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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 비사
2016년 01월 13일 00시 28분  조회:5027  추천:0  작성자: 죽림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시인 김수영'  


1950년대 말,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서 다들 붉어진 얼굴이다. 

그들 사이에는 시며 잡지,원고료,문단 얘기들이 오간다. 

다만 유난히 키가 큰 한 사나이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좌중의 화제가 사회와 정치 쪽으로 옮아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나이도 말문을 연다. 

엔간히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자유당과 이승만을 향해 직설적인 비판과 함께 욕을 토해낸다. 

한 시인이 제지하려고 들자 그가 대뜸 항의한다. 

"아니,자유 국가에서 욕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단 말이오?" "글쎄,김형 말이 도에 지나치니까 하는 말이지" "도에 지나쳐? 그럼 이 썩어빠지고 독재나 일삼는 정부며,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이에 상대방이 발끈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술상까지 엎어져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난다. 

이 키 큰 사나이가 바로 시인 김수영(金洙暎·1926∼1968년)이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한 김수영. 

그는 현실의 전위에 선 시인의 불온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도시 소시민의 내면과 자의식을 까발려 내보이며,그때까지 한국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여성적 운율과 재래의 토속성을 벗어던지고 세련된 도시 모더니즘의 시세계로 나아갔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온갖 금기와 허위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그가 생전에 남긴 1백80여편의 도저한 요설의 시들은 곧 쉬지 않는 싸움의 도구이고,싸움의 현장이다. 

그는 1921년 11월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문산·김포와 강원도 철원·홍천 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어의동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를 전학년 우등으로 마친 김수영은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았던 집안은 낙방 소식에 울음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 주간부에도 떨어져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한다. 

상급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성북(東京成北)고등예비학교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한 가족을 따라가 거기서 한동안 연극에 빠져든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고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굳힌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내놓으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작은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조지훈류의 회고 취미가 압도적"인 작품이다. 

그가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학했다가 이내 그만둔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선배 시인들의 복고적이고 퇴영적인 언어 관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 많던 그는 두번째 작품인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에 이르러 범속한 일상 용어들을 시어로 바꿔놓는다. 

김수영의 시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사물과 현실을 '바로보려는 정신'이다. 

이 비타협적인 '바로보려는 정신'이야말로 반골의 전형성을 드러내는 정신인 것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얼마 뒤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 전하듯이,그는 포로수용소 야전 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 수송관의 통역,선린상고 영어 교사,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양계(養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1960년 4월 12일 부산일보를 받아 든 독자들은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 부두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주검 사진이다. 

마산상고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북 남원의 집을 떠나 마산의 할머니 집에 와 있던 김주열은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진 3월 15일 밤에 사라졌다. 

행방불명된 지 거의 한 달만에 참혹한 주검이 되어 나타난 열일곱 살 소년.이 한 장의 사진이 3.15부정선거와 장기집권을 꾀하는 이승만 정권에 신물이 나 있던 민심을 분노로 들끓게 만들어 마침내 4월 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4월 혁명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세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4월 혁명에 대한 자의식이 강렬하고 이를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아 성공한 사람으로는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소설가 최인훈,평론가 김현을 꼽을 수 있다. 

4월 혁명 기간 내내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거의 매일 만취되어 집에 돌아오고,어느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날이 새면 또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4월 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수영은 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유에 대한 느꺼움을 가누지 못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후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비로소 그의 시 세계는 만개하며 절정을 맞은 것이다. 

그의 언어들은 풍자(諷刺)와 해탈(解脫) 사이로 뚫린 길 위를 질주한다. 

그의 시는 독재,빈곤,무지,허위,속물 근성을 사정없이 질타하고 후진국 지식인의 설움을 머금는다.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소시민적 자아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까발리며 그는 치를 떤다. 

이처럼 젊은 정신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언어는 그를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남게 한다. 

그는 자유와 정의,사랑과 평화,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혁명은 본디 '고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라벌예대·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 등에서 시간 강사 노릇을 하던 그는 이 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에 사로잡힌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요직을 친일 지주와 관료,경찰 출신이나 보수적 인사들이 차지할 때 혁명은 이미 실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제2공화국!/너는 나의 적이다/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고 토로하거나,체제와 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고 사람만 바뀐 현실 상황에 비애를 느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절규한다.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터지고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자 현실에 대한 시인의 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현실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뼈저린' 인식이다. 

혁명의 장애 요소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깨달음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주고 있던 그의 눈길을 다시 '안'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나 '안',즉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라든지 헤어날 길 없는 소시민적 일상은 나태와 허위로 감싸여 있고 이런 사실은 그를 못 견디게 만든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외치거나 가족이라는 속된 사슬에서 풀어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쳐서 잠자던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울리는 등 예전보다 심하게 식구들을 괴롭힌다. 

그는 혁명 뒤에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조국의 후진적인 정치 현실에 절망하며 그 절망을 술로 풀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 가지고 경찰서에 데려다 준 일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경찰서에 업혀간 그는 순경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더럭 겁을 내기도 한다. 

극심한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이런 잦은 음주와 가정 폭력은 시에서 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소시민 계급의 안일함과 소극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로 변용된다. 

영원한 자유를 향한 비상과 거듭된 좌절 사이에 걸쳐 있는 김수영의 시 세계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의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1968년 4월 13일,그는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시여,침을 뱉어라"(원래의 제목은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다)라는 제목으로 40분쯤 강연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청중을 당혹에 빠뜨린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김수영은 상업 학교를 나왔음에도 숫자를 극도로 싫어해 원고지에 매기는 번호도 아내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곤 한다. 

1968년 6월 15일,그는 이날도 아내가 번호를 매긴 원고를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신구문화사에 나갔다. 

번역 원고를 넘긴 뒤 고료를 받은 그는 이날 밤 신구문화사의 신동문(辛東門),늦깎이로 등단한 신예 작가 이병주(李炳州),한국일보 기자인 정달영(鄭達泳)과 어울려 청진동의 술집들을 옮겨다니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다. 

술에 취한 김수영은 좌충우돌하며 횡설수설하던 끝에 "야, 이병주,이 딜레탕트야" 하고 시비를 걸었다. 

이병주는 "김 선생,취하셨구먼" 하고 껄껄 웃어 넘긴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밤 이슥한 시각.김수영은 이병주가 운전사 딸린 자신의 폭스바겐 차로 모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 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서 내린다. 

그 때 좌석 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면서 인적 끊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김수영은 '퍽!' 하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를 내며 나가 떨어진다. 

밤 11시30분께의 일이었다. 

그는 응급실로 옮겨지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진다. 

김수영은 스스로 몸담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준엄한 비판 의식을 시 속에 구현하고자 애썼다. 

그는 해방 이듬해에 시작 활동에 뛰어들어 1950년대의 궁핍하고 혼란한 시기에 '후반기' 동인을 거치며 비로소 자신의 독자적인 문법을 발견하고 비판적 시선을 날카롭게 심화시켰다. 

이어 4월 혁명을 기점으로 1960년대에 들어서며 아직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현실과 그의 의식은 첨예하게 부딪친다. 

이 때 시인 김수영의 비판적 감수성이 절정의 시편들을 토해낸다. 

김수영은 근대적 자아 찾기,온몸으로 자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는 이상(李箱) 이후 최고의 전위 시인이며 4월 혁명의 정치적 함의를 정확하게 읽어낸 명실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그는 문학 속에 하찮은 '일상성'을 수용하고,삶이 문학이며 문학이 곧 삶임을 일깨운다. 

거칠고 힘찬 남성적 어조의 시 속에 담아 낸 소시민적 자아에 대한 가차없는 자기 폭로,후진적 정치 문화에 대한 질타,빈정거림,맹렬한 비판은 오랫동안 여성적 정조의 전통을 이어오던 한국 시에 대한 반동이며 갱신의 뜨거운 몸짓이다. 

그는 정신의 깊이와 정직한 자기 성찰,예술가의 순결한 양심과 완전하게 밀착된 시를 쓰려고 했으며,이것이 곧 시인에게 부과된 행동과 실천의 길임을 믿은 사람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삼중의 싸움,곧 언어와 자기자신,그리고 정치 현실과의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김수영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갔다. 

그의 시집이 30여 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이 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꾸준히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 시인·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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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김수영 - 원고료 꼬박꼬박 '주머니로'

1,

1950년대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다. 

그것이 당시 한국 문단의 미풍 양속이고 관습이었다. 

따라서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주는 김수영의 행위는 이런 관례를 깨뜨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에게 글쓰기와 번역은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버는 노동이다. 

그는 작품이 발표되거나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나면 신문사나 잡지사로 찾아가 당당하게 원고료를 재촉한다. 

창작을 노동으로 생각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김수영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잡지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한 원고의 원고료를 받으러 온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2. 

1950년대 말,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서 다들 붉어진 얼굴이다. 

그들 사이에는 시며 잡지,원고료,문단 얘기들이 오간다. 

다만 유난히 키가 큰 한 사나이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좌중의 화제가 사회와 정치 쪽으로 옮아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나이도 말문을 연다. 

엔간히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자유당과 이승만을 향해 직설적인 비판과 함께 욕을 토해낸다. 

한 시인이 제지하려고 들자 그가 대뜸 항의한다. 

"아니,자유 국가에서 욕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단 말이오?" "글쎄,김형 말이 도에 지나치니까 하는 말이지" "도에 지나쳐? 그럼 이 썩어빠지고 독재나 일삼는 정부며,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이에 상대방이 발끈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술상까지 엎어져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난다. 

이 키 큰 사나이가 바로 시인 김수영(金洙暎·1926∼1968년)이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한 김수영. 

그는 현실의 전위에 선 시인의 불온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도시 소시민의 내면과 자의식을 까발려 내보이며,그때까지 한국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여성적 운율과 재래의 토속성을 벗어던지고 세련된 도시 모더니즘의 시세계로 나아갔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온갖 금기와 허위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그가 생전에 남긴 1백80여편의 도저한 요설의 시들은 곧 쉬지 않는 싸움의 도구이고,싸움의 현장이다. 

그는 1921년 11월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문산·김포와 강원도 철원·홍천 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어의동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를 전학년 우등으로 마친 김수영은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았던 집안은 낙방 소식에 울음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 주간부에도 떨어져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한다. 

상급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성북(東京成北)고등예비학교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한 가족을 따라가 거기서 한동안 연극에 빠져든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고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굳힌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내놓으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작은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조지훈류의 회고 취미가 압도적"인 작품이다. 

그가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학했다가 이내 그만둔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선배 시인들의 복고적이고 퇴영적인 언어 관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 많던 그는 두번째 작품인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에 이르러 범속한 일상 용어들을 시어로 바꿔놓는다. 

김수영의 시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사물과 현실을 '바로보려는 정신'이다. 

이 비타협적인 '바로보려는 정신'이야말로 반골의 전형성을 드러내는 정신인 것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얼마 뒤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 전하듯이,그는 포로수용소 야전 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 수송관의 통역,선린상고 영어 교사,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양계(養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3.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일부)

이 시는 주체로서의 각성과 반성을 보여주는 김수영의 정신적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의 실천적 이성은 마땅히 "왕궁의 음탕"과 "언론의 자유","월남 파병"같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에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한다. 

설렁탕집 여주인과 야경꾼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소시민의 범주에 든다. 

행동에 나서기보다 일상의 조가비 속에서 방관자로 지내며 나약한 후진국 지식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가 치를 떤 까닭은 바로 이런 비겁함 자체가 퇴폐고 타락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그를 자기 연민과 비애의 감정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때때로 온갖 억압으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의 고독한 자기 학대로 나아가게 한다. 


4.




1960년 4월 12일 부산일보를 받아 든 독자들은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 부두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주검 사진이다. 

마산상고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북 남원의 집을 떠나 마산의 할머니 집에 와 있던 김주열은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진 3월 15일 밤에 사라졌다. 

행방불명된 지 거의 한 달만에 참혹한 주검이 되어 나타난 열일곱 살 소년.이 한 장의 사진이 3.15부정선거와 장기집권을 꾀하는 이승만 정권에 신물이 나 있던 민심을 분노로 들끓게 만들어 마침내 4월 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4월 혁명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세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4월 혁명에 대한 자의식이 강렬하고 이를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아 성공한 사람으로는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소설가 최인훈,평론가 김현을 꼽을 수 있다. 

4월 혁명 기간 내내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거의 매일 만취되어 집에 돌아오고,어느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날이 새면 또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4월 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수영은 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유에 대한 느꺼움을 가누지 못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후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비로소 그의 시 세계는 만개하며 절정을 맞은 것이다. 

그의 언어들은 풍자(諷刺)와 해탈(解脫) 사이로 뚫린 길 위를 질주한다. 

그의 시는 독재,빈곤,무지,허위,속물 근성을 사정없이 질타하고 후진국 지식인의 설움을 머금는다.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소시민적 자아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까발리며 그는 치를 떤다. 

이처럼 젊은 정신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언어는 그를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남게 한다. 

그는 자유와 정의,사랑과 평화,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혁명은 본디 '고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라벌예대·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 등에서 시간 강사 노릇을 하던 그는 이 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에 사로잡힌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요직을 친일 지주와 관료,경찰 출신이나 보수적 인사들이 차지할 때 혁명은 이미 실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제2공화국!/너는 나의 적이다/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고 토로하거나,체제와 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고 사람만 바뀐 현실 상황에 비애를 느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절규한다.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터지고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자 현실에 대한 시인의 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현실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뼈저린' 인식이다. 

혁명의 장애 요소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깨달음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주고 있던 그의 눈길을 다시 '안'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나 '안',즉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라든지 헤어날 길 없는 소시민적 일상은 나태와 허위로 감싸여 있고 이런 사실은 그를 못 견디게 만든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외치거나 가족이라는 속된 사슬에서 풀어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쳐서 잠자던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울리는 등 예전보다 심하게 식구들을 괴롭힌다. 

그는 혁명 뒤에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조국의 후진적인 정치 현실에 절망하며 그 절망을 술로 풀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 가지고 경찰서에 데려다 준 일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경찰서에 업혀간 그는 순경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더럭 겁을 내기도 한다. 

극심한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이런 잦은 음주와 가정 폭력은 시에서 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소시민 계급의 안일함과 소극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로 변용된다. 

 

 

 
2008년 김수영 시인의 40주기를 맞아
많은 후배시인들은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로 꼽았다.
 
나희덕 시인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그의 전언은 혼란도가 낮은, 그리하여 폭력적 질서에 갇혀 있는 나의 시들을 화들짝 깨우는 말”이라고 말한다.
 
장석주 시인은 “비가 오고 있다/여보/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김수영 ‘비’)에 대해 “한순간에 눈이 번쩍 뜨인다. 비의 운동역학에 ‘비애’를 슬쩍 얹는 솜씨라니!”라며 감탄한다.

 ‘시인세계’는 겨울호에서 현역 시인 109명이 뽑은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를 가려 뽑은 기획특집을 마련했다. 강은교 김규동 신달자 등 원로에서 정일근 이원 등 중견 시인까지 전 연령대를 망라한 시인들이 가슴에 감춰온 ‘최고의 시구’를 조사해 꾸민 기획이었다. 

조사 결과 시인들의 시세계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은 단연 김수영이었다.‘최고의 시구’로 언급된 횟수를 기준으로 본 평가이다. 이어 서정주와 정지용 이상 백석의 순이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는 "풀"과 "바람"이라는 명사와 "눕다" "일어나다" "울다" "웃다"라는 동사 두 쌍만을 교묘하게 반복함으로써 뛰어난 음악성을 만들어낸다. 단순하기에 오히려 암시성의 극대화를 가져온 시가 바로 "풀"이다. 이런 까닭에 일부에서는 풀을 민초의 상징어로 읽어 참여시의 표본으로 내세우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대지에 뿌리를 내린 인간의 근본적 삶과 관련된 순수 서정시의 백미로 본다. 이처럼 견해가 엇갈리는 것 자체가, 이 시가 풍부한 의미성을 내재하고 있는 문제작이라는 증거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삼중의 싸움, 곧 언어와 자기 자신, 그리고 정치 현실과의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김수영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갔다. 그의 시집이 30여 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이 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가장 널리 그리고 꾸준히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것이다.  (장석주)
 
김수영 육필시(왼쪽)와 일기.

김수영의 유년기와 그 생애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수영네 집안은 본래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 부상(富商)들로 이루어진 중인들의 주거지인 관철동에 있었다. 
 
무반(武班) 계급에 속한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 철원. 홍천 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 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김수영이 태어나던 해에 관철동에서 종로 6가로 이사한다. 그는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를 전학년 우등으로 마치고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았던 집안은 낙방 소식에 울음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 주간부에도 떨어져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한다. 상급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않았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성북(東京成北)고등예비학교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일본행의 동기가 유학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김수영의 첫사랑이었던 고인숙이라는 여인 때문일 거라는 가족의 증언도 있다. 정확한 사정은 알수 없으나 김수영은 일본에서 고인숙을 만나지 못하였고, 동경성북예비학교에 들어가 대학 입학 준비를 하다가 그만두고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연극연구소를 찾아갔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한 가족을 따라가 거기서 한동안 연극에 빠져든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곱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굳힌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내놓으며 문단에 나온다. 그가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학했다가 이내 그만둔 것은 1946년의 일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피난을 가지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평남 야영 훈련장에서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北院)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그런데 얼마 뒤 그는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그는 포로수용소 야전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美八軍) 수송관의 통역, 선린상고 영어 교사,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마포에서 양계(養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겨울의 사랑’ 육필원고. 사진 제공 민음사

‘늬가 준 요ㅅ보의 꽃잎사귀 우에서 잠을 자고/늬가 준 수건으로는/아침에 얼굴을 씻고/(…)이만하면 나는 너의/애정으로 목욕을 할 수/있는 행복한 사람이다(…)늬기 너의 애무/대신 준 흰 속옷/(…)따뜻한 사랑이였다/발악하는 사랑이였다’(겨울의 사랑)
김수영 시인(사진)의 미발표 시 ‘겨울의 사랑’이 나왔다. 이 시는 김 시인의 부인인 김현경 씨(82)가 보관해왔으며, 1일 나온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민음사)에 실렸다.

‘겨울의 사랑’은 1954년경 쓴 사랑시다. 전집을 엮은 이영준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은 1일 기자간담회에서 “시인이 부인과 별거하던 중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만났던 간호원을 서울에서 재회하며 쓴 시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현실 비판이나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을 남긴 시인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이다.


 김수영의 시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사진처럼, 시란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고 작정한듯 '간단한 복장'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지나칠 만큼 진실과 정직을 시어로 삼았던 그는 타계하기 두달 전인 1968년 4월13일, 부산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발제하에 이렇게 일갈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김수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시인이다. 그의 성장기의 주된 삶의 공간이 도시라는 점은 그의 시가 전통 서정시의 공간인 농촌이나 전원이 아닌 도시를 배경으로 적극 차용하는 모더니즘적 성격을 지니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가 두 자식이 사망한 뒤 태어난 병약한 맏아들이라는 점도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그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받음으로써 자아 중심적인 고집
불통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래서 후에 그가 이어령과 벌이는 참여시 논쟁이나 시론 등에서 강하게 표출되는 타협을 모르는 신념의 고수는 유아기의 환경이 주요한 인자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 김수영 시인의 초상화 앞에 선 부인 김현경씨. 김씨는“초상화 속 남편이 입은 옷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 준 것들”이라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김 시인이 우리집 바깥 길가에서 휘파람을 불어요.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잘 따라
불렀어. 조바심이 나서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 그래서 몰래 구두 갖다 놓고 또
 이쪽으로 오버코트 갖다놓고…. 이런 식으로 기어이 나가서 만나곤 했지요."

"시여 침을 뱉어라"며 엄정한 시정신을 추구했던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부인 김현경(金顯敬·81)씨가 회상한 시인과의 연애시절 한 장면이다.
 
김수영 시인과 부인 김씨는 6·25 전쟁에 김 시인이 의용군으로 끌려나가고 종전 후에는 한 때 별거를 하는 등 거센 풍파를 겪었지만 그 후 시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부인 김씨는 6·25 전쟁중 김 시인이 의용군으로 입대하게 된 계기에 대해 "길에서 붙잡혀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김 시인의 의용군 입대에 대해서는 그간 자원입대와 강제 징집 사이에 논란이 있어 왔다. 부인 김씨는 "내가 만들어 준 셔츠를 입고 외출한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수소문 끝에 서울 일신초등학교에 수용된 것을 알고 감자를 한 보따리 삶아 찾아갔다"고 회고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던 김 시인이 살아 돌아온 사실은 그간 '탈출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가 그녀의 증언을 통해 이번에 세밀하게 드러났다. 

'큰 구덩이에 세워놓고 빵(집단사살)해버렸는데… 어느 순간 자기도 쓰러졌는데 자기 위로 팍팍 시체고 사람이고 겹쳐지면서 쌓이더라.… 어떻게 해서든 죽은 시늉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그러고 있었다.'라고 김수영이 말하더라고.
 
별거와 재결합

부인 김씨는 김수영 시인의 선린상고 선배이자 영문학자인 이모씨(작고)와 자신이 잠시 동거한 사실을 두고 떠도는 풍문에 대해서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 있는 시인을 찾아갔던 그녀는 일자리를 알아본다며 평소 안면이 있던 이씨를 만나러 갔다. 부인 김씨는 그러나 당시 40대 노총각이었던 이씨의 집에 그대로
눌러 앉았다.
 
두 사람이 살던 집에 김 시인이 나타나 부인 김씨에게 "가자"고 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시인에게 돌아온 것은 2년이 더 지난 뒤였다. 김씨는 (이혼하기 위해)김 시인의 도장까지 받았지만 "이러다가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고, 재결합을 결심한 뒤 서울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다. 부인은 재결합하던 날의 상황도 증언했다. "삼선교 어디에서 5시쯤 만나자"고 엽서를 써 보내자 시인이 '이발을 깨끗하게 하고 딱 나와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그냥 삼선교를 빙 두 바퀴 돌고 그날 밤 이후 다시 부부로 같이 살기' 시작했다.

부인 김씨는 대담에서 김 시인이 "술을 무지무지하게 먹고 들어오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은 길에서 이○○를 만났다든지 하는 자극이 있는 날"이라는 말로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부인은 또 "1년에 한두 번 무지무지하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내가 꼭 냉수를 떠다 줬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남편에게로 돌아온 뒤 "시인과 밤을 새가면서 얘기를 참 많이 했다"고 했다. 남편에게 "시인 중의 시인, 최고의 시인"이라고 말해주면 김 시인이 아주 좋아하며 "나는 인류를 위해서 시를 쓰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인으로서의 남편에 대해서도 나름의 평가를 내렸다. "똑같은 기분으로 절대로 시 두 편을 안 써요. 그리고 곱게 쓰는 것도 싫어하고." 아내가 "어머 이거 참 좋다"고 하면 시인은 일부러 더 거칠게 시를 만들어서 대중성을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왜 이렇게 어려워요?"라고 물으면 "내가 좀 덜 됐지"라며 난해하다는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 아내를 등장시킨 김수영의 시.
아내 김현경에 따르면 김수영은 1960년대 중반 이후 하이데거의 철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 영향은 그가 남긴 빼어난 산문 중 하나인 <시여, 침을 뱉어라>(1968)에 담겨 있다.

김현경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지금도 남편이 남긴 시 원고를 보면 가슴이 뜨겁고 이런 大詩人과 살았다는 것이 흐뭇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시인이 쓰던 물건은 재떨이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며 "1980년대 초에 충북 보은 속리산 자락에 집을 사 둔 것이 있는데 이곳에 생전에 시인이 사용하던 그대로 서재를 복원하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몇년전 교육방송(EBS)에서 방영한 <명동백작>을 볼 때였다. 이 작품은 1950년대 명동에서 활동한 예술인들의 삶과 작품을 다룬 일종의 예술드라마였다.

김수영은 그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서울로 돌아와 전쟁 중 헤어졌던 아내와 다시 결합해 마포에서 양계업을 시작했던 당시의 어느 날. 

오랜 친구인 박인환이 시집을 낸 것을 보고 아내 김현경이 당신도 이제는 마음 편히 시를 쓰라고 했을 때, 그는 하루하루의 노동이 바로 시라고 답하면서 아내를 위로한다.

문제는 그 다음 장면이다. 저녁을 먹은 후 그는 집 마당 닭장 앞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살랑거리는 강바람 속에 닭들이 구구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는 부인에게 이야기하듯 자신에게 말을 건다. 

쓰고는 싶은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의용군과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여전히 떨쳐버리기 어렵다고, 한때 자신을 떠난 아내를 용서할 수 없다고, 아니 미안하다며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장면이 기억난다.

 
 
 
시인 김수영의 돌연사
  1968년 4월 13일, 그는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시여, 침을 뱉어라"(원래의 제목은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다)라는 제목으로 40분쯤 강연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청중을 당혹에 빠뜨렸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 - 바로 지금 이 순간에 -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여동생 김수명씨는 1955년 창간된 월간 '현대문학'에 입사, 초대 편집장 오영수씨에 이어 2대 편집장을 20년 가까이 지냈다. 문예지로서는 국내 최초의, 그리고 최장기 여성편집장이었다.

  김수영은 상업 학교를 나왔음에도 숫자를 극도로 싫어해 원고지에 매기는 번호도 아내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곤 했다. 1968년 6월 15일, 그는 이날도 아내가 번호를 매긴 원고를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있던 신구문화사에 나갔다. 
번역 원고를 넘긴 뒤 고료를 받은 그는 이날 밤 신구문화사의 신동문(辛東門), 늦깎이로 등단한 신예 작가 이병주(李炳州), 한국일보 기자인 정달영(鄭達泳)과 어울려 청진동의 술집들을 옮겨다니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다. 
 
술에 취한 김수영은 좌충우돌하며 횡설수설하던 끝에 "야,이병주, 이 딜레탕트야"하고 시비를 걸었다. 이병주는 "김 선생,취하셨구먼"하고 껄껄 웃어 넘긴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밤 이슥한 시각. 김수영은 이병주가 운전사 딸린 자신의 폭스바겐 차로 모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서 내렸다. 그 때 좌석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면서 인적 끊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았다. 갈색 옷을 입고 있던 김수영은 "퍽!"하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를 내며 멀찌감치 나가떨어진다. 밤 11시 30분께의 일이었다. 그는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옮겨지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졌다. 
 

 “자신을 활활 태운 오빠"

 


"최근 결심한 게 하나 있는데 조카들에게 유언을 할까봐요. 내가 죽거든 분골해 김수영 시비가 세워진 잔디밭에 뿌리라고 말이죠. 시비 뒤쪽 어디쯤.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풀도 잘 자랄거고요."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그에게 오빠 김수영은 혈육 이상의 절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김수영 신화라는 현상

김수영 문학은 시인의 생전에는 비평적 조명을 그다지 받지 못하다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김수영 문학을 텍스트로 한 2차 문서들의 집합에는 시인에 대한 회상이나 시와 산문에 대한 단상을 비롯하여 본격적인 평론에 이르기 까지 약 120편의 길고 짧은 글들과 100여 편의 석사논문 그리고 10여편의 박사논문이 들어있다.

김수영 시의 가장 흔한 모티프의 하나는 폭로적인 자기 분석이다. 죄와벌(1963), 강가에서(1964),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 식모(1966), 엔카운터지(1966), 전화이야기(1966), 도적(1966), 美濃印札紙(1967), 성(1968),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1968)등 1960년대에 그가 쓴 시들은 대체로 폭로적인 자기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김수영의 그런 자기 해부와 노출은 늘 꾸임없는 직선적인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자기 분석은 김수영의 시의 구심적 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시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1960년대 발표 작품뿐만 아니라 1950년대 발표한 작품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그러한 자기 분석을 발견할 수 있다.

"먼 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나와 자식과 나의 아내와/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구름의 파수병,1956),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서시,1957),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아래에서/간간이/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사령, 1959). 이러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작품들의 특징은 시인 자신의 구체적 일상을 분석 대상으로 삼으면서 거기에다 희화적인 극적 정황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일부) 

이 시는 주체로서의 각성과 반성을 보여주는 김수영의 정신적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의 실천적 이성은 마땅히 "왕궁의 음탕"과 "언론의 자유","월남 파병"같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에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한다. 

김수영의 미발표 시 15편 사후 40년 공개

 

이 원고들은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씨가 보관해 오던 것으로, 10여 권의 수첩과 노트, 서류 봉투와 엽서, 광고지 등에 남긴 것이다. 이 가운데 <김일성 만세(金日成萬世)>라는 시는 4ㆍ19가 일어난 반년 뒤인 1960년 10월6일 탈고했지만 이념적인 금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김일성 만세> 부분.


 

 

 

 

 

 

 

 

 

 

 

 

 

시인의 문학세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내는 왜 덜 다듬어진 작품을 공개했을까. 27일 김씨가 사는 경기도 광주를 찾았다. 김씨는 시인의 육필 원고와 노트가 들어있는 커다란 반닫이를 열어 보이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분만이 문학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지난 27일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씨가 경기도 광주 자택에서 시인의 육필 원고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고 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김 시인(남편을 지칭)은 인생 전부가 시였어요. 생활이 시고, 시가 생활이었죠. 김 시인을 후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미완성작도 있고 발표하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그것 때문에 김 시인이 비하될 것도 없잖아요."

이번에 공개된 작품 중 '김일성 만세(金日成 萬歲)'(1960)는 이념적 금기어를 직설적으로 담아 논란을 불렀다. 김씨는 "김 시인은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시는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일 뿐, 공산주의 찬양과는 거리가 멀어요. 김 시인은 절대적인 자유주의자였어요. 공산당과 호흡을 맞출 수 없는 사람이죠."

문학소녀였던 김씨는 고등학생 때 김수영을 만났다. 여섯 살 차이 나던 시인을 김씨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40년 전 장례식 때, 김씨는 시인의 관(棺)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책을 함께 묻었다. 

시 한 편에 3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김씨는 양계(養鷄)와 바느질삯으로 한 달 생활비 2600원을 벌었다. 1949년부터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혼하자는 말도 나오고 별거도 했다. 그러나 '예술과 밥'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인에게 받은
 '벼락같은 감동'이 부인을 지탱하게했다.

 
  • 김수영 시인이 떠오르는 시상(詩想)을 정리해놓던 노트. / 채승우 기자
 
  • "한번은 싸구려 대중잡지에서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이 왔어요. 원고지 70장짜리였는데, 원고료가 대두 한 말 값일 정도로 후했어요. 김 시인이 나보고 쓰라는 거야. 물론 이름은 가명으로 하는 거였고. 그 정도야 하룻밤이면 뚝딱이지. 아침에 원고를 건네주면서 원고료 받아오라고 시켰는데,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와서는 다짜고짜 주먹질을 했어요. '더러운 년, 나쁜 년' 하면서. 알고 보니, 원고료 받으려고 잡지사에서 기다리다 그 소설을 읽었는데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거야. 내가 미워 죽겠더래요. 다음 날 아침에 해장국 들이밀고 방에서 나오려는데, 내 발목을 턱 잡았어요. '우리 그런 거 써서 밥 먹고살지 말자. 굶는 게 낫겠더라.' 그 말을 들으니, 두들겨 맞았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김씨는 요즘도 김수영의 작품을 꺼내 읽으며 새로운 감동을 받는다. "김 시인은 산문도 조각 같아요.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최고다' 하는 생각이 솟아나요.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안기고 싶어."
     
    •  
    •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씨가 경기도 광주 자신의 집에서 김시인에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  

  • 김수영은 체질적으로 보수주의 또는 민중주의에 기울어지기 어려운 지식인이다. 김현이 지적하듯 일생 동안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였다. 자유에 대한 열망을 그는 현실과 역사 안에 끝없이 위치시키려고 했다. 또 이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하고자 했다

    참고 자료 : 부인 김현경이 밝힌 '인간' 김수영 시인 /대구 문인협회

     [기타] 도서:한국시인론(백년글사랑,2003),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  창작과 비평
    건국 60년의 책·담론·지식인 김호기 교수의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서③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
  • [원고지시대 작가들] 時의 자유정신 김수영… 분신으로 살아온 여동생 수명씨/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  
 

[출처] 김수영|작성자 드라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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