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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으로 되돌아가다 - 시의 그로테스크
2016년 02월 15일 02시 41분  조회:4280  추천:0  작성자: 죽림
그로테스크 어원과 정의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는 1500년 무렵 로마유적 발굴 과정에서 나온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데 섞여 식물, 동물, 인간, 건축 형식이 얽혀있는 형식의 벽화에서 나온 것이다.
그로테(grotte)라는 단어는 동굴이라는 이탈리아 어로 그것의 형용사형인 그로테스코(grottesco)와 명사형인 그로테스카(la grotesca), 불어로는 끄로떼스끄 (crotesque)라는 말이 1532년에 쓰이고 있었고 영어에서도 이 말이 쓰이다가 1640년 무렵 그로테스크(grotesque)에 의해 대치되었다.

초기에 이 단어는 고대와 16세기에 발굴된 형식의 모방형태에 관한 것으로 국한되어 쓰였고 ‘그로테스크’라는 말을 문학과 비미술 분야로까지 확대시키게 된 것은 프랑스의 경우 16세기 경이었지만 영국과 독일의 경우는 18세기에 와서이다. 이렇게 그로테스크가 확산됨에 따라 초기에 그로테스크의 끔찍하거나 무시무시한 성질들이 억제되고 그에 따라 우스꽝스럽고 뒤퉁그려진, 괴상한 것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의미는 19세기에도 그대로 통용되었으며 또한 상당한 정도까지 20세기에도 계속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부정적, 경멸적인 것으로 배척당하였다. 이는 그들이 고집스럽게 현실세계의 질서와 그에 따른 고전적인 미학 규범이란 척도에 의해서만 그로테스크를 평가했기 때문이었고 그로테스크에 대한 당시의 지배적인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공포, 현실과 비현실의 결합이란 양면성을 지닌 그로테스크의 미학적 정당성과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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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최승호

사나운 빗줄기가 유리에 흘러내리고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일 때,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번개가 밤하늘을 찢어놓을 때,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나는 불현듯 그 기이한 문어를 떠올렸다. 발 하나를 떼어내듯 자신의 음경을 어둠 속으로 출발시키는 문어를.

달의 뒷면으로 하강하는 달착륙선처럼, 그것은 목표물을 향해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태고의 흑암이 깔려 있는 바다에서 그 괴상한 음경은 홀로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았을까. 눈 먼 채 개흙에 우글거리는 먹장어들이나 입 큰 아귀, 왕코브라처럼 성질 사나운 곰치의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눈앞에 벼락불이 떨어지고 천둥이 치고 사방이 점점 더 캄캄해진다.

—시집 『북극 얼굴이 녹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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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 최승호


나는 말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어느 날 나는 지상에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빙하기가 지상의 피를 다 얼려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 내장까지 다 얼어붙은 채 동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얼어죽기는커녕 눈보라가 칠 때마다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뚱뚱한 몸에 雪片들이 들러붙어 나를 더 뚱보로 만들고 있었다.
옥상 위 뚱보의 고독, 그렇다. 소름 끼치는 무서운 고독이 빙하기에 있었다. 내려다보면 거리는 텅 빈 백색 동굴처럼 고요했다. 마네킹이 뛰쳐나와 울부짖을 것만 같은 적막의 거리. 소음도 소란도 없었다. 사람 하나 없었고 개 한 마리 없었다. 다 죽었는데 나만 혼자 구경꾼처럼 남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마치 지구의 종말에 대한 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어느 우울한 외계인처럼, 빌딩 옥상 위에서 허구헌 날 망원경도 雪眼鏡도 없이 얼음과 눈에 파묻힌 문명의 폐허를 지겹도록 지켜보는 것, 별로 살아남고 싶지도 않았지만 산 자의 몫은 이것이다.
시간은 얼음과 더불어 굳어버린 것일까. 옥상에서 바라볼 때 적어도 인간적인 시간은 끝장이 난 것처럼 보였다. 변화를 몰고 올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과거는 얼음으로 굳어진 현재일 뿐이었다.
흘러가는 것도 없고 흘러오는 것도 없이 모든 사물들이 굳어 머무는 세상의 한 꼭대기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종말의 현장 검증에 필요한 유일한 증인으로서 계속 이렇게 소금기둥처럼 얼어붙은 채 결빙된 선과 면과 굳어버린 각도와 구도들을 한없이 관찰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내가 화가였다면 이 장엄한 설경을 거의 흰 물감만으로도 캔버스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능 있는 화가였다 해도 지금은 그림 그릴 심정도 아니고 붓 하나 없다. 물감도 없고 관객도 없고 뭐든지 없다. 사정이 그렇다. 나는 옥상에서 내려갈 수 없는 것이다.
어제는 진종일 눈보라가 쳤다. 이미 지워버린 세상을 완벽하게 뭉개버리겠다는 기세로 유리조각 같은 눈발들이 끝없이 날아왔다. 하늘도 땅도 없고 오직 눈보라만 보였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 왠지 불안했다. 밑이 보이지 않으니까 추락할 것 같았다. 내가 잠든 사이 빌딩이 붕괴되기를...... 현기증 속에서 그런 자살 같은 생각을 했다. 왜 나만 혼자 죽지도 못하고 빙하기에 불멸의 존재인 양 남아 있으란 법이 있는가. 이건 끔찍한 형벌이다. 옥상은 나의 감옥이고,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존재의 이유라는 게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옥을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감옥이 존재한다. 이상한 논리지만, 적어도 이 논리는 어처구니없이 고독하고 암담한 나의 현존보다는 덜 이상하고 덜 비논리적이다. 이론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면 이상한 이론들을 많이 만들어서 불안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야 한다. 물론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존재의 이유, 그럴듯한 말이다. 똥주머니가 대가리 안에 들어 있는 문어처럼, 이유는 대가리 안에서 만들어져 문어발처럼 너희들을 움직였다. 너희들은 이제 다 얼어 죽었기 때문에 존재의 이유는 나 하나 만의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존재의 이유가 있다 해도 움직일 수 없지 않은가. 소금기둥처럼 부동의 자세로 굳어 있는 나에게 사실 이유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없는 게 낫다. 생각은 그렇지만 이유가 없으면 불안해진다. 바로 이 점이 문어와 나의 차이인 듯하다. 문어는 존재의 이유를 몰라도 움직이지만 나는 움직이는 데 이유가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되도록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움직일 수도 없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다니! 나도 두족류로 태어나볼 걸 그랬다. 대가리에 발이 달려 결국 가슴이 생략된 두족류 말이다.
밤이다. 보름달이 광할한 얼음도시를 비추며 떠오른다. 텅 빈 건물마다 들어찬 어둠, 이제는 최후의 그 늙은 유령도 어디서 얼어 죽은 것 같다. 날마다 교회 지붕에 항아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아마 자살했을 것이다. 빙하기의 유령이야말로 빙판 위에서 오래 방황하지 말고 용단을 내려 제 목을 끊는 순간 얼굴을 집어 던져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게 해야 미혹에서 깨어나는 길이 열릴 것이다. 훌륭한 충고 같다. 누구에게도 충고해본 적은 없지만 기억해둘 만한 말을 모처럼 하는 것 같다. 구원이 끝난 밤, 지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옥상 위에 구원받지 못한 내가 하나 남아 있지만 바라는 것이 오직 죽음이기 때문에 이 빙하기에 구원의 문제는 끝장이 났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일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봄이 와야 나는 죽을 수가 있고 말을 멈출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최승호, 여백, 솔출판사, 1997>



* 그로테스크? 이게 그로테스크가 아닌가. 자판을 두드리다가 팔목 관절에 염증이 생겨 약을 먹으면서 아무도 보지 않을 시를 , 장장 5쪽이나 되는 시를, 저도 읽지 않은 시를, 최승호 자신도 읽지 않을 시를, 미친 듯 입력하고 있는 너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로테스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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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의 시학: 최승호 론

이병용(시인, 문학평론가)


인생에는 추위가 있고, 추위는 견뎌야 하고, 견디다 보면 끝장이 나버리는 인생, 그것도 인생일까. 그렇다고 북극곰이 될 수도 없고.
-<겨울나기> 중에서

그랬더라면 내 이름이 어떻든
이름의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
삶을 사랑하는 일에 삶이 바쳐졌을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중에서

Ⅰ. 문제 제기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세계사, 1993)을 기점으로 최승호의 시세계가 조금씩 변모하고 있다. 첫 시집 『대설주의보』(민음사, 1983)부터 『고슴도치의 마을』(문학과지성사, 1985), 『진흙소를 타고』(민음사, 1987), 『세속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0), 『회저의 밤』(세계사, 1993)까지의 그의 초기 시집들은 "도시문명의 비판적 사실화"라는 "절대 부정"의 시세계였다면, 그 이후 출간된 『반딧불 보호구역』(세계사, 1995), 『눈사람』(세계사, 1996), 『여백』(1997), 『그로테스크』(민음사, 1999), 『모래인간』(세계사, 2000)과 최근작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열림원, 2003)에 이르는 후기시집에서는 내면적 자성(自省)을 통한 "긍정적"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하지만, 최승호의 시에 대한 지금까지의 접근은 대략 "표현의 즉물성"(김우창), "도시산업문명에 대한 비판"(유종호, 김준오), "구멍 또는 뿔 이미지"(도정일, 남진우), "불교적 혹은 생명적 세계관"(정효구, 이승하)이란 네 갈래 길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의 시집의 해설들을 통해 그간의 공유되고 있는 대표적 논의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기로 하자.
먼저 김우창은 최승호의 "관찰의 즉물성"에 주목하고 그의 시가 "지나치게 산문적인 느낌"을 주긴 하지만 뛰어난 사실적 묘사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종호는 "난폭 운전 시대의 비인간화 경향에 대한 유력한 문학적 대안을 탐문"한 시인으로 그의 현실 인식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특징이어서 "일상의 이모저모를 차분히 반추하면서 그 미세한 음영에 대응하는 섬세한 내향적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김현은 그의 "부패의 상상력은 인간의 육체가 죽음 앞에서 해체되어가는 과정"으로 드러나는데, 특히 그것은 "변기-똥의 이미지" 즉, "그의 시를 채우고 있는 것들은 전부 쓰레기들이다" 라는 것이다. 김준오는 최승호의 시가 "문명비판의 시고 죽음의 시고, 정치시고, 그리고 세계관의 시"인데 그것이 다분히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정일은 세상을 보는 최승호의 방식은 <허/무에 관통 당한 허구렁 세상>이라는 것이고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시적 주제는 생각컨대 <갇힘과 벗어남>"이라는 것이다.
최승호의 시집이 세상에 쌓인 것만큼 그의 시의 "신비"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비평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논의일 뿐 최승호라는 작가(작품)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평론들을 도전적으로 읽은 듯한 남진우의 말을 들어보자.

최승호의 모든 시적 진술은 일관되게 삶의 문명의 허망함에 바쳐지고 있다. 그는 삶의 부질없음을 되풀이해서 묘사한다. 그는 건설·생산·발전보다는 폐허·몰락·소멸 등의 단어에 상대적으로 더 친근감을 느끼는 부류의 시인이다. 물론 최승호 말고도 우리 시대엔 이와 비슷한 감수성과 사유를 갖고 있는 시인들이 상당수 있다. 최승호가 이들과 다른 것은 이들과 다른 이미지, 다른 어법으로 그것을 표현해낸다는 데 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살아있다고 열심히 생을 영위해나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윗글에서 최승호가 시집을 새로 펴낸 것만큼의 시의 변모양상을 간과하고 있음은 물론, 그간의 평론들이 "무엇을 말해왔나"가 기존의 작가들을 분석해오던 내용과의 차이를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죽어 있는 존재"를 노래해온 수많은 작가, 예를 들면 송욱이나 고석구와 최승호의 시들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남진우에 의하면, 그 차이는 그들 작가의 면면들을 "어떻게"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밝혀내느냐로 귀착되어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 지금까지의 최승호에 관한 저간의 평들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갈아엎을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조금씩 그 모습을 완성해오던 최승호의 시적 방법론이 가장 잘 체적(滯積)된 시집이 바로 『그로테스크』이다. 하여 이 시집은 최승호의 시적 형상화의 창작술을 엿볼 수 있는 "대문"이 될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를 "어디서" 구할 것이며 또한 찾은 열쇠로 열고 "어떻게" 그 안을 들여다 볼 것인가가 우리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Ⅱ. 기법으로서의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란 원래 회화 용어로 "그로테"(grotte: 동굴[cave]이라는 이탈리아 낱말인데 발굴이라는 말도 이와 관련된다)라는 말에서 생겨났으며 이 말은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형식의 그림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음은 볼프강 카이저의 『회화와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The Grotesque in Art and Literature, 1957)에 나오는 글로 그로테스크의 본질을 가장 잘 파헤친 설명 부분이다.

그로테스크는 낯설어진 혹은 소외된 세계의 표현이다. 즉, 새로운 관점에서 봄으로써 친숙한 세계가 갑작스럽게 낯설어진다(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낯설음은 희극적이거나 또는 으시시한 것, 아니면 그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일 수 있다).
그로테스크는 터무니없는 것과 벌이는 게임이다. 다시 말해서 그로테스크를 추구하는 예술가는 존재의 깊은 부조리들과 반쯤은 우스개로 반쯤은 겁에 질려 장난을 한다.
그로테스크는 세상의 악마적 요소를 통제해서 쫓아내려는 시도이다.

윗글에서 서로 겹치는 여러 특질을 종합하여 그로테스크의 정의를 내려보면, 하나는 "우스꽝스러운 것과 무서움 혹은 협오감이 동시에 함께 있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작품과 반응 속에서 해결 안 된 충돌", 즉 양면성이 공존하는 비정상이다. 한마디로 그로테스크 이미지란 희극적이면서도 공포스런, 이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으로, 바흐찐 (『라블레와 그의 세계』)의 경우가 희극적인 측면을 보다 주목한 경우라면, 카프카(『변신』)의 경우는 끔직스럽고 괴이한 것에 보다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 이미지 속에서 이 양가적 감정은 혼돈된 채로, 갈등의 상태에서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지만, 희극적인 측면을 띤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불안하고 섬뜩한 느낌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그로테스크가 적어도 "지적"인 효과만큼이나 강력한 "감정적"인 효과를 동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위에서 희극적인 효과를 유발한 것으로 언급한 불균형이 또한 공포를 부채질하는 근원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섬뜩한 유머" 혹은 "섬뜩한 농담"이라는 말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최승호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 "그로테스크"란 용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도정일의 아래에 나오는 평론의 지적이 최초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이런 이미지들의 선택만이 아니다. ... 그의 묘사는 날카롭고 정확하면서 동시에 섬득하고 괴이하다. 그 묘사는 30년대 독일의 표현주의 그림들을 연상케 하는 <그로테스크 상상력>-사실성을 괴이함의 상상력에 나염하여 생생하고 충격적인 심상과 특이한 형상으로 변환해 낸다. 이를테면 <쥐들이 앞가슴을 파먹어도 밤이 즐거웠는지, 내장을 끌고 돌아다니던 암탉>(4: 44)이라든가...

위에서 최승호 시의 "충격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를 처음으로 "그로테스크 상상력"이라 이름 붙인 것이 우리 논의의 출발점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최승호의 시에서 그로테스크란 단어는 단 두 번 나온다. 한번은 『여백』이란 시집에서 <그로테스크>란 시 제목으로 "구원이 끝난 밤. 지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옥상 위에 구원받지 못한 내가 하나 남아 있지만 바라는 것이 오직 죽음이기 때문에 이 빙하기에 구원의 문제는 끝장이 났다."라고 그로테스크한 상황을 적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가 중시하여 다루고 있는 『그로테스크』시집의 책명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로테스크』라는 시집은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그로테스크"하단 말인가? 이 물음에 최적의 답을 주는 시가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이다.

무력감에서도 악취가 난다. 산 송장들, 시화호 바닥에 누워 공장 폐수와 부패한 관료들의 숙변을 먹은 산 송장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인가.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했다. ...

나는 무력한 사람이다. 절망의 벙어리, 그래도 세금은 낸다. 세금으로 시화호를 죽였다. 살인청부자?

내가 시화호의 살인청부자였다. 나를 처형해 다오. 달 뜨는 시화호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못 박아다오. 아니면 눈 푸른 달마를 십자기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든지.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중에서

위 시에서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이 핵심어이다. 그러면 이 나라가 어떠하기에 그로테스크하단 말인가? 사건의 발단은 시화호의 "악취"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라는 시인의 질문에 대한 그 정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라 안 그 어느 누구도 "살인청부자"의 죄를 피해갈 수 없겠기에 시인의 눈에 그로테스크하게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분명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한 것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웃음"은 또한 어이가 없어 웃는 너털웃음 내지는 쓴웃음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로테스크라는 표현은 좁게는 한 나라의 실패한 환경 정책을, 넓게는 "악취"가 날 정도로 "부패"한 그 나라의 정신적 혹은 윤리적 혼돈 상태를 비판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또 한편에서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최승호의 다른 시에서는 "기괴한" "무시무시한" "불가사의한" "공간 인식"으로 확장 되어 나타난다. 이때의 공간은 일차적으로는 "초현실"적으로 지각하고 있다.

익사자는 북어처럼 금세 뻣뻣해져서 강물 밖으로 끌려나온다. 수영복을 입은 유원지의 마네킹 300여 명 가량이 갑자기 물에 예배하는 엄숙한 자세로 서서 번뜩이는 강을 바라보는 지금은 오후 3시 17분 59초. 산중턱 무덤지기 돌말은 툭 불거진 돌멩이눈으로 파라솔 색색인 유원지를 굽어보며 벙어리 말 울음을 운다. 누가 선그라스를 깨뜨린다. 뜨거운 자갈들이 노른자도 없이 이글거리는 태양을 품었다. -<초현실적인 유원지> 전문

위 시에서 산 자는 "마네킹"으로 무감각하고 사자(死者)는 오히려 "북어"로 생명이 없을 뿐이다. 강 "안"과 "밖"이 삶과 죽음의 경계인데 최승호의 시에서 "문"으로 상징되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송장"과 "시체"와 같은 섬뜩한 이미지도 선명한 색상과 더불어 자주 사용한다. 왠지 모르게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삶의 공간을 "초현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어찌 보면 그로서는 현실을 버터내기 위한 안간힘으로 보여져서 "부조리"한 상황과 닿아 있다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최승호 시의 공간이 그로테스크한 까닭은 시원(始原)으로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자연은 "인공"적인 물질문명의 진행으로 이제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대판 생명 현상은 도처를 떠돌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또한 그 "위기"를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마을버스는/마을이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마치 내가/나 없는 곳으로 돌아가듯이. -<기다림의 풍경> 중에서

우리는 돌아갈 모천이 없는 사막의 연어들, ... -<황사> 중에서

그래서 그는 더 늦기 전에 마지막 방편으로 삶과 죽음의 "목록"을 작성한다. <황사>에 나오는 "황사반죽 질료"의 목록은 "죽음"의 목록이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에서 시인이 읽고 있는 『동강 유역 산림 생태계조사 보고서』는 모든 생명체들이 그로테스크해지기 이전의 오염되지 않은 자연 세계를 대변한다. 다시 말해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통해 암시하고 있듯이 『동강 보고서』가 "죽음의 목록이 아니"라면, 그의 시집이 기록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은 다름 아닌 "죽음의 목록"이라는 점에서 가히 역설적이다. 그리고 이 역설적인 것 또한 기법적으로 그로테스크한 것이기도 하다.

Ⅲ. 변신으로서의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는 또 다른 한편에서 이상하게 만들기, 즉 미학적으로 보아 상(像)의 변형(變形)이고, 가장(假裝)이며 또한 강등과 비하(卑下)요, 일상적인 세계의 전도인 것이다. 이런 상과 생활의 왜곡화와 변형은 그로테스크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최소한 그로테스크가 "신체적으로 비정상적인 것"과 강한 친화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로테스크가 유발하는 웃음과 그와 뒤섞인 협오, 공포 따위의 반대반응은 둘 다 신체적으로 "잔인한" 혹은 "비정상적인" 혹은 "음란한 것"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러한 관점에서 우선 최승호의 <남자의 젖꼭지>란 어리둥절하면서도 전혀 외설적이지 않은 아래의 시를 살펴보자.

성인(聖人)들을 생각하면
샘 같은 젖통이 떠오른다.
어린 세상에게
젖을 물리려고
그들이 왔었는지 모른다. ...

오늘 내 유두 곁에
철사처럼 털이 하나 솟은 걸 발견했다.
영영 부풀지 않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젖꼭지가 어떻게
두 개씩이나
못대가리처럼
내 가슴팍에 붙어 있는 것일까. -<남자의 젖꼭지> 중에서

위 시에서 "젖(통)""유두""젖꼭지"와 같은 낱말들은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첫 연에서 성인(聖人)들이 어린 세상에게 젖을 물리려고 왔다는 "비유적" 진술을 사용함으로써 전혀 성적이지 않다. 2연에서 "털"을 "철사"로 "젖꼭지"를 "못대가리"로 연관짓는 시인의 상상력은 심지어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이 시는 신체의 성적 부위를 자극적으로 표현하고도 실제적으로는 성인이 되지 못하는 자괴감을 표출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뒤바뀌고 마는 극적 아이러니의 효과를 낳는다.
흥미로운 것은, "관상학적" 기형 또는 "변형된" 인간의 탄생과 관련된 최승호의 시가 주로 "동물지(誌)"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승호의 시에서 죽음 의식의 편재성과 함께 "곤충"이나 "동물"의 이미지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동물의 이미지는 단순한 시작적 유추나 비유를 위해 사용된 경우도 있다. 이 경우의 동물 이미지는 단순한 "시각적 비유"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가파르고 잔혹스러운 삶의 조건을 "상징적 소도구"로 동물 이미지가 동원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시가 그려내고 있는 폐허, 변기, 쓰레기통, 푸줏간으로서의 세계와 일정한 "환유적 인접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마치 중국의 고서 『산해경』의 분류목록과도 같은 "특이함"과 "괴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최승호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넙치>를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왼쪽 오른쪽으로 나누어졌던 눈을
한 곳에 모으느라
넙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눈알 하나를 밤마다 끌어당겨
왼뺨으로 옮긴 뒤
넙치는 원했던 사시(斜視)가 되어버렸다.

넙치 눈은
배꼽을 쏙 빼닮았다.
눈도 배꼽처럼
단절의 흉터인가,
껌벅거리는
흉터,
시선은
남아 있는 탯줄,
한없이 뻗어나가는 투명한 탯줄?
엇갈리면서
뒤 없는 투명함을 마중나가는. ...

어제 넙치가 있던 바닥에 오늘은 벽돌이 놓여 있다. 넙치가 벽돌로 변신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했다. 오해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넙치> 중에서

위 시에서 넙치의 필연적인 "진화"는 상식으로 보면 기형에 가깝다. 시인은 그러한 넙치의 변신을 "적어도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회피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변신"(變身)이라 함은 누에가 나비 되는 "자연질서 속의 변신"이기는 하나 문명적 공간으로 강제적으로 옮겨와서는 부정적 변신, 즉 누에가 날개 달아보기도 전에 삶겨져 통조림 번데기로 바뀌는 것과 같은 "피동적 변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승호의 변신에 대한 분석은 단연 도정일의 그것이 돋보인다. 그는 최승호의 "인간의 인간 아닌 것 되기"로의 변신이 발생하는 원인을 인간의 "욕망"혹은 "탐욕"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최승호의 시에 등장하는 변신의 이미지들은 바로 이 역사적 형태의 욕망인 탐욕 때문에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들, 자기 아닌 다른 것으로의 둔갑을 강요당한 것들의 이미지이다. 이 점에서 최승호의 시는 탐욕의 문법에 지배된 삶의 양식이 인간을 어떻게 인간 아닌 것으로 바꾸어 놓는가라는 문제 -타락한 부족의 변신술에 대한 시적 탐구이며, 그 변신술이 초래한 고통의 보고서이다. 이 때문에 변신의 주제와 이미지들은 그의 시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윗글에 나오듯이 문명사회 안에서 인간은 어느덧 "제 모습을 잃어버"렸고, 형태마저 완전히 일그러져 버렸다. 그런데 최승호의 시에 나타나는 변형은 어느 의미에서는 인간의 "원형 찾기", 즉 "자기 돌아보기"에 대한 기록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로테스크란 황당무계한 "공상"과 필연적인 친화관계를 맺고 있기는커녕, 사실적인 틀 속에서 "사실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그 효과를 상당부분 성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의 시속에서 예를 들면 시인은 "구토물"을 "뜯어먹"고 "가짜 날갯짓"(<구토물을 먹는 아침)>을 하기도 하고, 할머니는 "늙은 쥐며느리처럼 뻘뻘거리시다 입적"(<퀴퀴한 광장>)하시고, 택시 기사와 승객은 "질겨빠진 몸싸움"(<질겨빠진 것>)을 해야 하고, 생존자는 "오직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나라에서는 영웅"(<폐허 속의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처절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Ⅳ. 낯선 시간으로서의 그로테스크

시간의 흐름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과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사적이고 문명적인 전환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개인이 체험하는 몸과 마음의 변화가 주가 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환경과 불가피하게 관련지어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로테스크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해체"와 "구성"을 반복하는 "낯선 타자"로 다가온다. 따라서 "신구교체"와 "일신우일신"으로 간단없이 찾아오는 시간의 역동적인 힘이 어떻게 일상 혹은 문명의 모습을 바꿔놓는지 아래의 시들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굴러간다 해도 텅 빈 고무껍질에 불과한
페타이어는
석유문명에 버림받은 듯
길을 벗어나 넘어져 있다.
속도 제로
그 안에서 강아지풀들이
늙은 개털의 질감으로 시들고 있다. -<제로> 중에서

2) 자동차를 타고 있었고 뒤에서 자동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으므로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었다. ... 사실은 우리가 빠르게 도망자들처럼 멀어져가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고 있었고 차 유리문을 다 닫고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의 절규도 그 어떤 울부짖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질주> 중에서

위 시들은 모두 현대산업문명을 낳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파괴적"인 속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1)에서 "석유문명"은 자원이 고갈되면 "속도 제로"가 되는데 그 속에서 생명이 다시 소생할 수 있을지 하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2)에서 역시 "속도" 사회의 "비인간적"인 동력학을 비판하고 있다. 생명의 "절규" 혹은 "울부짖음"에 귀기울이지 않고 그냥 "질주"하는 근대문명의 그 끝은 어찌 보면 "속도 제로의 폐허"가 아니겠는가? "속도"에 마냥 안주할 수도 없겠기에 "불안"하고, 그렇다고 여기서 "멈춤"은 또 다른 "공포"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점에서 "막다른 상황"에 다다른 느낌을 전달해준다.
최승호의 초기시 속에는 놀라우리 만치 "일상"이 한결같이 "비역사적"이고 "비시간적"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앞선 비평가들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처럼 "즉물적"이고 "파편적"인데 기인한다. 그로테스크는 정상상태를 벗어난 것이고, 그것의 두드러진 특징은 "과장"과 "극단"적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특질로 인해 흔히 그로테스크는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것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현실과 비현실이 마구 뒤얽혀 있는 최승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피><송장헤엄><고기 한 덩어리> 등이 있다.

3) 붉고 붉은 살덩어리에 척 들러붙은
축축한 신문지를 손톱으로 떼내다 보면
피에 절여진 독재자 사진도
조각조각 찢어지던 일이 어제 같은데
이제는 비닐봉지에 피가 흐를 뿐. -<피> 중에서

4) 배를 위로 하고
누워서 송장헤엄을 치는데
송장이 되어서야 송장헤엄을 그친다.
절망도 송장이 되어서야
송장헤엄을 그칠 것이다.
절망에 절망해 버리는 절망까지도. <송장헤엄> 중에서

위 시들에서 최승호는 "육체"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에서 "육(肉)을 담은 포장"을 보고 "분열"적인 사고(思考)를 확실하게 드러내는데, 그 착란이 매우 충격적이다. 분명 "신문지"에 스며든 피가 그 면에 실린 "독재자 사진"을 "조각조각 찢어" 소멸시킨다. 그러나 "비닐봉지"는 그러한 변화가 없다. 그래서인지 "검은" 비닐봉지로 상징되는 근대문명의 "암흑"은 무엇이든 감춰버린다. 이러한 역사의 종언은 인간의 종말을 의미할 수도 있다. 4)에서 산 자는 "송장헤엄"을 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자(死者)는 그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자는 "절망"하지만 후자는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산 자에게는 가시적이기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사자에게는 불가시적이기에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몸"은 문명의 옷을 입은 그 순간부터 "자유"를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로테스크 패러디"를 주목해볼 수 있다. 이 용어는 패러디가 극단적으로 행해져 마침내 패로디의 원작, 혹은 내용과 형태 사이의 갈등이 지탱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는 것을 지칭한다. 문학은 작가와 독자간의 대화 혹은 소통이다. 패러디는 그러한 "시·공간의 자율성"에 끼어 들어 "간섭" 또는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하다. 이러한 최승호의 패러디 시들로는 아래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5) 봄이 와도 봄에 내놓을
꽃 한 송이 준비하지 못하였다. ...
그리고
개의 슬픔을 느꼈다. -<뿌리내린 곳에서의 슬픔>

6) 질화로의 식어가는 재를
부젓가락으로 뒤적이고
바람 새는 문틈에 걸레를 끼우는 것이
겨울나기의 풍경이다. -<겨울나기>

위 시들에서 최승호는 선배 작가들의 작품들을 자신의 시속으로 고스란히 녹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에서 정현종의 "한 꽃송이(시)" 예감은 최승호 시로 와서는 "꽃 한 송이 준비하지 못"한 "개의 슬픔"으로 감정이 전이된다. 6)에서 정지용의 <향수>가 "참하 꿈에도 잊힐 리"없는 겨울 추억의 되풀이라면, 그의 <겨울나기>는 "추위"를 나야하는 현재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원작(原作)의 "낭만적" 삶의 태도들은 최승호의 종말의식 때문인지 모두 사그라지고 그로테스크한 풍경만이 목하(目下)에 남는다. 즉, 최승호의 패러디는 그의 "사실적" 정황에 맞게 적절하게 대치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경험은 서로 "대화"하면서도 "충돌"한다는 점에서 해석의 여지를 층층이 남겨두고 있다.

Ⅴ. 그로테스크 시학: 일상적 리얼리즘을 위하여

최승호의 『그로테스크』는 간행 시기로 보면 후기 시집에 속한다. 그러나 이 시집은 그의 문명 비판적인 "부정적" 세계관을 투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 시의 특징을 그대로 적립(積立)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작시법에 있어서는 초기 시와 좀 다른 수사적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회화적 기법이었지만 점차 문학적인 수사법과 맞물려 정착이 된 "그로테스크"를 그의 시적 묘사의 "문법"으로 확립한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의 "투철한" 사실적 표현에 아이러니, 패러디, 풍자, 부조리 등과 같은 "장식"을 곁들이게 되어 이전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시적 정의"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최승호는 단순한 "시적 유희"를 즐기지 않는다. 그는 참여시와는 다른 방법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알몸"의 시이다. 그의 이러한 시학을 정립(定立)하고 있는 시행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자물통처럼 생긴/자라야,/네가 껍질을 벗어놓고 글을 써볼래?/나는 네 대신 늪으로 돌아가/흐린 물 속을 알몸으로 헤엄칠 테니. -<밤의 자라> 중에서

「문법을 잘 지켜라. 제군들 그 누구도 문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비유하자면 문법은 형무소장이요 너희들은 죄수들인 것이다」-<문법> 중에서

등에 펜이 꽃힌 채/글을 쓰는 것은 아닌지, ... 등에 쟁기 박힌 하늘소가/볕밭을 갈아엎는다, 라고. -<그림자> 중에서

밤이 오고/사라진 수평선으로/불 밝힌 내 손가락들이 어기적거리며 지나간다. -<손> 중에서

그렇다. 그는 "알몸"의 시인이고, 그의 문법에 갇힌 "죄수"이고, 펜으로 농사를 짓고, 손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제 그는 "부정"을 넘어서, "긍정"을 절대시하는 새로운 미로에 갇혔다. 나는 그가 근대문명의 일상에 벗어나는 그로테스크의 시학을 완성했다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그리고 그가 "명상"과 "초월"을 꿈꾸는 새로운 시학에 정진하는 것이 즐겁다. 그래서 그를 진정 시인이라 예찬해마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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