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아하! 헤밍웨이
김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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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경전 “로인과 바다”를 맨 처음 접하게된것은 1980년대 중기,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총서에서였다. 비정기적으로 20권 가량 간행되다 나중엔 정간되였지만 문학도 시절 나는 그 작은 총서에서 세계문학의 진수를 대량 접할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또 다른 경전작품들인 “킬리만자로의 눈”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90년대초 모두 영화로 먼저 접했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주인공 그리고리 팩은 멜로영화 “로마의 휴가일”에서 오드리 햅번과의 열연을 펼쳤던, 남자가 봐도 멋있는 끼끗한 스타로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은 히치콕크의 추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로서, 좋아한데서 두 작품을 접하게 되였다. 사실 애초의 헤밍웨이의 작품은 이렇게 어린 문학도인 나에게 있어서는 좋아하는 영상물의 주인공에 대한 팬의 시각으로 다가왔던것이다. 그후 헤밍웨이의 작품들을 제대로 다시 읽게된것은 본격적인 문학창작에 매진한 다음의 일이다. 그 명저들을 단지 열성 팬의 스크린속 우상에 대한 유흥의 시각으로서가 아니라 문학창작인의 신분으로 다시금 가슴에 새기며 읽었다.
“미국문학의 대부”로 불리고있는 헤밍웨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사후 50년인 올해말로 만료된다고한다. 하여 세계적인 헤밍웨이 작품 출간붐이 다시 일고있다. 중국에서도 헤밍웨이의 전집이 상해역문출판사(上海译文出版社)에 의해 다시 출간, 변강오지인 이곳 서점가에도 올랐다.
따라서 헤밍웨이가 또 한번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고있다.
강하고 힘찬 문필과 대담하고 공개된 생활로 유명한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는 사냥과 낚시를 좋아한 의사인 아버지와 미술에 관심 있던 어머니의 맏아들로 시카코에서 태여났다.
중학교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17년 중학교를 졸업하자 대학에 가는 대신 캔자스시티로 가서 당지주요한 신문이였던 “스타”지의 기자로 활약했다.
눈병으로 계속 군입대를 거절당하다가제1차 세계대전때 가까스로 미국 적십자사의 구급차 운전사로 참전, 이딸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었고 그 위훈으로 19세도 채안된 나이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건강을 찾은뒤 다시 집필을 시작, 1925년 최초의 단편집인 “우리 시대에”를 뉴욕에서 출간했다. 이듬해에 전쟁후의 “잃어 버린 세대”를 다룬 장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발표, 비관적이지만 활기 넘치는 이 소설 작품으로 그는 처음으로 출판계와 독자들에게 문명(文名)을 알렸다.
그동안 아들 존을 얻고 첫번째 결혼은 실패했으며 그뒤 다른 녀자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그는 빠리에 살면서 스키· 투우, 낚시, 사냥과 려행에 빠져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많은 글의 배경을 이루었다. 그는 많은 모험을 기초로 책을 썼는데 문학적인 경험을 위해서도 그러한 모험을 열렬히 추구했다. 에스빠냐에 대한 사랑과 투우에 대한 열정으로1932년 “오후의 죽음”을 창작, 펴냈는데 이것은 그가 투우를 스포츠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의식으로 보고 깊이 있게 연구해서 쓴 작품이였다.
그무렵 에스빠냐는 내전이 한창이였다. 행동파 작가로서의 헤밍웨이는 군사 독재자에 맞서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돈을 모았으며 포위된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한 희곡 “제5렬”(1938년)을 창작했다. 에스빠냐 내전뒤 그는 꾸바의 아바나 교외에 농장을 구입했으며 안해와 함께 또 다른 전쟁, 일본의 중국침략을 취재하러 중국으로 오기도 했다.
1940년 에스빠냐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 이 소설은 판매부수면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꾸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으며8년 년상의 녀인과의3번째 결혼 역시 파탄에 이르자 4번째로 런던에서 만난 통신원 메리 웰시와 결혼해 여생을 함께 보냈다.
1952년에 늙은 어부의 고독한 싸움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낸 작품 “로인과 바다”를 발표했다. 소설은 전세계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애대를 받았다. 이 작품은 1953년에 플리처상 소설부문상을, 그 이듬해인1954년에 드디여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극적인것은 그 생애의 최고의 해에 헤밍웨이는 두번이나 항공기 사고를 당한다. 두 번 다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중상을 입고 시상식에도 나가지 못했다. 그 두번의 사고로 이후 그의 특징이였던 강인한 신체와 활동적인 생활을 돌려받을수 없었다.
호탕하고 개방적이고 헌신적이였던 그는 타고난 스포츠맨으로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복잡한 생활을 했다.
만년에 사고의 후유증에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활동도 점차 막히기 시작하자 결국 1961년 아이다호주에서 렵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문학관은 전쟁과 폭력이 란무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지독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실존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간 실존의 부조리한 상황을 수긍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최고 덕목으로 치면서 희망을 념원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고있다.
20세기의 미국 작가들중 헤밍웨이가 얻은 명성을 뛰어넘은 사람은 몇명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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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헤밍웨이가 재다시 회자되면서 동시기 활동했던 작가들과의 불협화음이 뒤늦게 공개되여 충격적이다.
헤밍웨이는1920년대 미국문학의 제2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인물로 정평받고있는데 그와 함께 이 제2의 부흥시기를 주도한 인물이 또 있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이다.
피츠제럴드
피츠제럴드하면 이곳 문학풍토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우리 조선족문단에 그의 작품이 단 한편도 소개되지 않았기때문이다. 굳이 그에 대해 환기시키려면 최근 나온 영화 “벤자멘트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本杰明·巴顿奇事)”를 말하면 될것이다. 할리우드의 꽃미남 브래드 피터의 주연으로 크게 흥행을 본 영화, 이 영화가 바로 피츠제럴드의 원작을 개편한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유명 작품으로는 또 20세기 가장 뛰여난 미국 소설로 꼽히는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1920년대 미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이 소설은 “20세기 미국 현대 문학의 최고봉”, “미 대학생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 1위라는 눈부신 찬사를 받고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뒤의 미국은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는데 “위대한 개츠비”는 이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신의 풍경을 예리하고 생생하게 보여 주고있어 미국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할 작품”으로까지 꼽힌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두 작가는 프랑스 빠리에서 처음으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헤밍웨이는 이름없는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무명 작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문단과 독자들이 알아주는 유명작가였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 작품을 읽고 감명받아 그에게 싸인을 받으러 찾아가면서 처음 면목을 익히게 된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신진이였던 헤밍웨이의 문학적 재능을 혜안으로 알아보았다. 이후 그는 헤밍웨이를 등단시키기 위해 물심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조언했고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그의 작품 출판을 도왔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 소설이며 헤밍웨이의 작품중에서도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력작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였다. 헤밍웨이는 책의 부제에 "스콧 피츠제럴드의 우정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특별히 밝혀 실으며 둘 사이의 우정을 과시했다.
당시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 데뷔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다보니 정작 자신의 작품을 쓰는데는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를 만난것은 작가로서 나의 행운이였다”고 거듭 감사를 드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피츠제럴드의 생활에 금이 가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랑비벽이 심한 부인때문에 경제적 파국을 맞게 되였으며 나중에 그 부인이 정신병까지 앓게 되자 피츠제럴드의 생활고는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박록 (薄祿)의 원고비라도 벌어 생활고에서 벗어나기위해 피츠제럴드는 닥치는 대로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쓴 작품이 무려 160편에 달했다.
벼랑에 선 피츠제럴드와는 반대로 그 사이 피츠제럴드의 사심없는 도움을 발판으로 헤밍웨이는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등을 발표하며 헤밍웨이는 하루밤새에 미국 출판업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어제날 피츠제럴드의 싸인을 받으러 찾아갔던 올챙이 문학도 헤밍웨이는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어찌보면 은인격인 피츠제럴드에게 감사나 동정의 손길대신 조소와 야유의 비틀려진 입꼬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피츠제럴드가 돈을 벌기 위해 되지도 않는 작품을 쓴다고 내놓고 폄하(貶下)를 했다. 9년 만의 신고끝에 탄생한 피츠제럴드의 장편 “밤은 부드러워”에 대해서도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비록 상업적으로도 실패했지만 피츠제럴드의 소설 중 가장 감명을 주는 이 소설에 대해 헤밍웨이는 “번지르한 문장으로서 세상을 리해하지 못하며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혹평했다. 지어 자신의 그 유명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피츠제럴드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작품의 실패와 친구와의 반목으로 절망에 빠진 피츠제럴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알콜중독에 시달렸다. 그후로 내내 병고에 시달렸던 피츠제럴드는 결국44세의 나이에 요절하고말았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죽은 피츠제럴드를 “꽃가루 떨어진 나비”로 까지 비하했다.
비록 피츠제럴드가 유감을 품고 사망했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끊기지 않았다. 피츠제럴드의 사망후 그의 작품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고 헤밍웨이와 두사람은 끊임없는 비교를 당해야 했다. 헤밍웨이 역시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62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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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가들의 정신과 작품과는 다른, 실제의 숨겨진 삶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위대성을 탈신화하는 작업은 찬반론란속에 계속되고있다.
명성으로 가려지고 분장된 위인들에게서 허울을 벗기고 어두운 곳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야누스적인 얼굴(Janus. 로마 신화에 나오는 성이나 집따위의 문을 수호하는 신,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과 평화를 나타내기도 한다)에 대해 연구가들은 가차없이 동전의 량면처럼 뒤짚어 보이고있는것이다.
아무리 뛰여난 작품을 내놓은 이름난 작가라 할지라도 그 역시 인간임에는 분명하다. 우리가 감탄했던것은 우선 그의 사상이며 작품이지 그의 인품과 인격이 먼저가 아닐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려낸 세계의 서술과 그가 살고있는 삶의 실제는 같은것일수가 없다.
저 위대한 똘스도이도 젊은 시절에는 도박에 깊이 빠져있었고 성병에 걸릴만큼 녀자관계가 문란했으며 로년에는 갖가지 주제로 책을 쓰고 설교를 하며 성자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그 내용은 상투적이고 고리타분할 뿐이라는 인간평도 있다.
영국의 대문호 쉐익스피어는 호색한에 량성애자라는 론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쉐익스피어 는 유부녀를 임신시킨 난봉군이였다.
바이런은 자신에게 진정한 영양분은 섹스라며 베니스에서 1년동안 자그마치 녀자 250명과 잠자리를 했다.
“선량한 회색 시인”이라고 불렸던 월트 휘트먼은 섹스에 대한 로골적인 찬미로, 평론가로부터 “그 시대의 가장 불결한 짐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매우 도덕적인 작품 “작은 아씨들”을 쓴 올컷은 평생을 약물에 중독돼 살았다. 건전한 아동소설보다 에로틱하고 저속한 작품 쓰기를 즐겼던 그녀다.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톨킨은 세금 내기를 거부한 지독한 구두쇠였다.
윌리엄 포크너는 우체국장으로 일하다 다른 사람들의 우편물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이 종종 목격돼 직장을 잃은적 있다.
언감 몇몇 대가들의 이름을 언급하고있지만 이는 적지않은 작가들의 사례중의 한두 경우일뿐이다.
여기서 그들의 인간적 약점들만을 들추어 심리 (审理)하면서 세속의 자대로 그들의 전존재를 부정하려는것은 아니다. 우리의 소설사를 위대하게 만들고 몇세대 독자들에게 끊임없는 감동을 주고 있는 이들의 문학적 성과를 무의미한것으로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자는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존재가 그림자를 가져야 하듯이 그 위인들도 그림자를 숨기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이룩해낸 위대한 사상적, 문학적 세계와 그것이 세상에 끼친 거대한 영향은 절대 폄하하지도 못한다. 다만 그들의 문학생애중에 왜 그런 배리적 모습도 보였는지 우리의 학자들이 심입되게 더 연구하고 우리 독자들이 숙고할바이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헤밍웨이 닮은꼴 찾기 선발대회”가 열린다고한다. 이 선발대회는 헤밍웨이 탄생일인 7월 21일을 기념해 매년 7월 이면 열리는 “헤밍웨이의 날” 축제의 하이라이트이다.
번마다 100여명이 되는 참가자들은 헤밍웨이가 생전 즐겨 찾던 “슬로피 조바”라고 하는 술집에서 선발 경쟁을 벌린다. 이 술집에서 헤밍웨이가 “무기야 잘 있거라”를 집필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가자들은 그처럼 다복솔같은 수염을 기르고 그가 생전에 즐겨 입던 옷차림을 하고 낚시대를 든채, 혹은 렵총을 든채 닮은 꼴에 도전한다. 참가자들은 지어 지글지글 끓는 한여름에도 그가 겨울이면 즐겨입던 굵은 실 스웨터를 입고 땀을 벌벌 흘려가면서까지 자신들이 애대를 하는 위인의 모습에 한결 다가가자고 한다.
느닷없는 비화(秘話)로 우리들을 혼란케하는 헤밍웨이, 그런 헤밍웨이가 아닌, 진정 우리들의 머리와 마음을 선점(先占)했던 그 엘리트적인 모습의 헤밍웨이의 닮은꼴에 다가가고 싶다.
“도라지” 2012년 1월호
헤밍웨이의 작푸을 각색한 영화 "로인과 바다"주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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