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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 - 시에서의 상처, 죽음의 미학
2016년 02월 20일 05시 24분  조회:3422  추천:0  작성자: 죽림

상처와 죽음을 바라보는 몇 가지 방식

                                                                                          /박남희(시인)


1. 상처와 죽음의 시간적인 의미

시간을 선형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의 삶이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생의 마무리이며 매듭인 셈이다. 시학에서 삶을 이야기 하면서 종종 죽음에 천착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야 말로 삶의 비의를 숨기고 있는 뇌관과 같은 것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선형적으로 보면 죽음은 시간의 끝에 존재하며 그동안 시간이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적인 거울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삶의 끝에 있으면서도, 매 순간의 삶의 의미를 환기시켜주고 있고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무수한 상처를 매듭지어주는 신비한 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형적 시간의식 속에는 이미 상처가 내장되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상처란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상처를 포함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상처는 엄밀한 의미에서 각자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이 스스로 개체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개인과 집단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고대의 역사가 집단에 치중되어 있었다면 근대의 역사는 차츰 개인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근대 시 역시 근대 이전의 시에 비해서 개인의 정서와 사상을 중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문학의 다른 장르에 비해서 시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시야말로 현대성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장르라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시에 있어서 서정성은 개인적 정서를 드러내는데 유용하고, 서사성은 대체로 집단의 공통적인 화두를 시적으로 형상화 시키는데 적합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상처는 서정성이나 서사성과는 무관하게 거의 모든 시에 나타나 있다. 시에 있어서 상처를 읽어내는 방식은 시간을 전경화시켜서 바라보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간을 전경화 시키는 방식은 기억이나 체험을 현재화 시키는 수법이 일반적이다.

2. 상처, 혹은 기억과 체험의 현재화

물이 흘러가다 돌부리에 부딪쳐서 부서지기도 하고 물방울로 튀어서 낯선 곳에 버려지기도 하듯이, 인간의 삶을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전경화시켜서 바라보면, 개인과 역사 속에서 부서지고 분리되고 고립되는 상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처들은 커다란 흐름 속에서 어긋남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어긋남은 주로 타의적이고 집단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쉽게 치유되기가 쉽지 않다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근대문학의 시점을 20세기 초로 본다면 우리의 근대문학은 근대사의 상처와 더불어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36년간의 암흑기와 6.25전쟁, 4.19 혁명과 5.16 군사구테타, 그 후의 군사독재 정권과 광주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근대사는 그 자체가 다양한 상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문학 역시 이러한 근대사와 함께 상처의 길을 걸어왔으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상처야 말로 우리 근대문학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이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처는 주로 과거의 기억이나 체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문학으로 수용하려면 기억이나 체험의 현재화가 필요하다. 우선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그 상수리나무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진달래 피는 금강변
신동엽시비 곁에는
죽은 상수리나무 하나
봄비에 젖어 있었는데요

진달래 꽃그늘 아래
장총을 베고 잠들던 소년병사처럼
그 상수리나무 지금쯤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살아생전 열매 털던
모진 떡메에 시달려
엉덩짝처럼 짓이겨진 상처 두어 개
옆구리에 매달고
비 그친 하늬바람에 감기어 있었는데요

발길질 해댈 때마다
이 세상에는 용서 못할 것들이
끝끝내 있다는 듯이
털릴 열매도 없이 신동엽처럼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치고 있었는데요

―정양,「상수리나무」전문(『문학과 경계』2005년 여름호)

이 시에서 ‘상수리나무’는 신동엽과 소년병사로 상징되는 근대사의 상처를 현재화시켜서 보여주는 환유적 대상물이다. 상수리나무는 이 땅의 민주화의 첨단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던 신동엽의 시비 곁에 죽은 채 서있는 나무라는 점에서 신동엽과는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3연 역시 상수리나무는 “진달래 꽃그늘 아래/장총을 베고 잠들던 소년병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나무라는 점에서 소년병사와 환유적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환유적 관계는 이상하게도 은유적으로 읽혀지는데, 이것은 신동엽과 상수리나무가 죽었다는 점에서 상동관계에 있고, 상수리 나무와 소년병사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동엽과 소년병사는 상수리나무로 완전히 환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은유라고 볼 수는 없다. 4연에 오면 상수리나무는 신동엽과 소년병사로 상징되는 우리의 근대사의 상처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된다. 상수리나무 열매를 털기 위한 “모진 떡메에 시달려/엉덩짝처럼 짓이겨진 상처 두어 개/옆구리에 매달고”있는 상수리나무야말로 우리의 근대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역사의 ‘발길질’은 이러한 아픔과는 상관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마지막 연의 “발길질 해댈 때마다/이 세상에는 용서 못할 것들이/끝끝내 있다는 듯이/털릴 열매도 없이 신동엽처럼/부르르 부르르/진저리치고 있”다는 표현에서 이러한 시인의 관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털릴 열매도 없는데 무작정 털어대는 행위야말로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무자비한 폭력이고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어긋남’과 상처는 종종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지기도 한다.

더운 바람에 갈대만 술렁인다.
개성 뒷산을 바라보며 강변을 어슬렁거릴 때
강물 타고 떠내려온 철모 하나
나는 이것이 누구의 것인 줄 알 수가 없다
쪼그리고 앉아 해묵은 갈대 알구지로
철모를 건져올린다
뚜껑 없는, 속이 빈 화이버
흰 물새 날개짓 같은 글씨가 또렷하다
믿음, 소망, 사랑 ­ 이건 참 이상하다
20년전 참호 속에 숨어 내가 00군번으로 썼던 낙서
이 글자판의 화이버가 녹슬지 않고 지금도 떠내려온 것은
아침 세수길에서 그때 내가 멍청히 흘려보낸 철모일까
아 오늘 이 강가에 나와 내가 다시 만난 침묵 하나
이 침묵은 너무 두렵고 고요하다

―송수권,「임진강」부분(『창작 21』2005년 여름호)

이 시의 인용되지 않은 후반부와 연결시켜 보면, 시인은 일요일 한낮에 자유의 다리 밑 임진강에 가서 개성 뒷산을 바라보며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철모를 줍게 되는데, 이 철모는 시인이 20년 전 군대에서 세수하다가 멍청히 흘려보낸 철모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에서 시인에게 새롭게 전경화 된다. 떠내려 온 철모에 씌어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글씨는 시인이 20년 전에 화이버에 썼던 낙서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까맣게 잊혀졌던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동인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글은 시인 자신의 창작품이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글이라는 점에서 시인이 발견한 화이버가 20년 전에 자신이 물에 떠내려 보냈던 화이버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 화이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화이버가 20년 전의 화이버와 동일한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 화이버를 통해서 20년 전의 역사를 새롭게 환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철모를 시의 말미에 ‘침묵’으로 은유함으로써 역사의 침묵에 대한 무언의 항변을 하고 있다. 시인은 “이 침묵은 너무 두렵고 고요하다”고 말한다. 이 시의 인용되지 않은 후반부에서 시인은 “이 침묵을 깨뜨릴 자 누구인가, 답답한 산도/이제 한번쯤 돌아앉아 입을 열 때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함으로써 여전히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상처는 그 상처가 생긴 그 순간에는 그 상처의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순간에는 상처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파온다. 이러한 아픔은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몸속의 저항과 관계된다. 아픔을 인식시키는 감각이야말로 상처에 대항하게 해주는 안티테제인 것이다.

칼날이나 칼날 같은 것이
살갗을 베고 지나간 후
바로 들여다보면 상처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때는 아프지 않다
조금 더 기다리면 통증은 배어나는 핏물과 함께 온다
상처는 피로 증명되고 피가 나면 통증이 온다

그 아침, 피를 보지 말아야 했다
고개를 돌린다고 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이희중,「상처에 대하여」부분(『문학마당』2005년 여름호)

이 시 역시 상처가 살갗을 베고 난 후 금방오지 않고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 한 후 “핏물과 함께 온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의 ‘핏물’은 상처를 가시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시각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역사와 연결시켜보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역사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시에 따르면 상처는 피로 증명된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다고 피를 보지 않는 행위를 통해서 상처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은 “고개를 돌린다고 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고 말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역사의 소용돌이나 상처가 이미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3. 상처의 풍경과 치유의 방식

오래된 상처는 그 상처가 우리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속에서 그 상처가 어느 정도 지워졌거나, 아픔의 감각이 이미 무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상처의 존재를 아주 무화시켜주지는 못한다. 상처는 살갗이 아문 뒤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상처의 온전한 치유는 물리적인 치료 뿐 아니라 기억을 통한 심리적인 요인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상처란 뿌리가 깊고 복잡하다. 따라서 그 치유의 방식도 복잡할 수밖에 없고, 완치 가능성도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아래의 시는 우리에게 상처의 풍경을 보여주고 그 치유방식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그녀는 49년생 소띠에 무남독녀로 자랐다.
타고 난 것일까,
성격이 우직해서 근본은 잘 울지 않는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얼굴도 모르는 슬픔에 대해 울 일 없다.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전사했다. 역사에 대해 물론 울 일 없다.
그 힘센 홀어머니 이제 다 늙었다, 낯익은 슬픔에 대해 더 이상 울 일 없다.
그 고생에도 어머니, 울지 않았으므로 그 속 다 물려받았으므로
그녀는 잘 울지 않는다. 도대체, 그녀의 인생은 담수 중인 것일까.
드디어 대학까지 나오고 시집가고 아들 딸 낳아 키웠고
사십 여 년 직장생활 동안 그러나
남편은 일평생 백수이고 별 볼 일 없고 그녀는 낙이 없고
그래서 성당 나가고 맹신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하고
한탄해도 늙어가고 마침내 한 번,
행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잘 울지 않는다.
인체의 70% 이상이 물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좀 뚱뚱한 편이다. 그녀의 꾹 다문 인상에선 만수가 느껴진다, 그녀는
잘 운다. 연속극 같은 걸 보다가도 걸핏하면 운다.
이산가족 찾기 실황방송을 보면서 많이 울었고 무슨 유가족들 슬피 우는 것 보다가 덩달아 운다.
어딜 좀 부딪쳐 아프기라도 할라치면 비로소
살아나는 상처가 있는지 울고
당신 밖에 없단 말에 울고 선물 하면 울고 아이들한테 위로 받으면 찔끔, 운다 근본은 잘 운다, 그녀는
무넘이처럼 운다. 눈물 어룽거리면서도 끔벅,
소처럼 소리가 없다. 그녀는 가끔 방류한다.

―문인수,「저수지 풍경」전문(『현대시』2005년 7월호)

시인은 저수지를 보면서 49년생 소띠에 무남독녀로 힘겹게 자라온 그녀를 떠올린다. 이 시는 저수지의 ‘담수’와 ‘방류’를 ‘울지 않는 행위’와 ‘우는 행위’에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시의 전반부는 그녀가 울지 않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녀가 울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행복하거나 울만한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얼굴도 모르는 슬픔’이나 ‘낯익은 슬픔’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고생에도’ 울지 않았던 어머니의 모진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는 후반부에 와서 그녀가 걸핏하면 우는 여자임을 말함으로써 그녀의 본성이 울지 않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녀의 몸이 좀 뚱뚱한 편이라는 진술은 그녀의 몸에 수분이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녀의 몸에는 눈물이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지시해준다.
시인이 잘 울기도 하고 울지 않기도 하는 그녀를 저수지에 빗대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운다’고 표현되는 그녀의 상처가 단순히 개인의 상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저수지가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는 그 안에 물이 있고 그 물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그녀를 저수지로 본다면 물은 그녀 안에 있는 눈물이고, 상처의 또 다른 기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로 상징되는 저수지는 자신의 내면으로 흘러드는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한다. 저수지가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는 모두 저수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방법이고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저수지의 행위를 역사나 인간의 상처에 빗대어 보면, 일종의 치유의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위의 시에서 그녀가 울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세상을 모질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방식이고, 우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뭉쳐있던 상처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가 다 나름대로의 치유의 방식이고 존재의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울음은 ‘무넘이’처럼, 소처럼 소리 없이 운다는 점에서 그녀로 표상되는 상처의 주체, 즉 역사가 처해있는 현실이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위대한 생애가 위대하게 다하고
울음이 끝나고 썩음의 생애가 다하고
기억과 시간의 생애가 다하면
생명 아닌 그 무엇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지
저녁놀 직전 왕릉을
우러르면 보인다.
빛도 크기도 없다 색깔도 없다
깊음도 없다 모양도 없다
동그라미는 수천년이 애매하다. 왕릉의 동그라미는
가라앉으며 솟아오르므로 제자리이다.
가라앉음이 솟음이므로 제자리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생애 너머로 흔들린다. 저녁놀 직전 우러르면
왕릉은 빛 없는 빛이다. 크기 없는 크기다.
냄새, 남은 생애의
냄새 없는 냄새 코끝에 물씬하다.

―김정환,「왕릉」전문(『내일을 여는 작가』2005년 여름호)

죽음의 위대성은 크기나 모양으로 측량되지 않는다. 왕릉은 보통사람의 묘에 비해서 크기도 크고 웅장하지만, 그 묘는 더 이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과거의 어떠한 영화나 위대함도 시간 앞에서는 그 형체를 잃는다. 왕릉은 그 위대성과 더불어 무덤 스스로 숨겨진 상처를 내장하고 있다. 하지만 왕릉의 위대함이나 상처는 모두 “기억과 시간의 생애가 다하면” 빛도, 색깔도, 깊음도, 모양도 없어진다. 다만 하나의 동그라미만 남는다. 여기서의 동그라미는 시간의 원형이며 시간의 끝인 죽음에 닿아있는 부재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을 원환적으로 바라보면 윤회의 시간이고 원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은 존재의 있고 없음도 아니고, 밝음도 어둠도 아니다. 시인은 “동그라미는 수천년이 애매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애매하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혼동시킨다는 개념으로, 겉으로 보이는 왕릉의 모습이 노을이 지는 시간 즉, 죽음의 시간 속에 들어가서 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왕릉의 동그라미는 왕릉의 광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광휘 즉 이 땅의 영화야 말로 가라앉았다가 솟아오르는 것이고, 결국은 그것조차 구별되지 않는 ‘제자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시는 결국 이 땅에서 영원한 영광은 없으며 모두 시간 앞에서는 무기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시간이야 말로 상처를 치유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셈이다. 시간의 끝을 죽음으로 본다면 죽음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식구였다

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을 훑고 다니고
하나는
안전선 밖에서 종종거리고
하나는
뜨거운 레일 위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푸득
날아 건너편으로 가고

하나는
제 집인 듯한
전철 플랫폼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빠알간 맨발이었다

―이경림,「비둘기들」전문(『현대시』2005년 8월호)

본래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해서 인간은 비둘기를 잘 해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비둘기들은 도심 어디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는 지상의 전철역 부근에 살고 있는 네 마리의 비둘기 가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시를 읽다보면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떠오르는데, 이것은 두 시가 유사해서라기보다는 도심에 살고 있는 비둘기의 집 없음(homeless)이라는 모티브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생기면서 비둘기의 번지가 없어지면서 ‘홈리스’의 처지로 전락했다면, 이경림의 비둘기는 도시의 임시 거처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의 폭력에 의한 ‘홈리스’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생태 환경 시로도 읽을 수 있지만, 이 시는 단순히 생태 환경 시의 차원을 넘어서 문명에 의해서 침해받는 ‘평화’와 ‘자연’의 결핍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비둘기들은 한결 같이 안전과 생존을 침해 받고 있으며,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시의 끝부분에서 시인이 비둘기의 ‘맨발’을 전경화시키고 있는 것은, 문명의 폭력 앞에서 무방비상태로 놓여있는 비둘기들의 힘없음과 헐벗음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도심에 사는 비둘기는 그 안에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집 없음과 불안은 문명에 의해서 훼손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상처를 도심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치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이 시에서 제시한 “빠알간 맨발”은 한편으로는 문명에 대한 순응의 표시이고 한편으로는 문명에 대한 반항의 표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은 이렇듯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순간 ‘맨발’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마지막 역시 ‘空手來 空手去’라는 점에서 ‘맨발’이다. 그런 점에서 비둘기들의 ‘맨발’이야말로 세상의 어긋남이나 상처와 대면하는 가장 정직한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창작 21>


 

 

박남희 시인

 

경기 고양(원당)에서 출생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9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1997)
고려대. 숭실대 강사
일산문학학교 시창작반 강사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2005년 문학과경계

평론, 「탈주와 회귀 욕망의 두 거점-장정일론」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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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4 詩의 벼랑길위에서 만나는 시인들 - 신석초 2016-02-10 0 5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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