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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소설의 또 다른 가능성/한영남
중편소설 <가람이여, 어허널널 가람이여>는 수필식 구조에 편승하여 력사의 편린들을 호불호, 잘잘못에는 함구한채 그냥 쏟아놓고있다. 여기서 수필식 구조라고 하는것은 전반 소설이 하나의 완정한 이야기인것이 아니라 파편적이고 력사시대적이라는데 그 리유가 있다. 환언하면 시공을 자유로이 뛰여넘으며 오로지 강이라는 하나의 줄에만 의지하여 전반 소설구도가 짜여졌다는것이다. 도합 일곱개의 소제목으로 된 소설은 그 개개가 강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우리 민족의 한 횡단면들을 그대로 려과없이 보여주고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서로 련관이 없기도 하고 우리 민족이 겪었다는데서, 또 그것이 다 강을 둘러싸고 진행된 이야기라는데서 일정한 련관이 있기도 하다.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을 간단히 읽어보자.
<두만강, 1885년>, 여기서 등장하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물론 배달겨레요 꼭뒤에 붉은 술 달린 벙거지를 쓴 사병들은 청군이다. 그들은 한창 "월강죄"를 범한 불법도강자를 처형하고있다. 한반도에서 간도땅으로 슬금슬금 이주해오기 시작하던 무렵의 이야기이다.
<해란강, 1919년>, 쑹가라는 당지 지주와 이주소작농 김씨네 일가의 이야기. 쑹가는 소작료를 내지 못하는 김씨를 닥달하다못해 쌀이며 소금까지 덤으로 얹어주며 그 딸을 달라고 뻔뻔스레 요구한다. 아버지보다 열살이나 더 많은 되놈지주에게 팔려가느니 차라리 강에 뛰여드는 길을 택한 김씨네 맏딸, 이는 당시 간도땅에서 결코 생소한 풍경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고 마을의 리훈장 아들한테 구원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그 리훈장의 아들은 그런 그녀를 이끌고 봉천(서간도)으로 결연히 떠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랑의 도피행각-난질가는것과는 전혀 별개의 장면이다. 그것은 희망이요 당시 어찌할수 없었던, 돈 없고 빽 없던 약한 자들의 유일한 선택이 아니였을가.
<송화강, 1937년>, 일본놈들과 괴뢰군들의 련합토벌속에서 싸우는 동북항일련군 전사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있다. 재봉틀을 마련해가지고 돌아오다가 적들의 포위에 든 녀전사와 꼬마전사, 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마침내 녀전사가 적들을 유인하고 꼬마전사는 재봉틀을 보호하기 위해 숨고 적을 유인하며 싸우던 녀전사는 총탄마저 떨어지자 서슴치 않고 강물에 몸을 던진다.
<볼가강, 1956년>, 해방을 맞아 땅의 주인이 된 사람들, 그러나 그 땅을 건설하기 위한 템포는 한시도 늦출수 없는 법. 나라에서는 국비류학생들을 파견한다. 거기에 김군은 합격되고 서로 사모하던 리양은 락방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의 인연은 결코 끝나지 않았으니 김군은 모스크바에서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고향대표단의 통역으로 따라온 리양을 만나게 된다. 김군은 속삭이듯 말한다. "기다려주오. 나 이제 고향에 돌아가리다"
<홍기하, 1976년>, 문혁이와 문화는 모주석께서 장강을 헤염쳐건넌 10주년을 맞아 수영내기를 한다. 그들은 홍기하라 이름이 바뀐 강에서 두번이나 겨루어보았으나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세번째로 도전해나선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직 그만큼 체력이 따르지 못하는 나이였다. 끝내는 그들은 표표히 흐르는 홍기하속에 사라져버리고 비보를 접한 교원과 부모들은 강안을 미친 사람들처럼 헤맨다. 당시의 력사를 재현함에 있어서 비극만큼 확실한것은 없는 듯 하다.
<황해, 1996년>, 중한수교의 물꼬가 트이면서 끈이 닿지 못해 한국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밀입국이라는 비정상루트를 통해 한국으로의 진출을 꾀한다. "코리안드림"의 또 하나의 풍경선이다. 항해도중에 폭풍을 만나 목숨을 잃거나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표류하는 일도 비일비재였지만 그들의 모험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 역시 지난 세기 90년대말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라는 장편르포를 펴낸적 있는 김작가로서는 대단히 익숙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그에게는 풍부한 자료들이 있었고 그런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언젠가는 소설화하겠다고 했던적이 한두번이 아닌걸로 기억한다. 이번에 맛보기처럼 보여준 <황해>는 그래서 더구나 리얼하게 다가오고 작가의 필봉에 의해 우리에게는 보다 실감나는 현실로 체감되고있다.
<갠지스강, 2010년>, 주인공 나는 <한룡운과 타고르의 시문학 비교>라는 박사론문이 통과되고 일가족의 배려로 시성 타고르의 고향인 인도를 방문하게 된다.
인도에서 나는 갠지스강을 보러 가고 가이드 리따는 단순한 호기심때문에 이것저것 묻는다. 가이드 리따가 나의 고향에 있는 강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내 고향을 떠올리며 먹먹해진다. 그리고 나는 강의 흐름에 눈과 마음을 맡긴채 꿈꾸듯이 말한다. "그 강의 이름은 두만강이랍니다!"
다른 강을 보면서 고향의 강을 떠올리고 고향의 강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조선족임을 자각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 글이 기행문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을 다시 각인시켜주고있다.
그리고 전혀 본 소설과 상관없을듯 보이는 이 <갠지스강>은 결국 인간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고향을 그리게 되고 자신의 뿌리와 피를 잊을수 없다는 지극히 간단한 도리를 묻어두고있다. 그래서 두만강이라는 말이 주인공의 입에서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꿈에서 깬듯 무릎을 치게 되는것이다.
문예리론가들은 력사철학적인 사상으로 현실을 깨우치는것이 문학이라고 설파하고있다. 당연한것은 력사속에서 오늘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해결책을 찾고저 하는 작업은 문인들 모두가 여지껏 꾸준히 해왔고 그래서 맥맥히 이어져오던 중요한 제재요 소재였다는것이다.
특히 중국조선족이라면,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거창한 해석이 필요없이 쉽게 한두가지씩 말할수 있는 력사의 파편들을 김작가는 전형화 내지 소설화시켜서 강이라는 긴 줄에 꿰서 우리앞에 밀어주고있다. 일단 그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이기에 가능한것이고 보다는 중편이기에 가능했을것이다.
독자들은 중편소설 <가람이여, 어허널널 가람이여>라는 강을 마주하고 여러 강들에서 들려오는 세월의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거기에서는 우리 겨레가 세기를 뛰여넘어 겪어왔던 거의 모든 애환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넘실댄다.
요컨대 두만강에서는 간도땅으로의 이주가 시작되던 시기의 험악상을, 해란강에서는 이주해온 초기의 현지인들과의 갈등을, 송화강에서는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뒤엎기 위해 분연히 총을 들고 일제와 그 주구들과 피뿌리며 싸운 투쟁사를, 볼가강에서는 건국후 사회주의건설을 위해 다투어 쏘련으로, 조선으로 류학을 가던 사회상을, 홍기하에서는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을 언급하면서 우리 민족도 어쩔수 없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황해에서는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들이 겪었던 피눈물나는 로무송출 내지 밀입국 사건의 진면모를, 갠지스강에서는 요즘 한결 자유로워진 출국으로 이루어진 인도기행에서 받아안은 감수를 묘파하면서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 민족의 아픔과 설음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력사에 대한 반영은 여러가지 류형으로 분류되는데 일상적 반영, 학문적 반영, 미학적 반영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김작가의 상기 중편은 그 미학적 반영을 충분히 하고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헝가리의 저명한 문예리론가인 게오르크 루카치의 말을 빈다면 "소설이란 문학형식은 우리 시대에 가장 적합하고 의미있는 예술형식으로 이런 형식은 일체의 가치가 무너지고 형이상학적 지향이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력사적 상황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와 총체성을 추구하려는 현대 인간의 의식과 동경을 형상화하고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 중편소설은 오히려 소제목 하나하나가 장편으로, 그래서 전반 소설은 대하소설로 흘러야 하는것이 아닐가라는 로파심때문이다.
어쨌거나 흩어진듯 엄밀한 구성을 이루고있는 이런 소설적구조는 참신한 느낌을 주며 앞으로 이런 실험은 간단없이 진행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김혁선생의 글은 언제나 볼만하다. 특히 이번 중편은 고요하기만 하던 우리 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킬것으로 예상된다.
굳이 대명사가 필요없는 김혁선생의 새로운 작품과 만날 날을 기다려본다.
"도라지" 201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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