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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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비극(4)
2015년 10월 20일 13시 24분  조회:2891  추천:1  작성자: 김송죽
 

                                             모택동의 비극(4)

 

                                                          김  송  죽

 

1966년5월29일,청화대학부속중학의 학생들은 비밀리에 <<홍위병>>이라는 조직을 성립했다. 그리고서는 6~7월간에 그들은 <<무산계급반란정신만세>>등 3편의 대자보를 만들어냈다. 내용인즉은 “반란에 도리가 있다”는 것이였다. 8월1일, 모택동은 편지로 자기는 청화부속중학의 홍위병들을 지지한다고 알리였다. 그 소식이 나가자 북경의 각 학교들에서 학생들이 앞다투어 “홍위병”을 조직했던 것이다.

8월 18일, 모택동이 천안문성루에 올라 홍위병들을 검열 한 후부터 북경의 홍위병조직과 같은것이 재빨리 전국에 퍼졌다. 하여 그것은 “문혁”의 중요한 정치력량으로 되었거니와 “문혁”이 악성스레 “좌적”으로 파도치게 만든 장본인이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 조직의 제일 고약스런 파괴가 “혁명”이라는 깃발을 내들고 민족문화를 소탕한 그것이다.

 

1966년6월1일, <<인민일보>>는 전국에다 <<모든 요물잡귀신을 일소하자>>는 사론을 발표했다. 사론은 전국인민에게 “착취계급이 수천년간 내려오면서 인민들을 해친 낡은사상, 낡은문화, 낡은풍속, 낡은습관을 철저히 쓸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때로부터 “모든 요물잡귀신을 쓸어버리자”와 “퍼쓰쥬”가 “문혁”초기의 중요한 구호로 되었던 것이다.

 

그 시대를 겪어본 사람이면 다가 알다싶이 문혁(文革)이란건 그를 발기한 자가 불민함으로 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대재난이였던 것이다. 그것이 중화의 문명에 해를 끼친것을 보면 너무나도 한심하고 혹심해서 그야말로 일구난설이다. 그때 공자(孔子)를 비롯한 허다한 선인(先人)의 능묘(陵墓)들이 정도부동하게 털리우고 파궤되였거니와 문물은 대량으로 훼손되였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중국은 제민족의 고유한 경천법조(敬天法祖)의 문화전통을 제절로 부정하고 제손으로 구중천에 내던져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을 웃기는 한심한 바보짓이였다!

 

문화혁명이 일어나 얼마안되여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의 검열과 지지를 받은 북경의 홍위병들은 샤딩줴신(下定決心)을 부르짖으면서 기차로 산동에 가 공자묘부터 뢰관(雷管)으로 부셔버렸다.

 

산동 곡부(曲阜)에 있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을 "삼공(三孔)"이라 부르는데 공묘(孔廟)는 제를 지내는 곳이고 공림(孔林)은 공자와 그의 가족묘지가 있는 곳이고 공부(孔府)는 세습적인 연성공(衍聖公) 즉 서한(西漢)때로부터 공자의 처가편의 후예가 거주하는 곳인바 중국에서는 명나라때와 청나라때에 황궁못지 않게 대량의 력사당안과 문물이 보존돼있었다. 그런것이 퍼쓰쥬(破四舊)바람에 맨먼저 파괴되고 도적을 맞아 거덜이 나고 만 것이다.

 

1966년 8월 23일, 곡부현정부는 외지의 홍위병들이 곧 들이닥치리라는 소식을  접하게되였다. 그러자 곡부제1중학교에서는 "시급히 동원하여 일체 계급적들의 파괴활동을 방지하자!"는 프랑카트를 만들어 교문에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농민들도 신속히 모여와 공부의 문을 지켰다. 미처 붉은완장을 만들어 팔에 낄 새도 없었던 그들은 그저 붉은 천오리에 "빈하중농"이라는 네글자를 써서 앞가슴에 달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분노했다. 홍위병들이 이제 삼공(三孔)을 습격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집집의 나무상자들을 거두어 그것으로 삼공(三孔)입구에 있는 돌사자를 가리웠다. 그래놓고는 모택동의 상을 들어다 그앞에 놓고서는 표어를 내걸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의 그같은 노력은 공자를 반격하는 노조(怒潮)를 막아내기에는 너무도 무기력했던 것이다.

 

1966년 11월 11일, 당시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이였던 진백달(陳伯達)은 북경에서 전보로 "공묘, 공부, 공림을 태우지 말라"고 지시하고는 "공자의 모는 파버려도 된다"고 했던 것이다.

 

같은날, 중앙문혁소조성원이였던 척본우(戚本禹)는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는 "명대이전의 석패들은 남기고 청대의 석패들은 부수어도 된다. 공자의 모는 파버려도 된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상방보검(上方寶劍)이라 그같이 상급에서 특허한 권력이 있는지라 북경에서 간 홍위병들은 담이 커질대로 커졌다.

 

11월 13일에 그들은 공부(孔府)의 대문을 활 열어 제끼였다. 그러고나서 하루지나 15일날에는 대문앞에서 "공가점을 철저히 짓부셔버리는 선서대회"를 한 것이다. 그러고나서 그들은 패를 나누어 공묘(孔廟), 공림(孔林), 주공묘(周公廟)에 뛰여들어 비(碑)를 마구까부시고 편액들을 뜯어내리고 조각상들을 뚜드려마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기세 흉흉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신주를 모신 감실에 뛰여든 홍위병들은 땅에 떨어진 성현의 머리를 뽈차듯 이리굴리고 저리굴리면서 좋다고 웃으면 서 고와댔다. 이와 동시에 홍위병이 당지의 농민들가운데서 뽑아낸, 손에다 곡괭이와 삽을 든 자들로 무어진 한무리의 "쪼판패"는  공자(孔子), 공리(孔鯉), 공급(孔伋) 조손삼대의 모를 파헤치는 작업을 동시에 벌렸던 것이다.

 

11월19일, 거대하고 무거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비(碑)를 끌어 엎어뜨리고는 그것을 두동강으로 만들어버렸다. 혁명적인 꼬마맹장들은 그래놓고나서 뢰관(雷管)과 작약으로 공자의 모를 폭파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무지막지 포악한 행위였다. 
"혁명"이니라 는 패쪽을 내들고 저지른 천추에 용납못할 죄악이였다.

 

홍위병들은 그렇게 한 후 공림에서 다섯구의 시체를 끄집어냈으니 그것은 75대 적손(嫡孫) 공상가(孔祥珂)와 그의 부인, 76대 적손(嫡孫) 공령이(孔令貽)와 그의 처 외 하나였다. 시체를 꺼내보니 그때까지도 별 손상없이 거의 완정하게 보존돼있은 것이였다. 그런것을 홍위병들은 쇠꽉지로 찍어서 모양없이 만들었거니와 파낸 시체를 그 자리에다 대엿새를 내쳐두었다가 그냥보기사 싫었던지 공림의 동남쪽에 있는 흙구덩이에 가져다 처넣고는 불에 태워버린것이다.

 

홍위병들이 그같이 모를 파헤친 후 혁명적인 촌민들은 발광적으로 모안에 있은 순장품들을 도둑질해갔다. 그때 밤에 뜨락또르로 모들을 밀어버렸는데 그번 도둑질에 부자가 된 자가 적지 않다는 설이 지금도 나돌고있다.

 

2천년넘도록 보존되여 내려오던 근 3,000여무에 달하는 공씨가족의 모들은 이렇게 거덜이나고 만 것이다. 말대 연성공(衍聖公)인 공덕성(孔德成)은 공령이(孔令貽)의 아들인데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면서 거의 강박하다싶히 데리고갔다. 그는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륙을 그렇게 떠나간 그가 생전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해서 한번도 조상께 제를 지내지 못했거니와 대륙에서는 조상의 모와 시체들이 다 그모양으로 형편없이 만들어놓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랬은즉 숨이 지는 시각까지 그는 그 모욕과 치욕을 어떻게 참고 받아냈을가? 

 

당년에 혁명자가 퍼쓰쥬(破四舊)를 하고 리쓰신(立四新)을 해야한다면서 철없는 홍위병들을 추기여 저지른 천추에 용남못할 그 죄악들이 이제는 력사에 꼭 기재될 것이다. 이 외에도 그같은 사실들이 많고많지만 나는 다른건 더 말하지 않겠다.

"대륙에서 줄기차게 문화대혁명을 하느라 할 때에 대만성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중화문화부흥운동(中華文化復興運動)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1966년 11월에 손중산(孫中山)의 아들 손과(孫科)와 공자의 적손(嫡孫)  공덕성(孔德成) 등이 련명으로 발기한 것이였는데 포괄된 내용은 "대량의 고적(古籍)들을 정리하고, 중국력대의 충효인물(忠孝人物)과 문선들을 편찬인쇄하며, 중국과학기술사총서를 편역하며, 중국인문(中國人文) 및 사회과학총서를 편찬한다" 는 것이였다.  

                                (참고자료: <<中國新聞周刊>>)

 

그리고 장개석은 생전에 미국이 세 번이나 대륙에다 원자탄을 던지자는것을 그러면 절대안된다고 막았다. 그런다면 자기는 민족앞에 죄인이 된다는 것이였다. "文革"기간에도 그는 쏘련에서 같이 손잡고 대륙을 치자는 제의역시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일축해버렸던 것이다.

                            (참고자료 : 文革時將開石拒絶蘇聯帮助反共大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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