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에서 가장 빈도 높게, 그리고 깊게 하나의 상징적인 체계를 획득하고 있는 사물,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라고 생각된다. 기록된 문헌상의 첫 시가로 꼽히는 옛 시가 「황조가」에서 박남수의 「새」, 또는 「새의 암장」에 이르기까지 그 <새들>의 대표적인 속성인 비상의 이미지는 우리 시를 동사화하는 여러 모습의 움직임들로 우리 곁을 날아다니고 있거나 우리 시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의 한 무늬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또 한 마리의 새가 우리 시의 하늘을 깊게 날고 있다. 혹은 이 겨울에도 맨발로 우리 곁을 종종거리고 있음을 만난다. 장석남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 바로 그것이다.
1.
찌르레기떼가 왔다/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검은 새떼들//찌르레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저문 하늘을 업고 제 움음 속을 떠도는/찌르레기떼 속에/환한 봉분이 하나보인다
2.
누군가 찌르레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봄 햇빛 너무 뻑뻑해//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오랜 세월이 지난 후/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찌르레기떼가 가고 마음엔 늘/누군가 쌀을 안친다/아무도 없는데/아궁이 앞이 환하다
<망명>이라는 말이 지닌 농도로 보아 그 표제가 좀 크고 그 때문에 이미지의 누수현상을 빚고는 있지만, 그것은 지금의 척박한 삶으로부터의 적극적인 초월을 현실적인 행위가 있는 말로 자리바꿈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 힘을 새떼들, 찌르레기떼의 움을 속에서 그는 훔쳐 내고 있다. 이 시에서는 물론 그 울음소리가 <쌀 씻어 안치는 소리>, 곧 배고픔(결핍)에 충만을 주는 음성상징으로 처리되어 따뜻하고 밝은 극복의 힘(아무도 없는데/아궁이 앞이 환하다)이 되고 있지만, 이 또한 <여기>에서 <저기>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새>의 원초적인 비상의 이미지에 깊게 닿아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찌르레기떼의 울음 속에서 <환한 봉분>을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주검의 봉분마저 그에겐 <환한> 밝음의 그것이다. 적극적인 만남, 자연과의 화응이 거기에 있다. 모든 상처와 생명의 단절마저 수용하는, 그래서 시는 혁명이다. 시인은 프롤레타리아다. 시는 <환한 봉분>이다.
나도 그렇게 쓴 적이 있다.
<성자 거지 프란치스코가/새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그가 살아 죽어서, 죽어서 살아!/새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나도 그럴 수 있을까/살아 죽어서, 죽어서 살아!/뜨락의 작은 나무 하나도 나뭇가지도/한 마리 새를/평안히 앉힐 수 있는/몸으로, 열심히 몸으로!/움직이고 있다>
-「몸시.52-새가 되는 길」부분, 「몸시」, 세계사, 1994.
<새들은 하늘과 땅을 왕래한다 저승의 어머니께오서 다녀가신 날이면 우리 집 새벽 마당에 새들의 발자국이 찍혀져 있다 새들은 어디나 건너다닌다...... 하느님께오선 풀잎들 정갈하게 자라고 풀씨들 까맣게 익는 나라에만 새들을 두신다>
-「새.2」부분, ꡔ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ꡕ, 문학세계사, 1990.
<새>의 2차적인 상징은 극복과 초월을 통한 적극적인 화응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데려가 주는 힘이며 마침내는 하나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무속에서 흔히 만나기도 한다. 높은 솟대 위에 나무로 깎아 앉힌 새들이 그것이다.
우리 시는 비극적인 정황과 인식 속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새들>의 그것을 통해 <원초적인 정기가 조금도 부패되거나 손상되지 않은 최초의 장소와 그 순간>을 꿈꾼다. 이른바 프로이트의 Unheimlich, 드러난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것마저 힘으로 바꾸어 <저기>로 가는 이행 속에 있다. 우리 시의 사상의 <무늬>는 절망의 편이 아니다. <새들>의 날개짓이거나 그들이 척박한 땅 위에 찍는 발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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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용인 지나는 길에 / 민영
용인 지나는 길에
민 영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냄새.
구국 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민영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 중에서
민영 연보
1934년 음력 9월 6일 강원도 철원군 월하리에서 민준식과 나창훈의 외아들로 출생. (본명 : 병하 丙夏)
1937년 3세 부친의 부름을 받고 모친과 함께 만주 용정으로 이사.
1939년 5세 명신소학교 입학(이후 신민소학교로 이름이 바뀜).
1946년 12세 부친 별세, 9월에 귀향. 철원 제3인민학교 5학년 편입.
1947년 13세 월남하여 생계를 위하여 명동에서 담배 장사를 시작.
1950년 16세 숭실중학교 입학. 한국전쟁 발발로 휴학(이후 학교를 다니지 못함.)
12월에 부산으로 피난.
1951년 17세 부산에서 부두노동 및 신문팔이 등을 함.
1952년 18세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열린 ‘문예강좌’ 청강.
대한체신협회 인쇄부 해판공으로 취직 후 자유민보사 공무부로 이직.
(김상옥, 박재삼, 송영택, 천상병 등을 알게 됨.)
1953년 19세 대한교과서 공무국 입사.
1954년 20세 서울로 이사.
1957년 23세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9월호에 시 ‘동원’이 수록(1회 추천).
1959년 25세 시 ‘죽어가는 이들에게’가 <현대문학> 2월호에 추천(2회 추천).
시 ‘석장에서’가 <현대문학> 9월호에 추천(천료)되어 등단.
1960년 26세 전후문학인협회 가입. 11월에 한경재와 결혼.
1967년 33세 대한교과서 사직 후 학원사 편집사원으로 취직.
1972년 38세 첫 시집 <단장> 간행.
1973년 39세 소설가 정인영과 함께 도서출판 창원사 창립.
1974년 40세 자유실천문인협회 회원 가입.
1976년 42세 창원사을 그만두고 독서신문사 출판부장이 됨.
1977년 43세 제2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 간행. 계몽사 편집차장으로 이직.
1979년 45세 출판대행 <금란사>를 창립하여 독립.
1982년 48세 번역서 <육일간>, <태양 속의 사람들> 간행.
1983년 49세 제3시집 <냉이를 캐며> 간행. 이 시집으로 제2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수상.
번역서 <중국민화집> 간행.
1984년 50세 신경림, 정희성, 하종오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 창립.
1985년 51세 모친 별세.
1987년 53세 제4시집 <엉겅퀴꽃> 간행. 자유실천문인협회 고문으로 추대.
1988년 54세 재일교포 시인 허남기의 <화승총의 노래> 번역서 간행.
1989년 55세 민요연구회 회장이 됨. 설화집 <고구려 이야기> 간행.
1990년 56세 위인전기 <광개토왕> 간행.
1991년 57세 제5시집 <바람 부는 날> 간행. 이 시집으로 제6회 만해문학상 수상.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으로 추대.
창작과비평사에서 기획한 <한국현대대표시선> 1·2·3권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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