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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매체시대와 우리 작가들의 예술적 탐구
2019년 03월 03일 23시 19분  조회:684  추천:13  작성자: 김혁
 
 
평론
 
다매체시대와 우리 작가들의 예술적 탐구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우리는 농업사회,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를 거쳐 인공지능기술의 시대로 가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경우는 정보화사회, 즉 다매체시대에서 창작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모임의 테마는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1928—2016)는 1980년에 《제3의 물결》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내놓았는데, 인류는 농업혁명에 의한 제1의 물결, 산업혁명에 의한 제2의 물결이라는 대변혁을 경험했고 앞으로 20~30년 사이에 제3의 물결에 의한 새로운 변혁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21세기는 디지털혁명의 시대라고 하면서 디지털혁명도 혁명인 이상 적잖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늘의 세계상을 보면 그의 예언이 적중한 것 같다.
보통 20세기의 4대 발명으로 핵기술, 통신기술, 항공기술, 유전자기술을 들고 있다만, 그 중 "제3의 물결"을 선도해온 통신기술이 우리 인류에게 전례 없는 문화적 혜택을 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혹간 스마트폰을 집이나 직장에 두고 나왔을 때에는 누구나 다 숲속에 간을 두고 온 토끼처럼 불안해진다. 
 
아무튼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한 인터넷과 위챗은 다매체시대의 중요한 표지로 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커다란 편리를 주고 있다.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스마트폰 하나로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다.
 
우리 작가들 중에도 석화 시인이나 정세봉, 김혁과 같은 소설가는 문학카페를 만들어가지고 자기의 작품은 물론 우리 문단의 동태나 최신작들을 속속 소개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은 알리페이(Alipay, 支付宝)같은 것은 이용할 줄 몰라 빈축을 사기도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검색하거나 여러 가지 사전을 손쉽게 이용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011년 "9.11테러" 때 핸드폰을 통해 아내를 구출한 프랑스 기자의 이야기가 좋은 예로 된다고 하겠다. 그날 프랑스 빠리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뉴욕의 세계무역청사가 육탄공격을 받는 장면을 보고 그 빌딩에서 사무를 보는 아내에게 스마트폰으로 알려 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매체시대 역시 빛과 그늘을 갖고 있다. 다매체시대 우리 작가들이 직면한 곤혹과 위기를 적어도 아래와 두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각일각 홍수처럼 쏟아지는 매체의 방대한 정보량에 현혹되어 다만 그 가상의 세계에서 소재를 취하는 경향이다. 물론 다양한 매체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도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작가들이 자신의 개체적인 관찰과 체험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가상적인 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고 여러 매체의 뉴스, 이러한 뉴스에서 전달하는 특이한 인물과 사건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작가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다양한 매체들에서 이미 모든 소재를 제공했다. 작가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와 이야기,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이미 만들어졌으니 새로운 조합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작가의 개체적인 관찰과 체험에 의한 창조를 포기하고 최종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론에서 주장하는 페스티시(pastiche)를 만들어내게 된다. 패스티시는 다른 텍스트에 대한 모방으로서, 그것은 기성 작품의 내용이나 문체를 교묘하게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과장이나 풍자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패러디(parody)와는 달리 긍정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특성을 지니며 여러 작가의 여러 텍스트로부터의 부분적인 모방들을 가져다 자기 작품에 합성시켜 놓습니다. 이런 행위는 창조성을 생명으로 간주하는 작가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활자매체와 언어예술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의 상실이다. 근대의 지배적인 매체인 활자매체와 결합된 문학은 그 결합으로 근대의 문화적 중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매체시대에 와서 활자매체는 종래의 지배적인 위치에서 거침없이 추락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가능해진 새로운 매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매체들은 활자매체를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에 따라 문학은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다른 매체나 장르의 곁방살이나 시녀의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들은 동화상(動畫像)이나 음향과 같은 예술에 도무지 미칠 수 없는 문학의 묘사나 표현력을 절감하고 기가 죽게 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문자와 동화상, 음향이 한데로 겹쳐지는 하이퍼텍스트( hypertext, 컴퓨터에서, 문자, 그래픽, 음성 및 영상을 서로 연결시켜 비순차적인 검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텍스트)의 형태로 옮겨가고자 한다. 최근에 나온 《중국조선족시화선집》이나 저의 제자 박아무개의 시집이 그러하다. 
하지만 언어예술, 즉 문학의 생명력과 존재의미가 소진되고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언어예술은 모든 예술형태의 기초로 되며 다른 예술형태에 비해 사회생활을 보다 폭넓게, 깊이 있게 묘사할 수 있다. 작가는 어쨌든 언어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언어가 주는 보다 큰 상상력과 그 여백, 심리묘사의 깊이, 비유와 은유, 상징과 아이러니, 패러독스와 패러디의 매력을 알고 그것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요즘 저는 한국 작가 김훈(金薰, 1948~ )의 《칼의 노래》를 읽고 언어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두고, 귀신도 울게 하는 그의 탁월한 문장력을 두고 전율할 정도로 놀랐다.
 
우리 문단의 경우, 나는 다매체시대 문학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우수한 작품을 속속 펴내고 있는 사례를 허련순과 김혁 두 소설가의 작품을 통해 보고자 한다. 물론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와 프랑스 작가 메리메(Prosper Mérimée, 1803 - 1870)의 작품과의 상호텍스트성에 관해서는 김관웅 교수가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는 허련순의 단편 《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와 김혁의 단편 《www.아픔.com》에 대해 잠간 살펴보기로 하겠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폭넓은 독서를 통해 고금중외의 명작을 체화(体化)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互文性)의 원리를 두 작가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작품은 없다는 말과 같이 작가들은 선행 텍스트를 차용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으며 독자 역시 텍스트를 읽을 때 다른 텍스트를 참조할 수 있다. 또한 작가들은 의식적으로 선행 텍스트를 참고할 때도 있고 이미 선행 텍스트를 체화했기에 저도 모르게 선행 텍스트를 차용하거나 변형시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성격패턴이나 인물관계, 모티프나 플롯을 교묘하게 차용해서 오늘의 생활을 담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쉽게 말하자면 약탕은 바꾸고 약은 바꾸지 않는 게 아니라 약탕은 바꾸지 않되 약은 바꾸는 수법을 구사한다. 허련순의 《푸주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는 한국의 어느 평론집의 제목을 빌려 쓰고 있고 소도구, 인물관계와 플롯은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를 묘하게 닮았습니다. 두 작품은 모두 귀중품인 금목걸이나 다이야반지를 손에 넣었다기 맹랑하게 잃어버리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배경이나 인물성격, 그리고 주제는 다릅니다. 모파상의 《목걸이》는 서민층의 허영심을 비판한 작품이라면 허련순의 《푸줏간에 걸린 고기와 말 걸기》는 물질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일부 조선족형제들의 탐욕과 그로 인한 비도덕성을 꼬집은 작품이라 하겠다. 
 
김혁의 단편 《“피에 누아르”의 춤》에서도 역시 모파상의 단편 《나의 삼촌 쥴》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만, 이 글의 주제를 진일보 논증하기 위해서는 한국작가 하근찬의 《수난이대》의 인물관계와 서사구조를 따다가 코리안 드림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은 조선족사회, 그 재활의 몸부림을 리얼하게 형상화한 김혁의 단편 《www. 아픔. com》을 례로 들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하근찬의 《수난이대》는 일제시대와 “6.25”전쟁의 아픔을 초극하고자 하는 서민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수난의 초극이라는 주제를 한 팔을 잃은 아버지와 한 다리를 잃은 아들의 해후를 통해 해학적인 필치로 다룬 명작이라 할 수 있다. 
 
김혁의 작품에 와서는 한 다리를 잃은 아버지가 한 다리가 불편한 안마방 마담으로 나오고 한 팔을 잃은 아들 역시 한 팔을 잃은 남주인공으로 변신한다. 둘 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크게 다쳐서 불구가 된 몸이다. 둘은 안마방에서 우연히 만났고 서로의 동병상련에서 몸을 섞는 사이까지 된다. 하근찬의 소설에서는 한 팔은 잃었지만 다리가 성한 애비가 한 다리를 잃은 아들을 엎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압권이라면 김혁의 소설에서는 깊은 밤 한 다리가 불편한 아낙과 팔 하나가 없는 남정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백미라 하겠다. 불행한 남주인공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이다. 
 
녀자가 깁스를 한 행복의 손을 들어 가슴에 얹어주었다.
어줍게 가슴을 만졌다.
건과(乾果)같은 녀자의 유두가 손에 들어왔다. 
본능에 넘쳐 그 가슴을 와락 옴켜잡았다. 그러다 팔에 통증을 느끼며 나지막이 신음을 뿜었다. 
녀자가 옷을 벗었고 의족도 벗었다.
행복은 짚이영에 튕긴 불씨를 치우듯 후딱 탁상등을 꺼버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두 사람은 안타깝게 허둥거렸다. 
어둠에 익숙하지 못해서가 아니였다. 
한 사람은 오른 팔, 한 사람은 왼 다리, 
상처입어 갈가리 해체된 몸뚱이를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몰라 헤맸다. 
두 사람은 지접(止接)이 잘못된 괴상한 과수의 가지처럼 왜곡된 형상으로 한데 얽혔다. 
그리고는 부서진 뼈가 잇기 듯, 찢겨진 피부가 아물어 붙듯 서로에게 들붙었다. 오늘만 있고 래일이 없는 곤충처럼, 단말마로 서로를 탐했다. 
등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로 얼룩진 녀자의 얼굴이 척척했다. 그 척척한 얼굴에 자기 얼굴을 붙여 대였다. 다른 하나의 눈물이 마르려는 그 눈물자국 우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얽혔다. 
서로는 서로의 눈물을 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녀자는 간호사 여러 명이 달라붙어 분쇄성골절을 입은 팔에 딱딱한 석고를 마구 댈 때처럼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처절한 장면의 설정과 절묘한 비유들, 시와 같은 짧은 호흡의 문장들, 코리안 드림의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서민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준 수작이라 하겠다. 1937년 독일 콘도르 비행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만신창이 된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의 참상을 그린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 《게르니카》를 방불케 하지 않는가!
요컨대 다매체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 빛을 충분히 이용할 때, 개체적인 체험을 토대로 하면서도 다매체를 통해 공금중외의 명작을 널리 읽고 여러 장르를 아우르면서 언어예술의 장점을 십분 살릴 때 우리 문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매체시대를 살아가는 비법은 다른 장르들을 기웃거리거나 멜로드라마나, 무협지, 추리소설과 같이 똑같은 인물과 줄거리를 조금씩 변용하여 이야기를 엮는 작품을 창작해 여러 매체를 선점하는 게 아니라 독창적인 개성과 인류보편성을 결합시킨 작품, 조선족사회는 물론 한국이나 중국 주류사회에서도 읽힐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길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문학의 거목 김학철 선생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소설은 약이 아니므로 억지로 먹일 수 없다고 했고 문학의 기본적인 바탕은 언어이므로 이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이에 대한 수양을 쌓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베실로 수를 놓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연변문학” 2019년 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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