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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金得臣) 1604(선조37)∼1684(숙종10) 조선의 시인. 본관은 안동(安東),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귀석산인(龜石山人), 충무공 시민(時敏)의 손자, 부제학(副提學) 안흥군(安興君) 치(緻)의 아들. 어머니는 사천(泗川) 목씨(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 김씨이며,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16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1662년 (현종3)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장악원 정·지제교(掌樂院 正·知製敎) 등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를 지냈다. 뒤늦게 벼슬에 올랐으나 장차 일어날 사화(士禍)를 예견하여 벼슬을 버리고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취묵당(醉默堂)에 내려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74세에는 사도시정으로 증광시 시험관이 되었고, 78세에는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80세에는 가선대부에 올랐고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되었다. 이듬해인 81세에 생을 마쳤다. 묘는 충북 괴산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 당대 유명한 시인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문집으로 <栢谷文集>이 있고 평론집인 <終南粹言>,<終南叢志> 등이 있다.
백곡은 백이전(伯夷傳)을 1억1만3천번을 읽고 그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으며 그의 뛰어난 문장이 세상에 알려지니 효종이 그의 '용호한강시(龍湖漢江詩)'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문보다는 시, 특히 오언 ·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백곡집 외에 시화집인 '종남총지(終南叢志)'가 있으며 그 밖의 작품으로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은 '국순전' '국선생전' 등 고려의 한 시대만 한정된 줄 알았던 술 가전계통의 소설이 조선조에도 그 면모가 지속됐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조선 중기에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백곡 김득신의 서재 억만재에 얽힌 내력은 아주 유명합니다. 백곡 김득신(1604~ 1684)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 는 꿈에 노자를 만났고 그 연유로 아이적의 이름을 몽담(夢聃)으로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김득신은 머리가 지독하게 나빴습니다. 10살에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흔히 읽던 십구사락의 첫 단락은 26자에 불과했지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오히려 엄청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은 간서치였다는 말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서치는 책벌레라는 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편집증, 독서마니아 즉 독서광이었을 것입니다.
부친이 감사를 역임할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인데도 머리가 나빴던 그는 유명 작품들을 반복하며 읽으며 외웠습니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괴강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김득신의 옛집, 취묵당(醉墨堂)에 걸려 있는 ‘독수기(讀數記)’에 보면, 그는 1634년부터 1670년 사이에 1만번 이상 읽은 옛글 36편을 밝혔는데, 그 횟수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억만재(億萬齋)’는 글자 뜻 그대로 김득신이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책벌레 김득신의 책읽기에 대한 일화가 적잖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백곡이 혼례를 치르던 날의 이야기다.백곡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밤 신랑은 신부를 제쳐두고 방을 뒤지며 책을 찾았습니다. 경대 밑에서 백곡이 발견한 것은 책력(冊曆). 밤새도록 읽고 또 읽은 백곡은 날이 새자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냐”고 말했다 합니다.
80이 넘도록 장수한 백곡은 먼저 딸을 여의었는데, 분주한 장례 행렬을 따라가면서도 그가 손에서 놓지 않고 보았던 글이 바로 ‘백이전’이었다. 또 부인의 상중에 일가친척들이 ‘애고, 애고’ 곡을 하는데, 그는 곡소리에 맞춰 ‘백이전’의 구절을 읽었다고 이의현은 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백곡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자질을 알아본 사람들은 글공부를 포기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수치요 굴욕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벌레 김득신은 40여년간 꾸준히 읽고 시를 공부한 끝에 그는 말년에 ‘당대 최고의 시인’(택당 이식)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작하다가 얼마 하지도 않고 좌절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책벌레가 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끈기가 필요합니다. 목표가 필요합니다. 독서광이야기/ 김득신의 독수기에서 “그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아예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탓하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 되었던 것처럼 책벌레가 되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꿈을 이루며 성공적인 삶을 사시지 않으시렵니까? 또한 책벌레 중의 책벌레가 되어 최고의 지성으로 남고 싶지 않으십니까? ▣ 용호(龍湖) ▣ 고목한운리(古木寒雲裏) /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추산백우변(秋山白雨邊) / 가을 산엔 소낙비 들이치네. 모강풍랑기(暮江風浪起) / 날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 어자급회선(漁子急回船) / 어부는 급히 뱃머리를 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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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백곡 김득신 선생님 비문에서
어릴 적 우둔하다고 놀림 받았고, 환갑이 다 되어서애 과거에 급제한 백곡 김득신 선생님은 엄청난 독서량과 배껴쓰기의 힘으로 당송 8대가에 뒤지지 않는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10살에야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정도로 아둔하였으나 읽고 또 읽고 읽은 책은 또 베껴 써가며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둔재에서 천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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