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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시인
/함명춘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 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 들이 그의 유일한 독자였으니
세상을 위해 쓴 게 아니라 세상을 버리기 위해 쓴 시처럼
난 그가 집 밖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잠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먹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자꾸 적어넣었다
더이상 쓸 수 없을 만큼 연필심이 다 닳았을 때
담벼락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를 새겨넣고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무명시인
끝내 그의 마지막 시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 몇 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날은 바람과 구름이 한참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갔다
누군가는 그 글이 그가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라 하고
또 누군가는 그건 글도 시도 아니라고 했지만
더이상 아무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
한 그루 연필이 노트 속으로 들어가고 또 한 그루의 연필이 노트 속에 심겨지는 동안 세월이 갔다. 그가 그 방으로 들어와 열심히 연필을 깎았기 때문이다.
연필로 시를 쓰면 볏짚 타는 냄새가 나고, 저물 무렵 연필 속에서 흘러나온 글씨 속에는 비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비가 오는 날 젖은 볏짚이 타는 냄새를 쓰고 싶어서 그는 혼자 연필을 깎는 사람이다. 감추어 두었던 울음이나 세상이 자신을 지나가며 남겼던 것들이 혼자 헛웃음이 되면 그의 연필에서 흘러나온 젖은 볏짚들은 두엄이 되어 노트 귀퉁이에 쌓여간다.
그와 함께 그윽하게 썩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는 시인이다.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에 없는, 허명을 남기는 일보다 자신의 노트 속에 새들을 남기겠다고 다짐한, 그래 진짜 시인은 부러진 연필을 깎아 새들을 불러 모으는 존재니까.
산중여관1
마당엔 제비가 낙엽을 쓸고
몇 개인지 모를 방을 옮겨다니며
물고기들이 걸레질을 할 동안
오동나무와 족제비는 아궁이를 지펴 서둘러 밥을 짖는다
뒤뜰에는 장작을 패는 바람의 도끼질 소리
혹시 오늘은 어느 객이 찾아오려나
주인인 듯한 허름한 옷차림의 산국화
현관문 앞 숙박계를 어루만지며
길고 흰 수염을 쓰다듬듯 시냇물이 산골짜기를 빠져나가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모두 잃어야 한 번 쯤
묵어갈 수 있는 산중여관
- 함명춘 (1966~ )
"겨울의 초입에 서니 이런 산중여관에 가고 싶다. 가을은, 낙엽은 다 졌겠다. 나목이 되어 조용히 서 있어도
좋겠다. 산중여관의 주인은 까다롭지 않고 무던해서 노랗고 작은 산국화처럼 나를 보고 반겨 웃을 것이다. 그
러면 엷은 향기가 그에게서 내게로 올 것이다. 나는 세상을 떠나와 산중여관에 묵고, 시냇물은 세상을 찾아가
라고 거룻배를 띄워 보내도 좋겠다.
방과 마루에 걸레질을 하고, 불을 때 밥을 짖고, 밤새 문 밖에서 낙엽을 비질하는 바람의 소리를 듣고 싶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늦은 밤에 물을 끓여 차를 마시면 어느새 나도 수수해져 사람이 좋아질 것이다. 목침
을 베고 누우면 깊은 산속에 사는 사람처럼 순하게 잠들 것이다. 어느 날에는 소복하게 내린 눈을 순은의 아
침에 보게도 될 것이다" 시를 올린 문태준 시인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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