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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구석진 곳에서 시인을 만나다 - 변영로 시인
2016년 01월 13일 04시 13분  조회:4668  추천:0  작성자: 죽림

 

한 시대를 바람처럼

살다 간 풍류객 ......시인 변영로(卞榮魯)

 

 

 

 

 

 

몇 날 며칠 밤을 앉은자리에서 꼬박 새우며 술을 마셨다는 얘기나, 당대의 4大酒仙으로 일컬어지는 오상순, 이관구, 염상섭 등과 함께 대취하여 성균관대학 뒷산 사발정 약수터에서부터 옷을 홀딱 벗은 채 소를 타고 내려와 인근 주민들을 기겁하게 만들어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순경에게 끌려가는 곤경을 겪었다는 얘기, 술에 대취한 그가 홍난파의 집 안방에서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으로 벌거벗고 자다 심한 갈증으로 깨어나 물을 마시려고 마루로 나섰다가 마침 여름철이라 마루에 모기장을 쳐놓고 자고 있던 그 집 아낙네들 위로 넘어져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는 예기들은 그 전대미문의 신화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변영로는 이미 소학교 취학 연령 이전부터 아버지 무릎에 앉아 한두 잔씩 얻어마시던 버릇이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주도의 역사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卞榮魯는 1898년 한말의 문장가이며 선비인 변정상과 진주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형님 두 분이 있는데, 큰형은 국한학자이며 법관을 지낸 卞榮晩이고, 중형은 문학자이며 나중에 국무총리를 지낸 卞榮泰이다. 이들 삼형제는 중국의 큰 문장으로 이름을 널리 떨치며 唐宋八大家의 세 자리를 차지한 蘇洵 3부자에 비견하여 한국의 ‘삼소(三蘇)’라고 불릴 정도로 그 재주가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약관의 나이인 20세에 법관직에 오를 만큼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던 卞榮晩은 한말 석학 金允植을 가리켜 ‘시골 훈장감’이라고 거침없이 폄하했고, 대학자로 꼽히는 鄭寅普를 가리켜서는 겨우 ‘면무식했다’고 짜디짠 평을 하기도 하였다.

변영로는 서울 계동 계동부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인 1912년 체육교사와의 마찰로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 등지를 유람하다가 같은 해 평창 이씨 흥순과 혼인했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 월 만에 마친 뒤 중앙고보 등에서 영어교사 생활을 하던 중 YMCA 구석진 방에서 일경의 눈을 피해가며 3.1독립선언서를 영역해 해외로 발송하는 일을 했다.

 

1920년에 문예지 <폐허(廢虛)>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평문 <메테를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잡지 ‘신천지’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 많은 나에게>. <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며 정식 문단 등단의 절차를 밟았다. 1921년에는 시동인지 <장미촌> 동인으로 참가하는 한편 <개벽>에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수필과 발자크의 작품들을 번역해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땅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도량으로 술과 풍류를 즐겼으나 도가 지나친 인간적 실수를 반성하는 뜻에서 몇 번이나 금주를 선언하고 실천에 옮겼다. 처음에는 은으로 만든 금주패를 목에 걸고 다녔는데, 한동안은 술자리에서 그것을 풀어 상 위에 올려놓고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결심은 굳은 것이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동아일보’ 지면에 ‘금주단행론’이란 글까지 써서 금주 맹세를 선언한 일이다. 그러나 그 결실도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동키호테를 배우고 싶다. 닮고 싶다. 하다 못하면 흉내라도 내고 싶다.“고 했던 변영로는 1961년 3월 4일 영원히 눈을 감았다. 궁색한 형편에 처해 있으면서도 서울의 일류 양복점이던 ‘源泰洋服店‘이나 ’福章洋服店‘에서 꼭 맞춤옷만 해 입고, 구두는 인편을 통해 상해나 홍콩에서 맞추어 신었다는 변영로, 우리는 앞으로 그러한 도량을 지닌 풍류객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酩酊)40년>(1953), <樹州詩文選>(1959), 영문시집<진달래 동산>(1948)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한 <수주변영로 문선집> 등을 남겼다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

 

 

혜화동(惠化洞우거(寓居)에 지낼 때이었다어느 하룻날 바커스(Bacchus)*의 후예들인지 유령(劉伶)*의 직손(直孫)들인지는 몰라도 주도(酒道)의 명인(名人)들인 공초(空超-吳相淳), 성재(誠齋-李寬求), 횡보(橫步-廉想涉주삼선(酒三仙)이 내방하였다.

주인이 불주객(不酒客)이란대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 문제인데주인이랍시고 나 역(술 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이었다허나딱한 노릇은 네 사람이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 원(數三圓), 그때 수삼 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3~4인이 해갈(解渴)함 직하였으나 오배(吾輩)* 4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有不如無)*이었다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와는 다르다 하여도 1개의 악 지혜(기실 악은 없지만)를 안출하였다.

동내(洞內)에서 모인(某人집 사동 하나를 불러다가 몇 자 적어 화동(花洞납작집에 있는 동아일보사로 보내었다당시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은 고(고하(古下-宋鎭禹)이었는데편지 사연은 물을 것도 없이 술값 때문이었다. -좋은 기고(寄稿)를 하여 줄 터이니 50원만 보내달라는. - 우리는 아이를 보내 놓고도 마음이 약간 조이지를 않았다거절을 당한다든지 하면 어쩌나 함이었다. 10, 20, 30한 시간참으로 지리(支離)시간의 경과이었다마침내는 보내었던 아이가 손에 답장을 들고 오는데우리 4인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것같이 한군데로 집중되었다직각(直覺)도 직각이지만봉투 모양만 보아도 빈 것은 아니었다급기야 뜯어보니 소기(所期)*대로아니 소청대로의 50우화(寓話중의 업오리 금 알 낳듯 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50원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쓰느냐는 공론이었다그때만 하여도 대금(大金)이다아무리 우리 넷이 술을 잘 먹는대도 선술집에 가서는 도저히 비진(費盡)시킬 수 없었던 반면에 낮부터 요정에를 가서 서둘다간 안심 안 될 정도이었다끝끝내 지혜(·惡間)의 공급자는 나로서 나는 야유(野遊)를 제의한바일기도 좋고 하니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 가지고 나 있는 곳에서 지척인 사발정 약수터(성균관 뒤)로 가자 하니 일동 낙()다 하였다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명륜동에 있는 통신중학관(故 姜相熙 군이 경영하던)으로 가서 그곳 하인 어()서방을 불러내어 이리저리하라 만사를 유루(遺漏)*없이 분부하였다우리는 참으로 하늘에나 오를 듯 유쾌하였다.

우아하게 경사진 잔디밭 위에 둘러 않았는데 어 서방은 술심부름안주 장만에 혼자서 바빴다술은 소주이었는데 우선 한 말은 올려다 놓고 안주는 별것 없이 냄비에 고기牛肉를 끓이었다참으로 그날에 한하여서는 특히 쾌음(快飮), 호음(豪飮)하였다객담·농담·고담(古談치담(痴談문학담을 두서없이 지껄이며 권커니 자커니 마시었다.

이야기도 길고 술도 길었다이러한 복스러운 시간길이 계속되기를 빌며 마시었다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고금 무류(古今無類)의 대기록을 우리 4인으로 하여 만들게 할 천의(天意랄까그는 하여(何如)했던 국면이 일변되는 사태가 의외에 발생하였다.

그 때까지는 쪽빛같이 푸르고 맑은 하늘에 난데없는 검은 구름 한 장이 떠돌더니 그 구름장이 삽시간에 커지고 퍼지어 온 하늘을 덮으며 비가 쏟아지기를 시작하였다그야말로 <유연작운(油然作雲패연하우(沛然下雨)> 바로 그대로이었다처음에는 우리는 비를 피하여 볼 생의(生意)도 하였지만일가 하나 없는 한데이고 비는 호세 있게 내리어 속수무책으로 살이 불을 지경으로 흠뻑 맞았다우리는 비록 쪼루루 비두루마기를 하였을망정 그때의 그 장경(壯景)! 산중취우(山中驟雨)의 그 장경은 필설난기(筆舌難記)*이었다우리 4인은 불기이동(不期而同)으로 만세를 쾌창(快唱)하였다.

그 끝에 공초(空超선지식(善智識), 참으로 공초 식 발언을 하였다참으로 기상천외의 발언이었던 바다름 아니고 우리는 모조리 옷을 찢어 버리자는 것이었다옷이란 워낙이 대자연과 인간 사이의 이간물(離間物)인 이상,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따는 그럴 듯도 한 말이었다공초는 주저주저하는 나머지 3인에게 시범 차(示範次)로인지 먼저 옷을 찢어 버리었다남은 사람들도 천질(天質)이 그다지 비겁은 아니 하여 이에 곧 호응하였다.

대취(大醉)한 사나한(四裸漢)들 광가난무(狂歌亂舞)를 하였다서양에 Bacchanalian orgy (바커스 식 躁宴이란 뜻)란 말이 있으니아무리 광조(狂躁)한 주연(酒宴)이라 하여도 이에 비하여서는 불급(不及)이 원의(遠矣)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언덕 아래 소나무 그루에 소 몇 필이 매여 있음을 발견하였다이번에는 누구의 발언이거나 제의이었던지 이제 와서 기억이 미상하나우리는 소를 잡아타자는 데 일치하였다옛날에 영척(甯戚)*이가 소를 탔다고 하지만 그까짓 영척(甯戚)이란 놈이 다 무엇이냐그따위 것도 소를 탔는데 우린들 못 탈 배 어디 있느냐는 것이 곧 논리이자 동시에 자세(姿勢)이었다하여간우리는 몸에 일사(一絲불착(不着)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똘물(소낙비로 해서 갑자기 생기었던)을 건너고 공자(孔子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 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장도(壯圖-市中까지 오려는)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박쿠스로마 신화의 주신(酒神바쿠스(Bacchus). *유령(劉伶): 중국 西晉竹林七賢의 한 사람술 대가酒德頌을 지음 *오배(吾輩): 우리들. *유불여무(有不如無): 있으나 마나. *소기(所期): 바라던 대로. *유루(遺漏): 빠짐없이. *필설 난기(筆舌難記): 글이나 말로는 다 옮기지 못함. *영척(甯戚): 춘추시대 나라 정치가.白石歌를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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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1897~1961) 시인 · 수필가.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 1922년 이후 해학이 넘치는 수필과 발자크의 작품 등을 번역해서 발표. 1924년 일제 강점 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내놓았으며동아일보사 재직 시에는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健脚)’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회사를 물러나기도 하였음그의 수필집 명정 40(酩酊 四十年)은 너무나 유명. 1981년 3, 20주기를 맞아 수주 변영로 문선집(樹州卞榮魯文選集)이 출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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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이미지 

 
  • 일제시대 변영로(卞榮魯 )는

    누구입니까?


    변영로는 부평부 오정면 고강리(古康里) 출신이다.

    변영만, 변영태 형제의 막내 동생으로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귀국하여 기독교청년학교 및 중앙고등학교 영어 교사를 지냈고, 1919년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920년 「폐허(廢墟)」 동인을 비롯한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조선의 마음』 등의 시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출발하여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어과 교수로 취임했다. 작품집으로 『수주(樹州) 변영로 문학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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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택된 답변답변

    일제시대 변영로(卞榮魯 )는 누구입니까?

    -변영로(卞榮魯)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한 시인입니다.

    -호 수주(樹州). 부천 출생. 영만, 영태와 함께 3형제이다. 12세 때 중앙학교에 입학하여 3학년 때 중퇴하였다. 1913년 중앙기독청년회관 영어반을 6개월만에 수료하고, 1914년 영시(英詩) 《코스모스》를 발표하였다. 1918년 중앙고보 영어교사로 들어갔고,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과 발자크의 작품 등을 번역해서 발표하였다. 1924년 일제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내놓았고, 193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산호세대학을 수료하고 귀국,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 《신가정(新家庭)》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그들의 압력으로 회사를 물러나기도 하였다. 1927년 ‘우리의 것’을 알아보기 위해 백두산에 올라가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定界碑)》 《천지(天池) 가에 누워》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은 무류실태기(無類失態記)로서 너무나 유명하고, 1981년 3월 그의 20주기를 맞아 새로 발견된 그의 작품까지를 수록하여 《수주 변영로 문선집(樹州卞榮魯文選集)》이 출간되었다. 1949년 제1회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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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변

    [질문] 일제시대 변영로(卞榮魯 )는 누구?

     

    변영로(卞榮魯, 1898∼1961)는 시인·영문학자로 서울 출신이며 아호는 수주(樹州). 정상(鼎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입니다

     

    이하는 변영로(卞榮魯)의 생애 및 활동사항이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 마찰이 일어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평창 이씨(平昌李氏)흥순(興順)과 결혼하였다. 1915년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도 있다. 1920년에 ‘폐허(廢墟)’,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신민공론 新民公論≫ 주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기자, 1934년 ≪신가정 新家庭≫ 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 1955년에는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청춘 靑春≫에 영시 <코스모스 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폐허≫ 제2호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 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22년에는 ≪신생활 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 활동 초기부터 과작(寡作 : 작품을 적게 제작함.)의 시인이었다.

    ≪신생활≫·≪동명≫·≪개벽 開闢≫ 등을 통하여 한 해에 5, 6편 정도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이 평문관(平文館)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처분된 바 있다.

    그의 시작품들은 가락이 부드럽고 말씨가 정서적이어서 한때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까지인데,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이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 <논개>를 들 수 있다.

    2기는 그 뒤부터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실제 失題>·<사벽송 四壁頌> 등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시작 활동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 벽(南宮璧)의 유고 일문시(日文詩)를 ≪신생활≫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詩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에는 서울시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 酩酊四十年≫(1953)·≪수주시문선 樹州詩文選≫(1959)·영문시집 ≪진달래동산 Grove of Azalea≫(1948)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한 ≪수주변영로문선집 樹州卞榮魯文選集≫ 등이 있다.

     

    총 획
     
  • 답변

    1898∼1961. 시인·영문학자.

    개설

    서울 출신. 아호는 수주(樹州). 정상(鼎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 마찰이 일어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평창 이씨(平昌李氏)흥순(興順)과 결혼하였다. 1915년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도 있다. 1920년에 ‘폐허(廢墟)’,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신민공론 新民公論≫ 주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기자, 1934년 ≪신가정 新家庭≫ 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 1955년에는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청춘 靑春≫에 영시 <코스모스 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폐허≫ 제2호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 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22년에는 ≪신생활 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 활동 초기부터 과작(寡作 : 작품을 적게 제작함.)의 시인이었다.

    ≪신생활≫·≪동명≫·≪개벽 開闢≫ 등을 통하여 한 해에 5, 6편 정도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이 평문관(平文館)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처분된 바 있다.

    그의 시작품들은 가락이 부드럽고 말씨가 정서적이어서 한때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까지인데,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이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 <논개>를 들 수 있다.

    2기는 그 뒤부터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실제 失題>·<사벽송 四壁頌> 등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시작 활동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 벽(南宮璧)의 유고 일문시(日文詩)를 ≪신생활≫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詩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에는 서울시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 酩酊四十年≫(1953)·≪수주시문선 樹州詩文選≫(1959)·영문시집 ≪진달래동산 Grove of Azalea≫(1948)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한 ≪수주변영로문선집 樹州卞榮魯文選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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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로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수주 변영로 시인과 부천의 인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 시,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수능시험을 대비해 한번 쯤은 보았을 ,'논개' 입니다.

     

     

    채명신 장군과 변영로 시인(1953)

     

     

     

     

    그런데 이 시를 쓴 시인 '변영로(卞榮魯, 1898~1961)'가 우리 고장 부천의 인물이라는 것은 알고 계신가요?

     

    수주 변영로?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한 시인. 수필집 《명정(酩酊) 40년》은 매우 유명하며 이를 제외하고 주요 작품으로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定界碑)》, 《논개》 등이 있다.

     - 

     

     

    변영로 시인의 호인 수주(樹州) 고려시대 사용하던 부천의 옛이름(樹州 나무고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부천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저는 오늘 낡은 자전거를 타고변영로 시인의 동상을 찾아나서기로 했습니다.

     

     

     

    변영로 시인의 동상을 찾아서...

     

     

     

     

    변영로 시인의 동상은 특이하게도 부천에서 양천구로 가는 봉오대로의 끝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도 상에서는 '고강지하차도'입니다오정동 OBS 방송국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였는데요, 초행길인지라 약간 헤매기도 했습니다.

     

     

    사실 부천에는 아라뱃길로 이어지는 굴포천 자전거길을 제외하면 자전거 전용도로는 없고보행자 겸용 도로가 많아 아쉬운데요이쪽은 부천의 외곽인지라 비교적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춰져 있는 편이었습니다. 

     

     

    열심히 달리다보니 부천의 특산물 중 하나인 마시멜로 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 무럭무럭 자라는 마시멜로들이 입맛을 다시게합니다츄르릅~

     

    저기 먼 발치엔 오정구청과 덕산 중학교도 보였습니다.

     

     

    가는 길에는 중간중간 쉬어갈만한 벤치도 마련이 되어있었습니다. 또 중간 중간 보이는 표지판에는각종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안내되어있네요오늘 찾아 갈 코스는 아니지만이렇게 많은 박물관이 부천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해집니다.

     

     

    변영로 시인 동상 발견!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지 약 30분 정도드디어변영로 시인의 뒷 모습이 보입니다~ (감동 ㅜㅜ사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는데, 뒷모습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동상 뒤로는 김포공항으로 착륙하려 고도를 낮추는 여객기도 보였습니다.

     

     

    변영로 시인의 동상이 있는 이곳에는 꽤나 규모 있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행복해보이는 가족상과자전거 도시 부천을 알려주는 다양한 구조물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변영로 시인입니다. 시인이자 영문학자답게 책을 손에 들고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동상 앞에 있는 푯돌에는 시인의 일대기와 대표작인 '봄 비'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변영로 시인의 일대기

     

     

    변영로 시인은 1918년 그의 나이 21세에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하여 천재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1919년에는 최초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다른 나라에 알렸고일제에 의해 중부서 지하 유치장에서 107일간 고문과 형벌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1924년 발간된 시집 조선의 마음에는 변영로의 대표작 '논개'가 실립니다직유와 상징의 수법을 통해 서정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되는 이 시는 지금도 널리 알려져있습니다이 시집은 발간되자마자 일제로부터 판매 금지 및 압수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변영로 시인은 우리 민족의 저항을 보여주는 애국 시인이며부천 문학의 효시이자 자랑입니다.

    그러나 그의 동상이 부천의 외곽에 있어 인적이 드물고,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오늘도 변영로 시인은 서울에서 부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수 많은 이들을 맞이하며 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

     


    한국 삼변(三卞)은 변영만(卞榮晩 1889~1954), 변영태(卞榮泰 1892~1969), 변영로(卞榮魯 1897~1961)를 칭하는 말이다.

    삼변은 중국 북송시절 소위 삼소(三蘇)라 불린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鐵)에 빗댄 표현으로 이들 삼부자(三父子)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할 만큼 중국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삼변은 이러한 중국의 삼소에 걸맞는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겼다. 세 형제 모두 문학적으로도 뜻 깊은 작품을 남긴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각계각층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변영만 선생은 판사와 변호사 등으로, 변영태 선생은 외무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로, 변영로 선생은 민족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변영로 <봄 비>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


     

     

     

       
    환갑 때 창경원 수정궁에서(가슴에 꽃을 꽂은 변영로)


     

       
    1955년 국제 PEN클럽 대회가 열리는 비엔나로 떠나며(맨 오른쪽)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은 정렬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로 시작되는 논개는 수주 변영로 시인의 대표시이다. 

    민족적 울분을 시에 담아냈던 변영로시인도 시문학파의 창립동인중의 한명이다. 
     
    변영로는 1898년 5월 9일 서울 맹현(지금의 종로구 가회동)에서 아버지 변정상과 어머니 진주강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난다. 

    서울 재동보통학교 등을 거쳐 사립중앙학교에 입학한 변영로는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랑하게 된다. 

    1915년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에 입학한 변영로는 3년과정을 6개월만에 졸업하고 다음해 영어반 강사로 취임한다. 

    중앙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한 1918년에는 청춘지에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하면서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다. 또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YMCA에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에 조선의 독립선언 취지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던 변영로였다. 
     
    이후 1924년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을 발표한 변영로는 이듬해 조선일보에 여러편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면서 그의 아호인 수주(樹州)를 쓰기 시작했다. 1930년에 변영로는 시문학 2호에 '고운 산길'을 발표해 시문학파 동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1933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월간 신가정의 주간을 맡게 된 변영로는 손기정의 다리만 게재한 사건이 빌미가돼 동아일보를 떠나게 된다. 이어 1939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돼 107일간 옥고를 치루기도 한다. 
     
    해방이 된 후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서울신문사 이사로 활동했던 변영로는 휴전 후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이사장을 맡는다. 1959년 수주시문선을 출간한 변영로는 1961년 3월14일 서울 신교동 자택에서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변영로의 시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전까지로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로 대표작이 바로 논개이다. 2기는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서 오는 절망감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로 들어나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실제와 사벽송이라고 할수 있다. 3기는 광복후에서 사망할때까지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시를 주로 썼다. 
     
    이런 모습속에서 변영로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당연히 민족시인의 행보다. 조선의 독립선언을 알리기 위해 기미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신가정의 주간을 맡으면서 잡지표지에 신기정의 다리만 게재한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07일간 옥살이를 하는 변영로의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조선인들의 민족적 울분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런 민족시인의 길을 걸었던 변영로의 시문학파 활동은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시문학파의 핵심인물은 박용철과 김윤식이고 여기에 정지용, 정인보, 이하윤이 참여해 시문학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뒤이어 변영로와 김현구가 2호에 참여했고 신석정, 허보가 제3호에 동참했다. 시문학은 제3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번영로는 영랑 김윤식과 인연으로 시문학파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변영로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교사로 활동하던 1916년 영랑 김윤식이 영어반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은 정확히 알수 없지만 영어교사와 학생으로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연이 훗날 시문학 창립동인으로 이끌었다는 추정의 근거가 되고 있다. 
     
    지난 1998년 수주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열리면서 기념사업으로 수주문학상이 제정됐다. 2005년 제1회 수주 변영로 문학제가 열린 이후 청소년 백일장과 함께 수주문학제로 이름을 바꿔 매년 10월 행사가 마련되고 있다.<계속>
     

       
    제 1회 문학 예술상 시상식장에서(왼편 세 번째)



    변영로 시인 연보
    ·1898년 5월 9일 서울 맹현(현 종로구 가회동) 출생
    ·1910년 사립중앙학교 입학, 학교자퇴후 만주 안동현 유랑
    ·1915년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 입학
    ·1916년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 교사 
    ·1918년 청춘지에 영시 코스모스 발표 천재시인 찬사
    ·1919년 YMCA에서 독립선언서 영문으로 번역
    ·1920년 동인지 폐허 동인. 학지광 20호 주아적 생활발표 
    ·1923년 이화여전 강사 부임. 
    ·1930년 시문학 2호 고운산길 발표 
    ·1933년 동아일보 입사 월간 신가정 주간 
    ·1939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경 체포, 107일간 옥고치룸.
    ·1946년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부임 
    ·1950년 진해 해군사관학교 영어 교관
    ·1953년 대한공론사 이사장 취임 
    ·1961년 서울 종로구 신교동 자택에서 별세 
    ·1999년 수주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수주문학상 제정 

     

     

         
     

    ▣ 인터뷰 - 변영로 선생 후손 변창순 종친회장
    "절실한 애처가 수주 할아버지"

    수주 변영로 선생의 후손으로 기념사업회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변창순 종친회장을 만났다. 

    변 회장은 비교적 어린시절의 변영로 선생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변 회장은 "변영로 할아버지는 3형제로 첫째 변형만은 재산을 팔아 중국 독립군을 지원했다고 들었고 셋째 변영로는 사랑방에서 한학자로 계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어 변 회장은 " 영등포에 다니면서 문인 활동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막걸리에 취해서 집으로 걸어왔던 기억이 난다"며 "할머니가 발이 아프다면서 할아버지 발을 씻겨줬던 기억과 할머니를 끔찍하게 위해줬던 것이 머릿속에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변 회장은 작은 소망을 이야기 했다. 변 회장은 "강진의 시문학관을 보면 상당히 부럽다"며 "수주문학관, 기념관을 짓기 위해 종친회에서 기념관 부지매입의사까지 밝혔지만 자료수집이 않되 진행을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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