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 독서칼럼 8]
“둔감”이라는 화두
와타나베 준이치의 에세이집 “둔감력(鈍感力)”
영화 "실락원" 포스터
지난 세기 90년대초, 조심스레 서점가에 오른 와타나베 준이치(渡辺淳一)의 장편소설 “실락원”은 우리 독자들로 말하면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50대 공무원과 30대의 정숙한 부인의 결코 허락받을수 없는 사랑과 죽음까지 함께 한 불륜 이야기는 그 작품이 일본에서는 1970년대의 작품이고 3만여자나 가위질한 삭제본이였음에도 말이다.
당시의 아직도 윤활하지 못했던 문화풍토에서 출판계와 독자들은 그 실사적인 내용 모두를 필터없이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가위질 투성이로 원전의 의미를 온전하게 볼수 없었던 와다나베의 “실락원”은 출판13년 만에야 결국 온전한 모습 그대로 중국에서 재출판됐다.
“삭제된 부분으로하여 원작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 풍부성, 줄거리의 완전성 및 작가의 심도 높은 문학 사상에는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았기때문이였다.
사실 와타나베의 작품은 그 어떤 에로물처럼 유흥으로 읽을 작품이 아니다. 일본인의 섬세한 정서에 남녀의 사랑과 성을 다루고있는 그의 작품들은 성에 대해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천박하지 않다. 또 세세한 심리묘사로 그 안에 한 사회와 긴밀하게 련관된 인간의 욕망과 존재의 의미까지 담고 있어 통속과 순문학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여러계층의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있다.
때문에 “실락원”은 발간 즉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으며 “실락원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로맨스 소설의 황제” 와타나베 준이치
1933년 삿포로에서 태여난 저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후 정형외과 의사로 활동하였고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하였다. 1970년이후 의사의 길을 접고 의학 소재 소설, 력사 소설, 로맨스 소설 등 다채로운 작품에서 삶과 죽음의 다양성과 남녀의 사랑을 다루며 정력적인 창작 활동을 해왔다. 주로 의학적인 시각에서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탐미주의적인 미학이 돋보이는 현대 소설을 써왔다. 저자의 고향에 문학관이 개관되였고 그간의 성과를 24권의 문학 전집으로도 간행한바 있다.
어쩌구려 와타나베 준이치의 작품을 우리 조선족 작가들에게 맨 먼저 알린 사람은 내가 되였다. 지난세기90년대초, 그의 대표작 “실락원”을 먼저 VCD로 보았었고 후에 소설로 출간되자 선참 사들여 읽었다. “실락원”의 계보를 잇는 와타나베의 중요한 작품 “사랑의 류형지” 역시 소설과 영화 DVD로 읽고 보았다. 그리고 독서칼럼을 써서 문학지에 실었고 문인들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실락원”의 재판 소식도 역시 내가 신문의 문예부간에 번역 소개했다.
파격적이고 탐미적인 소설로 신드롬까지 일으키며 화제를 몰고 다녔던 와타나베 준이치가 지난 5월 집요하게 탐미해 들었던 세상과의 인연을 놓았다.
고인에 대한 추모 분위기속에 그의 작품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회자되고 있는 작품은 대표작 “실락원”이 아니라 와타나베 준이치가 2007년에 펴낸 에세이집이다.
그의 주특기인 멜로물이 아니였지만 “둔감력(鈍感力)”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은 출간돼 100만부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고 그동안 정치인과 기업 CEO들의 열독서로 꾸준히 회자됐다. 부정적 의미로 사용돼 온 단어 “둔감하다”에 “힘(力)”을 붙인 “둔감력”이라는 단어는 책이 출간된 2007년 일본에서 “올해의 류행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의대 출신인 그는 이 책에서 하얀 가운을 입었던 의사시절의 에피소드와 더불어 일생의 다양한 경험을 언급하며 이른바 “둔감” 례찬론을 펼친다.
수술 때마다 교수에게 혼나던 한 초짜의사가 후날 대형 병원의 원장이 된 이야기, 지나치게 예민했던 동료가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몰락한 이야기…
이 에세이집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둔감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련애와 결혼은 물론 직장 생활에서도 성공한다"는 지론이다. 따라서 저자는 "둔감력이야말로 인생에서 성공할수 있는 최고의 재능"이라고 력설하며 “둔감력”을 재능의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와타나베는 멜로소설이 아니라 이 에세이집을 집필한 리유로 "요즘 세상은 예민함과 신경질로 가득한데 이 때문에 생기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문제가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공통점이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의 바탕에는 둔감력이 있다”라고 갈파했다. 여기서 둔감력은 바로 “일에 실패하거나 남에게 질책을 듣고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힘”이라는 얘기다.
둔감함은 게으름, 우둔함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의 단어이다. 그리고 이 단어의 반대편에는 예민함, 민감함이란 긍정적인 이미지의 단어가 있다. 그만큼 둔감하다는 말이 미련하다는 말과 오버랩되며 좋지 않은 이미지로 사용되였던 우리 사회의 풍토였다.
민첩하고 눈치빠른것이 미덕이라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마냥 신경의 안테나를 곧추 세우고 예민하게 반응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옥죄이고있다.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 세상은 온통 경쟁주의와 리기주의로 가득 차 있고 그 틈바구니에 치대는 사람들은 여유롭지 못하다.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민감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것처럼 아우성이다. 세상살이가 모두 내 마음같이 않고 록록치 않고 때문에 저도모르게 자라난 예민함이 당신을 더없이 힘든 수렁속으로 몰고 가는수가 많은것이다.
그 속박에서 수렁속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주는 우직한 힘이 바로 “둔감력”이다.
둔감한 사람은 흔히 게으르고 리유없이 락천적인 골빈 사람처럼 생각될수 있겠으나 바꾸어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경쟁력을 갖추고 건강도 지킬수 있으며 지혜로운 생활 태도를 가진 자라고도 볼수도 있다.
좋은 의미의 둔감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야만 오히려 치렬한 사회생활에서 건강하게 살아남을수 있음을 깨쳐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해결할수 없는 민감한 문제들에 골머리를 썩이기보다는 그저 놓아버릴 줄 아는 여유로움을 가짐이 좋을듯 하다.
동료의 자질구레한 루습도, 상사의 지지콜콜한 질책도, 부하의 안쓰러운 잘못도, 안해의 가끔의 실수도 크게 하하하하 웃어넘기는 대범함으로, 둔감력이라는 술수로 뭉때버리는것이 좋을듯 하다. 나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도 둔감함을 시의적절하게 적용하는것. 그야말로 오늘 하루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새로운 인생 메세지이다.
어찌보면 둔감력이라는 그 능력은 누구나 쉽게 얻을수 있는것이 아닌것 같다. 이는 그저 눈 감고 귀 막고 안 본척 안 들은척해서 얻을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다 보고 다 듣고 다 알고서도 느긋하게 감내할수 있는 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가질수 있는 힘이요, 능력이다. 그러고 보면 둔감력은 도(道)의 다른 이름이다.
둔감이라는 화두는 성인 공자의 일화에도 나온다.
공자는 “론어(论语)”에서 이르기를 “柴也愚,参也魯,师也辟,由也喭”, 즉 “시(柴)는 어리석고, 삼(参)은 둔하고 사(師)는 형식적이고 유(由)는 거칠다.”고 하였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에 대해 일일이 평가한 말이다. 공자는 제자 안연(颜淵)에 대해 가장 만족해 했다. 제자 증삼(曾参)에 대해서는 다소 둔(鈍)하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뛰여난 순발력을 지닌 안연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 둔한 증삼이 천수(天寿)를 누리면서 스승의 의지를 이어 나갔다. 증삼 즉 증자(曾子)가 결국은 공자의 사후에 유가사상을 계승한 인물로 부상한것이다.
공자는 증삼을 둔하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증자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증자는 유가의 최고 덕목인 인(仁)의 실현을 자신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과제로 여겼기 때문에 평상시에도 아주 근신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였으며 결코 자기가 취해야 할 활동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증자는 특히 효행으로 이름났다. 그는 효의 전형으로서 어리석을 정도로 몸소 효도를 실천하였는데”효경”은 바로 증자가 지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둔”한 덕목이 그를 위대한 사상가의 반렬에 올려 세웠던것이다.
와타나베의 “둔감력”은 재미있는 스토리와 화려한 언어로 가득한 여느 멜로물이나 미사려구의 에세이집들과는 달리 현대인들의 마음과 생활 스타일에 좋은 조언을 해주는 값진 책이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를 와타나베 준이치의 상식을 뒤엎는 발상과 현명한 삶의 힌트에서 배운다. 이는 의사출신의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질병에 대한 통렬한 진단이라 볼수 있다. 우직한듯하나 지혜로운 “둔감력”이 바로 그 처방전이다.
“길림신문” 2014-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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