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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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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과 김학철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5081  추천:75  작성자: 김혁


. 잡문 .
 

 솔제니친 김학철

 김 혁

 

 


솔제니친의 경우

 

 지난 여름, 말복더위에 서재에서 머리맡 가까이에 선풍기를 돌리면서 요즘 회자(膾炙)되는 신간을 읽다가 버릇처럼 컴을 열었는데 그 부음을 접했다. 쏘련이 낳은 문학의 거장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서거한 소식이였다.
세계적 지성- 솔제니친은 8월 3일 오전 11시, 향년 89세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네티즌들이 올린 도편자료와 동영상에서 솔제니친의 모습을 다시 한번 찬히 뜯어보았다. 수난과 고집, 지성을 말해주듯 깊고 형형한 눈길과 몹시 벗겨진 머리와 수북하고 흰 수염은 일견에도 지성적인 어떤 현자(贤者)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넷에 널려있는 그이의 생애와 문학업적에 대한 편린(片鱗)들을 뽑고 정리하여 나의 문학블로그에 올리면서 한 지성의 인생궤적을 따라 가보는 시간을 가졌다.
화려한 문학사적 명성과는 달리 솔제니친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려정이였다.
알렉산드르 이싸예비치 솔제니친은 1918년 12월 11일 북깝까즈의 도시 끼슬로보드스끄에서 태여난다. 태여나기 6달 앞서 그의 부친인 세묘노비치 솔제니친은 불의의 사고로 당금 태여날 아들을 보지못한채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따이샤 자하로브나는 속기사(速记师)였다. 교양있는 어머니의 교육으로 솔제니친은 일찍부터 문학에 눈을 뜨며 장래 희망이 작가였던 소년은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향한다.
로스토프대학에서 물리수학을 전공하면서 한면 모스크바대학 통신학생이 되여 력사, 철학, 문학을 배운다. 배우수업도 했지만 발성에 문제가 있어 배우의 꿈을 접는다.
대학을 나와 평범한 수학교사로 지내던중 2차대전이 발발(勃发), 1941년 히틀러가 쏘련을 침공하자 조국을 위하여 분연히 전장에 나선다. 로씨야군 포병장교로 용감하게 싸워 무공훈장을 두번이나 받는다.
그러나 1945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속에 불온한 대목이 있다는 죄장으로 무공훈장을 단 젊은 장교는 인생의 일대 전환을 맞고 일조일석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정치범으로 투옥되여 10년 동안 동토(冻土)의 수용소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광부, 벽돌공, 주물공으로 육체를 혹사하며 게다가 불치의 종양 수술까지 받는다.

 

솔제니친은 흐루쇼브 시대인 1962년 해빙기를 틈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하며 문명(文名)을 알리기 시작한다. 문학지 “노비미르”지에 발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절제된 문체와 심리적 깊이로 수용소에서의 한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충격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 잡지의 편집장은 작가의 수감시절 겪었던 시련을 바탕으로 한 이 원고의 출판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공산당 총서기였던 흐루쇼브에게 보여줬는데 흐루쇼브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출판을 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4년 흐루쇼브가 실각하고 브레쥐네브가 취임한후 문화활동의 리념적 규제가 심해지면서 그는 반체제 인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 병동”, 그리고 “수용소 군도” 와 같은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다 그가 실제로 체험한 무서운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10년여의 수용소 생활은 “억압에 대한 저항”을 주제로 하는 그의 작품세계의 기본적 질료(质料)가 됐으며 그때가 바로 그의 저항정신과 문학의 시발점이 됐다. 그의 작품활동은 쏘련의 이른바 “수용소 문학”을 개척한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전체주의의 억압에 대한 고발이라는 주제의식뿐아니라 수용소 죄수들의 은어를 사실감 있게 사용하고, 참혹한 수용소 생활과 죄수들의 유머를 대비하는 등 구성과 문체 면에서도 탁월한 수작으로 꼽힌다.
당국의 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솔제니친은 불굴의 창작의욕을 고시(告示)한다. 그의 작가적 량심은 드디여 “수용소 군도”라는 대작을 이끌어낸다. 솔제니친은 원고지 1만장이 넘는 대작 “수용소 군도”를 통해 외부세계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채 기아와 폭력에 시달리며 정치범 수용소에서 중로동을 해야 했던 류형자들의 삶을 그려낸다. 수용소에서 자행된 불법적 재판과 고문, 탈주, 폭동, 수형자들간의 갈등, 미성년자들의 타락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그 누구보다도 적라라하게 당시 쏘련의 체제가 전통, 인격, 도덕 등 정신세계를 얼마나 파괴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972년 파리에서 출간된 “수용소 군도”는 발표직후 쏘련을 넘어 유럽 전체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킨다. 그 방대한 리얼리티(真实感)에 담긴 핍진하고도 정확한 력사의 증언은 문학작품의 경계를 확장시켰다는 호평을 받는다.
작품 활동에 방해를 받게 되면서 더이상 쏘련에서는 공식적으로 출판이 어려워지자 결국 그는 국외에서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암병동”을 비롯한 주요 작품들은 해외에서 먼저 출간된다. 따라서 세계문단은 똘스또이를 이을 거장의 출현을 반겼고 그의 용기에 주목한다.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 병동”등 작품들은 1970년 솔제니친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반렬에 오르게 한다. 1970년 그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지만 당국의 불허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 참석조차 못한다. 망명의 길에 올랐던 1974년에야 그는 자신의 노벨상을 수거(收去)한다.
빠리에서 최우수 소설상을, 스톡홀름에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사람이 모스크바 작가동맹으로부터는 제명당한다. 시민권까지 박탈당하고 차디찬 시베리아에 류배된다.

1974년 쏘련으로부터 추방되며 그때로부터 20여년에 거친 망명생활에 들어간다. 이후 독일ㆍ스위스ㆍ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 2부와 3부를 펴내는 등 꾸준한 창작활동을 펼친다.
한 작가를 포용(包容)하는 그릇이 되지못했던 정부때문에 추방되였지만 그를 맞아준 서구사회 역시 그가 원하는 대안은 아니였다. 쏘련에 대한 미국의 이데올로기 선전전(宣传战)의 전위(前位)를 맡는 일을 그는 거부한다. 서방세계에 안주했다면 가능했을 안락한 삶을 또다시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서방세계는 그가 쏘련을 비난하고 서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를 바랐지만 솔제니친은 늘 자기를 버린 조국을 마음에 품고 산다. 1974년 망명의 길에 올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그는 "작가는 조국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다"고 감회를 토로한다. 그만큼 “나는 글 한 줄을 쓰는 데 1년이 걸린다”라고 말한것처럼 모어의 낱말 하나, 장절 하나하나에 깊은 사랑을 바친 작가였다.
1978년 하버드대 졸업식 연사로 초대되였던 솔제니친은 미국등 서구의 정치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물질문명의 오염과 황금만능풍조가 만연한 미국에 대해서도 비난했고 구미의 도덕적 타락과 방종, 물신숭배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도덕성과 정신의 파괴에 맞먹는 서구 자유주의 기본개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서구가 쏘련의 대안적 모델이 될수없다"고 선언한다.
이에 반체제에 주목했던 서방은 자신들의 병리(病理)를 지적하는 “망명객” 솔제니친에게서 흥미를 잃어갔고 그를 반쏘 지성인의 상징으로 칭송하던 서구의 우파지식그룹은 그를 반자유주의자로 락인찍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소외시켰고 그의 망명 생활을 더욱 외롭게 한다.
인고의 망명생활중에서 그는 내내 조국을 그리워한다. 1990년 마침내 로씨야 시민권이 회복되여 1994년 “언젠가는 되돌아 갈것”이라고 되뇌였던 고국으로 돌아온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예리친의 로씨야는 령토가 축소되고 민주주의와 시장주의의 이름하에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신적으로 파괴된 조국일뿐이였다. 몰락해가는 조국의 참담한 실상에 작가는 또한번 장탄식과 함께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자신의 80회 생일을 맞아 펴낸 시사평론집 “이 잔혹한 시대의 내 마지막 대화”는 분리독립 등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기막힌 현실에 대해 "로씨야는 과연 진정한 로씨야로 존재할수 있는가"라고 통절하게 부르짖는다.
우여곡절 고국의 품에 안긴 뒤에도 그는 여전히 비판의 칼날을 차갑게 세운다. 비판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그를 일각에서는 “욕쟁이 할아버지”라고까지 비난한다. 하지만 그는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로 돌아갈것을 촉구한다. 그가 비판한것은 로씨야의 물질주의에로의 경도(倾倒) 였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것은 물질문명에 훼손되지 않는 로씨야, 바로 민족적인 가치였다.

로씨야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은 예리친대통령과도 극심한 불화를 보인다. 1998년 예리친이 80회 생일을 맞은 그에게 로씨야 최고권위의 “성 안드레이 피르보조반니사도”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제의해오나 로씨야를 파국으로 이끈 정권이 주는 상은 받지 않겠다며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부해버린다. 그는 "로씨야에 세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선 17세기, 1917년 볼쉐위크 혁명 그리고 예리친의 취임"이라고 예리친을 통렬하게 비꼰다.
따라서 그는 공인(公人)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며 교외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2007년 6월 푸틴대통령은 솔제니친에게 로씨야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로 꼽히는 국가공로상을 수여한다. 수상식에 불참한 솔제니친은 영상을 통해 이렇게 답사를 보낸다. “나는 생의 마지막날까지 력사가 우리의 기억뿐아니라 량심을 되살린다는것을 믿는다.”
2006년 그의 작품 전집이 발간에 들어가 2010년 완간될 예정, 하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알렉산드르 이싸예비치 솔제니친은 세상을 천착(穿鑿)했던 눈을 감는다.

솔제니친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세계 주요 언론사들은 그의 타계 소식을 주요뉴스로 내보내고 문학과 생애를 자세히 소개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뉴욕타임스, AP통신 등은 “솔제니친은 20세기 로씨야의 가장 위대한 량심이였다”, “솔제니친의 량심에 대한 신념, 그리고 불굴의 저항정신은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초월해 세계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유럽의 좌파 지식인에게 경종을 울린 작가"이며 "서구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등 평생 지식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가 남긴 작품 중 일부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문학적 업적"이라고 보도했다.
평론가와 사학가들은 "그는 인간가치의 문제를 모럴(도덕,륜리)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철저한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는 등 똘스또이와 도스도예프스끼의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작가"라며 " 20세기 로씨야 문학의 정점에 있는 작가"라고 말한다. “대문호 똘스또이와 도스도예프스끼가 19세기 로씨야 문학을 대표한다면 20세기 로씨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는 바로 솔제니친이라고 할수 있는바 솔제니친은 전세계를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작가중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수 있다.”고 정평한다.
이렇듯 세계가 그의 죽음을 각별히 경건하게 애도하는 리유는 그가 어두운 철의 장막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위해 펜 하나로 거대한 체제와 외롭게 싸우면서 투옥-추방-귀환”으로 이어지는 굴곡진 삶에서도 꼿꼿하게 자신의 철학을 지키는 위엄있는 일생을 보냈기때문이다.

 

 

 김학철의 경우

 다투어 솔제니친의 부음을 전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눈에 확 띄는 제목이 있었다. “로씨야의 가치 지키려 시대와의 불화로 살다”라는 제목이였다.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한 그의 인생을 퍽 잘 압축한 느낌의 글이였다. 부음과 그의 생평을 읽노라니 또 하나의 인물이 나의 뇌리를 선점(先占)하며 나타났다.
바로 우리문단의 거장 김학철옹이였다.  

조선족 문인이라면 애대를 머금고 익숙하게 알고있겠지만 우리가 때때로 범문이나 사전을 찾아 판독(判读)하듯이 다시 한번 그이의 생애를 반추해 보기로 하자.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난다.
서울에서 보성고에 다니던 시절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거사에 충격받고 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감동받아 1932년 17세에 포부를 품고 상해림시정부를 찾아 교복을 입은채 무작정 중국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의렬단과 조선민족혁명당을 거쳐 1937년 장개석이 교장을 담임한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 1938년 7월에 졸업한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에 참가한다 조선의용군 하북지대 제2대 분대장이 되여 용맹히 싸우다 1941년 12월 10일 호가장전투에서 일본군 총탄에 왼쪽다리를 맞고 생포된다.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되여 징역 10년을 언도 받는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않고 전향서 쓰기를 거부한데서 3년 6개월 동안 상처를 치료 못받아 결국 다리를 잘라내고 만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소,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하며 그후 륙속 “담배국”, “균렬” 등 작품을 발표한다.
1946년 조선에서 로동신문 기자로, 인민군신문 주필로 돌다가 조선전쟁이 터지자 1950년 10월 다시 중국으로 건너온다.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연구원으로 몇년 있으면서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등을 중문으로 출판한다.

1952년 12월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연합회 준비위원 주임사업을 맡아하다가 반년후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활동한다.
이동안 소설 “새집 드는 날”, “번영”, 소설집 “고민”,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 부를 창작 출간,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한다.
1957년 반우파투쟁확대화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된다. 공직도 없고 로임도 없고 글을 발표할 자격도 박탈당한다.
1964년부터 개인숭배와 극좌교조주의를 비판한 27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한다. 1966년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견되어 기소, 감금 되며 징역 10년형을 받고 당적을 박탈당한다.
1980년 복권, 65살의 나이에 빼앗겼던 필을 찾아들고 창작활동을 재개한다. 문전에 “한인막고문 (闲人莫敲门. 한가한 사람은 문을 두드리지 마시오)”라고 써붙이고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20년간 문학창작에만 일로매진한다.

2001년 9월, 풍진세월 외다리로 버텨온 몸이 더는 가망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85살의 김학철은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유서를 써놓고 곡기(谷气)를 끊어 21일간 단식끝에 세상을 뜬다. 유언에 따라 그의 골회는 두만강에 뿌려진다.

그 파란만장한 생애에 “항전별곡”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태항산록” “최후의 분대장”, “20세기의 신화”…등 작품을 출간, 몸속에 체화된 력사의 진실을 문학으로 뿜어낸다.

그야말로 드물디 드문 반골(反骨)기질이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맛보아온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정치박해의 철쇄에 묶인 인고의 중년시절, 65세의 나이에 다시 붓을 들어 창작의 왕성기를 맞이한 충만한 만년. 연연을 버린 깨끗한 마지막 길…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도 드물것이다.
로신을 사표(師表)로 삼아 자신을 엄격히 규률한 그는 권력과 불의에 맞서 사투를 벌렸으며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고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항거했다.
그냥 보기에는 량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낀 척각의 볼썽사나운 로인일지모르지만 력사와 후세의 눈에 비친 그는 분명 거인이다. 왜놈들에 의해 떨어져 뒹구는 외짝다리를 랭철하게 바라보면서 인간적 슬픔을 초월한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고, 동란시기 비인간적인 숙청대회에서 아갈잡이를 당하면서도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인간의 존엄이 무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던 그는 척각으로 서 있어도 이 땅에서 가장 꿋꿋이 서있었다.

우리들의 경우

 문학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평생을 불태웠던 사람들이 있다. 한때 부당했던 체제는 그들에게서 소중한 필을 앗아갔고 지지리한 옥살이를 시켰으며 망명의 서러움도 지니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문학은 정신의 올곧은 길이였으며 그 길에서 타협이란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꼭같게도 민족의 운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사회의 모순과 비인간성을 고발했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 그 텍스트를 력사라는 큰 줄기에서 육골을 바친 삶으로 초연하게 써내려갔다.
그러한 근원적인 명제에 천착했고 삶과 문학이 그처럼 요약되는 작가였다는 점에서 문필가로서의 김학철과 솔제니친은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할수 있다.

아는 바처럼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의 삶과 문학은 꼬장꼬장함 그 자체다.
주의와 정의를 위해 “천자도 손가락질”하고 “룡의 수염도 건드린” 대바름을 보여주었고 긴긴 투옥과 비인간적인 학대, 암과 상처와의 사투에서 초인간적인 경지를 보여줬다. 생애 전반에 거쳐 들이닥친 역경을 인고로 견뎌내며 암흑속에 사자후(师子吼)같은 작품을 토해냈다.

솔제니친과 우리의 김학철은 정말 여러모로 많이 닮았다. 솔제니친의 문화코드(符号)가 가장 투철한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불의에 대한 저항 및 존재인식을 통한 시대정신과의 소통이라면 김학철의 창작모토(座右铭)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극적 정서를 통해 민족의 고통과 비극적 력사에 대해 사유하면서 현실의 모순과 비리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특징지어는 사실주의로 점철되여 있는 점에서도 서로 문화적 맥은 통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언론인 장 프랑수아 칸은 그의 저서 “NO!”에서 삶의 권태와 시대의 반력사성에 NO라고 외친 인물들의 리스트(名单)를 실어 그들의 생애를 조명했다. “인류 력사를 진전시킨 신념과 용기의 외침”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다 간 200여명의 “NO 맨”들이 등장한다.
그중에는 당연 솔제니친도 포함돼 있다. 이 서방에서 명성 자자한 언론인이 동방사회에 대한 료해가 어느정도일지 모르지만 아마 우리의 김학철을 알았다면 역시 그 리스트에 당연한 일석을 내주었을것이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문뜩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바로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모순된 사회에 비판적 량심의 역할을 하면서 일관성있는 대안을 제시하는것을 의미한다. 즉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는 도전과 자기혁신을 일삼는 행위와 사유를 말하는것이다.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이 바로 이러한 비판적 지성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라는 점에 감히 NO!를 웨치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초지일관하게 시대의 모순에 대해 발언을 했던 “비판적 지성인의 전형”으로 그이들을 평가할수 있다.
솔제니친의 비판에서 얻을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로씨야적인것의 재발견과 유지라할 때 그의 민족정신에 대한 집착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전통의 련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많은것들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지금 중국조선족은 격변기의 물굽이에서 흔들리고있다. 비록 솔제니친과 김학철이 살아왔던 시대와는 그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중국조선족이란 공동체는 지금 또다른 절체절명의 위기에 시달리고있다. 이대로 침몰되느냐 아니면 순항을 계속 하느냐 하는 판가름의 중요한 력사시기, 바로 이 시기에 우리의 작가들은 문학의 펜을 들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공간이 위축되고 문단의 위상이 위축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격변하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줄도 모르고 대안에 대한 연구에 주목할줄도 모른채 공리적인 작은 욕망이나 웃기는 독선을 부담없이 드러내고 편안해 하는 요즘 문인들의 부화뢰동(附和雷同)의 행보는 결코 미덥지 못한 모습이다.
편협하고 비생산적인 소제(小題)에 그야말로 신명을 걸고 영원히 마를줄 모르는 침샘으로 질퍽한 설왕설래(舌往舌來)의 설전(舌战), 몇해고 그냥 피페하기만한 문인상경(文人相轻)의 풍토에서 돌이켜보면 김학철이나 솔제니친의 문학과 사상의 핵심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라고 할때 우리는 그 일그러진 자화상에 참괴(惭愧)를 가져야 할것이다.

대서사시를 읊조리듯 장대한 느낌구조로서 루루세월속의 어마어마한 사태를 모조리 내포한 그들의 생애를 매개 작자들의 몸속에다 체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삶을 그냥 스토리가 강한 소설보듯이 하면서 비바람 세찬 현장으로의 출두를 거부한채 일껏 꾸민 으늑한 보금자리에서 키보드를 악기건반처럼 한가롭게 두다리며 음풍영월의 가벼운 미문(美文)만 량산하는 작태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결코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이 바라는 이 시대 작가들의 진정한 모습은 아닐것이다.

주어진 자리에 안주하며 자사리기주의에 빠진 우리의 작가들에게 솔제니친, 김학철의 궤적은 오늘날에도 류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문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작가가 있다는데서 때때로 큰 자호감을 머금게 된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솔제니친과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문학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수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수 있는 계시로도 될수을것이다. 

거장의 서거를 계기로 이제 우리문단의 지적력량(知的力量)에 얼마만한 여유 공간이 있는지 점검하는 자성(自省)의 시간을 가져봄이 좋을듯 하다.

 "연변문학" 2008년 12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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