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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작가 김창걸
2011년 01월 11일 11시 14분  조회:3507  추천:28  작성자: 김혁

 

. 인물 다큐 .

 

향토작가 김창걸

 

김 혁

 

스튜디오, 사회자:

중국 조선족문학은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삶이 그스란히 그려낸 장엄한 화폭입니다. 100여년의 민족이주사와 함께 펼쳐진 그 화폭에는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을 이루고 게으름없는 작품창작과 문학활동으로 중국 조선족문학사에 빛나는 페이지를 남긴 문인들의 얼굴이 비껴있습니다.

매양 그 화폭을 접하게 될때마다 우리는 일찍 자신의 심혈을 다바쳐 그 화폭에 일획을 그으신 문학의 거장들을 경모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김창걸단편소설선집 들어보이며)

오늘 소개하게 될 조선족의 저명한 소설가 김창걸 선생님이 바로 그 중의 한분이십니다.

장재촌 풍경 (내레이션):

   룡정시 지신진 장재촌은 김창걸선생의 고향이다. 장재촌은 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많이 알려진 명동촌과는 삼합으로 가는 하나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2 상거해 있다. 장재촌으로 가면 륙도하 기슭에 하얀 비석 하나가 유표하게 보인다. 바로김창걸문학비이다.

문학비는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 연변대학조선언어학부, 한국한민족문화연구소에서 2000 8 3일에 김창걸선생에 대한 경모의 정을 담아 .

김창걸선생은 1936 1943년사이에 단편소설 20여편을 발표했는데 그중 암야가 대표작이다. 대리석을 다듬어 세운 문학비 정면에는 암야의 한글귀가 새겨져있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의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무용장면, 암야의 대표적인 례문 랑독:

인간의 칠십은 고래희인데 요렇게 살려고 태여를 낳는가?…”

어쩐지 노래를 불러도 신통치 않다. 어릴 때 김참사집 머슴 영돌이가 부르던 노래는 그렇게도 신이 나기에 따라다니며 졸라서 듣군 했는데 나는 아무리 그처럼 부르려 해도 도무지 되질 않는다. 아마도 내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떴기때문인가보다.

만일에 지금이라도 고분이가 바구니를 끼고 나물캐러 와서 내 노래를 들어준다면 더 신이 날는지 모르지만 봄은 이름뿐이고 아직 풀싹도 돋아나지 않았으니 벌써 나물캐러 나설리 없다.

, 왜 하필 이때 이 땅에 가난뱅이로 태여났는가? 스물두살 먹도록 장가도 못가는 주제에 왜 사내로 태여는 났는가? 생각하면 모두다 귀찮다.

나는 베던 나무춤도 거둘 생각이 없이 일어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옹지종기 쓰러지는듯한 오막살이들이 열댓집 늘어선 우리 마을에서는 최령감네 집만이 호기있게 뻗대는듯하다. 논이라고는 구경도 못하는 산골, 만주는 눈이 모자라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이라더니 하도 떨어질데가 없어 십년을 앉은자리에서 산골놈이 되고마는가! 생각하면 통분한 일이지만 고분이가 사는 동네이니 나는 떠나고싶지는 않다.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을 흘린다더니 참으로 그렇긴 하다. 남풍은 분명히 남풍이련만 오장륙부가 으스스 떨리고 눈에선 매운 눈물이 똑똑 떨어진다. 남의 눈을 도적하며 한가지 두가지 발등에 얹으며 베여놓은 나무춤이언만 삽시에 바람에 다 불려서 날려가고만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 두가지 흩어진 나무가지를 모으고싶지는 않다. 내 눈에는 분명 고분이가 보이지 않는가! 저 최령감네 집 울타리밑 우물에서 물동이를 이고 담모퉁이를 돌아서 가는것은 확실히 고분이가 아닌가. 자주저고리에 검정치마, 최령감네 울타리높이와 물동이 꼭대기가 거의 같지 않은가! 내가 일년내 두고두고 얼마나 눈여겨보았기에 빗보았을리 있는가. 그리고 삼단 같은 머리채도 바람에 하늘거리지 않는가!

그래도 처음엔 혹여나 잘못 보지나 않았을가 해서 오른손으로, 바늘로 쏘는듯한 매운 바람을 막으며 한참이나 서서 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가 그 물동이 임자는 고분이 집 찌그러진 부엌문을 열고 다리를 굽혀 키를 낮추어가지고 들어가지 않는가!

고분이와 나는 왜 빨쥐(박쥐)처럼 낮에는 꼼작못하고 밤에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박쥐의 신세도 될수 없는 운명이라면 모르겠으나 버젓하게 대낮에 서로 좋아하지 못하는것은 아무래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밤에만 만나서 좋아하는 고분이래도 나는 조금도 고분이를 잊을수 없다. 지금 잎나무는 벤다고 해도 고분이의 생각만이 머리에 간절하다. 고분이의 낯은 왜 웃을 때면 량쪽 볼에 쌍우물이 폭 패이는지, 그러니 나는 죽을듯이 미칠수밖에 없다.

… …

… …

스튜디오, 사회자:

학계는 김창걸선생에게 연변땅 토양으로 자라난 향토작가이며 평생을 땅의 인민들과 운명을 같이 우리 문학의 개척자이며 선구자이다.”라고  평가를 내리 습니.

김창걸 문학비앞, 리광일:

김창걸선생님은 1911 12월 생, 원적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26 3월 룡정은진중학 입학했고 1927년초 대성중학 전학했다가1928년 가정난으로 중퇴하게 됩니다.

농사, 야학교원, 혁명활동을 하면서 조선 서울, 관북지방, 중국 북부지방, 쏘련 연해주 등지를 편답하였습니다.  

1934년 귀향하여 소학교원, 회사사무원등 직을 지냈습니다. 1936년 처녀작으로 단편소설<무빈골전설>을 내놓습니다. 1943 <암야>를 쓰기까지 8년 간 무려 20여편의 소설을 창작하였습니다.

1943<만선일보> 등이 일본어판으로 바뀌자 <절필사>를 쓰고 붓을

놓았습니다.

1949년 연변대학이 창립되자 조문학부에서 교단에 섰으며 1950년 소설<

로운 마을>을 쓰면서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1950년부터 선후로 연변문예연구회 문학부장, 연변문련 부주석직을 력임하셨습니다.  

주요작품:으로는 해방전무빈골전설,”암야등 수십편.

해방후 새로운 마을,”행복을 아는 사람들등 수십편. “김창걸단편소설집(해방전편) 이 있으며 번역작품으로는시경,”홍루몽등과 공동편찬으로 한조사전,”조선어속담사전등이 있습니다.  

스튜디오, 사회자:

김창걸 선생님은 일찍 위만주국시기부터 장재촌, 명동촌을 무대로 문학창작을 시작습니. 그의 작품들에는 조선이주민들의 애환이 그대로 깃들어있습니. 없고 힘없고 없고, 모든것이 없는 사람들, 있는것이란 서러움뿐이지만 그래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성실하고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 정겹습니.

단편소설암야 보면 바로 가난이 청춘남녀들의 아름다운 사랑 짓밟 비극을 보여주고 습니. 하지만 김창걸의 작품은 렇게 비극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주인공 명손이는 결국 사랑하는 처녀 고분이를 데리고암야 헤치며광명 찾아 나아갑니. 작품의 우수성은 바로 여기에 습니. 이것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중국 조선족 이주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기때문입니.

북경 호텔, 장춘식:

  지금까지 김창걸의 작품을 의할때 거의 모든 자들이 암야 김창걸의 대표작으로 꼽고있고 해방 조선족 소설창작의 가장 성과작으로 평가하고 습니다.

  작품의 가치는 우선 갈등을 이룬 세력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있다는 , 계급적 대립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갔다는데 있을 입니.

어쨌든 양복쟁이신사보다도 보리마당질에 보리거스러미를 잔뜩 뒤집어쓴 얼굴이 고분이에게 좋은 것은 회박을 뒤집어쓴 거리계집보다도 보리방아 찧고 보리겨를 담뿍 쓰고 나온 고분이 얼굴이 나에게 어여쁘고 좋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뾰죽구두 짜리에게 장가 것이나 고분이가 양복쟁이한테 시집 것이나 마찬가지 신세이긴 하다. 그러니 촌사람은 촌사람끼리, 없는 놈은 없는 놈끼리가 좋은 법이다.”

이는 작품의 주제를 분석할 흔히 인용되는 예문입니. 작품의 주제의식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라 하겠습니. 특히 작품에서는 그러한 갈등을 주인공인 명손이라는 시골 젊은이의 시점에서 고분이라는 처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관련시켜 전개시킴으로써 보다 리얼리티를 획득하고있다. 이러한 분석은 다수의 평자들이 일반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입니.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매매혼인이라는 사건의 시점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습니. 고분이는 때문에 외통눈이 남가가 아니면 나이 오십에 아들이 없어 소실로 고분이를 사려는 윤주사에게 팔려가야 운명입니. 최령감네 빚을 변리까지 일백오십 졌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최령감은 딸을 팔아 부자가 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 얻은 빚은 도무지 미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네놈의 딸은 궁녀더냐, 선녀더냐, 대감집 규수더냐? 이놈아, 돈도 딸을 팔아 모은 돈이다. 자식만 딸이더냐? 나두 다리 저는 놈에게 후실루 딸을 때에는 생각이 좋지 못했다. 딸은 썩은 호박새낀 아느냐?” 이것이 최령감의 빚을 갚지 않으면 안된 이유가 되는 입니. 우리 민족 이주민들이 간도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가슴아픈 대가를 치렀는지를 보여준 대목이라 하겠습니. 그런데 그렇게 돈을 모아 부자가 최령감은 자신의 지난날의 아픔을 다른 가난한 사람에게 전가(轉嫁)시키고자 합니. 여기서 있는 자와 없는 자간의 갈등이 다시 발생하게 되는 입니.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쳐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밤길을 빨리하였다.” 이는 암야 결구입니. 이와 관련하여 전성호는특히 소설의 주인공 청년 남녀의 야간도주는 비록 그것이 소극적이고 자연발생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부정(否定)하고 현실극복의 자세와 저항적 의지를 표명함에 있어서는 커다란 문학적 의의를 산생시킨다. 그리하여 작자는 야간도주를 하고 있는 그들의 앞길에 밝은 미래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평가하고있다. 대체적으로 정확한 평가라 습니.

정제된 묘사와 형상적인 인물표현으로 그리고 함경도사투리의 적절한 사용 등 측면에서도 암야는 해방후 우리 소설문학에 중요한 모범이 된 작품입니다.

 

장재촌 모습 (내레이션):

김창걸 선생은 조선족 문단에서 '향토작가'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소설적 특징 이 바로 조선인의 인정 세태와 풍속 습관 등을 잘 그려내고 있기때문이.

사회적 배경과 자연의 풍광을 묘사한 부분을 살펴보면 그의 향토 작가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선바위 앞에 드러누운 황무지속의 밭뙈기, 우비우비 파고 심은 곡식, 팔뚝 같은 강냉이 이삭, 베개 같은 감자들에 대한 묘사는 사회적 배경과 함께 땅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관심을 함께 잘 표현해내고 있는것이다.

사진속 김창걸의 모습 (내레이션)

김창걸 선생은 시종일관 사실주의적 창작방법에 충실하면서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 그리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락관인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작가였다. 그의 작품은 또한 당시 우리 민족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소재로 하였으며 동시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작가적 안목과 함께 예술적 형상미를 지닌 작가로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스튜디오, 사회자:

지난 100여 년의 력사 속에서 중국 조선민족은 근면으로 자신들의 삶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랑할만한 우리 조선족문학도 이루어 냈습니다. 오늘날 중국 조선족문학은 그 지역적, 력사적 특수성으로 중국문단과, 한반도 문학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으며 그 의미가 더욱 새로워 지고있습니다.

따라서 김창걸 선생님과 같은 문학의 선각자들이 피워 올린 꽃은 오늘날에도 그 향기를 잃지 않고 더욱 큰 꽃망울로 더욱 짙은 향기로 만개될것입니다.

 

연변위성TV 종합문화프로 두만강3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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