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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 문 .
위험한 도피
김 혁
하나
꽃은 지고 가을은 어느새 내곁으로 다가와
쓸쓸한 거리를 바라보네.
이대로 영원히 잠이 들었으면
빨간 장미꽃잎은 시들어 하나둘 떨어지네
내가 좋아하는 이 노래는 한국드라마 “장미빛 인생”의 주제곡이다.
프랑스의 대중적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가 맨처음 불렀던 샹송. 심금을 울리는 애끓는 목소리의 가창력을 가진 그녀의 이 노래는 창작되여 수십년동안 여러 영화에서 불려지다 한국드라마 “장미빛 인생”에서도 영화의 애절한 줄거리와 꼭 사개맞게 번안(翻案)되여 불려진것이다. “장미빛 인생”은 남편에게 리혼맞고 암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한 억척아줌마의 생을 그린 드라마, 주역 최진실이가 온몸을 던져 연기인생에 진정성을 불어넣어 준 화제작이다.
에디프 피아프의 노래도 좋아하지만 드라마의 주역 최진실도 참 좋아하는 배우이다. 최진실은 비단 한국에서 “국민배우”로 통할뿐더러 아시아권에서도 인정받는 월드스타.
80년대 중기, 연변에도 수입되여 상영되였던 한국드라마 “질투”, “그대 그리고 나”에서 조선족관중들은 밝고 건강한 이미지의 이 녀배우에 대해 알게되였고 한국드라마가 주는 묘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직 “한류”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않았던 그 당시, 중국관중들에게 있어서 최진실은 명실공히 “한류”를 이끌어낸 “한류스타”의 1인자였었다.
그런 최진실이가… 죽었단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긴 국경련휴를 맞아 어딘가 들떠있는 명절기분을 강타하며 날아든 하나의 충격적인 비보.
최진실에 이어 한국에서는 한달사이에 연예인 4명이 련이어 자살한 소식이 연예정보지와 사이트들을 도배하다 싶이 하고있다.
을씨년스러운 가을, 자국 나아가서 아시아권에서인기를 누리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기라성같은 유명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 비보는 남의 일 같지않게 환절기의 쓸쓸한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둘
똘스또이의 장편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안나는 새로운 사랑을 지향하지만 귀족사회의 지탄을 받고 철길에 몸을 던져 애젊은 목숨을 끊는다.
괴테의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사랑을 얻지못한 자기 삶을 권총자살로 결속짓는다.
문학작품에서 자살은 이렇게 랑만적인 죽음으로 그려진다.
흐린 마음으로 구차하게 자료를 더듬어보니 문인들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극단적인 방법으로 문학사의 행간에 혈흔(血痕)을 남겨놓은 이들이 적지않음을 발견하게 되였다.
“무기야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불후의 명작을 썼고 “로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렵총자살을 했고 영국의 녀류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코트주머니에 돌을 가득 주어넣고 즐겨 거닐었던 고향의 강에 빠져 죽었다.
“설국”, “이즈의 무녀” 등 눈빛같이 아름다운 감성의 작품으로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근대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하였던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가스관을 입에 물고 죽었고 그에 앞서 그의 제자인 소설“금각사”의 저자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술잔들어 달을 읊조리며 천고의 절구를 남겼던 리백은 달빛 어린 호수에 빠져 죽었고 시에서 리상향을 노래했지만 결국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김소월은 젊은 나이에 음독자살을 했다.
헤밍웨이
버지니아 울프
가와바다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코
리백
김소월
문인들뿐 아니다. 인류력사의 여러 분야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중에는 자살자 대오에 끼여든 사람들이 많다. 고대 애급의 녀왕 클레오파트라, 비운의 화가 고흐, 천재적인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나일론의 발명자 캐러더즈,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몬로, 홍콩배우 장국영… 외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도 있고.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위인도 한때 자살충동으로 고뇌했으며 29살 때에 한 주간지에 “자살의 독백”이란 자살에 관한 시까지 쓴것으로 알려졌다.
인류의 력사와 동반해 온 자살의 음달진 력사를 더듬어 보면-
중세 유럽에서는 자살을 신에 대한 모독으로 해석하고 자살을 터부시(꺼리여 피하다. 금기시하다)해 왔다. 이를 범죄시해 자살한자의 시체훼손이나 재산몰수를 통해 자살을 막으려고 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에서는 자살기도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서 “햄릿”의 애인 오필리어는 자살했기 때문에 인부들이 무덤 만드는 일을 거부하는가하면 단테의 “신곡”에서 마루투스 카토는 자살 리유 때문에 련옥(炼狱)의 문지기로 되고만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자살하여 죽으면 후날 다시 태여나 그가 자살했던 그 한계 상황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고 설파한다. 그의 앞에 놓여있는 한계 상황은 도저히 회피할수 없는것이며 아울러 반드시 극복해 넘어가야지 자살이나 그 어떤 수단으로도 회피할수 없게 되여있다. 그래서 불교적으로 봐도 자살은 부질없는 짓이다.
과거 동양사회에서 남자는 충신이 되기 위해 녀자는 렬부(烈妇)로 남기 위해 종종 자살을 택했다. 충성과 정절은 유교의 미덕으로 렬녀나 충신이 되기 위한 자살은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유교에서 자살이 찬양된것은 아니였다. 유교경전 례기(礼記)에는 자살을 금기시하는 조항이 들어있다. 사람이 죽었을때 조상하지 않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는데 포함된것의 하나가 자살이였다.
중국에서 청조(淸朝)때에는 과부들이 자결하는 의례를 금지하는 법이 공포되기도 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관가로 가서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그 상황에 대해 조정에 청원하고 기다려야만 한다”고 법에 적혀있다.
철학자들의 자살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칸트는 자살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의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헤겔도 자살을 “절대정신에 헌신해야 하는 개인의 의무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사르트르는 "자살은 삶의 종말이라고 간주될수 없다. 자살은 내 삶의 행위이기에 스스로 의미를 요구하는데 그러한 의미는 미래만이 줄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내 삶의 마지막이기에 미래를 부정한다. 자살은 내 삶을 부조리 속에서 몰락하게 만드는 부조리이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도 자살에 대해 흉한 죽음으로 보았다.
“자살하는데 있어 취할것이 뭐가 있나? 자살하려면 의(义)에 합당해야 한다. 례컨대 남편이 맹수나 도적따위에 당해 죽었을때 안해가 호위하다가 함께 죽었다면 렬부다. 그러나 남편이 천수(天寿)를 누리고 죽었는 데도 안해가 따라 죽으면 제 목숨을 끊는것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죽음이 의에 합당한 것이냐? 천부당만부당이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것이 천하에서 제일 흉한 일이라고 여긴다.”
다산 정약용의 “렬부론”의 한 대목이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도 “자기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맞서 싸워야할 악과 두려움을 감당해 낼 용기가 부족하다는것을 뜻한다. 살아만 있으면 상황은 어떻게든 개선되고 호전될터지만 죽음은 상황을 전혀 개선시키지도 못하고 새로운 악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다.” 고 말했다.
하지만 인류의 지속적인 두절(杜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사연과 방식이 다양하고 기구하게 자살은 우리가 살고있는 이 터전에서 오늘도 자행되고있다.
셋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자살방지협회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자살은 교통사고와 각종 재난, 질병에 이어 13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사인(死因)에 속한다.
통계상으로 자살률이 높은 지역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쪽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자살자가 많은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불명예나 량심의 상처 또는 의리나 신념을 리유로 한 자살을 은연중 미화하고 원인행위를 용인해주는 관습이 있는것 같다. 그래서 “셋부꾸”- 즉 할복(割腹)같은 타민족에게 볼수없는 자살의 류형도 엄연히 전해오고 있는지 모른다.
중국에서도 상황은 심각하다. 중국심리위기 연구 및 예방센터에 의하면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매년 25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특히 15-34세 년령층에서는 압도적인 사인이 되고 있다. 또 매년 200만명이 자살하려다 실패한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폐암과 교통사고가 사망원인 제 1위, 자살로 인한 사망이 사망원인은 제 5위에 이른다.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 세상 살아갈 리유도 재미도 없고 힘들고 지쳐서, 하려고 하는 일들이 뜻대로 안돼서 등의 여러가지 리유로 목숨을 끓는다. 학자들은 자살적 태도의 발생 리론을 크게 생물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리론으로 나뉜다. 심리학가들은 “가장 두드러진 경제, 사회적 변동, 즉 고도의 도시산업화가 현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건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어차피 한정된 세상을 살고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를 살인함으로써 주어진 삶에 허락되지 않았던 마침표를 긋는 행위- 자살은 인간만이 저지를수 있는 “범죄행위”일 것이다. 자살은 자기존재와 역할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자살은 자기 존재를 소멸시키는 행위이므로 절대적 정체성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폐기하는것이다.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사자가 느끼는 절망감은 엄청났겠지만 자살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며 더구나 탈출구가 될수 없다. 죽음의 의미는 당사자보다도 살아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므로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짐을 친지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남은 자들은 그 공백감을 힘들게 채우지 않을수 없다.
때론 삶이 죽음보다 더 힘들다.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자살이 행해지곤 한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을 향해 부단히 도전하는것이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라고 할수 있다. 잘못된 인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는 노력으로 얼마든지 개선시킬수 있다. 자기 파괴의 다른 돌파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모른척하고 홀로 떠나는것만큼 리기적이고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 사람에 따라 그 끝이 언제인가에 대한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 앞에 누구나 동등한 립장이라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다.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인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행보에서 누구나 안정된 삶끝에 자연스런 운명(殞命)을 기대해 보지만 죽음은 인간의 의지를 잘 따라주지 않는것 같다.
종종 영예로운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보기도 하지만 생각하지 못한 연고로 스스로 우리 곁을 훌쩍 떠나버리는 이들을 보는 마음이 석연치 않다.
바람도 한결 차가워지는 이 가을, 한국작가 리외수의 따뜻한 시 “자살을 꿈꾸는 그대에게”를 특별히 뽑아 읊어본다.
그대여
인생은 서러운데
별은 저리도 눈부셔 눈물만 나는구나.
이 뜨거운 삶의 담벼락에 기대앉아
서로의 이를 솎아주듯
나는 그대와 얘기하고 싶다
희망은 과연 없는것일까?
과연 세상은 눈곱만큼도 살가치가 없는것일까?
나는 지금
그대 눈물이 마른자리 눈곱을 떼여주며
눈곱만큼 작은
세상의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연변문학"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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