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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과의 만남은 우연이였다. 최교수는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다가1997년, 1998년을 안식년으로 보냈다. 이때 팔꿈치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수소문하다가 중국쪽에 한방 치료를 잘하는 곳이 있다는 말에 연변으로 향했다. 당시 최교수를 안내한 한양대 학생 추명은 조선족이였고 최교수는 연변에서 축구계 인사들을 만날수 있었다.
연변대학은 최교수에게 1년 동안 겸임교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성적이 좋지 않았던 연변오동팀의 지휘봉을 잡아달라고 간청했다. 최교수는 연변대학의 요청은 흔쾌히 수락했지만 감독부임을 두고는 고심했다. 1986년 포항제철팀 지휘봉을 놓은후 10년 동안 축구현장을 떠나 있었다. 게다가 연변팀의 성적과 환경은 좋지 않았다. 최교수가 직접 관찰한 연변오동팀의 상태도 실망스러웠다. 담배와 술을 상시적으로 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최교수는 지난 2000년 7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밝혔다. 그는 자신의 조건을 수용하면 지휘봉을 잡겠다고 했다. “팀을 맡기려면 내가 하자는대로 해야 한다. 2부로 떨어지더라도 성적을 두고 시비하지 말라. 선수 기용이나 관리에 대해서도 일절 간섭하지 말라.”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최교수는 1997 시즌을 앞두고 연변오동팀 감독이 된다. 이후 대대적인 개혁을 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담배와 술을 가까이하던 주축 선수들을 모두 내쫓았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선수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러고는 18∼19세의 어린 선수 30명을 모아 기초훈련부터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야단이 났다. 쓸만한 선수들은 다 내보내고 어린애들을 데리고 무슨 프로축구를 하겠다는거냐고.”
연변은 충격에 빠졌다. 아무리 전권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런 급격한 개혁을 할것이라 예상한이는 없었다. 최교수는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였다. 청소년대표 시절에 최교수를 만났던 허정무 한국 프로축구련맹 부총재는 최교수를 이렇게 기억한다. “좋은 분이셨지만 선수들은 굉장히 무서워했다. 성격이 칼 같은 분이였다. 철학이 분명했고 고집도 있었다. 아마 한국 축구인가운데 처음으로 독일류학을 하신것으로 알고있다. 선진적인 훈련방법을 한국에 도입하기도 했다. 무서웠지만 내게는 잘해주셨다. 힘들어 하는 선수들을 보듬어 줄줄 아는 분이였다.”
개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교수는 연변에 프로축구선수라는 개념을 알린 선구자다. 당시 연변오동팀은 경기 출전 여부에 상관없이 20명의 선수에게 경기수당을 똑같이 나눠줬다. 최교수는 경기에 뛰는 선수에게만 수당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하며 경쟁에 불을 당겼고 훈련을 게을리하면 팀에서 내쫓겠다고 엄포를 놨다. 선수들이 꾸물거리면 불호령을 내렸다.
최교수 아래서 연변팀은 조금씩 강해졌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좋지 않았던 연변팀은 수비적인 경기를 해왔는데 경기 양상도 확실히 바뀌였다. 최교수는 많이 뛰는 축구로 상대팀을 압박했고 공을 빼앗으면 많은 인원을 공격진으로 일시에 올려보내는 전술로 재미를 봤다. 한 상대팀 감독은 최교수의 연변팀과 상대하는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연변팀과 경기하면 마치 미친개랑 싸움하는것 같다. 그들은 끊임없이 뛰여다니고 그림자처럼 붙는다. 전혀 당해낼 방법이 없다.”
연변팀은 강해졌다. 젊은 선수들은 경기를 거듭하면서 경험을 쌓았고 어떤 상대를 만나도 주눅들지 않았다. 결국 1997 시즌을 4위로 마무리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열광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최교수를 명예(영예)시민으로 추대했다.
최교수는 소리를 질러 연변을 바꾼게 아니다.
최교수는 선생님의 마음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갔고 선수들은 최교수의 진심을 느꼈다. 최교수는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연변오동팀은 월급을 거부하는 최교수에게 일정액의 생활비를 지급했다. 일반 시민들의 기준으로 보면 큰 돈이였지만 외국감독이 생활하기에는 작은 돈이였다. 최교수는 이 돈마저 거의 선수들에게 소비돈으로 줬다. 한 선수가 지갑을 잃어버리자 자신의 지갑에 있던 돈을 모두 내줬고 외국인선수에게는 국제통화료를 계산하라며 돈을 줬다.
독일 국적의 당시 중국 국가대표팀 슬라프나감독이 “정말 월급을 받지 않느냐?”라고 묻자 최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난 도우러 온것이지 돈을 위해 온게 아니다.” 최교수는 시즌을 치르다가 쓰러진적이 있다. 석가장으로 원정을 떠나다가 공항에서 갑자기 중풍증세를 보인것이다. 최교수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석가장 원정을 떠났다. 결국 석가장에서 선수들의 강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최교수는 경기 당일 다시 그라운드에 나타나 감독석에 앉았다. 선수들은 감동했다. 당시 로장이였던 황경량은 이렇게 말했다.
“최감독의 모든 행동은 모두 우리를 위한것이다. 월급도 받지 않으면서 림시로 도와주러 온 사람이 이러하신데 우리가 무슨 리유로 열심히 뛰지 않을수 있겠는가!”
최교수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지난 1998년 연변은 연변오동팀과 최교수의 발자취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었다.
당시 한 조선족아이는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최은택교수님”이라고 답했다.
최은택교수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축구선수가 되기전에 인간이 되라”는 만인이 공감하는 리념을 중국에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 연변축구팀의 선수들에게 최은택교수는 감독이 아니라 아버지였고 인생의 스승이였다.
연변팀 코치나 선수들 모두 감독님이라고 부른것이 아니라 학장님, 교수님으로 존칭하였다.
연변팀의 이런 가족같은 분위기는 타팀 선수나 다른 지역 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였고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고있다.
중국에 대서특필된 부고
연변과 아쉽게 리별했지만 최교수와 연변의 인연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다. 최교수는 2000년 길림성의 한 출판사에서 <<축구의 예술-나의 축구관>>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후에도 연변과 중국 전역에서 어린 선수들을 발굴하고 교육하는데 도움을 줬다. 여러 도시의 축구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강의했고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연변에 들려 도움을 줬다. 최교수는 2005년 연변체육운동학교에서 강의했고 이것이 마지막 연변 방문이 됐다.
2007년 2월 5일, 최교수가 지병인 페암으로 작고하자 그의 별세에 중국 <<시나닷컴>> 등 주요 언론이 특집기사를 마련해 최교수를 추모했다. 연변뿐만 아니라 중국의 많은 이들이 최교수의 죽음을 안타까와했다.
“최교수님, 천국에 계신 당신을 너무나 뵙고 싶습니다. 영원히 당신같은 진정한 호인(好人)을 잊지 못할것입니다.”...
최교수가 연변팀 지휘봉을 잡았을 때 학생이였던 부모가 현재 박태하감독에 열광하는 자신들의 아이에게 혹시 이렇게 말하지 않을가? “박감독 전에 연변에는 ‘큰별’ 최교수님이 계셨다”고.
조선족의 자존심 세운 사람
지난 2015년 10월 24일, 박태하감독이 이끄는 연변장백산팀은 갑급리그(2부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있었다. 경기장 분위기는 극적이였다. 지난 시즌 꼴찌였던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였다. 조선족축구팀이 우승을 차지한것은 50년만이였다. “연변인민의 영웅 박태하 THANKYOU”라는 문구가 적힌 대형 프랑카드가 본부석 맞은편으로 올라갔다.
“어 저건 누구지? ” 박태하감독과 하태균과 같은 “공신”들을 응원하는 프랑카드가운데 낯선듯 낯익은 프랑카드가 보였다. 고 최은택감독, 아니 최은택교수를 기리는 프랑카드였다. 최교수가 이끈 연변팀은 1997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당시 갑A(1부리그) 4위를 차지했다. 이는 연변팀이 프로리그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다.
“최교수님이 여기 계셨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연변팀 서포터 박미화씨는 박감독에 열광하면서도 최교수를 떠올렸다. 연변이 최교수를 기억하고 기리는것은 성적때문이 아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렬악한 상황에 있었던 연변을 일으켰고 조선족의 자존심을 세운 이가 바로 최교수이다.
/연변일보 본면 글· 기획 리영수 리병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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