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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속죄
김혁 독서漫筆
소설 "속죄"의 중국판 표지
이언 매큐언(伊恩 .麦克尤恩)의 “속죄(赎罪)” (상해역문출판사. 上海译文出版社 출간)를 읽다.
이 소설은 신진소설가 리진화씨가 추천하고 보내주어 읽었다. 사실 이 소설 역시 영화로 이미 보았었다. (근년래 출판계와 영화시장을 살펴보면 문자로 나온 베스트셀러는 거개가 영상으로 각색된다. 단 문자에만 머물지 않고 영상매체로 뻗어가며 상호보완하고있는 요즘 문학의 발달이요 풍토라 할수 있다.)
리진화씨와 대만작가 기미(几米)에 대해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하다가 연변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기미의 작품들을 리진화씨가 소주에서 보내주었는데 그 책묶음속에 “속죄”도 끼여있었다. 후배의 추천작이라 자못 진지하게 읽었다. 영화못지않게 감수는 여전했다.
(나에게는 명작이나 유명세를 탄 작품이면 꼭 소설과 영화DVD를 함께 소장하는 기호가 있다. 원작과 그를 개편한 영화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고본다.
영화의 경우 장점으로는 섬세한 재구성을 들수 있다. 이를테면 고대가 배경인 경우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한 거리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복장, 소품 등까지 상상하기가 힘들다. 묘사를 통해 느낌을 받을지 모르지만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곧바로 립체감있게 보여준다. 또 책을 읽으면서 감명을 받았던 명대화들이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생생하게 살아난다. 분위기에 맞는 음악 또한 작품에 몰입하게 준다.
영상작품은 동시에 단점도 안고있다. 수준미달의 감독이 자기의도대로 제멋대로 해석할수도 있고 그러한 오류는 원작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또 주인공의 모습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상상하기 마련인데 그 상상을 영화가 앗아간다. 글을 읽으면서 독자마다 상상한 한 것은 확실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영화는 하나의 형상으로 되풀이해서 보여준다.
이렇게 우렬을 갖고있지만 원작 소설이나 그것을 개편한 영화를 모두 갖추고있다는건 열독자로서는 나름 행복한 일이 아닐수 없다.)
영화 포스터
1935년의 영국. 소설가를 꿈꾸는13살 소녀가 있었다. 감수성 풍부한 소녀 브라이오니. 그의 언니인 세실리아와 가정부의 아들인 로비는 사랑에 빠지고 브라이오니는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곁에서 지켜본다. 그러나 두사람의 사랑이 불편했던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공상과 오해를 부풀려 로비를 강간범으로 지목한다.
로비는 루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되며 이어 곧 프랑스전선으로 끌려간다. 로비를 잊지못한 세실리아는 집을 뛰쳐나와 간호사가 되여 역시 전장으로 찾아간다.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에 대한 갈망으로 끔찍한 전장에서 두사람은 재회를 꿈꾸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소설은 여느 눅거리 애정소설처럼 애틋하고 극적인 사랑을 다루고 끝을 맺는것이 아니다.
소설에서 후반부는 독자에게있어서 가히 충격적이다. 동생 브라이오니의 실수로 가혹한 운명에 놓였던 언니 세실리아와 련인 로비는 재회하여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생활해 나간다. 하지만 독자들이 행복에 겨워 아름다운 결말에 심취되여있을 때 작가는 그 환상을 사정없이 부수어버린다. 결국 이 아름다운 풍경은 로년이 된 소설속 작가 브라이오니의 작가적인 환상이였을뿐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도 못한채 이미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던것이다.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질투심때문에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인 된 세실리아와 로비를 위해 그리고 독자들을 위해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어 주었다. 소설가인 그가 할수있는 일은 문학으로 속죄하고 참회하는 길 뿐이였다. 현실속에서는 일어날수 없는 일들을 아름다운 상상으로 풀어내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려 몸부림한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많은 독자들로하여금 탄식을 내뿜으며 무릎을 치게 만든다. 소설은 이렇게 브라이오니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후 진중하게 속죄를 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범한 인간이 겪는 고통을 그리고 있다.
작가 매큐언은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집단 무의식”에 관한 주제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해 주목을 받다가1998년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했고 이번 작품 “속죄”로 명실공히 영국 최고의 작가 반렬에 올랐다.
저자 매큐언
소설을 읽고나서 은연중 우리의 문화대혁명제재의 작품들에 대해 련상해 보았다. 우리의 작품은 모두가 피해자의 시점에서 공소문처럼 되여있고 가해자의 시점은 거의 없다. 여기서 우리 작가들의 창작에서의 발상의 문제가 제기된다. 해외작가들에게 문화대혁명과 쌍둥이로 비견되는 나치스의 폭행을 다룬 작품들도 많다. 피해자로서의 아픔을 친히 다룬 작품도 많았지만 가해자들의 반성을 보여준 작품도 적지않았다. 그 일례로 노벨문학상 수상작품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를 들수있다. 귄터 그라스는 나치의 친위대가 되였던 광채롭지 못한 리력을 가진 사람이였다. 전쟁과 파시즘을 목격하며 야만의 력사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랭정한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 반성의 작품을 써냈고 그로서 문명을 세상에 알렸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으로의 집필이 주는 생신감과 그로인한 문체의 다양성이 이 책을 읽으며 역시 소설만드는 사람으로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기도 했다.
완전무결한 신이 아닐진대 인간이라면 누구나 대동소이하게 죄라는것을 짓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중요한것은 그 죄값을 치르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있다. 바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하여 반성하고 그에 걸맞는 방법으로 죄값을 달가이 치루어 내는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량심의 궤적을 따라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마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은 오늘의 사회요, 오늘의 인간들이기에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너무나 깊고 필요할지도 모른다.
동명 영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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