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
디아스포라의 화자(话者)-윤동주
김혁 (소설가, 장편소설 "윤동주"의 작자)
요즘들어 조선족이 오롯이 모여살고 있는 중국 변강의 오지인 용정시 지신향에서 옛 학교 한 채가 복원중이다. 그 복원소식에 조선족 각계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고 매체는 끓고있다. 그 학교가 바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의 모교인 명동학교이기때문이다.
명동학교의 복원소식과 더불어 시인 윤동주가 다시 한번 연변에서 회자되고 있다.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이며 연변은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다. 자신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별 헤는 밤”에서나 동시 “오줌싸개 지도”에서 읊조렸다 싶이 “북간도는 시인의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이며 “돈 벌러 만주로 떠난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기도 하다.
한민족이고 보면 너나가 즐겨부르는 “선구자”의 두 번째 구절에 나오는 용정의 “용두레우물가”에서 택시 기사에게 30원을 주거나 혹인 12인승 남짓한 소형버스를 타고 20분 가량만 달리면 윤동주 생가가 있는 마을 명동촌까지 다다를수 있다. 도로 밑으로 난 양지바르고 비교적 넓은 더기에 자리한 윤동주 생가는 명동촌으로 들어가는 바로 입구에 있다. 실개천이 흐르는 들판 너머 멀리 아늑한 오봉산이 병풍처럼 휘두르고 있고 온종일 따사로운 햇볕을 받을 수 있는 양비바른 곳에 네 칸 방 기와집의 본채와 옆에 딸린 곳간 한 채가 있는 생가. 시인은 바로 이 함경도 풍이 짙은 농가에서 1917년이 저무는 마지막 날인 12월 30일 아버지 윤석영과 어머니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세기 말 1885년을 전후로 조선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두만강 너머의 간도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민족이동을 시작했다.
몇해고 지속된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기근이 원인이였다. 척박한 땅, 송곳하나 꽂을 땅이 없는 고향을 떠나 기름진 옥토가 방치되여있는 간도땅에서 잘 살아보자는 심사에서 쪽박차고 남부여대하고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1910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적 한일합방이후 식민지시대, 망국의 설움을 안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와 간도일대의 동북3성을 아우르는 곳곳으로 수많은 민족이동이 시작되였다.
중국인들은 이들, 바로 지금의 조선족을 월강(越江) 혹은 과경(跨境)민족 즉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이라 칭한다. 류랑하는 유대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맥(脉)으로 봐도 무방할것이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도 그 과경 이주민의 대렬에 끼인 한 사람이였다.
간도에 정착한뒤 부지런한 천성으로 볼모지를 다루어 윤동주의 가족은 명동마을에서는 인끔높은 가문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윤동주네 가족이 자동촌 등 간도의 여러 곳을 경과하여 나중에 머무른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은 조선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합진을 지나 삼합진과 지신진 두개 진의 경계선으로 되여 있는 오랑캐령을 넘어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회령에서 북으로 40리, 명동촌에서 용정까지는 30리이다.
명동촌은 1899년, 유학자 출신 김약연을 비롯한 함북 종성의 다섯 가문 142명이 두만강을 건너와 이룬 마을, 명동이란 “조선을 밝게 하자”는 의미로서 10여개 부락을 합친 총칭이다.
그들은 단합된 공동체의 힘으로 “밝은 조선”을 건설할 인재를 육성하는데 모를 박았다. 집단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제일 좋은 10분의 1의 토지를 학교밭으로 떼 놓고 서당을 차렸는데 그 서당이 바로 후일 간도의 명문으로 승격한 명동학교였다.
김약연은 후일 윤동주의 외삼촌으로 되였다. 간도 간민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명동마을 나아가 간도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은 연변 각지에 명동촌과 명동학교의 경험을 보급하면서 연변을 건실한 반일운동기지로, 각지 사립학교를 민족인재양성의 요람지로 건설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중 와룡동의 창동학원, 후동촌의 정동중학, 소영촌의 길동학교 등이 당시 연변지역의 명망높은 반일 학교로 되였다.
하지만 황무지를 개척하여 평화롭게 살던 이곳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직후 1908년 일본의 마수가 뻗쳐들었다.
1907년 8월,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변에 침입하여 용정에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우고 명동촌 주변인 종성대안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했으며 1909년 9월 “간도협약”이 체결된후 용정, 투도구, 국자가, 배초구와 훈춘 등지에 영사관과 분관을 설치하고 조선인을 통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명동촌 사람들은 더욱 단합하여 학교교육을 강화하여 반일인재양성에 힘썼다.
1919년 3월 13일 “3.1운동”의 불씨를 넘겨받아 용정에서도 3만여명이 모여 성세호대한 반일대집회와 시위를 벌렸다. 명동학교에서는 정동 등 학교와 함께 300여명의 충열대를 조직하여 시위운동의 앞장에 섰다. 시위에서 중일군경들의 탄압으로 13명이 희생되고 48명이 부상당하였다.
반일의사들의원쑤를 갚고 뜻을 이어가기 위해 최봉설, 임국정 등은 1920년 1월 4일 지신향 수성촌에서 조선은행 회령지행으로부터 용정출장소를 보내는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지난해 유흥적인 오락물로 만들었던 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되였던 15만원탈취사건이다. 이 사건은 윤동주의 고향과 불과 몇리 떨어진 곳에서 명동학교 졸업생이 동참한 가운데 일었다.
따라서 일제의 탄압은 가심해만 갔다. 1920년 일제는 2만여명의 병력을 출동하여 연변에 대한 토벌을 감행하여 3,400여명을 살해하고 5,000여명을 체포하였으며 3,000호의 민가와 36개의 학교를 소각하였다.
“불령선인의 소굴”로 간주된 명동은 일제의 중심토벌지역이었다. 명동학교를 수색하여 학생 14명을 체로하고 “반일근거지”를 이유로 학교와 남부지방총회장 마씨의 집을 소각하고 돌아갔다. 일제의 토벌로 15년동안 민중의 힘을 합쳐 건설한 명동반일기지는 파괴되였다.
이렇듯 명동촌은 이향한 이주민들의 효시가 되었고 1910년대와 20년대초에 간도조선인들의 반일운동의 중심기지로 작용하였으며 민족독립운동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역사에 남긴 유서깊은 마을이다.
민족을 위해 육신을 불사른 선구자들이 운집해 들었던 명동에서 나서 자란 윤동주의 행적은 이곳 명동 소학교와 용정의 은진중학교, 평양의 숭실중학교, 다시 용정의 광명중학교, 그리고 서울의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도지샤 대학으로 그 학구(学究)의 루트가 이어진다. 1945년 2월 16일 인본 규슈의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이른바 “사상범”으로 옥사하기까지 인생 28년을 살아오면서 생애의 많은 시간을 명동과 용정에서 보냈다.
1931년 명동소학을 졸업, 달라자의 현립1교에서 6학년 공부를 1년 수학, 1932년 은진중학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 1년 재학, 1938-1942년 연희전문 4년, 1942-1943년 일본 릿교대학, 도지샤대 영문과, 1943-1945년 후꼬오까 형무소 옥사. 이런 리력을 년도순에 따라 계산해보면 평양과 서울에서 5년, 일본에서 3년 하여 고국과 일본에서의 체류시간이 모두 8년간이나 된다. 히지만 연희전문 4년동안 여름과 겨울 두 방학에는 고향에 돌아왔었고 일본유학기간에도 고향에 다녀갔고 하니 이 8년중 시간적으로 대략 1년반 정도는 고향에서 보냈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추산해보면 윤동주는 생애의 절반이 넘는 15년을 지금 연변의 명동과 룡정에서 지냈다.
윤동주의 작가적입장이 이민자인것은 물론이려니와 대부분의 인생체험 역시 이민지에서의 삶이 되었기에 그의 다수 작품은 이민체험에서 비롯되였고 이민자의 정서를 담고있었다.
우선 “고향집-만주에서 부른”이라는 작품이 있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1936.1)
윤동주는 이민 2세가 될 것인데, 그런데 이 작품에서 화자는 고향이 “남쪽 하늘 저 밑”에 있는 따뜻한 곳이다. “내 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그리고 “나”는 “헌 짚신짝 끄을고”여기에 왔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화자는 어미니가 계신 남쪽 하늘 저 따뜻한 고형집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온 이주민이다. 즉 시인은 두만강을 건너 온 이주민이라는 립장에서 향수를 토로하고 우리의 역사와 불행한 운명을 하소연하고 드러내고있는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정체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생존을 위한 이주를 단행하였고 현재는 이민지에서 또다른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살려니 과거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고국땅의 고향집이 그리운 것이다.
동심이 짙게 드러난 “오줌싸개지도”역시 그러한 정체성 확인의 욕구를 잘 보여준다.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1936.초)
이 작품 역시 앞의 “고형집”과 비슷한 정서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적화자가 그 반대편인 고국의 고향땅에서 이민지인 만주땅을 떠올린다. 시에 따르면 아빠는 돈을 벌어 가정을 먹여살리기 위해 만주땅에 이민을 간 것이다. 화자의 공간적위치만 바뀌었을뿐 “고향집”과 같은 맥락이다.
시 “양지쪽”에서도 이러한 정서가 짙게 묻어나고 있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인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중략)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6.26)
“양지쪽”에서는 시인 스스로가 “황사”가 불고 “호인(胡人)들이 있는 중국땅에서 조선 조선인 이민자임을 전제하기 위기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 이민 2세의 정체성 인식을 드러낸 경우다.
그리고 유명한 “별헤는 밤”이 있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을 몇달 앞둔 시기에 창작한 작품이다.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는 표현에서 볼 때 이 시의 화자는 북간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타향에 있다는 말이 된다. 년표를 살펴보면 윤동주는 서울에 있었던것으로 되어있다. 시에서 간간히 적어내린 “추억”과 “쓸쓸함” 그리고 “어머니”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별이 아슬히 멀듯이”,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고 북받치는 향수를 털어놓은다.
이 작품들의 경우 비록 향수의 정서는 여느 향수시와 별 다름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이주민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고향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고향에 대한 인식이 복잡한만큼 향수의 정서나 감정도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몸 담고 있는 강 건너쪽은 모국이고 조상의 고향이지만 그것을 고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국땅을 고향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주민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이 작품들은 조선인 이주민의 이증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윤동주의 시에서 보여지는 이주민들은 관념적 강 저쪽의 고향이나 실족전 강 이 쪽의 고향을 모두 상실한 이중의 이산자였다. 우리의 문학에서 이주민의 정체성인식을 보여준 시작품이 많지 못한 상황에서 이 작품들은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이민자의 후예로부터 지금은 한반도에서 애대하는 시인으로 떠올랐지만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시인의 고향인 연변에서는 윤동주의 이름조차도 몰랐었다.
1985년 5월,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교수가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들과 용정중학교 역사교원들의 도움으로 용정 동산의 그리스도공동묘지에서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아냈고 그때로부터 연변에서의 윤동주연구가 전에없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92년에 용정중학교 대성중학에 윤동주시비를 경립했고 1994년 8월에는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윤동주시인의 생가가 뭔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윤동주의 이름을 딴 문학상 시상식활동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용정중학교에서는 사회지명인사들과 함께 해마다 시인의 추모모임을 가지고 시인의 탄생일이면 “윤동주 문학상”시상식을 열고 있으며 특히 연변협회 기관지 “연변문학”잡지사에서는 1999년부터 시인을 기리고 민족문학을 반전시키기 위하여 조선문단에서 권위적인 “윤동주문학상”을 세웠다.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편집부에서도 “윤동주문학상”을 세우고 해마다 시상식을 가지곤 한다.
요즘들어 관광명소가 된 시인의 고향 명동촌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함경도 살림집의 원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이었다. 가운데 부엌을 두고 서쪽엔 방을, 동쪽엔 외양간을 들인 이른바 양통형 구조의 집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80년대부터 시작된 개혁개방과 함께 산업화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이런 모습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세월의 때가 묻은 집들은 방치되거나 슬레이트지붕, 시멘트집으로 뜯어고쳐졌다.
근년들어 뒤머처 지성인들어 노력에 의해 명동은 파괴된 원향을 복원하고, 민족의 문화를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고 있다. 일존에 시작된 윤동주의 모교인 명동에 대한 복원이 바로 그한 노력의 일환이라 하겠다.”용정은 중국내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이고, 명동촌은 조선족의 역사가 숨쉬는 곳”이라며 “이를 되살리는 것은 우리 민족의 혼을 지키는 것”이라고 연변의 지성인들은 다시 인식을 다듬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조상들의 살을 후대에 전하자는 구상엔 용정시와 연변자치주 정부도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과 자치주 수부 연길, 옛 간도의 서울 용정을 함께 묶는 민족관광 벨트가 형성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이중언어를 구사하고 중국과 한국의 양대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커다란 장점을 지닌 조선족의 디아스포라는 이제 수난으로 점철되었던 어젯날의 슬픔을 넘어 다시 세계에로 향하고 있다. 윤동주가 자란, 민족의 웅지(雄志)가 남아 꿈틀거리는 이 곳이 먼 훗날에는 중국, 조선, 한국, 러시아의 경제, 문화를 이어주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동북아시아의 빛나는 변두리로 부상할지도 모른다.
그때면 멀리 북간도의 하늘 아래 별을 헤였던 윤동주는 더는 외로운 화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한국현대시인 연구-윤동주편(이건청)/문학세계사 2000년
별의 노래-윤동주 삶과 시(김수복)/한림원 1995년
세월속의 룡정/연변인민출판사 2000년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개척/민족출판사 1999년
중국조선민족 인물전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민족시인 윤동주50주기기념학술토론대회론문집/1995년
“어둠속에 빛나는 한줄기 빛-윤동주론”/김호웅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장춘식
윤동주 시의 공간의식 연구/김경훈
-편자주
파일 [ 1 ]
전체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