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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혁
옥탑방(閣樓)에서는 아파트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높은 곳에서 보이는 인간들은 모두 바닥에 납작하게 눌려서, 마치 게처럼 땅 우를 기여 다니고 있다.
광장의 모습은 컴퓨터를 뜯어보면 뒷면에 부착 된 전자기판의 회로처럼 오밀조밀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공터는 블록타일로 깔려 있고 변두리 네 귀에 나트륨 등이 초병처럼 서있다.
광장 가녁에 벤치가 놓여 있고 그 뒤에 단을 지어 만든 화단에는 그냥 탈없이 자라는 코스모스 다리아 따위를 심었다. 때로 바람이 바뀌면 환기용 창으로 아릿한 꽃 냄새가 흘러든다.
한쪽 구석의 놀이터에는 철봉대 몇 개가 부설 되여 있고 그네도 매여 있다.
옥탑방은 흡사 대극장의 2층에 설치된 호화좌석과도 같다. 좋은 가시도(可視度)의 위치에서 아파트광장의 구석구석을 부감(俯瞰)할 수 있는 것이다.
커트 (鏡 頭): 1
소년은 초롱 속의 한 마리 부리 붉은 새처럼 옥탑방에만 붙박여 있다.
아니, 갇혀있다.
기다리던 여름방학 이였지만 소년은 들큼한 환상으로 기다렸던 방학을 나름대로 지내지 못하고 있다. 죄다 이모 때문이다. 소년의 학습성적이 추락하는 승강기 꼴이니 이 방학엔 옴쭉 말고 죽쳐 앉아 성적제고에 전념하란다. 그러니 실제 소년은 본의 아니게 감금 된 셈이다. 옥탑방에서 텔레비전은 아예 볼 수 없고 컴퓨터를 놀려해도 이모가 굳이 우체국으로 찾아가 인터넷접속을 끊어 버렸다. 친 엄마는 출국해 버리고 이모에게 얹혀 사는 신세니 소년은 응석 같은 것은 물론 거부 같은 것은 더구나 몰랐다. 감금이 싫어진 소년이 하는 짓거리란, 옥탑방의 창으로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보는 일이다.
그러다 어느 날엔 가부터 갑작스레 소년은 옥탑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옥사(獄舍)같아 뵈던 옥탑방이 사물사물 좋아진 것은 소년이 이불장 위에서 소학시절 심취 되였던 그것을 뒤져 낸 다음부터였다.
그것은 천문망원경 이였다. 《매 눈(鷹眼)》이라는 상표딱지가 붙여진 천문망원경. 배률이 아주 높아 별자리들을 확인해 볼 수 있고 달 표면에 웅기중기 솟은 환형 산까지도 볼 수 있는 망원경이다. 소학시절 소년은 학교 천문애호가서클의 책임 이였고 천문망원경의 사용권과 보관은 소년에게 주어 졌었다. 그러다 소년이 다니던 조선족 소학교는 어느 날엔 가 번개라도 맞은 듯이 갑작스레 폐교 되였고 그 아수라장에서 누가 천문망원경에 대해 구태여 따져 묻지도 않았기에 망원경은 소년에게 문을 닫은 모교에 대한 아픈 기억과 함께 남아 있게 되였다.
... 달에는 지구와 달리 대기가 없다. 공기 층이 없기 때문에 우주에서 떠돌던 암석이나 먼지들이 떨어지게 되면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크고 작은 분화구들이 많이 생기며 환형 산(環形山)이 형성되게 된다. 달에서 매우 흔한 지형은 환형 산일 것이다. 달은 아주 오래 전에 류성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는데 류성이 달 속으로 파고들면서 표면을 파헤치고 구덩이를 만들어내었다. 실제로 반반한 모래에 돌멩이를 세게 던지면 이와 비슷한 구덩이가 만들어지는 원리와 같다. 이렇게 생성된 분화구들은 평평한 바닥과 뾰족하고 둥근 테두리를 갖고 있으며 중앙에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달 표면에는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가 수십 개나 들어갈 수 있는 크기(60-300km)의 분화구들이 234개나 있다고 한다...
맨 처음 망원경으로 무대 배경처럼 코앞에 다가온 환형 산을 보면서 가슴 벌렁 이였던 그 날의 감수를 소년은 내내 잊지 못해 한다. 그날의 격정은 그의 동년의 메모장에 커다란 획을 그으며 남아 있다. 그후로 천문서클에 누구보다 열성을 보였고 하면서 알둥말둥한 천문상식을 죽어라 외우기도 했다.
허나 요즘 들어 소년은 천문망원경으로 달을 보지 않는다.
하늘을 보지 않는다.
천문망원경으로 소년은 ...
사람을 본다.
《매 눈》표 천문망원경으로 보면 멀리 산의 꼭뒤, 건물들의 이마, 안테나들의 촉수들이 손에 잡힐 듯이 잡혀 온다. 그러니 가까이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더 극명하게 보인다.
광장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은 몇 명 안 된다. 일요일마다 광장에서 롱구를 치고있는 23번 유니폼(先手服)을 입은 자기또래의 사내애며, 저녁 무렵이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발을 간댕이는 소녀며...
그리고... 아파트 광장 건너 4동6층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샅샅이 드러난다. 매 호의 창문마다는 하나의 텔레비전 형광 막으로 되여 자신들의 모습을 리허설(試演)을 앞둔 극단 마냥 소년 앞에 펼쳐 보인다.
4동1단원6층에는 지지리 늙은 할망구가 살고 있다.
몸이 불편 한 할망구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낯빛이 노란 할머니는 베란다에 앉아 매일이고 그렇게 하염없이 밖을 내다본다. 그런 할머니의 품에는 늘 고양이가 안겨져 있다. 포만감 서린 고양이의 얼굴과 주름이 자글자글 한 무표정한 할머니의 얼굴이 사뭇 대조적이다.
4동2단원6층에서는 매일이고 마작 판이 벌어진다.
술 먹은 터에 얼굴이 잘 구운 찐빵처럼 불그레해진, 만족스런 표정의 나그네들이 저 저마다 담배 대를 입 귀에 지긋이 물고 피여 오르는 연기에 실눈을 좁힌 채 부지런히 마작 쪽을 쌓고 헤치고 섞는다.
4동3단원6층에는 렵기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떤 녀자가 홀로 살고 있다.
소년에게 망원경으로 천체가 아닌 사람을 보려는 념두가 생긴 것은 모두다 이 녀자 때문이다.
달빛이 은으로 칠한 풍경을 토하던 어느 밤이였다.
그날 밤, 아래층에서 울리는 드라마의 주제곡 소리를 듣다말고 소년은 망원경으로 화단의 꽃을 보고 있었다. 광장에 불 밝혀 진 나트륨 등의 빛을 받아 꽃은 부옇게 빛나고 있다. 지나치게 클로즈업(特習) 된 꽃의 색조에 잠시 어지럼을 느껴 렌즈를 돌리던 소년의 렌즈 속에 풍경 하나가 잡혀 들었다. 자석에 끌리는 쇠 가루 마냥 소년은 렌즈를 그쪽에 맞췄다. 망원경의 조리개를 돌리자 4동3단원6층의 광경이 무대처럼 드러났다.
녀자는 금방 머리를 감고 나서 드라이어(吹風器)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훈풍에 날리듯 머리카락이 표표히 날리고 있었다. 간편한 속옷차림 이여서 많이 드러난 피부들이 환장하게 눈에 시였다.
드라이어를 흔들 때마다 녀자의 위태롭게 엷은 속옷을 들추고 솟은 지극히 풍만한 가슴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입에서 단내가 났고 눈앞에 엄청 밝은 전구가 켜진 듯하다. 가슴이 부서질 듯 쿵쾅거린다. 푸른 목초지 에서 양이 뛰노는 듯한 심장의 박동을 스스로도 들을 수 있었다.
녀자가 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낚아채듯 속옷을 뒤집어 벗는다. 물 속에 거꾸로 처박히듯 소년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켠다. 녀자가 백양의 가지처럼 두 팔을 우로 한껏 뻗으며 겨드랑이의 치모가 보이게 기지개를 켠다. 하품을 하고 나서 녀자가 벗은 몸으로 창가로 다가온다. 소년은 덴겁해 창가에서 몸을 사렸다. 가슴은 상사 말을 품은 높이 뛴다. 소년은 네발 짐승처럼 헐레벌레 기여 가 침대 전에 놓여진 탁상 등의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불을 꺼버렸다.
이윽고 소년은 용기를 내여 다시 창으로 머리를 반쯤 내밀었다. 3단원6층을 내다보았다. 창에 두터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소년은 벽에 등을 댄 채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소년의 몸은 간단없이 떨리고 있었다.
의구심에 사로잡혀 황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문손잡이를 트는 소리가 들린다. 소년은 덴겁해 하며 망원경을 침대우의 이불 밑에 밀어 넣었다. 이모는 시시 때때 그의 방에 뛰여들곤 한다. 뛰여들어서는 소년이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지 공부에 몰두하는지를 확인하군 했다. 마치 나치스 집중 영의 살벌한 순경처럼. 이모의 눈이 무서워 소년은 천문망원경의 삼각 틀도 세우지 못한 채 그저 렌즈의 경통(經筒)만 창턱에 얹어 놓고 밖을 보군 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이모가 들어섰다. 딸깍 불이 들어 왔다. 그런데... 들어 선 사람은 이모가 아니였다. 이모가 칠삭둥이로 낳았다는 철없는 아들녀석도 아니였다. 들어 선 사람은 뜻밖에도 4동3단원6층의 그 녀자였다.
《잘, 잘못했어요》
《나 처음이 애요. 오늘 딱 한 번이 애요》
《제발, 제발 우리 이모에게 이르지 말아 주세요》
죄의식에 쫓겨 더듬이며 소년은 자기의 행위를 반성했다. 녀자가 소년을 향해 다가 왔다. 소년은 죽치고 앉은 채로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그런데 녀자의 얼굴에는 그다지 격노하는 기색이 없었다. 녀자가 불현듯 블라우스를 낚아채듯 벗어 버렸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가슴이 출렁 튕겨나왔다.
그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소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만져 봐》
녀자가 떨리고 있는 소년의 손을 가슴에 얹어 주었다. 보드라운 살갗의 감촉이 느껴지자 소년은 불에 닿은 듯 손을 옴츠렸다. 붉은 입술 속 하얀 옥치를 보이며 녀자가 웃었다. 이번에 소년의 머리를 거대한 가슴사이에 감싸안았다. 지극히 포근했다. 그리고 지극히 숨이 막혔다.
그냥 내리누르는 묵직한 중압감에 몸부림치다 소년이 깨여 나 보니 외사촌동생이 베개로 자기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일어나! 몇 신데 아직도 꿈 밭이냐.》
일어나 밥 먹으라고 녀석이 쥐여 당겼지만 소년은 한사코 이불을 잔뜩 껴안으며 몸을 옹송그렸다. 잔뜩 부풀려져 있는 자기의 신심을 녀석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기 위해 서였다. 미몽을 깨뜨린 덤벙이녀석이 잡아죽이도록 미워졌다.
그날 이후로 소년은 다시 열성스런 천문서클의 그때로 돌아간 듯 했다. 초조히 밤을 기다렸고 어둠이 내리기 바쁘게 천문망원경을 집어들었다.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커트 (鏡 頭): 2
소년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하나는 4동의 4층엔 가에 살고 있는 나그네이다.
할리우드 영화중의 변태 광처럼 생긴 온몸이 깡마른 나그네.
어느 밤, 맞은 켠 아파트의 창을 향해 망원경의 조리개를 신나게 돌리 던 소년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잡혀 들었다. 4동 4층인가의 방에서 펼쳐지고 있는 즉물적인 광경이 본의 아니게 잡혀 들었다. 그 할리우드 영화중의 변태 광처럼 생긴 온몸이 깡마른 나그네가 텔레비전에 충혈 된 눈을 박은 채 팬티를 까고 막 물 오른 가지처럼 부풀어 오른 그것을 열심히 주물러대는 광경이다. 나그네가 뚫어져라 눈 박고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금발머리에 가슴이 거대한 녀자가 그를 향해 자기의 치부를 벌려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함께 살고있는 이모이다. 두 사람 다 판에 박은 듯 한 일면이 있다. 항용 풀 먹인 옷 같은 엄숙성으로 굳어있는 얼굴이 싫었고 미이라를 방불케 하는, 몸 안의 물기를 몽땅 쏟아낸 듯 비쩍 마른 몸매가 싫었고 음절과 음절사이의 곡선을 무시해 버리고 그저 직선으로 솟구치기만 하는 목소리가 싫었다.
그보다도 이모의 자기와 외사촌동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촘촘히 규제하는 강요가 싫었다. 조그만 일이 있어도, 례하면 반 급의 녀학생들에게서 전화가 오거나 남녀의 키스장면이 나오는 조금 그런 비디오를 보거나... 하는 날이면 하늘이 두 쪽 날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직살 나게 야단치 군 한다.
《부모들은 지들을 위해 타향서 쌍 코피 터지도록 일하는데》
이는 말 사이에 양념처럼 튀여나오는 이모의 관용구(慣用句)다.
영악한 후각으로 우리가 담배를 피워 낸 냄새나 알콜이 조금 섞여있는 음료를 마신 냄새를 맡아내곤 한다. 그러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지도자동지들처럼 더 쓰잘데없고 긴긴 일장 훈화가 시작된다. 그것이 인생설교를 빗댄 어른들의 자기 발설임을 소년은 안다. 컴퓨터를 할라치면 시시각각 그들 쪽을 흘깃거리다 모니터 앞에 머리를 불쑥 들이밀기도 한다 들기도 한다. 소년이 그런 사이트에 들지 않나 해서. 기실 외사촌끼리 그런 그림들을 다운로드(下載)하여 D판에 감추고 시시때때 들여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 접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오래 하면 바이러스 옮는다! 꺼라! 고 어처구니를 벌리기도 한다.
부엌에서 이불거죽을 삶으며 늙어 온 세대지만 그 앞에서 컴세대인 소년과 외사촌동생은 용빼는 수가 없다. 고집도 어찌나 센지 그가 지구가 네모다 면 옛! 맞슴다! 하고 답해야 한다. 소년뿐 아니라 외사촌동생도 지어미에게서 심연처럼 가로놓인 불투명한 기류를 느낀다. 어른들의 관심이 간섭으로 여겨지는 사춘기이다.
이모는 시가지의 중점학교에서 한어교원 노릇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만둔 게 아니고 밀려났다. 년령도 년령이려니와 요즘 들어 엄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강위(崗位) 시험에서 합격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콤플렉스가 있어서인지 이모의 성깔은 나날이 가시를 닮아 가는 모양이다. 교원자리에서 밀려나 이모는 학교 문방구에서 일했다. 그러다 남세스럽다고 나와 지금은 전화박스 하나를 세 맡고 수금원 노릇을 한다.
이모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여 조선족 학교들에서 이중언어 교학을 실시하면서 한족교원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많은 조선족교원들이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제야 이모의 콤플렉스는 조금 풀린 듯 했다. 학교에서 밀려 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런 시국을 미리 보아내고 원견성이 있어 학교에서 나온 것처럼 이모는 남들과 말하곤 했다. 그런 이모의 얼굴에 평소에 보기 힘든 웃음 살이 어리광치는 것을 소년은 놀랍게 본적 있다. 또한 전화박스에서의 수입도 짭짤한 모양.
외사촌동생은 칠삭둥이여서 육아상자에 몇 달 있다 세상에 나온 녀석이다. 그래서인지 녀석이 하는 행위는 언제 봐도 유치의 최고봉이다. 매운 구석이라곤 어디에도 없는 녀석은 매일 평균 세 번씩 지 엄마의 욕을 먹어야 자기의 인생을 진행해 나갈 수 있다. 조카인 소년과는 할 수 없으니 번마다 그가 어른들의 스트레스 해소의 제물(祭物)이 되는 지도 모른다.
그런 녀석이 하필이면 댄스에 맛을 들였다. 밥을 먹으면서 까지도 이어폰(耳機)을 끼고 발 많은 문어처럼 손발을 허우적이며 댄스음악을 듣는다. 그러다 지어미한테 철썩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한다. 지랄도 자꾸 하면 요령이 생기는 법인지 녀석은 댄스를 제법 추었다. 고난도 동작을 하다 손목뼈를 상하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이는 당연히 이모에게는 하늘이 세 쪽 날 일 이였다. 번마다 련습장을 찾아가 녀석을 연행해오곤 했다. 하고싶은 일을 못하게 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이 녀석의 배속에 오글오글 숨어 있다. 그래서인지 집에만 들어서면 녀석의 입 륜곽은 마냥 하현달처럼 아래로 쳐져 있다.
그 인상이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구겨져 아예 걸레로 되였다. 외사촌동생의 그 감정의 파장을 소년은 안다.
오토바이에 약수 병을 처매 달고 집집에 약수를 날라주던 나그네가 있다. 어쩌면 전문 흙 밭을 들추며 개미를 잡아먹는 식의 수(食蟻獸)같이 입이 앞으로 유난히 튀여나온 나그네다.
그런데 어쩌면 이모가 그 《식의 수》와 별로 좋아하는 눈치다.
어느 날인가 이모의 방에서 울려나오는 다른 음색과 가락으로 랑자한 코고는 소리를 듣고 소년도 외사촌동생도 잠에서 깨였고 그 이튿날부터 약수 나르는 나그네는 자연스레 그들의 아침상이나 저녁상에 합석하곤 했다.
밖에서 오토바이소리만 나도 외사촌동생은 안절부절을 못한다. 마치 올 곳에 온 듯이 태연하게 그들의 저녁상에 끼여들어 나그네가 개미처럼 이 반찬 저 반찬을 들추는 것을 원쑤처럼 지켜보다 외사촌은 문을 박차고 나가곤 했다.
《하필이면 광천수 나르는 나그네냐?? 명색이 교원이라는 엄마가》
한 살 어리지만 소년보다 머리 하나는 큰 녀석은 변성기에 접어든 컬컬한 고함 질로 소년에게 성토한다.
《그렇게 단칼에 베지 마라. 니 엄마도 고충이 있을 거다.》
형이랍시고 어르지만 소년이 보기에도 덜 좋은 풍경이다. 녀석의 아버지, 소년의 이모부는 인력송출대오에 끼여 리비아의 노가다판으로 나갔다. 이제 4년쯤 될 거다.
소년에게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몽롱하다.
어릴 적 한 달에 한번 정도 아버지가 집에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면 양고기 뀀을 먹는 날 이여서 소년은 좋았다. 그렇게 양고기 뀀과 같기 부호를 그었던 아버지는 언젠 가부터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그때 겨우 식자 본을 떼고있던 소년을 동생에게 맡기고 한국으로 나갔다.
이제 어머니의 얼굴 역시 소년에게 몽롱해 진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소임을 하련 듯 한 달에 한번 꼴로 전화가 왔고 또 돈도 우송하곤 했다. 그날이면 이모네 온 집 식구가 또 나가서 뀀을 먹는 날이다. 한국 경주에서 일하고 있다는 엄마가 어느 한번 사진을 보내왔다. 요행 차려진 휴가 일에 유람을 나가 찍은 사진이란다. 그 이름난 전설의 에밀레종 앞에서 찍은 사진 이였다. 오랜만에 더듬어 보는 낯설은 엄마의 모습보다 엄마가 배경으로 한 그 종에 깃 든 옛말이 주는 흥미가 소년에게는 더 컸다. 그래서 종에 새겨 진 문양을 유심히 더듬어 보았던 소년이였다.
엄마는 소년에게 그저 한 컷의 사진으로만 남았고 전화 속의 목소리로만 남았다. 돈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지만 소년의 코밑이 가무스레해 지고 울대뼈가 복숭아씨 삼킨 듯 도드라진 나이가 되여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커트 (鏡 頭): 3
공격적으로 치켜 든 군더더기 없는 턱에 머리를 솔잎처럼 세운 그 애는 일요일마다 광장에 등장한다. 4동4단원인가에 살고있는 것 같다. 애는 23번 유니폼을 입고 있다. NBA를 주름잡는 롱구 거성 맥클, 쵸단의 번호이다.
《매 눈》표의 렌즈 속에 잡혀 든 롱구 공이 지구처럼 커다랗게 보인다. 말쑥한 새 공이다. 롱구 틀도 없는 광장에서 《23번》은 뛰고 솟고 구울 고 한다. 공 튀는 소리가 광장에 가득하다.
소년은 그 애를 안다. 소년과 한 학급에 있던 애. 학교 축구팀의 중앙공격수로 이름이 있는 애다. 마냥 짧게 치 깎고 다니는 머리 때문에 키가 한결 더 커 보이는 그 애의 별명은 《안정환》이다. 성이 안씨인데다 공 다루는 수준이 한국의 축구스타 안정환 이처럼 신기에 가깝기 때문. 그리고 그 애만 나서면 우리 팀은 안정환(安定丸)을 먹는다. 그 애는 학교축구팀의 령혼 인물이다. 소년의 학교축구팀이 전주의 학교들에서 해마다 펼치는 리그전에서 번번이 보좌에 오를 수 있은 것은 모두다 그 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서였다. 애가 수면을 헤 가르는 숭어처럼 몸을 솟구며 헤딩으로 꼴 문을 터뜨릴 때 소년은 곁에 선 계집애들과 함께 자기를 잃고 새된 환성을 지르기곤 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왜소한 체구와 벋장이 발에 대해 처음으로 자비를 느껴 거울 앞에서 구구히 살폈던 소년 이였다.
그런 《안정환》이가 축구 공 대신 롱구 공을 안고 23번 유니폼을 입고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소년의 마음은 빼여 난 스타가 이적해 간 뒤의 축구팀을 지켜보는 팬과도 같은 심경이다.
얼마 전에 애는 한족학교로 전학을 해 갔다. 그 애처럼 한족학교로 전학을 가는 것이 요즘 풍조다.
이모도 외사촌동생에 한족학교로 전학을 하라고 구구히 권장한 적 있었다.
요즘 세월엔 한어를 잘 해얀다! 한어 잘해야 좋은 직장 얻을 수 있다! 이 바닥에서 굴러먹을 수 있고!
그때마다 녀석은 안가! 죽어도 안가! 하고 필요이상으로 악청을 지르곤 했다.
공부가 반 급의 평균을 깎아먹는 수준인 녀석에게서 또 가장 약한 고리가 한어이기도 했다. 그런 체신에 이질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무리에 묻히는 것이 그에게는 공포감 자체 그 것 이였다. 이모가 집요하게 달려들자 녀석은 손을 칼처럼 세워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엄마가 자꾸 이러면 나 쓱- 할거야.》
녀석이 하도 심각한 표정으로 진저리를 치는 바람에 이모는 한숨을 한번 짓고 나서 더는 그 일을 꺼내지 않았다. 허나 그로서 이모의 속셈이 수그러든 건 아니였다. 어느 하루 옥탑방으로 올라 온 이모가 전에 없이 험상을 풀고 푸근함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넌짓이 소년과 물었다.
《넌 기본도 못 되는 우리 녀석과는 달라.. 공부도 잘 하고 총기도 있고.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하니? 한족학교 가는 거?》
소년도 덴겁해 손을 칼처럼 세워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안정환》의 부모가 어떻게 그를 전학의 길에 오르게 했는지 누구도 알 바가 없다. 그가 떠나던 날, 환송파티에 온 애들이 많았다. 애에게 아름 벌게 선물이 안겨졌다. 그 애가 좋았던 학교의 몇몇 녀자 애들은 입을 감싸쥐며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까지 했다. 체육선생이 조선말로 학교축구팀의 로고가 찍혀 진 스포츠모자를 그에게 씌워 주었다.
《가서 잘 해라. 글구.. 조선말 잊지 말고》
그 어조는 평소에 면도날 같던 체육선생의 소리답지 않게 어쩐지 음울했다.
《안정환》이 떠난 뒤로 학교의 축구팀은 생기를 잃었다.
한족학교로 전학 해 간 뒤 그의 체육기질을 보아 내여 학교 롱구팀에 편입 되였다고 했다. 그 학교에서는 축구보다 롱구 쪽을 선호하고 있었다. 이제 《안정환》이 아니라 23번《맥클 쵸단》인 그 애에게서 소년은 어제 날의 벽파 속에 자유자재로 요동하던 물고기 같은 정열을 보아낼 수 없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23번》은 롱구 공을 손으로 다루는 것 아니라 발로 차고 있었다. 소경 매질하듯 되는대로 찬다. 광장 변두리에 일매지게 축조된 차고(車庫)의 벽에 대고 차고 있었다. 둔 중한 공은 힘겨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벽을 부수 어라도 뜰 일듯이 탕탕 부딪힌다.
《야, 지금 롱구 하냐? 축구 하냐? 제대로 못해?》
4동 4층인 가에서 아버지인 듯 한 나그네가 창을 열고 소리소리 지른다.
그러나 《23번》은 아랑곳 않고 공을 찬다. 롱구 공을 찬다. 렌즈 속에 잡힌 《23번》의 표정은 무슨 힘에 붙잡힌 듯 필사적이다. 어스름이 내릴 때 보아서인지 마냥 맑고 강인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이던 그 애에게서 어떤 음영이 느껴진다.
공처럼 둥글고 커다란 열 엿새 만월이 옥상 우에 떠오른다.
탕! 탕! 공 부딪는 소리가 그때까지도 광장에 가득하다.
잘그랑! 문뜩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파렬음이 울린다.
커트 (鏡 頭): 4
이제 어둠이 내리면
혼자 남는 게 너무 싫어
불빛 거리로 헤매다
지쳐버리면 잠이 드네
그대는 인디안 인형처럼 멀리 떠나갔지만
나의 마음은 인디안 인형처럼
워 워 워 워 워 ~
오늘밤에도 꿈결에 찾아 헤매네
... 《인디안 인형》이라는 노래에 맞추어 댄스를 추었던 녀자애였다.
오관이 무척 귀엽게 생긴 애, 눈이 커서 얼굴 전체가 불안해 보이는 애였다.
그리고 피아노를 잘 치는 녀자애였다.
중학생을 위한 텔레비전 프로에 나와 피아노곡조를 선보인적 있었고 그후에도 학교에서 조직하는 문예활동에서 마냥 보류 종목으로 녀자애가 나와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흰 면 티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매끈한 종아리 밑에서 복사뼈까지 목이 올라오는 흰 운동화를 신은, 너무 깨끗해서 눈에 뜨이는 애다. 녀자애는 수채화 같은 맑은 인상으로 소년에게 남아있다.
허나 진정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녀자애가 피아노 치는 모습이 아니다. 어느 날, 학급의 짱이 몇몇을 청했다. 한국 갔던 아버지가 드디어 돌아와 열기 띈 모습인 그 며칠, 짱은 내내 돈 쌈지가 불룩해 있었다. 노래방으로 갔다. 《미성년출입금지》라는 표말이 붙어있는 큰방에서 밤을 패며 놀았다.
그 모임에서 녀자애를 보았다. 《인디안 인형》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다음절로 넘는 간이 곡이 나오는 사이 머리 흔들고 엉덩이 흔들며 춤을 추기도 했다. 그 노래가 좋았던지 다음에도 차례가 돌아오자 또 그 노래를 불렀다. 엄격하게 양육되고있는 양순한 녀학생으로만 알았는데 그녀에게 이런 파격이 있는 줄을 소년은 몰랐다.
풍향이 바뀌면 건너 아파트에서 울려나오는 피아노소리가 소년의 귀에까지 잡혀 오기도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 온, 여하튼 무슨 명곡일거라고 소년은 판정했다. 녀자애가 치는 피아노 우에는 석고상 하나가 놓여 있다. 봉두란발에 험한 인상을 가진 사람의 흉상(胸像), 역시 어떤 유명한 음악가의 초상일거라고 소년은 판정했다.
집에 붙박여 피아노를 두드려 대다가도 저녁 무렵이면 애는 광장으로 나온다. 흔들거리는 그네에 몸을 싣고는 꿈결처럼 몽롱한 눈길을 하고 멍해 있기가 일쑤다. 그런 역삼각형의 얼굴에 물 그림자 같은 수심기가 스쳐 지나고있음이 렌즈 속에 잡혀 온다. 노래방의 샹들리에 불빛 속에서 봄물 오른 꽃가지처럼 발육이 잘 된 몸을 흔들며 춤에 빠져있던 모습과는 판 다른 얼굴이다.
그 애가 자기와 한 구역 내에 살고있고 또 다름 아닌 마작 패들이 운집해 드는 그 4동2단원6층에 산다는 것을 소년이 알게 된 것은 잊혀졌던 천문망원경을 더듬어 낸 다음의 일.
한쪽 방에서는 나그네들이 모여 마작 쪽을 번지고 녀자애는 자기 방에서 피아노를 두드려 댄다. 때로 나그네들에게 라면을 삶아 마작 상에 까지 날라 주고 꽁초로 그득 찬 담배재떨이를 털어 주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부유(浮游)하는 먼지처럼 일렁이는 담배연기 속에서 녀자애의 모습은 무대의 인공 운무 속에 선 듯 보였다. 담배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울어서였던지 빨갛게 짓무른 눈을 하고 있다.
저녁으스름이 내려 광장은 흑백수묵화처럼 흐려졌다. 종일 피아노 앞에만 앉아있던 녀자애는 또 광장으로 나왔고 예전처럼 그네에 몸을 실었다.
그 모습을《매 눈》으로 쫓던 소년은 옥탑방에서 나와 광장으로 내려갔다. 미루적거리던 소년의 발길은 놀이터로 향한다. 소년이 용기를 살려 놀이터에까지 다가갔을 때 녀자애는 막 몸을 일으키고있다. 무심하고 메마른 표정으로 소년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소년을 쳐다보지 조차 않는다.
《야!》
녀자애가 가버리려 하자 소년이 덴겁해 녀자애를 부른다. 녀자애는 그냥 가고 있다. 《야, 인디안 인형!》
어떻게 호칭을 달아 야할지 몰라 망설이던 소년에게서 이런 부름이 퉁겨 나간다. 필요이상으로 소리가 높다. 녀자애가 머리를 돌린다. 둥실하게 키워 진 눈길로 소년을 쳐다본다. 녀자애의 밝은 흰자위가 희다못해 쪽빛이다. 그 맑은 눈빛이 찔러 오는 순간, 다 자라 남 같아진 오누이처럼 소년은 내숭 기를 느낀다. 겨우 한 마디 짜낸다.
《너 2반이지? 나 4반.》
《그런데는?》
녀자애가 짧게 반문한다.
《너 피아노 잘 하지. <인디안 인형>이란 노래 좋아 하구》
《그래서 방금 날 그렇게 불렀어?》
소년이 그렇다고 바삐 머리를 끄덕여 보인다.
《너 매일 치는 곡이름 뭐냐?》
녀자애가 훌쩍 떠나 버릴 가봐 소년은 연신 말을 주어 댄다.
《쇼팽의 <야상곡(夜想曲)>. 너 음악에 관심 있니?》
《아니. 그저 음악 하는 사람 보면 존경스러!》
소년은 진심의 말을 한다. 녀자애의 입가에 애 잎사귀 같은 미소가 매달린다. 그 작은 미소가 소년의 긴장을 적절히 이완시켜 준다. 그리고 반가운 것은 얼굴로 내려오는 생 머리를 간간이 귓바퀴로 걷어올리며 녀자애는 자리를 뜰념을 않는다. 아마 그도 말동무가 그리웠나 보다.
소년은 호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낸다. 한 개비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녀자애 앞에서 좀 로련된 모습을 보이기 위한 거동이다. 입을 오므리며 담배연기를 동그랗게 만들어 내뿜는다. 동그라미가 잘 돼주지 않는다.
《엄마 출국했냐?》
목구멍을 간질이는 연기에 작은 기침 한번 하고 나서 소년이 묻는다. 학교에서 태반의 학생들이 출국자녀였기에 이런 물음은 아이들끼리 편지문안처럼 의례 있는 것이다. 녀자애가 머리를 까딱인다.
《일본? 한국?》
《한국》
《울 엄마도 한국》
《몇 년째냐?》
《5년》
《울 엄만 7년》
소년의 입으로 부지중 한숨이 새여 나온다.
《너 음악 전공할래?》
《아냐. 엄마가 돈 부치면서 꼭 피아노 사얀대서 아빠가 사준 것 뿐》
《잘 하던데... 음악 아니면 뭐 할래? 그냥 공부만 할래?》
《몰라 이제 엄마가 돌아오면 다시 보지 뭐》
《엄마가 안 오면?》
《몰라...》
이번에는 녀자애가 한숨을 쉰다.
밤, 풍향이 바뀌자 피아노소리가 들려 온다. 그 소리를 향해 소년은 《매 눈》의 초점을 맞춘다. 흰건반 검은건반 사이를 뛰어다니는 녀자애의 가는 손가락들이 보인다.
《부모들은 이제 우릴 잊은 거 같애. 이사할 때 낡은 인형을 흘리고 가듯이》
놀이터에서 녀자애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돌아올 줄 모르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송금 한 돈으로 허구한날 마작 놀이에만 빠져있는 가정에서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두드려 대는 녀자애, 그의 얼굴에 주근깨처럼 뒤덮인 체념의 그림자를 소년은 어둔 밤이지만 가려 볼 수 있었다.
문손잡이 트는 소리가 들려 온다. 소년은 잽싸게 망원경을 이불 속에 밀어 넣는다. 덤벙이며 들어선 놈은 이모가 아니라 외사촌 동생.
《형, 빨리 내려와 전화 받어. 큰 엄마한테서 온 전화야》
녀석이 복음을 전달하듯이 윤나는 소리를 지르지만 왠지 소년은 전화 받기조차 귀찮아 진다. 전하는 소식은 또 판에 박은 듯 타향에서 고생하는 어머니의 우울할 고행 담일 것이고 잘해라! 버텨라! 는 그 단말마의 비명 같은 것일 거였다.
《내가 잔다고 그래.》
벌렁 침대 우에 누워 버린다.
《이그, 부모들은 지들을 위해 타향서 쌍 코피 터지도록 일하건만》
아래층에서 분명 소년을 들으라는 듯 한 옥타브 높아 진 이모의 푸념소리가 들려 온다.
소년은 침대에 누운 채로 책상우의 목조사진틀 속에 들어있는 어머니를 말끄러미 건너다본다.
커다란 구리 종 앞에서 포즈를 취한 40대의 낯선 녀인이 렌즈를 의식하고 애써 웃음을 만들고 있다.
엄마와 그 사이는 이제 지구에서 달, 아니 지구에서 명왕성만큼 한 궤도를 도는 사이가 되었다. 소년은 엄마의 치마꼬리를 잃어버린 미아(迷兒)가 된지 오래다.
무관심만큼 사람을 황페하게 만드는 횡포는 없다. 그래서 소년 또래의 출국자녀들은 너나가 일정량의 우울함을 누군가에게서 배급받은 것 같은 모습들이다. 기분이 아주 들떴다간 금세 죽어 드는 불온정한 상태로 나날을 보낸다. 밝은 곳에 있어도 늘 그늘이 진 듯한 표정이다.
돈 많이 벌어 갖고 갈게! 그때까지만 기다려! 전화에서 마다 엄마는 물먹은 소리로 이 한 가지 내용을 복창하곤 했다.
그러나 소년들의 또래에게 있어서 엄마들의 미래는 핑계이고 두통거리이다.
돈을 많이 벌어 갖고 와서는 어쩔 건데? 있어야 될 때 없어준 엄마는 아이들 맘속에 진정한 엄마가 아닌데. 부모의 다스운 손길 없이 자란 사랑에 굶주린 애들이 굽이진 외길을 너무 나가 되돌아 올 수 없는 곳에까지 갔는데...
엄마가 시주로 종속에 처넣은 그 설화 속의 아이처럼 소년의 마음도 밤마다 에밀레! 에밀레! 울고있는 줄 엄마는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피아노 소리도 끊기고 광장은 어항 속처럼 조용하다.
누가 잃어버린 눈섭같이 애잔하고 매운 달이 홀로 떠있다.
커트 (鏡 頭): 5
4동1단원6층의 할망구는 언제 보나 불가사의다.
애초에 소년은 할머니가 한 점의 조각 물이 아닌 가로 착각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꼭 마치 숨 없는 밀랍인형 같다.
아침, 출근 무렵이면 할망구는 누군가에 밀려 베란다에 나타난다. 맥도널드(麥當勞)전문 앞에 개장과 함께 나타나는 광대처럼. 출근시간에 맞춰 어김없이 나타난다. 베란다로 나타나서는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말없이 계속 그 본새로 앉아만 있다. 단단한 핀에 고정 된 박제 표본인양 내내 그 모양 그 상태다.
할망구의 무릎에는 엷은 양탄자가 씌워져 있고 품에는 고양이가 안겨져 있다. 일신이 오목같이 까만 고양이는 집안에서 팽이 치듯 돌다가도 할머니의 무릎에 곧잘 찾아 든다. 찾아 들어서는 할머니의 품에 골을 박고 나른히 존다. 고양이가 움죽거리면 할머니가 손으로 쓰다듬는다. 그럴 때면 할망구가 그 무슨 조각 물이 아니라 생생한 살아있는 존재임을 느끼고 지켜보는 소년으로 하여금 꿈틀 놀라게 한다.
고양이도 할망구의 정서에 옮았던지 움직이기를 싫어하고 내내 그의 품에 안겨 있다. 다스운 한낮의 해살 아래 할머니도 고양이도 조는 듯 마는 듯 앉아 있다.
때로 하릴없는 소년은 렌즈 속에 들어 온 할망구 얼굴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세기도 한다. 할망구 얼굴의 주름은 많기도 하여 소년은 다 세여 내는 수가 없었다. 시든 상추같이 쪼그라든 얼굴이었지만 할망구는 눈만은 의안(義眼)처럼 부조화스럽게 홀로 말똥말똥하다. 그 말똥말똥한 눈길로 할망구는 광장의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다.
그렇게 움직일 줄 모르는 조각상 같던 할망구가 어느 날인가 광장에 나타났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소년은 조리개를 돌려 렌즈의 초점을 맞추었다. 가두의 아줌마 몇몇이 6층에서부터 휠체어에 앉은 할망구를 들어 내렸다. 할망구를 소풍시키려는 것인가. 륜번으로 휠체어를 밀고 광장주위를 맴돈다. 화단 앞에 휠체어를 세우고 할머니를 옹위하여 무슨 이야기인가 신나게 나눈다. 그 중에는 소년의 이모도 끼여 있다. 할망구가 앉은 휠체어를 조심스레 밀며 광장을 도는 그를 지켜보며 소년은 여태 몰랐던 다른 한 이모에 마음의 초점을 맞춘다.
할망구의 우는 듯 웃는 듯 하는 얼굴이 렌즈를 메우며 커다랗게 보여온다. 부대처럼 빈 볼을 풀럭이며 치아가 몽땅 물러나 마치 빗 틀 같은 이 몸을 드러내고 할망구는 어떤 분명치 않는 표정을 짓는다. 그것이 꼭 웃음일거라고 소년은 판정한다.
홀로 지내는 할망구라 했다. 중풍으로 쓰러진지 2년 채. 6층에서 꼭 2년만에 밖으로 나와 본다고 했다. 자식 셋이 모두다 출국했는데 돌아올 념을 않고 그저 얄팍한 돈 깍지만 우송해 온다고 했다. 그 돈으로 시간보모를 두고 살아간다고 했다. 손자손녀도 있는데 지 부모들을 닮아 몰인정해서 좀처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밥상에서 할망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모는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눈물도 몇 방울 떨군다.
할망구의 품에 내내 안겨져 있던 고양이가 어느 날 문뜩 보이지 않았다. 일신이 오목같이 까만 그 고양이가.
그리고 그날, 이모네 집에 난데없는 이변(異變)이 일었다. 약수 나르는 그 나그네가 여느 때와 같이 어흠! 어흠! 헛 목청을 가다듬으며 저녁식사 시간 맞추어 들어왔다. 그런데 이날 따라 마냥 사람 좋은 얼굴이던 《식의 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어떤 새끼가 죽은 고양이 피를 내 오토바이에 뿌렸어》
약수 나르는 나그네의 작업복 앞섶에 피가 묻어 있다. 차체에 피를 게 발라 놓고 오토바이 앞 바구니 속에 죽은 고양이도 처넣었다고 했다.
《누가 그렇게 못된 짓 한다나요? 왜요?》
이모가 서둘러 작업복을 벗겨 비누 물에 담근다. 나그네는 식의 수처럼 튀여 나온 입에 담배를 꽂아 물고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데데한 나그네로 만 여겼던 그가 이런 심각한 표정도 지울 수 있다는 것이 소년에겐 경이롭다.
느닷없는 활극에 어쩐지 께름칙한 느낌이 들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나서 소년은 외사촌동생의 방문을 떼고 들어간다. 방안에 술렁이는 어떤 음모의 냄새를 소년은 육감으로 맡는다. 용변을 참는 아이처럼 갑자 지르다 밥을 대충 먹고 일어 선 동생과 기습하듯 따져 묻는다.
《너지?》
《뭐? 》
《고양이 잡아 피 뿌린 눔》
뚱한 표정을 짓고있던 동생의 얼굴이 극적인 표정으로 변하며 목구멍에서 웃음이 기여 나왔다. 녀석은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킬킬댄다.
《왜 그랬냐? 주제가 뭐냐?》
《외국 공포영화에서 봤는데 덜 좋은 사람에게 고양이 피 뿌리면 그 사람 저주받는대 까만 고양이 피! 》
평소엔 쥐 죽은 듯 잠잠하다가 엉뚱한 괴력을 발휘한 녀석은 딴에는 장한 거사라도 치른 듯 길게 찢어진 입을 들썩이며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에이, 못 배워먹은 녀석》
소년은 동생의 울퉁불퉁한 머리통을 쥐여 박는다. 그래도 웃음은 고장난 발동기처럼 제어가 되지 않는다. 무뇌(无腦)적이고 행동파 적인 그 모습이 밉살스러워 또 한번 쥐여 박는다. 단단히 쥐여 박는다.
《왜 때려?》
동생이 후딱 몸을 일으킨다. 키만 허청 컸지 심보가 여려 겨우 한 살 위인 소년과 접고만 들던 동생이 소년의 손목을 부여잡는다. 손이 축축하고 악력이 느껴진다. 화가 난 짐승처럼 형을 노려본다. 메밀 눈 눈자위엔 몇 올 선연한 핏줄기가 실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다른 애들이 날 보고 니들 집에선 광천수 돈 안내고 먹지하고 놀려 댈 때면 내 기분 어떤지 알어?
저 사람이 누군데? 저 사람이 누군데? 왜 내 아부지 샤쯔 입고 내 아부지 치솔 통 쓰고 내 아부지 면도 기 써? 누군데 내 아부지 베개 베고 자냐 말이야?》
쏟아 붓듯이 말하고 난 녀석이 손을 스르르 놓는다. 얼굴구조가 조합을 바꾸더니 입 귀가 하현달처럼 처진다. 방금 전의 만용을 잃고 삐질 삐질 울음을 짜낸다.
피해의식이 가득한 얼굴을 쳐들어 녀석이 형을 쳐다본다.
《형은 몰라 내가 왜 이러는 지. 몰라. 누구도 몰라. 》
소년은 할말을 잃는다. 원체 할망구의 고양이를 죽인 죄에 대해 단죄하려 했는데 엉뚱한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녀석과 비슷한 내용, 비슷한 부피로 감동을 먹고 있는 자신을 느낀다. 녀석의 어처구니 짓거리가 일순 리해가 되는 듯도 했다.
장면을 수습할 길 없어 소년은 방을 나선다. 문을 떼던 소년이 엉거주춤 멈춰 선다. 문가에 이모가 서있다. 한 손으로 얼굴을 싸 쥔 이모의 얼굴이 금시 울음을 터뜨릴 듯 잔뜩 구겨 져 있다.
그 궁상을 피해 소년은 옥탑방으로 올라간다. 이모네 집에 얹혀 살지만 옥탑방이라는 자그만 자기의 공간이라도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소년은 생각한 적 있다. 방에 들어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로 다가간다. 창가에 팔을 얹고 밖을 내다본다.
맞은 켠 옥상의 물 탑 뒤로 펼쳐진 서쪽 하늘에 조각 달 하나가 도끼 날처럼 섬뜩하게 박혀 있다.
커트 (鏡 頭): 6
그녀는 소년이 준비 없이 목격한 꽃 이였다. 소년의 상상 속에 저장된 이미지가 가리키는 녀자였다.
그날 본의 아니게 렌즈 속에 그 녀자를 집어넣은 후로 소년은 야생화의 독향(毒香)에 취한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그 녀자의 얼굴이며 라신(裸身)이 눈앞에서 어른거렸고 이모 몰래 컴퓨터 속에 가만히 업로드해 놓은 서양녀자 누드사진처럼 가슴깊이에 박혀 꺼내보고 싶은 충동을 시시 때때 없이 유발시킨다.
소년은 그녀를 누님이라 지칭(指稱)했다. 누나가 없는 사내애들이면 다 그러하듯 자상한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는 년령대가 있는 것이다.
책장을 펼쳐도 공부는 좀처럼 소년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밤이 깊어도 잠은 좀처럼 소년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때면 망원경을 끄집어내곤 한다. 배률(倍率)높은 《매 눈》 의 힘을 빌어 소년은 누님의 일상사를 클로즈업해 본다.
아침잠에서 깨여 커튼을 여는 누님을 본다.
화장을 벗은 얼굴이지만 그냥 아릿답기만 하다. 겨드랑이의 소담한 치모가 보이게 기지개를 켜고는 하품을 해서 맑아 진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본다. 때로 누님의 이마 전에 생겨나는 여드름조차 소년에겐 벅찬 발견이다.
칫솔질을 하는 누님을 본다.
한입 가득 치약거품을 물고 누님은 거울을 향해 악동이 같이 웃는다.
고른 치아가 옥돌 같다
화장을 하는 누님을 본다.
머리를 간편하게 뒤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채 누님은 채광이 좋은 창가에서 화장을 한다. 화장 발이 좋은 얼굴이 점차 색 먹은 수채화처럼 생동해 질 때 소년은 눈이 부셔 찡긋거리다.
전화를 받는 누님을 본다.
전화에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들은 양 누님이 웃는다. 모란이 벌어지는 듯 한 아름다운 웃음이다.
외출하는 누님을 본다.
해 빛이 밝은 날이면 차양이 너른 모자를 쓰고 누님은 밖에 나선다. 모자에 쌓인 누님의 얼굴이 맑고 현명해 보인다.
귀가하여 샤워준비를 하는 누님을 본다.
낚아채듯 블라우스를 벗어 던지고 스타킹을 손으로 훑어 내린다. 잘 뻗은 눈부신 흰 다리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벗은 몸이 빛을 뿌린다. 그때면 소년의 몸은 파렬 직전의 고무풍선처럼 팽팽해진다.
때로 누님은 창턱에 마주 앉아 밖을 내다보곤 한다.
파마세트로 머리를 만 채 매우 밝은 목덜미를 내놓고 손으로 얄팍한 턱을 괴이고 밖을 내다본다. 앞자락이 갸웃이 열려 있었고 깊숙한 유방의 륜곽이 드러나 보인다. 밝은 채광에 흑란(黑蘭)의 줄기처럼 유려한 눈섭을 찡긋 이며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밖을 빤히 내다본다. 누님이 자기를 보아낼 가 주저하면서도 소년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조리개를 부지런히 돌리며 누님과의 거리를 한껏 좁히려 애쓴다. 누님의 눈을 가까이 에서 들여다본다. 하늘이 비치도록 시린 눈이다.
창가에 누님의 영상이 흘깃하다 사라져도 소년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는 미열로 달아오른다. 누님의 모습, 하다못해 뒤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소년은 내내 창가에서 망원경을 겨누고 대기해 있다. 렌즈를 눈확에 붙이고 조리개를 틀어잡고 어깨를 솟군 채... 마냥 그 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어깨가 뻐근하다.
온몸이 땀으로 미끄덩거린다. 땀이 흘러 바지 단이 맨살이 들어 붙는다.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한 옷에서 마른 건어물 냄새 같은 것이 난다. 허나 혹서의 더위 속에서도 소년은 수렵 자처럼 대기해 있다. 이제는 하루라도 누님을 보지 못하면 안 되였고 누님의 모습만 보이면 가슴은 형언할 길 없는 기쁨과 야릇한 만족감으로 차 오른다.
애초에는 호기심이 증폭 되여 시작한 짓거리이지만 이제 소년은 자신을 주체할 길 없어 했다. 훔쳐보고 싶은 충동은 소년의 신심을 괴롭히며 종양처럼 자라고 있다. 무슨 악취미 같아서 소년은 그만두리라 마음을 뼈 물기도 했다.
망원경 속에 본의 아니게 안겨 온 멀리 교회당의 뾰족지붕과 그 우에 솟은 십자가를 보며 어떤 속죄감에 그을 줄도 모르는 성호(聖號)십자를 긋기도 했다.
이모며 사촌동생을 보기도 어색해 졌다. 그들이 자기가 하는 짓거리를 꼭 눈치 챈 듯 느껴졌다. 마냥 남의 결점에 머물러 있기 좋아하는 그들의 시선이 형체를 뚫고 소년의 내부를 응시하는 듯 했다. 그래서 눈길을 느낄 적마다 어색하게 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리곤 했다.
그날은 이 여름 들어 기온이 치솟을 대로 치솟아 징그럽게도 더운 날 이였다. 진한 어둠이 내려도 한낮의 열기를 삭히지 못해 했다.
누님의 창을 향해 조리개를 돌리던 소년의 손목에서 경쾌함이 바수어졌다. 신경 줄이 올올이 직립 함을 소년은 느낀다. 누님의 집에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구름우의 천사처럼 혼자 사는 줄 여겼는데, 옛말 속의 공주처럼 높은 성채에서 혼자 사는 줄로 여겼는데...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나이가 어중간한 신사였다. 누님이 달려가 깨끔 발로 한쪽을 딛고 신사에게 안긴다. 그의 목에 팔을 친친 동여매고 발을 간댕거려본다.
누님의 아버지일가?
허나 다음 순간 소년은 머리 속에 피가 꽉 차 오름을 느꼈다. 신사, 누님의 아버지 벌로 돼 보이는 신사의 손이 누님의 앞섶을 들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속옷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 가 누님의 부픈 가슴을 탐욕스럽게 움켜잡는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는다. 벌건 입술로 누님의 목 줄기를 부비여 대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서둘러 배추 잎을 벗기듯 누님의 옷 견지를 하나하나 벗겨 내린다. 누님이 몸을 배틀며 그의 품에서 벗어난다. 덴겁해하며 커튼을 친다.
커튼이 소년의 시선을 가리워 버렸다. 소년의 눈앞에 아릿한 어둠이 잠시 어린다. 허나 막을 길 없던 련상작용 그리고 상상력들이 소년의 눈앞에서 그냥 진행되고 있다. 의관이 버젓한 그 령감태기가 누님의 온몸을 주물러 대는 모습이. 주린 듯 핥아 대는 모습이. 소년은 사막에 불길이 치솟아 모래가 불타고 그 아비규환의 복판에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달무리 진 달이 불그스름했다. 비라도 쏟아질 듯이 뭉뭉한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한번 얼굴을 보인 뒤로 령감태기는 자주 나타났다.
그런데 소년을 괴롭히는 것은 누님이 그 령감태기를 아주 좋아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령감태기를 보면 웃음기에 함함하게 벌어지는 누님의 입 모양새를 보아도 그런 정서는 알린다. 령감태기가 무어라고 말하면 한 문제만 틀린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웃기도 한다. 매우 재미있는 유머를 들은 사람들 마냥 거침없이 웃어젖히기도 한다. 때로 누님은 와이셔츠와 속옷 나부랭이를 빨아 베란다에 놓인 간이 건조대에 널어놓는다. 호수가 큰 그 옷가지들은 일견에도 남자의 것, 분명 그 령감태기의 것 일거다.
그런 날이면 소년은 비를 앞둔 구름처럼 방향을 걷잡을 수 없는 심기를 느낀다.
《왜 그렇게 저기압이야? 형?》하며 아이스크림을 넘겨주는 외사촌동생을 발길로 밀어 던지는가하면 밥 먹으러 내려 오라 이모가 불러도 듣는 둥 마는 둥 옥탑방에서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한낮, 또 그 령감태기가 유령처럼 나타나자 소년은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옥탑방을 달아 내렸다.
《불 끄러 가냐? 왜 그리 급해 쌌냐?》
외사촌 동생이 불러도 응대조차 않고,
《밥은 안 먹냐? 당금 점심 시간인데 또 어디로 가냐? 쟤 요사인 밥도 잘 안 먹고 왜 저런 다냐? 돌멩이도 삭힐 땐데》
의중(意中)을 알 수 없어하는 이모의 걱정 어린 푸념을 뒤로 던지며 소년은 4동3단원을 향해 달려갔다. 달리며 소년은 고슴도치처럼 바싹 털이 솟는 자신을 느낀다.
4동3단원6층.
그 앞에서 소년은 턱 끝까지 말려 오른 호흡을 가다듬는다.
분명 누님의 집 앞까지 와서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버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문가에 묶인 듯 서있는 소년을 소스라쳐 놀라게 하며 문에서 쇠 소리가 난다. 소년은 급히 몸을 돌려 층계에서 달아 내린다.
령감태기가 나온다. 이마에 번드르르하게 배인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기름 낀 배를 불룩 내밀고 령감태기는 층계를 내린다. 직사각형의 멋진 가죽 가방을 든 령감태기는 계단을 하나하나 세듯 천천히 걸어 내린다. 단원의 출입 문가에서 자기를 빤히 지켜보고 있는 소년을 시큰둥하게 쳐다본다.
령감태기에게서 향수냄새가 난다. 솔잎 향기 같은. 송곳처럼 코 점막을 후비는 향수냄새에서 소년은 그가 한국사람임을 판정한다. 이곳 남자들은 좀처럼 화장품을 쓰지 않는다. 전번 학기 학교에 컴퓨터를 기증한 한국상공인에게서도 이런 향수냄새가 났고 한국에서 로무를 마치고 돌아 온 학교 짱의 아버지 몸에서도 이런 향수 냄새가 났다.
느려 터진 팔자걸음으로 아파트 구역 내에서 령감태기는 사라진다. 소년은 무슨 대결이라도 한 듯이 몸이 피로해짐을 느낀다. 광장의 놀이터로 간다. 그네에 몸을 싣고 멍청한 꼴이 되어 허깨비처럼 몸을 흔든다.
커트 (鏡 頭): 7
어디선가 울음소리 들린다.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내는 울음소리다. 구역 내에서 공명이 되어 울리는 울음소리는 사뭇 괴기스럽기 까지 하다.
《무슨 일일 생겼나본데요.》
심란해진 눈길로 외사촌동생이 묻는다.
《엊저녁 그 할매가 세상 떴다 누나. 4동에 살던 그 할매. 외롭게 두 지내드니만. 이제야 친척들이 모여와 우는 시늉이라도 한다. 남의 눈이 무서운 게지.》
이모가 코를 훌쩍 치 걷으며 말한다. 아침밥은 절 로들 챙겨먹어라 하고는 가두사람들과 함께 장례에 참가 해얀다며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철저히 홀로 이였던 할망구가 세상 뜨자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소년에겐 경이롭기까지 하다. 광장에는 차 앞머리에 검은 꽃을 단 령구차가 대기해 섰고 나그네들의 어깨에 실려 관 하나가 층계로 내려왔다. 죽어서 그저 불에만 넣지 말아 달라는 것이 할망구의 마지막 소원이란다.
뜻밖에도 관을 메고 나선 이들은 4동2단원6층에서는 매일이고 마작의 향연을 펼치던 나그네들 이였다. 어쩜 너나가 한결 같이 마누라들이 출국해서 부쳐 보낸 뼈 돈을 까먹으면서 놀이에나 빠져 있다는 나그네들에게도 이렇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경이로운 풍경이다.
소년으로서는 처음 보는 관이다. 흥미를 느껴 소년은 조리개를 돌린다. 망원경으로 상여행렬을 쫓는다. 굵어지는 아침 해 빛에 옻칠을 먹이지 않은 하얀 관은 야릇한 빛을 발하고 있다.
장례행렬이 떠나자 광장에는 다시 고요가 깃 든다.
구역 내를 빠져나가는 령구차를 마지막까지 쫓다가 소년은 망원경을 내린다. 다시 망원경을 쳐든다. 누님의 창에는 두툼한 커튼이 내려져 있다.
느닷없이 신산(辛酸)해 진 기분을 소년은 떨칠 수 없어 한다. 아이공 대공 괴음(怪音)으로 울어대던 통곡소리가 계속 귀전에 끈끈히 남아 있다.
그 잡친 기분을 무마하련 듯 소년은 망원경에만 매 달려 있다. 어떤 동정을 기대 하는 수렵 자처럼.
점심 무렵이 되여서야 누님 방의 커튼이 걷혀졌다.
그와 함께 소년은 또 한번 눈동자를 키운다.
누님의 집에 또 사내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늘 찾아오던 그 령감태기가 아니였다. 이번에는 좀 어수룩한 입성의 사내다. 나이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지만, 시골에서 일에 절어 온 듯 흙빛이 나는 피부가 나이를 좀 얹어 보이게 만든다. 찜통더위에 땀을 벌벌 흘리면서도 소매 긴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색이 천박해 보이는 와이셔츠는 구지레하게 땀에 절어 있다. 사내는 전쟁 피난을 가는 사람처럼 보퉁이 하나를 들고 문가에 서있다.
누님이 랭장고에서 음료수 한 병을 가져다준다. 목 울대를 울리며 사내는 급박하게 음료수를 들이켠다. 다 마시고 나서 빈 병을 어찌할지 몰라 주춤거린다. 누님이 빈 병을 받아 휴지통에 던져 넣는다. 사내는 여전히 방 한복판에 어색하게 서있다. 누님이 앉으라는 시늉을 하는 것 같다. 사내는 쏘파에 앉지 않고 맨 바닥에 벌렁 주저앉아 버린다. 누님이 쏘파에 앉으라고 권하는 듯 하다. 그러자 사내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겸연쩍게 웃는다. 계속 맨 땅에 앉아 있다.
《파이내플 이요! 파이내플 이요!》
광장에서 과일 장사치가 메가폰에 대고 외치는 싸구려 소리가 공명으로 들린다.
마냥 웃비가 걷힌 하늘처럼 명랑하던 누님의 얼굴이 이날 따라 다르다. 누님의 입 모양새는 그렇게 함함하게 벌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는 듯 하다.
한 사람은 쏘파우에 한 사람은 바닥에 그냥 그렇게 앉아만 있다. 누님은 매니큐어를 바른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고 사내는 머리를 수굿하고 장판지의 문양을 들여다본다.
가려는지 사내가 몸을 일으킨다. 누님이 문가까지 바랜다. 돈 잎 몇 장을 구겨 사내의 손에 쥐여 주나 사내는 한사코 뿌리친다. 그러면서 사내는 또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억지로 입술을 비틀어 만드는 웃음 같다.
이윽고 사내가 광장에 나타난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사내는 벤취로 다가간다. 벤취에 앉지 않고 하필이면 벤취 뒤의 화단 가에 쪼그리고 앉는다.
누군가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 통을 들여간다.
잔인한 뙤약볕아래 사내는 그냥 쪼그리고 앉아 있다.
누군가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홑이불을 턴다.
오목렌즈로 내리 비추는 듯한 끔찍한 해살 아래 사내는 내내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다. 캄캄한 얼굴을 하고 무엇을 씹듯 입술을 일그러뜨린 채.
더운 한낮 이여서 광장에는 사람 하나 없다.
사내가 나간 뒤로 누님은 다시 쏘파에 앉아 버린다. 멍하니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들여다본다. 누님의 몸가짐이 평소보다 좀 산란해 보인다.
소일거리가 생각났던지 누님이 사내가 가져 온 보퉁이를 푼다. 법랑그릇에 그득 넘쳐 나게 담은 것은 껍질 채로 삶은 옥수수다. 무슨 곤충의 날개 같은 껍질을 벗기자 황옥(黃玉)같이 노란 알이 박힌 옥수수가 드러난다. 희귀한 얼굴로 그 옥수수를 들여다 보다 누님이 옥수수를 한입 떼 문다. 누님의 입 모양새가 그제야 함함하게 벌어진다.
한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나서 누님이 두 번째 옥수수의 껍질을 벗긴다. 그 옥수수도 순식간에 하얀 고갱이만 남는다. 세 번째로 집어든다. 탐식(貪食)하는 그 모양을 지켜보는 소년의 입가에 웃음이 감돈다. 누님이 한입 떼여 문 세 번째 옥수수를 내려놓는다. 목이 메게 한입 그득한 옥수수를 넘긴다. 그런 누님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급기야 누님의 눈확에서 이슬이 넘쳐난다. 옥수수 알보다 큰 눈물방울이 누님의 볼을 타고 뚤렁 뚤렁 떨어져 내린다. 누님이 울고 있음을 뒤늦게 야 보아내고 소년은 잠시 어리둥절해 진다.
손바닥으로 눈물 젖은 볼을 이리저리 훔쳐내고 나서 누님은 베란다로 달려나온다. 머리를 내밀고 광장을 굽어본다. 광장에는 아무도 없다.
해 빛이 박살난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내린다. 부서져 내려서는 광장의 블록타일 우에서 탱글탱글 튀여 오른다.
해 빛은 세상중심을 관통할 듯 투명하다.
커트 (鏡 頭): 8
광장은 그냥 그 모습 그대로이다.
아침이면 너나가 바삐 광장을 질러 출근길에 오르고, 한 낮이면 잡상인들이 광장 변두리를 돌며 메가폰으로 각자의 매물에 대한 홍보의 소리를 지르고, 저녁이면 부지런한 가두의 아낙들이 나와 화단의 꽃 포기를 손봐주고... 낡은 필림 되감듯이 비슷한 내용 비슷한 모습들이다.
허나 소년에게 보이는, 소년의 《매 눈》에 잡혀 오는 광장은 다르다.
일요일마다 광장에서 울리던 공 다루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23번 유니폼(先手服)을 볼 수가 없다.
대신 어디서 온 애들인지 왁작거리며 배드민턴을 치곤 한다.
쇼팡의 야상곡도 들리지 않는다.
소년이 알 수 없는 다른 곡이 울린다. 아직 손에 익지 못한 듯 중복을 거듭하는 곡조는 가락 맞는 곡조라기보다 심란한 아낙이 국자로 솥전을 두드려대는 소리 같다.
저녁 무렵이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발을 간댕이는 인디안 인형을 볼 수도 없다. 그네 줄이 끊어져 버렸는데 누가 나서 이어주는 사람도 없다.
4동1단원6층에는 빈 휠체어만 뎅그러니 놓여있다.
4동2단원6층 마작 판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가세해 들었다.
4동 4층인 가에 사는 할리우드 영화중의 변태 광처럼 생긴 온몸이 깡마른 나그네, 그리고 이모가 사이가 좋은 약수를 날라주는 《식의 수》도 끼여 있다.
술 먹은 터에 얼굴이 잘 구운 찐빵처럼 불그레해진, 만족스런 표정의 나그네들은 저 저마다 담배 대를 입 귀에 지긋이 물고 피여 오르는 담배연기에 실눈을 좁힌 채 부지런히 마작 쪽을 쌓고 헤치고 섞는다.
그리고 4동3단원6층. 좋아하는 배우 때문에 편애하는 영화처럼 자기의 옹근 정감과 옹근 시간을 잡아먹는 누님을 보면서 요사이 소년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 가 늘 두려움에 의식의 목을 짓눌리고 있지만 요즘의 두려움은 그런 두려움이 아니다.
이제 누님의 아파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직사각형의 멋진 가죽가방을 든 신사타입의 령감태기도, 삶은 옥수수를 그릇 넘쳐나게 들고 왔던 얼굴이 흙빛이던 그 시골총각도... 누님만의 일인 극을 보게 되였지만 소년은 일전 같은 신명이 솟지 않는다.
어느날인가부터 누님이 갑자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집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분류하여 종이박스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누님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다. 중국식당의 료리들을 청해 놓고 온 저녁을 술판을 벌렸다. 누님은 술에 취한 듯 했다.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다. 시간이 자정으로 흘러서야 탕진한 듯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가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누님과 포옹을 했다.
짐들을 처리한데서 갑절 커 보이는 집에 누님만 남았다.
한 상 가득 널린 음식상을 치울념 않고 누님은 쏘파에 앉아만 있다. 두 손으로 무릎에 처박을 듯 숙인 머리칼을 싸쥐고 어깨를 흔든다. 이리저리 아무 생각도 없이 흔든다.
무슨 생각이 났던지 일어나 핸드백을 뒤진다. 핸드백에서 무언가 꺼낸다. 란발을 한 채 그것을 들여다본다. 소년의《매 눈》이 누님의 손에 들려진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 조리개를 틀고 있는 손이 사뭇 팽팽하게 떨고 있다. 렌즈 속에 클로즈업된 그것이 총탄처럼 소년의 동공에 와 박힌다.
그것은 비행기 표이다.
누님이 어딘가 가려나 보다?
누님이 어딘가 가려나 보다.
누님이 어딘가 가려나 보다!
소년의 손에서 망원경이 미끄러져 내린다. 불을 켜두지 않은 옥탑방의 눅신한 어둠 속에 소년은 묶인 듯 서버린다.
《비행기는 몇 시에 뜨나요?》
객실로 내려가서 지글대는 텔레비전을 방임한 채 끄덕 끄덕 졸고있는 이모와 소년은 묻는다. 부러 심상한 투로 묻지만 소년의 목청은 필요이상으로 높았고 자기가 듣기에도 파장이 맞지 않다. 이모가 흠칫 놀라며 깨여 난다.
《어디... 행인데?》
이모가 코잔등에서 흘러내린 안경을 벗으며 묻는다. 그 물음에 소년은 할말이 궁색해 진다. 사실 누님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그.
《국내 행은 낮에 있고 한국 행은 보통 아침 일곱 시와 저녁 네 시에 있는 거 같드라. 니 엄마가 갈 땐 비행기도 못타보고 그저 기차로 가서 다시 배타고 갔는데》
소년이 오랜만에 먼저 이모와 말을 건네였고 하도 진지한 태도로 물어왔기에 이모도 정확한 답을 주려 애썼다.
《헌데 너 왜 그러냐?》
소년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태엽 준 인형처럼 옥탑방으로 올라간다.
망원경을 주어 든다.
누님이 쏘파 등걸 이에 두 팔을 얹고 그 팔 우에 볼을 얹은 채 잠들어 있다.
소년은 창가에 무릎을 꿇는다. 누님의 얼굴을 표나게 바라본다. 달의 환형 산까지 보이는 천문망원경이지만 망원경의 배률이 더 높지 않은 것이 소년에겐 한스럽다. 누님의 모든 것, 얼굴이며 몸매며 지어 누님의 발톱 하나까지 동공에 아로새기고 싶다.
그리고 누님이 래일 이른 새벽이 아닌 한 낮에 외출하기를 소년은 바라고 바랐다.
어떤 독실한 신도처럼 창가에 무릎을 꿇고 소년은 밤을 새운다.
거대한 밤의 망토 뒤에서 한 겹씩 엷어지는 어둠 속에 섬세하게 깃 드는 새벽을 소년은 눈으로 피부로 느낀다.
새벽, 건너편 아파트 4동3단원6층. 그 방에서 드디여 소년이 바라지 않던 일이 일고 있다.
숙취에 일어나지 못할 것 같던 누님이 일찍이도 깨여난다. 시계추처럼 부지런을 떤다. 화사한 옷가지를 챙겨 입는다. 바퀴가 달린 커다란 트렁크를 밀고 집을 나선다. 문을 나서다 말고 집안을 한바퀴 돌아본다. 그리고 문이 닫힌다. 멀리 아파트지만 쾅! 하고 쇠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소리를 소년은 분명 듣는다. 그 소리는 소년의 신심을 란타하며 환청으로 울린다.
누님이 가는구나. 저렇게 가는구나. 끝내는 가는구나.
낮 행이 아니고 새벽 행으로 가는 걸 보니 분명 한국으로 가는구나.
소년은 옥탑방을 달아 내린다. 6층에서 달아 내린다.
너무 일찍 해서 광장에는 조깅을 나온 사람조차 없다.
저 앞에 누님이 보인다. 몸에 꼭 끼이는 청바지를 입고 바퀴가 달린 트렁크를 끌고 아파트 구역 내를 빠져나간다. 새벽대기 속에 트렁크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선명히 울린다. 피리소리의 주술에 걸린 뱀처럼 소년은 그 소리를 따라 간다.
대로 가에서 누님이 멈춰 선다. 택시를 대절해 기다린다. 잎새에서 아침 이슬이 떨어져 내리는 가로수에 몸을 감추고 소년도 멈추어 선다.
택시가 오지 말았으면
아직 새벽인데 택시가 오지 말았으면
누님을 훔쳐보며 두서없는 소년의 마음은 이렇게 되뇌고 있다. 측면에서 봐도 누님은 까닭 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새벽안개를 헤 가르며 택시가 온다.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주문을 외워도 택시는 온다. 누님 앞에 와 칙 멈춰 선다. 모범택시라는 자호가 찍혀진 그 택시에 이 순간 소년도 고양이 피를 뿌리고 싶다.
이른 아침에 미모의 녀자를 승객으로 맞는 택시 기사는 기분이 좋은 듯 경쾌한 동작으로 누님의 트렁크를 받아 차체의 뒤 함에 싣는다.
《누나! 누나!_》
소년이 가로수 뒤에서 뛰쳐나온다. 누님을 부른다. 허나 목구멍에서 소리는 움츠러든다. 가슴으로만 부른다. 누님의 길을 가로막고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진다. 소년의 볼로 주체할 길 없는 눈물이 도랑을 지어 흘러내린다.
차 문을 열다말고 누님이 소년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야릇한 눈초리로 아침부터 길가에서 눈물을 질질 흘리고있는 아이를 본다. 누님의 얼굴이 가수(假睡)상태에서 본 정물처럼 륜곽이 흐릿했다.
탕! 택시 문이 닫히고 갈개는 말처럼 몸을 한번 뒤로 당겼다가 택시가 떠난다.
소년의 그렁하게 젖은 동공 속에서 택시는 굽이를 돌았고 멀리로 사라져 버린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광장은 행락객(行樂客)들이 떠난 유원지처럼 텅 비여 있다.
솨 아! 낮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화단의 꽃들이 힘에 겨운 듯 봉오리를 가누고 있다.
비바람에 놀이터의 그네도 흔들거리고 있다.
유리에 툭툭 빗방울이 듣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텔레비전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옥탑방의 창가에 서서 소년은 광장을 내다본다.
어느 류역의 이방인(異邦人)인 양 서글피 내다본다.
천문망원경이 발치에 뒹굴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달이 뜨지 않는다. 때문에 소년은 환형 산을 볼 수 없다.
이날 따라 달이 몹시도 보고픈 데.
... 달에서 매우 흔한 지형은 환형 산일 것이다. 달은 아주 오래 전에 류성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는데 류성이 달 속으로 파고들면서 표면을 파헤치고 구덩이를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생성된 분화구들은 평평한 바닥과 뾰족하고 둥근 테두리를 갖고 있으며 중앙에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달 표면에는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가 수십 개나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분화구들이 234개나 있다고 한다...
문뜩 소년이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비 내리는 광장을 내다보며 소년은 언젠가 천문애호가 서클시간에 외워두었던 천체지식에 대해 외워 본다. 비 소리가 소년의 소리를 잘라먹는다. 허나 소년은 그냥 왼다. 무아에 빠진 사람처럼 소리 높이 왼다.
비 내리는 광장은 종영되는 영화처럼 저물어 간다. ♤
"도라지" 2003년 5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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