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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3)
민족교육의 효시- 명동학교
김 혁
명동학교의 창립당시의 모습
민족의 교육사와 반일운동사에서 단초를 열어젖힌 리상설의 "서전서숙"은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폐숙 (废塾)되였지만 그와 더불어 룡정에서 수십리 떨어진 명동이라는 마을에서는 큰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구한말 일제의 횡포로 나라를 읽고 고향을 잃은것을 통탄했던 김약연 등 회령의 학자들은 1899년 가족과 10여 가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명동지역(지금의 룡정시 지신향 명동촌)정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차렸던 몇 개의 서재를 합쳐 사립 명동서숙을 세우고 룡정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받기로 의기투합되였다. 그리하여 "명동서숙"이 1908년 4월 27일에 창립되였다.
초대숙장으로는 김약연이 맡게 되였다. 숙장부터 교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피 끓는 조선의 반일애국지사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였다.
"명동서숙"은 창립된 첫해부터 잘 꾸려져 이듬해 4월에 현대 멋이 물씬 풍기는 명동학교로 개창 되였다. 1911년 3월 김약연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명동학교에 녀학부를 세웠다. 이 역시 중국조선족 이주사에서 처음으로 있은 녀성교육으로 된다.
김약연은 학과목의 중심을 조선민족의 말과 글을 가르치고 조선의 유구한 력사와 지리를 가르치는데 두고 학생들에게 민족자부심과 반일의식을 키워주기에 힘썼다. 후에 일제침략자들이 사립학교들에서 조선어와 조선력사, 조선지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던 시기에도 김약연은 여전히 가르치게 하였다.
명동학교는 갈수록 생기를 띠고 명성이 높아져 뜻있는 청년들은 연변 각지와 남북만, 조선, 로씨야의 연해주 등지에서 륙속 이주민들의 “리상향”인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조선에서 피신해 온 독립지사들은 교원으로 되여 강단에 서서 수많은 반일지사들을 길러냈고 이들은 후날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등불이 됐다.
1914년 5월 28일자 “신한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간도에 있는 명동예수교학교는 설립한 지 4년에 교무가 날로 진흥하며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여 150여 명에 달하였으므로 장차 학교를 크게 건축하고 교육을 더욱 확장하고자 하는 중이라 하더라”
명동학교는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였다.
당시 선생들에게는 월급이 따로 없었다. 독신으로 와 있는 선생님은 돌림 차례로 학부모네 집에서 한 달씩 주숙 하거나 한집을 정해놓고 주숙하게 되면 그 땔나무와 쌀을 학부모들로부터 거두어 하숙집에 들여놓았다. 가족이 있는 선생은 학전(學田)을 적당히 부치게 하였다.
이렇듯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명동학교의 여러 가지 사업은 정연하게 잘 진행되였다. 수업이 눈에 뜨이게 성과적으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외활동과 사회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되여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반일민족의식과 독립사상으로 학생들을 각성시켰다.
명동학교후원회에서는 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10여년간 열심히 노력하여 모은 의연금 800여원으로 1917년에 13개월이란 시공을 하여 드디여 현대식 교사를 짓게 되였다.
철저한 교육운동, 치렬한 항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었던 명동촌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들이 즐겨 찾는 아지트가 되였다.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중근도 명동촌의 뒤산의 명암골을 찾아 들어 권총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이곳에 두달 가량 체류하면서 김약연 등 지사들과 항일구국의 장구책을 론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부대와 김좌진 부대 그리고 1920년 1월 3일 명동과 불과 10여리 리 떨어진 동량리어구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선 회령으로부터 룡정으로 보내는 일화 15만원을 "철혈광복단"에서 탈취한 의거에는 명동학교 출신이거나 명동과 관련된 독립군 용사들이 적지 않았다.
명동촌은 당연히 일제의 눈에 든 가시”로 되였다. 일제는 명동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더욱 엄밀히 감시하였다.
1920년 10월 북간도지역을 피바다로 만든 "경신년 대토벌"이 일제에 의해 일어났다. 김약연은 반일시위의 주모자로 관헌에 체포되였고 일제는 명동에 덮쳐 들어 수백명 군중을 명동학교운동장에 몰아다 놓고 독립운동자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일제토벌대의 위협공갈앞에서도 명동사람들은 의연했다. 헛물만 켜게 된 극악무도한 일제는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명동사람들이 터를 닦고 세운 명동학교를 재더미로 만들었다.
1922년 가을, 민국관청에서 석방되여 명동에 돌아온 김약연은 또다시 명동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1924년 갑자년 특대 흉년이 덮쳐왔다. 명동학교는 운영난에 시달렸고 왕년의 생기를 잃어갔다. 로령에도 불구하고 명동을 지켜내려는 김약연의 노력은 외롭고 처절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중학부가 취소되고 중학부의 교원들과 일부 학생들이 룡정의 여러 중학교로 옮겨지자 명동학교도 교회에서 경영하는, 남녀공학학교로 바뀌였다.
1928년 환갑연의 김약연은 솔가하여 룡정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가 창설한 명동학교는 력사의 갈피에 그 존재를 또렷이 적었다.
명동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중학부가 1925년에 페지 될 때까지 18년간 학교는 무려 1천명의 애국청년들을 양성하여 졸업시켰다. 이 졸업생들은 모두가 항일투쟁에 나섰거나 민족교육사업 그리고 문학가와 저명한 예술가로 청사에 길이 빛날 업적들을 쌓았다.
그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읊조렸던 윤동주는 김약연의 누이동생의 아들이자 명동학교 학생으로서 김약연이 가르친 제자였다. 그리고 영화 “아리랑”을 만든 춘사 라운규, “통일의 아버지” 문익환,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등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이곳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물려받았고, 근대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다.
새로 복원된 명동학교 (사진, 리련화 기자)
이후8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학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채 담배밭으로 변했으며 “명동학교 옛터”라고 쓰인 표지석만이 외로이 남아 과거 민족운동의 산실이였음을 알려왔다.
그러던 지난 2010년 력사의 뒤안길에 사라졌던 명동학교가 사람들의 주목속에 드디여 복원되였다.
룡정시에서는 중국조선족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룡정을 중국조선족 민족문화도시로 건설하려는 취지로130만원을 투입, 근 일년간의 시간을 거쳐 원 명동학교 자리에다 사연많은 명동학교를 복원하였던것이다.
명동학교 옛 터에 복원된 학교는 당시 평면도에 따라4채의 단층 벽돌 건물로 이뤄졌던1920년대 초의 명동학교 모습을 그대로 재현, 건축면적은265평방메터이고 4개 교실에2개의 사무실로 구성되였다.
중국조선족 교육의 효시이자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던 명동학교는 옛터에 다시 일떠서 당년의 위용을 자랑하고있다.
"연변일보" 2015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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