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
육필, 련꽃무늬 밥상우를 달리다
- 대하소설 “해란강”의 저자 리태수선생을 만나
김 혁
지난해의 이 봄날, 연길시 도심에서 위치한 시대광장에서 제2회 독서절활동이 성황리에 펼쳐지고있었다. 그때 광장의 가녁에 설치된 도서코너에서 나의 눈길을 대번에 사로잡는 책이 있었다. “해란강”! 정다운 고향의 강 이름을 딴 책의 제명이 마음에 들었고 그 저자가 다름아닌 고향의 문학스승 리태수선생의 작품이라는데서 좋았고 무엇보다도 대하소설이라는 부피가 주는 충격에 사로잡혀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나는 선생님께서 몸소 싸인해 보내주신 “해란강”의 전(前) 4권을 무겁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봄양기가 꿈틀거리는 이 봄날 다녀온지 퍽 오래되는 고향으로, 문학스승 리태수선생님이 계시는 룡정으로 나는 달려 갔다.
룡정 안민소학교부근에 위치한 선생님의 집에 까지 도착했을 때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밖에 나와 기다리고계셨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선생님의 손을 꼭잡고 유명작가의 이름에 어덴가 걸맞지 않을 낡은 건물 낮은 층수의 선생님의 집에 들어섰다. 문학도시절 대중없이 찾아가도 언제나 특유의 엎딘 자세로 글을 쓰시던 선생의 모습이 순간 뇌리에 떠올랐다.
인테리어가 퍽 오래된 낡은 집, 하지만 집안 가득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书卷气)”는 배여 있었다. 서재에 들어서자 선생이 밥상을 펴놓았고 차탁대신 밥상에 쏘파대신 맨땅에 우리는 마주 앉았다. 역시 퍽 오래된 밥상,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져있는 두리넓적한 밥상이였다. 하지만 련꽃무늬는 아직도 남아 서기롭게 피여있었다. 그 밥상이 선생님의 창작전초(前哨)라고 했다.
꿈많은 문학도시절이였던 80년대 중기, 나는 룡정의 문학도들과 어우러져 문학동아리인 “희망봉”협회를 만들었고 리태수선생님을 비롯하여 김재권, 오흥진 등 당시의 중견작가들이 흔쾌히 우리의 고문을 맡아주셨다. 선생님의 사모님과 나의 어머니가 한 학교동료라는 “우세”를 빌어 나는 시시때때 선생님의 집으로 뛰여들곤했다. 난삽하고 미숙한 작품임에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정독했고 선생님은 빙그레 미소를 띈채 그 긴 작품들을 마지막까지 들어주셨고 세세하게 수개평을 달아주시곤했다. 나의 처녀작 “피그미의 후손”이 발표되자 기뻐마지 않으며 우리 집까지 친히 찾아오셔 축하의 술잔을 들어주었다.
그후 선생님을 위시로하여 룡정의 작가들이 “보름회”라는 문학동호회를 창설했다. 기성작가들과 문학애호가 20여명으로 구성된 동호회는 보름에 한번씩 작품합평회를 가졌다. 그때 이미 연길의 “길림신문사”에 전근해 있었지만 나는 보름에 한번씩 룡정으로 달려가 작품합평회 그 열기의 현장에 뛰여들었다. 그때의 그 열렬하고 진지했던 문학분위기는 열혈문학도였던 나에게 아직도 화인(火印)처럼 남아있다. 그런 인연의 대스승님이였기에 선생님의 대하소설의 출산을 두고 나의 기쁨은 그 누구보다 진실했고 크기만 했다.
어제에 대한 회포가 잠간 오간뒤 거두절미하고 문학에 대한 화제가 밥상우에 진담으로 굴렀다. 그 련꽃무늬의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나는 선생님의 생애와 작품을 더듬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은 정밀한 기억력으로 지난 시간들을 반추해 냈다.
리태수(李泰洙)선생은 1936년 10월 길림성 연길현 평안구 유신촌에서 아버지 리종식과 어머니 김숙자사이에서 항렬 셋째로 태여났다. 그래서 문필활동을 시작한후 때로 필명을 리삼(李三)이라 짓기도 했다.
룡정에서 학업을 마치고 1956년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했다. 원체 선생의 꿈은 흰 가운을 걸친 의사였다. 광복이 나던 무렵, 동생이 당시 괴질이였던 장질부사로 죽었고 동생의 주검을 지켜보면서 꼭 세상질병을 치유할수 있는 의사로 되여야겠다는 생각을 눈물과 함께 머금었었다. 의과대학 지망생이였지만 가정 여건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고 미련은 남아 문화대혁명기간 맨발의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지금도 어중간한 두통, 설사쯤은 침 몇대로 고칠수 있다는 선생의 서가에 얹혀있는 빛나는 침통이 보였다.
무선전병이 되여 강원도 이천에으로 종군한 그는 손풍금도 잘치고 시랑송도 곧잘하는 매력덩어리 젊은 군인이였다. 기온이 찬 강원도에서 눈속에 피여있는 진달래를 보고 부푸는 애련과 감수를 머금었고 감흥을 못이겨 조기천의 시를 소리높여 읊기도 했다.
1959년에 복원, 처녀시 “복원군인의 노래”를 《연변문학》 3월호에 발표했다. 그후로 련줄로《연변일보》에 등지에 시 “초상화”, “새해에 드리는 세배”등 여러수를 발표했다. 화학공장에 취직하여서도 넘치는 끼를 주체못하고 업여연출대를 휘동하고 다녔고 가사도 쓰고 연출도 맡고 손풍금 연주도 했다.
1971년 연길현문화관으로 전근, 관원을 거쳐 군중문화보도조 조장을 맡았다. 당시 문화관에서는 매년 200일 하향이라는 규제가 있었는데 그렇게 오랜 시일 깊은 산골에서 순박한 농군들과 함께 하면서 많은 작품소재를 얻었다. 시창작외에도 연극창작에도 기량을 보여 대창극 “꽃피는 양돈장”, 촌극 “쓸데없는 경쟁” 등을 써냈고 주과외연극콩쿠르 창작1등상을 받기도 했다.
소설은 1974년 10명의 합집으로 된 총서에 단편 “우두봉의 매” 를 발표하면서 시작했다.
한편 아동문필회에 다니면서 아동문학쟝르에도 흥미를 보여 1982년 “세계동물운동회” 라는 동화집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1984년 단행본 “체포령이 내린 ‘강도’”를 출판, 당시 십분 류행되였던 반특(反 特)제재인 작품은 동북3성 조선문우수도서 3등상, 전국 우수도서 2등상을수상했다.
1986년에는 5막6장으로 된 대형가극 “기생 봉선아씨”를 창작, 룡정현예술단의 공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20년대 룡정에서 발생한 15만원 탈취사건 등 반일사건을 모티브로하여 박진감있는 스토리로 엮어진 가극은 당시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다쟝르를 넘나드는 선생님의 행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88년 텔레비죤소품 “홈”(합저)을 창작, 전국콩쿠르에서 “금우상” 1등상 수상핶고1988년 가사 “산향길”와 “들놀이 가자 꽃놀이 가자”로 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수상, 1989년 국경 40주년 전국과외문예콩쿠르에서 “특등상”을 수상했다. 복격적인 소설창작으로 단편소설 “달동네” 등 80여편을 발표했고 텔레비죤극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깍쟁이량반”등을 내놓았으며 “진달래꽃동산”, “산간의 마방울소리” 등 가사를 150여수 발표했다. 그중 “사회주의조국을 노래부르자”, “어머니 당이여 고맙습니다.”, “고향산”, “따사로운 품” “고임돌” 등 작품들은 중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여 지금까지 읽혀지고있다.
선생님이 펴낸 저서들
여러가지 쟝르와 문체의 집필에 대해 선생은 장기간 문화관 일군으로 지낸 직업적 특수성에서 인기된것이지만 또한 작가라면 어느한 쟝르나 문체에 얽동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시창작을 하면서 형상사유를 제고할수 있었고 연극에서는 대화를 정제하는 법을 배웠으며 동화쓰기에서는 작가의 심리를 정화할수 있었다”고 선생은 정리해 낸다. 그리고 매쟝르에는 정도 다르게 자신이 경험한 삶의 편린(片鱗)들이 슴배여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쟝르에 대한 다양한 수용과 탐구는1993년 《이야기천지》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리태수선생이 1임 주필을 담당한 통속문학지 “이야기 천지”는 내부간행물에 불황의 출판풍토에도 불구하고 발행부수 1만5천부라는 놀라운 “전적(前績)”을 자랑했고 독자들의 다양한 수요에 걸맞는 출판모식의 실험에서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선인들이 내놓은 “량춘백설” “하리바인”의 도리는 오늘날에도 적용되는바 창작과 출판에서 과감하게 시장수요에 맞추어야 한다고 선생님은 력설한다. 하여 신문의 폐간을 가슴아파 하며 무순에 까지 찾아가 타지방 신문과의 제휴방안을 내놓으며 신문발행번호를 얻으려 로심초사했던 그였다.
“문학은 한 민족의 얼굴이다. 민족의 세태, 의식주, 례의범절, 풍속, 종교신앙 등 거의 모든 부분들을 문학으로 기록할수 있는데 문학을 보면 그 민족이 알린다.”고 말하고있는 선생님은 그만큼 여러 쟝르에 민족적 소재만을 끈끈히 담아온 창작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96년 정년퇴직했지만 만년에도 여전히 필경(筆耕)에 주력하여 다산작가로서의 식지않은 정열을 보여주었다. 단행본 “춘삼월”, 중편소설집 “사랑은 S“를 펴내였고 2001년 《연변문학》에 장편소설 “재박골의 새 이야기”를 련재했다.
고희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도(古都) 룡정에만 붙박혀 고향의 문화지킴이로 전력해온 선생님은 단지 개인적인 창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룡정문화발전추진회, 3.13기념사업위원회 등 단체의 요직을 맡고 우리것을 지키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1992년 선생님은 조선족민속풍토를 다각적으로 보여준 다큐멘터리 “중국조선족민속”을 집필, 책은 국가관광국출판사에서 화책으로 출판되였고 한국 서울프라이즈(KBS)해외부문 1등상 수상했다.
수십년간 중국작가협회, 연변작가협회, 연변희곡가협회에서 활약하며 1급작가라는 직함과 수식도 갔고 있지만 선생님은 복잡한 문단의 패거리에 끼거나 손쉽게 문명(文名)을 팔려하지 않았다. 그저 나서 뼈를 굵혀온 고향을 뜨지않고 량산의 글농사로만 자신의 창작생애를 집계했을뿐이였다. 그 올곧은 외줄다리기의 결과가 조선족문단 최초의 대하소설을 출산하게 만들었다.
요즘 문단의 큰 이슈로 되고있는 대하소설 “해란강”은 룡정 해란벌의 “농민영웅” 김시룡을 원형으로 파란만장한 호조합작사시기로부터 개혁개방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장장 60여년의 조선족 농민들의 력사와 운명, 그리고 해란강지역의 독특한 력사와 풍속, 인정과 세태를 거대한 리얼리즘의 사시적인 기법으로 대하소설이라는 큰 그릇에 담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일찍 동북의 넓은 광야를 개척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가렬한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피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건국후 호조조, 합작화, 인민공사화 운동가운데서도 전국에 이름을 날린 김시룡과 같은 ‘농민영웅’을 배출했다. 이러한 우리의 력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필을 들었고 “애초에 거창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 한글자 두글자 쓰다보니 그 파란많은 력사의 경륜을 원고지 부피가 꽤 두텁게 새기게 되였다.” 고 선생님은 집필동기에 대해 겸손하게 피력했다.
어찌보면 선생님의 평생의 창작리념과 경험을 집대성한 “해란강”은 1996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꼭 10년만인2007년에 마무리되였다. 오랜시간 문화파종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있는 문화관에서 근무하면서 기층에 자주 내려가고 밑바닥 삶과 호흡을 같이 했던 과정에 피부로 절감해왔던 대중들의 생존상황이 그에게 그들의 모습을 원고지에 담아야할 충동을 느끼게 했던것이다.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20여번이나 받은 “농민영웅” 김시룡, 빈농협회 회장이였던 삼촌의 경력과 구술, 당안관에 널린 방대한 자료의 수집 등 번쇄한 로동속에 자신의 주변에 떠다니는 서사의 무수한 조각들을 조합하여 “해란강”이라는 큰 곬의 창창한 흐름에 에워넣었던것이다.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속에 “해란강”은 이미 4권까지 출간되여 서점가에 올려졌고 무난하면 명년까지 모두 출간될수 있다고 한다.
“’해란강’ 은 작자가 20여년의 신근한 필경을 통해 우리 농민의 60여년의 력사를 반영하려는 전무유일의 장엄하고 힘겨운 시도인바 그 치렬한 작가정신과 민족적사명감을 충분히 긍정함과 아울러 그간의 로고에 우선 경의를 드린다”고 비평가들은 평한다. 한면 어떤 부분에서는 사관(史观)이 몽롱하여 단순한 흑백론리로 흐르고 가치판단의 문제점을 로정(露呈)한 아쉬움에 대해서도 제기되면서 작가가 조선족농민의 생활을 독창적으로 파악하고 특색있게 형상화하여 우수한 대서사시적 화폭을 창출할것을 문단과 독자들은 기대하고있다. 이제 작품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위해 또한번 볼펜을 잔뜩 거머쥐어야할것 같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늘 버리지않고 있는 창작태세에 대한 새로운 긴장감의 힘이 선생님과 작품을 또한번 거듭나게 할것 같다.
요즘 빨리 쉽게 써서 재빨리 인정받으려는 작가들이 스스로 호흡이 짧아짐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독자들이 짧고 쉬운 작품만을 요구하는 스낵식 풍토 때문인지 우리 문단에서 장편소설이 많이 나오지 못하고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문단밖에서는 중국과 서구와 일본의 장편소설이 홍수를 이룬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비춰 주는 거울의 역할을 하거나 한 미족의 시대정신 혹은 그 위대한 철학이나 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호흡이 긴 장편소설은 필요하다. 고금중외 명작가의 명작들은 긴 호흡으로 사회상황을 인간조건과 련결시켜 큰 성공을 거두지 않았던가! 조선족 공동체 삶의 문학적형상화는 우리 문학의 기본사명의 하나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큰 진통을 겪고있는 시점에서는 더 필요하며 그것이 대하소설과 같은 큰 편폭으로 루어질 때 더 값있는것일것이다. 때문에 이번 대하소설의 출산은 그 선보임이라는 선각적인 행위 하나만으로도 가지는 의의가 크다고 나는 선배에 대한 편파적인 존경만이 아닌 긍정의 분석을 해보았다.
선생님의 서재에는 미국에 류학 간 딸이 마련해준 컴퓨터가 있었지만 선생님은 컴퓨터를 쓰지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어마어마한 분량의 대하소설이 모두 육필로 나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해란강”에는 등장인물이 165명 실제 실존한 력사인물만도 20여명으로 그들이 경과한 60년의 력사를 380만자의 편폭으로 새기고있다. 선생님이 뒤이어 내놓은 “해란강”의 원고들을 보고 부지중 감탄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마분지로 겉가위를 댄 원고지 묶음이 저그만치 15개, 원고지의 모서리는 모두다 닳아있었다. 작품에 투여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원고지 묶음이였다. 250자원고지에 써내려간 원고뭉치를 쌓으니 족히 1메터 반은 되였다.
원고지의 필적(筆跡) 또한 선생님처럼 단아했다. 단정한 기운의 글씨가 원고지 칸을 가득가득 채워 원고지가 아주 묵직해 보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여태 원주필로 원고를 집필한다고했다. 그러면 연필을 깎거나 잉크를 채우는 등 번거로움을 줄일수 있다는것이다.
육필로 15권, 380여만자를 써내려가면서 손목에 무리가 와서 근 한달간이나 치료를 받으며 집필을 중단했던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손목은 오랜 글쓰기의 고역에 엄중하게 변형되여있었다. 원체 엎디여 글쓰는 습관이 있었는데 가슴에 통증이 와서 이제는 밥상앞에 마주 앉아 쓴다고 했다. 옻칠이 벗겨진 련꽃무늬의 밥상, 그 밥상이 선생님의 10여년 로고의 견증자가 된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컴퓨터와 같은 기계문명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기피자는 아니였다. 철자 익히는 애들처럼 컴퓨터 지법을 외손녀에게서 배웠는데 이제 몸이 따라주지 않아 타이핑 속도가 늦다고했다. 키보드를 두드려 온 하루 5,6천자를 쓰지못하는데 육필로는 8천자는 거뜬히 써내려갈수 있다며 선생님은 무가내의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아예 몸에 배인 육필사용을 고수한다고 한다.
우리문단에서 6, 70대 이상 작가들 가운데서 컴퓨터를 활용, 집필에서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분들도 적지않다. 50대도 대부분도 꽤 능숙하게 컴을 사용하고있고 40대는 모두가 쓰지 않고 친다. 그 아래 세대는 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키보드우를 날아다닌다.
따라서 속도가 우선인 이 시대, 글씨 쓰기가 메모나 서명의 범주로만 남아 있는 이 디지털 무한 복제시대에 필자의 정성과 령혼이 담겨 있는 육필(肉筆) 원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선생님의 정감이 묻어나는 손글씨가 새겨져있는 원고지들을 지켜보며 “나는 온몸으로 글을 쓴다”고 선언했던 어느 유명작가의 경구(警句)를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작가의 본령이라 할수있는 올바른 작가정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각박한 표현 같지만 요즘들어 치렬한 작가태도와 작가의식을 지닌 작가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창작 외의 일에 너무 관심이 많은것같다. 작가혼은 오간데 없고 속도나 경쟁 그리고 독선만이 보인다. 이러한 빈번히 풍토속에서 선생님과 같이 육필을 고수하는 이들은 시대에 떨어진 모습으로 오인(误认)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진정 부박(浮薄)한 속도의 가치에 저항하면서 한획한획 새겨나가는 철저한 장인정신의 표출이 아닐가!
넝쿨지지도 잔가지도 치지도 않고 반듯한 이파리와 환한 꽃잎을 피워올리는 련꽃, 그 무늬가 새겨진 낡은 밥상을 마주하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오늘의 작가들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에게 창작의 공간은 과연 몇평이면 족할까?하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작가가 거주하는 삶의 공간이 창작의 공간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세계와의 뉴대와 자기 동일성이 형성되는 실존의 중심공간임은 분명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낡은 밥상의 반경이 주는 공간이 내게는 너무나 크게 보였다.
선생님의 모습을 내가 꾸미고있는 문학블로그에 담고저 선생님을 향해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었다. 세상의 번화함을 멀리한 조촐한 서재에서 련꽃무늬 밥상앞에 마주 앉아 육필을 부여잡고 원고지를 메워나가는 선생님의 모습, 고감도 영상에 포착된 선생님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아우라(Aura.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서 흉내낼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보았다.
"연변문학" 4월호
리태수 선생님과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