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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천리 꽃이 지네
- 유정의 “은사” 류원무 선생님
김 혁
비보를 인터넷에서 접했다. 선생님이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꼭 찾아보려했는데 이렇게 빨리도 가시다니!
선생님의 문학생평을 정리한 글과 사진들을 나의 문학블로그에 올리고 타계소식을 신문 문화면에 톱기사로 내면서 점차 이 망지소조(忘知所措)의 소식이 기성사실임이 피부로 느껴졌다.
선생님은 내 소시적의 문학우상이였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당시 선생님의 아동소설 “우리 선생님”과 “장백의 소년”은 서점가를 강타한 베스트셀러였다. 그리고 정탐소설 “숲속의 우등불”과 번역서인 “쇼헤마의 이야기”등 동심을 아우른 많은 작품들은 꽤 유명한 어린 독서가였던 나의 여린 동공(洞空)에 그렇게 많은 것을 부어넣어주었다.
짤깍돈을 모아 그 책들을 사서는 내 책장의 현요한 자리에 꽂아놓고는 몇번이고 곱씹어 읽었었고 라디오방송국 소년아동시간에 나오는 련재방송도 빼놓치 않고 들었었다. 나에게는 그렇게 큰 글재주를 가진 선생님이 당시 보았던 련환화 “바다를 소동한 나타”속 삼두륙비(三头六臂)의 기인으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선생님을 맨처음 뵙게된것은 80년대 중기 “천지” 잡지사에서 조직한 문학강습반에서였다. 여러 작가들이 나와서 창작담을 이야기했지만 나의 시선은 온통 선생님에게로 몰부어져 있었다. 중간휴식시간에 나는 쭈볏거리며 다가가 선생님과 사진을 찍자고 청구를 들었다. 숫기가 적은 애송이 문학도가 어떻게 유명한 작가와 그렇게 도담한 청을 들었던지 모를일이다. 선생님은 흔쾌히 대답해 주었고 쏘파에 나란히 앉아 사진을 남겼다.
그런데 다급한 마음으로 사진관에 달려가 사진을 뽑아보니 사진속의 내가 눈을 감고있는 것이 아닌가! 원체 눈을 슴벅거리는 습관이 있는 나였다.
하지만 그 사진을 나는 지금까지도 앨범에 고히 간직해 두고있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유명 작가와 남긴 사진이였으니깐. 그후 문학행사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꺼내며 다시 사진을 남기자고 여러 번 간청했었다.
94년께로 기억된다. 예술극장에서 무극 “춘향전”을 관람하고 있는데 막간휴식시간에 누군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류원무선생님이였다. 선생님은 조용하지만 조금은 근엄한 모습으로 내게 의문을 쳐들었다. 근간에 발표한 나의 아동력사소설이 도작이라는 말이 떠 도는데 정말로 본인이 쓴 것이 맞냐?고 물으셨다. 나는 “만약에 내 작품이 아니면 제 머리를 내놓겠습니다. 하고 격해지며 말했다. 선생님이 웃으셨다. “대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하필이면 다른것도 아닌 머리를 내걸어서야 되겠나? 난 혁이를 믿네.”
그후로 나는 련속 중편아동력사소설 “신라의 검”, “혼불”을 발표했고 도작이라 물의를 빚었던 그 소설 “거북구슬”은 연변인민출판사 “별나라” 아동문학상 1등상을 수상했다.
그후 문학행사에서 만난 선생님은 유난히 기뻐하셨다. “아동문학을 홀시하지 않고 성인문학과 병행하련다니 참 기쁘네. 사실 똘스또이 같은 대문호도 아동문학을 아주 돋보며 창작했다네.” 하면서 선생님은 근작인 장편동화 “코대황제와 울보황후”를 특별히 싸인해 선물해주셨다. 그때 아직 여린 나에게 직접 소설가라는 호칭을 붙여 싸인해 준 그 동화집을 나는 그렇듯 황공하게 무겁게 받아들였었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을 나에게 보내주셨다. 지어 한국에서 찍은 부수가 아주 적은 책도 특별히 나에게는 정히 싸인하여 보내주셨다. 새 책이 출간될때마다 잊지않는 그 모습에서 후배 소설가에 대한 다정한 기대를 나는 깊이 체념할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필봉이 시나브로 무르익고 있을 때, 나의 신상에 큰 변고가 일었다. 인위의 “번개”를 맞고 나는 창작의 전당에서 일조일석에 한지로 떨려나고말았다. 내 삶의 전체를 송두리째 흔드는 변고에 나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나의 몸을 향해 란타하는 부조리의 우박을 우산도 미처 갖추지 못한채 맞기만 하고있었다.
참말로 유감스럽게 가까이 다가와 우산을 건네는 사람도 몇이 없었다. 해빛 찬란하던 그제날 어깨겯고 양광대도를 함께 달리자 약속하던 소위 지인들조차 이 순간만은 어데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때 눈빛을 빛내며 온몸을 던져 이루었던 모든것들이 결국은 허접쓰레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때는 꿈꿀수 있어 행복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뤄내야 할 꿈도 상실해 버리고 무정과 소외의 높은 벽만이 굳건히 버티고 있을뿐이였다. 질량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력감이 온몸을 덮쳐와 나는 세상과 담을 쌓은채 몇해고 서재에만 지친 신심을 감추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내 벙어리가 돼있던 우리집 전화통이 문뜩 울렸다.
“혁이요? 나 류선생일세. 해빛 쪼이려 한번 나오지그래.”
연변일보사 뒤골목에 있는 “한라산” 숯불고기집에서 나는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소주를 하시는 선생님이였지만 나의 맥주에 대한 기호를 알고 맥주를 많이 올렸다. 그리고 마음껏 마시라고 극진히 권했다. 말없이 그저 맥주잔을 벌컥벌컥 기울이며 선생님이 구워주시는 고기를 집어먹던 나는 홀연 선생님이 전혀 드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발이 온전치 않아 그러네. 혼자라도 많이 들게나.” 선생님은 금방 틀이를 다시 맞추셨지만 미처 고정하기전에 급박하게 나를 만나신것이였다. 그날 선생님이 하신 한마디 말이 강하게 나의 뇌리를 때렸다.
“기죽지 말고 아프지 말고 틀이를 낄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봐. 그리고 악착같이 글을 써.”
선생님과 같은 유정한 선배님들의 괘념의 눈길속에 나는 몇해만에 웅크려있던 서재에서 나왔다. 나를 저버린 문단일망정 창작의 끈을 놓지않았고 또 생계를 위해 큰 사업건에 희망을 가지고 투신했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신문사를 차렸다. 나는 언감 조선족에서 처음으로 16면 모두가 동판지 칼라 타블로이드판으로된 호화롭고 내용이 알찬 주간신문을 만들려 시도했다.
창업의 길은 문자그대로 극난의 길이였다. 여태껏 책상물림으로 “두부값 콩값도 변변히 계산할줄 모르던” 내가 편집뿐아니라 경영까지 맡아해야 했다. 종이질과 인쇄값이 엄청 높은 칼라 동판지라 한달 인쇄비만도 만여원을 넘겼고 게다가 네, 댓명의 직원의 로임까지 대려니 그야말로 일보가 백보맞잡이로 힘에 부쳤다. 원체 청빈한 문인에 근년에는 수입 한푼 없이 못나게도 안해의 박봉에 기대여 사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륙지오리 바다 건느기”였다. 애된 편집들을 휘동하여 힘들게 신문을 편집하는 한편 출판자금을 얻으려 낯에 철판을 깔고 밤낮으로 뛰였다.
류원무 선생님을 모시고
첫 신문이 나온지 며칠 안되여 뜻밖에도 선생님이 세기호텔에 림시로 차린 편집부로 찾아오셨다. 시중에 발행된 신문을 보고 찾아오신것이였다. 선생님은 기쁘다기보다 걱정기 어린 얼굴이였다.
“해낼수 있겠나? 우리 같은 글장이들이 경영에 붙을려면 쉽지않을건데…”
선생님은 걱정을 련발하시다가 한숨 한번 짓고 돌아가셨다.
그후로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번씩 꼭꼭 신문사로 찾아오시곤했다. 내가 자택에 까지 신문을 부쳐보내려니 운동삼아 와서 가져가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신문 몇장씩 드릴라치면 굳이 한장만 뽑아들었다.. 매 한장이 한잎의 돈이니 아껴야 한다고 말하셨다.
알찬 내용의 신문을 만들려 꿈꾸었던 나는 선생님에게 하나의 간청을 들었다. 신문의 련재란에 선생님께서 금방 출간하신 “연변취담”을 련재하고 싶었던것이다. 하지만 신문사 여건상의 어려움으로 원고비는 드릴수 없다고 모기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흔쾌히 대답하셨다.
“그럲잖아도 어떻게 혁이를 도울가 생각이 많았네. 이렇게라도 도움을 줄수 있다면 참 기쁘이.”
그렇게 나는 선생님의 주옥 같은 글을 원고비도 드리지 못한채 신문에 그냥 련재했고 련재를 본 독자들의 반응은 사뭇 좋았다.
선생님은 월요일마다 찾아오셔 새로 나온 신문을 받고 나의 어깨를 힘있게 두드려주셨고, 때로 내가 자금을 미처 마련하지 못해 신문이 나가지 못한 날에는 퍽 걱정어린 모습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그러다 생계를 위해 오욕을 진채 단말마로 뛰고있는 나의 신상에 또 한번의 “번개”가 내려졌다. 글외에는 글밖에 모르고 대인관계에는 백치에 가까웠던 나는 또 한번 사람의 덫에 치여 본의아니게 신문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직원들의 로임도 바로 주지 못해 편집실에서 쓰던 컴퓨터와 같은 계기들로 대신했고 신문의 명맥을 이으려 리자돈을 겁모르고 꾸어 들이댔던 나는 문인의 수입으로서는 도저히 갚을수 없는 천문수자같은 빚짐에 깔려야 했다.
한두명도 아닌 빚쟁이들은 낌새를 알아채고 우리집에 몰려 들기 시작했다. 빚군들은 한밤중에도 뛰여들어 나보다 퍽 어린 녀자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말마디를 골라 극언을 퍼부었고 또 어떤이들은 나의 책밖에 없는 살림을 둘러보더니 조소를 흘리며 서재에 불을 달겠다고 위협 하기도 했다.
나는 빚쟁이들을 피해 지어 친지들과의 일체 련락도 끊은채 북대의 자그만 세방집에 근 여덟달 동안 피신해 지내는수밖에 없었다.
그날, 급한 일로 어쩌다 핸드폰을 열었는데 눈에 익은 번호가 현시되여있었다.
“어디서 어찌 지내냐? 얼굴 한번 보자.” 선생님이셨다. 핸드폰이 먹통이 된데서 십여번은 전화를 했다고 하셨다.
다시 또 그 “한라산” 숯불고기 집, 나는 맥주를 마셨고 선생님은 소주를 마셨다. 선생님은 가난 때문에 학업도 미처 마치지 못했던 서러운 과거를 이야기 해주셨고 역시 엄청 난 빚을 지고 수년간 오로지 그 빚을 갚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힘들었던 시간을 이야기해 주셨다.
어린 후배에 대한 걱정에 안쓰러워하시며 위무(慰撫)의 이야기를 끊없이 해주셨던 선생님, 하지만 나는 그동안 선생님이 병환으로 사모님을 잃으신것도 모르고 그저 나의 설음만 읊조렸을뿐이였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만난건 내가 “윤정석 아동문학상”을 수상한 날이였다. “다시 창작에 돌아온 모습이 보기에 좋네. 아동문학 다시 시작하겠다니 반갑고”. 선생님은 남들처럼 오랜만에 보는 나를 향해 요란은 떨지 않았고 그저 또한번 조용히 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때 선생님의 병은 이미 골수에 깊어 있었고 그것이 내가 선생님을 본 마지막시간이였다…
힘들었던 한해가 또 저물었다. 세모(岁暮)에 선생님을 보내신 그 슬픔이 많은 힘든 사연중의 큰 리유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명함앞에 고자가 붙여져 나가는 그 어제라는 과거형의 시간이 너무나 슬프다. 그리고 많은 것을 돌이켜보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것없이 빈틈없는 시스템속에서 관리되고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세련된 삶, 근대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인 배려와 반응은 오늘의 절주빠른 사회 시스템에서 완벽하게 쇠외되고 지어 봉쇄되여있다. 도처에서 제도화되거나 상품화되여있는 “정”, 게다가 부담없이 드러내는 몰인정을 우리는 목격하고있다. 이미 이 체제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정이란 오히려 촌스러운것으로 비칠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촌스러운 끈끈한 정이 아직 살아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이라는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학도 사람의 일이라 치렬한 문학정신의 저변엔 탄탄한 인성이 깔려야 하는것, 정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좋은 글을 내놓을수 있을가? 진정 바람직한 문단의 풍기와 성장은 이러한 “정”으로 점철된 배려와 련대(连带), 선의의 협력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새삼 해본다. 독선이나 타락의 샛길로 빠지지 않고 문인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와 규률에 적응하도록 대선배님은 몸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사실 나는 선생님과 그렇게 자주 만난 편은 아니였고 경륜과 창작리념도 많이 달랐다. 하지만 선배와 후배로서 서로의 배려하고 존경어린 마음이 이런 에피소드를 낳은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도 선생님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중견의 작가로 성장하고있다. 선생님과 내가 묵묵히 나누고 드러내고자한 것은 문학에 대한 드팀없는 애정같은것이라든가, 실추하고있는 문단에 대한 걱정같은것이라든가 , 진정 올바른 삶에 대한 질의와 행동같은것에 모아진다고 생각하고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보기를 저어한 만큼 더 잔인한 삶이 숨겨져 있다. 그렇다고, 내 삶이 힘들다고 다른 이에게서 눈 돌려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불행을 맞이하는 태도와 남의 불행에 면려의 눈동자를 돌릴줄 아는 태도를 나는 선생님에게서 배웠다. 불행을 피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자세를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배워주었다. 나에게 “훌륭한 배사공은 거친 파도가 만드니 그 파도를 두려워하지도 피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고 “작은 작가에 그치는 끼와 열정이 아니라 지성인다운 기와 에네르기가 필요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눈물을 닦고 한숨을 거두고 내 안팎을 정리하고 덜어내고 채우고 되새기는 동안, 불행을 견뎌낼 수 있는 내성(耐性)이 생겨나고 해결사처럼 다가온 시간은 많은것들을 해결해주고있다.
다시 추운 겨울이다. 나에게는 마치 누군가 부당하게 반은 툭 잘라먹은것처럼 해가 짧아진 요즘 시간이요, 계절이다. 나는 작렬하는 빛이 무척이나 그리운 응달속에 웅크린 작은 작가이다. 그만큼 선생님이 계시지않은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워보인다.
하지만 불행과 추위를 반복하다보면 의외로 주변이 선명해진다. 선생님이 남긴 작품을 통해, 내 생애 가장 곤고했던 시절 이어졌던 선생님과의 인연을 통해 나의 행위를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볼수 있어 이번 겨울이며 이제 다가올 무수한 겨울의 추위는 무섭지 않을 모양이다.
근년래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우리의 스승들이 하나 둘 떠나시고 있다. 그들을 묵묵히 배웅하고 있노라니 진짜배기로 마치 혈육과 헤여지듯 마음이 고적해진다. 문단 서렬로는 아직도 한참 후배이나 인생 선배들이 많아 그분들의 떠나는 모습을 다 지켜보아야 할것 같은 마음에 우울하던 때도 있었다.
누군가 떠나는 뒤모습을 바라보다가 언젠가 자기도 떠나야 하는 세상살이… 어쩌면 우리들의 삶 전체가 그런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면 누군가의 뒤모습을 지켜보는것도 사람이 할수있는 중요한 일중의 하나이리라. 어떻게 보내고 또 어떻게 남겨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바이다
이로서 실제 교정에서의 수업절차를 가진 선생이 아니지만 류원무선생님과 나는 스승과 제자의 연(緣)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오호 애재(呜呼哀哉), “우리 선생님!”
"연변문학" 200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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