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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츄사" 노래 가사가 중국 연변 방천 "장고봉"에서 태여나다...
2017년 02월 09일 19시 41분  조회:3548  추천:0  작성자: 죽림

(멀리 보이는 산이 장고봉(張鼓峰)이다.)

 

솔직히 산은 훈춘(琿春)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산이었다. 누구라도 산의 이름이 하필이면 악기 장고(長鼓)에서 유래했는지 이유가 궁금할 법 했다.

"장고봉사건기념관" 유총지(劉叢志) 관장이 한마디로 우리 일행의 궁금증을 확 풀어주었다.

"예전에는 남쪽 비탈이 가파르다고 해서 '칼산'으로 불렸는데요, 산기슭의 물 웅덩이가 장고 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장고봉이라고 불렀대요. 후에 같은 중국어 발음 베풀 장(张)으로 바뀌어 장고봉(張鼓峰)이 되었지요."

사실상 장고봉은 악기 이름이 아니더라도 유명세를 탈 만 했다. 국경의 산이기 때문이다.

두만강의 하류에는 러시아와 중국, 조선이 서로 이웃처럼 맞닿고 있다. 아래쪽의 조선과 위쪽의 러시아 사이에 중국 땅이 마치 띠 모양으로 끼워 강 출해구까지 이어진다. 바로 이 띠 모양의 지대에 장고봉이 위치하는데,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장고봉 정상을 지나고 있다.

"러시아 민요 '카츄사'가 바로 이곳 장고봉을 배경으로 탄생했다고 해요. 지난 세기 50년대 중국을 뜨겁게 달구고 그후 여러 세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줬던 바로 그 노래 말입니다."

억지라도 이런 억지가 있나, 조선족의 악기 장고에서 러시아의 민요를 뽑아냈다는 격이니 뭔가 잘못되어도 한창은 잘못된 것 같다. 하지만 유총지 관장의 말은 맺고 끊듯 단호했다. "카츄사" 가사 탄생설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1938년, 이곳에서 '장고봉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소련군(소비에트 연방)이 승리를 거두자 소련의 유명한 시인 미하일 이사코프스키가 전투에 참가한 원동 군인들을 칭송하기 위해 '카츄사'를 작사했지요. 훗날 이 가사에 곡을 붙이면서 노래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유총지 관장의 말대로 장고봉사건을 배경으로 했으니 장고봉은 노래 "카츄사"의 탄생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총지 관장은 흥얼거리 듯 노래를 불렀다. 보아하니 "카츄사"는 그에게 "장고봉사건기념관"처럼 익숙한 듯 했다.

"사과꽃 배꽃 아름답게 피고

강위에는 안개 흐르네.

카츄샤는 강기슭에 나왔네

높고 험한 강기슭으로

…"

목가(牧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래였다. 기실 "카츄샤"에는 피로 얼룩진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러시아 민요 "카츄사"가사가 장고봉을 배경으로 탄생했다고 한다./자료사진:유총지 제공)

 

 

장고봉에서 벌어진 소-일 무력충돌

장고봉은 훈춘시(琿春市) 경신진((敬信鎭) 방천촌(防川村)에서 북쪽으로 1.5㎞ 상거한다. "장고봉"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으니 망정이지 상대고도가 150m 정도의 보잘 것 없는 야산이다.

그런데 이 야산에는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이 숨어있었다.

1886년 러시아와 청나라가 체결한 "훈춘협정"의 번역문이 그 발단으로 되었다. 중국문에는 국경선이 두만강 기슭의 하산(哈桑) 호수의 서쪽으로 통과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러시아문에는 국경이 하산 호수의 서쪽, 장고봉의 정상을 지나는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9.18"사변 후, 일본군이 동북지역을 강점하면서 장고봉을 둘러싼 일본군과 소련군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소련과 일본의 국경경비대가 이곳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쌍방은 서로 장고봉 정상부분을 점령하지 않고 무주공산의 형태로 방치했다.

1938년 7월 12일, 소련군이 장고봉 정상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발견되었고, 이틀 후 일본군은 마츠시마(松島) 오장(伍長) 등 3명을 파견해 소련군의 군사시설과 병력배치를 정탐한다. 이때 소련군은 마츠시마 오장을 사살하며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소련 측에 장고봉 일대에서 철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요구는 소련군에 거부를 당한다.

(장고봉사건 중의 소련군/자료사진:유총지 제공)

7월 29일, 일본군이 두 개의 소분대를 출동해 장고봉 이북 2㎞ 떨어진 사초봉(沙草峰)에 진지를 잡았던 소련군 소분대를 격퇴한다. 이틀 후 일본군은 재차 야간습격으로 장고봉과 사초봉을 점령하며 이에 소련군은 보병 32사와 40사, 기계화 제2여단에 소속된 탱크대대로 반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중형 폭격기 TB3을 선후로 200여차 동원하는 등 기계화한 장비로 무장한 부대를 동원했다. 9일, 소련군이 장고봉 부분진지를 점령하며 일본군은 이런 진지를 되찾으려고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장고봉은 고지쟁탈로 선후로 주인을 네 번이나 바뀌는 것이다.

"장고봉사건기념관" 유총지 관장은 지난 10년간 줄곧 장고봉사건에 대한 역사자료를 수집, 정리해왔다. 장고봉전투 상황에 대한 그의 지식은 웬만한 전문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일본군은 한 개 사단의 7000명을 동원하고 소련군은 두개 사단 1만 5000명 정도의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쌍방 사상자가 도합 6000명이었는데 일본군은 1,440명, 소련군은 4,071명에 달했습니다."

결국 8월 10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정전 합의가 이뤄진다.

(장고봉사건 결속후,소련군은 원동군구사령부가 소재한 하바롭스크에서 승리열병식을 거행했다./자료사진:유총지 제공)

 

연변대학 민족역사연구소 소장 김춘선(金春善) 교수는 장고봉사건을 이듬해인 1939년 중국-몽골 변경지역에서 발생한 노문한(諾門罕) 사건과 연관시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문한 사건에서 소련군은 또 한 번 기계화 장비로 무장된 부대를 동원해 일본군을 전승한다.

"(장고봉전투는) 소련과 일본의 자존심의 대결이지만 사전에 군사력을 탐지하는 그런 성격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소 전쟁이 시작된 후 나치 독일이 일본에게 소련을 군사공격을 해달라고 수차 요구합니다. 그런데 왜 공격하지 않았냐? 하나는 중국의 인민전쟁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고 또 하나는 장고봉사건과 노문한사건, 이 두 번의 격전에서 소련홍군의 강대함과 기계화 부대의 전투력을 충분히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김춘선 교수는 장고봉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주의깊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937년 '7.7'사변이 발발한후 일본은 중국 대륙침략을 본격화 했습니다. 1938년 좌우로 보면 주요한 일본군이 이미 중국에 투입돼 무한(武漢)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던 시기입니다. 무한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조선에 있던 일본군 두개 사단인 19사단, 20사단까지 총 동원되었습니다. 일본이 중국 대륙침략을 본격화 했다는 것입니다. "

김춘선교수는 중국 인민전쟁의 정세 역시 일본의 "북진"계획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을 펴고 있었다.

(유총지 관장이 장고봉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고봉 사건은 궁극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진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유총지 관장은 그의 일가견을 이렇게 피력한다.

"가령 '장고봉전투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면 (일본군이) 직접 소련을 진공하고 나치독일과 손잡고 동서 두 갈래로 소련을 진공할 경우 소련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일본이 남쪽으로 태평양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며 원폭으로 세계대전의 결속을 빨리는 일이 없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 있지요."

"장고봉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전투에 참가한 원동 군인들을 찬양한 노래 "카츄사"는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탄생한다.

어찌됐거나 사업가인 유총지가 훈춘 방천을 선택한 원인은 애초에는 "카츄사"와 십만 팔천리나 떨어져 있었다. 적어도 그의 출생지인 길림(吉林)에서 훈춘에 이르는 천리 길 만큼은 떨어져 있었다.

(장고봉 산자락에 자리잡은 "장고봉사건기념관")

 

장고봉 산자락에서 "카츄사"를 찾는 사람

"처음에는 장고봉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어요. 1992년 훈춘 개발과 개방의 붐을 타고 방천에 와서 투자하게 됐어요. 이곳에 음식점이나 여관을 꾸리면 돈을 벌 것 같았습니다."

그때 유총지가 "산장"을 꾸리려고 행장을 푼 자리가 바로 장고봉 산기슭이었다. 이때 유총지는 마을의 노인들로부터 귀가 솔깃한 옛말을 듣는다. 오래전 "큰 코빼기"의 소련군과 "난쟁이" 일본군이 이곳에서 싸운 적이 있으며, 이 전투는 "모택동저작"에도 수록된 큰 사건이라는 것. 날이 지나고 달이 갈수록 장고봉사건에 대한 유총지의 관심은 하나 둘 늘어갔다.

"가끔 산에서 포탄과 탄피 같은 유물이 발견됐지요. 촌민들이 별것 아니라고 여기고 파철로 파는 경우도 많았어요. 어느 해인가는 촌민이 포탄을 잘못 건드려 폭발한 사건도 발생했지요. 가끔 맥주병도 발견됐는데 병에는 '대일본맥주주식회사제조' 등 글자가 있었습니다. 이는 선명한 역사적 견증이지요. 역사증거물이 이렇게 손실되면 재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유총지는 해마다 몇 번씩 일부러 산에 올라가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내막을 알게 된 촌민들이 발견한 유물을 유총지에게 갖다 주었다. 유총지는 또 돈을 주고 촌민들로부터 문물을 사들였다. 2005년에 이르러 유총지가 수집한 문물은 무려 100여점을 넘었다.

2005년 8월 15일, 세계 반파시즘 승리 60주년에 즈음하여 "산장"에는 산장 이름이 아닌 "장고봉사건기념관"이라는 현판이 걸렸고, 유총지는 산장을 운영하던 사업가에서 기념관을 운영하는 관장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현재 "장고봉사건기념관"에는 150여 종의 문물과 문헌자료 20여권이 있다. 부지 400 여 ㎡의 기념관에서는 장고봉전투와 관련된 일본어의 간행물과 화첩, 신문들도 적지 않게 진열되어있다.

(기념관에 진렬된 장고봉사건 관련 문물)

 

지난 10년간 유총지는 기념관에 선후로 인민폐 100여만원을 투자했다. 많은 대출을 받았고 또 친지들의 돈을 빌리다 못해 아내의 금팔찌까지 처분했다. 호주머니가 텅텅 비어 어느 해 설에는 밥상에 고기 한 점 올리지 못했다. 생활비를 한푼이라도 줄이기 위해 주식인 쌀과 밀가루를 가격을 따져 선택했다. 마을버스 표 값이 모자라 버스를 집 부근에 대기시킨 후 집에 뛰어가서 표 값을 치른 경우가 한두 번 아니었다고 한다.

"특별히 신념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기념관을 세웠으니 문을 닫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우리 세대에서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 사람들이 할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총지가 유일하게 위안을 얻는 것은 바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장고봉사건기념관"을 찾아 그 단락의 역사를 알려 하는 것이었다. 설립 초반에는 한 주에 한 명 꼴로 찾아오던 기념관이 현재는 연간 4만 명의 관객이 찾는다. "장고봉사건기념관"은 현재 길림성애국주의교양기지, 길림성국방교육시험기지로 명명되었다.

 

장고봉전투 기념비, 그리고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곳이 바로 장고봉전투에서 전사한 소련 군인들의 유해가 묻힌 곳입니다. 2004년에 사초봉에서 광케이블공사를 하다가 소련군의 유해와 유물이 발견됐습니다. 철갑모 4개와 삽 2자루, 방독마스크 조각과 군인증 등이었지요. 기념관에 진열하다가 2013년 기념관 뒷 뜰에 기념비를 세우고 소련군의 유해를 안치했습니다."

"인류여, 전쟁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기를!"라는 글발이 새겨진 기념비는 그렇게 장고봉 산기슭에 자리잡게 되었다. 더 이상 전쟁으로 인한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것이다.

(소련군의 유해가 안치된 기념비에"인류여,전쟁에서 영원히 멀어지기를!"라는 글발이 새겨 있다.)

 

(유총지 관장이 기념비가 서게 된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장고봉 산기슭에서 발견된 건 소련군의 유해만 아니었다.

2003년 경, 장고봉의 중국측 땅에서 당시 소련군이 폐기한 탱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기계부품은 다 뽑아가고 껍데기만 남았는데, 도합 7대나 되었다.

그때 이 탱크를 소장하지 못한 것은 유총지의 지울 수 없는 유감으로 남아있다.

"촌민들이 파철로 팔았는데 그때 저로서는 도저히 돈을 구해 사들일 수 없었어요. 그대로 파철이 되는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요. 역사 문물이 파철로 영영 사라졌지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옵니다. 개인의 유감뿐만 아니라 역사의 유감이라고 생각해요."

(기념관 부근에 세운 조각상이 이곳에서 일어났던 장고봉사건을 연상시키고 있다.)

 

유감은 그뿐만 아니었다. 장고봉에는 아직 알려지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고 한다. 유총지는 그때 그 당시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과 문물이 점점 줄고 있다고 말하면서 연신 한숨을 쉬었다.

유총지는 전시관의 색이 하얗게 바랜 흑백사진 속의 한 여자아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이름이 황옥정인데요, 장고봉 산기슭에서 쭉 살아왔고, 장고봉사건을 직접 겪었던 사람이지요. 올해 3월 돌아가셨어요. 이제 마을에는 장고봉사건에 대해 기억할만한 어른들이 없습니다."

70여년 세월이 흐른 후 "장고봉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다행히 "장고봉사건기념관"에 일말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중국항일전쟁승리 및 세계반파시즘전쟁 승리 70주년에 즈음하여 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총지 관장은 연신 들이닥치는 인파를 접대하면서 "장고봉사건"의 해설에 입술이 부르틀 지경이라고 한다.

그래도 "장고봉사건"을 관심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어서 늘 기쁜 심정이라고 한다. 와중에 유총지 관장은 하나의 작은 바람이 있다고 속심을 터놓는다.

"큰 꿈은 없습니다만, 가능하다면 기념관 규모를 좀 더 크게 늘렸으면 해요. 민족역사의 교육에 대한 중시를 한층 더 높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30, 40명 되는 17, 18세 학생들 속에 '중-러 북경조약'을 모르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역사교육이 따라가야 한다고 봅니다."

금세 귓가에 노래 "카츄사"가 다시 울릴 듯 했다. 실제로 장고봉에서 탄생한 이 노래는 70년 전의 그 이야기를 재생하는 음악으로 되고 있었다.

(글:중국국제방송국 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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