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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2월 9일 대법원은 염재만의 소설 「반노」에 나오는 남녀 간의 변태적인 성생활 묘사에 대해 정상적인 성적 정서를 해칠 정도로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 볼 수 없다며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소설은 1969년 7월 30일 서울지검에 기소된 지 1년여 만인 1970년 6월 11일 제1심에서 벌금 3만 원의 유죄 선고를 받고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었다. 항소심에서 무죄가 판결된 후에도 원고인 검찰 측은 2차에 걸쳐 불복 상고했으나 그때마다 기각되었고, 결국 1975년 12월 9일 대법원은 최종심에서 역시 무죄를 확정했다.
이 판결의 의의는 문학작품에 대한 음란성 여부는 작품 전체와 관련시켜 판단해야 하며 어느 한 부분만 떼어놓고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남녀 성교를 직접 묘사해 문제가 되었지만 당시 문제가 되었던 표현은 지금 기준으론 소박하기까지 한데, 그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죄를 선고한 원심에 대해 항소심은 「반노」가 "그 주제나 표현에 있어서 선정적인 작품이라고 인정되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원심이 이를 음란 문서라 하여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은 음란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5년 6월 16일 대법원이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에 대해 내린 판결은 20년 전에 비해 오히려 표현의 자유 보장에서 후퇴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1992년 10월 29일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검찰에 의해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전격 구속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한겨레신문』 10월 31일자 사설은 "작가의 창작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상충하는 과제는 물론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시대 상황과 인간의식의 변화에 따라 예술과 외설의 거리를 재는 작업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외설 시비를 불러일으켰던 문학작품이 해금되는 데 수십 년이 걸린 외국의 적지 않은 사례들이 보여주듯, 예술과 외설, 그리고 인간의 미의식에 대한 사법적 재단이란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광수는 1992년 12월 28일 1심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판결 요지는 "이 사건 소설은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져 그 주조를 이루고 있고 ······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병적이고 동물적인 차원에서 통속적으로 형성화되어 있을 뿐 건강하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를 서술함으로써 인간의 성적 욕구의 본질을 제시하거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나 비전을 제시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등이었다.1)
마광수는 1995년 6월 16일 대법원에서도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작가가 주장하는 '성 논의의 해방과 인간의 자아확립'이라는 전체적인 주제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음란한 문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문학작품이라고 하여 무한정의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2) 판결의 법리적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마광수는 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이 나온 지 약 보름 후인 6월 말 연세대학교에서 면직 처분을 받았다. 당시 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과 관련해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최상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8년 3월 13일 대법원은 음란물의 판단 기준을 획기적으로 변경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그간 일관되게 성욕을 자극해 성적인 흥분을 유발하고 성적 수치심을 해치는 것을 음란물 판단으로 기준으로 채택해왔는데, 해당 판결에서 '전적으로 또는 지배적으로'성적인 흥미에만 호소하고 '하등의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을 음란물로 규정한 것이다. 『즐거운 사라』는 '하등의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이었을까? 그 판단을 어떻게 하건 마광수가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나 비전을 제시한 흔적'이나 '사회적 가치'로 간주될 수도 있는 현학적인 요소를 『즐거운 사라』에 넣지 않은 게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2007년 마광수는 홈페이지에 『즐거운 사라』를 올린 혐의로 약식기소 되어 2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92년 마광수를 구속시켰던 검찰이 15년 후에는 약식기소한 점을 놓고 "사회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3)
2015년 9월 마광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즐거운 사라』 발표 후 24년이 지났다. 변화를 느끼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음란 문서 배포 혐의로 검찰에 잡혀갈 때 '이 사건은 10년만 지나도 코미디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틀렸다. 성의 이중성은 더 고착화됐다. 바뀐 것도 있다. 내가 30년 전부터 주장한 화려한 네일아트가 널리 퍼졌고, 아무도 못 알아듣던 페티시(fetish, 특정 물건을 통해 성적 쾌감을 얻는 것)도 흔한 단어가 됐다. 섹시하다는 말이 이젠 칭찬이 됐지않나." 그는 "죽기 전에 대한민국이 솔직해지는 걸 보고 싶다"며 "한국 사회 위선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성 문학을 통한 창조적 불복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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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29일,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이자 작가인 마광수(馬光洙, 1951~2017)는 집에서 검찰 수사관에게 연행되어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은 뒤 영장이 청구되어 그날로 전격 구속된다. 마광수는 형법 244조 음란물 제조 혐의로 기소되어, 1992년 12월 28일의 1심 재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서 풀려난다. 작가가 구속되면서 그의 특정 소설에 구현된 게 외설인지 표현의 자유인지를 둘러싸고 온 나라를 뒤흔들 만큼 전례 없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며, 텔레비전 · 라디오와 주요 일간지 · 주간지 · 월간지 등 거의 모든 매체가 앞다투어 그 일을 집중 취재해 보도한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음란한 싸움”이라는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의 개요다.
“경건과 금욕으로 강제된 한국 문학사에서 희귀하고 소중한 예”에 해당하는 마광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대광중학교와 대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연세대 · 한양대 · 강원대 등의 강사를 거친 그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홍익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한다. 그는 1984년부터 모교인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임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7년 『현대문학』에 「배꼽에」 · 「망나니의 노래」 등의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온 마광수는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 소설 『권태』를 연재하며 소설가를 겸업하게 된다. 이제까지 그는 시집 『광마집』(1980) · 『귀골』(1985) · 『가자, 장미여관으로』(1989), 장편 소설 『권태』(1990) · 『광마 일기』(1990) · 『즐거운 사라』(1992) · 『자궁 속으로』(1998) · 『신기한 알라딘의 램프』(2000), 문학 이론서 『상징 시학』(1985) · 『마광수 문학론집』(1987) 등을 펴낸 바 있다.
『즐거운 사라』는 상상과 허구를 전제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리얼리즘 문체를 활용해 사회의 조감도를 그려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라’라는 여성이 만들어진 것은 이런 인물이 우리 사회에 적든 많든 실존할 수 있는 개연성이 큰 인물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사라』에서 작가는 한 젊은 여성이 전환기의 성윤리에 혼돈을 느끼며 여러 남자를 거치는 동안 겪는 내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 묘사의 결은 직정적이고 도발적이며, 그래서 “경건과 금욕으로 강제된 한국 문학사에서 희귀하고 소중한 예”라는 평가를 받는다.
마광수는 『즐거운 사라』를 내기 전에 이미 『권태』와 『광마 일기』 같은 소설을 펴낸 적이 있다. 이 두 소설은 모두 관능적 상상력의 해방을 그리고 있다. 다만 『권태』가 현대를 배경으로 육체를 성적 매재로 삼아 페티시즘과 마조히즘―사디즘을 그려내고 있다면, 『광마 일기』는 신괴(神怪) · 염정(艶情) · 우언(寓言) · 호협(豪俠)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기 소설(傳奇小說)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들은 작가가 말하는 ‘가벼움’의 소설 미학을 성취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마광수는 심심찮게 매체를 타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학 교수이자 작가다. 그런데 소설 한 편 때문에 그는 구속되고, 이 일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검찰에서 작성한 공소장을 보면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마광수 교수에 대해 제재한 내용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다. 공소장은 “피고인 마광수”의 신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1989년 문화공보부에 등록된 임의 단체이던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의 조직을 재편해 발족시킨 사단 법인체다. 간행물들에 대해 심의 · 검열 등을 하는 이 위원회는 자율 단체라고 저희 스스로 주장하지만 한국방송광고공사로부터 막대한 예산을 배정받고 위원의 선임이나 그 비용 일체를 정부에서 관장하는 등 사실상 정부의 산하 기구다. 1992년 당시 이 ‘윤리위’에 소속된 심의 위원은 24명이었는데, 대학 교수 16명, 일간지 논설 위원 2명, 변호사 1명, 고등 학교 교장 1명, 출판문화협회와 잡지협회 이사 각 1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사저널』 1992년 11월 12일치에 따르면 윤리위 소속 16명의 교수는 강성위 · 김대환 · 김형배 · 이용필 · 장원종 · 한승조 · 나학진 · 윤병로 · 이태동 · 이현희 · 손봉호 · 김재은 · 서정우 · 이원복 등이다. 그 밖의 심의 위원들은 이중한 · 김형덕 · 백현구 · 유경환 · 정희경 · 황수원 · 허광수 · 이택규 등이다. 어쨌든 1980년대에는 주로 진보적 사회 과학 서적들에 대해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리는 데 주력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념 서적들이 줄어들자 이른바 ‘음란물’의 단속 쪽으로 방향을 튼 간행물윤리위원회의 반문화적 전횡의 실체가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다.
『즐거운 사라』는 1992년 8월 20일께 서점에 배포된다. ‘서울문화사’에서 내놓았을 때 ‘검열’을 의식해 누락시킨 부분들을 다시 보완하고 개작해서 ‘완성도’를 높인 상태로 소설이 출간된 것이다. 『즐거운 사라』 출간에 즈음해 몇몇 신문에 관련 기사가 나가자 윤리위에서 발끈하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대중 매체들은 표현의 자유와 한계, 그리고 이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은 정당한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를 다룬다. 격주간지 『출판저널』이 특집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시사 주간지 『시사저널』도 지면을 크게 할당한다. 『한국일보』에서는 「성 표현의 한계에 대한 문단의 뜨거운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윤리위 소속의 서강대 영문과 교수인 이태동과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청하의 대표이자 문학 평론가인 장석주에게 똑같이 할애된 지면을 주고 글을 쓰게 한다. 이어 KBS 1 텔레비전의 「여의도 법정」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생방송으로 이 문제를 다룬다.
위의 글은 『즐거운 사라』에 대한 제재 건의 결정에 항의해 장석주가 1992년 9월 30일치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이처럼 『즐거운 사라』를 두고 문학인가 외설인가 하는 논란이 문단과 대중 매체에서 한동안 이어지는데 느닷없이 검찰이 개입하고 나선다. 1992년 10월 28일치 거의 모든 중앙 일간지에는 「‘문학’ 포장된 음란물 법적 제재」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린다. 기사들은 “검찰이 소설 『즐거운 사라』가 미풍 양속을 해치는 음란 도서라고 결론짓고 수사에 나섰다.”고 밝힌다. 아울러 검찰은 “이 작품을 변태성 행위, 여성간의 동성애 행위, 교수와 제자간의 성 행위 등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묘사, 우리 사회에서 용납되는 ‘성애 행각’의 수준을 넘어 문학이 아니라 음란물”이라고 단정짓고 있다고 보도한다.
검찰은 특히 “사회 윤리를 정면으로 파괴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행동을 다룬 이 같은 사실상의 포르노물을 ‘마광수 신드롬’이란 유행어 속에 그냥 방치해 두는 것은 일부 매스컴의 선정주의에 영합하는 것으로 사회 전반에 해악을 미칠 소지가 크다.”고 강조하고, 『즐거운 사라』에 대한 ‘법적 제재’의 움직임을 기정 사실화한다. 한 신문은 검찰이 법적 제재에까지 나서게 된 배경과 관련해 “최근 들어 주간지 소설 스포츠신문의 일부 내용이 음란 퇴폐적이어서 이처럼 ‘법적’ 음란 개념을 축소할 경우 사회 윤리의 마지노선을 포기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고 보고 이의 척결에 나섰다고 밝히고 있다. 검찰은 특히 마 교수라는 공인의 신분으로 사회 도덕적 책임까지 망각함으로써 다음 세대의 교육 및 관리에도 심각한 어려움을 낳고 있기 때문에 사법적으로 단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쓰고 있다.
『국민일보』가 검찰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피상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면, 피상적 사실을 벗어버리고 좀더 깊이 있게 ‘기자의 주관’이 들어간 기사를 내보낸 신문은 『문화일보』다. 엄주엽 기자는 1992년 10월 28일치 『문화일보』에 실린 관련 기사의 말미에서 ‘사라’를 자기애에 충실한 하나의 발랄한 개성이며, 그것의 직접적인 노출은 ‘충격’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숨겨진 현실’이라고 쓰고 있다.
곧 검찰청사 앞에서 문화인들이 작가 구속에 항의하는 침묵 시위를 벌이고, 문단에서는 ‘문학 작품 표현의 자유 침해와 출판 탄압 대책위원회’가 조직되는가 하면, 김주영 · 김병익 · 문덕수 · 반경환 등 217명의 문인이 서명한 ‘마광수 교수의 석방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서’가 발표된다. 한편 신문과 주간지 · 월간지 등에 마광수 구속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글들이 실리는데, 하일지 · 장정일 · 최일남 · 임헌영 · 김병익 · 반경환 · 박범신 · 강준만 등 50여 명이 나서고, 독자 투고까지 합치면 100편이 넘는 글들이 실린다. 1992년 11월 5일에는 흥사단 강당에서 ‘외설 시비에 대한 공청회’가 열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침해하는 검찰과 정부의 문화 정책을 규탄한다. 이 공청회에서는 김수경 · 문형렬 · 한승헌 · 하재봉 등이 나서 주제 발표를 한다. 이런 와중에 구속 적부심 재판이 열린다.
결국 1992년 12월 28일, 『즐거운 사라』의 출판과 관련해 마광수는 서울지방법원(판사 석호철)으로부터 ‘음란 문서 제조와 판매’ 혐의로 징역 8월의 유죄 선고를 받고 집행 유예로 풀려난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지 61일 만이었다. 한 편의 소설이 ‘음란 문서’로 위조되고, 수십 년 동안 사문화되어 있던 법을 적용해, 작가와 출판인의 전격적인 구속 수감에 이어 ‘유죄 선고’까지 내린 ‘즐거운 사라 재판’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 판결문은 음란서의 여부는 “건전한 사회 통념에 따른 지배적인 성 문화관”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된다고 말한다. 아울러 ‘음란’의 개념을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 통념에 비추어서 그것이 공연히 성욕을 흥분 또는 자극시키고 또한 보통인의 성적 수치심을 해하는 것이어서 건전한 성 풍속이나 선량한 성적 도의 관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판사가 자인하고 있듯이, 이것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추상적인 대로 이를 정리해보면, 서울형사지방법원이 말하는 ‘음란’의 범위는 첫째, 성욕을 흥분 또는 자극시키는 것, 둘째, “보통인의 성적 수치심”을 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흥분되어서도 안 되고, 자극되어서도 안 되는, 오, 그토록 불길한 성욕! 그러나 살아 있는 건강한 사람의 성욕이란 활동하는 에너지이고, 그것은 우리 시대의 개방적인 문화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거의 매순간 성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개방적인 문화’들과 접촉하며 살아간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마구 퍼부어지는 온갖 광고, 심지어 뉴스 화면, 비디오, 영화 같은 여러 영상 매체, 신문, 잡지, 책, 지하철 전동차에 부착된 광고······. 특히 생산된 재화의 잠재 소비를 창출하기 위한 소비 사회에서 많은 광고가 ‘육감적인 육체의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사람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것을 매개로 상품에 기호와 환영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육체를 감추고 옥죄던 유교 문화적 윤리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살지 않는다. 오늘의 육체들은 권력과 제도의 담론에 짓눌려 은폐되거나 하지 않는다. 육체들은 감추기보다 과감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과시한다. 우리의 “성욕을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이 모든 개방적인 문화의 주체들을 그 추상적인 ‘음란’의 법 개념을 적용해 다 구속할 수 있는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즐거운 사라』 재판’에 적용된 법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사문화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적으로 흥분되는 것, 자극되는 것은 죄악이 아니며, 살아 있는 인간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명 충동의 활동이다.
덧붙여서, 판결문은 문학 작품의 음란성 여부는 “어느 일부분만을 따로 떼어 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작품의 전체 내용과 관련해 판단해야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학 작품이 부분과 전체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련 속에서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예술 양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한 편의 소설 중에서 어느 특정 부분을 따로 떼어 문제로 삼으면 논리적인 과장과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법원의 판결문도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점을 명시해놓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검사와 판사는 기소장과 판결문 뒤에 “『즐거운 사라』 중 성 행위 등 성 관계를 노골적이며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라고 『즐거운 사라』의 여기저기서 따온 대목들을 열한 쪽에 걸쳐 적시해 별지로 붙이는 모순을 저지른다. 그들은 성 행위 등이 “노골적이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부분들만을 적시해 드러냄으로써, 문학 작품의 음란성 여부는 “어느 일부분만을 따로 떼어 논할 수 없다.”는 저희의 논리를 스스로 거스른다.
『즐거운 사라』는 작가를 구속해 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릴 만큼 위험한 소설일까? 문학의 역사를 조금만 돌아보아도 그것이 탈억압을 위한 끝없는 싸움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르키 드 사드는 감옥에서 죽었고, 보들레르는 저 유명한 『악의 꽃』에 씌워진 ‘풍기 문란’ 혐의 때문에 법정에 서야 했고, 『보봐리 부인』의 플로베르가 그랬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D. H. 로렌스가 그랬고, 『북회귀선』의 헨리 밀러가 그랬고, 『벌거벗은 점심』의 윌리엄 버로즈가 그랬다.
『즐거운 사라』는 성 해방을 꿈꾸는 작가 자신의 성에 관한 사상과 논리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적 실천의 행위’다. 따라서 『즐거운 사라』에 성적 담론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성애 소설’은 성을 여느 통속 소설들과 달리 결코 달콤하거나 호색적으로 그려내고 있지 않다. 이 소설의 문체는 직설적이고, 거칠고, 생략적이고, 건조하다. 이는 『즐거운 사라』가 노골적인 성애를 다루고 있는 어떤 통속 소설들과 달리 독자들의 호색적인 쾌락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씌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마이클 퍼킨스는 현대의 성애 소설이 세 가지 근거, 즉 공격적인 측면, 매혹적인 측면, 철학적인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에로티시즘 저작의 공격적인 형태에서는, 에로티시즘을 통해 무정부적인 충동을 자아내는 극단적인 표현을 포함한다. 그것의 공격적이고 잔인한 이미지들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억압되어 있는 성적 감정의 파괴적 측면을 자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매혹적인 형태에서는 성적 공감의 정서를 끌어내서 독자의 성적 본성을 비춰주며, 철학적인 형태에서는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탐색하고, 특히 에로티시즘을 통해 죽음의 의미나 자아의 초월을 깨닫게 해주는 의식적 · 무의식적 충동을 고찰한다는 것이다.1)
『즐거운 사라』 파문이 일어났을 때 보수적 기득권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들은, 성애 소설이 무정부적 충동을 자아내는 공격적인 측면이 있다는 마이클 퍼킨스의 지적을 생각나게 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보수적 기득권층은 저희의 그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흔히 ‘현상 유지’를 원한다. 그들은 결코 저희의 삶의 토대인 현실이 ‘무정부적’ 상태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즐거운 사라』 같은 성애 소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지니고 있는 성적 본성을 통찰하게 할 뿐 아니라, 기존의 도덕 체계를 뒤흔들고 더 나아가 급진적인 현실 변화를 초래할 만큼 위험한 ‘뇌관’을 가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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