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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작곡가 - 鄭律成
2015년 04월 27일 22시 28분  조회:6408  추천:2  작성자: 죽림

격동의 시대를 거창한 악장에 담아낸 위대한 작곡가 정률성

석화

  

  

작곡가 정률성(鄭律成, 1918~1976)은 격동의 시대를 거창한 악장에 담아낸 위대한 작곡가로서 우리민족과 우리나라 음악예술의 전당에 빛나는 이름을 새겨놓은 걸출한 예술가이다.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지어 국내외 음악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 작곡가이기도한 정률성은 일생동안 397수(편)의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연안송》(1938), 《중국인민해방군군가(원 팔로군행진곡)》(1939), 《조선인민군행진곡》(1948)과 가극 《망부운》(1957)등은 모두 20세기 우리민족 및 우리나라 음악사에 빛나는 위치를 자리매김하고있다.

  

1. 나젊은 혁명음악가의 길

  

정률성은 조선에서 삼일만세항쟁이 발발하기 약 7개월 전인 1918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시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슬하에 아들 다섯, 딸 다섯 모두 열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어 열 자식 중  다섯이나 죽고 아들 넷에 딸 하나만 남았다. 아버지 정해업은 아홉 번째 자식으로 출생한 아들이 부유하고 은혜롭게 살아가라는 뜻을 담아 부은(富恩)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률성이 태어나 성장한 1920년대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민족적 억압과 가혹한 수탈이 극도에 달하고 또한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이 전개되던 때로서 중국 동북에서 유명한 청산리대첩이 펼쳐지고 북경, 상해를 비롯한 곳곳에서 윤봉길의거 등 항일투쟁이 치열하게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분이였고 그의 맏형과 둘째형은 직접 반일투쟁에 투신한 투사들이였다. 그들은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검거선풍을 피하여 중국에 망명해 항일활동을 하였는데 맏형 정효룡은 그 후 조선에 돌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여 8, 9년간의 옥살이 끝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둘째형 정인재는 운남 강무당에서 주덕장군과 동창생으로 군사를 배웠고 중국공산당에게 가입하였으며 국민혁명군 제 24군 중좌참모로 일하다가 대혁명 시기에 장렬히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항일애국 가정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생활은 그의 가슴속에 침략자를 증오하는 씨앗을 묻어주었으며 민족의 독립을 이룩하고 광명과 행복을 위하여 굽힘없이 싸우는 정신을 키워 주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정률성은 일제의 노예교육을 외면한 부친의 고집으로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공립학교를 거부하고 대신 민족정신이 농후한 사립학교인 신흥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별안간 돌아가시고 큰형도 감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가세가 기울게 되자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외롭게 남은 정률성은 중국으로 망명한 둘째형이 남겨 놓고 만돌린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오선지를 베끼며 세월을 보냈는데 이렇게 음악과 만난 정률성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외삼촌 최홍종의 축음기였다. 이 축음기를 통하여 정률성은 이 시기에 벌써 슈만의 《환상곡》과 《유모레스크》그리고 드보르작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등 세계명곡과 접촉하게 되였다.

1933년 봄에 항일애국자들이 중국의 남경에서 학교를 꾸리고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조선 남부도시 광주시에까지 전해졌다. 이 무렵 셋째형 정의은이 누님 정봉은을 남경에 데려가 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 박건웅과 결혼을 시키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고향으로 비밀리에 들어왔다. 정률성은 셋째형이 중국 남경 독립군학교의 밀령을 받고 우리민족 청년들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단호히 그를 따라 중국에 망명할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어머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큰 형이 죽고 둘째형, 셋째형과 누나가 모두 망명을 떠난 집에 그라도 남아야 한다는 당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셋째형이 중국으로 망명할 청년들은 목적지에 보내고 오다가 일제정탐군에 들켜 순사들에게 잡혀갔다. 물론 셋째형은 상인으로 가장을 했고 외삼촌이 도움을 주어 곧 풀려났으나 이 바람에 놀란 어머니는 정률성도 즉시 함께 떠나라고 하였다. 사회의 탁류 속에서 갈길 몰라 헤매며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통탄하던 정률성은 이렇게 16세의 어린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목포에서 “평안환” 배를 타고 셋째형과 함께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해로 망명해 왔다.

그 후 양자강 아래 기슭에 위치한 큰 도시 남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반일단체 의열단이 조직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항일애국이론을 학습하고 민족재생의 빛발을 보게 된 정률성은 1934년 겨울 이 학교를 졸업한 뒤 남경에서 강도일제를 반대하는 의열단 비밀활동을 진행하면서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그 뒤 친구의 소개로 상해에 있는 레닌그라드의 유명한 음악가인 소련교수 끄릴노와를 만나 성악공부를 하였다. 그의 음악적 천부는 성악교수로부터 이탈리아에 가서 계속 공부한다면 반드시 훌륭한 가수가 되리라며 극찬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났다. 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한해 반 동안에 그는 남경에서 수백리 떨어진 상해로 매주 한번씩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성악리론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명곡을 배워 중국어와 외국어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1935년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북경의 학생들이 “내전을 중지하라!”, “일제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벌인 “12․9학생운동”은 즉시 전국 각지에 파급되었으며 항일구국의 노래를 부르는 운동이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당시 전한 작사, 섭이 작곡으로 된 《의용군행진곡》은 진군의 나팔 소리와도 같이 거리와 마을, 공장과 광산들에 울려 퍼졌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수억만 인민들의 심장을 불타오르게 하였다. 이 세차게 굽이치는 노래의 물결 속에 뛰어든 정률성은 시위대열의 앞장에서 사람들의 붐비는 거리에서 항일구국의 노래를 부르고 가르쳐주었으며 애국청년들의 모임들에서 언제나 《의용군행진곡》을 목청껏 불러 그들의 가슴에 필승의 신념과 굽힐 줄 모르는 투지를 안겨주었다.

1936년 봄, 정률성은 진보적 청년들이 조직한 항일문예 단체인 “5월문예사”에 들어가 핵심요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문예사 발기자 추취도가 쓴 가사에 곡을 달아 《5월의 노래》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그 즉시 “5월문예사”의 사가로 인정받고 전체 사원들 속에 퍼지게 되었다. 이 문예사의 활동에서 정률성은 중국의 문예일군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들의 투쟁에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큰 힘을 얻었다.

1937년 “7․7사변” 후 정률성은 상해에서 대공전복무단(大公戰服務團)에 참가하여 선전대대 음악대장의 중책을 맡고 열화 같이 뜨거운 심정으로 선전선동사업을 진행하였으며 항일애국정신으로 자기를 무장하고 애국적인 음악가들과 사귀었다. 이해 8월 그는 남경에서 파리음악대학 고급작곡반을 졸업하고 돌아온 선성해를 만났다. 선성해는 그 때 자기가 방금 지은 노래 《구국군가》를 정률성에게 주면서 불러보라고 하였다. 오래 전부터 음악작품을 통하여 선성해를 잘 알고 있으며 흠모해 오던 정률성은 그의 작품을 받아 쥐자 노래의 격조 높은 선율, 절절한 정서에 깊이 매혹되였다. 첫 상봉에 이처럼 정열적이고 재간있는 젊은 음악가와 사귀게 된 선성해는 몹시 기뻐하면서 “우리 함께 합작해 봅시다!”라고 하며 정률성의 손을 굳게 잡아 주었다.

  

  

2. 《연안송》, 어머니품에 바치는 송가

  

1937년 여름에 항일전쟁의 포성이 울렸다. 온 나라 여러 민족의 청년들은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구원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항일의 중심인 연안에 밀려들었으며 여기서 항일애국의 사명을 받아 안고 또다시 항일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이해 10월 열아홉이 된 정률성은 그때 항일구국운동의 지도자들이었던 리공박, 두군혜의 고무와 지지하에 서안 팔로군행정처 주임 림백거동지에게 보내는 지하공산당원 선협부(조선인, 후에 국민당에 의해 암살당했음)의 소개편지를 지니고 남경을 떠나 연안으로 향하였다. 수십일 후, 바이올린을 어깨에 메고 세계명곡집을 가슴에 품은 그는 끝내 왜적의 첩첩한 봉쇄망을 뚫고 수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으며 꿈에도 그리던 혁명의 성지 연안에 도착하였다.

정률성은 어려서부터 음악으로 성공할 결심을 하여 많은 민요와 세계명곡을 익혔고 배의 힘을 키우기 위해 복부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호흡훈련을 하였다. 그는 모든 삶에서 음악을 떼어내지 않아 캄캄한 방안에서도 콧노래로 작곡을 했고 잠자리에서도 악곡을 구상했을 정도였다. 연안의 땅굴집에 살면서 조밥을 먹는 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어디에서나 항일애국의 기상이 나래치고 명랑한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는 혁명의 성지는 말 그대로 민족애의 정열과 청춘의 기백으로 정률성의 심장을 틀어잡았다. 그는 섬북공학원 제 1기 7대에서 공부하면서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가창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수천명 대중들의 앞에 나서서 대합창을 지휘하고 하였다.

그 이듬해 5월 연안 로신예술학원이 창립됨에 따라 정률성은 섬북공학원으로부터 로신예술학원에 들어가 근 넉달동안 공부하였다. 어느 날 저녁 무렵 군중집회가 끝난 뒤 정률성은 몇 명 학우들과 함께 북문 밖에 있는 산기슭에 올라가서 연안성의 전경을 굽어보았다. 연안의 장엄한 옛성, 석양에 비친 산마루의 보탑, 맑은 연하수, 그리고 동녘에 떠오르는 밝은 달은 예술가의 가슴을 치는 장면이었다. 대열을 지어 보무당당히 행진하는 전사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노래소리, 웃음소리, 보탑산 봉우리와 연하강물결에 비낀 저녁노을, 이처럼 장엄하고 황홀한 화폭 앞에서 정률성은 가슴속에 넘치는 격정을 누를 길 없어 ‘아, 연안!’하고 환성을 올리었다.

연안에 들어온 뒤 몇 달 동안 이 영광의 도시에 드리는 서정적이며 전투적인 송가의 선율 속에 밤낮으로 갈등을 느끼고 있던 그는 옆에 서있는 문학학부의 여학생 막야에게 “나에게 가사를 써주오!”라고 부탁하였다. 그의 정서는 즉시 막야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민족은 달라도 하나의 신념과 이상을 품고 새로운 기상이 나래치는 연안의 품에 안긴 같은 열혈청년으로서 그들의 생각과 지향은 너무나도 일치되었다. 때문에 막야가 쓴 《연안송》의 가사를 받아 쥐었을 때 정률성은 용솟음쳐 오르는 샘물과도 같이 심장의 뜨거운 격정을 쏟아부어 단숨에 작곡을 끝낼 수 있었다. 중국혁명의 역사와 더불어 빛나는 혁명송가 《연안송》은 바로 이와 같이 우리 조선족의 참된 아들 정률성에 의해 작곡된 것이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철벽의 성새(城塞), 승리의 요람

그대 이름 세월과 함께

역사에 길이 빛나리

  

이 해 봄 어느날 저녁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이 참석한 련환모임에 《연안송》이 처음으로 무대에서 불려졌다. 끓어 넘치는 정치적 격정을 담은 정률성의 격양된 노래소리는 모주석의 박수와 관중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공연이 있은 다음날 중공중앙선전부에서 《연안송》악보를 가져갔고 이 노래는 재빨리 전선과 후방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는데 심지어는 국민당통치구와 동남아의 화교에게까지도 퍼졌다.

송가로서의 정서적 폭과 숭엄한 감정을 잘 살린 노래 《연안송》은 실로 중국인민의 애국투쟁을 승리의 한길로 인도하는 당중앙의 소재지 연안에 대한 열렬한 찬가이며 침략자를 몰아내고 자유로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그날을 그리는 희망찬 포부와 혁명적 낭만을 그대로 진실하게 담은 불멸의 송가이다. 이 노래의 창작과 유행 과정에 대하여 정률성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항일전쟁이 진행되던 8년동안에 이 노래는 정식으로 출판된 적이 없지만 나래가 돋친 것처럼 연안으로부터 전선에로 해방지역으로부터 국민당 통치지역에로 심지어는 멀리 동남아세아 지역에까지 날아갔습니다. 실로 이것은 상상밖의 일입니다. 이 노래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인민들을 항일투쟁에로 부른 당의 호소가 온 나라 인민의 항일열의를 불어일으키고 우리 음악예술인들에게 넓은 무대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며 이 노래가 이렇듯 널리 유행되고 커다란 생활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온 나라 인민들이 혁명의 성지이며 항일의 중심인 연안을 무한히 동정하며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로 불멸의 송가《연안송》은 항전시기 중국의 수천수만의 열혈청년들에게 일제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영웅적인 투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도 우리들은 이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연안시대의 혁명전통을 생각하게 되며 원로항일애국자들을 그리게 된다. 극악무도한 “4인무리”들이 살판치던 살벌한 나날에도 행동의 자유와 말할 권리마저 빼앗긴 우리 당의 오랜 동지들이 《연안송》을 입속으로 부르면서 서로 고무지지하고 진리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지 않았던가!

  

3. 《팔로군행진곡》의 탄생

  

1939년 1월 10일 정률성은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조직의 교양과 동지들의 배려아래, 정률성은 들끓는 항일활동속에 더욱 깊이 빠져들어 꾸준히 모색하고 탐구하는 과정에, 음악창작에서도 생기발랄한 왕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의 음악교원으로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온 학생들에게 《연안송》등 애국가요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의 노래소리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믿음을 안겨 주었다.

이해 8월 정률성은 연안 남문밖 서산요에 있는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의 한 땅굴집에서 시인 공목과 함께 생활하였다. 어느 날 정률성은 공목에게 “우리도 대합창을 만들어 봅시다.”라고 말하였다.

 

“대합창이라니?”

“물론《팔로군대합창》이지요!”

  

선성해의 《황하대합창》이 방금 불려지기 시작한 그 때였으므로 《팔로군대합창》을 창작하자는 정률성의 뜻을 공목은 대뜸 알아차렸다. 원래 전선에서 연안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는 공목은 풍부한 전투생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불과 사나흘 사이에 《팔로군대합창》의 가사 여덟수를 전부 써내었다. 작품은 팔로군이란 이름에 맞추기 위해 여덟 부분으로 구성된 것인데 《팔로군 군가》, 《팔로군행진곡》, 《유쾌한 팔로군》, 《자야강 병사의 노래》, 《기병가》, 《포병가》, 《군대와 인민은 한집안 식구》, 《팔로군과 신사군》이 여덟수의 가사는 그 이름으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률성의 요구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피아노도 풍금도 없는 조건에서 정률성은 방안에서 팔을 저으며 걸음을 걸으면서 작곡했으며 때로는 산속에 들어가 목청을 돋아 불러보면서 작곡하였다. 실로 천재음악가라는 표현이 어울릴 일인데 이는 동서고금을 털어서 거의 맨손으로 위대한 음악을 창작해 낸 사례이기도할 것이다. 단지 21세 나이의 어린 청년이 제대로 된 작곡교육을 받은 바도 없건만 포연이 쏟아지는 전쟁터 토굴 속에서 지내며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천재성이 용솟음치며 이 노래를 작곡을 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중국어가 서툴렀다. 그러나 시인 공목을 조르고 다그치며 작사를 재촉하면서 그의 구상을 확실하게 공목에게 전하였다. 《기병가》를 창작할 때에 말발굽 소리를 가사에 써 놓도록 요구하고 《포병가》를 창작할 때에는 쿵쿵하는 포소리를 가사에 써 넣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행진곡은 긴 구절과 짧은 구절을 섞어 엮고 음률이 조화를 이루게 되며 절주가 강하되 중간에 네글자로 된 구절을 세 개 만들어 넣을 것을 요구하여 공목이 그대로 가사를 써주었다.

정률성은 공목이 쓰는 대로 갖다가 작곡을 하는데 피아노도 풍금도 없는 속에서 그저 머리를 흔들며 흥얼거리다가 손으로 박자를 치기도 하고 때로는 책상 주위를 빙빙 돌며 발구름으로 곡조를 구상하다가 공목이 옆에서 웃고 있으면 움집을 나가 산기슭에서 산비탈에 올라 작곡을 하였다. 그는 늘 피아노 대신 콧노래로 곡을 부르며 고쳐 나갔고 온몸을 바쳐서 창작에 열중하였다. 그는 자기가 지은 노래들을 먼저 작사자인 공목에게 불러주면서 그의 의견을 듣고는 하였다. 이와 같이 작곡하는데서 시간이 좀 걸려 8월말인가 9월초에야 《팔로군대합창》의 작곡이 전부 끝났다.

이 해 12월 당조직의 결정에 의하여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성악을 가르치게 된 정률성은 영용한 팔로군장병들에게 드리는 노래 《팔로군대합창》을 학생과 전사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 대오

조국의 대지 위에 섰다.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 힘 막을 자 그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

두려움 없이 굴함 없이 영용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자

자유의 기치 높이 날리자

아, 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동무들 발을 맞춰 항일의 싸움터로

동무들 발을 맞춰 적들의 후방으로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 대오

나가자 화북벌로! 장성밖으로!

  

           ―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인민군대의 영용무쌍한 형상을 창조하고 인민군대의 백전백승의 영웅적 기백을 심각하게 표현한 《팔로군대합창》 그의 박력있고 장중한 노래들은 누구의 비준도 받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하여 삽시에 연안의 여러 기관과 부대, 학교들에 퍼졌으며 항일전쟁 대오에서 널리 불리게 되었다.

《팔로군대합창》은 1939년 겨울에 로신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책으로 만들어지고 1940년 초에 정률성의 지휘하에 로신예술학원 악단과 합창단의 출연으로 《팔로군대합창》의 첫공연이 연안 중앙대강단에서 진행되어 절찬을 받았다.

이 해 여름 팔로군 총정치부 선전부장 소향영은 정률성과 공복을 식당에 청하여 불고기를 대접하고 《팔로군대합창》의 노래들이 이미 여러 항일근거지들에 퍼져 광범한 전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고 알리면서 그들의 성과를 치하하였다. 그 뒤 《팔로군군가》와 《팔로군행진곡》이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정식으로 《팔로군잡지》에 발표되었다.

지난 항일전쟁의 초연탄우 속에서 이 노래들은 일본침략자들을 때려 엎는 승리의 한길로 우리 군대 전사들을 힘있게 고무한 진군의 나팔로 되었다. 항일전쟁이 끝나고 팔로군이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짐에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고쳐졌다. 1949년 10월 1일 수도 북경에서 성대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의식이 진행되었을 때 정률성이 지은 이 명곡은 천안문광장 상공에 울려 퍼졌다. 그 뒤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되어 인민군대의 필승불패의 상징으로 되었으며 따라서 정률성의 이름은 전국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4. 조선에서의 나날에

  

1945년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해방을 맞은 조선은 재능 있는 작곡가 정률성을 불렀다. 10여년만에 찾아온 어머니의 나라는 사람마다 환희에 들끓고 산천도 거리도 마을도 새롭게만 안겨 왔다. 조국을 되찾은 기쁨 속에서 일어서는 조선의 새 모습은 작곡가 정률성의 가슴을 한없이 설레게 하였다. 그는 조직의 배치에 의하여 1946년 1월 해주에 가서 황해도 당선전부장으로 일하면서 해주음악전문학교를 꾸렸으며 1947년 봄에는 평양에 돌아와 보안간부훈련대대부 구락부장(즉 문화부장)을 담임하였고 이해 3월 10일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현재 조선인민군협주단 전신)을 조직하고 그 협주단 단장의 중책을 맡았다.

 

      우리는 강철 같은 조선인민군

      평화와 정의 위에 싸우는 전사

      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

      인민의 자유행복 생명을 삼고

      규율과 훈련으로 다진 몸이니

      승리의 민주대열 조선의 인민군

      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자

  

      ― 《조선인민군행진곡》

  

정률성이 작곡한 《조선인민군행진곡》(박세영 작사)은 조선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계승한 조선인민군의 군가로서 인민군장병들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고무한 우수한 음악작품이다. 이밖에도 정률성은 《조선해방행진곡》(강승환 작사), 《조중친선》(김순석 작사), 《조국의 아들》(김우철 작사) 그리고 대합창곡인 《두만강》(조기천 작사), 《동해어부》(김학철 작사)등 30여 수의 노래들을 창작함으로써 조선인민의 새 조국건설과 중조 두 나라 인민들 사이의 친선단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음악가 정률성의 자랑찬 성과는 조선 정부와 인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1948년 2월 8일 일제에게서 되찾은 조국의 경제건설을 위하여 훌륭하게 일한 정률성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으며 1948년 11월 23일에는 또 “8․15 조국탈환 3주년기념공동준비위원회”의 상을 수여하였다.

1949년 4월 조선국립음악대학이 창립된 뒤 정률성은 그 대학에 발령을 받아 작곡부장으로서 교편을 잡고 후대양성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끓어넘치는 열정으로 조선의 새 가극창작에 달라붙었다. 그는 가극 《막을 수 없는 그의 노래소리》(사량 작사)를 창작하여 1950년 8․15 축전무대에 내놓으려고 하였지만 이 해 6월 25일 조선전쟁이 발발함으로 말미암아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지키기 위한 조선 조국해방전쟁의 불길 속에서 정률성은 농촌에 나가 인민대중들에 대한 조직전선 사업을 진행하면서 《인민공화국의 기치》(석광희 작사), 《공군의 노래》(김학철 작사), 《우리는 땅크 부대》(박남수 작사)등 10여 수의 노래들을 창작하여 인민군 장병들을 힘있게 고무하였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이 방공호나 눈보라치는 길가에서 입김으로 만년핀을 녹여가며 쓴 것이다.

  

5. 새나라 건설의 교향곡을 울리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년 후인 1950년 10월, 정률성은 80고령이 되는 어머님을 모시고 다시 중국에 왔다. 그의 안해와 딸은 이보다 먼저 북경에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중국에 돌아온 후 작곡가 정률성의 창작적 재능은 더욱 빛났다. 그는 선후하여 북경예술극장,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의 직업작곡가로 있으면서 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다. 1952년에 그는 사품치며 흐르는 중국남방의 가릉강에 가서 뱃사공들과 함께 생활하며 합창곡 《강위의 노래소리》를 지었으며 1953년에는 흰 눈에 뒤덮인 중국북방의 흥안령 원시림속에 들어가 벌목공들과 함께 일하며 《채벌가》, 《홍안령에 눈이 내리네》등 노래들을 지었고 1954년에는 남해의 주산군도에 찾아가 《강대한 함대 바다를 누비네》,《포정은 출동했다》,《전진, 인민공군》등 군가들을 창작하였다. 그 뒤 그는 새 기상이 나래치는 중국 농촌의 새 모습을 노래한 대합창 《행복한 농장》등을 내놓았다. 이밖에도 그는 조국의 미래인 귀여운 어린이들에게 《우리는 행복해요》, 《푸른 조국》, 《별노래》, 《평화의 비둘기》,《소년운동원가》등 소년아동가요를 비롯한 40여수의 노래들을 지어 주었다. 로동자와 농민, 해방군전사와 어린이들을 위한 다방면적 주제의 이런 음악작품들, 생활의 기백과 정열이 넘쳐흐르는 그의 노래들에서 우리는 새 중국의 건설사업과 빛나는 미래에 대한 음악가 정률성의 불같은 사랑과 기대를 가슴 뜨겁게 느낄 수 있다

1957년과 1958년에 그는 운남성에 여러번 찾아가서 라이족의 민간전설과 음악을 깊이 연구하고 5막 가극《망부운(望夫云)》을 창작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 뒤 1962년과 1963년에 그는 또 현실주제의 새 가극 《설란(雪蘭)》 창작에 심혈을 전부 쏟아 부었다.

그러나 음악가의 이러한 불타는 창작정열은 1966년에 이르러 “문화대혁명”이란 때 아닌 시련을 맞았다. 그러나 이 “10년 동란”의 무서운 재난과 고통을 이겨낸 작곡가 정률성은 다시 오랫동안 막혔던 창작열의를 터뜨려 중국인민해방군 창건 50돌과 항일전쟁 개시 40돌에 드릴 교향악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중국 인민해방군》, 가극 《베쮼》을 비롯한 대형음악작품 창작계획을 짜놓고 새로운 창작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기나긴 혁명의 길에서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으며 병이 생겨도 제때에 의사를 찾지 않고 제대로 쉬지 않은데다가 “4인무리”의 심한 압제와 타격을 받아 여러해 동안 고혈압으로 고생하여 오던 정률성은 이 때 혈압이 180~220 사이를 오르내렸지만 손에서 한시도 붓을 놓지 않았다. 혈압이 높아 지탱해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책상에 엎드려 좀 쉬었다가 계속 일하곤 하였다. 서거하기 이틀전에는 지프차를 타고 수백리 길을 달려 장가구에 가서 주은래 총리를 추모하는 조곡을 창작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장가구에서 돌아온 이튿날인 1976년 12월 7일 아침, 그의 몸은 몹시 지쳤고 혈압은 올라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야외에 나가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 새 작품도 구상하려고 여나므살되는 조카딸과 어린 손자애를 대리고 북경의 서북쪽 교외에 있는 창평에 고기잡으러 갔다. 찌뿌듯하게 흐린 날씨에 맵짠 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이날은 몹시도 추웠다. 오전 열시에 창평운하에 이른 정률성은 투망도구들을 꺼내어 다년간 익힌 솜씨로 고기그물을 던졌으며 이윽고 그물을 잡아당기려 하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뇌출혈이 생겨 강기슭에 쓰러지고 말았다. 두 어린이의 놀란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웃동네 고마운 사람들에 의하여 즉시 창평병원에 호송되어 구급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이날 오후 5시10분에 58세를 일기로 그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다. 그 후 그는 북경 근교의 팔보산에 묻혔다.

정률성의 서거는 온 나라 여러 민족 인민들과 예술인들의 커다란 슬픔을 자아내었다. 그의 서거를 알리는 비보를 접한 조선족인민들은 그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였다. 한평생을 빛나는 공산주의 위업과 중국인민의 해방과 건설위업에 남김없이 바친 우리 조선족의 우수한 음악가 정률성은 애석하게도 우리 곁은 떠나갔지만 그가 남긴 불멸의 노래들은 의연히 우리나라 인민들속에서 높이 불리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6. 정률성음악의 가치

  

작곡가 정률성의 생애는 바로 음악의 생애이다. 그는 우리민족이 낳은 저명한 작곡가로서 우리나라에서 섭이, 선생해와 나란히 3대 작곡가로 꼽히는 훌륭한 작곡가이다. 작곡가 정률성의 음악가적 생애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로 그는 혁명투쟁사를 대변하는 훌륭한 작품을 남긴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의 음악은 혁명을 위해 불타오르는 불덩어리 그대로였다. 그는 늘 력사상황을 떠난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제침략으로 유구한 민족력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항일전쟁에 투신하기위해 망명한 애국음악가가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항일전쟁 그것뿐이었다. 또한 중국과 조선에서의 전쟁시기 그리고 조국의 평화건설시기에도 그의 음악은 항상 인민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았다. 그의 음악은 바로 이렇게 혁명투쟁의 서사시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둘째로 그의 음악적생애는 독창적인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한 세계적인 천재음악가로서의 삶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섭이나 선성해 같은 음악가가 있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악조건의 어려움 속이라 할지라도 나름으로 최소한의 음악환경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정률성은 사실상 뚜렷한 정규음악교육을 받은 기간이 없었고 대신 혈혈단신 망명청년에게는 이국땅에서 전란에 쫓기고 총탄에 흔들리는 극한상황만이 주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예술적삶은 여러 천재들이 그러하듯 악조건을 승화시켜 영광을 얻어낸 위대한 인간승리의 삶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률성이 위대한 천재성으로 이끌려진 천부의 음악가임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셋째로 그는 인간과 풍속과 생활을 사랑한 작곡가였다. 그는 단지 책상머리에 앉아서 잔재주로 작곡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작곡을 할 때는 정면으로 삶에 뛰어들어 완벽할 정도로 처절한 경험을 겪고서 창작을 했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처절한 체험이 없는 잔재주 음악을 항상 거부하며 정열의 삶을 산 인물이였다. 정률성이 평생을 바쳐서 작곡한 300여곡의 작품은 국내외 음악사로 볼 때 결코 쉬운 기록은 아닐 것이다.

넷째로 정률성은 철학이 있는 음악가였다. 문화대혁명의 어둠 속에서도 끝까지 변절을 하지 않고 어둠의 음악을 만들지 않은 그의 지조는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정률성의 음악을 이용하려는 “4인무리”들의 집요한 공격과 회유, 탄압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고서 올곧은 철학을 지킬 수 있었음에 그의 삶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시류에 따르며 안일을 추구하는 음악을 통해서 편한 삶을 살겠다는 의식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 그의 생애이다. 정률성은 예술을 정면으로 사랑한 본격 창작의 참다운 음악가였다.

일찍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왕진은 정률성의 창작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섭이, 선성해의 뒤를 이어 나타난 또 한분의 걸출하고도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고 말했고 저명한 시인 하경지는 “나는 정률성을 통하여 조선민족을 알았다. 정열적이고 재간 많고 정의감과 헌신성이 강한 것이 조선민족인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정률성을 통해 또 수많은 조선민족의 아들딸들이 중화민족의 해방위업을 위해 총을 들고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정률성처럼 시대의 앞장에 서서 중국인민을 혁명의 제1선으로 고무추동해준 일류의 예술가를 낳아 키워준 것이 조선민족인줄 알았다.”고 말하였다.

일찍 조선에서는 정률성의 음악생애를 담은 예술영화《음악가 정률성》을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1992년 제2차 “2·16 영화상” 작품상을 받았다. 또한 2002년 장춘영화촬영소에서도 정률성의 혁명예술생애를 그린 영화 《태양을 향해》를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그해 중공중앙선전부 등 부문에 의해 16차 당대회 헌례작품으로 확정되였으며 2004년 조선 평양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05년 11월 11일 그가 태어난 고장인 한국 광주시에서 정률성의 이름으로 진행된 음악제가 개최되었다. 이 음악제에서는 작곡가 정률성의 영상물 및 노래 등을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의 대표적 가수와 합창단들이 그의 음악을 함께하였고 한국과 중국 그리고 조선에서의 작곡가 정률성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하였다. 이 음악제는 현재 한국에서 《광주정률성국제음악제》라는 이름의 국제적인 행사로 자리 잡아 매년 성황리에 펼쳐지고 있다.

정률성, 그 이름은 그의 불멸의 작품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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