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담 .
문학의 중심에서 쟝르를 웨치다
- 우리문학에서 소박맞고있는 쟝르문학에 대하여
대담자: 김혁&장춘식
김 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리사, 소설분과 주임
장춘식
평론가,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교수
김혁:
장춘식 평론가님 안녕하세요? 짜증나는 무더위에도 대담에 응해주셔 감사합니다. 북경은 지금 몹시 더웁지요.
장춘식:
네. 안녕하세요? 말그대로 불볕더위입니다.고향 연변도 무척 더울테지요?
김혁:
네. 어딜 가나 더위때문에 아우성이군요.
"누가 이 찜통 더위를 벗어날수 있을가/더위 식힐 좋은 음식도, 피서 도구도 없으니/조용히 앉아 책 읽는게 최고로구나"하고 조선 숙종때 윤증이라는 학자가 읊었다고 합니다. 에어콘도, 랭장고도 없던 옛사람들에게 독서는 최상의 피서법이였다고 하네요.
책읽기를 뜻하는 한자말에는 독서말고도 “간서(看書)”, 그리고 “피서(披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피서(披書)”와 더위를 피한다는 “피서(避暑)”는 음이 꼭 닮았네요. 짜증나는 더위에는 심오한 저서들보다는 쉽게 그리고 재밌게 읽을수 있는 추리나 멜로물이 좋을겁니다. 그래서 전 요즘 읽은 책이 할빈출판사 출판으로 된 일본추리소설 “고백”입니다.
일본에서 추리소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신인작가 미나토 가나에(凑佳苗)의 첫 장편인데 데뷔작치고는 너무나 훌륭해 그토록 치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탄하며 읽은 책이였습니다. 후덥지근한 날씨때문에 더위를 잊고자 든 책인데 외려 인간의 본성을 깊숙히 파헤친 책의 묵직한 내용에 저으기 심각해지고 말았네요.
책은 중학생들이 저지른 살인 사건행각과 자기가 가르친 학생에 의해 딸을 잃은 반주임 녀교사의 복수라는 충격적인 소재때문에 일본에서 거대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우리문단에서도 추리소설은 찬반양론이 심하게 엇갈리는 쟝르이지요. 그러면 오늘은 추리소설과 같은 쟝르문학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평론가님은 요사이 어떤 책이나 영상물을 보았는지요. 쟝르문학쪽으로 굳이 뽑으라면?
장춘식:
최근에 본 국산 드라마중에 “정탐 적인걸(神探狄仁杰)”이 추리적인 축면에서 상당히 정교한 구성으로 짜여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에도 력사적으로 유명한 탐정 적인걸의 전기적인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옛날의 드라마는 공안소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김혁:
한때는 포공(包公)에 대한 공안(公案)소설을 각색한 드라마가 많더니 요즘은 적인걸이 대세인것 같습니다.적인걸은 당나라 무측천 시절에 거란(契丹)의 내습을 평정하여 공을 세운 실존했던 력사인물입니다. 적인걸에 관한 소재는 요사이 류덕화가 주연한 영화(狄仁杰之通天帝国)로도 한편 나왔습니다. 유명한 무협감독 서극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서 무협과 추리를 버무린 퓨전식의 오락물로서 아주 큰 흥행을 보였지요. 이처럼 요즘의 독자와 관객들에게는 무협과 추리 그리고 멜로와 같은 쟝르들이 각광받고 있네요.
장춘식:
네. 저는 사실 무협소설이나 추리소설, 판타지소설은 최근에 별로 읽은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때는 저도 추리소설에 심취해있던 시기가 있었지요.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구해볼 수 있는 추리소설류 작품들, 일본의 추리소설, 한국작가 김성종의 추리소설, 그리고 특히 미국작가 시드니 쉴던의 추리소설들을 즐겨 읽었습니다. 거리 난전에서 팔고있는 해적판도 꽤 많이 사서 읽었지요. 해적판은 오역에 오자투성이지만 그래도 내용은 대충 알 수 있었으니까요.
김혁:
더 일찍 80년대에 이미 이러한 쟝르소설 열독붐이 일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중기에 연길에 헌책가게 하나를 차린적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무협과 추리 멜로물들의 열독상황에 대해 매우 익숙합니다.
당시 일본작가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 한국작가로는 김성종 그리고 미국작가로는 시드니 쉴던(西德尼 . ·谢尔顿)의 작품들이 거의 서점가를 독점하다 싶이 했지요.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阿加莎·克里斯蒂)의 추리소설을 각색한 영화 “나일강 살인사건(尼罗河上的惨案)”과 “동방특급렬차 살인사건(东方快车谋杀案)”이 중국말로 더빙되여 나와 인기를 끌었지요. 인상에 남는 문학작품들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인간의 증명”, 김성종의“피아노 살인”, “제5의 사나이”, 시드니 쉘던의 “가령 래일이 오면”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않았다면 “가령 래일이 오면”은 당시 “천지”문학지에서 꾸리던 문학애호가들의 통신간물 “개간지”에 련재된적있습니다. 무협과 멜로쪽으로는 김용과 경요의 작품이 압권이였구요.
김성종의 추리소설은 그후로도 거의 20년가까이 서점가를 강타했고 모든 간행물들에서 그의 소설들을 다투어 련재했었지요. 우리의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많은 소설들이 중문으로 번역되였는데 지난해까지만도 진설홍, 윤금단등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소설이 중문으로 번역되여 서점가에 올랐습니다. 저도 연변일보 문예부에서 기자로 뛰던 시절 경요의 멜로물 “불타는 천당(失火的天堂)”을 우리말로 번역한적 있습니다.
장춘식:
그시대 사람들로말하면 인상깊은 열독추억이지요. 그때는 저도 아직 소설을 쓰고있었고 뭔가 팔릴 수 있는 소설이 없을까 생각던 끝에 추리소설을 나 자신의 소설에 접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코난도일의 추리소설은 매우 정교하지만, 그래서 학계에서 추리소설의 전형으로, 고전으로 인정받고있지만 시대적 차이가 느껴지고 조금 따분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일본의 추리소설이나 한국의 추리소설들이 우리의 구미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시드니 쉘던의 소설을 읽고는 왜 이 작가의 작품이 늘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리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구요. 시드니 쉘던의 너무 정교한 추리와 기발하고 풍부한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혁:
시드니 쉘던은 기네스북에 오를만큼 량산의 작가였고 탁월한 이야기 군이였지요. 그의 작품은 “가령 래일이 오면”을 완정하게 읽었습니다. 그외 “벌거벗은 얼굴”과 “천사의 분노”는 련환화로 보았지만 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야기에 흠뻑 매료되였더랬습니다. 시종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사건의 진상과 결과에 대한 독자의궁금증을 유지하고 증폭시키는 작가의 필력이 당시 문학도였던 저에게는 거의 “신필”의 경지로 읽혔지요.
요즘 다시 읽어도 의학, 법학, 심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스릴감 강한 이야기로 요즘의 독자군에도 어필이 될만한 작품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때는 단지 추리소설이라고 정의되여 나왔지만 지금 다시보면 의학소설,심리소설 등 여러가지 타이틀을 띈 작품, 쟝르문학의 범주에 드는 작품이였지요.
여기서 쟝르문학에 대해 다시한번 환기해보도록 합시다. 평론가들의 정의에 따르면 이른바 쟝르문학이란 추리, 공포, 력사, 련애소설 등으로 순수문학과 대비되는 매니아적 성격의 대중문학 혹은 상업문학을 뜻하지요. 특정 쟝르만의 규칙, 기호, 취향을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고 그것을 전제로 글쓰기와 글읽기가 이뤄지는 문학을 말하는데 순문학작품과 대비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오래전에 추리소설과같은 쟝르문학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지요. 70년대에 이미 계급투쟁주제의 탐정소설이 등장되였다고 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 력사 배경과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 평론가님께서 분석해 주시지요.
장춘식:
네. 우리 문단에서 1970년대에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이 인물설정과 플롯구성에서 탐정소설화 현상이 나타났다는 주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계급투쟁의 주제가 우리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숨은 계급의 적, 채 개조되지 않은 지주, 부농, 계급이색분자 등이 부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면서 이들을 수색하고 반동적인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소설의 플롯을 형성한 것이지요. 수색 수사 과정은 추리가 필요하고 따라서 탐정적인 요소가 가마되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전까지는 아직 추리적, 혹은 탐정적인 요소가 뚜렷하지는 않았습니다.
문화대혁명 후기, 다시 말하면 1970년대 초, 중반에 한동안 중단되였던 문학창작이 다시 시작되면서 이제 계급투쟁은 우리 소설의 기본적인 주제가 되고 작가들의 플롯구성이 점차 탐정적, 추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김지훈의 단편 “첫 근무”(1976)에서는 녀 공인민병(工人民兵, 당시 비전문적인 치안요원) 봉순이가 주과부와 채무재라는 사람이 싸운 일때문에 조사를 가서 자초지종을 파악하고는 그것을 실마리로 주과부의 아들을 꼬드겨 기계부품을 훔쳐내다가 지하고물점을 통하여 팔아먹는 숨은 범죄자 송칠보를 검거해내는 과정을 그리고있는데 이야기 자체가 범죄사건의 수사로 되여있어서 당시로서는 전형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김청송, 황하성의 “철벽”(1976)은 더구나 상당히 정교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습니다. 공안분야의 간첩수사과정을 다루고있고 그 과정이 상당히 탐정적 혹은 추리적인 형식으로 진행되고있기때문입니다. 이 두 작품은 플롯구성이 기본적으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어 어느 정도 전형성을 띤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그러나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이와 류사한 탐정구조를 갖춘 작품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리고 재미있는것은 이처럼 본격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소설에 속하는 작품들이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다는 점입니다. 김희철의 중편소설 “전우의 딸”(1976)과 “림해의 풍파”(1977)가 대표적이지요.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고 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두편 모두 중편소설의 형식을 취하고있구요.
김혁:
당시는 이른바 “3돌출원칙”이라는 좌적인 철쇄에 매여 모든 작품들이 소재나 구성면에서 천편일률적인 자유롭지못한 상황이 아니였나요? 그러면 왜서 이런 창작경향이 일어났을까요?
장춘식:
두가지 측면에서 이런 현상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는 소설 플롯구성의 중요한 방식으로 존재했던 련애이야기가 금기시되는 등 플롯구성과 인물설정의 측면에서 수많은 금지구역이 존재하였기때문에 작가들이 리용할 수 있는 플롯구성의 방식에 별로 여지가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전에 우리글로 번역소개되었던 쏘련의 탐정소설(“구리단추” 등)이나 70년대 중반 중국에서 방영되었던 조선의 탐정영화 등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입니다. 탐정소설이나 탐정영화, 당시에는 흔히 “반특”영화라 불렀던것 같군요.
김혁:
맞습니다. 조선영화로는 “숨길수 없는 정체”, 쏘련영화로는 “발자욱”, 그외 알바니아와 루마니아의 반특 영화들이 있었지요. 몇편 안되는 혁명적 본보기극 영화들만이 란무하던 그시절에 몇번이고 다시보았던 영화들이였습니다. 그나마 단일한 제재의 반복에 식상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보태여준 작품들이라 볼수 있겠지요.
장춘식:
네 이러한 영화나 소설들의 기법을 습득할 수 있는 여건이 존재했고 마침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숨어있는 반동분자가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때문에 이를 수사하는 과정을 탐정적인 방법, 혹은 추리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는 점, 이런 상황이 서로 접합점을 찾아 탐정소설화 현상이 일어난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은 점차 자취를 감추는데, 소설 플롯구성에서의 이와 같은 탐정,혹은 추리적인 수법의 관성은 그후 김경련의 중편소설 “흉수는 누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있습니다.
김혁:
“흉수는 누구”는 “아리랑”총서에 몇회에 나뉘어 련재되였던것으로 기억됩니다. 그이후로 리만호의 “국장과 나리꽃”등 몇부의 소설들이 통속소설의 형태를 띄고 창작되여 당시로는 작지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지요.
그외도 추리소설에 대한 창작시도를 보여준 분들이 몇분 있었습니다. 연변 로투구출신의 윤송이라는 젊은 작가도 있었고 경찰계통에서 사업했던 룡정의 전강이라는 작가가 추리소설을 몇부 내놓았지만 량적으로 적었고 수작을 내놓지못했기에 쟝르문학 창작군을 뭇기에는 그 기세가 판부족이였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도 80년대에 추리소설을 발표하려 고심한적 있었습니다. “꿈의 변두리”라는 제목으로 4만자되는 꽤 큰 편폭으로 창작했는데 여러 문예지들에서 퇴짜를 맞고 나중에는 당시 번역작품들을 전문 싣다가 페간된 “갈피리”라는 잡지에 그나마 실려 추리소설 창작에 대한 감질난 창작욕구를 무마한적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서도 강하게 느낀바이지만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에 대한 수용태도는 그닥 원활하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추리소설외에도 쟝르소설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무협이나 과학환상소설, 판타지같은것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지요. 과학환상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환상동화가 그런대로 몇편 나왔지만 성인을 상대로 한 것은 리태학선생이 “아리랑”지에 발표한 겨우 한두부로 알고있습니다. 무협형태의 작품역시 80년대 내부간행물인 “개간지”에 당시 문학통신원출신의 젊은 작가였던 류순호씨에 의해 겨우 한편이 나온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장춘식:
쟝르소설의 부진은 결국 우리 소설의 쟝르가 다양하지 않다는 말로 리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쟝르의 다양화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문학교육에서의 다양한 쟝르 설정이 그 하나가 되겠고 다양한 쟝르의 접촉이 또 하나의 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소설시장의 규모와 다양화가 중요한 여건이 될 것입니다.
문학교육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지요. 우리의 문학교육은 소설의 경우 전통적으로 사회소설 혹은 예술소설을 모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대학교육도 그렇고 관련 리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같이 상당정도 무협적인 요소가 있는 소설을 가르칠 때도 무협적인 요소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거기에 함유된 사회적 혹은 력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있지요. 초중등교육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대학교육에서도 이 점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소설에도 여러가지 다양한 쟝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지요.
김혁:
네, 그리고 또 거부와 폄하가 또 이러한 쟝르문학의 정체를 빚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의 일부 주류문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추천하고 언급하고 연구하는 것만을 배타적으로 문학으로 간주하"며"쟝르문학같은 것은 순수문학으로부터 배제된 "상업주의 문학”, 지어 “하위문학”이라고 락인을 찍고 있습니다.이러한 쟝르가 우리가 흔히 접해 온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 것은 변조하고있는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기에 쉽다고 감히 말해 봅니다.
이렇게 쟝르문학을 “수준 낮은 문학”으로 치부하는 시선들이 있기때문에 쟝르문학에 아예 근접해보지도 못하고 너나가 이른바 순수문학쪽으로 몰려가는 것도 쟝르문학이 정체되는 리유 중 하나가 아닐가요?
우리 문단의 작가들과 독서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쟝르문학의 최고봉으로 꼽는 조앤 롤링의“해리 포터”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은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독서량의 편식에 놀란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국외의 쟝르문학작품들을 대량 사들여 소장하고 읽으면서 나름 쟝르문학창작에서 시도를 많이 해보았습니다. 아동력사소설에 미스터리와 무협요소를 가미한 “거북구술”과 “신라의 검”을 “별나라”에 발표했고 “문학과 예술지”에 “환을 말하다” 라는 평론을 게재하여 판타지문학의 추세에 대해 분석도 해보았고 “도라지”에서 호러작품 몇편도 발표하여 평론가들의 찬반의 평론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연변문학”지에 판타지 “불의 제전”을 발표하여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당시 문단의 첫 판타지였음에도 그 새로운 쟝르를 존중해 큰상에 뽑아준 심사위원들에 감사를 느꼈지만 거의 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판타지작품은 아직도 거의 한편도 보이지 않아 갑갑한 마음입니다.
쟝르문학의 결여에 대한 그 일례로 개인에 대한 사례가 많이 들어가 미안하지만 그만큼 이렇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새로운 매체나 틀이 등장하였을때 관습적인 서사형태로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던 우리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소위 “문학성 혹은 예술성이 없다”는 론리로 이러한 신생사물들을 몰아붙였지요. 쟝르문학은 순수문학에 비해 문학성이 뒤처진다는 “편견”이 따라붙지만 독자들의 수요를 외면한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라고 봅니다.
국외의 경우 쟝르문학은 대중깊이 침투되여 있습니다. 누구나 즐겨 읽고 명인들도 자신의 독서성향에서 쟝르소설을 우선 꼽고 있습니다. 미국의 클린톤 대통령이 취임하던 당시 기자들이 즐겨읽는 책을 소개하라고 하자 서슴없이 “추리소설을 매일밤마다 읽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의 유명작가들이나 령도분들이 공중장소에서 이런 말을 했더라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가요? 사실 오래전부터 유럽의 명사들은 자신이 지적이고 품위있으며 교양이 넘치는 신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가지 취미를 내 세우는데 그 세가지인즉 첫째- 사냥, 둘째- 승마, 셋째- 추리소설 읽기라고 합니다. 이는 백여년전부터 귀족이나 상류사회의 신사들이 즐기던 일이였지요.
클린톤 이전에도 링컨도 추리문학을 좋아했고 루즈벨트는 독자의 한계를 넘어 작품을 직접 구사하고 작가들에게 부탁해 쓰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작가들중에서 쟝르문학에 심취한 이들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 “인간의 굴레”의 저자인 영국소설가 서머셋 모옴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합니다. 특히 서머셋 모옴은 “미래에 살아남는 문학은 추리소 설뿐이다. 책방에도 도서관에도 추리가 넘쳐날것이다”고 예견하기도 했지요.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도 그렇고 수학가 화라경도 무협지의 충실한 독자였습니다. 김용의 무협지 “련성결(連城訣)”은 등소평이 가장 즐겨 읽은 소설이라고 합니다.
추리소설이 단순한 추리가 아니고 “소설”의 체제를 갖춘 추리요, 추리를 위한 “소설”인만큼 문학의 쟝르임에 틀림없으며 문학의 쟝르인한 문학상을 부정할수는 없습니다. 만약 문학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전히 추리에 대한 문제의 제시와 해답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소설은 커녕 원고지 몇장이면 충분한 퀴즈풀이에 지나지 않을것입니다.
우리문단에서의 쟝르문학의 정체는 흥미로움과 경박함이 문학의 외피를 쓰고 범람하는 풍조에 대한 거부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판단은 이러한 문학을 향유하는 독자의 몫이기도 하겠지요.
장춘식:
네. 그러면 우리 독자들의 독서환경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독서환경의 경우 문학교육의 경우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라 하겠는데요, 그래도 일반적인 사회소설에 비하면 다양한 쟝르의 소설들은 양적으로 너무 보잘것 없지요. 이 두가지 여건에서 우리의 작가지망생들은 소설을 공부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다양한 쟝르의 소설공부를 할 기회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을것입니다.
그래도 마음 먹고 다양한 쟝르의 소설을 공부하고자 하면 할 수는 있겠지요.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하여 옛날보다는 훨씬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혁:
그렇지요. 인터넷을 통해 또 새 세기에 들어 거족적으로 발달된 중국의 출판, 도서시장을 통해 세계각지의 우수한 쟝르작품들을 시효성있게 접할수있습니다. 요즘은 서구의 판타지와 일본의 추리가 대세인데 그러한 베스트셀러들을 중국에서도 불과 일년안에 번역본을 접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작을 개작한 영상물과 같은 다양한 참조계를 통하는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할수 있지요.
장춘식: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 즉 작가들이 다양한 쟝르에 손댈 수 있는 욕구가 필요한데 이것이 너무 미약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쟝르의 창작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는 독서시장의 요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베스트셀러라는 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무협소설이나 추리소설, 판타지소설은 이 잘 팔리는 책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그런데 우리 독서시장은 워낙 규모가 작기때문에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을 쓰더라도 소설을 써서 돈을 번다는것이 비현실적이지요.
김혁:
네. 우리 작가들이 그것도 자비로 출판한 책들이 겨우 3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말 출판시장의 침체는 말할것도 없고 중국이나 외국의 영화나 텔레비죤과 같은 영상매체 및 컴퓨터 사이버 매체에 경도된 조선족독자들에 의해 점차 소멸해가는 장르의 하나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나 위기의식에 작가들은 시달리고있습니다.
하기에 더욱더 생존의 길을 뚫어야겠지요. 생존화하려면 다양화, 그리고 분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쟝르문학을 바로 분화. 다양화의 한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봐도 무방하겠지요.
전 세계 수천만의 독자들의 검증으로 쟝르문학의 최고의 반렬에 오른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은 자신의 작품에서 문학적 정교함이 떨어진다는 비난에 “나는 노벨문학상이 아닌 수백 수천만 명의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다”라고 호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대중이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대중에 의해 문화가 창조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이러한 정론은 쟝르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합니다. 독자들의 흥미를 무시하고 독자를 외면하며쓰여진 작품은 비록 작품성이 뛰여나다 할 지라도 “읽히지 않은 소설”이라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을겁니다.때문에 우리의 문단은 편협한 변두리 사유에서 벗어나 첨단 다매체 시대에 걸맞게 활용 매체에 부합되고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소통 전략을 필요로 해야 할것입니다. 작은 시장, 엷은 독자층을 가진 우리 문단, 우리 작가로서는 그런것이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서서히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 우리 문학의 다양화와 정체의 극복을 위해선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장춘식:
조선이나 한국을 포함시킨다면 물론 작은 시장은 아닙니다만 이들의 독서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수련과 적응과 연구가 필요한데 선천적으로 우리는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상황이지요.
김혁: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만의 특유의 정서와 소재로 한번 승부사를 던져본다면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을가요? 외려 한국에서 우리의 소재를 활용하여 책도 내고 영화도 만들고 있던데요. 그와중에 상업효과만 쫓아가고 조선족에 대한 진정한 리해의 결핍때문에 조선족 독자와 관객들의 불평의 소리도 때때로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 조선족 작가들이 해외에서 사뭇 선호하는 쟝르문학에 대한 연구와 동참의식에 대해 한번 호출해보는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우리문단에서 나름 시도가 없는것도 아니였습니다. 일전에 문단에서는 참으로 반갑게 전문 인터넷 문학상이 공모되였는데 그 문학상에 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생각되는바가 많았습니다. 인터넷 문학이라는 쟝르문학의 요소에 거의 근접하지도 못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였기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심사위원 모두가 우리의 인터넷 작가들의 문학 전반에 대한 리해와 예술적 안목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정평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참여의식과 열기는 보였지만 우리의 인터넷소설이 문단에서 하나의 새로운 력랑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아직 성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해외에서도 학자들이 인터넷 소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기존의 소설 양식이 가지고 있는 구성의 치밀성과 예술성이 떨어지고, 언어에 대한 투철한 자각이 결여되여 있어 민족어의 상실과 그로 인한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는 지적”이 나오고있는데 우리의 인터넷 문학에도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장춘식:
저도 이번 인터넷문학 문학상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만 얼마간 실망하기도 했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 또한 문단의 선배로서 저에게도 책임이 없을 수 없지요.
가장 절실한 느낌은 우리 문학청년들이 아직 인터넷문학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이라는 점이였습니다. 문학작품을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 공간에 올려놓으면 곧바로 인터넷문학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하기야 종이신문이나 잡지에 게재했던 작품을 인터넷에 올려놓기만 해도 어느 정도 인터넷문학의 기능을 하기는 하지요. 쌍방향의 소통이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이것을 인터넷문학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나도 인터넷을 단순하게 보는 편협한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형의 미디어로서 인터넷은 종이신문이나 잡지, 서적, 영화나 텔레비죤 등 전통적인 미디어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있습니다.
김혁:
네. 인터넷문학을 비롯한 쟝르문학 작품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소설에 대한 정의와 가치 기준으로 보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존의 문학이나 소설에 대한 정의, 역할등 면에서 현격한 관점의 차이를 보이면서 기존의 양식과 구분되고있지요.
요즘의 인터넷 문학을 보면 인터넷 작가들만의 환상작인 소재, 파격적인 구성방식, 그들만이 오가는 은어,전용어 즉 축약되거나 변용된 부호의 인용, 마치 삽화처럼 사용되고 있는 이모티콘등으로 그들만의 창작방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터넷 문학작품들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에 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인터넷문학인 것은 아니지요.
장춘식:
그런만큼 인터넷문학 또한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의 장점을 최대한 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문학이여야 하겠지요.
아직 많이는 개발되지 않았습니다만, 가령 이미지나 음향, 음악 등을 동반한 시문학, 하이퍼링크식의 소설구성 등은 쉽게 생각할수 있는 인터넷문학만의 특징이 되겠지요. 하이퍼링크라는 개념은 쉽게 말하면 인터넷사용자들이 자주 접촉하게 되는것인데요, 하나의 링크를 클릭하면 새로운 화면이 뜨는 현상을 말하지요. 례를 들면 이런것입니다. 전통적인 소설과 꼭 같은 형태의 스토리가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클릭을 필요로 하도록 설정합니다. 하나 이상, 가령 2개나 3개의 링크를 설정하여 원하는 링크를 클릭하였을 때 이어서 스토리가 진행되게 하는겁니다. 링크마다 스토리의 진행상황이 달라지고 특히 결말부분에서 몇개의 서로 다른 링크를 걸어놓으면 독자의 궁금증을 배가시키게 되지요. 그러니까 시작이 같은 소설이 중간에서 스토리의 방향이 몇개로 나뉘여질수도 있고 또 몇개의 서로 다른 결말이 설정될수도 있다는 말이 되지요. 이런 형태는 종이미디어에서는 불가능하니까 인터넷만의 특징이 되는겁니다.
이외에도 인터넷의 끊임없는 발전과 더불어 인터넷의 특징과 개성을 리용한 수많은 새로운 문학창작양식이 개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혁: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이 언제면 제 명성을 찾을수 있을 것인지? 안타깝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도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의 신진들은 선배들의 고답적 문학 형식을 거부하는 한편, 작품들이저마다의 개성과 작품성을 보이면서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맞서는 창조적 글쓰기의 순발력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작품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작품들과는 언어와 플롯면에서 완연 분별되는 쟝르물의 문법을 끌어들이면서 독자층을 사로잡는 깜찍발랄한 작품들, 감히 수작이라고 부를수 있는 작품들이 씨앗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 소설이나 신예들을 발견하면 반가움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찾아옵니다. 소설이 더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쟝르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소설의 인문학적 가치를 고려하는 습작생이기에 반갑고 또한 그 습작생을 어떤 문체방식으로 이끌어야 할지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들은 언제쯤 싹을 틔울수 있을까. 쟝르문학의 황무지 같은 이 곳에서, 조금은 간절하게 그 순간을 기다려봅니다. 그들에 의해 우리의 쟝르문학도 꽃을 피워 우리만의 특색의 “적인걸”이 나오고 “홈즈”가 등장할 날이 있겠지요.
장춘식:
소설쟝르의 다양화 혹은 쟝르소설의 발달은 문학교육, 독서환경, 시장요청 등 세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수 있겠는데, 알수 있듯이 어느 한 측면에서도 우리 문단은 소설쟝르의 다양화나 쟝르소설의 발달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지 않고있습니다.
김혁:
이에 반해 해외의 경우는 “순수문학”과 “쟝르문학” 사이의 경계조차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이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게 벌써 십년 저쪽의 일입니다. 추리와 과학환상판타지, 로맨스, 무협 같은쟝르소설들이 본격문학의 령역안으로 대거 밀고 들어오는 한편, 순수문학 쪽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지요. 이른바 순문학 작가들은 쟝르소설적 틀과 장치를 적극 활용한 작품들을 다투어 내놓고 있습니다. 이들은 “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독자와 정면승부하자는게 취지”라고 창작의취에 대해 설명하고있습니다.
일종의 세를 형성하면서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는 요즘 우수한 쟝르작품들은 쟝르작품들이 갖는 특유의 기계적 장치를 크게 차용하고 의지하면서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통찰을 담고 현실에 대해발언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추리적인 것이나 무협적인 것 환상적인 것은 배경에 불과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혹은 인간의 어떤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적극적인 소재이자 계기에 불과하기도합니다. 상상력은 보조에 불과할뿐 결국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그리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소설로써의“이야기”, 문학으로써의 완성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태고적에 칼날을 휘두르고 은하계밖에서 날아예고 피투성이의 복수극을 펼치던 쟝르문학이 이제는 사회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있습니다. 쟝르문학 전문작가들은 그 시대의사회문제를 포착하고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대중들도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한국의 경우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이 엄격한 그들의 문학 풍토에서 쟝르문학 시장이 활성화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하위쟝르로 폄하되던 쟝르소설들이 미래의 문학을 이끌어갈지도 모른다고 문단과 학계가 조심스레 점치기도 합니다.
쟝르문학이 가지고 있는 오락성은 분명 순수문학의 엄숙성과는 구분지어질 특징이라 할만도 합니다. 그러나 쟝르문학의 가치 전부가 부정적으로 판단될 성격의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교훈적이기보다는 오락적인 재미를 얻기 위해 소설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순수문학이 추구하는 목적 달성의 “일석이조”의 효과도 줄수 있다면 쟝르문학의 가치를 작지않게 매길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몇해전에 “도라지”에 내였던 호러작품에서 저는 단지 공포물이라는 취미로 쟝르문학에 접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변혁기 농촌사회의 붕괴와 그 와중에 겪게되는 농촌총각들의 실의와 아픔에 대해 다루려 했습니다.그리고 판타지 “불의 제전”에서는 민족의 렬근과 분단의 아픔에 대해 말하려 꾀했구요. 오래동안 엄숙한 자세로 소설창작에 림해온 작가로서 저는 기존의 본격소설은 쟝르문학과 같은 다양한 자양분을 수용해야 그 지평을 넓힐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독자들을 섭렵하고있는 쟝르문학의 흥미가 종국에는 순문학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라마지 않고있습니다.
장춘식:
이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면 가령 문학교육에서 다양한 소설쟝르를 가르치고 다양한 쟝르의 소설들이 독자에게 배급되고 마지막으로 조선과 한국을 포함한 한글문화권을 대상으로 시장개척을 시도해보아야 하겠지요. 한어로의 창작도 생각해볼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상 우리 조선족문학이라는 개념과는 점차 멀어질수밖에 없습니다.
문학선배로서 책임감을 통감하며 함께 노력해야겠다는 말밖에는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김혁:
“호불호”가 엇갈릴지라도 현재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양식과 감각은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의양상을 결정지운다는 점에서 쟝르문학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중요한 령역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순수문학이 지금 당장 그동안의 중국이나 구쏘련등의 주류문학을 고스란히 접해오고 중국조선족이라는 락인이 찍히게끔 노력해왔던 전통과 결별하고 오로지 가벼운 상업주의와 내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의 위기론이 매일이고 들려오는 오늘, 해원의 길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또 한 방편으로 쟝르문학의 부재에 대해 질호해 봤던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의 쟝르문학에 대한 새삼스러운 환기와 구구한 담론은 산업화시기에 맞닥뜨려 어딘가 무력해진 우리 문학의 현황과 하지만 그 문학의 생존을 갈망하는 열정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이 문화 전체의 구조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재조정될것이고 탈변에 탈변을 거듭할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더욱 문학답게 정련될 것이며 그것만의 절대적인 기능을 갖게 될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문단의 빈 구석을 찾아보며 대중문화담론을 구구히 늘여놓는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과 무관하지 않을것입니다.
무더위를 잊게 한 좋은 대담 감사합니다.
장춘식:
감사합니다.
“도라지” 2011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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