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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어둠속, 삶의 통과의례
- 김금희의 수필 “터널”
김 혁
김금희 소설가
“여느 터널들보다 더 좁고 깊고 어두운 터널”, “들쑥날쑥 터널안벽을 쌓아올린 오래된 돌들, 두껍게 얹혀있는 먼지와 푸른 이끼…”
작가가 보여준 터널의 어둠과 습도가 너무 생동하여 수필을 읽는동안 내 자신이 지나 온 터널이 바로 김금희 작가가 지나온 똑같은 그 터널이 아닌가 착각해 버렸다.
작가는 먼 려행지에서 돌아온 피곤한 행자처럼 누구나 한두번 겪어보았을 인생의 블랙홀같은 터널로 우리를 인도한다. 서사 중심,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작가는 우선 화자를 둘러싼 터널속 경관이나 미물을 보여주며 고단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다. “돌”, “이끼”는 물론 “비대한 몸집의 쥐”등이 그것이다.
어둠에 적응되면 모든 사물이 외려 명징하게 보인다. 어두운 터널속에서 작가는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몰두”하고, 그 내면의 응시를 통해 “속모습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 괜찮다고, 정직한 편이라고 자위했던 내 외양의 심면에 그렇게 많은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생긴 부패와 온갖 쓰레기와 지어 추악한 욕망들이 곳곳에 도사려 있는것”을 보아내게 된다.
터널밖에서의 타자에 대한 인식이 터널안에서의 자아안에 존재하는 내적 타자의 발견으로 어둠속에서 이어진다.
핍진한 체험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고뇌가 서사의 호흡을 거칠게 하고 독자들의 심중을 터널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객체를 대상으로 던져두지 않고 주체에게 끌어들여 자아화하는 서사적인 양식을 작가는 미구에 보여준다.
간명한 내용이라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을뿐 사실상 소설의 양식을 그대로 가져온 느낌을 준다. 다름아닌 소설가의 수필이기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소설쟝르에서 볼수있는 긴장과 이완이 고루 균형을 이룬 탄탄한 수필이 태여난것이다. 소설쓰기에 주력해왔고 근년들어 볼만한 성적을 내고있는 작가는 어느 누구보다 묘사력에 강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수필작품에서도 형상적인 리얼리티를 보게 된다.
“적막한 터널안에서 들리는것이란 자신의 외로운 발자국 소리뿐. 내 발자국 소리가 저랬던가싶을 정도로 그것은 터널안의 특이한 구조에 힘입어 전에 없이 크고 뚜렷하게 들린다.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느라면 청진기를 페 세포에 댄듯 헉헉후욱ㅡ 헉헉후욱ㅡ 들숨과 날숨이 정확히 구분되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확인할수 있다.”
이렇게 대체로 회색 이미지로 끌고 가던 수필은 다음 단락에 이르러 감정의 기복을 일으킨다. 무겁게 흘러온 긴장을 깨뜨리고 작품 분위기를 터널을 나선자와도 같은 밝은 분위기로 인도한다. 곧 화자중심에서 다시 객관의 시선으로 넘어가서 화자가 전달하고 싶은 심중을 서술하는것이다.
“내 속의 집에 또다시 다른 류형의 쓰레기가 몰래 쌓여가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나이에 아직도 비좁고 낡은 집에서 근근득식 거짓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알기 위해 자성(自省)의 터널을 다시 한 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모든 변화의 시작, 긍정적인 결단은”, “내속 가장 안쪽 깊이에 있는 능동의 나로부터 발생”된다. 터널을 지날때 체감하게 되는 까닭모를 두려움이 자아성찰이라는 “스스로의 점검”속에서 봄날의 “여유만만”한 통로를 찾아 화음을 낸다. 그로서 어둠을 헤쳐나온 작가는 “참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터널로 향하여 “내면의 려행”을 떠난다.
이처럼 터널이라는 이미지의 련상에 의한 문학적인 효과를 이끌어내며 “아픔과 원망, 분노, 자책, 수치와 두려움들을” 떨쳐온 생의 철학적 의미를 공포, 진통, 고민, 경외, 설렘, 환희 등의 정서로 등가물(等價物)하고있다.
다만, 어둠을 극복해나가는 지난한 과정이 생략된 그 과도부분의 어색한 련결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작품은 일상에서 당착한 터널이라는 풍경을 다루면서, 인생살이에서의 통과의례와 같은 고난과 그 어둠을 이겨나가는 과정에서의 고민 또 그것이 갖는 존재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극복해야 하고, 타개해야 하고, 닿아야할것에 대한 추구와 고뇌가 작은 수필속에 그득하다.
"흑룡강신문" 2016년 4월 7일
한국에서 출간된 김금희의 소설집
수필
터 널
김금희
지금 있는 세집으로부터 도보로 십분 남짓의 거리에 짧은 터널이 하나 있다. 장춘역을 지나는 기차길과 전차길을 나란히 머리우에 이고 있는 터널이다. 따듯한 봄이나 나른한 여름날의 오후, 시간적 여유가 있다 싶을 때 나는 장춘역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는 그 터널을 지나 세집으로 걸어가군 한다.
터널들이 대개 그렇듯 그 짧은 터널의 안도 오랜 시간 직사광선을 받지 못한 탓에 늘 어둡고 습했다. 인행보도가 따로 있지만 쌩쌩 지나치는 차들의 경적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리기때문으로 깜짝깜짝 놀라는 수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터널을 통과하는것에서 얻는 어떤 독특한 체험은 다른 어떤 곳을 지나면서도 경험할수 없는 색다른 것임이 내게는 분명하다.
입구가 있고 출구도 있지만 일단 터널안에 들어서면 외계와 격리된 기분이다. 훤화하는 세계의 소리는 그치고 밝은 해빛도, 그 해빛아래 분주히 돌아치는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일순간에 사라진다. 어둠이 갑자기 엄습하는 바람에 시야는 찰나 좁고 흐려지며 그에 따르는 불안감때문에 분명히 있을 출구에 대한 확신마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또각또각. 적막한 터널안에서 들리는것이란 자신의 외로운 발자국 소리뿐. 내 발자국 소리가 저랬던가싶을 정도로 그것은 터널안의 특이한 구조에 힘입어 전에 없이 크고 뚜렷하게 들린다.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느라면 청진기를 페 세포에 댄듯 헉헉후욱 ㅡ 헉헉후욱ㅡ 들숨과 날숨이 정확히 구분되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확인할수 있다.
그 소리들이 너무 생동하여 나는 가끔 자신이 지나고 있는 터널안이 바로 내 속인가 착각할 때도 있다. 들쑥날쑥 터널안벽을 쌓아올린 오래된 돌들, 두껍게 얹혀있는 먼지와 푸른 이끼, 간혹 쓰레기더미속에서 스멀스멀 기여나오는 비대한 몸집의 쥐… 혹시 오래동안 청소 한번 않고 방치해둔 내 속이 저런 모습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 사뭇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누구나 한두번 겪어보았을 인생의 터널이 내게도 있었다. 다른 여느 터널들보다 더 좁고 깊고 어두운 터널이였다. 손으로 벽을 더듬거리며 한발 한발 나갔지만 출구의 빛이 도무지 보이질 않아 막힌 동굴이려니 락담하고 주저앉기도 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몰두할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나의 속모습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 괜찮다고, 정직한 편이라고 자위했던 내 외양의 심면에 그렇게 많은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생긴 부패와 온갖 쓰레기와 지어 추악한 욕망들이 곳곳에 도사려 있는것을 보았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15절) 혹간에서 말하는 인간의 탐욕, 또는 죄성때문에 내 마음속의 집이 그리 훼손되고 무질서하게 어지러워져서 내가 이토록 아프고 힘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나의 모든 정직함과 선함을 버리기로 하였다. ‘회칠한 무덤’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새겨 들었고 십자가 앞에서의 죽음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버리는것도, 소제하는것도, 다시 일어나 가는것도 쉬운 일은 아니였다. 죽음의 유혹에 버금가는 참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자신을 포함한 세상사람들을 두려워 않는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어렵사리 일어서서 벽을 더듬거리며 걸어 나갈 때, 내 발밑으로 여러가지 모습의 아픔과 원망, 분노, 자책, 수치와 두려움들이 하나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이 끔찍한 터널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무작정 펼쳐졌던것처럼 출구의 빛도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왔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터널 통과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 시절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 그 속에서부터 빠져 나오게 되였던것인지 잘 알수 없다. 그저 나는 이미 헤쳐나온 터널을 뒤돌아보며 신에게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표할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현실의 나를 강하게 만드는것일가. 또한 무엇때문에 삶속에서 나는 힘들고 아프고 약해 있는가. 그 끔찍한 터널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것이 있다면, 결코 외계의 환경과 타인들의 행동이 근본의 원인으로 군림할수 없다는것이다. 모든 객관의 요소들은 문제의 참고사항이 될뿐 주관적인 나의 세계에서 나 자신의 동의없이 주인 노릇을 할수 없고 따라서 그것들에게 나는 최종적인 책임을 물을수 없었다. 나의 속세계가 얼마나 질서있고 탄탄하고 포용력이 있는지, 얼마만큼 상처를 복구시키고 세상의 악을 해독할수 있는지, 얼마나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현실에 대처하는 나의 모습이 달라질수 있는것이였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오늘, 내 속의 집에 또다시 다른 류형의 쓰레기가 몰래 쌓여가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나이에 아직도 비좁고 낡은 집에서 근근득식 거짓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알기 위해 자성(自省)의 터널을 다시 한 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육체를 위해 정기검진을 받듯 마음의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내면려행을 떠나보는 일도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의 시작, 긍정적인 결단은 내 속 가장 안쪽 깊이에 있는 능동의 나로부터 발생되는것이니까.
바야흐로 겨울이 지나고 있다. 두꺼운 의복에 웬만큼 질리고 힘들었던 계절이였다. 의복의 부피도 줄이고 불필요하게 증가된 몸무게도 빼고 이 참에 마음까지 새로이 보수해야 할가부다. 비물이 새는 곳이라든가 세상고초때문에 내려앉은 구석 모퉁이, 혹은 비우지 않은 쓰레기통에서 썩어가고 있는 음식물이나 처마밑에 몰래 기여든 능구렁이 따위들이 어디 없는지 한번쯤 스스로 점검해볼 일이다.
따뜻한 봄, 어느 여유만만한 오후나절이 되여서 혼자 그 적막한 터널을 찾아 다시 한 번 그 속을 또각또각 걸어보고싶다.
2016. 3. 장춘에서
[출처] 어둠속, 삶의 통과의례|작성자 김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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