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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당을 허물고 말 것이다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원인을 놓고 장애평장군이 한 예언)
张爱萍将军
독후감 김송죽
지난해의 일이다. 한족친구 로조(老曹)가 보라고 준, 중국청년출판사에서 출판한 <<전쟁을 겪은 두세대 군인의 대화>>를 나는 감명깊게 보았다. 읽으면서 줄을 적잖게 그어놓았다. 그 책의 이야기 줄거리가 지금도 가끔 꿈에서까지 나타나군 한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잠을 설칠 때가 여러번이다. 거의 500 페이지에 이르는 그 책은 그같이 나를 충격한 것이다.
작자 장모리는 전에 총참모국 국장이였는데 그가 제 아버지의 경력이자 지난때의 국사(國史)를 한폭의 그림과도 같이 생생히 펼쳐보인 것이다. 피끗봐서는 책제목이 보고문학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기존의 다른 전기와는 어딘가 달랐다. 전기라면 보통 주인공의 기억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고 보기드믄 대화식의 에피소드에서 직업군인출신의 두세대지간의 정신교류가 이어진 것이였다.
장애평장군(张爱萍将军)은 직업군인으로서 견정한 혁명자였다. 리상이 뚜렷했거니와 추구가 끈질겼던 그는 자신의 추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것과도 과감히 맛서서 도전하는 열혈남아였던 것이다.
하기에 모택동은 생전에 그를 보고 “일을 칠 사람”이라 단언했고 엽검영은 “온몸에 가시돋힌 사람”이라 했으며 등소평은 그를 의욕적인 사람이라면서 “우리 군대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어디있는가.”했던 것이다.
“문화혁명”시기에 이르러서는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가 미칠지경이여서 그야말로 메스꺼웠다. 하여 장애평은 견결히 반대한 것이다.
그가 말했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썩은것이다. 역사방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러다가는 우리 당을 망하게 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령수라 해서 구역질나게 쳐올리니 정상적이 아니다. 위험한 짓이다!” 라고 하면서 그는 자기 립장을 분명히 말한 것이다.
“개인숭배, 개인독재 작풍이 지금 모택동의 한몸에 집중됐다. 맑스주의자는 유물론자다. 진정한 공산당원이라면 그따위는 짓은 버려야 한다.”
장애평장군의 이같은 비평은 진정한 공산당원으로서 당에 대해 고도로 책임지는 태도였던 것이다.
“어깨위에다 자기의 머리를 달아야 한다.”
레닌의 명언이다.
장애평장군은 제 어깨위에다 제 머리를 달았던 것이다.
국제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구세주란 종래로 없나니, 신선에게도 황제에게도 의존하려말라”, “진리위해 투쟁하리라!”
장애평장군은 행동으로 국제가의 정신을 따른것이다.
“명예와 부귀를 절대 탐하지 않는다.”
“노예근성을 버리고 진위를 가린다.”
장애평장군은 이 두가지를 일평생 자신을 편달하는 모토(座右铭)로 삼았던 것이다.
의지가 남달리 굴강한 장애평장군이 생전에 문화혁명을 일으킨 모택동을 놓고 평가하면서 내린 결론이 바로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당을 허물고 말 것이다."는 것이였다. 중국공산당에다 울린 경종이였다.
장애평 략력:
1910년1월9일에 사천성 생우 사달현 장가구에서 출생하여 2003년7월5일에 타계. 젊어서 고향의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에 참가했다. 1926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들었으며 이듬해에 중국공농홍군에 참가했다. 그때로부터 혁명생애가 몇십년간 이어진 것이다.
토지혁명전쟁시기,공청공청단중심현위서기였고,공청단중앙국비서장,소년선봉대중앙총대훈련부부장、참모장、총대장,홍삼군단제사 정치부주임,십삼단정치위원,군위기병단정치위원、퇀장으로 있었다. 중앙혁명근거지 반"토벌"에 참가했고 장정중 루산관(娄山关)을 탈취하고 준의성(遵义城)을 공략하는 전투를 지휘했다.
항일전쟁시기에는 중공강절성위군위서기를 지냈고, 예환소성위서기,팔로군소환종대 정위, 팔로군제오종대삼지대 사령원,신사군제삼사구려 려장,삼사부사장겸소북군구부 사령원,신사군제사사사장 겸 회북군구사령원이였다. 예환소항일근거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방전쟁시기에는 ,任华 중군구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였고,제삼야전군 전적위원회위원,화동군구해군(현해군동해함대)사령원 겸 정위를 지내면서 도강전역(渡江战役)에 참가했던 것이다.
건국후,제7병단사령원 겸 절강군구사령원을 력임했었고,화동군구, 제3야전군참모, 해방군부총참모장을 지냈거니와 따라서 선후 국무원 국방공판부주석을 겸임했었고, 국방과위주임, 국가과위제1부주임,중공중앙군위과기 장비위원회주임,제1계부터3계국방위원회위원,국무원부총리,중공중앙군위부비서장,국무위원 겸 국방부부장을 지냈다. 1987년에 중고위상위(中顾委常委)에 당선되였던 것이다.
1955년, 상장군함을 수여받았고 일급팔일훈장을 받았으며 일급독립자유훈장, 일급해방훈장을 받았다.
중공제8계후보중앙위원,제11,12계중앙위원,14대 대표, 15대 특요대표, 제5계전국인대상위를 지냈다.
원자탄、도탄、위성 등 연구제와 시험공작에 참여하여 조직령도했던 것이다.
<<장애평군사문선>>, <<신검의 노래>>(1992년)와 <<장애평묵적>>(1995年), <<신검의 빛>> 등 저작들이 있다.
만년에 이르러 서법을 즐겼기에 “장군서법가”로 불리였다. 그가 항전시기에 찍은 군인사진과 생활사진들은 다가 중국사진당안관에서 중요한 진장품으로 되고있다. 2003년7월5일, 북경에서 병으로 사망했으니 향년93세.
부인:리우란. 1942년8월결혼.
장자:장상. 소장군함.
차자:장성. 대교군함.
삼자:장품. 대교군함.
딸 하나있음.
부부사랑 사진
1953년2월, 모주석과 함께 해군함대 검열. 라서경(뒷사람), 장애평(좌)
1953년2월23일, 남경시찰 때
모택동,진의,양상곤,장애평,라서경,진비현 등 함께 찍은 기념사진.
1964년 핵시험장에서 방사선 정장을 착용한 장애평
호요방과 장애평 서로만나
병사들을 찾아 간 장애평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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