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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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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0일 21시 24분  조회:4106  추천:0  작성자: 죽림
유명인사들의 명언과 격언 모음 집 – 66


 *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고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 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우주 만물 그 중에서도 가난한 영혼들
에게는. - 박경리 <토지> 제1부 제1권 제1편 '어둠의 발소리' 中 '序章'에서
 
* 가을의 대지에는 열매를 맺어 놓고 쓰러진 잔해(殘骸)가 굴러 있다. 여기저기 얼마든지
굴러 있다. 쓸쓸하고 안스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檢屍)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 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絃)을 건드려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 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
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 준다.
 "저승에나 가서 잘 사는가."
 사람들은 익어 가는 들판의 곡식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판의 익어 가는 곡식은
쓰라린 마음에 못을 박기도 한다. 가난하게 굶주리며 살다 간 사람들 때문에.
 "이만하믄 묵을 긴데..."
 풍요하고 떠들썩하면서도 쓸쓸하고 가슴 아픈 축제, 한산 세모시 같은 한가위가 지나고 나면
산 기슭에서 먼, 먼 지평선까지 텅 비어 버린 들판은 놀을 받고 허무하게 누워 있을 것이다.
마을 뒷산 잡목숲과 오도마니 홀로 솟은 묏등이 누릿누릿 시들 것이다. 이러고저러고 해서
세운 송덕비며 이끼가 낀 열녀비며 또는 장승 옆에 한두 그루씩 서 있는 백일홍나무에는
물기 잃은 바람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겨울의 긴 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 박경리 <토지> 제1부 제1권 제1편 '어둠의 발소리' 中 '序章'에서


*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天才'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戀愛)까지가 유쾌하오.
 
 육신(肉身)이 흐느적흐느적 하도록 피로(疲勞)했을 때만 정신(精神)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蛔)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의례히 백지(白紙)가 준비(準備)되는 법이요.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布石)처럼 늘어놓소. 가증(可憎)할 상식(常識)의 병(病)이요.
 나는 또 女人과 生活을 설계(設計)하오. 연애기법(戀愛技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智性)의 극치(極致)를 흘낏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精神奔逸者) 말이요. 이런 女人의 반(半) - 그것은 온갖 것의 半이요 - 만을 영수(領收)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요.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恰似)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요. 나는 아마 어지간히 人生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쯤 되고 그만 둔 모양이요. 굿 바이.
 
 굿 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飮食)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패러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僞造)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요. 그대의 作品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旣成品)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輕便)하고 고매(高邁)하리다.
 
 19世紀는 될 수 있거든 봉쇄(封鎖)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精神)이란 자칫하면 낭비(浪費)인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佛蘭西)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至言)인 듯싶소. 그러나 人生 혹은 그 모형(模型)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禍)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告하는 것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傷)채기도 멀지 않아 완치(完治)될 줄 믿소. 굿 바이.)
 
 감정(感情)은 어떤 포우즈. (그 포우즈의 원소(元素)만을 지적(指摘)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不動姿勢)에까지 고도화(高度化)할 때 감정은 딱 공급(供給)을 정지(停止)합니다.
 
 나는 내 비범(非凡)한 발육(發育)을 회고(回顧)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眼目)을 규정(規定)하였소.
 여왕봉(女王蜂)과 미망인(未亡人) - 세상의 하고많은 女人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女人의 전부가 그 일상(日常)에 있어서 개개 '未亡人'이라는 내 논리(論理)가 뜻밖에도 女性에 대한 모독(冒瀆)이 되오? 굿 바이.  - 이상 <날개>
 
*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 - 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 - 마음에 들었다. 방안의 기온은 내 몸의 체온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眼力)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는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을 원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에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행복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날그날을 그저 까닭 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딩굴면서 축 처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이 절대적인 내 방은 대문간에서 세어서 똑 - 일곱째 칸이다. 럭키 세븐의 뜻이 없지 않다. 나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훈장처럼 사랑하였다. 이런 이 방이 가운데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그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던 것을 누가 알랴. - 이상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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