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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벼랑길위에서 만나는 시인들 - 신석초
2016년 02월 10일 23시 53분  조회:5092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인 이육사(1904~1944)가 남긴 묵란도(墨蘭圖) 원본(그림).

 


육사는 생전 2점의 난초 그림을 남겼는데 이번에 공개된 그림은 육필 시고집인 ‘이육사시고’(李陸史詩稿)의 표지에 실렸던 것이다. 가로 33.8㎝, 세로 24.2㎝의 그림에는 ‘풀이 무성하여 싱싱하게 푸르니 가히 경탄할 만큼 훌륭한 지경’이란 뜻의 ‘依依可佩’(의의가패)라는 묵글씨 제목이 적혀 있다.



이 작품은 이육사가 둘도 없는 친구인 신석초(1909~1975)에게 준 것으로 1974년 육사의 미발표 유고인 ‘바다의 마음’과 함께 잡지 ‘나라사랑’ 16집에 사진이 실리면서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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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석초(申石艸, 1909년~1976년)선생님 본명은 응식(應植). 본관은 고령(高靈). 긍우(肯雨)의 아들이며, 충남 서천 출생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생애 및 활동사항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병으로 중퇴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맹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문학 특히 발레리에 크게 심취하였으며, 1935년에는 『신조선(新朝鮮)』 편집일을 맡아보았고,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1957년에는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예술원회원(1960), 한국시인협회 회장(1965),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1965∼1966)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단 활동은 1931년 신유인(申唯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문학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抗)하여」를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논문은 볼셰비키화한 카프의 창작방법론의 강요에 항의하는 내용으로서,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발레리의 작품 「텍스트씨」를 읽은 감동 등으로 사상적 고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박영희(朴英熙)의 전향선언과 함께 1933년 탈퇴원을 제출하고, 이듬해 카프의 해산과 함께 관계를 끓었다. 1935년 무렵부터 이육사(李陸史)와 알게 되어 막역한 지기(知己)가 되었고, 서정주(徐廷柱)·김광균(金光均)·윤곤강(尹崑崗) 등과 함께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접(胡蝶)」·「무녀의 춤」을 『자오선』 1호에 발표하였고, 이어 1939년『시학(詩學)』지에 「파초(芭蕉)」(1호)·「가야금(伽倻琴)」(2호)·「묘(墓)」(4호) 등을 발표하였다.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폐간되자 침묵을 지킴으로써 친일 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제1시집 『석초시집(石艸詩集)』을 간행하였다.

이어 1959년에는 제2시집 『바라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 1974년 제4집 『처용(處容)은 말한다』와 제5시집 『수유동운(水踰洞韻)』을 간행하였다. 그는 대체로 엄격한 구성과 고전적 심미성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전개하여왔는데, 이러한 작품 세계는 발레리와 노장사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있다.

즉, 사고의 조직성을 추구한 발레리(Valery,P.A.)의 엄밀성과 명석성을 형태적인 바탕으로 삼고, 여기에 노장사상의 출세간적 달관(出世間的達觀)의 경지를 담아 보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체로, 과작에 속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바라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는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상훈과 추모

1969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신석초의 시세계를 살펴보면, 카프의식과는 극단적으로 상치되는 의식세계를 만나게 된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 그리고 발레리의 순수시 운동과 이백, 두보, 나아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제1시집 <석초시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는 불’의 세계, 즉 허무의 세계이다. 대체로 그가 가을 황혼, 붉은 바위, 단풍을 주로 노래한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제2시집 <석초시선>에 이르면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장시 <바라춤>을 통하여 새로운 시적 질서를 획득한다. 이 시의 리듬은 고시조의 운율을 원용한 것으로 발레리의 순수에 대한 경도가 마침내 동양정신과 만나면서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이때 동양정신은 노장사상을 의미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향가·여요·시조의 리듬을 답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3시집 <폭풍의 노래>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성은 불의 이미지로, 그것은 일상의 세계에 스며있는 한결 누그러진 불이다. 그러나 제4시집 <수유동운>에서 이러한 일상성 지향은 마침내 은거의 형식으로 고착된다. 즉, 상상력의 어떤 변증법적 울림이 없는 정신의 고요만이 나타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가 영향받은 서구 순수시론이나 노장사상이란 현실적 요소를 배제하거나, 그러한 요소가 함축하는 삶의 공리성을 전적으로 고화시키려는 정신의 모험이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는 이러한 정신의 모험을 기본율로 한다. 대체로 과작에 속하는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 45연 427행으로 된 장시 <바라춤>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데, 이 시는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 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석초 시모음--------------------------------

 

검무낭 신석초

 

검무낭(劒舞娘)

 

꽃송아리 달아

전립(戰笠), 검은 머리 위에

비뚜름히 숙여뜨리고

 

늘어진 버들가지……

긴 치마, 쾌자, 곁들여 입고

은장도, 두 손에 갈라 들고

 

건드러지게 돌아가는

몸매, 꿈결에 흔들려서

쾌자, 반쯤 흩날리고

 

자알 잘 흔드는 장도

공연히 죽을 둥도 모르는

매력의 잎만 떠돌게 하누나.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고풍 신석초

 

고풍(古風)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끝동 자주 고름

긴 치맛자락

살며시 치켜들고

 

멋들어진 화관 몽두리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서다.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광릉에서 신석초

 

광릉(光陵)에서

 

시월달에

광릉엘 오니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어

환한 꽃밭 속이데

빨간 단풍잎 한 잎을 따서

구름에 띄워 보았네.

 

다시 광릉에 오니

단풍은 바람과 함께 지데.

상강(霜降)에 쌓인 가랑잎 밟으며

오솔길 걷는 멋을

내가 처음 알았네.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궁시 신석초

 

궁시(弓矢)

 

반달 같은 활 시위를

당겨 한 번 힘껏 쏘으면

휘영청 하늘에 가이없이

뵈지 않는 물결이 이느니,

 

오오, 활이여! 네, 나는

황금의 아리따운 살로써

내가 가진 사념의

묘망한 구름을 쏘게 하여라.

 

화살이 가서 찌르는

그 과녁을 남은 몰라라,

아무도 그 비밀한 곳을 몰라라.

 

그래도 바람이 가는 이 사이,

빠르고 빛난 움직임이

잠들기 쉬운 내 몸을, 깨워도 있으리.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규녀 신석초

 

규녀(閨女)

 

네가 비밀한 장막 드리우고,

꽃과 같은 규방 속에서

내 여인이여! 너는 네 가슴에다

무슨 허무의 심사를 그리는가?

 

깊고, 그윽하고 범할 수 없는

무구한 사원 속으로 너는 지니리라,

영원의 달, 푸른 모이와

스란 속에 네 아리따운 열매를…….

 

오오, 규녀(閨女)! 감추인 옥석(玉石)!

후원에 핀 난꽃 한 떨기여!

네 숨음은 탄하기 어려워라.

 

네 몸은 익어 타는 듯하여도

네 혼은 깊은 뜰 안에 있어

지샘이 가져오는 숲들을 헤매게 하누나.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금사자 신석초

 

금사자(金獅子)

 

금사자야

금빛 바람이 인다

해바라기가 피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너의 황금 갈기

휘황한 너의 허리

 

주홍색 아가리를

딱딱 벌리고

조금은 슬픈 듯한 동굴 같은

눈을 하고

 

맹수 중에

왕중왕(王中王).

 

꽃 펴 만발한

싸리밭에

불붙은 태양의 먹이

 

네 발로 움켜잡고

망나니로 뒹군다

땅 위에.

 

고려 천년

화사한 날에

해바라기가 피었다.

금빛 노을이 뜬다.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낙엽의 장 신석초

 

낙엽(落葉)의 장(章)

 

□ 1

 

서릿바람이 산뜰을 휩쓴다.

낙엽이 낙화처럼 흩날린다.

낙엽이 산뜰을 덮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터져 온다

산뜰이 갑자기 너그러워진다.

 

붉은 노을이 산정의

푸른 기와 위에 번득인다.

뜰 아래 단풍이 홀로

곱게 곱게 불탄다.

 

□ 2

 

낙엽이 가득한 산뜰에

주인이 홀로 거닌다

머릿속의 사념이 푸른

바다 물결처럼 출렁인다

 

머리 위에 흰구름이 돈다.

산사의 종소리가 운다.

(종소리는 가깝고 차게 떨어진다)

 

주인은 말없이 국화꽃을 들여다본다

국화빛이 유난히 푸르다.

 

바라춤, 통문관, 1959

 

 

 

 

 

낙와의 부 신석초

 

낙와(落瓦)의 부(賦)

 

가을 황혼에,

쓸쓸한 폐허를 걸어서

나는 혼자 헤매이도다.

―무한히 열린 창공에 물들어서.

 

슬픈 국화꽃

태양 아래(나는 천상의 술을 마시고)

꽃잎같이 흩어져 구르는

푸른 파편들을 밟고 가도다.

 

서녘 바람은 마른 나뭇가지에 깃들이는

작은 새들을 고독히 하고.

 

어느덧 달은 이슬에 젖어,

내 발밑에 비명하는 깨진

보석을 비추이도다.

 

오오, 눈앞에 흩어진 낙엽들이여,

영화의 무덤 위에 불가항력의

조각들이여!

 

멸망하기 쉬운

시간은 물과 같이 흐르고,

 

어디선 애끊는 적(笛)소리

저 멀리 들려오도다.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돌팔매 신석초

 

돌팔매&

 

바다에 끝없는

물결 위으로

내, 돌팔매질을 하다

허무에 쏘는 화살 셈치고서.

 

돌알은 잠깐

물연기를 일고

금빛으로 빛나다

그만 자취도 없이 사라지다.

 

오오 바다여!

내 화살을

어디서 감추어 버렸나.

 

바다에

끝 없는 물결은,

그냥, 까마득할 뿐…….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매혹 1 신석초

 

매혹(魅惑) 1

 

바람이런가

숨결이런가

내 마음 천길 물 속처럼

잠잠한데

내 안의 구석진 기슭에

훌쩍이는 이 갈대는

무엇인가

 

노을이런가

달빛이런가

내 안의 먼 여울 속

물살져 쏟아지는

이 보석 조각들은

또 무엇인가

 

잠 못 이루는

하늘의 호수 속으로

가만히 부르는 소리

한 마리 백조가 날아와

깃드는

 

꿈결처럼 젖어드는

고운 꽃이파리

애끊는 여울에

구슬의 떨림이

이처럼 사무치는구나.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매혹 2 신석초

 

매혹(魅惑) 2

 

내 내부의

저문 늪가에

황금빛 노을은

내리고

 

잔잔한 노을 속에

꿈결에

다가오는

고운 꽃이파리

 

잡으면 바스러져

허망한 꿈의 여울로

사라져

없어지리

 

아아 나는

너의 매력에 이끌려

몸을 떨고

안간힘을 쓰며

 

너의

잿빛 무덤 위에

쓰러져

나는 죽는다.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멸하지 않는 것 신석초

 

멸(滅)하지 않는 것

 

황홀하게도, 은밀하게도

내 가슴에 정열이 타고 남은

적막한 잿무덤 위에,

예지와 수많은 그리메로써

꾸며진 이 회색의 무덤 위에

페닉스! 오오, 너는 되살아서

불과 같은 나래를 펴고

죽은 줄만 여긴 네 부리에

매혹의 힘은 다시 살아나서

나를 물고, 나를 쪼으고

연애보다도 오히려 단 오뇌로 나를

또, 이끌어 가누나.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무녀의 춤 신석초

 

무녀(巫女)의 춤

 

공작 깃

패랭이 제껴 쓰고

무녀야 미칠 듯

너는 춤을 추다

 

도홍선(桃紅扇) 활짝 피어

붉은 입술 가리고

웃고 돌아지는

보석 같은 그 눈매

 

쩔레쩔레 흔드는

신(神) 솟은 몸

저도 남도 모르는

귀매(鬼魅)를 부르는데

 

헐은 옷 떨치어

낙화로 흩날리고

징소리 쟁쟁

바람집에 모이더라.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밀도를 준다 신석초

 

밀도(蜜桃)를 준다

 

익어터지려는 이 밀도(蜜桃) 열매!

오―랜 열망이 와서 어린

상아(嫦娥)의 두렷한 반에 놓아서

네 아담한 웃음에 주거니,

 

그래도 제 몸 숨김일레

엷은 비단의 잔털로 싸아서

유방의 붉은 은밀한 끝이

애써, 지난날의 근심을 깨우려나.

 

오오, 아나한 여인이여!

매혹으로써만 감춘 단 이슬로

반쯤, 벌어져서 꽃잎과도 같은

네 입술을 물들게 하여라.

 

있는 듯, 마는 듯

이 과육(果肉)의 이슬이 사라지는 동안

붉어서 굳은 황금 씨알이

네가 가진 영혼의 밀우를 꿈꾸게 하노나.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바라춤 신석초

 

바라춤

 

환락은 모두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어라. ―싯타르타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아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추이고

뒤안 이슷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레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장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나려가겄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접동새, 우는 접동새야.

네 우지 말아라.

무슨 원한이 그다지 골수에

사무치길래

밤중만 빈 달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느니.

 

이화(梨花) 흰 달 아래

밤도 이미 삼경인 제

승방에 홀로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나니

시름도 병인 양하여

내 못 잊어 하노라.

 

아아, 속세의 어지러운 진루(塵累)여.

허울 좋은 체념이여

팔계(八戒) 게송이 모두 다

허사런가

숙명이 낳은 매혹의 과실이여.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묻혀진 백옥의 살결 속에

내 꿈꾸는 혼의 슬픈

심연이 있어라.

다디 단 꽃잎의 이슬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애끓는 여울이여

길어도 길어도 끊이지 않는

가슴 속의 샘물이여.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눔비니 밝은 구슬성도

이루지 안 했으랴.

눈물이 꿰어진 진주 다래라면

수미 높은 뫼도 아니

이뤘으랴.

눈물이 흘러 이내 흔적이

없으니

내 그를 애달퍼하노라.

 

아아, 헛되어라 울음은

연약한 속임이여.

수유에 빛나는 거짓의 보석이여.

내가 호숫가에 쓸쓸히

설레는 갈대런가

덧없는 바람 달에

속절없이 이끌리는

값싼 시름의 찌꺼기여.

 

적멸이 이리도 애닯고나.

부질없는 일체관념(一切觀念)이여.

영생의 깊은 수기(授記)가

하마 허무하여이다.

관념은 모두 멸하기 쉽고

잠든 숲속에 세월이 흐르노라.

어지러운 윤회의

눈부신 여울 위에

변하여 가는 구름 연기

시간이 남긴 사원 속에

낡은 다비만 어리나니

세월이 하 그리 바쁜 줄은 모르되

멎는 줄을 몰라라.

 

덧없이 여는 매살한 손이여.

창 밖에 피인 복사꽃도

바람 없이 지느니

하물며 풍상을 여는 사람의

몸이야 시름한들 어이리

오오, 변하기 쉬운 꽃여울이여.

내 아리따운 계곡에 흐느껴

우는 소리

내 몸 잔잔한 흐름 위에

홀연히 여는 전이(轉移)의 물결 위에

내 끝내 지는 꽃잎으로 허무히

흘러 여는다.

 

다만 참된 건 고뇌하는

현유(現有)의 육신뿐인가.

순간에 있는 너 삶의 빛깔로

벅차 흐르는 내 몸뚱어리

 

순수한 욕구로 불타오르는

꽃송아리

황홀히 타는 구슬의 꽃술 속에

망령된 시름하는 나비들은

금빛으로 날아

빗발처럼 쏟아지느니

 

깊은 산 유리 속에 홀로

선 내 모습이

하마 청산의 허재비 같으니다.

 

장근 동산이 날 에워

한 조각 여는 구름모양

저 영을 넘지 못하는다

내 안에 내 안 내 누리 안에

무닐 수 없는 장벽이 있도소이다.

아아 애절한 구속의

모래문이여.

 

넓은 천지간에 속세를 등져

깊이 숙여 쓴 고깔 밑에

고이 접은 네 아미

죄스럼과 부끄러움을 가려

그늘진 푸르른 정의(淨衣)

남몰래 앓는 백합을 어리는

빈 산 칡 달은 하마 휘엿하여이다.

야삼경 호젓한 다락에

들리느니 물소리만 요란한데

사람은 없고 홀로 타는 촛불 옆에

풀어지는 깃 장삼에

장한이 너울져

춤추는 부나비처럼

끝도 없는 단꿈을 나는 좇니노이다.

 

아아, 고독은 죄스러운

사념의 뱀을 낳는가

내 맘 그윽히 떠오르는 마아야

남몰래 떠오르는 꿈결 같은

마아야의 손길.

………….

 

천만 겹 두른 산에

어리고 서린 두렁칡이

밋밋한 오리나무를 친친 감아 얽으러져

제멋대로 살어 연다.

사람도 저처럼 어러져, 멋대로 살어 열까

바람도 그리움도 천만 없소이다. 나는……

절로 피인 꽃이니다.

만개한 꽃의 매력으로 부풀어오른 몸뚱어리

오오, 순수한 장미의 덩어리여.

바람으로 솟은 둥실한 도리(桃李)의 메여

 

팔상(八相)에 이끌리는 무릇 재앙의 씨여

오오, 끊기 어려운 삼계(三界)의 질긴 연(緣)이여

내가 오히려 사갈나의 꿈숲을

얼 없이 헤매느니

광풍에 지부친 뱃사공처럼

물 아래 세 가닥 모래

깊은 웅뎅이를 보지 못하는다.

 

`보리살타' 오오,

`보리살타'

나무 여래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지장보살

 

중생을 건지신 높은 덕에

청정한 크신 법에

내 몸을 바침이 내 평생의

원이니다.

 

시방 너른 하늘 아래

시방 너른 하늘 아래

내 몸이 한낱 피여지는 꽃이니다.

첩첩한 구름산에 남몰래 살어지이다.

살어지이다.

그러나 오오 그러나

사바를 꿈꾸는 나여. 마(魔)에 이끌리는 나여.

오오, `마라' 네, `마라'

오뇌의 이리여.

바람 속에 달리는 들짐승이여

 

네가 만약 장송에 깃들인 학 두루미라면

구름 잠긴 영(嶺)에 흰 날이 흐르는 제

구천 높이 솟아 훨훨 날아도

여지 않았으랴

내가 적막한 기와 우리 속에

차디찬 금빛 소상 앞에

엎더져 몸부림하는 시름의 포로가 되어

감은 치의(緇衣) 속에 솟아오르는 오뇌의 불길이

꽃바리에 타는 향연 같도소이다.

 

오경 밤 기운 절에 헤매는

바람결에 그윽히 우는 풍경 소리

상방 닫힌 들창에 꽃가지

흔들려 춤을 추고

창 밖 구름 뜰에 학도 졸아

밤이 더욱 깊으메라.

쓸쓸한 빈 방안에 홀로 일어 앉아

남몰래 가사 장삼을 벗도소이다.

벗어서 버린 가사 장삼이

방바닥에 흐트러져

푸른 못 속에 뜬 연꽃 같으니다.

 

누우면 잠이 오며

앉으면 이 시름이 사라지랴

이제 누운들 어느 잠이 하마 오리

어지런 시름 숲에 누워 앉아

홀로 밤을 새우나니

서역 먼 길은 꿈 속에도 차노메라.

겁겁(劫劫)에 싸인 골은 안개조차 어두메라.

극락이 어디메뇨 가는 길도 모르메라.

 

오오, 스님. 바라문(門)의 높으신 몸이여.

금석같이 밝으신 맘이여.

하해같이 넓으신 품이여.

백합같이 유하신 팔이여.

날 어려지이다 어려지이다

이 밤 어려 자는 목숨이 하마 절실하여이다

가뭇없는 속세의 티끌로 나는 가느이다

`사바세계' `일체고액'을 넋에 지고

여느이다.

스님 오오, 모진 이 창생을 안아지이다.

 

가사 어러메어 가사를 어러메어

바라를 치며 춤을 출까나

가사 어러메어 가사를 어러메어

헐은 가슴에 축 늘어진 장삼에

공천풍월(空泉風月)을 안아 누워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지루한 한평생을 짧게 살어여지이다.

수유에 지는 꿈이 소중하여이다.

다디 단 잊음이 영역으로 이끌어 가는 육신의 발원이여

게으름에 길길이 풀어지는 보석 다래여

천길 구름샘에 폭포가 쏟아져 내리노이다.

 

아아, 나는 미쳤는가

나는 짐승이 되었는가

마라의 짐승이 되었는가.

속세에 내린 탐란한

암사슴이 되었는가.

제가 제 몸을 얽는

관능의 오랏줄이여.

아스리 나는 미쳤어라.

유혹을 버리리라.

나는 거룩한 얼을 잃었어라.

형산(荊山) 묻힌 백옥같이 청정한

예지의 과일을 나는 잃었어라.

 

환락은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느니,

오오, 미친 상념이여, 허망한

감각이여.

물결이 왔다 철렁 달아난

빈 모래펄이여.

흐트러진 젖가슴에 회한의

바람이 휘돌아 불어

내 안이 텅 빈 동굴 같으니다.

꽃 지는 산 다락에 울어예는

귀촉도

영정한 저 소리만

어지러운 물소리에 적녁히 굴러

잠자지 못하는 사람의

깊은 속을 울리노라.

 

열치매 부엿한 둥근 달이

꽃구름에 어려

둥실 날은 추녀 위에

나직히도 걸렸어라

깊고 높고 푸른 산이 날 에워

네 골은 비어 죽은 듯 고요하여이다.

접동새. 우는 저 두견아.

어느 구름 속에 네가 울어

짧은 밤을 새우는다.

두견아. 네가 어이 남의 애를

끊느니.

쿵쿵 흐르는 물소리도

네 울음에 겨워 목이 메이노라.

 

물가에 내려 이슷한 수풀 속에

내 벗은 꽃 같은 몸을 씻노이다.

공산 잠긴 칡 달이 물 위에 떠

금빛으로 흐르메라

휘미진 여울에 빠져 흔들리는

내 고운 모습

여울에 잠근 하얀 진주 다래여.

물거울에 흐트러졌다 다시

형체를 짓는 보석의 더미여.

네가 물같이 흐르지 못하여

빠진 달처럼 구름 샘에 머무느니.

 

모양에 갇힌 포말의 뫼여.

내가 이 맑은 경(境)에 와

죄업의 티끌을 씻노라

적막은 푸른 너울처럼 감돌고

부풋한 아리따운 형태의 반영에

고혹하는 비밀의 힘은 살아나노나.

아아, 몸과 영혼은 영원히

배반하는 모순의 짝이런가

씻어도 씻어도 흐려지는 관념 형태여.

 

물아. 흐르는 물아. 철철 흐르는

물아.

풀어진 네 몸은 행복도 하여라

응고되지 않는 네 형체

번뇌도 시름도 없으리.

천 가닥 흩어지는 구슬 골짜기

네가 풀어져 흘러 산 밖으로 여는다

언제나 새로운 근원

흐려지지 않는 순수한 샘이여.

 

뎅!……

새벽 종이 우노라

밤이 이내 지새련다

뎅! 뎅! 종이 우노라

종소리 굴러 물소리에 흔드노메라

소쇄한 유리 속에 넌즛 선 나

고독한 나여.

여명은 참으로 모든 형체를 드러내고

물체와 영상을 나뉘노라

보랏빛 수풀 위에 흐려지는 달 그리메

창천이 부엿이 밝아

낙락한 푸른 봉우리가 이곳 가까이 다가서노나.

 

청산아 네 거룩도 하여라.

구름에 솟은 바위도 자라나는 나무도

어둠에서 되살아나

불멸의 빛을 던지노라.

네가 날 위해 날 위해

언제나 있어 주렴

그러나 부세(浮世)를 그리는 나

내 몸에 소용돌이치는 숙명의

부르짖음이여.

아아(峨峨)히 솟은 푸른 봉에 밝아 오는

숲 바다

밀밀한 나무가 금빛 나우리를 흔들고

지금 아침 태양은 장미꽃으로 벌어지노라.

가지 끝에 자던 새들 잠 깨어

생생히 우지진다.

 

둥, 둥, 북이 우노라.

두리둥둥, 아침 법고가 우노라.

천수 다라니 염불 소리

가사 장삼에 염주를 목에 걸고

아침 재를 올리느이다

아아. 우상에 절하는 어리석은 무리

서글픈 위선자여. 거지의 청신녀(淸信女)여.

꿈도 시름도 비명으로 사라지리

시간은 혼미에서 깨어나느니

아침 빛깔이 화려하게 불타

자잘한 삶의 소리 일어나노라.

 

북 소리 염불 소리

염불 소리 물 소리

물 소리 바라 소리

바라 소리 물 소리

물 소리 흘러

종소리도 흔드노메라.

 

일만봉 구름 속에 울어예는 산울림

미풍은 참으로 내 젖가슴을 틔우고

첩첩한 산허리에 장미의 숲을

건느노라.

네, 늘어진 장삼에 소매를 떨쳐

그윽한 저 절을 내린다

무위한 슬픈 계곡을 나는 내린다…….

 

* 이 시편은 1968년 11월 우리나라 신시 60년을 축하하는 `시인 만세' 잔치에서 임성남 씨가 안무한 춤과 함께 낭송되었다.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바람 부는 숲 신석초

 

바람 부는 숲

 

바람이 내 뒤안

수풀을 흔들고

그윽한 심연의 유리가

바다 물결처럼 울어 온다.

 

몸뚱이는 차다. 아아

거친 이 설레임에

나는 내 안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노라.

 

눈 쌓인 산

찌어질 듯한 하늘 아래

떨어지는 깊은 절 종소리

오오, 지새는 창살이여.

 

내가 질서도 없는

이 부산한 수풀에 누워

내일의 미지의 길목을

헤이노니

 

바람도 떠 가는 달도

흐르는 별도 해어진 옷도

다만 지나는 시간을 말할 뿐.

 

오오. 불어 제쳐라.

바람. 내 몸에 걸친

남루가

홀짝 벗겨질 때까지.

 

바라춤, 통문관, 1959

 

 

 

 

 

백운대 신석초

 

백운대(白雲臺)&

 

지난 가을날 단풍잎 지던 자리에

쌓이던 고운 것들은 다 갔어라.

 

화사한 꽃무덤에 모이던

눈 흘림들은 다 갔어라.

 

이제는 돌아와 서릿발 선 가지

서풍을 향해 눈산을 대해 앉았으니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 헛말이 아니어라.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뱀 신석초

 

뱀&

 

뱀은 빛나는

황금의 너울을 쓰고

미풍에 나부끼는

꽃밭으로 흐느적거리다

 

뱀은 비늘의

은밀한 간살마다

구름장 떠도는

근심스러운 피 빛깔을 흘레다

 

오오 붉은 양귀비꽃 옆에

마성(魔性)의 한 덩어리여

네 누운 매무새

느므림은 곁할 수가 없어라

 

애매한 가지

침의(寢衣)로 두른 질탕한 허리

푸른 띠 흐르는 요염한

꾀 많은 꿈트리

 

미궁으로 얽는

꿈의 또아리 속에서

넋은 불타는

위태한 탄력을 싸다

 

몸은 구슬픈

구렁이의 타―ㄹ

거짓하는 그물의

심연으로 꿈은 꺼지려든

 

몸은 슬픈데

넋은 어지러이

빛난 넌출을 감아서

지혜 놀음하는 저자로 헤매다.

 

뱀은 꿈어리는

수수께끼의 넌출

저자에 서린 불꽃 혀 둘러

총명한 `아이들'을 꼬이다

 

꼬여라, 그늘의 사자(使者).

붉은 꽃술 속에서

신은 와서 취하고

신 없는 하늘로 비틀거리다

 

누리 없는 꿈

둘레 없는 누림

신은 네 하늘에

오색 영롱한 무지개를 그리다.

 

빛과 그리메와

매혹의 영구한 모이로

뱀은 서린 자리에

슬픈 전설을 남기면서―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불국사탑 1 신석초

 

불국사탑(佛國寺塔) 1

 

불국사 깊은 뜰에

사람은 없고

탑만 홀로 서 있노라.

 

구슬같이

꽃같이

씻은 거울과도 같이

 

불국사 너븐 뜰에

사람은 가고

탑만 절로 빛나노라

 

눈부신 고운 형태

한 점 속된 티끌도

쓸었에라

 

돌을 깎아서

보물로 만드는 사람의 조화를

신(神)도 아지 못하리라

 

저 임아 천고 원한을

말치 말아.

사람은 가도 탑은 남아

영구히 빛나노라.

 

바라춤, 통문관, 1959

 

 

 

 

 

불춤 신석초

 

불춤

 

동트는 숲 속에서 보랏빛

우라노스*의 고요 속에서

페닉스*는 불타는 보석의 나래를 펴고

날아오른다. 하늘로

솟아오른다. 한 잎의 불꽃으로.

찬란하게 벗은 몸뚱어리가

황금가지로 늘어지고

눈부신 백합꽃 수낭이로 뻗어

꽃으로 되어 화살로 되어

봉화로 되어

타오른다.

삼십삼천*의 울려퍼지는 종소리

삼십삼천 욕계 구만리로

웅웅거리는 종소리

성처녀의 신비로운 두 팔이

붉은 명정을 휘날리고

욕망의 갈기를 발기발기 찢으며

바람 속 꽃잎으로 부서져

여울에 져서 무수한 꽃잎이 흘러가듯

머나먼 물굽이로 흘러

하늘 밖에 나래 치고

샛바람 속에 나래가 무리지고

꽃무등 서고 도약한다.

한 떨기 어여쁜 장미꽃 송아리로

받쳐 이어

솟아오른다. 솟아오른다.

불구슬로

불꽃으로

오, 불멸하는 것, 눈부신 살

광명의 구두사(九頭蛇)여.

번쩍이는 성(性)의 오, 번개,

프로메테우스의 누나여.

너의 번개로 내 내부의 우주는 술렁이고

너의 놀라운 날음으로

내 나비의 혼은 되살아난다.

창조의 희망이 네 부리에서 시끄럽게 짖어대고

생각하는 이파리는 모두 날개를 펴

꽃 핀 하늘로 올라가는구나.

너는 빛나는 선회를 하며

황금빛 네 손가락이 꿈꾸는 기슭에까지

나의 숨결을 이끌어간다.

작열하라. 타라. 불타올라라.

헤스티어*의 긴 머리채

휘황한 비단실 타래가

뭉게뭉게 뭉게구름으로 뒤틀어 내리다가

다시 아슬한 꽃봉오리로 솟아오른다.

하늘은 타 버리는 혼 속에서

전신을 다해 창백한 빛깔을 외치는구나.

나는 너의 금강석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미래의 연기를 마시려 한다.

불타라. 타라. 타라.

 

* 우라노스: 광대한 우주 공간.

** 페닉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비로운 새로서 아라비아사막 중에 서식하는데 500년 또는 1,500년 만에 신단 위에 날아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다시 그 재 속에서 새끼 새가 되어 재생한다 함. 불사조.

** 삼십삼천: 불교의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십삼천(三十三天).

** 헤스티어: 화로(火爐)의 신.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비취단장 신석초

 

비취단장(翡翠斷章)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

 

슬프다, 바람 숲에 구르는 옛날의 옥석(玉石)이여

비취, 보석인 너 노리개인 너여

아마도 내 영원히 잊지 않을 너만의 자랑스러운

영화를 꿈꾸었으련만

뜬 세상에 어지러운 오뇌를 안고

거칠은 쑥대 구렁을 내가 헤매느니

적막한 깊은 뜰을 비추이는 푸른

달빛조차 어이 흐려 있는다.

 

푸른 기왓장 흐트러진 내 옛 뜰에

무정한 꽃만 피어 지고

쓸쓸한 파멸 속에 너는 굴러서

창백한 때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볕살을 헤인다.

 

아아, 이슷한 오경 밤에

그므레 타는 촛불 옆에

홀로 누워 잠 못 이루는 여인의

희고 나릿한 백설 같은 목덜미

숱한 머리쪽은 풀어져 물결치는

베개 위에 찬 달 그리메

애달픈 꽃잎을 그려라.

 

비취. 오오, 비취. 빛나는 옥석(玉石)이여

내 전신(轉身)의 절 안에 산란한 시간의 발자취

다비의 낡은 흔적이 어릴 제

너는 매혹하는 꽃 같은 손길에 이끌리어

그지없는 애무 속에도 오히려 불멸하는 빛을 던진다.

 

나는 꿈꾸는 몸뚱이를 안고

소슬한 대숲 바람결에

솟아오르는 허무한 욕구를 사르면서

혼자서 헐린 뜰을 내리려 한다

저곳엔 시들어지는 고운 난꽃 한 떨기

또, 저곳엔 깨끗한 댓돌 위에

꿈결같이 떠오르는 영원한 처녀의 자태……

 

어쩔까나

나의 난심을

내 어지러운 갈레는 마음을

비취. 내가 옛 동산을 가고 또 오는

내 몸 고달픈 시름의 넌출을

인간의 얼크러진 갈림길로 알고서

고독한 푸른 옥에 몸을 떨며

슬픈 리라의 가락을 탈까나

 

비취. 오오, 비취. 티없는 네 본래의

빛깔이야 부러워라

저, 심산 푸른 시냇가에 흩어지는 부엿한 안개 떠돌아서

창천은 흐득이는 여명의 거울을 거누나

아아, 오뇌를 알은 나

영겁을 찾는 나

비밀한 유리 속에 떠서 흔들리는 나여. 너를 불러라.

빛과 흠절의 수풀 위에 찬 보석이여.

나여. 정신이여

멸하지 않는 네 밝음의 깊은 근원을 찾아라…….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삼각산 밑에서 신석초

 

삼각산(三角山) 밑에서

 

이 산 밑에 와 있네.

내, 흰 구름송이나 보며

이곳에 있네.

 

꽃이나 술이나에

묻히어 살던

도연명(陶淵明)이 아니어라.

 

어느 땅엔들

가난이야 없으랴만

마음의 가난은 더욱 고달파라.

 

눈 깨면 환히 열리는 산

눈 어리는 삼각산 기슭

너의 자락에 내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으리.

 

소스라쳐 깬 하늘 같은 것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은 것

깊고 또 높은 것이여.

 

이 산밑에 와 있네.

내, 흰 구름송이나 보며

이곳에 있네.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상아의 홀 신석초

 

상아의 홀(笏)

 

이 홍옥의 잔등이

어쩌면 상아의 홀이러라.

매혹하는 대리석 한 조각

너의 벗은 등허리로

환한 반달이 떠오른다.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서사 신석초

 

서사(序詞)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무구한

꽃이언만

깊은 절 속에 덧없이 시들어지느니

생각하면 갈가리 찢어지는 내 맘

설워 어찌하리라.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나는 혼자이로라. 찔레에 얽어진

숲 사이로 표범이 불러 에우고

재올리 바라 소리 빈 산을 울려

쩡쩡 우는 산울림과 밤이면

달 피해 우는 두견이 없으면

나는 혼자이로다.

 

숨으리, 잠긴 뜰 안에 숨으리란다.

숨어서 보살(菩薩)이 아니 스ㅣ이련만

공산나월(空山蘿月)은 알았으리라.

괼 데도 필 데도 없이 나는 우노니라.

혼자서 우노니라.

아아, 적막한 누리 속에 내 홀로

여는 맘을 어찌하리라.

 

낮이란 구름산에 자고 일어 우니노라.

밤이란 깊고 깊은 지대방에 잠 못 이뤄 하노라.

감으면 꿈결같이 떠오르는 마아야*의 그리메

가슴 속에 솟아오르는 오뇌의 불길이

꽃바리에 타는 향연(香烟) 같도소이다.

 

아아, 오경 밤 깊은 절은 하마 이슷하여이다.

달 밝은 구름 창에 이운 복사꽃이

소리 없이 지느니

사람도 늙어서 저처럼 이우는가

꿈 같은 사바(娑婆) 세월이 덧도

없으니이다.

 

천만 겹 두른 산에 들리나니

물소리

어지러운 시름의 여울 속에

보살도 와서 어릴 거꾸러진

유혹의 진주를 남하 보리라

푸여오른 꽃잎의 심연 속에

다디 단 이슬이 듣도소이다.

 

시름도 성체도 부질없는 우상이니다.

팔계(八戒) 쇠성이 모두 다 성이 가시니다.

시왕전(十王展)에 드린 원은 봄눈처럼 사라지니이다.

가사 어러 메어, 가사 어러 메어

바라를 치며 춤을 출까나.

 

가사 어러 메어 가사 어러 메어

헐은 가슴에 축 늘어진 장삼에

공천풍월(空泉風月)을 안고 뉘어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괴론 이 밤을 고이 새우고저.

 

몸아. 맨몸아. 푸른 내 몸아.

마(魔)의 수풀을 가노라.

단꿈은 끝없이 즐김을 좇아

꽃잎 저 흐르는 여울을 가노라

바다로 여는 강물을 뉘라 그지리오.

어느 뉘라 그지리오.

 

불타는 바다 위에, 불타는 바다 위에,

난 던져진 쪽달일레라.

사갈나* 너른 들에 버려진 꽃가질레라.

이슷한 사라의 장삼 속에 꿈어리는

몸이 부엿한 물 같으니다.

아스리 나는 미쳤에라.

나는 짐승이 되었에라.

마라*의 짐승이 되었에라.

내 혼과 몸의 씨앗을 쪼갤

빛날 장검을 나는 잃었는가.

숙명의 우리 안에 날 지닐

오롯한 자랑을 나는 잃었는가.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나는 절로 질 꽃이어라.

지새워 듣는 법고 소리

이제야 난 굳세게 살리라.

날 이끄을 흰 백합의 손도 바람도

아무것도 내 몸을 꺾을 리 없어라.

 

* 마아야: 범어로 환영(幻影)을 말함.

** 사갈나: 범어로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말함.

** 마라: 범어로 마왕을 이름(마라는 그의 딸을 시켜 춤을 추게 하여 싯타르타를 유혹하려 하였다).

 

바라춤, 통문관, 1959

 

 

 

 

 

선녀 비천 신석초

 

선녀(仙女) 비천(飛天)

 

그대는 천상으로 날아가며

구름 속에 하늘한 꽃이파리

누가 그대를 하늘의 나비로 그려

적(笛) 불며 깊은 푸름 속으로

날아가게 하였던가

먼 우리 조상들

아득한 고려인들의 신비로운 솜씨가

이곳에 있다

주황색 옷자락을 펄렁거리며

선연히 검은 눈썹이여

금세 피어난 한련화

선녀

애무당

꽃 같은 님의 얼굴이여.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시름하는 꽃가지 신석초

 

시름하는 꽃가지

 

으스름 달밤에 시름하는 꽃가지

네 마라의 아리따운 여인이여.

너는 바람부는 갈대의 어지러운

저잣거리에서

보석의 기이한 연단(煉丹)을 만들도다.

 

네 몸은 빈 들에 핀 홍도화 가지 같도다.

네 머리는 은횃대에 앉은 공작새 같고

네 얼굴은 반쯤 벌어진 연꽃봉오리 같도다.

그러나 남그윽한 진주의 동산에

장난하는 뱀이 숨어 있도다.

 

오오, 어여쁜 짐승이여.

너는 표피(豹皮)를 깔은 밤바다에다

다디 단 술을 퍼붓고

홍옥을 물린 고운 입술은

남 호리는 웃음이

사뭇 터져나오도다.

 

그러나 너는 도망하기를 좋아하노라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잡기 어려운 가시덤불로

이슷한 찔레꽃 숲 속으로

 

아아, 풍설이 싸움처럼 설레는

밤 호수에, 단장하는 쪽배를 띄고

원앙이 날은 비단 자리에서

너는 먼 시름의 뫼를 파도다.

 

으스름 달밤에 시름하는 꽃가지

배반하기 쉬운 하늘의 숨결을

교역하는 어지러운 저잣거리에서

너는 수많은 금강석을 울리며

슬픈 갈대의 피리를 불도다.

 

바라춤, 통문관, 1959

 

 

 

 

 

신라고도부 신석초

 

신라고도부(新羅古都賦)

 

□ 1

 

멀리 달려온

구름 벌판

밭틀에 구르는

낡은 기왓장

십팔만 호

옛 서울은

가뭇없는 꿈일레라.

 

소슬한 가을 바람

호젓한 길가에

묻힌

신라 왕궁의 화초와

삼한(三韓) 의관들.

 

저녁 안개 서린

아리나리강 찬 마을에

먼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무덱무덱

섬처럼 떠오는

고대 왕릉에

소리개 날아

떠돌아 우니노라…….

 

□ 2

 

서라벌 옛 도읍

가을 으스름

푸른 연기 자욱한

미추왕릉에

솔바람 차다.

 

멀리 돌아가는

동해 구름

구름엔 어린 삼천리

신라 천년 꽃구름도

꿈에 들어 스미노라.

 

적막한 요석궁반에

지나는 나그네

푸른 옷깃에

낙엽이 지노라.

 

아아, 인사(人事)는 변하여

그지없어라.

벽해 상전이 되어

옛것이 가고 오지 않으니…….

 

바라춤, 통문관, 1959

 

 

 

 

 

심추 신석초

 

심추(深秋)

 

손 대면 꽃물 들 듯한 나뭇잎들.

 

연 사과 같은 태양의

눈부시게 쏟아지는 금가루

천산(千山)에 가을은 짙어 가고.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어느 날의 꿈 신석초

 

어느 날의 꿈

 

그대가 내 옛 마을에 오고

내가 큼직한 용마름이 보이는

내 옛 집으로

그대를 맞아들였네

 

집안은 온통 잔칫날처럼

사람은 백결 치듯하고

넓은 뜰에는 꽃이 환히 피어 있었네

 

이른 아침나절에

그대가 잠든 당(堂)앞 호숫가에서

내가 작은 마상이를 씻고 있었네.

 

그대를 깨워 일으키려는

내 막내놈을 제지하고

그대로 하여금 늦잠을 자게 하였네.

 

그대가 잠든 당(堂)앞 호숫가에서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호수 물에서

 

내 손이 뒤척이는 작은 거룻배에

깨끗한 모래알이 담겼다가

살레살레 씻겨 나갔네.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여명 신석초

 

여명(黎明)

 

밤은 지새노라. 긴 한 밤

차운 어둠으로 밤은

가노라.

장미인 양 피어지는 나의

옷자락이

잠든 희미한 네 영혼을 안고

내 손은 아리따운 백합으로 어리어

오만한 네 이마를 어루만진다

오오, 광명의 아들 프로메테우스여.

잠을 깰 때가 왔노라

일어나렴아

어지러운 슬픈 모이와

무료(無聊)와 한 많은 구속의

자리에서

프로메테우스 네 몸을

일으켜

저어 드높은 산맥을

내리라.

 

너는 네 육체로 돌아왔노라.

너는 자유를 얻었노라.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되리.

빠른 동작과 불타는

의식으로

네 무상(無上)한 영역을 잡아라.

 

프로메테우스여.

네 팔과 다리를 내밀라.

크고 보드러운 수목과

소생하는 아침의

황량한 안개 낀 광야로

너의 영광과 너의 꿈꾼

비밀하고도 새로운

가지가지 이상 건축을

세우기 위하여.

 

어느덧 밝음을 고하는

나팔 소리 날카롭게

빈 창공을 건네노라

잿빛 구름 떠도는 골짜기에

희학(戱謔)하는 천사의 무리들

저마다 나래를 펴고

지저귀는 새들 어지럽게도

그를 시새노라

이럴 때 무리로 벌어지는

나의 꽃잎이

내오(內奧)한 벗은 우주를 낳는다.

 

우주는 나의 산산한 주옥 속에

숨김 없이 형체를 드러내고

기세를 찾은 모든 생물의

무리들의 떠들며 움직이는

발소리

수많은 금강석이 쏟아지는

소리 속에 그 속에

갖은 관념의 물결은 치노라.

 

아아. 바람이 불려는도다.

프로메테우스여. 달리어가거라.

저어 수풀 저어 부산한 물결 속으로

저어 섬과 섬 어지러운 저자

황금빛 표피(豹皮)가 드날리는

속으로

그래 널 그 속에 숨이게

하여라.

 

`프로메테우스'―

나는 일어나노라. 멸망으로부터

오랜 오뇌로부터

나는 되살아났노라 나는 부신

눈으로 세계를 보노라

아아. 무슨 숙명의 장난에

나는 이끌렸던가?

나는 내 몸에 얽힌 사슬을

풀고

내 사지를 길게 뻗어 보노라

난 이제야 나로 돌아왔노라

 

난 본디 불이로라

오오, 황취(荒鷲)여 나는 모든 것을

태우려 하노라

모든 것을 불사르려 하노라.

눈물과 영탄을 버리리

하잘것없는 이 관념 형태를

두들겨 부숴라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지새는

나의 영토를 내리려 한다.

 

바라춤, 통문관, 1959

 

 

 

 

 

연꽃 신석초

 

연(蓮)꽃

 

내가 옛 동산을 거니다니

깊은 못 속에, 푸른 이끼 끼어 어리고

붉은 연꽃은 피어나서

아나한 송아리를 들었에라.

 

붉게 피어난 연꽃이여!

네가 꿈꾸는 네안[涅槃]이 어디런가

저리도 밝고 빛난 꽃섬들이

욕망하는 입술과도 같이, 모두

진주의 포말로 젖어 있지 않은가

 

또 깊은 거울엔, 고요가 깃들고

고요에 잠든 엽주(葉舟)는 저마다

홍보석을 실어서, 옛날 왕녀가 버린

황금 첩지를 생각케 하누나.

 

오오, 내 뉘야 오렴아! 우리

님프가 숨은 이 뜰을 나려

연잎 위에, 오래고 향그러운 아침 이슬을 길으리…….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유파리노스 송가 신석초

 

유파리노스 송가(頌歌)

 

들어라, 바다 한녘에 울려 퍼지는

이 유파리노스*의 노래를

불꽃 튀기며 대리석 부서지는 소리

화사한 꽃밭 일구는 쇠갈퀴의 고함 소리

기둥은 밋밋한 백합꽃 대궁으로 일어선다.

 

눈부신 빛깔의 쌓임으로

층층이 솟아오르는 고층건물

놀라운 힘이 기하학으로

새 바벨탑을 세워 올린다

저곳엔 삼대처럼 공장이 늘어서고

또 저곳엔 꽃처럼 구름처럼

누대(樓臺)가 솟아오른다

오오 유파리노스의 머리 좋은

솜씨, 하늘을 깁는 손이어

유파리노스여 너의 손길에서

눈부신 칠보(七寶)의 숲은 떠오르고

너의 머리에서 반짝이는

뭇 별자리가 돋아난다.

네 가슴팍은 메트로폴리스의 찬란한 원천이다

 

네 도시는 장미꽃 천엽 속 같구나

비단 그물과 금고리가 서로 꼬리를 물고

물구나무 서는 뱀의

황금팔찌를 받들어 올린다

묵은 성 둘레로 너는 하늘 닫는

금발 화관을 둘러 씌우고

유리의 산 해무리 지는 골짜기로

무지개 선 안개문으로

석류 항아리의 진주 조개의

은빛 벌통들이 포개져

올라간다

 

하늘은 온통 뒤덮인 바다

금속 돛배가 구름 늪을 누비며

바다는 아틀라스의 이마와 발끝을 둘러

뭍마다 쏜살 같은 가르마를 뻗어 놓는구나

구름녘과 보석의 섬으로

술 취한 디오니소스의 상선들이 떠 흔들리노라.

 

아테네에서 로마에서 칼타고에서

무화과와 올리브의 향내 떠도는

이오니아의 섬에서

블론디의 벗은 살갗으로 물드는

플로리다의 해안에서

또는 거대한 유방이 솟아오르는

해지는 대륙에서

해뜨는 동양의 뭇 항구에서

물결은 쳐 밀려온다.

바다는 밝고 세계는 하나다

일어서라, 콤파스 유파리노스의

다락이어

너의 무게는 휘청거리는 메뚜기의

긴 다리로 떠받쳐진다

 

프로메테우스 너는 보는가

아슬한 이 기적의 매스[堆積]를

겹겹이 쌓아 오르는 바다 비늘

빛나는 이 노적을

인간의 호사스러운 손장난을

너는 보는가.

 

`프로메테우스'

나는 가지가지 망령들과 싸워야 한다

변덕스러운 파충류의 음탕한 활과

저 보석을 물린 섬과

무성한 금속성 갈잎들과

나의 섬을 물어뜯는 물결과

회오리바람과 나는 싸워야 한다

음산하고 안이한 것들은 모두 가라

너의 완성을 위하여 너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순수한 것 위에 너를 놓는다

나는 영혼으로부터 나타난다

오오 지고한 예술가

유파리노스여

 

너는 나의 혼의 불꽃에서 시작한다

바람 부는 도끼, 바퀴를 깎는 대목*이어

너의 제일 빛나는 연장은 너를 아는 일이다

네 자신을 돌아보라

너의 천재 너의 반짝이는 섬광

너의 기묘한 앵무 언어는

소멸하기 쉬운 물거품이다

나는 너의 안개를 거부한다

그러나 유파리노스여, 네가 파괴하고 또 건설하는 동안

찬란한 이 순간을 찬양하라

 

너의 창조 새로운 변화를

이 다채로운 꽃의 형성을

구가하라.

 

* 유파리노스: 그리스의 무명 건축가. 발레리의 『유파리노스』 대화편이 있음.

** 바퀴를 깎는 대목: 『장자(莊子)』에 나옴.

 

현대문학, 1969. 1

 

 

 

 

 

이상곡 신석초

 

이상곡(履霜曲)

 

온 산 붉은 나뭇잎

세월도 늙어

찬란한 익음으로 물들어

꽃 같은 노을이 내리는

나뭇잎.

 

나뭇잎 이리도 찬란한

골짜기에

서릿바람은 불어 와서

쓸쓸한 석양 물 기슭에

갈꽃 허연 물

은실머리를 흔드누나.

 

어디서

자지러지게도 고운 것이 찾아와서

날 나뭇잎 지는 오솔길로

이끌어냄이어.

흰 달빛 아래 서릿발 서걱이며

밟고 지내감이어.

 

세월이 늙는 조용한 이 산속에

내 한 가닥 구름으로나

한 잎 나뭇잎으로나

있으려 했더니만

 

어디서

남몰래 서릿바람은 불어 와서

내 가슴을 뒤설레고 가는 것이어.

뒤설레고 가는 것이어.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적 신석초

 

적(笛)

 

슬프다, 찬 달이여.

연기 낀 서라벌의

옛 하늘로 헛되이

네 먼 꿈을 보내는가.

 

아스라한 날과 달이

흘러가고 또 와도

인간의 어지러운 풍파를

그치지는 못할넨가.

 

어느 초월한 악공이 있어

널 부러 홍량(弘亮)한 소리를 내어

창해에 담뿍 어린 구름을

깨끗이 쓸지는 못하는가.

 

멸한 나라 옛 빈 터전에

남은 찬 달과 연기

오오, 애달픈 침묵의

적(笛)이여.

 

바라춤, 통문관, 1959

 

 

 

 

 

종 신석초

 

종(鍾)

 

나라이 망하면

종도 우지 않던가

 

네가 한갓

지나는 손의 시름을

이끄는

기인한 보물이 되었을 뿐

꿍하고 네가 울면

신라 산천 사백 주가

한데 엎드려

대응도 하였으리

 

나라이 망하면

종도 우지 않던가.

오오, 묵묵한 종이여

 

가을날 단청이 떨어지는

옛 정(亭) 소슬 추녀에

구름이 돈다.

 

울어라. 종 울어 보렴.

네가 큰소리를 내어

또 한 번 천리를

뒤흔들어 보렴…….

 

바라춤, 통문관, 1959

 

 

 

 

 

주렴 신석초

 

주렴(珠簾)

 

주렴 드리우라

 

주렴 밖에

 

쨍쨍한 햇빛이

저리 눈에 부시니

 

소슬한 꽃 추녀

육간(六間) 대청에

 

분홍색 깨끼저고리

 

남 갑사치마에

비취 옥을 꽂은 가인(佳人)

 

주렴 드리우라

 

벌거벗은 몸뚱어리

벌거벗은 몸뚱어리

벌거벗은 몸뚱어리

 

이제는

아마존 여족(女族)들의

방패*만큼한 한 올 덮개도

기릴 줄이 없다만

 

주렴 드리우라

 

주렴 밖에

 

쨍쨍한 햇빛이

 

저리 눈에 부시니……

 

* 아마존 여족(女族)들의 방패: 밀튼의 실락원에 나오는 말.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처용 무가 신석초

 

처용(處容) 무가(巫歌)

 

꽃으로도 고운 모란꽃으로

열두 대문에 환히 핀

함박꽃으로 오너라

 

봉황음(鳳凰吟)으로

삼진작(三眞勺)으로

북전(北殿)으로

보허자(步虛子)

학연화대(鶴蓮花台)

영산회상(靈山會相)으로

계면(界面) 돌음으로

만두삽화(滿頭揷花)

칠보홍의(七寶紅衣)

오방(五方)처용(處容)

 

신라 밝은 날에

 

나후라*의 인고의 하늘

밤 들어 달빛이 적(寂)하여라

저며 논 보릇 같은 살갗이

역신(疫神)의 손에 문드러지던 때

내 가슴에 석류알이 쏟아졌나니

 

들깨지 마라 이 꽃새벽의

꿈의 꽃잎으로부터

환장할 누릴 꿈의 버금의

둘레

 

구름 갠 바닷가에

일곱 마리 용의 오색 찬란한

비늘이 번뜩인다

해가 뜬다

 

네 참아라 꽃아 도리(桃李)야

휘젓지 마라

역신이야 처용 탈만 보면

줄행랑이어라

 

천리를 가리러, 만리를 가리러,

속거천리(速去千里)하라

산이여 내여 길 열어라

나무아미타불

 

억만 세계 겁겁의

구슬의 광망으로

땅아 비추어 오라

 

길 밝혀라 처용아

열두 나라 지은 이들

장락태평(長樂太平)하랐다.

 

* 나후라: 범어로 인욕(忍辱)의 뜻을 가짐. 원뜻은 구요성(九曜星) 가운데 여덟째 별로서 식신(蝕神)이라고도 일컬음.

 

현대문학, 1969. 4

 

 

 

 

 

처용은 말한다 신석초

 

처용(處容)은 말한다

 

□ 1

 

바람아, 휘젓는 정자나무에 뭇 잎이 다 지겄다

성긴 수풀 속에 수런거리는 가랑잎 소리

소슬한 삿가지 흔드는 소리

휘영청 밝은 달은 천지를 뒤덮는데

 

깊은 설레임이 나를 되살려 놓노라

아아 밤이 나에게 형체를 주고

슬픈 탈 모습에 떠오르는 영혼의

그윽한 부르짖음…….

 

어찌할까나 무슨 운명의 여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도 육체에까지

이끌리게 하는가

무슨 목숨의 꽃 한 이파리가

나로 하여금 이다지도 기찬 형용으로

되살아나게 하는가

 

저 그리운 연못은 거친 갈대 우거져서

떠도는 바람결에도 몸을 떨며 체읍을 한다

굽이 많은 바다다운 푸른 물 거울은

나의 뜰이었어라

밤 들어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에 보니

가랄이 넷이어라

 

그리운 그대, 꽃 같은 그대

끌어안은 두 팔 안에 꿀처럼 달고

비단처럼 고웁던 그대,

내가 그대를 떠날 때

어리석은 미련을 남기지 않았어라

꽃물진 그대 살갗이

외람한 역신의 손에 이끌릴 때

나는 너그러운 바다 같은 눈매와

점잖은 맵시로

싱그러운 노래를 부르며

나의 뜰을 내렸노라

나의 뜰, 우리만의 즐거운 그 뜰을

 

아아 이 무슨 가면이 무슨 공허한 탈인가

아름다운 것은 멸하여 가고

잊기 어려운 회한의 찌꺼기만

천추에 남는구나

그르친 용의 아들이어

처용(處容)

도(道)도 예절도 어떤 관념 규제도

내 맘을 편안히 하지는 못한다

지금 빈 달빛을 안고

폐허에 서성이는 나 오오 우스꽝스런

제웅이어.

 

□ 2

 

모든 것은 흘러가 없어지는가

시간의 여울로

어지러운 잊음의 숲이어

변모한 서라벌이어

빈 절 무너진 성 둘레

멸하고 또 멸하지 않는 대리석의

빛나는 소상들이어

구름 다락과 비단의 거리는 어디 있는가

사랑하며 노닐던 나의 황금 장소는

바이 없고

지금 황량한 갈대밭에

바람 달이 설렌다

 

나의 범절과 나의 몸짓은

다시없는 보물을 잃게 했어라

나는 우활(迂闊)하였어라

나는 빈 꿈 여울에서 크낙한

술을 마셨어라

그대는 나를 떠나고

나는 나의 체념의 갈밭을

그지없이 헤맨다

나의 달관은 스스로 나를 버리게 했구나

지금 뉘우친들 무엇하리

홀로 메어지는 슬픔을 안고

여기 서성이노니

하늘과 땅이 나에게 모멸하는

눈살을 던지는 듯

나무는 깔깔대고 돌들은 허허 웃는다

 

바람에 부서지는 산란한

보라

이슥한 물거울에 비칠 그림자도

나는 갖지 못하였어라

우수수 듣는 나뭇잎이 낙화(落花)처럼 내려

찬 늪을 덮을 뿐…….

 

아아, 나는 유령이 되었는가

형체만 남은 형체도 안 보이는

유명의 그림자여

못내 나는 슬픈 유령이 되고 말았는가

이젠 사랑도 그리움도 없어라

이젠 의젓한 풍채도 높은 긍지도 없어졌어라

 

머리 그득히 꽃 꽂아 밝은 모양에

수삼(袖衫) 드리워 늘씬한 몸매에

애인 상견하여 윤나는 눈에

산상(山相) 이슥한 긴 눈썹에

홍도화같이 붉은 입술에

백옥같이 흰 이빨에

칠보(七寶) 늘이어 수굿한 어깨에

지혜 가득하여 풍만한 가슴에

그리움도 아름다움도

이젠 모두 소용이 없어라

 

무녀(巫女), 네가 성화같이 날 불러 외었은들

무엇하리

요사스런 미치광이어

밤 신명의 의붓딸이어

너의 헐은 옷에 펄렁이는 쾌자 자락이랑

징소리에 흔드는 붉은 둥치랑

외잡한 네 몸뚱어리의 뒤흔드는 물결은

나를 완구로 만들었을 뿐

너의 수다스런 언어의 주술도

거만하고 실속 없는 나의 화상을 남겼을 뿐

휘황한 궁궐도 춤추던 깁 장삼도

나의 서글픈 풍류에 지나지 않는다

 

무녀(巫女) 지혜 많은 사생녀여

숱하고 오랜 어두운 밤

밤의 목마름이 너로 하여금

을씨년스런 신화를 지어내게 했구나

신들린 너의 사지, 사시남기처럼

떨리는 손길로

너는 무슨 광명의 불꽃을 가져왔는가

네 기특한 슬기도 이젠 쓸모가 없어졌어라

아무도 네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아무도 네 얼굴을 믿지 않는다

나의 태양의 잠든 가지는

재난과 안개에 뒤덮여

희미한 전설의 내음으로 떠돈다.

 

□ 3

 

저기엔 내가 불던 옥적(玉笛)이 굴러 있어라

허무히 빈 갈대가 되어

써늘한 다락 속에

여인이 버린 패물 조각과

쓸쓸히 지는 나뭇잎과 함께

일찍이는 네 짙푸른 목청이

하늘가에 가 서렸더니

사랑하다 밀리는 흐느낌도

저녁 노을도 밤바람 소리도

바다 물결도 모두 멎었더니

지금은 잠잠한 가락도 없이

무위한 옥가지 되어

어둡고 이끼 낀 섬돌 위에 버려졌구나

바다는 뒤설레어 상기 멎지 않고

바람은 부르짖고 물결은 솟아올라

언덕을 물어뜯는다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저

금속의 별빛 소리는 내 것이 아니어라

차고 현란한 위조 보석

금강석이 부서지는 불야성은

은하의 별 구름다워라

사월 초파일 황룡사에 높이 현

연등불도 무색하구나

그러나 여기엔 정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찍이 너그럽고도 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섰던 곳에

값싼 모형 건물들이 서서

그 속에 어지러운 장기판이 벌어진다

`황무지'의 허술한 들창가에

간음하는 소리 들린다.

 

춥다 춥다

내 품 안에

들어오너라

저며 논 보릇다운 몸뚱어리,

오오 드러난 살갗들이어

아내도 처녀도 없어라

뒤섞인 소란한 수풀 속에

풀어지는 자락은

나라 땅을 가른 장벽만치나

저를 가리지 못하는구나

갈대는 어질머리처럼 흐트러져

은빛 물결을 흔들고

여기 흐므진 성황굿이 열렸는데

야만스러운 인수(人獸)의 다리 얽히어

숨도 헐떡거리며

안간힘을 쓴다

 

열반이 번져 온 마을에 노을이

타는

이 언덕에

꽃 타는 이 언덕에

언제 머루나무의 새잎이 돋아날 건가

밤 밤 밤

기어오르는 뱀의 혓바닥과 환장할

한바다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움직임과

전신의 혼이 녹아내리는 마디마디는

열병신(熱病神)에게야 횟갓이어라

 

바다는 뒤엎질고 물결은 일어난다

바람아 인다 동해 바다

아홉 개의 머리의 용이 솟구쳐 올라

천지를 뒤흔드는데

성난 물결을 잠재울 태평의

가락이 없구나.

 

오오, 처용(處容) 너는 보는가

변화의 격한 물이랑을

눈부신 세월은 그 위를 지나가고

너에겐 이제 아무 할 일이 없구나

너는 너로 돌아가야 하리

네 자신의 위치로 태양처럼

고독한 너의 장소로

지혜의 뜰, 표범 가죽이 드날리는

그 속으로

동이 튼다

 

아침 해가 비늘진 물결 너머로

굼실거리는 용의 허리 너머로

솟아오른다

황금빛 부챗살을 펴고

바람꽃을 헤치며

아득한 푸름의 맞단 곳으로

붉게 불타는 찬란한 구슬 늪이

이글이글 뒤끓고

진동을 하며

보라색 안개의 가리마 위로

징 같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오오. 광명의 나래짓이어…….

 

현대문학, 1964. 5

 

 

 

 

 

천마도 신석초

 

천마도(天馬圖)

 

천마야, 달려가거라

동해의 하늘로

한 조각 마른 자작나무

껍질의 하늘로

오색 인동(忍冬) 무늬의 하늘로

먼 구름으로

먼 아미타불의 하늘로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나

거기엔 밝음이 있었을까나

삼국의 풍운의 그 구름의

성을 뚫고 나갈

무슨 찬란한 말씀이라도

있었을까나.

 

한국문학, 1974. 2

 

 

 

 

 

천지 신석초

 

천지(天池)

 

밝아 오라

너의 높은 연화(蓮花)로부터

하늘로 솟아오른

너의 크낙한 심연으로부터

신룡(神龍)이 살아 굼실거리고

오색 영롱한 벽으로

천둥 번개를 하며

진동하는 하늘의

정수리로부터

그 높은 심장으로부터

일월은 천지 개벽을 하고

천도화(天桃花)를 피우고

태초에 하나의 무리의

조상을 낳았나니.

 

수유동운(水踰洞韻), 조광출판사, 1974

 

 

 

 

 

추호 신석초

 

추호(秋湖)

 

무심코 휘저은 한 물결이

일만 물결로 번져 간다

아늑하고 은밀한 이 호수에

한 마리 백조도 와 목욕 감지 않은

이슥한 이 물가에

잠자는 내 아내의 눈썹

여울 속 하늘에 뜬 흰구름도

아무 말이 없어라.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춤추는 여신 신석초

 

춤추는 여신(女神)

 

달은 잠들고 그윽한

한숨지는 밤 동산으로

꽃 같은 여신이 내려오다.

 

매혹하는 꽃송아리

꾸며 논 보석의 수풀 속에

꿈결같이 움직이는 벗은 몸이

바람에 흔들리는 물을 그리면서

 

금강석에 묻힌 호수 위에

모호한 장미빛 안개 떠돌아서

여신은 매력의 술을 마시고

 

제 그림자에 명정하는

아리따운 새와도 같이

시름하는 여울로 비틀거리어

허공의 한 끝을 헤매다

 

머리는 칠보의 병을 기울여

공작이 어여쁜 연꽃봉오리를 찍고

홍옥을 물린 고운 입술은

탄식하는 꽃잎의

달고도 괴로운 숨결을

어둠 속으로 남몰래 흐트러 놓다.

 

아아, 넋 끊는 적(笛) 소리 들리고

청춘에 늘어진 기인 버들가지

소백한 보드러운 팔을 서리어

대리석으로 깎은 허리에

애무하는 고운 기반을 끄르다.

 

이럴 때 시간은 내밀한

우주를 이루고

침묵은 다디 단 권태의 술을 빚다.

 

어느덧 빛과 그림자 얼크러진

순수한 진주의 바다 떠올라서

범주(帆舟)는 푸른 물 거울을 건너고

지상(至上)의 나래 오오, 뜬구름 쪽은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파초 신석초

 

파초(芭蕉)&

 

황혼의 쇠잔한 노을이

소리 없이 뜰 위에 내리고

파초가 드린 기인 소매 나부껴

잠깐 옛날의 근심을 돋우노나.

 

속절없이 저무는 이 사이

방황하는 바람은 불어 와서

황금빛 나는 네 가지에다

한숨 모여, 비단의 띠를 흘려라.

 

한숨 쉬는 묵은 파초(芭蕉) 잎이여!

너는 아는가! ―현세와, 내 머언

인연이 짓는 어지러운 심사를

파멸하고, 또 존재하는 것……

나는 있다, 이 고귀한 것의 옆에

오오, 퍼덕이는 옛날의 명정이여!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폭풍의 노래 신석초

 

폭풍(暴風)의 노래

 

바람이 분다. 바람아 잠 깬 바다를 건너

네 몰려오라.

너의 숨결은 내 아침 하늘에

안개와 광명의 티끌을 가져온다.

금은으로 두른 아레스*의 옷자락이

나를 빛내고 또 나를 흐린다.

 

프로메테우스여. 내―

바다를 쏘는 황금 화살이

구름 벽을 뚫고

너의 심연으로 쏟아지는구나.

바람에 뒤설레는 물결의 눈보라

밝음을 낳는 아침 한때는

이렇게 혼란을 가져오는가.

 

저기 번득이는 여명의 부채살 속에

구름과 갈대 흔들리는 곳에

바빌론*의 저자가 움직인다.

불멸하는 묵은 제왕의 도시가

잠 깨어 물결을 치노라.

성은 뒤끓고 원주(圓柱)는 수런거린다

복도에 웅성대는 군집(群集)의 소리.

 

바다는 고민하는 아틀라스*의 머리 위에서

진동을 한다.

바위로 부서지는 물결의 물보라가

하늘 꼭대기까지 솟아오르는구나.

유락의 천사. 하얀 비둘기들은

놀래어

미지의 숲으로 날아 흐트러지고

적멸을 깨뜰고 일어선 팡세의 군사들이

구름에 모여 기치 창검을 든다.

오오, 프로메테우스.

황량한 나의 뜰에 구르는

부서진 주춧돌과 어수선한 벌집들.

 

바람아 불라. 씰라*의 숨결이여.

불어 오라.

역사를 꾸미던 숱한 꽃잎들이

낙엽처럼 날아

기슭 없는 바다를 덮는다.

갑작스러운 물결의 소용돌이로

바위는 포효하고 하늘은 찌푸려지고

갈대는 떤다.

잡초는 우거진 묵은 거리론

놀란 곤충들이 기노라

아아, 먼지가 이노라.

 

광명을 찾는 무리들이여.

대지에 자줏빛 하늘문이 열릴 제

내가 쏘는 불의 화살

나의 빛깔의 충격에 사로잡힌

뭇 새들, 자유의 새들이여.

서로 배반하는 오오, 시천(十千)의 생각의 자식들이여.

이 큼직한 불집 속에 와 헤매라

나의 장미빛 화살에 몸을 던져

살을 찢기우고 피를 흘리게 하라.

내가 갖가지 환상의 숲에 펼쳐 놓은

매듭 많은 비밀한 그물을

너희들은 보지 못한다.

프로메테우스. 어쩔까나,

이 혼돈과 어지러운 풍파를.

너의 지혜의 보고를 활짝 열어 노렴.

 

문명의 선구자여. 어둠을 밝힌 자여.

그러나 장난꾸러기 창조자여.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폭풍이 부는 거리에서

이 티끌의 도가니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여, 너는 무슨 능력으로

너의 완결무결한 낙원을 이룩하려는가.

너의 다시 없는 국가를?

 

`프로메테우스'

나는 움직인다. 나는 행동을 하려 한다.

바람 속에 뛰어들겠노라.

거칠고 캄캄한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어라

나의 몸은 밝다

무엇을 주저하리

프로메테우스여. 달리어가라.

내 몸은 빠른 아킬레우스*

내 혓바닥은 순수한 불꽃이어라

나는 지혜 많은 칼타고*의 범과 같도다

나는 약진한다.

나는 나의 이상을 빨리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조바심하는 가슴이여

내 내부의 깊은 뒤설렘이여

(정신은 질서 없이는 지속되지 않느니)

오오. 독수리여. 제우스의 사자여

나의 간을 갉아먹는 악독한 새여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야 한다.

 

너의 날카로운 부리로 쪼은 내 몸의 흉터

얼마나 포악한 너의 박해가

나에게 이다지도 큰 시련을 주었던가

나는 안다. 내가 준 불의 어지러운 결과를

나는 비틀거린다. 나는 다시 일어선다.

나는 파괴된 것을 건설해야 하리

나는 언제나 높고 빛나는

영원한 피라미드를 원한다.

 

* 아레스: 그리스 신화의 군신(軍神).

** 바빌론: 서쪽 아시아에 있던 고대왕국 바빌로니아의 서울. 한때 인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 아틀라스: 어깨로 하늘을 떠받고 있는 거인. 지도의 신.

** 씰라: 호머의 오딧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난파하여 떠돌아 다닐 때 지나던 험한 물목을 말함.

** 아킬레우스: 트로이 전쟁의 용장임.

** 칼타고: B.C 9세기께 페니키아인들에 의하여 건설되었던 최대 도시.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풍우 신석초

 

풍우(風雨)

 

봄도 반 넘어

깊은 산방에

내 홀로 잠을

깨어 누웠나니

 

베개 위에 듣는

비바람 소리는

뒤안 꽃숲을

다 흔들어 놓는다.

 

꽃이 피면 왜 이리

비바람은 많은가

 

세월이 하마 덧없어

뒤흔들며 가느니.

 

바라춤, 통문관, 1959

 

 

 

 

 

함령지곡 신석초

 

함령지곡(咸寧之曲)

 

홍포(紅袍) 금사(金絲)띠

흑사모(黑紗帽)로

피리 가야금 적대 비껴 들고

무고(舞鼓) 앞에 앉다

적적한 고궁 뜰에

강화 화문석이 차구나

조용히 울려 퍼지는

함녕지곡

옛 가락은 구름인 양.

 

그날 번화했던 뜨락에

빈 자락 깔린 위에

새삼 그윽히 우조(羽調)가 흐른다.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호접 신석초

 

호접(蝴蝶)&

 

호접(蝴蝶)이여! 언제나

네가 꽃을 탐내어

붉어 탈 듯한

꽃동산을 헤매느니

 

주검도 잊고

향내에 독주에 취하여

꽃잎 위에 네 넋의

정열이 끝나려 함이

 

붉으나 쉬이

시들어질 꽃잎의 헛됨을

네가 안다 하여도

 

꿈결 같은 즐거움

사라질 이슬 위에

취함은, 네 삶의 광휘일러라.

 

자오선, 1937

 

 

 

 

 

화장 신석초

 

화장(化粧)

 

다만 불멸의 소리 있을 뿐. ―발레리

 

날마다, 날마다

고적한 거울을 대하여

내 모양을 꾸미는

내 심사를, 그대는 알아요?

 

내가, 내 꾸밈으로써

구태여 그대의 욕구를

끄을려 함은 아니언만

 

그래도, 난 내 모양 꾸미는

그 일에만 팔려, 날마다

거울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바라춤, 통문관, 1959

 

 

 

 

 

흐려진 달 신석초

 

흐려진 달

 

하룻밤, 내가 달을 좇아서

이름도 모를 먼 바닷가

모래 위에다 장미꽃으로

비밀의 성을 쌓고 있더니

 

밤이 깊도록 내가 모래성에서

다디 단 술에 취하여 있을 때,

문득 구름이 몰려와서

내 달을 흐레다.

 

아아, 내 꿈이 덧없음이런가

바다의 신이 나를 시기하였음이런가

심연으로 달은 빠지다.

 

달이여, 너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헤매다, 나는 보다

물결쳐 움직이는 바다의 그 큰

모양을…….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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