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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문화에 근저를 둔 하얀 혼의 독백
- 김혁의 중편소설 <<조모의 전설>>을 읽고
◇ 윤윤진
얼마전까지만해도 퍼그나 시끌벅적하던 민족문화와 전통, 그리고 민족문화에 대한 찬미, 긍정, 반성, 비판 등등이 요즘은 좀 조용해 졌다. 민족문화의 이중성에 대한 론의도 요즘은 잠잡해진 상태이다. 하긴 그동안 무척이나 떠들어 댔으니 한단락을 맺고 머리를 식히며 랭정하게 사고할때도 되였다. 한낱 들뜬 분위기와 감성에 치우친 분석과 평가, 그리고 찬미, 긍정, 반성과 부정, 비판은 편견으로 흐르기 십상이기때문이다.
사실 모든 민족문화의 뿌리는 하위문화에 있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 래일로 변하면서 시체와 현실응수에 바쁜 상위문화에서 한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는다는것은 어찌보면 사본취말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몇년전에 중국의 <<뿌리찾기>>문학도 주로 하위층인가들을 묘사하면서 거기에서 민족문화의 근저를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중국을 300년간이나 지배하면서 상위문화는 그럴듯하게 다스렸으나 하위문화를 정복하지 못하였기에 동화는 커녕 오히려 자기 문화만 잃고만 만족(满族)의 경우는 시사하는바가 큰바 우리민족이 일제36년 강점기에도 동화되지않은 주요한 원인은 역시 민중속에 깊숙히 스며있는 하위문화때문이 아니였는가? 양복을 입고 일본어를 구사하며 시체에 따라 요지경으로 변화되는 상위문화를 따랐더라면 민족문화는 고사하고 민족이란 그 자체도 어떻게 되였겠는가고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중국의 조선족문화를 이중성으로 규정할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상위문화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그 근저를 밭머리에서 담배쉼을 하는 농군이나 부엌에서 맴도는 아낙들에게 두었다 할때 결론은 달라졌을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위층의 몇몇이 중국어를 몇마디 하고 이민족복장을 걸쳤다해서 전체 문화를 이중성으로 규정하는데는 어디까지나 맹점이 있는것이다.
민족문화의 본고장은 민중이고 민족혼의 바탕은 하위문화이며 이른바 문화의 저력은 하위문화에서 온다.
그런 측면에서 말하면 김혁의 중편소설 <<조모의 전설>>은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다
작품은 우리 연변에서 심심찮게 만날수 있는 할머니, 쌍가매의 기구한 일생을 통하여 우리 중국조선족의 백년 이민사의 희로애락을 적고있는데 귀에 못박히게 들어온 이야기라 무심하게 보면 액자형구성 외에 별 볼일이 없는 글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설심층에 깊숙히 들어가서 귀를 기울이노라면 <<조모의 전설>>에서 조용히 전해오는 언질을 들을수 있으며 민족문화파수군으로서의 하위문화의 저력을 깊이있게 느낄수 있다.
소설에는 <<사람끼리 잡아먹었다는 기사년>>에 괴나리보짐에 쪽박차고 한많은 두만강을 건너 <<천년 묵은 진펄에 갈대숲이 우거지고 야수가 출몰하는>> 산간벽지에 봇짐을 푸는 그날에 태여난 운명의 주인공 쌍가매할머니가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어디로 보나 빼여난데가 없고 수수한 할머니, 그에게 차려진것은 <<물고기가 논코에 욱실거리고 꿩이 가마에 절로 날아들고 뜰에서 몽둥이로 노루를 때려잡는>> 살기좋은 고장이 아니였다. 하느님이 그에게 마련하여 놓은것은 리상과 현실의 엄청난 괴리와 거대한 수난, 그리고 이민족의 기시였는바 쌍가매할머니는 운명적으로 이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운명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주어진 생활을 끈기있게 영위해나가면서 운명이지만 운명이 아니게, 숙명이지만 숙명이 아니게 괴나리보짐과 쪽박에 실려온 빈약한 문화를 기반으로 개척의 모지락괭이를 박으면서 새로운 전설을 쓰기 시작한다. 이른바 <<룡의 전설>>은 이렇게 생겨난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모든 수난을 무언에 맡기면서 나름대로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하위문화의 저력과 궁냥, 그리고 본질이 안받침되여 있는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쌍가매할머니는 리상적인 인물이 아니며 선각자는 더구나 아니다. 오히려 길거리에서 마구 뒹구는 작은 돌멩이나 만주땅 도처에서 볼수있는 민들레처럼 보잘것없는 인간으로서 세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면서 발로 차면 채이고 밟으면 밟히우는 따라지인생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자의가 아니게 이국땅에서 태여났고 또 핍박에 못이겨 이민족에게 시집갔으며 온갖 고충을 다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모든것을 받아들여 삭히고 해소할수있는 무형의 힘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중속에 깊이 스며있는 하위문화의 깊고 넓은 <<우물>>일지도 모른다. 이 <<우물>>은 민중속에 깊숙히 박혀있는바 그 깊이는 누구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깊고 넓은 <<우물>>이 있었기에 그는 풍진세상의 모진 세파를 조용히 기르며 말없이, 그러나 굳세게 생활을 영위해 나갈수 있었던것이다. 훈장네 손주를 선뜻 받아들이고 자기의 아들을 서슴없이 전장에 내보낼수 있는것도 바로 이러한 굳센 생활의 신조가 있었기때문이였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력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의 하나가 렬사가 많다는 사실인데 그것도 쌍가매할머니로 대표되는 우리 민족의 민중속에 헤아릴수 없이 깊은 이러한 문화기반과 갈라놓울수 없는것이다. 따라서 쌍가매할머니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않은 할머니가 되며 우리 민족의 대중문화풍토 역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내적 힘을 가지고있는것이다. 이것은 쌍가매할머니의 형상이 가지는 첫번째 의의이다.
쌍가매할머니의 형상이 가지는 다른 한 측면의 의의는 할머니가 생활가운데서 보여준 외유내강적인 성격이다. 앞에서 잠간 이야기 했지만 소설에서 할머니는 거의 숙명적으로 운명대로 한생을 살아온 보잘것 없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강인하고 끊어질지언정 굽어들지 않는 굳센 성격적 측면이 있는바 바로 이러한 성격때문에 그는 그 험난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기를 지킬수 있었고 더욱이는 자기의 문화를 지킬수 있었으며 또 나름대로의 생활을 영위해 나갈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말하면 할머니는 차면 굴러가는 돌멩이가 아니라 짓밟히나 기어이 다시 일어서고야마는 풀이라 해야 할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우리 민족문화의 저력은 바로 이리저리 부대끼다가도 세월에 따라 다시 재생하고 생기를 얻는 풀과 같은 할머니의 그러한 정신에 있다고 력설하고 있는 동시에 그러한 문화의 재생능력에 문한한 경모의 정을 보내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바로 할머니의 그러한 성격과 정신이 조모의 전설을 만들었고 룡의 전설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다시 우리 문화를 키워 왔으며 오늘의 우리 문화 역시 거기에 터전을 두고 있다는것이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구색이 잡힌 현성의 력사와 그 력사의 년륜에 새겨진 사람들의 전설을 소리에 담아 우물은 무겁고 웅숭깊은 유장한 소리로 세기의 오페라를 속울림으로 연주하고 있는것이다. 그 순간 지지리하고 조악한 삶을 밟아온 할머니의 섬약하나 끈질긴 아집과 그 와중에 기어코 전하고자하는 할머니네 세대의 상상력에 수렴되는 룡의 전설이 주는 언질을 나는 읽어낼수 있을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전설을 받아서 이어나가야겠다는 자긍심과 사명같은것에 사로잡혀 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명감이 있는한 새로운 전설은 민중속에서 계속 만들어 질것이며 그러한 전설이 지켜주고있는한 우리 민족문화는 영원한 힘의 원천을 가질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사회의 최하층 인간들속에서 작품의 령감을 얻는 김혁이 <<조모의 전설>>에서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로서 망각속에 뒤흔들리고 있는 요즘의 가치관과 문화관에 대한 엄연한 경고이며 또 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하위문화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으로서 하위문화의 저력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는 모든 지성인들에 대한 간곡한 부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와 그 미래를 관심하는 사람이라면 가볍게 지나칠수 없는, 심사숙고하여야 할 중요한 문제로 되는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조모의 전설>>에서 받은 가장 큰 인상으로서 대중속에 깊숙히 뿌리박고 있는 작가의 문화적선택을 깊이 느낄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였다.
김혁의 소설이 준 두번째 인상은 소설에 넘쳐흐르는 호기와 박력이였다. 조비는 <<글은 기를 기본으로 한다.(文以气为主) >>고 하였는데 김혁의 글에는 바로 김혁다운 <<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김혁의 소설을 읽고나면 언제나 힘을 얻게 되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바로 그의 글속에 호기와 박력에 따른 매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패기가 있고 저력이 있기대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실 호기는 김혁소설의 일대 특징의 하나이다. 일전에 발표한 일련의 중편소설 <<바람과 은장도>>, <<미망하는 도시>>, <<적(笛)>>, <<꽃뱀>> 등등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사회 밑바닥인생을 살아가면서도 그어떤 생활리상을 잃지 않고 있는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들은 또 거개가 리상파멸의 운명을 면치 못하는 인간들이다.
(김혁이가 하층인간들의 사회밑바닥 생활만 일관하여 쓰는데는 몇가지 원인이 있을수 있는데 그 주요한원인은 사회배경과 가정배경때문에 자신의 뛰여난 재질을 마음대로 발휘할수 없고 억제된데서 기인된 심리적침적물, 즉 콤플렉스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콤플렉스에서 생기는 문화심리이 지향성인데 그는 언제나 그러한 인간들을 동정하고 그러한 인간들속에서 미를 발견하며 더욱 중요한것은 그속에서 변하지않는 문화적저력을 찾고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편폭때문에 후일로 미루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호협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파멸도 호기롭게 대하고 있다. <<조모의 전설>>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바 이민족과의 억지혼사를 피하여 우물에 서슴없이 뛰여드는 쌍가매, 동네사람의 억울함을 보고 화승총을 들고 왕지팡이네 집으로 달려가는 박포수, 왜놈들의 횡포앞에서도 두렴없는 미소를 짓고있는 훈장의 아들, 그들의 행동에는 모두 그 어떤 김혁식의 호기가 있다. 그런 호기가 있음으로 쌍가매는 또 렬사의 후예를 흔연히 맡아서며 또 그런 호기로 사당패집 아들의 배신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준다. 따라서 소설은 근자에 우리 문단에서는 보기 드문 양강지미(杨刚之美), 즉 박력있는 남성미를 보여 주고있는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김혁의 이 소설은 함축성있게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평범하지않은 우리 민족의 이민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문화의 기반과 그 미래를 이야기 하고있다. 바로 그러하기에 소설은 슈제트가 충분히 전개되지 못한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하얀 혼을 지켜나가려는 하얀 혼의 독백으로 되여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 주는것이다.
윤윤진 (문학박사, 길림대학 교수)
문학 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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