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문학 -> 발표된 작품 -> 수필
나의카테고리 : 수필作品
. 추모수필 .
오! 류형(柳兄), 플로라이드 사진속의 류형!
경인년이 막 시작되던 어느 추운 아침, 매일의 일과처럼 컴퓨터에 마주앉아 메일함부터 열었다. 류연산 선배에게서 온 메일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열었고 다음순간 나는 얼음방망이에 맞기라도 한듯이 그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의 입으로는 부지중 주체못할 비명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동안 무사하오? 물론 무사치 못하리라 알고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도 시련을 주었소.
지난 11월 23일 연변대학 복지병원에 입원했소. 가볍게 치료하면 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27일 암 진단을 받았소. 28일 연변병원에서 다시 담도관 암으로 판정되였소.
- 2010년 1월 3일 일요일
선배에게 향한 새해문안으로 예쁜 엽서를 골라 축하메세지를 일껏 작성해 보내고 좋은 답복 기다렸는데 그 답멜의 내용은 지극히 충격적이고 가혹한것이였다. 그리고 그뒤로 일년하고 18일만에 류선배는 몸소 답사했던 “혈연의 강”을 거슬러 영원히 돌아로지 못할 강을 건너가고 말았다.
류선배의 이름을 맨처음 접한것은 문학도시절이였다. 당시 김훈등 나젊은 소설가들을 위시로 한 소설가들의 동인회가 발족되였는데 우리 문학도들에게는 그야말로 선망의 협회였고 기라성같은 회원들은 존경의 대상이였다. 동인회를 소개하는 “문학과 예술지”의 뒤 표지에서 처음 류선배의 모습을 보았다.
“문학과 인생의 길을 연소하고 싶은 마음에 부모가 지어준 이름의 연(然)자를 사사로이 불타오를 연(燃)자로 고친 나”하고 문학과 인생에 대한 호언을 적은 자기소개서가 사뭇 인상적이였다.
선배와의 관계가 더욱 도타워진것은 95년경 연변일보 문예부 기자로 뛰던 시절 선배와 인터뷰를 가지면서부터였다. 그때 문예란에 “젊은 작가들의 현주소”라는 제명으로 류연산,
그후 류선배가 편집을 맡았거나 기획한 “아리랑”문학상과 흑룡강신문사 “한얼”패 문학상을 내가 거듭 수상하면서 나는 류선배와 자연히 문학선후배의 도타운 관계로 우정을 쌓아갔다.
그동안 류선배의 작가생활은 가히 폭발적이였고 휘황했다. 작품을 발표하는 족족 이슈가 되였고 많은 애독자를 모았다. 잦은 발로 뛰고 방대한 자료를 추려낸 작품들은 어느것 하나 허투로 다루어진 작품이 없어 다작(多作)이지만 들쭉날쭉 없이 고른 성취를 보여주었다. 우수한 작품일수록 사회증언적 가치도 풍요하다는 문학사회학의 명제를 그의 작품들은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학의 위상이 땅바닥에 떨어져 문학을 미련없이 버리고 있는 사람들도 속출하고 있는 지금의 풍토에서 누구도 해낼수없는 함량이였고 무게였다.
나의 첫 작품집은 류선배에 의해 묶어져 나왔다.
1990년대 국문이 열리면서 온 사회는 출국붐에 들떠있었다. 그에 따른 불협화음과 진통도 컸다. 일부 몰지각한 일부 한국인들에 의해 중국전역에서 무려 3만여명이 3억이라는 막대한 사기피해를 당했다.
어느 하루 류선배가 나를 차집에 불렀다. 차집에는 류선배외에도 초면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몰골이 꾀죄죄한 그 사람들은 바로 사기피해의 덫에 치여 인생이 쑥밭이 된 불운한 피해자들이였다. 그들은 류선배의 작가라는 신분을 알고 그의 손목을 감쳐 붙들고 넋두리를 해대고 있었다. 그날 류선배는 나에게 특종기사감이라며 사기피해문제에 관한 글을 써볼 의향이 없냐고 물어왔다. 그러면서 그동안 자신이 수집해두었던 피해자들의 고소서와 배경자료들을 한 가방 가득 나에게 넘겨주었다. 글재주도 재주겠지만 민중의 대변인인 기자의 신분으로서의 내가 쓰는것이 가장 합당하다는것이였다.
류선배의 지지와 청탁에 등을 밀려 나는 이 엄청난 작업에 언감 필봉을 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여동안 수십곳을 돌고 수백여명을 만나면서 한국인사기행각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추적해 보았고 드디여 “코리안드림”에 흔들리고있는 우리의 공동체 사회를 진맥하는 장편르포를 펴내게 되였다. 류선배의 진지한 청탁과 성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장편기사를 채 마무리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라는 제명의 장편르포는 “청년생활”지에 1년간 련재되였고 그후 류선배의 기획, 편집으로 단행본으로 묶어져 나왔다. 당시 조선족사회의 최대열점을 건드린 이 장편르포는 그해 “청년생활”화연문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흑룡강신문사 “한얼”표 실화문학 대상을 몇해후에는 또 자치주 최고문예상인 “진달래” 문예상도 거듭 수상했다. 또한 이 르포집은 피폐한 오늘의 출판풍토에서 무려 5천여권이 팔리는 전후무후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두번째 작품집 “천재 죽이기” 역시 류선배에 의해 나왔다. 당시 류선배는 추락하고있는 문학의 가치와 위상에 대해 통탄해 했고 총서 “아리랑”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고심하고있었다. 해마다 발간되는 “아리랑”의 몇부를 할애해서 작가들의 작품집을 찍어주는것이 어떠냐 하는 나의 제언에 류선배는 무등 기뻐하며 좋은 아이디어라고 거듭 칭찬해 주었다. 나의 이 제언은 인차 수납돠여 그후 많은 작가들의 작품집이 류선배에 의해 기획, 출판되였다. 그중 나의 중편소설집도 가장 나이 어린 작가로 그 계렬에서 출판되였다.
그 무렵 나는 여의치 못한 운명의 굴레에서 내내 신음하고있었다. 강보에 버려져 남의 집 수양아로 자랐고 박봉에 매달려 사는 청빈한 작가의 쭉줄린 신세라 혼인이 깨여져 버린데다 양모는 나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덜컥 출국해 버렸다. 그리고 출국하여 불과 3년이 못되여 양모는 나와의 일체 련락을 끊어버렸다. 나는 문자그대로 혈혈단신 무주고아가 되여 버렸다. 무정한 양모였지만 그동안의 길러준 정도 있고 또한 유일한 의탁이였기에 꼭 찾고싶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나가는 류선배에게 양모를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친척에게서 겨우 알아낸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류선배는 수소문하여 인천에서 나의 양모를 찾았고 어렵게 만났다.
귀국하여 류선배는 선참 나를 찾았다. 지금의 중앙소학교 부근의 “소수레” 다방. 류선배는 퍽 안쓰러운 기색으로 나를 지켜보다가 무겁게 말머리를 떼였다. 이제 양모는 나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절교를 표했다고 했다. 대신 양모에게 나대신 욕을 삼태기로 먹었다고 했다. 양모는 달랑 천원을 내게 넘겨주고 나와 절교해 버렸다. (그후 한국에서 10여년을 지내다 귀국해 불과 몇달만에 끝내 나를 만나주지 않고 내 가슴 가득 유감만 남긴채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내 신변에서는 류선배가 나의 양모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였다. 그날 의기소침한 나를
일가친지 없는 내게는 오로지 문학이, 그리고 이 길에서 함께 하고있는 후배문학도들이, 내 삶의 의탁이자 의지였고 전부였다. 북대시장부근, 루항(陋巷) 의 맨끝에 자리잡은 월세 100원짜리 나의 세방집은 그 무렵 문학도들이라면 거의 모두가 운집해드는 짜장 “문학 구락부”였다. 지금도 문학을 그 무엇보다도 우위에 놓고 일심으로 문학의 도정에서 열심히 달리고있는 시인 H며 소설가 L며 모두가 우리집에서 몇해동안 교우하며 지냈다. 모든 세상사를 문학인의 빈약한 홀로의 어깨로 짊어져야하는 무게와 무원조라는 그 처연함으로 오는 스트레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편으로 일상화가 돼버린 매일같은 음주는 나의 신체를 극도로 쇠약하게 만들었고 어느 날 나는 목욕하고 돌아오다 나는 그만 길가에 쓰러져버렸다. 병원으로 가야했는데 주사약 뗄 돈조차 없었다. 곁에 있는 문학을 빼고는 또 문학밖에 모르는 후배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나보다도 빈약했다. 랭기도는 세방집에 나를 눕혀놓고 어쩔바를 모르고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고 류선배가 들어섰다. L가 황급한 나머지 류선배에게 알린것이였다.
온 집안에 침구 하나밖에 없고 대신 바람벽을 에돌며 토담처럼 쌓여있는 책더미와 생기잃은 문학후배들의 부연 얼굴을 보며 류선배의 만감이 교차하는 큰 한숨을 지었다. 어서 병원에 가라고 독촉하며 200원의 현찰을 내놓았다. 그날은 눈이 내렸다. 펄펄 날리는 눈발속에서 한숨을 허연 입김으로 날리며 고개돌려 배웅하러 나온 우리들을 연신 돌아보던 류선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려운 처경이였지만 문학은 나와 후배들에게 힘든 생활을 견디게해주는 버팀목이 되였다. 그해 나와 함께 했던 H와 L가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시부문상과 소설부문상을 동시에 유일하게 수상했고 Z가 연변일보 생활수기 상을 수상해 우리는 하늘 같은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잔혹한 운명은 오직 나만을 조준해 치명적인 직격탄을 날리는것만 같았다. 40대에 들어서던 첫해 어수룩한 일 어수룩한 사람들에 휘말려 일조일석에 번개를 맞고 나는 직장마저 떼우고 한지로 쫓겨나야 했다. 나의 생활의지로 꿈틀이던 력동적인 잔등에 사정없는 발길질을 해 천길나락에 처넣은 누군가가 아니라 뻔뻔한 등짝을 가진 나자신이 부끄러운것을, 누구 탓이 아니라 나 자신이 박복해 그렇게 되고만 내 인생인것을, 그누구도 아닌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미숙하고 부끄러움투성이임을 깨치며 나는 사회와 담을 쌓고 몇해고 서재에만 자신을 가두어 버렸다. 자숙하며 다시 감사를 배우며 성찰의 눈을 벼리며 돌아온 길을 돌이켜보는 동안 나는 그 굽이에 류선배가 자주 서있었다는 생각을 뒤늦게 가지게 되였다. 그동안 대인기피증 증세까지 보였던 나를 류선배는 여러 번 불러주었고 때때로 메일을 보내여 위무와 격려를 그냥 주었다. 읽은 메일들을 금방금방 처리하는 결벽에 가까운 성미의 나였지만 그 고마운 메일편지만을 나는 보관함에 지금까지 그냥 저장해 두었다.
축하하오.
6월 4일 한국에서 오는 길에 북경에 들려서 민족출판사하고 하나의 기획을 짜보았소. 조선족 인물 20명을 선정하여 평전(혹은 전기) 식으로 집필하는 것이오. 집필진으로 몇몇작가들을 잠정했소. 당신은
아주 어려우리라 믿소. 그런중에서도 많은 글을 써내는 당신이 자랑스럽소.
아마도
새해 건강하고 좋은 성취 기도드리오.
고난은 바울에게 있어서 성공의 디딤돌이였듯이 오늘날 당신은 시련을 겪고 그 시련속에 큰 작가로 성장하고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의 문학적 성취는 력사적 평가를 받기에 충분함을 잊지 말고 힘을 내오.
가내 평안을!!!
지난 달 29일 한국 갔다가 14일 돌아왔소.
한국 생활건강(암)연구소에 다녀왔소. 약방문과 식단을 받아왔소.
상해 중산병원에서 십이지장과 담낭을 떼여내고 위도 3분의 1을 제거했을때 나는 이미 모든 각오가 되여있었소.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소. 하나님께서 나한테 다른 작가들은 체험하지 못할 귀중한 생활을 마련해주셨음을 감사했소. 그리고 복지병원에 입원한 날부터 병상수기를 썼소. 현재 2부까지 끝났는데 4부로 마감하려 하오. 세상에 암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의 수기가 그들한테 힘이 되고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라오.
나는 수많은 분들이 나를 이처럼 아껴주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행복을 느꼈소. 세상은 사랑으로 넘치오. 수술을 하고 개복하면서 나는 모든것이 경이로움을 체험했소. 그리고 지금부터의 나의 삶은 모든 이들의 사랑으로 얻은것임을 실감하였소.
덤으로 얻은 여생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려고 하오.
그 때때로 전해오는 메일 몇통이 나락에서 헤매고있는 나에게 전화 한통 주는데조차 린색한 다른 메마른 무관심의 인정들에 비해 얼마나 따뜻한 위무가 되였는지 모른다.
지난 여름, 악착같은 병마에 시달려 몰라보게 변한 선배를 만났다. 그런데 늦게 나타난 나의 손을 부여잡고 한 선배의 첫마디는 “몹시 어려울턴데 별 도움도 주지못하고…”였다. 당신의 육신이 병마에 한겹 한겹 뜯기여 가면서도 선배는 후배의 처경을 아파하고 계셨다. 나는 돋솟는 눈물을 금할수 없었고 환자앞에 못난 눈물을 보일가봐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이제 선배는 저 하늘의 별이 되였다. 무기력하고 못난 이 후배가 남아서 할수있는 일이 선배의 안식을 기원하는것뿐이라는 무력감앞에서 허탈감과 막막함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잔혹한 내 운명이 처처에서 내 육신을 쓰러뜨릴때, 본능적으로 누구에게라도 제 감정을 엎지르고 싶은 마음이 북받칠때 찾곤했던 선배, 메일로나마 내 쓰라린 심경을, 내 기쁨과 고뇌를 때때로 전하고 싶었던 선배, 이제 그 메일을 쓸 자그만 안도조차 누리지 못하게 된건가? 그 사람좋은 웃음도 그 소탈한 유머도 그 력동적인 모습도 이제는 못보고 못듣게 된걸가? 이제 우리는 그를 영영 잃은것인가!
선배에게로 향한 그렇게 쓰고 싶은 메일편지를 하늘 길 열고 보낸다. 나에게는 이제 영원(永遠)으로 통하는 이메일 주소가 하나 더 늘었다.
민족사를 제대로 정립하려는 그 막중한 책임과 제자리를 떠나 비틀어져있는 세상의 서툰 물정과 만취상태의 비틀거림같은 문단의 오류를 어쩌려고 이렇게 빨리 가시는것인지? 대신 할수없는 선배의 빈자리는 오래 우리를 불안하게 허탈하게 만들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의 타계가 특히 안타까운것은 어쩌면 문학에서도 자기 령역을 공들여 지키는이가 드문 시대가 되였다는 그 점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배는 무수히 많은 작품을 남겨 놓았다. 그를 애도할수 있는 길은 다시 그를 읽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에게 싸인해 준 그 책들을 서가에서 꺼내 다시 책상 앞에 쌓아놓았다.
많이 함께 했지만 어쩌면 류선배와 남긴 사진은 거의 모두가 집체 합영이고 단둘이 찍은 사진은1996년경, 한국의 언론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남긴 사진 한장뿐이였다. 그때 기자가 플로라이드(卽席寫眞機. 사진을 찍으면 그 자리에서 인화되여 바로 나오는 사진기.) 사진기로 우리 둘의 모습을 담았다. 즉석에서 나오는 그 사진에 나도 류선배도 무척 흥취를 보였다. 사진이 툭 떨어져 나오자 류선배는 사진을 손에 꼭 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따뜻하면 사진이 빨리 인화되여 나온다는것이였다. 화선지에 묵향이 번져나가듯이 트럼프장만한 사진종이에는 우리 두 사람의 실루엣이 요술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그 단 한장뿐인 사진은 내가 간직했다. 세월이 흘러 사진이 누렇게 바래여지자 나는 덴겁히 스캐너 해 두었고 나의 블로그에도 올려 놓았다. 사진속의 우리는 조금 젊은 모습, 그리고 유난히도 형형한 눈빛으로 함께 한곳을 바라보고 있다.
지지리도 춥던 1월 24일 연길 북산에 있는 경도릉원 장의관에서 선배를 보냈다. 남들처럼 흥감스럽게 표나게 고인을 추모할 처경도 면목도 없는 나는 그냥 구석쪽에서 검은 마스크로 부끄러운 얼굴을 가린 위축된 모습으로 선배의 령정만 지켜보고섰다.
눈물 가득 고인 눈동자에 나는 선배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인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에 뜨거운 손을 얹었다. 빨리 인화되라고, 낱낱이 그리고 뚜렷이 인화되라고.
플로라이드 기능처럼 우리의 가치나 인정이 일회용으로, 즉석용으로 그치고 있는 요즘 세월이지만 선배님의 작가로서의 자부심과 민족에 대한 사랑, 올곧게 날이 선 그 정신은 내 가슴속에 또렷이 그리고 오래오래 각인되여 있을것이다.
류형! 오, 플로라이드 사진속의 류형!
“연변문학” 2011년 2월호
|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6 ]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이런 뜻으로 리해하면 되겠습니다.
어느 영화의 삽곡으로 나왔더랬는데 가사와 곡조가 너무 인상적이여서 차용해 봤습니다.
오래 된 못난 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