보면서 가족의 의미를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11    장백산 화산의 폭발 댓글:  조회:5654  추천:80  2007-06-29
  . 잡문 .   장백산 화산의 폭발   김 혁   1  재난영화라는 쟝르가 있다.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난을 극복하는 인간의모습을 다룬 영화, 흔히 지진, 대화재, 화산폭발, 외계인의 침략이나 류성의 충돌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다. 재난영화 하면 선참 떠오르는 경전으로는 “타이타닉 호”이다. 지난세기초 사상 초호화 유람선이였던 “타이타닉 호”가 처녀항행에서 침몰한 비극을 다룬 영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또 한편의 재난영화경전으로는  일본영화 “일본침몰”이 있다. “일본침몰”은 일본렬도를 뒤흔든 거대한 지진과 련쇄적인 화산폭발로 일본 전역이 바다속으로 침몰한다는 내용의 재난극복 영화다. 내가 “일본침몰”을 맨처음 보았던것은 아마 초중시절로 기억된다. 요즘 눈부시게 발전한 영화의 특수효과에는 못 미치겠지만 지진으로 레루가 엿가락처럼 탈리고, 아스팔트길이 계곡처럼 갈라지는 특수효과 장면들은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어린 나의 어섯눈을 휘둥그레 키우기에는 족했다. 포스터와 영화의 한 장면  “일본침몰”은1973년에 출판되여 400만권이라는 판매기록을 올린 일본 과학환상문학의 거장 코마츠 사쿄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했다. 당시 사상최고인 4천만원이라는 제작비가 투입된 초특급 대작영화였다. 그 결과 6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3억원이라는 흥행수익을 거두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3월에 출판된 원작을 같은해 12월말에 제작, 개봉한것은 전례없이 이례적인 일로써 당시 얼마나 큰 붐이 일었는지 짐작할수 있게 한다.  “일본침몰”은 그이후로도 TV시리즈, 만화 등 각종 쟝르로 뻗어나가 일대 사회현상이 되면서 계속 거대 붐을 일으켰다. 그 영화가 요즘 다시 리메이크(예전에 있던 영화, 음악, 드라마 따위를 새롭게 다시 만듦.) 되였다. 발달된 미디어의 혜택으로 변강오지에 사는 나도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된지 얼마안되여 DVD로 구입하여 볼수 있었다. 또 음향가(音响街)들을 “이 잡듯 뒤져”1973년판본 “일본침몰”도 구입하는 영화수집광으로서의 수집 벽(癖)의 기쁨도 만끽했다. 30여년이 흐른뒤 리메이크되여 나온 “일본침몰”은 70년대의 첫상영과 마찬가지로 일본영화 력사를 뒤집을 정도의 파괴력을 갖추고 대대적인 이슈가 되고있다. 또 한번 일본영화 통틀어 최고 액수의 제작비인 1억5천여원이 투여되고 일본연예계 최고배우들이 총출동하고 일본 굴지의 특수효과팀과 전례없는 륙해공군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일본에서 개봉한뒤 12일 만에 제작비 전액을 회수했고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6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왜 재난영화에 이렇게 “편집광(偏执狂)”적인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있는걸가? “할리우드 묻어가기”로 엄청난 제작비로 쌓아올린 상업효과다, 온난화 현상으로 지구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시점에 잘 맞추어졌다… 등등의 평정이 란무하지만 위기상황속 일본을 향한 일침을 보여준 영화라는데 그 최종 포인트가 있다.  단 대규모 재해가 발생했다는 가상 시나리오로 관객들을 대거 스크린앞으로 불러모은 영화는 무관심과 자기중심주의가 팽배하고있는 오늘날, 민족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으며 그 위기상황에 대해 급박하게 깨우쳐 주고있다. 온나라가 침몰이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배경으로 인간이 할수있는것은 무엇이고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영화는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일본인들만의 공동체의식, 위기의식을 진하게 엿볼수 있다.   2  몇해전, 서울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젊은 감독 하나가 연변행차를 했다가 내가 발족시킨 “조선족영화동호회”의 극성스러운 팬들과 마주했다. 그 감독이 만약에 블록버스터급(대규모 흥행을 목적으로 막대한 자본을 들여 제작한 영화.)영화를 만들 조건이 주어진다면 어떤 영화부터 만들겠냐고 묻자 나는 “장백산(백두산) 화산의 폭발에 관한 재난영화를 만들거다, 시나리오는 구상중이다”라고 답했었다. 술좌석에서 광적인 영화팬들끼리 기분으로 말해제낀 일인데 그 친구가 “김작가, 참 좋은 발상이다, 꼭 시나리오로 만들어 보라”며 귀국해서도 그냥 메일로 전화로 시나리오의 진척여부를 물어오는것이였다. 알콜의 작용으로 인한 호기도 있었겠지만 사실 장백산화산에 관한 자료를 읽고 어진간히 충격을 받은데서 나온 이야기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장백산은 화산폭발로 이루어진 휴화산(休火山)이다. 장백산의  폭발시기는 1668년, 1702년, 1903년경에 천지화산으로부터 분화된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보다 오래된것은 화산재속에 묻힌 탄화목의 탄소동위원소 년대를 측정하면 기원 960년에 대폭발을 하였던것으로 알수 있다. 그렇다면 장백산의 폭발 규모를 따져보면 대략 어느정도 일까? 장백산은 원래 3000메터가 넘었는데 마지막의 화산폭발로 인해 2000메터대로 낮아지게 되고 산봉우리가 통째로 날라갔다. 이는 지난 1만년동안 전 지구상에서 일어난 화산분출 규모중에서 4위안에 속한다고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산의 사례로는 폼페이 화산이 있다. 기원후 79년 로마의 휴양지 폼페이-헤르쿨라네움 일대에서 적어도 2만 명의 사람을 통째로 매몰시킨 화산. 그 화산의 폭발의 분출량은 약 5 – 8km3 정도라고 하는데 장백산은 100 - 120km3로 추정된다. 그 10배 이상이라는 거다. 그러니 당시 장백산의 분출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컸는지 짐작할수 있다. 장백산화산 폭발시, 화산재가 편서풍을 타고 멀리 울라지보스토크를 지나 일본 혹카이도-혼슈 북부까지 날려가 무려 5㎝ 두께로 덮여있을 정도였다고한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화산 폭발사진. 백두산과 같은급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것은 이 장백산 폭발로 인해 발해가 멸망했을것이라는 설(說)이다. 발해멸망은 926년으로 기록되여있으니 장백산 폭발시기와 미묘하게 맞물린다. 해동성국(海东盛国)이라 불리우면서 활발한 해외무역으로 동북아 최강의 선박인 300톤급 배까지 가지고있었던 발해가 일개 유목민족에 지나지않는 거란에게 허무하게 멸망했다는 강단사학의 추정은 아직도 많은 력사학자들의 의문을 자아낼법한데, 그러한 설이 나옴으로서 장백산 화산 폭발이 발해왕조를 단숨에 멸망시켰다는 론조가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장백산화산의 폭발은 당시 발해의 민심혼란과 국론분렬을 야기하여 이 “해동성국”의 국력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것으로 보인다는것이다. 이런 일이 설마 일어날까? 혹은 일어나도 대개 몇백년 혹은 몇천년뒤 일일터이니 나하고는 눈곱어치의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거다. 여기서 오늘의 화제- 우리 모두를 아우를 위기의식이 요청된다.   3  미국의 저명한 리서치(Research- 실천활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연구 방법) 전문가인 죠지 바너가 펴낸 저서에는“주전자 속의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모 대학의 실험실에서 개구리의 신경반응 실험을 했다. 먼저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어 보았다. 즉각 반응으로 살기위해 개구리는 필사적으로 튀여나왔다. 이번에는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열을 가했다. 개구리는 상황 변화를 느끼지도 상황에 대응하지도 못하고 서서히 삶아져 죽어갔다. 죠지 바너는 이 같은 모습이 코앞에 닥쳐온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요즘 사람들의 현상태라 지적했다. 즉 현상유지, 안주, 편안함, 순간쾌락으로 우리의 령혼이 무너져가고 죽어간다는 경고이다.   죠지 바너의 경고는 곧바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공동체사회에 요즘처럼 “위기”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실감나게 다가온 적도 없었던것 같다. 한세기 이전에 무어져 세월의 파고(波高)를 넘고 암초를 피해 달려온 “조선족호”라는 인끔높던 선박의 흔들림을 우리는 멀미처럼 겪고있다. 개혁개방과“코리안 드림”이 가져온 제반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조선족사회를 발전과 진통을 동반한 선택의 물길에 몰아넣고있다. 우리주변에서 엄연히 벌어지고있는 농촌집거지의 소실, 인구의 감소, 모어의 위축, 리혼률의 증가와 결손가정의 산생, 인재류실, 혼인난 등등의 현상들은 이미 상당히 위험한 수위에 도달하였다. 역설적으로 공동체사회의 해체와 민족의 동화라는 “위기”가 서서히 대두하고 있는것이다. 그럼에도 점점 뜨거워지는 물속에서 이변(异变)을 모른채 유유히 물놀이나 즐기는 개구리는 우리의 모습과도 꼭 닮은데가 있다. 배가 물속 암초에 부딛히고 선창에 구멍이 나 물이 새여들어고 선체가 기울기 시작함에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부끄러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자기가 일껏 일구어놓은 터전도 버리고 오로지 네온싸인이 분만해 오르는 도시의 광환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돈벌이에 환혹해 자식들의 절규도 버린채 서울행에만 급급한 사람들, 우리 말의 우수성도 잊고 외래어만을 공리적으로 또는 시체멋으로 구사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것보다는 보이는것을, 영원한것보다는 눈앞의것에 그 가치의 중심을 옮기고있다. 인간은 위기가 눈앞에 닥쳐야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는 근성을 갖고 있다. 뜨거운 물이라는것을 깨닫고 빠져나오려할 때 솥은 이미 달구어졌고 내 몸은 뜨거운 물에 갇혀 있다. 이렇게 현실의 변화에 무감각한 사람들의 생각을 갈급(渴急)하게 사로잡는 메시지가 바로 위기의식이다. 거금을 부어 “일본침몰”이라는 시나리오를 루차 만든 일본에서 많은 성공사례의 회사들은 위기경영을 그 회사의 불가결의 경영준칙으로 삼고 있다. “닛산” 자동차회사가 바로 그 전범을 보여주고있다. 세계 제 1의 자동차 생산, 판매회사로 부상해 경제형 고품질의 차로 지구촌의 반을 일제차로 덮는데 성공한 자동차회사이다. 1990년대 후반 70년 력사를 자랑하던 “닛산”은 장기불황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 회사의 문을 닫아야할 위기에 빠졌었다. 이에 회사는 최고경영자를 영입하는것에서 회생(回生)의 해법을 바랐다.   “닛산”에 부임한 신임사장 카를로스 곤은 곧 위기의식을 새로운 슬로건으로 내들었다. 회사가 위기의식을 유지하는것이 불가능하다면 종업원의 사기는 둔감해져 수익성있는 회사를 만드는데 중요한 요소를 놓치게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때문에 위기감을 체계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기업경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으며 이를 성장동력으로 련결시키려 했다.    카를로스 곤 사장 애초 곤 사장의 몰아붙이는 위기경영이 계속되자 사원들은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이때문에 그에게는 “랭혈동물”,  “장의사(葬仪士)같은 량반”이라는 악명이 줄줄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부진한 회사에 대한 재건기간중 “닛산”은 곤 사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사원들 사이의 위기감으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토에  공장, 연구소, 부품업체 종사자들의 각고의 노력이 기울여졌고 이는 기술 축적과 신제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랭혈동물”사장의 취임후 1년만에 6800억엔 적자기업을 3311억엔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으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180도로 바뀌였다. “없는 위기도 만들어 낸 경영자”가 진정 위대한 경영자임을 절감하며 너나가 엄지를 빼들었다. 이처럼 위기의식의 소요(所要)는 한개 회사 더 나아가 민족, 국가의 존립과 번영이라는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서 위기(危机)라는 글자를 다시한번 찬히 들여다 보자. 위(危)는 "위태로울" 위이다. 그러나 기(机)는 어떤가?  기는 "기회"를 나타내는 글자이다. 영어에서는 기회를 찬스(Chance)라고 하는데 바로 이 글자의 깊은 뜻을 분명히해 준다. 위기라는 단어는 이처럼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위기라는 이 단어가 갖고 있는이중성 즉 부정과 긍정, 마이나스와 플라스의 공존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면에서 깊은 바다속 진주조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진주를 품고있는데다 껍데기는 세공품(细工品)에 활용되여 보배덩이로 일컫는 진주조개, 이 조개에 모래가 들어갈 경우 조개는 두 가지 선택을 할수 있다. 하나는 모래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이물질인 모래의 침습으로 인해 진주조개는 병에 걸리거나 죽게된다. 다른 선택은 모래를 나카(Nacre)라는 물질로 변화시키는것이다. 이로서 수년간은 불편하지만 병에 걸리거나 죽지않고 조개는 진주라는 귀한 보석을 탄생시키는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위기의 상황을 진주와 같은 값어치로 탈바꿈시킬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가진 위기에 둔감한 스스로의 함정을 걷어내야 한다. 위기를 알아야 위기를 극복하려는 욕구가 분출될것이고 위기를 알아야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수도 있을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철저한 자아점검과 주변환경에 대한 투철한 리해가 있어야 할것이다. 위기의 발생, 진행, 해결과정에서 보인 응집력과 성과로 우리 공동체의 미래의 주가, 성장성을 재평가 받아야 한다. 21세기 중국속의, 더 나아가서 세계속의 조선족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문명사적 시각에 립각한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만 하는것이다. 이제 나도 단순한 렵기제재나 일회용 오락물이나 만드는 창작의취를 떠나 장백산화산폭발이라는 시나리오를 다른 창작스케쥴을 제치고 선참 완수해볼 예정이다.   "연변문학" 08년 9월호        
10    거장들의 죽음 댓글:  조회:4159  추천:74  2007-06-29
 . 칼럼 .    거장들의 죽음    김 혁   지난 한해 세계문학계의 핫이슈를 살펴보면 많은 유명한 거장들이 유명을 달리한 해이기도 하다. 우선 한글 문학의 거목, 소설가 박경리가 5월, 폐암으로 타계했다. 박경리는 1969년 대하소설 “토지”의 련재를 시작, 장장 25년에 걸쳐 원고지 4만장 분량으로 탈고해 한국 현대문학에 금자탑을 세웠다. 그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속에 새겨진 개인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짚어낸데서 “한국문학의 어머니”로 불리고있다. 세계적 지성,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8월,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구쏘련 반체제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병동” 등의 작품으로 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73년 체제의 불의에 대항한 “수용소 군도´ 를 내놓으면서 반역죄로 강제추방당했다. 그는 16년 만에야 로씨야 시민권을 회복해 귀국한뒤에도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조국과 민족의 부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불굴의 저항 정신을 문학 작품에 담아내여 로씨야의 “살아있는 량심”으로 불리웠다.   이외 유명한 과학환상작가 아서 클라크도 3월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작품은 중국출판계에서 과학환상문학이 십분 풍미하던 80년대 조선말로도 번역되여 우리에게 읽힌적 있다. 그는 단순한 과학환상작가의 령역을 초월한 인물이였다. 1945년 그는 통신위성이란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실제로 통신위성이 출현한때보다 수십년을 앞선 획기적인 발상이였다. 또 우주왕복선과 슈퍼컴퓨터, 광커뮤니케이션 등을 너무도 정밀하고 자세하게 묘사한 그는 과학소설을 눈앞의 현실로 바꾸는 데 공헌한 인물이란 평가를 받았다. ------------------------------------------------- 한 시대를 풍미하며 세월의 행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풍운아들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우리 문단에서도 이 몇해간 1세대 2세대 원로작가들이 한분, 두분 유명을 달리하셔 문단을 슬픔에 빠뜨리고있다. 작가는 갔지만 작품은 남고, 올곧은 삶 역시 모든이들의 가슴에 남았다. 그들이 가는 길을 지켜보는 이들은 세상 방방곡곡에 참으로 많다. 묵도로 추념(追念)하는 정은 모두 그들이 뿌린 정신의 씨앗일터. 낡은것과 새것이 바통 터치로 임무를 교대하는 시점, 떠남과 도착이 한 정거장에서 조우하는 순간이다. 원로들은 떠나시며 젊은 후배들에게 세속을 벗어난 고독속에 창작을 신앙같이 여길것을 한결같이 당부한다. 도식적인 재단을 삼가하고 독자와 세월이 공감할수 있는 작품을 찾아 령혼의 울림을 이끌어내라고 조언한다. 하나 둘 큰별이 질때마다 풍운의 세월속에 자신의 존재 모두를 오로지 글쓰기에 투신한 진지한 정신과 품위있는 삶들을 이제는 더 만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이들의 영정앞에 처연히 고개가 더 숙어지는걸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몫이란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여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그들이 남긴 문학적유산을 소중히 챙기는 일, 그들이 보여준 장인정신과 도저한 작가적 품위를 고스란히 이어받는 길이다.   큰 별의 빛으로 우리들이 나아갈 길을 비추어보며 위기의 우리 문학을 살리는 길에 소명을 다하고저 기축년 벽두에 각오 하나 머금어 본다.  "종합신문" 2009년 1월 5일      
9    우보천리 댓글:  조회:6322  추천:74  2007-06-29
. 칼럼 . 우 보 천 리  - 기축년 잡설      1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소만큼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물은 흔치 않다. 하늘을 담을듯 어진 눈, 어떤 고난도 헤쳐나갈듯한 든든한 뿔, 산이라도 옮길 힘이 있어보이는 넉넉한 체대…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우리조상들에게 소는 가장 도타운 친구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기도 했다. 논을 갈고, 우차를 끌고 연자방아도 돌리면서 인간의 힘으로 부족한것을 보충해 주던 귀한 짐승이였다.   시골에서 제1호 재산목록으로서 소가 있고없는것이 바로 그 집안의 경제력을 징표하군 했다. 따라서 한식구라는 뜻으로 소를 생구(生口)라 부르며 배려도 각별했다. 외양간을 부엌가까이에 지어 음식 대접을 했고 날씨가 추워지면 짚으로 짠 덕석(추울때 소의 등을 덮어주는 멍석)을 입혀 주고 봄이 오면 외양간을 맨 먼저 깨끗이 치우기도 했다. 소는 풍요와 힘을 상징한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은 고인의 산소를 택할때 “소의 형국을 택하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라고 했으며 “꿈에 황소가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고 길몽으로 해몽했다. 여기서 소꿈은 조상, 자식, 재물, 사업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때문에 소에 관련된 속담, 격언 사자성어 등 언어적 표현도 여느 동물보다 많다. “소 웃음”, “황소고집”, “소처럼 일한다”,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써라”, “소에게 한 말은 안 나도 녀자에게 한 말은 난다”와 같은 속담… 사자성어로는 “돌밭을 갈아 옥답을 만든다”는 의미의 석전경우(石田耕牛), 쉬지않고 꾸준히 간다는 뜻의 우보천리(牛步千里), “범처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소처럼 우직하게 살아간다”는 호시우보(虎视牛步)”등이 있다. 교훈담으로 “교각살우(矫角殺牛)”라는 말도있다.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집착해 큰 일을 망치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권고하는 말. 이와 같은 표현들은 소처럼 순박하게 근면하게 충직하게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서구에서도 소는 오래전부터 숭배의 대상이였다. 고대 애급에선 소를 태양신의 자손이라 여겼다. 소가 죽으면 미이라로 만들어 신전(神殿)에 매장할 정도로 신성시했다. 소는 때로 미련하고 멍청한 대명사로 비유되기도 한다. “소귀에 경읽기”, “소 제 이불 뜯어먹기” 란 속담이 그렇고 영어로 “우둔하다”는“보바인(bovine)”도 소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는 성실하고 온순하고 끈질긴 소의 무한미덕에 비하면 “옥의 티”와도 같다.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게 없다."라고 했다. 사계절 열심히 일하고, 팔려갈 때는 부(富)를 남겨주고, 우유와  고기로 영양을 공급해 주고, 가죽은 북으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식용외에 소는 각 부위별로 공업용, 약용. 미술품의 재료로 쓰인다. 례컨대 뿔은 활과 같은 무기, 우산, 칼, 담배 물부리, 도장재료 등 세공품의 재료로 쓰이고 발굽은 단추, 제유 등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소가죽은 물론 털도 담요, 띠, 솔 등의 제조원료로 쓰인다. 또 뼈와 힘줄로는 아교와 젤라틴을 만들고 창자는 테니스나 바드민톤의 채나 악기의 줄, 수술용 봉합사의 실로 쓰이는 등 어느 하나 버릴것이 없다. 이렇게 소처럼 인간에게 리로움을 주는 동물이 또 있을가? 모든것을 베풀며 주기만 하였지 욕심을 채우지 않는 동물 역시 소가 아닐가?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는 말이 없어도 열두가지 덕이 있다”고 여겼고 로신과 같은 대문호도 “소는 풀을 먹지만 우유를 남긴다”고 “소 례찬론”을 펼쳤다. 2  연변특산 하면 곧바로 황소를 그중의 굴지로 꼽는다. 연변황소의 양육력사는 이미 100여년을 줄잡는데 한온대산구에서 양식이 적합한 역육(力肉)겸용의 소이다. 중국5대 지방우량소중의 하나로 뽑혀 그 명성이 높다. 연변황소는 적응성이 강하고 내한성이 좋으며 거친 사료도 잘 먹는 특점이 있어 기나긴 세월동안 줄곧 농촌의 주요 농경 동력과 비료 원천으로 되였다. 국가농업부는 연변황소를 국가품종자원 보호목록에 편입시켜 중점보호를 실시하고있다. 최근에 개량을 통하여 연변황소는 체구가 크고 견실하며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좋은 독특한 풍미의 고기소로 부상되여 일본의 화우, 한국의 한우와 나란히 어깨를 겨루게 되였다. 소띠해를 맞아 흥감이 아닌 자부감 어린 눈으로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우리의 연변황소다.  3  12간지중 가장 느리게 걷는 동물이 소다. 뱀은 기고 룡은 날고 쥐, 닭, 토끼는 방정맞고 돼지는 뒤뚱거리고 개와 원숭이는 천방지축이고 호랑이와 말은 날쌔지만 다급하다. 어느 순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들이다. 하지만 소의 걸음걸이에는 듬직함과 우직함이 담겨있다. 마치 숙고(熟考)끝에 중대사를 결재하듯 한발 두발 신중하게 자국을 남긴다. 그래서 “우보천리”라는 명속담도 생겨났다. 느릿하지만 꾸준히 천리를 가고 우직하지만 실족(失足)이 없는것이 황소걸음이다. 요즘은 매사에 속도가 강요되는 시대이지만 어찌보면 속도가 능사(能事)는 아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재빠르기보다는 우직함이 잔꾀보다는 성실함이 결국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것은 바로 이러한 “느림의 미학”이다. 용의주도한 관찰과 적확한 선택, 듬직한 결단과 우직한 실행으로 세상만사를 놓치지 않고 곱씹어 볼수 있는것이 우보의 기품이요 지혜다. 근년래 중국조선족은 변혁기의 갈림길에서 새롭게 거듭나기위한 산고와 같은 진통을 앓고 있다. 이 갈림길에서 작금의 시기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스스로 갈길이라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마다하지않는 소의 그 우직함이 필요하다. 힘들다고 주저앉지 않으며 갈길이 멀다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도전이야말로 우리 민족 모두가 소띠의 해에 다잡아 나가야 할 자세일것이다. 은근과 끈기, 여유로움을 지닌 소의 천성을 배워 신중하게 결단하고 듬직하게 행동한다면 곤경, 고통, 시련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을 다 떨쳐내고 우리는 또 한번 우수한 민족이라는 방명(芳名)으로 거듭날수 있을것이다.      
8    령혼의 방 댓글:  조회:4317  추천:78  2007-06-29
  . 칼럼 . 령혼의 방 김혁 고대 애급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는 “무세이온”이라는 도서관이 있었다. “무세이온 (mouseion)”은 신성한 사원이라는 뜻이다. 이 도서관은7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알레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와 같은 쟁쟁한 석학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전란을 겪으면서 무세이온이 그만 불타버렸다. 고대 이집트의 녀왕 클레오파트라는 미모만 빼여난것이 아니라 학문과 책을 사랑했던 지성적 녀인이기도 했다. 그는 분소(焚燒)된 장서를 몹시 애통해했다. 하여 즉위하자 도서관 재건부터 팔을 걷어부쳤다. 그의 로고에 인차 20만권의 두루마리 장서로 새 도서관을 채울수있었고 그 덕에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5세기까지 문화와 과학이 륭성한 도시로 번창할수 있었다. 사실 요즘만큼 책읽기가 운위(云谓)되는때도 없는듯하다. 해마다 봄이면 의례적으로 기관, 언론사•시민단체 등이 잇따라 독서캠페인을 벌린다. 좋은 일이다. “개권유익(开卷有益. 책은 펼치기만 해도 리익이 된다)”이라 하지 않았던가. 독서 캠페인으로 책읽는 풍토가 확산되고 나아가 위기에 처한 민족문화까지 일으켜 세운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조용히 살펴보면 작금의 우리의 독서풍토는 사실 심히 부끄러운 수준이다. 지식정보가 가속적으로 팽창하고 출판 도서도 늘어나고있는데 숨가쁘게 돌아가는 오늘의 절주는 외려 책과 담 쌓는 세태를 만들고있다. 출국, 도시진출로 인한 독서인구의 급락, 인터넷이 발달로 인한 활자매체의 소외가 이러한 풍토를 만들고있고 독서 문화의 부재를 실감케 한다. 각종 캠페인과 홍보활동을 벌리고 있지만 여전히 형식적이고 의례적이기 일쑤여서 전반 민족을 통한 독서의 저변 확대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공공도서관의 인력과 장서수도 부족해 정보화, 개방화시대에 필수적인 다양하고 신속한 정보를 시의적절하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도 안고있다. 정보의 보고로서의 독서공간이 기능을 다하도록 하고 대중들이 손쉽게 독서할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이 이루워져야 전 민족을 아우르는 독서풍토의 형성을 기대할수 있을것이다. 학습형사회, 독서형사회구축에 관한 정부의 바램이 사회성원들의 행동으로 되게 하자면 바로 이 운동을 이끌어갈 전문시스템이 구전해야 하는것이다. 이면에서 조권옥 사장이 휘동하고있는 연변조선문독서사의 노력의 행보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있고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있다. 옛날 서구사람들은 독서실을 “령혼의 방” 혹은 “령혼의 료양실”이라고 불렀다. 또 “책이 없는 방은 령혼이 없는 방과도 같다”는 속담, 경구도 만들어냈다. 클레오파트라처럼 전민독서의 중요를 깨쳐알고 피폐해진 토양우에 도서관 하나, 독서실 하나를 조성하는 절박함을 우리는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처처에서 볼수있는 유흥장소가 아닌 “령혼의 방”에서 좋은 책과 만나다 보면 우리는 아름답고 윤택한 인생의 길을 찾을수 있을것이다. 또한 개인의 발전속에  요즘 흔들리고있는 우리의 공동체 역시 선진민족으로 발돋음하고 세계속에 확실하게 뿌리 내릴수 있을것이다.   "종합신문" 2009년 4월 13일  
7    사라지는 전통농가 댓글:  조회:3971  추천:73  2007-06-29
   . 칼럼 .   사라지는 전통농가   김 혁     1 저기저기 저달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짓고/ 량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누구나 어릴적에 불러봤을 구전민요 “달노래”의 한구절이다. “옥도끼 금도끼로 찍고 다듬어 짓고 천면만년 살고지고”저하던 집, 그 집이 사라지고 있다. 조선족전통가옥이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선족 밀집구역이였던 룡정이나 화룡 지역에서 루루세월 기록해온 조선족농가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자치주수부인 연길시 교외의 소영진 하룡촌에 서도 100년세월 버텨온 전통가옥 한 채도 불과 몇해전에 소실됐다. 현재 룡정시 지신진 장재촌과 개산툰진 북흥촌, 훈춘시 경신진 회룡봉촌에 부분적으로 몇채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나마 언제 스러질지 몰라 그 모습이 곤궁스럽다. 조선족 전통가옥은 이땅에 정착한 조선족 이주민들의 애환을 담은 1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다. 이미 세계에 그 우수성을 알린 한옥의 계승과 발전으로서의 연변의 전통농가는 온돌방과 마루가 균형있게 결합되고 외양간이 딸린 륙간집, 팔간집이 그 형태인데 북방의 추위와 더위를 해결해주고 가족제도에 맞게 남녀와 장유(長幼)관계에 따라 공간 배치 또한 적절한 구조를 이루고있다. 연변주 건축설계심사쎈터의 김광택교수는 전통가옥의 소실에 대해 “옛집을 지어온 장인들이 타계해서 그 기량을 지닌 이들을 찾아볼수 없고 또한 조선족전통가옥 항목을 신청하는 보호단위가 없기때문.”이라고 분석한다.   2 해외에서 꾸준히 펼쳐오는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라는 캠페인이 있다. 산업혁명의 개발 바람이 자연과 문화유산을 거침없이 날려버리던 1895년 영국에서 발기된 자연신탁국민운동.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금과 기부를 통해 보전할 가치가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사들여 영구적으로 관리하는공익적인 운동이다. 3인의 민간독지가에 의하여 설립, 파급된 이 캠페인으로 민간단체들은 총 연장 4백마일에 이르는 자연해안을 보유하거나 보전하고 있으며 2백개 이상의 력사적인 건물과 40만 에이커(영국에서 주로 쓰이는 면적단위) 정도의 토지를 사들여 보존을 목적으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이 단체는 46만명 이상의 자연애호가들을 규합하게 되었으며 자연미를 지키자고 하는 국민운동의 핵심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1907년에는 법률의 뒷받침을 받기에 이르렀다. 1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이 활동은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랄리아, 일본 등 약 30여개 국가에서 추진되고 있다.  산업화과정에서 겪게되는 자연환경 및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자원의 파괴는 인간 본연의 상태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강조하면서 자연으로의 복귀 내지는 환경보전을 주장하는 사상은 우리에게도 곧바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3 우리의 전통과 맥줄기중에는 다양한 형태나 요소가 많은데 그중 전통농가는 의식주를 지켜준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사뭇 중요한 생활경관의 하나이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도래와 함께 “개발”이란 이름아래 아빠트가 도시에서 농촌까지 들어서고 도로가 뚫리고 각종 산업시설, 공장, 유흥업소들이 들어서다 보니 오래된 집도 헐리게 되고 편리를 추구하다 보니 옛날 전통가옥은 세월의 뒤안길로 밀리게 되였다. 앞으로의 세기는 문화세기라고 일컫는다. 문화에는 우렬이 없다. 그 민족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 문화자체는 독자적이고 전통적인것이어서 비교의 개념이 아니라 상호 존중의 개념이기때문이다. 때문에 전통의 파괴와 무분별한 타의추종은 무엇보다도 자기것을 업신여기는 렬등감에서 나온 부끄러운 행위이다.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의 경물, 우리의 가락, 우리의 말들이 이미 “명소”, “명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지만 우리의 보존과 활용은 여전히 미약하다. 너나 할것없이 부동산, 아파트를 투기, 투자의 대상으로 삼는 근시안적 사고에서 벗어나 전통농가들로 조성된 마을이나 특별한 단지의 구축에 한번 눈길을 돌림은 어떨까? 우리 스스로가 보호와 활용방법을 개발하고 또한 이를 타민족과 외국인들에게 개방, 제공한다면 외부인은 우리만의 문화를 체험, 공유하고 우리는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유조하리라고 본다. 해외에서 좋은 본을 보여준 내셔널트러스트의 경험을 적용해 전통농가를 지원자들에게 분양하는것도 하나의 좋은 방식이 아닐가? 견고한 콩크리트가 아닌 부드러운 결이 선 목재의 퇴마루,  얼레빗으로 곱게 다듬은듯한 노란지붕, 이마를 마주하듯 처마와 처마가 맞대여 있던 낮은 농가들, 보는 눈이 정겨워 보이게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전통가옥이 이제 당금 사라져 영상이나 박물관에서나 찾아볼수 있을것 같아 마음이 석연치 못하다. 우리는 언제쯤 우리들의 힘으로 지역의 문화유산과 환경자산을 보전하고 가꾸며 미래에 보답할 관리자로서의 사명을 다할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종합신문" 2009년 4월 20일        
6    귀소본능 댓글:  조회:3758  추천:73  2007-06-29
  . 칼럼 .   귀소본능   김 혁   1   CCTV “동물세계”프로에서 “연어의 회귀”라는 특집방송을 보고 감개에 젖은적 있다. 연어는 한반도의 동해, 일본, 오호츠크 해,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사는 회유어로서 머리는 원추형이며 주둥이는 뾰족하고 몸은 약간 가늘고 긴 편이다. 연어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태여난 하천으로 되돌아오는것이다.   연어는 민물에서 태여난뒤 바다로 나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다시 자기가 태여났던 하천으로 다시 되돌아와 산란하고 사망한다. 연어들은 아주 예민한 후각을 리용하여 고향의 강 즉 모천(母川)의 냄새를 감지한다고한다. 흔히 여름이나 가을에 산란하는데 원양에서 몇달동안 수천수백리나 헤염쳐서 산란지인 강에 도착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며 높이가 3m나 되는 폭포도 몸부림치며 뛰여넘는다. 그와중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오로지 고향의 강으로 되돌아가는데 전력한다. 떼를 지어 이동중에 죽음의 위험도 감수한다. 곰이나 가마우지같은 동물들의 먹이로 되고 인간 낚시꾼들에게 잡히고 공장에서 배출한 오염 물질에 희생된다. 연어는 그 길고 고통스런 려행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산란과 죽음속에서 그 의미를 완성한다. 고향을 향한 연어들의 력동적인 몸부림, 그 처절하면서도 장엄한 순환은 방송을 보는 내내 커다란 충격과 전률을 주었다.   2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및 생식을 위한 본능 못지않게 중요한 본질적 행동요소가 있다. 집으로 향하는 본능 즉 귀소본능(归巢本能)이다. 바다의 넓이를 헤가르고 강물의 급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의 험난한 려정은 흡사 우리의 인생과도 같다. 인간에게도 그 회귀본능은 적용되며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정감어린 귀소의 종착역이 바로 고향이다.   고향은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일상에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마음의 안식처다. 고향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사람의 생각을 이끄는 힘도 있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도 있다. 급변하는 시대, 경쟁이 소요되는 사회에서 현대인은 회귀본능의 연어처럼 근원적인 존재확인에 목말라하면서 본능적으로 각인된 고향의 내음을 찾아 귀향길에 오르고 있는것이다.     3   “연변, 떠났던 농민이 돌아온다”는 신문기사를 반갑게 접했다.  “땅을 버리고 떠났던 허다한 농민들이 다시 농촌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향후 정부의 경작지 우대 정책이 속출할것에 대비하면 땅은 이제 농민들에게 있어서 큰 자산이다. 과거 땅을 버리고 타향벌이에 나섰던 많은 조선족 농민들이 경제침체 여파로 륙속 귀국하면서 다시금 땅을 찾는 붐이 연변에서 한동안 일어날 전망이다.”고 기사는 전하고있다. 땅을 버리고 처자 리별하고 고향을 떠나 타지방과 외국의 로무수출에 생계를 걸었던 이들이 이제 타향이나 외국에 가서 하는 고생만큼 고향에서 열심을 보이면 땅은 한번 믿어볼만한 장사라는 계산때문에 이한 귀소의 현상이 일고있는것이였다. 한편 “돌아온 조선족 모친”이라는 보도에서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아이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들의 일례를 들고있다. 장춘시 조선족중학교 학생 1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부모가 귀국한 학생이 46.6%인것으로 나타났다.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은 어머니들은 "애들이 어딘가가 많이 달라졌다. 성적도 떨어지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됐다. 아이를 위해 돈을 벌러 갔지만 실상 아이가 가장 필요로 하는것은 엄마, 아빠의 사랑이라는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가 힘들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아들을 지켜줄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감수를 토했다.   현대인들에게서 생계를 위한 리소(离巢)적 압박은 아주 큰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귀소야 말로 일상의 압박을 극복할수 있는 힘의 원천이 아닐가. 연어에게 자신이 태여난 곳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게 하는 모천은 인생살이 고리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고향에 돌아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삶에 감사하고 재충전을 할 시간은 필요하다.   단지 욕망이 가리키는 양지만을 찾아 갈지(之)자 행보를 하던 행태에서 벗어난 고향에로의 회귀, 이러한 리향과 귀향의 아픔들이 우리 공동체사회가 직면한 진통의 현실에서 벗어나 한 단계 성숙을 위한 성장통이 되기를 바란다.    종합신문" 2009.5.25      
5    잃어버린 세대 댓글:  조회:5620  추천:73  2007-06-29
. 칼럼 .   잃어버린 세대   김 혁     1,   요즘의 신새대들은 “상산하향(上山下乡)”이라는 낱말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소학시절이였던 70년대에는 중국 전역에서 “상산하향” 운동은 거세차게 불어쳤다. “상산하향”이란 도시의 “지식청년”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에 정주하며 농업. 목축업 등 생산로동에 참가한 운동이다. 당시 연변 각지에서는 대도시 상해에서 온 지식청년들을 처처에서 찾아볼수있었다. 당시 시골이나 진배없는 변강오지에 살고있던 우리는 지식청년들이 가져다 준 나일론 양말이나 츄잉껌을 받아안고 세상 둘도 없는 진품을 선사받은듯 그렇게 좋아했었다. 지금도 연변지역에서는 당시의 형용어를 빌어 깔끔하거나 잘 생긴 사람들을 보면 “상해사람 같다”는 말이 류행되고있다. “상산하향”운동은1956년 정부가 지식청년들이 시골로 가서 농업생산 및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하도록 호소하여 이후 매년 100만 명 규모의 지식청년이 농촌 및 산골로 내려가서 정주하기 시작한것이 시초이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홍위병운동으로 일시 중지되지만 1968년 “인민일보”가 “지식청년이 농촌으로 내려가 빈하중농으로부터 배우는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모택동주석의 최고지시를 전달하자 대규모의 “상산하향”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1968년부터 1978년까지 10년간 1600만명의 지식청년들이 북으로는 흑룡강성, 서로는섬북, 운남성과 청해성, 신강 등 변방지역의 농촌으로 파견되였다. 그중 흑룡강성 북대황에만도 50만명이상의 지식청년들이 운집해 들었다.   1976년 “4인방”이 거꾸러지고 1978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에 대부분의 지식청년들이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2,   “상해지식청년 연변하향 40돐기념활동  및 환영대회”가 8월18일 연변예술극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40년전 이땅에 하향했던 1만8천여명 상해지식청년가운데서  1200여명이 연변을 다시 찾아 회포의 정을 흠뻑 나눴다. 연변주당위  서기가 연변인민들을 대표해 이들에게 축사를 드렸다. 그는 수많은 상해지식청년들이 동북지역에 하향해 당지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어깨겯고 로동하고 생활하면서 변강소수민족지구의 번영, 발전을 위해 적극 기여를 한 데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조국은 하향지식청년들을 잊지 않을것이고 력사 또한 저버리지 않을것이며 연변인민들은 더우기 이러한 정을 잊지 않을것이라고 지적했다. 연변에 내려와 물 설고 낯설은 곳에서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 연변은 “제2고향”으로 다름없었다. 이들 중에서 어제의 역경과 아픔을 딛고 오늘날까지 매진하여 현임 국가 국토자원부 부장, 중국공상은행 행장, 상해복단대학부교장 등 고위급 간부와  지명인사들도 배출되였다. 40년만에 연변을 찾은 그들은 감개에 넘쳐 연변과 상해간의 거리를 더욱 까갑게 하여 서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교류와 합작을 추진하면서 공동으로 더욱 아름다운 미래의 장을 펼쳐나가기 위하여 연변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관심하고 지지할것이라고 표했다. 3,   미국의 1920년대. 력사는 이 시기를 “광란의 년대”라고 부른다. 1차대전이 끝나 온정을 찾고 물질적 풍요가 찾아왔지만 정신적 허기는 점점 깊어 갔으니 이 시대 젊은이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 20세기 미국소설의 걸작으로 불리는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伟大的盖茨比)”는 바로 그 시대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린 작품으로 그들의 상실감과 환멸을 잘 보여준다. 이들처럼 문화대혁명시기의 지식청년들을 중국의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  40년전, 조국의 부름을 받은 수천만의 피끓는 젊은이들이 군복을 입고 완장을 끼고 배지를 달고 변경으로 농촌으로 떠나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고, 영양실조, 천재지변 등으로 희생되였다. 배움의 기회를 상실하였고 도시에 돌아와 보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것은 실업이였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들의 얼굴에도 시간의 주름은 력력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과거를 물으면 “지식청년이였지” 라고 기피하지않고 대답한다. 렬악했던 오지의 환경과 아직 여린 몸에 주어졌던 단련은 그들에게 그어떤 고난도 타개해나갈 고험의 장을 펼쳐주었고 아울러 중국의 더 광활한 지역 문화의 무한한 원천을 몸으로 느끼는 소중한 경험을 제공했다. 때문에 “상산하향”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실의에서 벗어나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요력랑으로 재빨리 부상할수 있었던것이였다. 한때 항거할수 없는 운명의 그늘에서 몸부림쳤던 그들, “잃어버린 세대”로 지칭되지만 그들은 많은것을 잃은 반면 또한 많은 것을 얻었다. 지금 10년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온 명암으로 굴곡진 그들의 얼굴이 력사의 착오적인 시행과 그를 무마해나가는 시간과 인간의 힘을 말해주는상 싶다.   연변일보 주간 "종합신문" 2009- 8- 24    
4    조선족 “야인시대” 댓글:  조회:4398  추천:74  2007-06-29
  . 칼럼 .   조선족 “야인시대” 김 혁   1, 조폭하면 드라마 “야인시대”가 얼핏 떠오른다. 서울 종로일대에서 끗발을 날리며 주먹하나로 세상을 평정했던 김두한과 그의 의리로 똘똘 뭉친 사나이들… 사실 세상의 암흑가를 지배해온 조직폭력배는 그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다. 이딸리아  마피아, 미국 마피아, 일본의 야꾸자, 대만의 삼합회 등 력사깊은 대표적 범죄조직이 아직도 법률의 사각지대에서 활개치고있다. 미국에서는19세기 아일랜드 갱단이 미국의 조직범죄를 장악했고1880년부터 200여만 명의 이딸리아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시칠리아에서 온 마피아들이 주류 밀거래를 통해 날개를 달고 성장했다. 일본의 경우 사회가 거부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범죄조직으로 받아들이는 야꾸자 전통은 일본 조직범죄의 가장 오래된 유산중 하나였다. 야꾸자가 1910년 한일합병을 위한 정치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했고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도 야꾸자의 짓이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 최근 경제 불황의 원인이 야꾸자들의 금융 불법대출에서 비롯된데서 “야꾸자 경기후퇴”라는 경제용어까지 생겨났다. 한국의 주먹계보는 1970년대 김두한, 시라소니 등으로 대표된 무리의 맥이 완전히 끊겼지만 조폭출신 건설업자, 조폭출신 정치가, 조폭출신 벤처기업가 등이 등장해 부와 권력을 등에 업고 민생을 고달프게 했다. 지금에 이르러 전 세계 조직범죄 사업 규모는 무려 1조 딸라에 이르는바 그들이 사회에 드리운 음달은 무성하기 그지없다.    2, 중국•윁남•로씨야 등 14개국 65개의 외국인 폭력조직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국의 매체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그중 조선족 조폭들이 한국내의 외국인 최대 폭력조직인것으로 확인됐다. 강남•가리봉•대림 등 서울 지역과 경기 안산, 인천, 울산, 경남 창원 등 20여곳의 조선족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한국내 폭력조직과도 대등한 관계로 련대할 만큼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1998년부터 방문취업비자로 대거 입국, 공단 밀집지역인 ‘가리봉동’에 정착하면서 중국 지명을 딴 조직들이 생겨났다. 초기에는 불법체류자 등 자국민들을 상대로 월급을 갈취하거나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는 수준이였으나 지금은 자국 녀성들을 유흥업소에 공급하는 인신매매, 마약밀매, 중국산 식품 밀수, 전화금융사기, 카드 위변조 등으로 사업 령역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에서 외국인 폭력조직이 급성장하면서 관련 범죄도 해마다 늘고 있다고 집계가 나왔다. 한국경찰청 외국인 범죄현황에 따르면 2007년 1만 4524건에서 2008년 2만 523건으로 41.3% 증가했다. 올해 상반년에는 1만 5466건에 달했다. 따라서 한국경찰은 자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강력범죄를 막기 위한 수사전담팀을 만들고 외국인 범죄와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경찰 관계자는 “일부 국가 출신의 폭력배들이 조직성 폭력형태로 자국민을 갈취하거나 각종 리권에 개입하는 사건이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면서 “아울러 국제결혼한 녀성과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피해가 확산되는것을 막고 이들의 편안하고 안전한 국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전담수사대를 설치했다.”고 강력한 대응책의 의지를 보였다.    3, 영화나 소설은 주먹 세계의 의리를 멋지게 포장하면서 죽음까지도 초로처럼 여기는 열혈 사나이들을 부각한다. 하지만 “폭력은 정당화 될수도 없고 미화될 수도 없다, 시청률에만 급급해 비판의식이 배제되였다”는 조폭영화마다에 따라붙는 평과 같이 그건 어디까지나 논픽션(虚构)이다. 현실에서의 조직폭력배는 흥행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속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사기, 공갈, 폭력, 강탈을 밥먹듯 하는 건달일뿐이다. 그들에게 해피엔딩은 절대 없다. 모든 조폭영화가 그러하듯이 그들 모두는 불안속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중국조선족은 바람부는 만주땅에서 가렬처절한 항일운동을 벌렸던 애족지사들의 후예들이며 중국의 거대한 사회변천과 맥락을 함께 한 중국소수민족중의 당당한 일원으로 높은 위상을 가지고있다. 국문이 열리면서 중국조선족은 고국과의 활발한 인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중한지간의 경제, 문화의 교류와 협력에도 커다란 중개작용을 놀았다. 저저마다 한국 로무의 길에 오른 그들은 이 십여년동안 불협화음속에서도 지긋이 자신을 정리하고 신근한 땅방울로 각 분야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해마다 자지방에서의 외화수입 1위라는 기록을 내면서 커다란 부를 일구어냈고 유족한 생활터전을 다지여 민족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다. 하지만 조폭1위라는 오명(汚名)이 우리들이 일껏 쌓아온 그 위상에 어둡고 무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 일어혼전천(一魚混全川), 즉 “미꾸라지 한마리가 내를 흐리우듯”이 그 소수의 왜곡된 형상은 한국에 진출해있는 수십만 재한 조선족들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무양하던 존립관계에 커다란 악과까지 초래할수 있다. 중한 두나라의 개혁개방정책과 동포정책의 큰 수혜자로서의 조선족의 보다 성숙된  모습과 자세가 요청된다. 따라서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국경을 넘어선 조직범죄에 대한 대책과 엄단이 필요되는 시점이다.   김혁 기자  기자 블로그:http://blog.hani.co.kr/kh99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10- 12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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