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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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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재잇기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3210  추천:73  작성자: 김혁


.  잡 문 .

 

련재잇기 

김 혁

 

 


하나,

 

련재소설은 19세기초 프랑스에서 생겨난 소설의 한 형태다.
1829년 <<르뷔 드 빠리>>를 창간한 베롱은 소설을 그의 잡지에 싣는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새롭고 기발한 착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하여 문학적으로도 격조높은 작품들이 정기간행물에도 안주하기 시작했다.


련재는 신문이라는 매체가 보듬어주었기에 신속한 발전을 기할수 있었다.
애초의 신문들에는 이미 문예란이라는 메뉴가 존재했으나 소설이 아닌 문화 전반에 관한 잡다한 글들을 실었다. 그러다 소설을 싣기 시작, 문예란을 통해 발표되는 소설들은 분절된 형식으로 되여 있었다.
당시 력사 소설가인 영국의 월터 스콧트의<<아이반 호>>와 쿠퍼의 <<최후의 모히칸족 >>이 련재되여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여기서 신문사 사장들은 대중들의 요구와 취향을 보고 재미있는 소설과 신문을 접목하면 더 많은 정기구독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 라는 생각을 갖게 되였고 신문들마다 다투어 련재물을 게재, 마침내 일간지의 대중시대가 열린다.
대뒤마의 <<삼총사>>와 <<몽테그리스도 백작>>등이 모두 이 무렵의 대표적인 련재소설이였다.
  

한글로는 일본인들의 신문제작 방법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되였는데, 1903년 일본인이 발행한 <<한성신보>>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련재된 <<대동애전 大東崖傳>>이 최초의 신문소설이라 한다.
지은이가 밝혀져 있는 최초의 작품은 1906년 <<만세보>>에 련재된 리인직의 <<혈의 루>>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후부터 소설은 대부분 신문에 련재되었다. 당시의 련재물들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개화운동의 추진을 도모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련재들이 한결같이 미신타파, 새 학문에의 동경, 자유결혼의 례찬, 남녀평등 사상의 고취 등을 내세우면서 대중계몽의 구실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리광수의<<무정(無情)>>도. 홍명희의 <<림꺽정>>도 신문에 련재소설형태로 나타났다.


대중계몽의 역할을 했다는 점, 문학사적으로는 신소설이 현대소설로 그 면모를 바꾸었다는 점 등등으로 보아 련재소설은 그 신종으로서의 구실을 착실하게 한 것 같다.
이때로부터 소설이 신문지면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둘,

 

제목에서 밝힌바와 같이 련재읽기가 아니라 련재잇기다.


문학도시절, 내게 재밌게 읽혔던 기억의 련재물로는 항간에서 수사본(手寫本)으로 읽혀지다가 <<연변일보>>에서 번역, 련재되였던<<매화사건>>, <<연변문예>>에 련재되고 방송으로도 나가 큰 반향을 일으켰던 김용식님의 력사소설 <<규중비사>>, <<장백산>>지에서 련재한 김래성의 <<청춘극장>>등이였다. 그때 그 작품들을 고작 한회에 몇천자분량, 또는 한달씩 기다려 읽는 것이 내게는 (당시 독자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이였다.
(이 작품들을 잡지에서 조심조심 찢어내여 두터운 마분지로 가위를 대여 서투르게나마 제본해 두었는데 연거번거 이사하던 중에 아깝게도 분실하고말았다.)


내가 언감 설익은 자기 작품의 련재를 시도했던 것은 열아홉나던 때였다. 당시 룡정에서 문학애호가들이 <<희망봉>>이라는 문학동호회를 설립, 동명의 등사판 문학지를 간행했다. 나는 그 문학애호가협회(당시에는 문학동호회들을 모두 문학애호가협회라 호칭했다. 좀 촌시럽지만…)의 비서장직을 맡았었다. 그 조야하기 그지없으나 문학도들의 열기가 페이지마다에 뚝뚝 듣게 슴배인 잡지에 나는 력사소설 <<피로 물든 야명주>>를 련재하기 시작했다. 자희태후의 장중보옥이였던 야명주가 도난당했는데 무림호걸들이 그 야명주를 찾고저 군벌과 토호들의 끄나불들과 혈투를 벌린다는 내용의 무협작품, 4만자가량으로 완수해서 련재하기 시작했는데…  항용(恒用 )그러하듯이 문학도들의 순 치기로 무어진 문학동호회는 얼마 못가 해산되였다. 그러자 자연히 우리네 동호지 <<희망봉 >>도 겨우 3기를 꾸리고 정간(?)되고 말았고 나의 련재 <<피로물든 야명주>>도 그로서 끊기고 말았다. 지금도 그 투박한 동호지를 나는 그 무슨 옛문사들의 진품인양 고이 소장해 두고 있다.


나의 두번째 련재물은 번역작품이였다. 1996년 스무살나이에 필재를 인정받고<<길림신문>>기자로 발탁되였는데 나를 천거(?)해 주신 이는 당시 주필을 맡고 있던 윤효식 은사님이셨다. 미륵보살처럼 귀가 유난히 크신 윤주필님은 나를 당시 유명 짜했던 작가 호연처럼 만들겠다며 커다란 관심을 몰부으셨다. 따라서 나에 대한 요구도 지엄했다. 
기라성 같은 문필고수들이 운집한 편집부 사무실에서 <<촌닭 관청에 온듯>> 떨떠름해 있는 나에게 처음으로 맡겨진 임무는 련재실화 <<당신대지진>>의 번역이였다. 당산에서의 대지진 발발(勃發) 10주년을 기념하면서 나온 장편 실화 <<당신대지진>>은 당시 문학계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킨 작품이였다. 그렇게 부피도 두텁고 묵직한 상도 수상한 작품을 번역하라니 나 같은 초라니(민속 탈놀이에 나오는 가볍고 방정맞은 인물) 가 큰 먹이를 료리해 내는 수가 있나! 속담 그대로 <<초라니 대상 물리듯>> 질질 끌기만 하는데 한쪽에서 선배들이 독촉하고 편집부 주임이 독촉하고 주필이 독촉하고… 밤을 패면서 숙소에서 번역해도 제때에 교부못해 땀에 눈물을 반죽하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진짜 련재다운 련재를 시작한 것은 1994년 <<중학생신문>>에 련재한 소년소녀력사소설 <<혼불>>이였다. 세조대왕이 주살(誅殺)한 충신 <<사륙신(死六臣) >>의 사화를 모태로 한 작품이였다. 석달가량 신문에 련재, 후에 방송소설로도 각색되여 련재방송되였다. 그 매기마다 련재되여나오는 신문들을 받아보면서 성우의 박력있는 음조로 다듬어져 나오는 방송을 들으면서 (<<규중비사>>를 랑독했던 그 유명한 성우님이 나의 작은 련재물을 읽어주셨다) 나는 오! 이거구나 하고 드디여 련재작가의 느낌 같은 것을 만끽할수 있었다. 그런데 그번 련재는 기성작품이 아니라 한편 쓰면서 한편 련재했기에 또 한번 시간과 글재주의 미달에 딸려 무척 신고했었다. 


 95년 연변축구팀이 오랜만에 갑A시즌에 출전하면서 축구팬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당시 <<연변일보>>문체부 기자로 뛰면서 문예취재 외에 체육보도도 겸해 했던 나는 그 분위기에 맞춰 추리소설 <<스포츠 살인>>을 창작, <<스포츠>>신문에 련재하기 시작했다.
축구스타의 의문의 죽음을 추종해 나선 열혈팬의 추리담. 이번 련재 역시 순탄치 못했다. 금방 연변일보로 전근하여 일선기자로 진동한동 뛰면서 낮에는 취재하고 밤에는 작품창작할라니 도저히 제 시간에 련재를 바쳐내는수가 없었다. 13기까지 나가고 (축구스타는 볼썽사납게 의문사를 당하고 열혈팬은 눈물 휘뿌리며 꼭 흉범을 잡아내겠다 맹세하는 요긴한 대목에서) 련재가 끊겼다. 당시 편집부인원들은 물론 축구팬들은 련재의 중단에 몹시 애석해 했다.


그다음 시작한 련재는 소설이 아니라 실화쪽이였다.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만연되는 출국붐과 더불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조선족들을 상대로 몰지각한 한국인들이 벌린 전대미문의 사기사건을 전방위로 취재한 르포. 먼저 <<청년생활>>지에 일년간 련재되였고 다시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단행본으로 간행되였다. 400여명에 달하는 사기피해자들을 찾아 만나고 수천건의 신고문을 읽으며 일면 취재, 일면 련재하노라니 힘에 부쳐 죽을 지경이였다.  (그때는 또한 혼인이 파렬된 고통으로 모대김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기는 잇지못하고 자리를 비운 <<사고>>까지 있었다.
  20여 만자에 달하는 분량의 장편르포는 98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된 뒤 요즘 같은 기황(飢荒)의 출판풍토에서도 5천부라는 엄청난 발행량을 기록했고 나는 그 작품으로 <<청년생활>>화연문학상, <<흑룡강신문사>> 한얼패 대상, 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을 거듭 수상했다.


그 다음의 련재는 룡두사미격으로 중도하차의 실패에 실패의 거듭이다.
 <<도라지>>잡지에 호러소설계렬을 일년동안 6편을 발표하기로 기획, <<산장>>, <<육가락>> 두편을 쓰고 잇지 못하고 말았다. 원체 우리문단에서 보기드문 호러물(공포, 현념소설의 일종)이라는 새로운 문체를 시도, 단 오락물에 그치지 않고 그에 흔들리는 우리사회의 아픔들을 접목하여 재미도 보고 무거운 메시지도 던지려는 <<일석다조>>의 효과를 꾀했는데…
 솔직히 끊은 리유는 작품을 본 독자들의 반영이 미지근했던것이다. 스스로는 홀리우드에서 호러영화로 리메이크해도 좋을 작품이라 여겼는데… (리메이크: 예전에 있던 영화, 음악, 드라마 따위를 새롭게 다시 만듦을 이르는 말.)
 역시 <<도라지>>에 독서만필을 계렬로 련재하려다가 무라카미에 대해 한 회 쓰고 그치고 말았다. (지금도 버릇처럼 책만 읽으면 독후감을 남기군 한다. 이제 일정한 분량이 차면 다시 기고하여 편집들의 간절한 청탁을 저버린 참괴(慙愧) 를 미봉하려 하는데…)


  나의 두번째 장편 역시 련재물의 형태로 나왔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내놓은지 두달도 못되여 <<연변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한 작품이다.
운명의 진공(眞空)속에 살아가는 녀성 주역을 내세워 그네들이 치렬하게 통과해온 삶을 직성 풀리게 쓰고싶다는 구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안나 까레니나 같은, 제인 에어 같은, 빠리노뜨르담 아래의 에스메랄다 같은, 더버빌가(家)의 테스 같은 그렇게 분명 기억될 녀인들을 쓰고싶었다. 내 머리 속과 창작스케줄 속에 각인 되여 있는 그러한 녀성 주역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첫 장편의 고역에 찌든 몸을 추슬리며 잇달아 두번째 장편에 뛰여든 것이다.


그런데 겨우 4회째 련재하고 내 신상에 큰 변고가 일었다. 두수없는 사건에 말려들어 공직을 떼우고 처연히 한지에 쫓겨나게 된것이다. 한쪽으로는 <<대적(大賊)을 주멸(誅滅)하려는 듯한>> 기세로 조사조가 들이닥치는 형국에 한쪽으로는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꾸어서 부과(賦課)해야 했다. 그런 사면초가에서도 련재는 이어나가야 했다. (나땜에 이름있는 문학지의 현요한 위치를 비울순 없지, 첫 장편을 초월하려는 향상심으로 쓰는 두번째 장편인데 어떻게든 마무리해 나가야지!)하는 생각에 이를 옥물고 등짝이 으깨질듯한 거대한 압력을 이겨내며 썼다. 조사를 받고는 돌아와 저녁도 거른 채 2만여자를 치고 윤색하고 나니 동이 번히 밝아오던 그때가 생각 난다. 어떻게 그 형국에 컴퓨터 앞에 앉을수 있었고 또 두드려댈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장편의 주요편집이였던 <<연변문학>> 조성희님의 로고가 컸다. 번마다 투고가 늦어졌고 세상이 번거로와 전화를 끊어버린 나에게 메일로 기마다 간절한 청탁을 했다. 아울러 수십통의 메일편지에서 위안과 격려의 말을 내내 잊지않았다. (후문이지만 조성희님은 나 때문에 편집에 영향을 받고 편집부 상벌제도에 따라 벌금까지 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많은 분들이 좋은 글 그냥 보고있다, 문학의 줄을 놓지말고 시련을 이겨내라고 혹은 메일로 혹은 인편으로 혹은 찾아와서 격려를 주었다. 그들의 따뜻한 위무(慰撫)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이어나가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곤고(困苦)했던 기간을 16회 40만자에 달하는 련재를 쓰는것으로 메워나갔다.


어쩌면 련재잇기는 내 삶 잇기의 그 자체가 아니였는지 모른다.

 


셋,

 

  지난해 한국 울릉도에서 열린 재외동포언론인 심포지움에 참석했다가 공무를 마친후 사재를 털어 문학기행을 마련한적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선생님의 창작자취를 따라 나섰다.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학관>>이며, 횡성군 우천면 두곡리의 드라마 <<토지>>의 촬영지며, 박경리선생님이 기거해 계시는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이며를 찾아 보았다.


<<토지>>는 박경리 개인에게나 한국문학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한국 현대 문학 100년 력사상 가장 훌륭한 소설로 손꼽힌다.
1969년 이후부터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의 창작에 몰두, 《현대 문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차례 지면을 옮겨가며 련재하여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 25년 만에 거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선생님의 온갖 경험과 사상이 반영된《토지》에는 력사적 인물이 100명, 소설 속의 인물이 700여명, 국내외의 력사적 사건이 130여차, 속담 438개, 풍속 및 제도 자료가 179개가 등장하여 3만 장이 넘는 기다란 원고지 피륙우에 수놓은 대작으로 대하소설의 방대함을 가진다. 원고지 분량은 3만1200매.  <<토지>>가 집필기간, 원고 매수에서 세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스스로 마련한 문학기행길에 올라 생소한 지역을 더듬으면서 나는 본질적인 질문
들이 사방팔방에서 나를 향해 압박해오는 걸 느꼈다.
문학은 무엇이고, 작가는 어떤 제단에 바쳐야 되는 것일까. 내가 써온 소설은 과연 어떤 위로를 나의 독자들에게 주었는가? 오래전부터 지긋이 나를 결박해온 질문들이였다.
무려 25년 동안 작품에 진력하셔야 했고 소설 속의 세계는 소우주에 가까울 정도인데, 그러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과 긴장을 어디서 끌어오셨는지 궁금하다는 모두들의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동과 글쓰기는 일종의 정화 작용입니다. 로동을 하거나 글을 쓰면 우리의 슬픔이나 이런 것이 왜 있는가에 대해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잡다한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생존의 지속성을 위해서 <토지>를 썼다는 것이 저의 정직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옛날부터 <<글 쓴다>>라는 말을 안하고 그냥 <<일한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글짓기는 자신을 <<고독에 처단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선생님은 고독을 껴안고 속세를 멀리한채 정갈하게 작품에만 매달렸다.
선생님은 평생을 바쳐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집중력과 처절한 로동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혹독한 집필작업을 통해서 엄청난 량의 작품을 생산해냈다. 그는 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건축물을 통해 우리에게 문학의 영원함과 위대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박경리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명작가들을 임의로 뽑아보니 이런 수치가 나왔다.
레브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 6년의 시간을 거쳐 창작하다. 작품에 상회하는 등장인물만 500여명
발자크의 24권으로 된 전집 <<인간희극>>. 장편 및 단편 소설은 90여편을 수록하다.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하기위해 자료수집에만 20년을 바치다.
미하일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을 집필하는데 14년. 1928년 제1부가 발표된 후 1940년에 제4부가 완결되다.
조정래, 83년 원고지 1만6천5백장 분량인 <<태백산맥>>을 현대문학에 련재하기 시작해 89년 완결하다. 하루 8시간씩 원고지 30장 분량의 소설을 쓰는 것이 평생 몸에 배어여있는 그는 90년 다시 대하소설 <<아리랑>>연재를 시작해 95년 총 2만장의 집필을 완료, 이어 98년부터 다시 10권짜리 <<한강>>의 집필에 들어가 2002년에 끝내다.
로신, 평생 지은 작품 1000만자. 그중 저술이 600만자, 편집교열과 서신이 4000만자
호적, 전집 44권, 자수 20000만자.
대만의 현역작가 리오, 창작품 1500만자…

이들의 행보가 보여 주다싶이 <<정신의 끌로 피를 묻혀가며 새기는 처절한 기호>> 가 없이는 진정한 작가, 진정한 대가의 길로 갈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 몇 년간 나는 위험수위에 다다를 만큼 마음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말자! 피를 말리는 련재같은거 더는 하지 말자. 하고 스스로를 불안과 두려움 속에 몰아넣었고 자페의 우물속에 박혀 있었다.
어려서부터 불우한 운명에 내쳐져 현실과의 불화는 지속되였다. 내게서 그 불화를 해소할수 있는 방편은 오직 문학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내부에 서식하는 역마직성의 시키는 바에 따라 나는 부지런히 소설에 매달렸고 작품을 통해 낯선 인물들을 만나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일들을 대신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다만 림시라도 웬만큼은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행위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엄청난 시행착오의 과정일 뿐이였다.. 세상은 얼마나 복잡하고, 사람은 얼마나 기기묘묘한지를 뒷전에 둔 채 나는 일방적인 글에만 묻혀 세상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며 경제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본질과 그 현실을 극복하는 복잡한 구조를 나는 너무도 단순하게 정리해 버렸고 따라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신은 사회와 괴리된 <<쓰일모없는 괴물 같은 인간>>으로 전락되여 버린것이다. (내가 바라본 세상의 깊이는 얼마나 형식적이고, 미시안적이였던가!)
10대에 글 쓰기를 시작하여 40대가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운명은 결코 나에 대한 조롱을 놓지않았다. 나는 스스로 껴안은 위안이 결국 나를 망치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는 것을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받으며 깨우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그래도 문학에 대한 나의 화두를 그동안 놓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감히 깨달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성숙한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숙고하면서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그런 아픔과 한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


   <<이 끔찍한 괴로움이여, 다시 또 한번!>>하고 니체가 웨쳤듯이 결국 나는 괴로운 글쓰기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길로 또 한번 련재를 택했다. <<장백산>>지에 <<령혼의 비늘>>(처음에는 <<패러독스의 향기>>라고 달았다가 너무 현학적이 되여 보여 제목을 바꾸었다.) 이라는 표제하에 명상시리즈를 1년반째 련작해 오고 있다. 그동안의 사색을 명상의 형식으로 담은 련재물이다. 
다시 문학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솔직히 역시 두려움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고통. 한 자, 한 줄, 한 장에 진을 빼는 그 희생을 나 역시 외면하고 싶다. (문학도 일차적으론 자기 욕구에서 나오고 자신을 위한 작업이지않는가! )
하지만 그것들은 극복해 낼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인생과 문학의 가치를 향한 순례의 로정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야한다! 하는 강박관념에 불안해하면서도 나는 늘 창작의욕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고단한 인내를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작가가 자기감정에 얽매이는 나약한 태도에서 벗어나 보다 견고한 자세로, 근원적이면서 소명적인 기상으로 제 역할을 다해야 하는줄로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직한 문체로 전력투구(全力投球)할수밖에 없다. 작품은 삶이 깊어지면 더 진국이 되여 나올 것이고, 이제 차곡차곡 쌓여 있는 그 작품들을, (련재물들을) 딛고 나는 고개너머의 빛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삶이 깊어지고 마음이 충만해 진다면 문학은 더욱더 그윽한 향기를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독감을 앓는 열병 같은 아픔으로 하나의 련재에 마침표를 찍기 바쁘게 또 다른 한 련재의 미혹에 뛰여드는 나의 리유다.

 

 

사족(蛇足): 몇해간 <<중국조선족테마소설 계렬>>이라는 제명으로 조선족사회의 현황을 다룬 소설작품을 각 문학지에 련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10여편에 이르렀다.
이 련재물이 언제 끝날는지 기약할 수는 없다. 나의 필봉이 멈추지 않는한 우리 민족의 비전을 위한 한 문필가의 고뇌적인 동참작업은 그냥 될것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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