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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과 “의열단”단원 유자명
2016년 10월 11일 08시 28분  조회:3183  추천:15  작성자: 김혁
 
. 역사칼럼 .
 
영화 “밀정”과 “의열단”단원 유자명
 
김혁 
 
▲ 영화 <밀정> 포스터
 
1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에 나섰던 “의열단”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밀정”이 최근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암살”에 이은 또 한편의 의열단소재에 대중적 관심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따라서 영화 속 에 부각된 의열단의 실존 인물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시대, 독립지사들이 1919년에 설립한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 운동단체이다. 단체의 명칭은 “정의(正义)의 사(事)를 맹열(猛烈)히 실행한다”는 취지에서 유래됐다. 의열단은 일제 경찰서, 헌병대, 조선총독부 등 관공서를 폭파하고 친일 지주자본가, 총독부 관리등 요인의 암살로 일제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의열단”은 그후 중국 상하이를 주무대로 외국인 치외 법권지역인에서 폭력 항쟁으로 일본제국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상하이의 프랑스인 보호구역을 근거지로 삼아 1919년부터 192525년에 걸쳐 약 300여 건의 테러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밀정”은 1920년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의열단의 경성 폭탄반입 사건이 그 배경이다. 의열단의 수많은 의거 중에서도 1923년 의열단이 중국에서 직접 제조한 폭탄을 대량으로 국내에 반입하여 벌이려던 파괴공작 계획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의열단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에 폭탄을 반입하여, 식민통치기관을 대상으로 동시다발적 폭탄투쟁을 전개할 예정이었다. 파괴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들과 물자들을 나르는 주요 철도였고, 암살 대상은 사이토 총독 이하 조선총독부 수뇌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계획은 사전에 탄로났고, 김시현과 황옥을 비롯해 작전에 참여했던 의열단원들 전원이 검거되었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영화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황옥

▲ 영화 속 송강호가 분한 황옥의 형상
 
황옥 경부(영화 속 이정출)를 비롯해 영화 속 주인공의 모델은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영화 속 송강호가 주역을 맡은 주인공 이정출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황옥(黃鈺)이다.
그렇다면90 여년 전 실존했던 인물 '황옥'은 과연 독립운동가였을까? 아니면 일제 밀정이었을까?
역시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유자명(柳子明, 1894~1985) 선생의 수기 “나의 회억”, (랴오닝민족출판사.1984년)에서 황옥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비밀참모로도 활동했던 유자명 선생은 수기에서 "황옥은 경기도 경무국의 고급정탐으로서 독립운동가들과도 비밀한 연락을 하고 있어서 내가 경성에서 김한과 같이 활동하고 있을 때도 나도 그를 만나봤다. 그런 황옥이 천진까지 오게 된 것은 폭탄과 권총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서다."라고 적고 있다.
의열단의 폭탄과 권총을 건네받은 '황옥'은 텐진에서 만난 다른 의열단원 3명과 함께 안동(지금의 단둥)으로 향했고, 단둥에서 평소 자신과 친분이 있던 일본 외교관 김우영(당시 안동 주재 일본영사)과 만났다고 수기는 기록했다.
 
일제와의 항쟁을 그린 영화에서 독립운동가가 아닌 일제 총독부의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 <밀정>의 흥행과 함께 또 다시 역사적 조명을 받는 의열단의 이야기, 그 증언자였던 유자명의 일대기를 돌아 본다.    
 
▲ 젊은 시절의 유자명
 
2
일제강점기의 아나키즘 운동에서 빠드릴수 없는 인물인 유자명은 충청북도 충주에서3남매 중 막내로 태여났다. 호는 우근(友槿)이고 원명은 유흥식(柳兴湜), 유자명은 중국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충주 간이농업학교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3.1”운동을 맞아 학생시위를 계획한데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유자명은 임시정부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한동안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천진 지역에서 신채호, 이회영등과 교유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특히 아나키즘 이론에 밝아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한 유자명 (앞줄 맨 오른쪽)
 
1920년대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 유자명은 의열단의 요원으로 극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이 시기 조선 식산은행(殖产銀行)과 동양척식회사(东洋拓植会社) 폭탄투척 등 의열단의 수차 의거에 깊이 관여하는 등 활동력을 보였다. “의열단 참모 유자명”으로 이름을 드날리면서 일본인과 친일파의 제거 작업에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인민을 탄압,학살하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는 일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일제 침략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의 폭파는 곧 반일 애국행동”이라는 론리로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정당화하였다. 그 후 선생이 1981년에 집필 한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은 중국 내 조선인 아나키즘 운동 및 의열단 활동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2월, 유자명은 난징에서 김규식 및 중국인 무광록,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어•중국어•한국어로 발간하여 관계된 여러 나라에 발송했으며 비밀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운동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항일독립의 연합전선을 펴나가는 한편, 조선인 청년 다수를 난징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민족혁명의 대열에 서도록 주선했다. 유자명은 이론에 밝았으며 탁월한 어학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항일운동계의 일급 참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대에는 상하이의 농업학교 립달학원(立达学院)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남화(南华)한인청년련맹”을 결성하였다.
 
난징이 일제에게 함락되자 연맹은 무한으로 옮겼다. 무한에서 유자명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대표 이사의 한사람으로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와 더불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사업을 맡아보았다.
선생은 자신이 쓴 조선민족전선련맹 창립선언문에서 “한•중련합을 통한 항일투쟁역량의 집중, 국제적 반일세력과의 련대”를 강조하였다.
또 난징, 상하이, 천주(泉州) 등지를 무대로 중국의 “이상촌(理想村) 건설활동”에 몰두하였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1941년 중국 푸젠성 영안(永安)에 거처를 잡고 농예연구와 농작물 재배실험에 달라붙었다.
농예면에서 성과를 올렸기때문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과 고위관원들이 유자명을 주목하게 되었고 여러곳에서 초청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계림(桂林)에도 농장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1943년 유자명은 중경으로 갔다. 그는 농장운영에 관련해 중경의 고위관원들을 만나고 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인 김구와 김원봉의 단합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하고 임시정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일했다.
농립학교를 졸업했던 그는 이후 복안(福安)현 계병(溪柄) 농장에서 일개 농부같은 생활을 하면서농업기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늘 성실하였으며, 인도주의 정신으로 중국을 사랑하였고, 선생 또한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부터 후난성 창사에서 후난대학 농예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간 유자명은 농학교수로 많은 연구를 거듭하여 농학사, 원림 화훼, 채소재배, 벼의 기원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자명은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의 특수벼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으며 한나라 묘지인 마왕퇴에서 출토된 씨앗과 종자 분석에 참여하여 볍씨의 품종과 형태 등을 판별해 냈다.
유자명은 원예면에서도 지위가 매우 높았다.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던 후난에서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또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1995년 중국농업출판사에서는 전기물 “훈장을 단 원예학자-유자명전”을 출간했는데 이는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 농예사로 지낸 만년의 유자명
 
1985년 4월 17일 후난성 창사에서 타계했다.
1978년 북한, 1991년 한국 정부에서 훈장을 받았고 2002년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2003년부터 농학자, 교육자로서의 유자명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중국과 그의 고향 한국 충주에서 수차 열렸으며2004년에는 그의 평전이 발간되기도 했다. 2009년 후난농업대학에서는 그의 거소를 문물 명록에 신청하여 복구하고 실내에 유자명 사적 진열관을 꾸며 놓았으며 교정내에 그이의 동상을 세웠다.
 


▲ 호남농업대학 교정에 세워진 유자명의 동상
 
3
“다음번엔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밀정”에서 황옥을 모티브로 했던 주인공 이정출이 읊은 대사다. 친일이냐? 항일이냐? 그런 경계 위에서 선택의 줄타기를 해야 했던 여러 부류 인간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에 반하여 유자명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묵묵히, 흔들림없이 항쟁해오면서 민족사의 갈피에 그 족적을 도렷이 남겼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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