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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작가의 말
잊혀진“영화 황제”
김 혁
나의 신작 장편소설 "무성시대"가 대형문학지 "장백산"지에서 새해 제1호부터 련재를 시작했다.
30년대의 옛 상하이를 배경으로, "영화 황제"의 보좌에 오른 조선족 배우 김염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금번의 소설 “무성시대”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문화대혁명의 난장을 그린 “마마꽃, 응달에 피다”,
출국붐 속에 스러진 조선족 여인상을 그린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한민족이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조명한 “시인”,
연길감옥에서 숨진 청나라 마지막 황후 완룽의 비극을 그린 "완룽 황후".
조선족 최초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그린 “춘자의 남경”에 이은
나의 여섯번 째 장편소설이다.
1
그이는 “황제”로 불린다.
우리의 예술계에서 그이만큼 이러한 미칭(美称)과 극찬의 보좌에 등극한 이는 전무후무, 류례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이를 잘 모른다.
그이는 “민국4대미인”으로 꼽히는 배우 완령옥(阮玲玉)과 영화작품을 가장 많이 한 절대 콤비였다.
하지만 구설수에 못이겨 자살한 아릿다운 완령옥에 대해 알지만 우리는 그이를 잘 모른다. 완령옥을 위한 무수한 전기에도 그의 이름은 겨우 한 두번 정도 나오고, 그녀를 위한 전기영화에도 그이는 어쩌면 단역으로 단 2, 3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이의 가문은 무려 일곱 명의 항일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그이의 아버지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서울의 최초 양의사로부터 중국 동북의 치치하르로 이주했고 핍박과 아픔이 없는 리상촌 건설을 꿈꾸다가 일제 끄나풀에 독살당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이도, 그이의 가족사도 잘 모른다.
대문호 로신의 산문시 “사화(死火)”을 읽고 감명 된 나머지 본명 김덕린에서 화염 “염(焰)”자를 따서 개명한 그이의 이름은 김염이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일찍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향항과 대만이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해영화에 두고 있다.
1930년대의 상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바로 그 당시 상해 영화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 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으니 바로 김염이였다.
영화 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상해가 일제의 손에 함락된 뒤 일본영화의 출연 제안에 “기관총으로 나를 쏴죽인다 해도 난 못해!”하고 칼날 같은 거부를 보였던 그의 패기는 일제의 출연요구를 거부해, 녀장배우로서 수염을 길렀던 경극대사 매란방과도 꼭 닮았다. 그처럼 김염 역시 대사급의 아우라를 간직한 예술가였다.
1962년 은퇴할 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이의 신화는 오늘도 계속 된다.
“중국 최고의 미인”이요, “공주”로 불렸던 진이(秦怡)와 사랑을 맺었고 그래서 주은래 총리가 “중국의 공주를 채 갔으니 당신은 우리의 부마(驸马)”라고 일컫을 만큼 김염은 뭇사람들의 선망을 자아냈던 배우였다.
"녀자 롱구선수 5번" 등 경전영화에 출연했던 진이는 96세, 구순의 고령에도 아직도 김염이 족적을 남긴 상해에 건재 해, 중국영화의 백년사를 육안으로 지켜 본 산증인으로 되였다.
지난해 중앙TV영화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진이는 “나의 남편 김염은 영화로서 일제와 싸웠다”고 자부심에 넘쳐 말했다.
현재 상해시 용화렬사릉원 기념관에 그이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고 북경영화박물관에 그이의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2
“조선족 중에 나보다 영화를 더 본 사람 있다면 한번 나와 보시지?”
수년 전 모 문학지에 발표했던 “영화, 그 현란한 중독”이라는 수기의 들머리에서 필자가 치기에 넘쳐 호언했던 첫 마디이다.
이렇듯 필자가 영화광이라는 것은 이제 문단이 다 아는 일이다.
세계영화사의 류류별별 영화들을 vcd, dvd 혹은 테잎으로 족히 6천장 넘게 소장하고 있다. 거기에 영화 론평집과 관련잡지들도 천권은 실히 넘는다. 이제 예술지들의 약력소개에서 나는 소설가 외에도 “영화 수집가”라는 호칭이 기어이 따라 붙는다. 왠지 그 별칭이 싫지만은 않다.
그러한 나였기에 김염 관련 영화들은 당연 적지않게 소장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대로(大路)”는 물론 콤비 완령옥의 출세작 “신녀(神女)”며 완령옥에 대한 전기영화들, 김염의 첫 부인이자 중국의 첫 국제영화상을 수상한 왕인미의 “어광곡(漁光曲)”, 일생을 함께 한 부인 진이의 영화들도 빠침없이 소장하고 있다.
근 10여 년래 민족사의 갈피에 큰 족적을 남긴 우리의 인걸(人杰)들을 논픽션과 픽션으로 번갈아 조명하는 일에 빠져 있는 나에게서 김염은 선참 조명하고 싶은 둘도 없는 인물이자 소재였다.
하지만에 나에 앞서 김염 관련 논픽션물들이 해내외에서 련이어 나왔다. 영화 100주년, 김염 탄생 100주년에 영화광으로서 헌례작품을 꿈꾸었으나 나의 감질난 창작의욕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픽션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는 내가 시인 윤동주를 평전뿐 아니라 우리 문단에서 처음으로 소설화 한 것과 같은 맥락의 창작성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고심에도 불구하고 픽션과 논픽션의 완충지대에서 고전하며 자맥질 하고 있는 우리 “력사+소설 쟁이”들에 대한 문단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편한 문체, 자극적인 스토리에 길들여진 동인들과 독자들의 몰리해가 그 주된 원인이다. “문(文)과 사(史)는 불가분리”라지만 왜서인지 우리 문단에서는 력사소재를 다루는 이가 적고, 그 소재를 순문학이 아닌 낡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한 세기 이전에 내던진 양것의 박래품을 주어들고 그에 대한 아집적인 취미야말로 모던하고 전위적인 문학인 듯 스스로의 상아탑을 쌓고 자족의 미주를 기울이는 이들이 외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향도 있다.
“소설을 쓰면서 그 분야를 관장(管掌)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력사에만 빠져있다”며 미간을 찌푸리는 웃사람들의 로파심적인 우려에다, “왜 케케묵은 냄새나는 사료집이나 뒤지고 앉았냐?”며 온라인에서의 악플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한 몰리해의 탁류에 치대이며 나는 한 사람의 명구를 떠올렸다.
유성영화시대가 왔다며 비아냥거리는 영화사 사장에게 “당신은 유성영화를 만드시오, 나는 위대한 영화를 만들겠소”라고 말했던 무성영화의 거장 챨리 채플린이 호매롭게 던졌던 유명한 어록.
그러한 편협한 시안을 가진 이들에게 나도 “당신은 당신 나름의 모던한 작품을 쓰시오. 나는 나 나름대로 우리의 옛 인걸들을 쓰겠소”라고 말하고 싶다.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하려는 나의 간절한 소망에 보응이라도 주련 듯 소설 “무성시대”의 스토리는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중점지지 작품”으로 선정되였다. (기획서 출제 당시의 중문 원제는 “火焰”, 조선문 원제는 “수은등 아래의 황제”였다.)
금번의 소설 “무성시대”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문혁의 란장을 그린 “마마꽃, 응달에 피다”, 출국붐 속에 스러진 조선족 녀인상을 그린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한민족이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조명한 “시인”, 조선족 최초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그린 “춘자의 남경”에 이은 나의 여섯번 째 장편소설이다.
그리고 김염 타계 35돐에 드디여 련재를 시작했다, 영화의 무성시대를 살아 온 예술가를 위해 한 목청 랩소디를 부르게 되여 기쁜 마음이다.
3
영화채널에 혹간 나오는 김염을 두고 그이의 빼여난 용모나 늘씬한 신장, 복근에 시선을 몰부어 부러운 듯 얘기하며 그이를 아이돌에 비하는 요즘의 시선들을 두고 그들의 용어처럼 나는 “멘붕”(신세대 용어로서,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멘탈리티”의 줄임말과 “붕괴”의 합성어이다. 즉 “정신이 허물어져버린 상황”을 이르는 말)에 빠진적 있었다.
어제의 세대를 기억해 둘 우리의 지금의 세대가 사라진 후 이 세상에는 어떤 기억들이 기억되고 어떤 기억들이 망각될까?
우리 또한 다음 세대들에게 아무런 기억도 없이 망각되지 않을가?
그러한 속찬식 문화풍토에 우려를 가지며 스스로 자문을 구해봤던 질문이다.
심리학 학자이자 영화감독인 루이스 브뉘엘은 일찍 “기억은 우리들의 일관성이자 우리들의 리성이며, 우리들의 행동이며, 우리들의 감정이다. 기억 없이는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한적있다.
기억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만드는 하나의 큰 요소가 바로 기억이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할진대 과거의 력사와 그 굴곡진 장하를 거슬로 온 민족의 인걸들, 그들의 력사의 공적을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을 후세에 남기는것은 밀어버릴 수 없는 책임이며 또한 망각할 수도 없다. 망각해서는 안되는 그 기억들이 그 민족의 소급과 비전을 위한 받침돌이 된다.
소리와 영상이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와 3D 영화들이 극장가를 점령한 21세기의 오늘 날, 김염의 무성영화를 보면서 조금 어색하고 당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를 알고 다시 보면서 차츰 익숙해졌고 오히려 편안했고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소리는 없어도 울림이 컸다. 배우의 풍부한 표정과 몸짓과 그 것이 전해주는 강렬한 메세지에 오감이 열리는 듯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무차별적인 악음이나 소음에 로출되여 있었던 것 같다. 눈 두덩이와 코마루, 귀바퀴 위에 거추장스러운3D 안경을 얹고 얻어내는 더 실감나는 립체영상은 기술적인 감탄은 주지만 정신적인 감동은 주지는 못하는 듯 하다. 때문에 때때로 무성영화, 흑백영화, 그 옛날 영화가 그립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활동인형이라 불리던 영화도 그 양상이 많이 바뀌였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이다.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김염의 아우라가 한동안 잊혀지지 않 것 같다.
몇해 전 중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중국영화의 한 세기를 통틀어 가장 뛰여난 영화인 1백 명을 선정하는 작업이 있었다. 그 1백 명 가운데 최선두를 다툰 사람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완령옥과 김염이였다.
무성영화나 유성영화나 대배우들은 하나 같이 예술을 위한 생활의 형극이라는 길을 걸었다. 김염도 외는 아니였다.
서울 의사가정에서 태여나 약관의 나이에 상해로 가서 중국영화의 톱스타가 된 전설의 예술가 김염. 력사와 인간이 빚어낸 놀라운 신화와 한 배우의 생애가 중국과 한민족의 현대사와 예술사를 관통한다.
수난 많은 민족사와 중국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우리민족의 걸출한 인걸- 김염, 그의 모습을 퇴색하지 않는 한 컷의 필림으로 가슴 골방 깊이 소장하고 싶다.
- “청우재(听雨斋)”에서
“장백산” 2018년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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